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시조시학 2024년 여름호(제91호)
숲속을 지키는 작은 말들의 발화
김태경 시인의 이야기는 숲에서 시작되어 숲에서 마무리된다. 숲이라는 자연적 요소가 기저에 있다면 그 위에 언어의 은유, 즉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위치하고 있다. 시인은 말을 매개로 하여 자아와 세계에서 혹은 자아와 자아 사이에서 고뇌한다. 그 고뇌는 아직 지켜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비롯된다. 사물이든 사상이든 일회성으로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시인은 인간이 성장하는 동력인 언어가 가진 ‘말의 힘’을 지키고자 한다. 더불어 시인은 말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침묵을 택하라고 한다. 잘못 사용한 말은 한순간에 일상을 잃게 만든다. 가볍게 여긴 말의 사용으로 인해 불우와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인이 지키고자 하는 말의 힘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간이 될 것이고, 우리를 바로 서게 할 발판이 될 것이다.
어제를 돌돌 말아 돌담 틈에 꽂아봐도
어차피 내 것 아닌 태양이지만 섬기고픈 새 빛을 가까이서 만나는 건 나무들만 큰 가지와 많은 잎이 긴긴 어둠 만들어도 아름다워 숙연해진 작은 말을 지키는 눈, 눈이 한 개 있거나 여러 개 달린 나무들 수천 개의 눈이 지키는 여린 숨에 입김 나고 눈을 보는 눈은 오직 검은 말의 눈뿐이라서 보여도 보인다고 말할 수 없는 입새 속에서
끝 모를
시선 어딘가에서
숲과 함께 밤이 자라도
― 「숲」 전문
화자인 시인이 위치한 곳은 숲이다. 숲에는 ‘돌담’도 있고 ‘태양’도 있고 ‘나무’와 ‘작은 말’도 있다. 이처럼 숲의 세계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서로 상호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태양이라는 “섬기고픈 새 빛을 가까이서 만나는” “눈이 한 개 있거나 여러 개 달린” 나무들은 “수천 개의 눈”으로 “숙연해진 작은 말”과 “검은 말”을 지키고 있다. “끝 모를/ 시선 어딘가에서/ 숲과 함께 밤이 자라도” 말이다.
돌이 늙어 주름진 담
고목만큼 자라는 담
숲과 밤이 쌓았을 담 작은 말을 지키는 담 유일한 출구였던 파란 문의 주인인 담 앙상한 말로서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담 용기 내어 넘으려면 말발굽이 걸리는 담 발목을 부러지게 만들 수 있는 잿빛 담 관리하는 문 옆에 커다란 코가 달린 담 말에게서 나는 냄새를 곧잘 알아채는 담 낯선 향기가 나는 듯하면 문을 열고 막는 담 부서질 것 같은 말을 보살피려던 견고한 담 무엇을 지켜야 할지 놓쳐버린 담담한 담
날 선 칼
말 등을 그을 때
피 냄새
맡지 못한 담
― 「담」 전문
담은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만들어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과 저곳으로 공간을 분리하여 독립과 함께 보호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이 대신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담을 찾아보기 힘들다. 담이 사라진 곳에는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사람의 동선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한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 쓰레기 투기 금지, 낙서 금지 등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던 담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곳에 ‘담’이 있다. 숲속에 있는 “돌이 늙어 주름진” 오래된 담이다. “숲과 밤이 쌓았을” 이 담은 “앙상한 말로서는 넘을 수 없”다. “용기 내어 넘으려면 말발굽이 걸”려 “발목을 부러지게 만들 수”도 있다. 진실됨이 없는 앙상한 말은 타인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든다. 때문에 자칫 함부로 내뱉은 말의 발굽에 걸려 발목이 부러지기도 하는 것이다.
담은 작지만 정도를 지키고 본질을 전달하는 소중한 말을 지키고자 한다. “관리하는 문 옆에 커다란 코가 달린” 담은 “말에게서 나는 냄새를 곧잘 알아”챈다. “낯선 향기가 나는 듯하면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내는 역할을 하고, “부서질 것 같은 말”은 보살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담은 “무엇을 지켜야 할지 놓쳐버”린 상황에 도달한다. “날 선 칼”이 “말 등을 그을 때/ 피냄새”를 “맡지 못한” 결과이다. 말이 온전한 말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순기능과 역기능 모두를 담 안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담 안에 있는 작고 여린 말들을 지켜주리라 마음먹었지만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게 된다.
