- 포지션 2024년 겨울호(제48호)
두리번거리는 시 ― 안희연, 『당근밭 걷기』(문학동네, 2024)
시인의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의 「소인국에서의 여름」에는 그가 누구든 그 영혼의 모판으로 회귀하게 하는 하나의 기차가 등장한다. 그 기차를 불러오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저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나 그 방법이 간단하다고 해서 누구나 기차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상함을 경계하는 누군가에게 눈을 감고 뜨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지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세계에 닿기 위해 지불해야 할 티켓료는 어쩌면 지독한 헛헛함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기차에 올라타 세계의 실금난 곳에 가만 초점을 고정하고 눈을 감고 있기만 하면, 우리는 어느새 ‘여름 언덕’과 작은 숲 ‘알혼’을 경유하여 ‘당근밭’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문진처럼 무상해진 “나의 주황 마음”을 어쩌지 못할 때마다 당근을 써는 행위로 자기 자신에게 단단한 안녕을 건네본다던 시인의 말1)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당근의 단맛을 내는 흙밭을 거니는 일은 그 행위자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흙처럼 “비밀을 감추기에 적당한 재료”(「율마」)를 호미 같은 눈동자로 헤집으며 그들이 찾는 것은 정말 당근뿐일까.
‘당신’의 ‘근’원
『당근밭 걷기』의 시편 다수에는 존재의 이름과 그 연원을 살피는 작업이 지난 시집보다 심화된 형태로 발견된다. 시인은 존재의 최초 기획 단계를 비집고 들어가 몹시 근원적인 차원의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설계 단계부터 고안돼있던 ‘효험’의 문법이 대상을 종속하는 ‘명령’의 형태로 변질되어가는 광경 또한 다수 포착한다.
가령 「율마」 속 시적 주체가 “아주 작은 씨앗이었을 때”부터 들어야했던 말, 그러니까 “너는 추위에 강하게 설계되었단다/찌르거라 다만 찌르거라”같은 명령이나, 「터트리기」 속 “오직 던질 것”, “오직 견딜 것”을 정언명령으로 삼는 세계가 그러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불에 탄 듯 새카매”진 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여름이 부패시켜갈 것들을 무력한 표정으로 지켜만 볼 뿐이다. 시인은 그 주위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맴돌며 묻는다. “열쇠 이전의 열쇠들은/자신이 태어나는 순간 열거나 잠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여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잠그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각인」)
그러나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다시 「율마」를 읽어보면, 자신을 집으로 데려온 ‘그’의 흙 안에서 착실히 발아해 어느새 ‘그’의 “악몽을 터트리”는데 자기 ‘찌름’을 쓰고 있는 ‘율마’를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안희연의 ‘고유 찾기’ 작업이 생명 저마다 종속된 굴레와 한계를 규명하는 작업으로만 귀결되어선 곤란하다는 뜻이다. 그 작업의 진의를 설명하려면 존재의 더 큰 차원을 향해 시인이 확장해 둔 믿음을 읽어내야 한다. “생밤의 시간”(「밤 가위」), “돌의 의지”(「발광체」), “씨앗의 일”(「나의 시드볼트」) 앞에서 겸허해지는 화자들의 자세 역시 같은 ‘믿음의’ 맥락 안에서 읽혀야 한다.
또한 “놓여 있는 모양 그대로/바라보기/조각내지 않기”(「청귤」)를 누누이 강조하며 대상과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벌리는 자세, 그리고 자기 소유격에의 배치를 지양하려는 언어의 결은 ‘그냥 그들이 존재하는 대로 놔두라’는 일관된 애정을 기반한다. “늦여름에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의 꽃” 백일홍을 볼 때, 그 이름의 기원이 백일만 피는 습성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지구 밖에서 개화한 최초의 꽃이기 때문인지부터 따지고 들어가는 꼿꼿함(「밀물」)도 같은 자장 안에서 읽어보면 어떨까. “모든 돌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밤의 석조전」)는 화자의 믿음은 그 돌의 존재감 일부를 담당할 만큼이나 묵직하고 견고하지 않은가. 그 때 “코알라에게는 코알라의 잔이 있고 (...) 나에게는 나에게 어울리는 잔이 있다는 것”이 “운명의 한계로 오인되지 않았으면 좋겠다”2)는 시인의 고백이 비로소 선연해진다.
