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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인 | 2024년 가을호(제15호)

사라짐과 살아남 ― 『살 것만 같던 마음』(창비, 2024)

황선희 문학평론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 현대시를 중심으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공저로 다시 읽는 백석 시(2014), 아직 오지 않은 시―포스트휴먼 시대 시의 미래(2022)가 있다.

1. 끝없는 마음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언제나 좋을까. 산문집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이불, 2015)에서 이영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오류지만,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하는 것은 어떤 다른 능력일 것이다.”(244) 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말하는 이들과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이들 사이에서, 숱한 오류와 폭력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종종 사라진다. 때로는 오류의 생산자가 되기도 하고 폭력의 가담자가 되기도 하면서.

이영광은 정확한 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말하는 시인이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언어는 오류와 낭비의 틈입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을 줄이고 줄여 거대해지는 법을 안다(“나는 나를 백만 분의 일로/줄일 수 있다/그래서 이렇게,/거대해질 수 있다”(「촛불」, 끝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8)). 동시에 그는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부정확한 것에 대해 더 말하기 위해 지레짐작하거나 섣부른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시인은 가장 명료한 것을 다룰 때조차도 기꺼이 떨거나 아프면서, 우리가 모를 법한 것들과 모를 수밖에 없는 것들 사이를 건너왔다. 말문이 막힐 때마다 매번 새 말을 탐색하면서.

경험보다 먼저인 건 마음일 것 같다”(왜냐하면 시가 우리를 죽여주니까, 이불, 2020, 9)라고 말한 적이 있기도 한 시인은, 여덟 번째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에서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마음의 모습과 자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르는 어떤 이들에게 끔찍한 일이 생겼다는 말이 들려오거나 아는 누가 큰 병에 걸렸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나 싶다가도 무너지는 마음 밑에” “어두운 마음이 희미하게 피어난다. “다 무너지지는/않던 마음”, “어둡던 기쁜 마음”, “살 것만 같던 마음”(「어두운 마음」)이 말이다. 더 이상의 슬픔과 고통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그 마음은 나를 보호하면서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날벼락 앞에서도 살 것만 같던 그 마음을 시인은 같이 살기 싫던 마음, 그러나 같이 살게 되던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는 끝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 이내 새어 나오는 다른 마음이 있다.

이영광은 얼음 위에 피운 모닥불처럼/물을 끄며 타는/불처럼//미워하는 마음을 노래하면서도 이내 둥둥 물 위를 떠가는 얼음장들,/꺼진 불을 만져주는 봄볕처럼/물에 젖는 불처럼” “미워하는 마음을/미워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미워하는 마음을」). 불같이 누군가를 미워했다가도 그 마음이 멋쩍어지는 순간이 있다. 애초부터 미워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마음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기도 해서 이리저리 뻗치는 마음을 다스리기란 쉽지 않다. 이영광 시의 는 끝없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을 지녔다가도 미워하는 마음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품을 수 있다. 그 마음의 결과 겹은 조금도 단순하지 않다.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2. 사라진 것과 사라질 것

 

이영광은 이미 사라진 것들과 이내 사라질 것들을 성실하게 노래해 왔다. 그것들의 사라짐이 덧없지 않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해 왔다. 그렇게 마음을 뻗으며 시력(詩歷)을 축적해 오는 동안, 그의 시세계에는 어떤 겨울의 잔흔이 남았다. 51편의 시를 부 구분 없이 엮은 이번 시집에서 그는 아픈 엄마를 얼마로/계산한 적이 있었다라거나 얼마를 마른 엄마로 외롭게,/계산한 적도 있었다”(「계산」)라고 고백한다. “오늘은 조시를 쓰고/내일은 축시를 써야”(「제자리」) 하는 자리에서 빛이 안 보일지언정 그게 무슨 대수냐고 낮게 말한다.

그의 시는 산별노조가/무언지 몰라/삼별노조인가보다/별 세갠가보다”(「별 세개」) 했던 김용균씨 어머니의 말을 빌려와 전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과 싸우지 않고/무엇과 싸운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과/사랑하지 않고, 대체 무엇과 사랑한단 말인가”(「나의 인간 나의 인형」) 묻기도 한다. 영안실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해 격리된 상주(喪主)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며(「밀접 접촉자」) “팬데믹 지나간 시절, 볕 좋은 서울 거리에서 그새 부음 몇줄 달랑 남기고 떠나버린 이들”(「마스크들」)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쓰면서도 는 아직도 자신이 인간이 못 되었다고 하며 그래서 어머닌 여태 나를 낳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영광의 시적 주체들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 사라진 자리에 서서 흐르는 시간을 감당한다. 사라진 것과 흐르는 것은 삶의 곳곳에서 섞인다.