불타지 않는 불꽃이 작은 말 옆에 있지
말 타고 온 기억은 사람을 지우려고 담 안에 머물면서 불태우기 시작했어 가까이 가서 보면 불에 그을린 입술이… 높아져 간 잿더미는 입술들의 무덤이었어 입술을 태운다 해도 자모는 피어올라 유영하다 주인을 찾아가는 표적들을 말 잃은 앙상한 말이 유심히 지켜봤지 총알처럼 돌아간 기억이 이빨마저 깨부수는 걸 버리려 애를 쓸수록 더욱더 나빠지는 걸 되살아난 얼굴에 예전보다 아파하는 걸 말발굽이 망가지도록 밟으며 불 끄려 해 타는 입술 꺼내려던 말의 입이 그을리고…
불에서 건져낸 입술
앙다문 밤이
끝없지
― 「ㅈㅐ」 전문
여기 입술들의 무덤이 있다. 말로 상대방을 속이는 입술은 결국 말의 무덤인 셈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말로 인해 상처받고 말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어쩌면 말들로 인한 무덤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말들, 근거 없는 말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짜 말들. 세상을 올곧은 시선으로 바로 보며 올바름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말에는 그 사람의 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보인다. 그만큼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실제 경상북도 예천군에는 말무덤이 있다. 이때의 말은 사람의 말(言)로, 말무덤을 한자로 하면 언총(言塚)이라고 한다. 말로 인해 갈등과 부로하가 생기니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무덤이다. 문제는 이러한 말무덤이 우리 삶의 곳곳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로의 탓으로 돌리고, 상대방을 공격하기에만 급급한 말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입술을 태운다 해도 자모는 피어”오르고 “주인을 찾아가는 표적들을 말 잃은 앙상한 말이 유심히 지켜”본다. 불을 끄려 하지만 입술은 타들어가고 오히려 “꺼내려던 말의 입이 그을리고” 만다. “불에서 건져낸 입술”이 “앙다문 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나뭇잎에 살 베이는 아픔을 아십니까
볼 수 없는 태양은 닿지 않는 신입니다 우람한 나무들은 작은 말의 우상입니다 검은 말은 푸른 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달리고 싶지 않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는 손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손끝이 모두 따뜻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비수 같은 버들잎, 장검 같은 솔잎, 톱날 같은 가시나무잎, 식칼 같은 파초잎 … (사이) … 때로는 당신 손길도 여린 말을 베고 갑니다 몸 곳곳을 베이고 피가 멈추지 않습니다 어째서 말의 피는 푸른색이 아닙니까 돌담 안을 붉은 피로 더럽힐 수 없습니다 여린 말은 밤새 피가 맑아지도록 웁니다 피가 멈추면 몸은 쇠처럼 차가워집니다 벌어진 상처에서 푸른 녹이 생깁니다 앙상한 말은 말이기를 그만두고자 합니다 몸에서 검은 물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조금씩 투명해집니다 머리부터 사라집니다
우는 이, 없길 바랍니다
깊은 침묵에 빠집니까
― 「칼」 전문
날카롭지 않은 나뭇잎에도 살이 베인다. 베이고 난 후에 찾아오는 아픔은 피와 함께 고통을 동반한다. “푸른 말이 되고 싶었”던 검은 말은 “달리고 싶지 않아 움직이지 않았”지만, 오는 손길을 피할 수는 없다. 철저한 개인 중심의 사유로 인해 검은 말은 감사할 줄 알고 서로 다독일 줄 아는 푸른 말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손끝이 모두 따뜻한 건 아니”다. “비수 같은 버들잎, 장검 같은 솔잎, 톱날 같은 가시나무잎, 식칼 같은 파초잎” 그리고 “때로는 당신 손길도 여린 말을 베고” 간다. “몸 곳곳을 베이고 피가 멈추지” 않는다.
“돌담 안을 붉은 피로 더럽힐 수” 없기에 “여린 말은 밤새 피가 맑아지도록” 운다. 울음을 통해 스스로 정화하는 것이다. “피가 멈추면 몸은 쇠처럼 차가워”지고 “상처에서 푸른 녹이” 생긴다. 말이 쇠가 되었다는 것은 말의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한다. “말은 말이기를 그만두고자” 할 때에야 비로소 “조금씩 투명해”져 “머리부터 사라”진다. 힘들게 애써서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사라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시인은 차라리 “깊은 침묵”을 지키고자 한다.