다시 표제작으로 돌아가본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엇이든 있게 되는 너른 밭을 가진 화자는 그곳에서 무엇이든 재배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작물이 진정 ‘당근’인지 아닌지를 잠시간 의심한다. 밭의 소출(당근)은 결과적으로 풍성했을진 몰라도, 화자의 “짧은 이야기”는 텅 빈 밭과 함께 다소 허무하게 끝나버린 모양새다. 대신 그 자리에 화자가 들인 것은 자기 대신 흙을 파고들어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를 찾아낼 “두더지의 눈”이다. 즉 의지할 거라곤 ‘달빛’ 뿐인 어둔 밤, 그 비밀 가득한 밭 아래 화자가 진짜 심고자 하는 ‘긴 이야기’를 헤아릴 수 있는 대체안(代替案)이자 대체-안(代替-眼)이 곧 두더지인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다음 질문이 뒤따라온다. 그러니까 두더지, “당신은 누구죠?/이야기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북치는 소년」).
시간, 그 비밀의 밭
기왕에 이야기의 ‘끝’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잠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경유해보면 어떨까?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간은 대체로 “핀셋을 들고/흰머리를 제거하려는 집요한 손”(「점등 구간」), 그리고 자꾸만 끝을 재촉하는 “불붙인 손”(「간섭」)의 모양으로 소묘된다. 그 손은 우리의 손으로는 통제할 수 없이 제멋대로(「호재」)라서 “우리를 뾰족하게 깎아나 가려는”(「파동과 경로」) 자세로 맹렬히 돌진해오고, 세계에 “아직 깎을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본격적인 자세(「관제탑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고」)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간다.
그러나 이 세계에선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더 아름다워질 무언가를 믿는 자세도 그 시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 초연함은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더 눅진해질 생명의 맛을(「반건조 살구」) 아는 일에서 비롯한다. 물론 “시간의 효험으로도 소용없는 날들”(「소등 구간」)도 있지만, 안희연의 시적 주체들에겐 높은 확률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날들일 것이다. 오로지 “모든 시간이 다 자국이라는 사실”(「토끼굴」)만이 그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빗방울의 언어가 얼룩으로만 쓰이듯” “흰 종이가 흰 종이인 채로 남아있더라도/말해진 것이 있다”는 「갈망」 섞인 믿음을 기반한다. 모든 “절단면은 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물색」) 역시 이 시집 도처에 그슬린 ‘존재들의 스키드마크’를 부연하기에 충분하다. 요컨대 안희연이 ‘시간’과 그것의 ‘스쳐감’을 얘기할 때 방점을 찍는 곳은 스쳐간 시간이 아닌, 스칠 만큼 ‘있었던’ 시간 아닐까. 그러니까, 그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 말이다.
그러니 목을 쭉 빼고 시간의 밭을, 그 원리에 숨겨진 비밀을 두리번거리는 화자의 모습 역시 미련의 방증이라기보다 “떠난 자리로 반드시 한 번은 되돌아오는 이가 있다”는 믿음의 예증으로 읽혀야 한다. 이 두리번은 누군가가 되돌아오기 전 자신이 시작해야 할 “긴 이야기”가 흙에 묻혀있음을 확신하는 자 특유의 단호함이다. 마치 주인과 종의 달란트 비유처럼, 묻힌 달란트를 땅 아래 보존하는데 자족하고 마는 ‘곧은 게으름’은 안희연의 화자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파쇄된 시간과 파기된 약속의 잔해를 어떻게든 그러모으려는 자의 성실만 있을 뿐이다. “어둠의 조도를 맞추는 방법”을 알아 “믿음이 두 눈을 가릴 때에도 묵묵히 그 일을”하는 자(「코트룸」)들에게 세상은 분주함의 필연이다.
그러니 이 당근 밭이라는 토양의 비료는 결국 어떤 어렴풋한 관념, 그러니까 “단춧구멍만한 믿음”(「미결」)임을 우리가 눈치챘다면, 두더지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도 이렇게 답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묻혀있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존재들. ‘기억’이라는 긴 이야기와 ‘시간’의 비밀이 생성해놓은 작물의 심연을 지상으로 건져 올리려는 존재들. 그 작업이 가당한지 화자(시인)조차 스스로 의심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 이야기를 대신 캐낼 존재들.
