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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지션 | 2024년 가을호(제47호)

일상의 전개도― 임승유 『생명력 전개』(문학동네, 2024)

하혁진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제20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고, 계간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 등이 있다.

  전개도(展開圖, development figure)는 3차원의 입체도형을 2차원의 평면 위에 펼쳐놓은 그림이다. 예컨대 정육면체를 전개도로 표현하면 여섯 개의 정사각형이 십자가 모양을 그리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똑같은 입체도형을 서로 다른 전개도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인데1), 이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입체도형이 점과 선의 연결, 즉 ‘관계’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만 적어 두자. 똑같아 보이는 일상도 알고 보면 서로 다른 전개도를 가지고 있으며, 차이의 핵심은 주체가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임승유의 『생명력 전개』를 읽고 나면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혹시 알고 있었어?”라는 질문들에 쉬이 대답할 수 없게 된다. ‘나’의 ‘일상’을 ‘나’가 ‘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어려운 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루하루 되풀이되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는 “모르고 지내다가 만져보고 알게 되는”(「모두 도망이라도 간 듯 조용하다」) 것이 너무 많다.


어디에 있었어

부엌 책장 위 하얀색 바구니에

그 바구니라면 내가 어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서 올려놓은 것 그전에는 베란다 한구석에서 겨울을 났지 그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 그전에는 요즘엔 안 쓰는 그린 초크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쏟아낸 것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
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그녀는 거의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전문


  ‘알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일상’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익숙한 일상은 언제 낯설어지는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전에 본 기억이 없는 것처럼 감각될 때 낯설어진다. 예컨대 인용한 시에서 “하얀색 바구니”는 낯익은 사물이다. ‘나’는 바구니에 얽힌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역사 이전에는, 다시 말해 ‘나’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 그 사실을 마주할 때 바구니는 불현듯 낯설어지며 익숙함으로부터 멀어진다. 따라서 화자는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맥락과 인과, 즉 장면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임승유의 시에서 일인칭 화자인 ‘나’는 안다고 믿었던 일상을 모르게 되는 순간과 자주 마주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존재 역시 자주 의심하게 된다 – 조금 전 인용한 시의 제목은 그녀는 ‘거의’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았다’이다. 임승유의 시에서 일인칭 화자인 ‘나’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나’가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조차 불안하고 불완전한 기억을 가진 ‘나’다.


집에서 나왔는데 갈 데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엄마가 뭘 갖다주라고 심부름을 시켜서 그랬는지

어느 순간

그 집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니? 묻지 않고 그애 엄마가 나를 야외용 식탁으로 데려가 앉히고는

막 정원에서 따온 게 분명한 딸기 한 접시를 내놓았다. 같이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그애가 여기에 살았다. 양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에 딸기를 집어 먹었다. 딸기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나니 이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일밖에 남은 게 없어서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고 돌아나올 때

그애 엄마가 문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줬던 장면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나를 미치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그애를 만나러 다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이야기」 전문


  그래서일까. 무언가 했다는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하는 주체가 “문득 정신 차려보니”(「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 낯선 풍경 속에 놓여 있는 장면들은 임승유의 시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인용한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그 집 앞에 서 있었다”라고 말하는 ‘나’의 회상에는 중요한 정보가 빠져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니?”라고 묻지 않는 것은 “그애 엄마” 뿐만 아니라 시인 역시 마찬가지다. 요컨대 어떤 마음이 ‘나’를 “그애”가 사는 집 앞으로 데려갔는지는 시를 끝까지 읽어도 알 수 없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기 때문에 단조로운 기억들이 시가 됐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딸기를 먹고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적인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는 문장이 덧붙여짐으로써 시가 된다. 텍스트 안의 주체도, 텍스트 바깥의 시인도 알 수 없는 마음(“어떻게 하면 그애를 만나러 다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이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기억들에 새로운 긴장감과 가능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시의 제목이 ‘이야기’인 이유다. 임승유가 그리는 일상의 핵심은 보이는 장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있다.


  한편 이번 시집에 수록된 “이야기에는 한 사람 이상이 등장”(‘시인의 말’)하는 시가 많다2). 불안하고 불완전한 ‘나’의 기억은 ‘나’가 아닌 존재에 의해, 그 존재와 맺는 관계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배치된다. “한 사람은 모든 작업 과정을 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지만 망설였다. 한 사람을 움직인 건 두 사람이다”(「한 사람이 두 사람을 끌어들여 이틀에 걸쳐 해낸 작업에 대한 보고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게 생각났고”(「두 사람이」), “혼자 했으면 했다 하기도 뭐했을 겁니다”(「소설 읽고 나서 하는 청소」), “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종묘」)와 같은 구절들이 방증이다. 이번 시집에서 ‘복수의 존재’는 ‘생명력 전개’의 조건이다. ‘나’의 고정된 일상은 복잡다단한 ‘관계’에 의해 새롭고 다양하게 전개된다. 특히 그러한 전개는 일인칭 화자인 ‘나’가 시 속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빠져나오는 한 사람이 되기를 반복”(‘시인의 말’)하는 구조를 갖는다3). ‘나’로부터 시작된 시는 내내 ‘나’를 의심하며 끝내 ‘나’로부터 벗어나는데, 그러한 뒷걸음질의 보폭 사이사이로 비일상의 낯선 감각이 틈입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번 시집은 “저녁으로 뭘 해먹으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어둠을 밝히는 불빛」)는 게 가장 중요한 일처럼 느껴지는 시집이기도 하다. 만두, 미나리, 감자, 카레, 과자, 딸기, 두부, 찌개, 은행, 레몬, 오이, 설탕 같은 음식과 재료들이 빈번하게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이제 그만 와서 카레를 먹어”(「카레」) 같은 구절들, 즉 주체를 일상에 붙드는 묘사, 진술, 대사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임승유의 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의 조합과 비약을 통해서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하는 한편 “생활의 지긋지긋함”(「나오는 사람들」)에 강하게 밀착해 있다. 예컨대 낯선 여행지로부터 “뒷걸음질치며 풍경에서 빠져나온” ‘나’가 “남은 생애 내내 양치질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 「직접적인 경험」이나, “백조라는 잡지”에 “시 발표하기로” 한 ‘나’와 “엄마 집에 가서 커튼을 달”기로 한 ‘너’가 “재미있을 것 같아”라는 말을 두고 대치하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같은 작품에서 ‘시’와 ‘생활’은 멀어질 듯 멀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 다시 말해 임승유의 ‘(비)일상’이 특별한 이유는 생활의 중력과 무중력, 그 사이 공간에 시의 터전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일상은 충분히 낯설고, 주체는 밥을 먹고 이를 닦고 청소와 설거지를 한다.