작은 말이 밤새 흘린 검은 피에 흙이 젖네요
무덤 같던 검붉은 재가 하나둘 늘어가고 아침햇살도 들지 않는 돌담 안이 고요해요 투명해진 말의 울음 바람처럼 지나갔나요 낫지 않는 병이래요 이번 생이 끝나도록 앙상한 말을 조금은 기억하리라는 오랜 착각, 착각을 바로 잡으려 느리게 땅을 파요 튼튼한 씨앗 대신 몇 알의 약을 넣고 숨느라 투명하게 사라진 말을 지키죠 봄이 와도 기대하던 싹이 나진 않아요
인사는 못하겠어요
온몸으로 견디느라
― 「씨」 전문
“작은 말이 밤새” “검은 피”를 흘리고 있다. “무덤 같던 검붉은 재”는 늘어가고, 돌담 안에는 “아침햇살도 들지 않는”다. “이번 생이 끝나도록 앙상한 말을 조금은 기억하리라는” 것은 오랜 착각이다. “봄이 와도 기대하던 싹이 나진 않”겠지만, “튼튼한 씨앗 대신 몇 알의 약을 넣고” 땅을 느리게 판다. 그러면 “숨느라 투명하게 사라진 말”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과 함께 말이다.
숲이 있고, 담이 있고, 재가 쌓이고, 칼에 베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가 남아 있다. 씨가 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봄이 와도 기대하던 싹이 나지는 않았지만, 아직 온몸으로 견디며 발화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니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숲의 언어는 순하다. 그리고 순수하다. 함부로 상대방을 비난하지도 않고 헐뜯지도 않는다. 서로 다독이며 오래 함께 가고자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푸른 숲에서 살아보는 것을 꿈꾸어 보았을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만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의 고요함과 꽃의 아름다움, 충만한 열매, 스스로 빛을 발휘하는 태양. 생각만으로도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된다. 나무와 꽃과 열매와 태양이 들려주는 숲의 언어는 스스로 빛을 낸다. 반면 도시의 언어는 삭막하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이 삶을 피로하게 만들고 그저 소모하게 만든다. 이 소모성의 내부에는 자아가 존재한다.
자아는 외부세계와 충돌하면서 본래의 맑고 순수한 모습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태고적 자아는 맑고 순수 그 자체였으나 세상과 만나 탁해지게 된다. 생활하다 보면 날 선 말로 인해 상처받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혹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오해와 갈등이 일어난다. 말이 가지고 있는 기능도 태초에는 순수하였을 것이다. 낯선 세계와 날 선 상황들에 대처하다 보니 그 순수함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이러한 순수한 자아 즉, 숲속의 작은 말을 지키는 것은 결국 시인 자신이다. 시인으로서 언어를 다루는 스스로가 지켜야 할 자신과의 사투이자 사회적 책무인 것이다. 김태경 시인의 시는 말과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추천 콘텐츠
1. 림보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해가 뜨고 지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예외 없이 반복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 의미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 온전한 구원도 영원한 처벌도 아닌 기이한 경계 위에 놓인 끝모를 유예의 삶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텅 빈 약속에 기대어 자기 몫으로 주어진 무한한 침묵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견디며 서서히 소진되어 갈 뿐이다. 림보가 때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원형이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구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한없이 갈망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으면서도 간절히 희구하는 인간의 오래된 마음과 그 기이한 관성을 림보의 심연으로부터 불현듯 마주치게 되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흐르지 않는 시간의 더미 속을 오늘도 무심히 통과해 간다. 림보 안에 갇혀 있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망각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금까지의 생과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무한한 반복뿐인 오늘의 심부에 거칠게 쑤셔 넣는다. 어떤 부정도 외면도 더는 되풀이할 수 없을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생의 열기를 창백히 소진시켜 하루치의 안도와 평화를 가까스로 얻어낸다. 그렇게 림보의 일부가 되어 간다. 급류에 휩쓸리듯 림보의 심연에 깊이 좌초된 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허방 속을 무한히 배회하며 림보의 중력에 천천히 소화되어 간다. 이번 최호빈의 시편들은 이 림보의 심연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매혹과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화자들은 공허한 반복뿐인 림보의 시간을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살아냄으로써 정보와 명령의 과잉으로 점철된 현실의 앙상한 구조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오래도록 잊어온 살아 있다는 일의 경이와 그 선득한 실재를 회복해내고 있었다. 의미의 부재를 좇으면서도 섣불리 상상적 매개에 의지하지 않는 신중한 견고함으로 림보가 뿜어내는 육중한 중력을 존재의 내부로부터 캄캄히 씹어 삼키고 있었다. 림보의 심연 속을 항해하는 그 투명하고도 예리한 시적 섭생의 한 방식을 따라가 본다. 2. 림보의 출입구를 발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그토록 선명했던 목표도 출발점도 림보의 중력과 그 자장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것이 한없이 모호하고 흐릿해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림보는 단순히 삶만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온 일체의 가치나 의미까지도, 이에 기대어 뿌리내려온 존재의 모든 시간까지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린다. 림보에 갇힌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동력은 관성이며, 이는 삶의 고유성과 의미를 모두 말끔하게 지워버린 현재라는 강력한 동일성의 중심을 향해 어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아간다. 