눌어붙고, 납작하며, 가는 잎, 당신
「정거장에서의 대화」 속 한 화자는 “얼굴을 갖는 것”이 곧 ‘파괴’라 말한다. 또 “거울 속에는 더는 꺼낼 얼굴이 없다”(「동률」)는 누군가의 진술은 안희연의 세계가 자기 형상을 거울 속에 정확히 비추어보는 ‘반사’의 문법보다, “물속에서 흔들리는 나무와 물 밖에서 흔들리는 나무”의 포개어지는(「물결의 시작」) ‘조정’의 문법을 따름을 보여준다.
“직접 본 것만 첫눈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사람과 직접/접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첫눈의 다녀감을 인정하라는 사람”(「부록씨 삶으로 데려오기」)의 세상 사이에는 좁히기 어려울만큼 먼 간극이 있을 것이다. 마치 “숲을 거닐 때 숲이 되는 사람”과 “숲을 잊는 사람”(「정거장에서의 대화」)이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서로에 대한 불가해성뿐이듯 말이다. 그러나 이 시 세계는 “나의 가장 무른 부분”이 되는 너, “너의 가장 탁한 부분”이 되는 나를 “억지로 꿰매지 않고/다만 갈 뿐”(「점등 구간」)이다.
그러니 「물결의 시작」 속 “어떻게 살거냐”는 먼 미래에 대한 물음보다 “어떻게 살아 있을 거냐”는 지금의 물음에 집중하며, 단 하루치 “나의 범람”과 “나의 복잡함을 끌어안는” 화자의 분투는 마냥 ‘고독자-개인의’ 싸움이 아니다. “철가루 눈처럼 흩날리는 날/서로의 목격자 되어”주며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결국 “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긍휼의 뜻」)임을 그가 알기 때문이다. 안희연의 화자들은 자기 안에 포개어진 누군가와 대화하고 끊임없이 조율하며 걸어갈 때 비로소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야광운」). 그렇게 “내가 나를 일으켜 걸어가는” 방식으로 ‘그들’은 나아간다. 요컨대 이제 더는 “숨지 않는다”(「파랑」). 그들에게 더는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해진 까닭이다(「굉장한 삶」).
이제 다시 서두의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이 당근 밭 속 화자와 두더지가 함께 찾아나갈 이야기란 “절대로, 도무지, 결단코, 기어이, 마침내, 결국………”과 같은 강력한 확신의 언어를 다독여 재우고, 그 자리에 대신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와 같은 희미한 부사를 덧대며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다. 단어와 단어가 저마다의 갈래로 뻗어가며 상이한 궤적을 그리려 할 때, 그것들의 “겨움”(「야광운」)을 그 해석의 키로 구성하여 접착시켜 주려는 사람의 언어. 그렇게 계속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람의 명랑한 분주함이 건져내는 ‘너’의 이야기 말이다.
이 무한대 비밀의 밭을 경유하여 이제 안희연의 ‘기차’는 어디로 갈까. “생의 마지막 1초에” 놓인 사람의 몸을 관통하러 가려나. 그래서 그 “한 사람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를(「북극진동」) 훑으러 가려나.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굵고 억센 이파리보단 늘 ‘가는’ 잎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산책자 당신께, 이 시를 되돌려드릴 수밖에.
(......)
당신은 자주 멈춰 서는 사람이군요. 당신은 나에게서 안개 숲을 보고 있네요. 강물 위를 떠가야 할 쪽배가 왜 거기 멈춰 있나요. 그 위로는 무성하게 잡풀이 자랐고요. 당신은 그 풍경을 좌초라 부르는군요. 정박은 불가능한 단어라 여기는군요. 시간은 벌을 내리는 존재인가요.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장면이 마음에 듭니다
길가에 쪼그려앉아
눌어붙은 초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당신이
너는 납작해도 알록달록하구나.
언제나 말을 할 줄 모르는 것들에만 말을 거는 당신이
(......)
- 「가는 잎 향유」 부분
- 1) 안희연, 『단어의 집』, 한겨레출판, 2022년, 44쪽.