 

내가 우는 건 좀 하지

 

낮부터 저녁까지 일하다가

밤이 깊으면,

다 큰 어른이나 된 듯

술병을 딴다

 

새벽에 잠들어 아침 늦게 일어난다

스물 때도 이랬는데

조금만 마시거라,

나무라기도 달래주기도 하던 말씀이

이젠 없고

어린 아침부분

 

어린 아침을 살아내는 이 시의 시적 주체는 그립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육친의 빈 자리는 다 큰 어른인 체하는 를 오롯이 혼자이게 한다. 그는 육친과 함께였을 때처럼 새벽에 잠들어 아침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나무라기도 달래주기도 하던 말씀, ‘이젠없다. 이름 없고 눈에 잘 안 띄는 그냥 넷째 손가락으로 살아온 그에게도 약처럼 약속처럼 남은 생은/당신과 나아보고 싶어요”(「무명지」) 중얼거린 시간이 있었다. 「내 인생 편안해에서 는 자신이 떠나보낸 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들 눈치 보고 걱정하느라 얼음장 같고 살얼음판 같았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는 다들 가시고 나니/편안해”, “다들 안 계시고 나니/홀가분해라고 말한다. “얼음 걷힌 강물 위처음걸으며, “검푸른 수심을 부들부들” ‘혼자건너며 그는 다시 한번 내 인생 홀가분해/아주 편안해라고 거듭 말한다. 인생이 편안해졌다는 고백은 나는 근심할 후사가 없고 당신은 내가 매달렸던/마지막 사람이었으므로/이제 나는 정말 끝이 나갑니다”(「당신의 끝」)라는 토로와 만나 그가 혼자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직시하게 만든다. 사라진 것들 때문에 는 곧 사라질 것만 같다.

 

당신과 나는 이제 끝입니다 우리는 정말

끝났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자연처럼,

어제는 강원도 어느 산간의 물소리 곁에

오늘은 저세상 같은 제주 상공의 구름들 위에

내일은 곯아떨어졌다 깨어 다시 쥐는 술잔에

나타나고 나타나고 나타납니다

나는 그것을 끝없는 끝이라 부르고

끝나가는 나를 끝나지 않는 나라 자연처럼 믿으며,

눈을 떠 당신의 끝을 온 하늘 가득 펼쳐놓고

눈 감아 당신의 끝없는 끝을

환한 어둠 속에 가둡니다

당신의 끝부분

 

그러나 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는 이미 닥쳐온 이별의 뒷모습에 대고 당신과 나는 이제 끝입니다 우리는 정말/끝났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고 나타나고 나타나는 당신끝없는 끝을 믿는 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인칭의 종말을 일인칭의 종말과 아울러 생각하는 동시에 이인칭의 영원과 일인칭의 영원을 나란히 상상한다. 미워하는 마음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연결하고 당신의 끝없는 끝을 환한 어둠속에 가두면서 이영광의 는 이렇게도 말한다. “너는 작으니까 많은 걸/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너는 없는 것이니까/나타나지 않아도 좋다/분홍 보라 꽃등을 켜고/이제, 나타나도 좋다”(「등꽃 아래서」)

이토록 곡진한 이별을 거쳐 살 것만 같던 마음은 다르게 읽힐 가능성을 획득한다. 그 마음은 저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떠난 이를 살아가게 하는 탈상(脫喪)의 의식 앞에 도달한다. 이영광은 기본적인 상식과 가치가 허물어져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상한 공동체에서, 그 일원으로서 저 거대한 공동(空洞)을 간파하고 응시해 온 시인이다. 그의 시적 주체는 오류도 낭비도 없이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 사라질 것들을 돌봐 왔다. 이제 그는 또 다른 모양의 상실을 끌어안으며 개별성과 보편성의 영역을 한층 확장해 나간다. ‘혼자남아 줄어든 것만 같은 모든 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 방식으로 말을 건넨다.

 

 

3. 마침내, 살아날 것

 

사라질 것을 돌보며 눌러쓴 것 같은 일련의 시편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을 골고루 톺아본다. 기왕의 시집에서 그가 꾸준히 보여주었듯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코로나를 비롯해 병과 노화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이번 시집에서 그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노인들을 노래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영광 시의 또 다른 개성이 된다. “그 사람을 업고 다니고 품고 다니며/주인처럼 병아리처럼/눈물처럼 모셔라/노인과 살아라 버리지/말아주세요,/노인에게 빌어라”(「노인이 온다」)라는 구절은 노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한다. 돌본다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노인과의 동행은 심지어, 내가 그를 버리지 않았음의 결과가 아니라, 그가 나를 버리지 않고 견디며 함께 살아주었음의 증거일 수 있다. 그러니 이 시인의 시적 주체는 견고한 파수꾼이라기보다는 무명의 아픈 손가락인 것이다. ‘당신이 끝났으니 덩달아 끝나갈 수 있는 존재, 태어나는 인 존재. 이영광의 는 이렇게 자신을 깎고 갈며 또 살아낸다.