최호빈의 시는 그 맹목의 관성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투명하게 응시하되 어떤 확신도 포기도 신중히 경계하는 이중의 절제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성찰적 시가 도달하기 쉬운 환원론적 경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 낸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체온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혈압을 잰다 폐활량도, 골밀도도, 시력도, 심전도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맥박을 세고, 혈당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기록한다 오늘이 낮이 긴 날인지 밤이 긴 날인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있다 (중략) 체인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차르르, 차르르 하루가 하루를 굴리고 있다 ―「루틴 버그」 부분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맹목적 “루틴”뿐인 삶의 허망함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사유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이 림보의 중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근대적 자각의 형식을 빌린 손쉬운 착각 속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오직 동일한 운동의 “반동”과 그 강도에 기대어 “하루가/하루를 굴리”는 지리멸렬한 삶의 풍경은 명백한 부정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는 우리 삶의 조건이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며 그 삶이 놓여 있는 지배적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계몽적 맥락에서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림보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그 맹목뿐인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호빈의 시는 림보에 갇힌 생의 구체적 세부를 하나하나 주시하고 “기록”해 둠으로써, 그 텅 빈 강박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존재의 깊은 불안과 고독을 읽어낸다. “맥박”, “혈당”, “혈압” 등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수치화한 표백된 추상의 개념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살아가는 뒤틀린 허기뿐인 삶의 중심엔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없는 곳에서/점멸하는 가로등같이 애써 살아가는 오늘이/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나 우리,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닌데, 다음의 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선생님, 저희는 팔을 흔들며 달릴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궁금한걸요 (중략) 마지막 곡선코스를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 친구는 쓰러져 있었고, 한 친구는 울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고, 한 친구는 마치 신호를 듣지 못한 듯 출발선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손에 있었던 것은 건네주고 건네받는 릴레이 바통이 아니라 녹초가 될 때까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0의 릴레이」 부분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경주마의 은유는 이미 우리 생의 보편적 형식이 되었고,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이를 내면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당위적 상식과 표준 내지 윤리적 규율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녹초가 될 때까지” 결코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대의 “릴레이”란 사실 “릴레이”의 형식을 빌린 단독 경주에 불과하다. 우리가 참고 견뎌온 공동체의 경주가 실은 어떤 것도 서로에게 “건네주”거나 “건네받”지 못하는 “0의 릴레이”였다는 깨달음은 날카롭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물론 최호빈의 문장은 그와 같은 체념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비록 영원한 “0의 릴레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릴레이 바통”을 단 한 번도 서로에게 건넨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트랙을 도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이 공통의 운명에 처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였음을 아프게 지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번도 온전히 발설된 적 없는 “우리”가 림보 바깥의 시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면, 다음 절의 시편들은 이를 존재에 대한 질문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전환해내는 시적 사유의 깊이와 그 견고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3. 앞서 다룬 시편들이 림보에 갇힌 삶의 구체적 세부와 그 표면에 비교적 밀착해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다음의 시편들은 성찰적 거리의 매개를 통해 림보의 바깥을 좀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사유한다. 이에 따라 시의 무대 역시 성격이 조금 달라지는데 이들 시편들에서 림보는 맹목의 관성과 공전(空轉)의 열기로 위태롭게 굴러가는 타성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매혹적인 탈경계적 공간으로 변모된다. 그럼에도 이를 림보의 차원에서 일컫는 까닭은, 이 마력의 공간이 언제나 경계와 경계 사이에 놓인 항구적 임시의 공간이며 오직 경계를 넘기 위한 갈망의 깊이만이 그 내부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최호빈의 다음과 같은 시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림보의 중심에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 림보 너머를 사유하고 매개하려는 존재 탐구의 의지를 드러낸다.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겠지. 별생각 없는 이마를 쓰다듬고 사라진 건 누굴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겹쳐 쥔 채, 조금씩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하는 너의 시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가 거기서 깨어난 적이 있다. 