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시조시학 2024년 겨울호(제93호)
인간 실존의 근원에 대한 사유
김상규 시인의 시는 인간 실존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각하며 존재한다. 김상규 시인이 바라보는 존재의 심연에는 삶의 의미, 자아에 대한 정체성,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전통적인 시조 형식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투영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인 삶의 양상과 죽음의 경계를 풀어낸다. 더불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상실, 고독, 고요, 적막과 같은 감정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다소 무거운 주제 의식처럼 보이지만 이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하여 독자가 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전통적 운율과의 조화를 통해 현대인의 감정을 정밀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섬세함도 엿볼 수 있다.
삶의 의미
나의 작은 심장이 여름에 뛰었다면
바다 건너 극락조도 울지 않고 날았으리
파초도 제 잎 떨구며 햇살 내려 주었으리
‘꿈을 노래하세요, 고둥 속 바다처럼.’
원주민 소녀의 장난스런 놀림마저
요람 속 긴 숨소리에 흩어지고 말았으리
활짝 핀 두 손에 거미가 집을 짓곤
나비마저 쫓았으리, 어지러이 날아가는
눈 따윈 알지 못하는 맨살결의 초록처럼
서리 맞아 얼어붙은 무화과를 못 본 듯이
인중 끝 차게 식은 숨결마저 잊은 듯이
암소의 혓바닥보다 길고 긴 회귀선
― 김상규, 「12월생」 전문
시의 제목으로 보아 시 속 화자는 ‘12월’ 겨울에 태어났다. 만약 화자가 열정적이고 활기찬 여름에 태어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화자가 바라는 세계는 “바다 건너 극락조도 울지 않고” 날고 “파초도 제 잎 떨구며 햇살 내려” 주는 세계이다. 즉 극락조처럼 울지 않고 슬픔 없이 삶을 살며, 파초처럼 따뜻한 햇살을 마음껏 내려 주는 풍요로움 속에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고둥 속 바다처럼” 무한한 세계에서 꿈을 향한 노래를 할 뿐이다. “원주민 소녀의 장난스런 놀림마저/ 요람 속 긴 숨소리에 흩어지고 말았”다. 외로움과 고립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활짝 핀 두 손에 거미가 집을 짓곤/ 나비마저 쫓았”고, 풍요를 상징하는 무화과는 “서리 맞아 얼어붙”었으며 숨결은 “인중 끝 차게 식”어 버렸다. “암소의 혓바닥보다 길고 긴 회귀선” 속에 화자는 자신의 삶이 불완전함을 느낀다.
이 불완전함 속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시 속에서 삶의 회귀선은 순환론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살아가면서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사건과 행동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기쁨과 행복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번뇌 등의 모든 감정들 역시 반복된다. 이와 같은 “서리 맞아 얼어붙은 무화과”와 “차게 식은 숨결”과 같은 피하고 싶은 순간도 삶의 일부이고, 이 또한 회귀선 안에 내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체감한 화자는 있는 그대로의 불완전함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12월의 추운 겨울 속이지만 삶은 또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향유 가득 채워진 검푸른 바닷속에
나를 버려 주세요, 누구도 찾지 못하게
수탉도 우짖지 않을 미완의 그늘 속으로
바다가 어둠을 품는다고 했지요?
달빛마저 들지 않는 연산호 용암굴 밑
잘 여문 망각 속으로 선뜻 놓아주세요
해마 꼬리 휘어잡은 아가는 잊으셔요
청각 꽂고 매달리는 꼬마도 지우셔요
해류에 떠밀려 가는 길 잃은 부표처럼
탄생도 죽음도 오지 않을 심연으로
천천히 풀어주세요, 아무도 찾지 못하게
태곳적 나 낳기 전 그곳, 황량한 소금밭으로
*망각유아:유아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
― 김상규, 「망각유아」 전문
유아 기억상실증은 두세 살 무렵의 어릴 적 일들 즉, 삶의 초기 몇 년 동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이다. 유아 기억상실은 뇌 발달이 미숙하고 언어 발달도 미숙하여 경험을 구조적으로 저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 기억상실증을 통해 시인은 “태곳적 나 낳기 전 그곳”인 미지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1연에서의 화자는 “향유 가득 채워진 검푸른 바닷속”으로 묘사된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에 머물러 있다. 이곳은 “수탉도 우짖지 않을 미완의 그늘 속”으로 아직 온전하지 못한 상태이다. 2연에서의 화자는 “달빛마저 들지 않는 연산호 용암굴 밑”에서 유영한다. 그러다 “잘 여문 망각 속으로 선뜻” 나오게 되는데, 이는 곧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화자는 “해마 꼬리 휘어잡은 아가”와 “청각 꽂고 매달리는 꼬마”는 이제 그만 잊으라고 한다. 어머니와 분리된 화자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혹여 “해류에 떠밀려” “길 잃은 부표처럼” 방향을 잃어버리더라도 즉 어떠한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화자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지속될 것이다.