- 2) 위의 책,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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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한 권의 시집을 열어 하나의 세계로 진입한다. 시인이 세심하게 배열해 놓은 시의 지도를 따라 걷다 보면, 세계와 교호하는 내면 풍경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오은경의 세 번째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는 어떨까. 그 길의 초입에 그녀는 끈을 손에 쥐여 준다. 오은경은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에서 타자―외부와의 접점에서 개인이 느끼는 모호한 윤곽을 가늠해 왔고, 두 번째 시집 『산책 소설』에서는 산책자의 시선으로 다층적인 삶의 이야기를 포착하는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시집에서는 끈으로 상징되는 관계의 시작과 변용, 그 이후의 상태를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처럼 조망하고 밀착하여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나와 너 혹은 나와 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거리, 변해버린 감정의 결이 포착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서시 「공중제비」와 바로 그 뒤를 잇는 「끈」, 시집의 마지막에 위치한 「두 눈으로」를 경유하여 살펴보려 한다. 이건 미래이고, 손에 잡힌 건 정체불명의 노끈이다. 미래가 노끈의 형태라면 미래란 얼마나 작고 가벼운가? 아니, 미래란 왜 이렇게 헐거워져버렸을까? 작은…… 미래, 꿈꾸던 내 모습이 아니었어. 나는 나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미래에는 당연히 나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는데, 어디에도 나는 없었네. 그렇다면 지금이 미래가 아니라는 소린가? 잠깐 의심했지만, 노끈이 되어버린 미래는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노끈을 사용한 적 없었고 무언가를 묶거나 무언가에 묶인 적 없었다. 노끈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노끈은 바람에 흔들렸지만, 떠내려가지 않았다. 땅에 단단히 박힌 상태였다. * 아무도 끈을 사용하지 않았다 ― 「공중제비」 전문 「공중제비」의 미래는 시간의 저편에 아득하게 존재하는 가능성의 영토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고 없이 도착한 현실이자, 감각할 수 있는 사물로 손안에 놓여 있다. 이 시의 미래가 당혹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정체불명의 노끈”이기 때문이다. 원대한 포부나 반짝이는 약속 같은 기대를 배반한 미래는 값싸고 흔한, 아무렇게나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질감을 가질 따름이다. 미래를 손에 쥐고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정녕 그것이 미래가 맞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섦과 마주하는 것은 ‘나’에게나 독자에게나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갑자기 공중제비를 넘는 것처럼. 공중제비는 화려한 도약이자 제자리를 맴도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순간적으로 세계를 거꾸로 볼 수 있지만, 이내 이전과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착지하는 운동. 괄호 안에 담긴 ‘나’의 독백은 어지러운 회전을 중계한다. 과거의 예상(“나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는데”)과 현재의 발견(“어디에도 나는 없었네”) 사이에서 “그렇다면 지금이 미래가 아니라는 소린가?”라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짧은 의심을 품는 일. 이는 공중제비의 정점―세계가 거꾸로 휙 지나쳐 보이는 면면과 유사하다. 그러나 역전은 길지 않다. 손으로 만져지는 노끈을 체감하면서 이내 현실로 착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지각이 뒤흔들린 ‘나’는 도무지 노끈으로 구현된 눈앞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노끈은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릴 만큼 가볍지만 질기게 현존한다. “땅에 단단히 박힌 상태”라는 시구를 보라. 동시에 “아무도 노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를 겸하여, 노끈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겨진다. 그렇게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노)끈은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끈을 잡아당겼다. 흙먼지가 일었다. 황사였다. 풀 몇 포기 마른땅에 나 있었다. 풀이 아니라 허물 같았다. 동물 사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냄새도 없었고 날개 달린 것들, 파리나 독수리, 참새 떼도 나타나지 않았다. 예견된 일이었거나 전에 한 번은 겪어본 일 같았다. 지금, 내 손은 핏기 없이 창백한데 이렇게까지 당길 이유가 없었다.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여기가 아닌지도 몰랐다.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통행금지 구역에 내가 와 있으며……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다. 수풀 우거진 배경은 기억에 없었다. 여름, 풀독이 오를까 봐 걱정되었는데 백구들이 논밭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지가 먼저 강아지들 쪽으로 향했다. 철책도 없는 논밭, 지난 계절의 벼와 새 떼, 메추리를 날려 보낸 다음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백구와 토끼를 구분하지 못했다. 수풀 사이사이 토끼가 숨어 있다는 것도. 전부 수지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 있었다. 내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바깥은 위험하며 나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고 했다. 기다리라고 말했던가? 하지만 시간을 일러주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는지, 아니면 내가 찾으러 가면 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수지는 어디를 간다고 했지? 어디에 있지? 