오늘도, 내일도. 네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오랜 꿈을 다시 꾸듯 네게 짖고 싶어. 그게 내 운명이라면, 컹컹. ―「데자뷰」 부분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또 건너왔다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돌 하나 정말 내 꿈에 누가 또 있는 걸까 세 번째 돌을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건너오다가 가라앉은 걸까 아니면 그냥 가져간 걸까 그냥 돌아간 걸까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물수제비」 부분 세계는 “미심쩍은 그림자들”로 대표되는 무의미한 일들의 무한한 반복과 단 하나 강렬한 사건적 의미의 출현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적대적 요소들의 대립으로 삶과 세계를 거칠게 이분화하여 환원시키려는 폭력적 의지와는 별 관련이 없는데, 의미의 부재와 결여는 상실된 존재의 시원을 회복하기 위한 인식의 토대이자 판단의 근거일 뿐, 무구한 세계에 죄를 물으려는 핏빛 단죄나 원한의 투사가 아닌 까닭이다. 그의 화자들은 “너”가 “날 선택했”다는 명료한 판단과 전제 위에서,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타자의 방문과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위에서 ‘너머’의 감각과 그 물성을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만, 이 간절한 열망은 언제나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라는 질문의 형식으로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라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기다림의 언어로만 발화되고 매개된다. 최호빈의 시에서 의미는 그렇게 찾아온다. 림보 바깥으로부터 건너온 환대와 초대의 몸짓들은 오로지 그 너머와의 맹약에 사로잡힌 화자의 절대적 갈망과 의지로 인해, 기다림에의 헌신과 그 오랜 견딤의 밀도로 인해 비로소 고유한 얼굴과 목소리를, 체온과 무게를 갖게 된다.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라는 시적 전언은 그러므로 또 하나의 절대적 기다림에 대한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 ‘나’를 투신하여 나를 지우려는 것도, ‘나’의 두터운 중력으로 꿈의 물성을 구부려 억지로 집어삼키려는 것도 아닌 이 투명한 기다림의 자세가 최호빈 시의 고유한 호흡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기다림이 있는 한, ‘너머’는 어디에서나 출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곳도 ‘림보’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다음의 시에서 림보는 세계를 집어삼키는 적대적 미로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 바깥을 상상하고 잉태하는 무수한 ‘너머’들의 자궁이자 그 기미들로 흘러넘치는 경계들의 성소로 현현된다. 조문하러 가는 장례식장은 얼마 전에도 갔던 곳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갔던 곳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아, 맥도날드 모든 불행은 멀리 있다는 듯 웃고 있는 맥 도 날 드 불 고 기 버 거 한참 뒤에 나타난 경찰이 정리를 해봐도 한번 막힌 도로는 쉽게 뚫리지 않고 눈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호루라기 소리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아, 글자 하나하나가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것처럼 묵묵히 솟아오르는 M c d o n a l d ’ s ―「이방인-맥도날드 불고기버거」 부분 “맥도날드”는 평소엔 아무런 문제도 의문도 일으키지 않는, 편리하고 무감한 숱한 일상의 장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퇴근길 막힌 도로처럼 꼼짝없이 림보에 갇히고 만 삶의 실재를 차분히 응시하려는 화자의 시선에 인해 일순간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처럼 분리되어 “묵묵히 솟아오”른다. 일상의 허기(“시장기에서 오는 쓸쓸함”)와 존재의 허기(“쓸쓸함에서 오는 시장기”)가 엇갈리며 뒤엉키는 이 기이한 경계적 시간 속에서 화자는 “맥도날드”라는 일상의 공간이 불현듯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무수한 “통로”들로 변신하는 시적 도약의 비일상적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맥도날드” 자체는 물론 어떤 숭고한 의미도 약속도 제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이하게 뒤틀린 경계적 공간들은 림보 너머의 삶과 그 선연한 물성들을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받아들이고 예감하게 한다. 이 너머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과 존재론적 갈망이 최호빈 시의 화자들이 ‘림보’의 심연을 헤매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것이 “너”라는 인칭으로 호명되든 “돌”이라는 존재론적 사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든, 불길하고 불가해한 실재에의 매개나 교차로로 묘사되든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최호빈의 화자들은 이 ‘너머’에 대한 사유와 갈망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실재들을 림보 속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림보’는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조건이자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 혹은 이미지이기에 앞서, ‘너머’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그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림보와 맺고 있는 곤경의 특수성을 얼마쯤 정확히 짚어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림보 안에서 태어나 ‘너머’를 꿈꾸고 갈망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림보는 우리를 가두지만, 동시에 그 가둠을 통해 깨어나게 한다. 깨어남을 갈망하게 한다. 림보는 우리의 적이면서 자궁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림보의 바깥은 림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림보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만 림보의 바깥으로 향할 수 있다. 최호빈의 시는 이 ‘림보’의 생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림보 안에서가 아닌 림보 속으로 쓰여진 기나긴 울음의 내력들을 그의 문장들로부터 뜨겁게 읽는다.