태어남은 곧 시작이지만, 과거의 어느 기억 한 페이지는 상실하게 된다. 태어나기 전에는 안전한 보호의 공간에 있지만,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황량한 소금밭”을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모의 공간에 던져진 존재는 미지의 세계에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곧 존재 자체의 여정일 것이다.
수염 난 두꺼비가 나를 깨워주었지
정화수 맑은 물은 마당에 넘쳤지만
그것은 오욕이었어, 가문 땅 진흙뿐인
아궁이 깊은 곳 숨겨둔 온기마다
내 피 하나 뚝뚝 떨궈 불씨 끄고 싶었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그것은 천형이었어
선생님, 오늘도 학교에 못 가겠어요
꼬리 잘린 뱀이 와서 제 살을 태우거든요
할머닌 기도 중이셔요, 이것만은 진실이에요.
― 김상규, 「신열(身熱)」 전문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두꺼비는 길한 동물로 여겨져 설화나 민담에도 많이 등장한다. 은혜갚은 두꺼비나 콩쥐팥쥐에서 두꺼비는 밑 빠진 독의 구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 속에서 두꺼비는 신열(身熱)이 오른 화자를 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 속 정황은 밝지 못하다. “정화수 맑은 물”이 “마당에 넘쳤”고 이를 “오욕”이라 생각한다.
정화수는 유교의 제사나 굿에서 올리는 깨끗한 물로 새벽 일찍 우물에서 길어온다. 전통적으로 정결한 기원을 상징하여 제수나 공물이기도 하지만, 시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처럼 주부들이 새벽에 소망을 빌기 위해 장독대나 우물가, 부엌 등에 떠 놓았던 물이기도 하다. 정화수는 부정을 쫓아내고 더러운 것들을 씻어주는 의미로 부정을 물리친다고 여겨왔다.
이 시에서 역시 정화수는 깨끗한 물이다. 하지만 이 깨끗한 물이 마당에 넘쳤고, 이를 오욕이라 표현한다. 즉 이는 깨끗함이 더럽혀졌다는 것으로 시인 내면의 갈등을 보여준다. 정화수가 오욕이 된 이유는 현실과 희망 사이의 괴리감 때문일 것이다. 바라는 희망은 저만큼 놓여 있고 현실은 불화하기에 이 사이의 간극이 결국은 시인을 좌절하게 만든 것이다.
“아궁이 깊은 곳”에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인 온기를 숨겨놓았으나,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천형”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죽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어나간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현재의 삶이 매우 극심한 고통 속에 놓여 있기에 죽음을 통해 삶을 다시 이어가겠다는 복잡한 감정이 시인을 더욱 고뇌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기도 중인 할머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할머니는 신열(身熱)로 인해 오늘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꼬리 잘린 뱀이 와서” 살을 태우고 간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시인을 보호해준다. 삶을 지속하는 것이 천형과도 같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경계
설산을 넘는 새는 긴 날개를 지녔다
가장 밝은 북극성에 먼저 가야 하므로
주검의 영혼을 달고 비상해야 하므로
― 김상규, 「조장(鳥葬)」 전문
「조장(鳥葬)」은 단시조이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시이다. 시의 배경은 눈으로 덮여 있는 산으로 고독하면서도 시련을 암시한다. 이 산 위를 “긴 날개를” 지닌 새가 넘어가고 있다. 날개가 길다는 것은 춥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넘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더욱이 날개가 긴 새는 “주검의 영혼을 달고” 앞서 나아가 먼저 “가장 밝은 북극성”에 도달하여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보여주는 묵직한 메시지가 새의 비상으로 인하여 아픔과 희생을 더욱 도드라지게 형상화한다.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삶의 ‘영혼’은 끝이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삶의 한 부분이다. 결국 새의 비상은 단순히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지고 나르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긴 꿈을 꾸었다, 죽은 자를 품에 안고
자취 없이 강을 건넌 물뱀의 허물처럼
설원 속 뿔을 떨구던 수사슴의 침묵처럼
― 김상규, 「윤회」 전문
설산의 이미지는 위의 시에서도 이어진다. 이 시 역시 단시조의 구조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을 보여준다. 시 속 화자는 “긴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죽은 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삶은 “강을 건넌 물뱀의 허물처럼”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이며, “설원 속 뿔을 떨구던 수사슴의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이후에는 그동안 살아온 내력에 대한 흔적도 소멸하고 만다. 쇠퇴하여 “뿔을 떨구던 수사슴” 역시 소리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삶과 죽음은 숙명적인 관계이다. 시 속 화자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큰 소란없이 담담하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일부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순환의 과정인 것이다.