내게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 손바닥에는 실금 같은 주름이 얽혀 있었다. 손은 소금빵 같았다. 먼지와 피가 달라붙어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끈을 당겨야 했다. 끈을 당길 나머지 손이 필요했다. 팔은 바게트 같았다. 끈을 힘주어 당길 필요는 없었다. 잡고 있기만 하면, 놓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 나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 끈은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 「끈」 전문 이 시의 끈은 ‘수지’와 연결된 기억의 매개체다. 「공중제비」에서의 시제가 사적 서사로 전환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헐거웠던 노끈은 더 질긴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러한 끈을 잡아당겨 마주하는 것은 숨 막히는 “흙먼지”와 “황사”뿐이다. “허물” 같은 풀이 돋아난 건조한 땅. 사체를 처리할 “파리나 독수리, 참새 떼도” 보이지 않는 황량함은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을 암시한다. 생명의 역동성뿐만 아니라 죽음의 자연스러운 과정마저 정지된 상태는 한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기억의 복잡한 층위를 드러낸다. 그 중심에 수지가 있다. 수지는 “내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통제라기보다 불안에서 비롯된 과잉보호에 가깝다. “바깥은 위험하며 나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던 수지는 위험이 제거된 안전한 장소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제 수지는 찾을 수 없다. 이 시의 후반부는 세계에 내던져진 ‘나’의 신체가 어떻게 감각되는지 기록한다. “먼지와 피가 달라붙어 있었”던 손과 팔은 “소금빵”과 “바게트”로 비유된다. 무력함 속에서 ‘나’는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나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라는 고백에 있다. 이전까지 ‘나’는 수지가 만든 규칙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되었으나, 규칙의 제정자가 수지에서 ‘나’로 바뀐 까닭이다. “잡고 있기만 하면, 놓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최소한의 머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이 미래를 방기하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라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 손으로는 미래를 단단히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과거와 이어진 현재를 어루만지면서 ‘나’의 시선은 천천히 바깥을 향한다. 무엇을 “두 눈으로” 응시하는 것일까. 유리의 조각난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빛이 전부였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느라 세상을 분간할 수 없었어. 세상에는 너도 있다, 통유리로 된 복도 바깥에 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너를 발견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바로 이곳이 처음이기 때문 아닐까? 다른 말로는 길 잃음. 헤맴, 너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었을 때 진짜 즐거웠는데. 안심되었으니까. 그때는 세상이 미로 같았고, 너와 나는 퍼즐 조각 같았지. 한 번도 바깥에 나가본 적 없는 것처럼. 자꾸만 날씨를 상상하고 싶어져. 그리고 깨닫고 만다. 떠난 것은 네 쪽이라는 것을. 적어도, 너와 둘일 때는 멈춰 있었던 적이 없고 내가 복도에 누워 잠들었던 적도 없지. 빛이 이렇게나 밝고 아름다운데 굴절되는 만큼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 ― 「두 눈으로」 전문 ‘나’는 “통유리로 된 복도” 안에 있고, 그 너머에 “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내가 나갈 수 없”기에 “너를 발견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다. 볼 수는 있으나 가닿을 수 없는 유리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 시는 ‘나’와 “너”를 포함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양자의 변모 양상을 되짚는다. 세상이 방향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았”을 때,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퍼즐 조각 같았”기에 길을 잃지 않았다. 길을 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헤맴, 너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었을 때 진짜 즐거웠는데. 안심되었으니까.” 그런데 “너”를 떠나보낸 뒤 ‘나’는 진짜로 길을 잃는다. 미로를 즐겁게 탐험하던 동반자가 사라졌으니, 세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돈으로 뒤바뀐다. 이에 ‘나’는 “굴절되는 만큼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라고 서술한다. “금”은 “너”와의 지난날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영원한 필터가 되었다. 필터는 이미지를 왜곡한다. 아름다운 “빛”도 그러한 균열을 통과하면서 휘어서 꺾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금”은 선명히 드러난다. 추억을 떠올리는 행위가 행복이 깨진 현재의 상처를 아프게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눈으로」가 응시하는 삶의 이면이다.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한쪽 눈으로는 환했던 기억(“빛”)을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금”)을 같이 바라보는 일이다. 두 개의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은 관계의 실패에 대한 뼈아픈 기록만은 아니다. 한 관계가 남긴 흔적을 자기 일부로 수용하고 이후의 나날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태도다. 외면하지 않기는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규범과 통한다.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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