인간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내면화 백애송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새로운 사회적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다양한 사고방식이 파생되면서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변화해 간다. 이러한 변화하는 삶 속에서 김범렬 시인의 시는 당면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탄탄하고 감각적인 시어를 통해 깊은 사유를 환기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감정 또한 분명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들을 모든 사람들이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김범렬 시인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어루만지듯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탄주(彈奏)되는 삶의 풍경 여름 한낮 탄주한다, 소낙비 오락가락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 경계 긋고 난센스 불가촉천민 간담 그리 서늘케 한.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 빠끔 낯 비춘다. 내로남불 청개구리 부르튼 입술 띄울 무렵 우화를 마친 쓰르라미 자연섭리 깨우친 듯. 말모이를 섬긴 걸까, 노랫말 줍는 그들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듣는 너나 나나 간절히 간구하는가, 목 떨구는 해바라기. 하늘 문 열고 닫는 해거름 멈칫 선다. 세상 물정 어둔 친구 금싸라기 안겨줄까?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마을 어귀 줄을 잇고. ― 김범렬, 「여름 한낮 판타지아」 전문 “여름 한낮”의 풍경은 가야금이나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힘차게 “탄주(彈奏)”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한여름의 날씨는 오락가락 소낙비를 뿌리며 변덕스러운 기운을 드러낸다. 이 소낙비는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을 경계로 삼아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을 만들어낸다. “불가촉천민”이라는 표현은 경계로 구분된 계급사회와 신분 차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가촉천민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난센스”처럼 느껴지며, 보는 이로 하여금 서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연은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소낙비가 지나간 뒤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는 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로남불 청개구리”와 같은 고단하고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연섭리 깨우친 듯” 흘러가는 “우화”의 시간은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쓰르라미가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환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노랫말 줍는 그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들으며 “간절히 간구”할 수 있다. “세상 물정 어둔” 순수한 이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의 탐욕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마을 어귀”에는 여전히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줄을 잇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 시는 여름의 한낮 풍경을 인간 사회의 모습에 빗대어 보여준다. 여기에 ‘판타지아(fantasia)’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배곯을까,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 검붉은 놀 드리울 즘 그 무슨 경종 울리나, 명치 끝 때리는 바람.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군다. 번개 배달된다기에 배꼽시계 수선 떤 날 아뿔싸! 한발 늦었구나, 한목숨 먼 길 뜨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 없고 불현듯 떠오른 그 말 “급할수록 돌아가라.” ― 김범렬, 「번개 배달 한때」 전문 현대 사회는 배달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빠른 소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음식과 물건이 주문과 동시에 집 앞까지 전달되는 편리한 환경이 일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로 위에서는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오토바이에는 배달 음식이 실려 있고, 라이더들은 음식이 식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속도를 높인다. 배달 라이더들의 증가는 생활의 편리함도 가져왔지만, 동시에 속도 중심의 문화가 만들어낸 양가적인 측면도 함께 드러낸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배곯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더 빠르게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배달 라이더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보다도 더 긴박한 것은 촉박한 시간 안에 배달을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이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해 있는 도시에서, “검붉은 놀 드리울” 해질 무렵이 되어도 라이더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구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한목숨 먼 길 뜨고” 난 뒤에야 “아뿔싸!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삐 서둘렀던 시간들이 결국 사고를 낳고, 한순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생명을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만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에 이미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조차 남아 있지 않다. 