김상규 시인은 시조의 전통적인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통해 오늘날 시조를 읽는 독자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주제를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형식이라는 시조의 기본적인 특징은 계승하면서 현대적 주제와 정서를 반영하여 재해석한다는 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나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성찰을 시조의 형식을 통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시조의 현대화 측면에서도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다. 감각적인 이미지는 독자로 하여금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시의 내용을 보다 더 풍부하게 하여 독자가 그 정서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김상규 시인은 은유와 역설, 이미지를 시조에 적극 활용하여 정서의 깊이를 더하고 전통과 현대적 감각의 융합을 꿰한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실존적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깊이 고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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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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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지난 호에서 한국시가 생존에서 실존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응시'하는 주체를 빚어내는 과정을 보았다. 왜 응시하는 주체인가? 김수영이 갈파했듯이 '사물'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그 후손으로서의 우리 마음은 뿌듯할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즉 어떻게 주체는 그런 응시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일까? 생존에서 실존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번개처럼 그런 능력이 그의 몸 안으로 떨어진 것일까? 그러나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은 '사탄' 뿐이다. 모든 능력은 몸 안에서 자생적으로 솟아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1945년의 해방과 1950년의 전쟁은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엄혹성은 의식의 표면에서 자각되지 않기 일쑤였다. 그 사실을 직면한다는 것이 엄청난 고통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인이 실존의 단계에서 응시의 권능을 자신의 몸을 초과해서 선취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가정이 타당하다면 그는 응시를 취득하기에 앞서 그가 넘어야 할 장벽이 있다는 가정 역시 성립한다. 그 장벽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가 응시를 응시하는 순간, 그는 두 가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그가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다는, 즉 타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누구보다도 '주체'의 힘을 강조한 사르트르가 그 점에 예민하게 주목했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끄러움(la honte)은 그 일차적 구조 안에서 '누군가의 앞에 놓인 자'의 부끄러움이다. 나는 방금 모종의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를 했다. 처음 이 제스처는 내게 붙어 있다. 나는 그것을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것을 바라볼 뿐이다....(중략)... 문득 갑자기 나는 고개를 든다.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곧 이어서 내 제스처의 천박성을 깨닫는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중략)... 나는 내가 타자에게 드러난 정도로 나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자의 출현 자체에 의해 나는 어떤 대상을 판단하듯이 나 자신을 판단하는 일에 서둘러야 한다는 처지에 놓인다. 왜냐하면 나는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에게 드러난 이 대상, 이것은 타자의 의식 속에서는 헛된 가상이 아니다. 이 이미지는 실로 타자에게 전가될 수 없고, 나를 변신시킬 수도 없다. 나에게 어떤 추함, 천박함의 표정을 입히는 나에 대한 나쁜 초상화 앞에서 그러하듯이 이 이미지 앞에서 나는 짜증과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골수까지 침범당하지는 않는다. 부끄러움, 그것은 본질적으로 재인식(reconnaisance)이다. 나는 타자가 나를 보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재인식한다. 1)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부끄러움을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나'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일까? 사르트르의 글의 문면에는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가 원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제스처는 어떤 타자에게 한 행위이다. '타자에게'라는 방향성이 없다면 나의 제스처는 그저 무심할 뿐이다. 더 나아가 이 제스처가 '서툴거나 천박한' 형태로 제시되었다는 것은 타자를 '대상화'하는 마음의 태도를 노출한다. 철학자는 그 점을 교묘하게 표현한다. "내가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처럼 나타났"던 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판단하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내 눈앞의 어떤 '타자'를 '대상'처럼 판단함으로써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를 행한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거의 동시적으로 타자에 의해서 나의 모습이 '서툴거나 천박하다'고 비추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타자에 의해서 대상화된다. 사르트르가 이런 풀이를 한 배경에는 '나', 즉 하나의 주체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존재결여'로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대자존재(être pour soi)'에 대한 그 특유의 정의가 깔려 있다. 