레몬 한 망 사갖고 와서 베이킹소다 푼 물에 씻은 후 말리는 동안 유리병을 삶는 사람이라면 여름에 레모네이드나 하이볼을 마시려는 사람일 테고

레몬 한 망 사갖고 와서 침대에 쏟아놓고 양손에 하나씩 쥐어본다거나 레몬 옆에 레몬처럼 누워본다거나 레몬이 레몬 향에 휩싸이듯 몸을 둥글게 말다가 생각난 듯 레몬 하나를 들고 나와 창틀에 올려놓는 사람이라면

당분간 레몬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테고

너무 덥다며 창문을 다 열어놓고 레몬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레몬에게서 레몬을 떼어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잘 안 돼서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리는 것이다.

─「레몬」 전문


  인용한 시를 범박하게 삼등분하자면 ‘살기-되기-쓰기’ 쯤이 될까. 먼저 1연은 익숙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레모네이드나 하이볼을 마시”기 위해 “유리병을 삶는 사람”은 생활하는 사람이다. 다음 2연과 3연은 낯선 존재가 ‘되어보려는’ 사람의 이야기다. 레몬을 먹는 대신 그것을 쥐고, 그것 옆에 눕고, 그것처럼 몸을 둥글게 마는 사람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마지막 4연은 그 두 개의 합이다. “너무 덥다며 창문을 다 열어놓”은 모습은 1연의 “여름”과 호응하고, “레몬에게서 레몬을 떼어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는 모습은 2연의 행위들과 호응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살기’와 ‘되기’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쓰는 사람”은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린다. 일종의 시론처럼 읽히는 시를 다시 한번 범박하게 표현하자면 ‘일상의 정반합正反合’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요컨대 임승유의 시에는 ‘살기-일상’의 충실함과 ‘되기-비일상’의 예민함이 두루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무엇이 무엇을 지나 무엇이 되는”,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지나 아름다움이 되는”(「애니시다의 죽음」) 자리에 놓인다. 일상’正이 ‘비일상’反을 지나 ‘낯선 일상’合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의 시는 “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소설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있”(「두 개의 마음으로」)는 시이기 때문에, 생활과 시, 현실과 작품, 일상과 비일상 두 개의 마음이 길항하는 시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매력적이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무한에 가까운 관계로 채워진 일상은 결코 지루할 수 없다. 다만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살아가는 ‘나’가 있을 뿐이다. 4년 만에 나온 임승유의 신간을 읽고서야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보이는’ 일상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비일상을 발견함으로써 감각과 세계를 확장하는 작업은 지난 세 권의 시집에 걸쳐서 확인한 임승유의 특장이었는데, 그러한 저력은 이번 시집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여름은 여름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여름에서 벗어나며”라는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임승유의 일상은 일상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시인은 “모든 이가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남겨지고 버려진 것들을 “한번 만져볼까”(「상진 녹색 진실 바지」)라고 말하는 사람. 그 손에 닿은 (비)일상의 촉감으로부터 또 다른 생명력이 전개된다.


추천시 : 「두 사람이」 「레몬」 「애니시다의 죽음」

  • 1)예컨대 정육면체 전개도의 경우의 수는 총 11가지다.
  • 2) ‘시인의 말’ 뒤에 적힌 ‘이야기’라는 단어가 다소 생경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임승유의 시가 가진 독특한 ‘서사성’을 떠올리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임승유는 장면을 이야기처럼 다루는데, 그에게 장면은 곧 관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임승유는 보이지 않는 관계들을 발견함으로써, 고정된 장면에 새로운 긴장감과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복잡다단한 맥락을 살피는 작업이기에, 그 과정에서 임승유의 시는 또렷한 서사성을 띠게 된다.
  • 3)대표적인 예로 「감자 양식」, 「충북대학교」 등의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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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하혁진 말을 잃은 아버지들 ―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을 중심으로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계간 창작과비평 하혁진 광장아버지이미상성혜령예소연세대젠더부녀서사 2025
하혁진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계간 문학인 하혁진 윤은성유리 광장에서광장공동체동일성타자성연대시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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