뒤늦게 후회하더라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속도를 미덕처럼 여겨온 ‘빨리빨리’ 문화는 배달 라이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라도 더 배달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곡예에 가까운 운전은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빠름을 추구하는 속도가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쉽게 외면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고요한 응시와 삶의 내면화 보름달 입맞춤한다, 소금쟁이 잠든 호수. ― 김범렬, 「달빛 호수」 전문 김범렬 시인의 시조는 현실 사회의 역동적인 풍경과 도시의 긴장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선은 한편으로는 고요한 자연의 풍경과 사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내적으로 성찰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위의 시 「달빛 호수」를 통해 고요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다. 그리고 호수에는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반영되어 보인다. 시인은 이를 호수와 달의 ‘입맞춤’이라 표현한다. 충만한 보름달이 호수를 비추고, 호수는 온몸으로 달빛을 감싸 안으며 고요한 정경을 이루고 있다. 잠든 소금쟁이가 떠 있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고,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이다. 살아가면서 시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잔잔한 순간을 얼마나 마주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시 속에 한 폭의 풍경처럼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시간이 마치 멈춰 있는 듯하다. 이 시는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을 붙잡아 고요한 사유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은 짙붉던 장미꽃 한 송이 피죽도 못 먹은 듯, 본디 넌 사랑의 화신化身 여태 불 밝히지 못한. ― 김범렬, 「겨울 장미」 전문 장미는 열정과 사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시를 지닌 존재로서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피어나는 계절은 5월이다. 그런데 시 속에 그려진 장미는 ‘겨울 장미’이다. 피어나기 어려운 계절에 피어난 장미는 환영받지 못한 채 제 빛깔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지만 한때 “짙붉던 장미꽃”은 “피죽도 못 먹은 듯” 색이 바래 있다. 본래 장미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지만 “여태 불 밝히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누군가를 향했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뜻한 계절에 피어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추운 겨울 피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장미. 시인은 이러한 겨울 장미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과 고독, 기다림의 감정을 중첩하여 보여주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존재들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타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 과정을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음의 시 「비누」가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눈길 주면 또 줄수록 닳아지는 몸맨두리 문대면 거품 게운다, 꽃무지개 띄울 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부리는 몸 한결같이.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본다.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한 떠꺼머리 뉘 봐줄까. 웬일일까, 분내 살내 몸 냄새가 그곳에서 배어난다, 바람 부는 그날따라 몸 부푸는 몸피, 몸피. 빛 쏟을 짬도 없이 폭죽 펑펑 터뜨린 날, 눈이 번쩍 귀가 쫑긋 번갯불 불똥 튄 날. 업보라는 짊어진 짐 내려놓을 그때까지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을 터. ― 김범렬, 「비누」 전문 위의 시조는 비누의 특성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표현하고 있다. 비누는 사용할수록 닳아서 없어지지만,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꽃무지개 띄울 듯” 나오는 거품으로 사물과 삶을 더욱 깨끗하게 만든다. 비누는 자신을 소모하면서 삶을 더 환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사라져가면서도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하고, 오히려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보며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빛 쏟을 짬도 없이” 하얀 거품을 폭죽처럼 펑펑 터뜨리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업보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비누의 업보는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여 끝내 닳아 소멸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으며 세상을 좀 더 맑고 깨끗한 만들고자 한다. 인간의 삶 역시 비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의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되지만 그 과정 속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며 삶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유한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배려하고 헌신하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개인의 삶은 소멸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누군가의 삶을 더 맑고 빛나게 하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새로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대 사회에서 김범렬 시인이 견인한 현실은 시어가 지닌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구체적이면서도 간명하게 드러난다. 시를 쓰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기에 김범렬 시인은 오늘의 시대를 다시 응시하며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삶의 모습들을 찾아내어 경고와 위로를 건넨다. 탄주하는 여름 한낮의 풍경과 배달 라이더,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는 비누, 겨울에 피어난 장미와 적막한 호수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다양한 장면들은 시인의 성찰을 거치며 시조 특유의 리듬 속에서 의미로 충만해진다. 시인의 언어는 시인이 직접 삶을 체화하여 행간에 의미들을 담아냈기에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