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함을 인식할 때의 존재일 때, 즉 대자존재일 때 그는 존재결여로서 나타난다. 그 존재결여가 가상의 타자들에 의해서 '대상'의 존재로 그를 격하시킨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무화할 수도 있는 위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변신시키기 위한 실마리이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두 문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얻는다. "부끄러움, 그것은 본질적으로 재인식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인식을 프로이트는 앞서서 파악한 바가 있다. 임상 실험 중에 환자가 자신을 오랜 시간 마주 본다는 점을 거북하게 여겼던2) 프로이트는 '응시'가 '시선'과 다르다는 점을 파악한다. 시선이 주체의 사안이라면, '응시'는 대상에 집착된 '시각적 충동'이며, 이 충동은 '오인'을 개입시킨다는 것이다3). 이러한 분리로부터 출발해 라캉은 이 대상, 즉 주체가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이 '남근(phallus)'이라는 점을 간파하는데, 이를 '거세된 성'이 야기하는 "거세 공포에 대항하여 "시선의 석화(石化) 혹은 발기"라는 남근적 반응이 작동한 것으로 풀이한다. 요컨대 '응시'라는 시각적 충동은 "거세 사실을 감쪽같이 감추려는4)" 충동이다. 그렇다면 이 '남근'의 표상들은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타자에게서 나온 갖가지 환(幻)들로 채워진다. 주체는 이때부터 자신이 타자에 의해 포획되었음을 느낀다. "나는 한 곳만 줄곧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으로부터 바라보아지고 있다. 5)" 하지만 여기가 주체에게는 삶이 에너지를 얻는 계기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주체는 타자로부터 빌려온 환상물들을 제것으로 삼으면서, 끊임없이 갈아치우는 모험을 전개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갱신을 거듭 도모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주체가 '실존'하는 생생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전쟁을 딛고 살아남은 한국인이 마침내 새로운 탄생을 개시했을 때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난 호에서 말했듯 최초의 인간들이 응시를 첫 번째 행동 수칙으로 삼았던 이유와 효과가 방금 말한 과정을 그대로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아무 능력도 재산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거세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태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것은 물론 대상 세계의 진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저의 운용 하에 두고자 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럴 수 있으려면 타자들에게서 '도구'와 '사용법'을 빌려와야만 해야 했기 때문이다. 별로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앞에서 왜 그리 복잡하게 설명했는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주체의 타자 의존의 주체성(실존성)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한국의 식자들은 고금을 통틀어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불통의 주체성을 고집하는 데 전념하기 때문이다. 그 주체성의 환몽이야말로 스스로 알려 하지 않는, 즉 자발적으로 망각된, 사대주의에 불과한데 말이다. 1950년대의 김춘수·김수영·신동엽은, 존재의 이유가 지금, 이곳에 도래해야 한다는 믿음을 생존의 역학을 만든 박인환·전봉건·김종삼의 유산을 받아, 타자와의 뫼비우스적 거래를 통해서 실존의 버팀막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 거래의 최초의 생산물이 응시의 획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응시는 주체의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 주체가 기댄 등받이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은 장벽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할. 거기까지 가는 데에 또 얼마나 장구하고 복잡한 굴곡의 생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6) 1) Jean-Paul Sartre, 『존재와 무 L'être et le néant』, Paris: Gallimard, 1943, pp.259~260. 2) 이에 대한 정보는, Jean-Michel Hirt, '응시 Regard' 항목, in Alain de Mijolla (direc), 『Dictionnaire Internationale de la Psychanalyse (M-Z)』, Paris: Calmann-Lévy, 2002, pp. 1418~9에 근거함. 3) 프로이트, 「성적 탈선들」, 『성이론에 관한 세 개의 에세이』, in Sigmund Freud, 『Œuvres complètes - VI. 1901-1905: Trois essais sur la vie sexuelle, etc.』,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6, pp. 90-91.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응시'는 '신체적 접촉'과 마찬가지로 "성적 목표를 고착시키는" 두드러진 행동이다. 또한 이 고착은 '성적 탈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시각적 충동(pulsion scopique)이 시각적 쾌락(plaisir scopique)으로 발전될 때, 그것은 '도착(perversion)'이 된다고 한다. 4) Jacques LACAN, 「시선과 응시의 분열 La schize de l'oeil et du regard」 in 『Le Séminaire XI: Les quatr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1964)』, Seuil, 1973, p.74. 5) ibid., p.69. 6) 개인적인 사정으로 여기에서 멈춘다. 제목이 약속하는 글의 내용은 아직 반 이상이 더 남아 있다. 다음 호로 연기할까 했지만, 글쓰기의 지속성을 위해서 요만큼이라도 발표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였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인간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내면화 백애송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새로운 사회적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다양한 사고방식이 파생되면서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변화해 간다. 이러한 변화하는 삶 속에서 김범렬 시인의 시는 당면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탄탄하고 감각적인 시어를 통해 깊은 사유를 환기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감정 또한 분명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들을 모든 사람들이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김범렬 시인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어루만지듯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탄주(彈奏)되는 삶의 풍경 여름 한낮 탄주한다, 소낙비 오락가락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 경계 긋고 난센스 불가촉천민 간담 그리 서늘케 한.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 빠끔 낯 비춘다. 내로남불 청개구리 부르튼 입술 띄울 무렵 우화를 마친 쓰르라미 자연섭리 깨우친 듯. 말모이를 섬긴 걸까, 노랫말 줍는 그들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듣는 너나 나나 간절히 간구하는가, 목 떨구는 해바라기. 하늘 문 열고 닫는 해거름 멈칫 선다. 세상 물정 어둔 친구 금싸라기 안겨줄까?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마을 어귀 줄을 잇고. ― 김범렬, 「여름 한낮 판타지아」 전문 “여름 한낮”의 풍경은 가야금이나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힘차게 “탄주(彈奏)”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한여름의 날씨는 오락가락 소낙비를 뿌리며 변덕스러운 기운을 드러낸다. 이 소낙비는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을 경계로 삼아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을 만들어낸다. “불가촉천민”이라는 표현은 경계로 구분된 계급사회와 신분 차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가촉천민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난센스”처럼 느껴지며, 보는 이로 하여금 서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연은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소낙비가 지나간 뒤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는 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로남불 청개구리”와 같은 고단하고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연섭리 깨우친 듯” 흘러가는 “우화”의 시간은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쓰르라미가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환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노랫말 줍는 그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들으며 “간절히 간구”할 수 있다. “세상 물정 어둔” 순수한 이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의 탐욕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마을 어귀”에는 여전히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줄을 잇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 시는 여름의 한낮 풍경을 인간 사회의 모습에 빗대어 보여준다. 여기에 ‘판타지아(fantasia)’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배곯을까,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 검붉은 놀 드리울 즘 그 무슨 경종 울리나, 명치 끝 때리는 바람.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군다. 번개 배달된다기에 배꼽시계 수선 떤 날 아뿔싸! 한발 늦었구나, 한목숨 먼 길 뜨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 없고 불현듯 떠오른 그 말 “급할수록 돌아가라.” ― 김범렬, 「번개 배달 한때」 전문 현대 사회는 배달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빠른 소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음식과 물건이 주문과 동시에 집 앞까지 전달되는 편리한 환경이 일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로 위에서는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오토바이에는 배달 음식이 실려 있고, 라이더들은 음식이 식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속도를 높인다. 배달 라이더들의 증가는 생활의 편리함도 가져왔지만, 동시에 속도 중심의 문화가 만들어낸 양가적인 측면도 함께 드러낸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배곯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더 빠르게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배달 라이더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보다도 더 긴박한 것은 촉박한 시간 안에 배달을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이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해 있는 도시에서, “검붉은 놀 드리울” 해질 무렵이 되어도 라이더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구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한목숨 먼 길 뜨고” 난 뒤에야 “아뿔싸!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삐 서둘렀던 시간들이 결국 사고를 낳고, 한순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생명을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만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에 이미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조차 남아 있지 않다. 뒤늦게 후회하더라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속도를 미덕처럼 여겨온 ‘빨리빨리’ 문화는 배달 라이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라도 더 배달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곡예에 가까운 운전은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빠름을 추구하는 속도가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쉽게 외면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고요한 응시와 삶의 내면화 보름달 입맞춤한다, 소금쟁이 잠든 호수. ― 김범렬, 「달빛 호수」 전문 김범렬 시인의 시조는 현실 사회의 역동적인 풍경과 도시의 긴장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선은 한편으로는 고요한 자연의 풍경과 사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내적으로 성찰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위의 시 「달빛 호수」를 통해 고요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다. 그리고 호수에는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반영되어 보인다. 시인은 이를 호수와 달의 ‘입맞춤’이라 표현한다. 충만한 보름달이 호수를 비추고, 호수는 온몸으로 달빛을 감싸 안으며 고요한 정경을 이루고 있다. 잠든 소금쟁이가 떠 있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고,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이다. 살아가면서 시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잔잔한 순간을 얼마나 마주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시 속에 한 폭의 풍경처럼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시간이 마치 멈춰 있는 듯하다. 이 시는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을 붙잡아 고요한 사유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은 짙붉던 장미꽃 한 송이 피죽도 못 먹은 듯, 본디 넌 사랑의 화신化身 여태 불 밝히지 못한. ― 김범렬, 「겨울 장미」 전문 장미는 열정과 사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시를 지닌 존재로서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피어나는 계절은 5월이다. 그런데 시 속에 그려진 장미는 ‘겨울 장미’이다. 피어나기 어려운 계절에 피어난 장미는 환영받지 못한 채 제 빛깔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지만 한때 “짙붉던 장미꽃”은 “피죽도 못 먹은 듯” 색이 바래 있다. 본래 장미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지만 “여태 불 밝히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누군가를 향했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뜻한 계절에 피어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추운 겨울 피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장미. 시인은 이러한 겨울 장미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과 고독, 기다림의 감정을 중첩하여 보여주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존재들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타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 과정을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음의 시 「비누」가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눈길 주면 또 줄수록 닳아지는 몸맨두리 문대면 거품 게운다, 꽃무지개 띄울 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부리는 몸 한결같이.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본다.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한 떠꺼머리 뉘 봐줄까. 웬일일까, 분내 살내 몸 냄새가 그곳에서 배어난다, 바람 부는 그날따라 몸 부푸는 몸피, 몸피. 빛 쏟을 짬도 없이 폭죽 펑펑 터뜨린 날, 눈이 번쩍 귀가 쫑긋 번갯불 불똥 튄 날. 업보라는 짊어진 짐 내려놓을 그때까지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을 터. ― 김범렬, 「비누」 전문 위의 시조는 비누의 특성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표현하고 있다. 비누는 사용할수록 닳아서 없어지지만,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꽃무지개 띄울 듯” 나오는 거품으로 사물과 삶을 더욱 깨끗하게 만든다. 비누는 자신을 소모하면서 삶을 더 환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사라져가면서도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하고, 오히려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보며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빛 쏟을 짬도 없이” 하얀 거품을 폭죽처럼 펑펑 터뜨리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업보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비누의 업보는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여 끝내 닳아 소멸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으며 세상을 좀 더 맑고 깨끗한 만들고자 한다. 인간의 삶 역시 비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의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되지만 그 과정 속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며 삶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유한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배려하고 헌신하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개인의 삶은 소멸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누군가의 삶을 더 맑고 빛나게 하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새로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대 사회에서 김범렬 시인이 견인한 현실은 시어가 지닌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구체적이면서도 간명하게 드러난다. 시를 쓰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기에 김범렬 시인은 오늘의 시대를 다시 응시하며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삶의 모습들을 찾아내어 경고와 위로를 건넨다. 탄주하는 여름 한낮의 풍경과 배달 라이더,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는 비누, 겨울에 피어난 장미와 적막한 호수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다양한 장면들은 시인의 성찰을 거치며 시조 특유의 리듬 속에서 의미로 충만해진다. 시인의 언어는 시인이 직접 삶을 체화하여 행간에 의미들을 담아냈기에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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