 

그애는 부모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집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사랑하는 부모님이 고생하신다고

원고지에 적었다

어젯밤 부서진 집이 아침까지 치워지지 않았는데

사랑이라는 시제가 나오자

입에 침이 고이고 낯이 달아올랐다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니,

그 말이 좋았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고생하는 어른이 될 고생하는 어린이

그애는 침 묻혀 꾹꾹 눌러 적어도

자꾸 지워질 것 같은,

집에는 못 가져갈 그 말이 좋았다

아는 말, 배워서 다 아는 말,

이해되지 않는 그 말이 좋았다

사랑―1970년대전문

 

당신의 끝이 시종일관 끝에 대해 말하면서도 어느 시보다도 강렬하게 끝없음을 노래했다면, 「사랑―1970년대는 없는 사랑을 공들여 적음으로써 사랑 있음에 가닿는 시이다. ‘그애는 사랑하는 부모님이 고생하신다는 말과 고생하는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꾹꾹 눌러 적으며 집에는 못 가져갈 그 말을 가만히 좋아한다. 사랑을 꾹꾹 눌러 적는 그는 고생하는 어른이 될 고생하는 어린이이다. 부모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애의 집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어젯밤 부서진 집은 아침까지 치워지지 않았는데,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이상하게도 입에 침이 고이고 낯이 달아오른다. 있는 것을 쓰는 것보다 쓰는 것을 있게 하는 편이 때론 더 빠를 수도 있다.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니,” 반색하는 그애에게 사랑이란 배워서 다 알지만 이해되지 않는말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침 묻혀 꾹꾹눌러 적는 행위가 아니고 또 무엇이랴. 사랑을 눌러 적듯 시인은 가는 봄과 오는 봄을 써 내려간다.

 

봄은 죽고, 봄은 온다

먼 훗날처럼

먼 옛날처럼 온다

봄은 죽고

봄은 태어났다

죽은 봄은 살아간다

붉고 녹고 푸른 곳,

꽃 피고 지고 새 우는 곳,

어둡기만 한 빛 속으로

가도 가도 환하기만 한

어둠 속으로

봄은부분

 

봄은 죽었다가도 다시 온다. 그처럼 이영광의 시적 주체에게 시는 먼 훗날처럼 먼 옛날처럼 온다’. 죽어야 올 수 있고 죽어야 태어날 수 있다는 역설은 죽은 봄을 살아가도록만든다. 끝없는 마음은 빛이 어둡거나 어둠이 환해도 끝의 끝에서 다시 태어난다. 시집 말미에 수록된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자신이 시 쓰는 시늉을 해온 것 같다고 고백한다. 시는 크고 시인은 작다 보니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조금씩 사라져간다고 느끼지만 이 봄에도 어느 바람결에나 다시 살아나는 것들이 많다라고 적는다. 사라질 것 같다가도 되살아나는 것들, 사라졌다가도 살아나는 것들을 기꺼이 끌어안으며 시적 주체는 어둡기만 한 빛 속으로혹은 가도 가도 환하기만 한/어둠 속으로나아간다.


    여덟 번째 시집의 들은 마음을 울고 웃기도 하고(「희망 없이」) 자라서 사납고 굳센 죽음들을 키”(「어느 양육」)우기도 하고 나는 늙어가서 요양병원 구석의/조그맣고 검은 치매 노인 될까”(「내 마음은 나도 몰래」) 남몰래 짐작해 보기도 한다. “헐한 곳에 있을 때면 다 같이, 조금 덜 헐한 느낌이든다며 긴 줄 서는 데 동참하기도 하고 나는 대책도 무대책도 없는데, 시는 늘 펄쩍펄쩍 뛰며 놀자고 보채는 아이 같”(「펄쩍펄쩍 뛰며 놀자고 보채는」)다면서 계속해서 시를 쓴다. 사라져가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끝끝내 졸아들지 않는다. 막스 피카르트는 사랑은 을 통해서 구체화되며, 말을 통해서 진리 위에 서게 되며, 말을 통해서만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된다고 말했다(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역침묵의 세계, 까치, 2010, 111). 이영광은 사랑이라는 말을 적는 그애의 곡진함으로, 미지의 것을 지레짐작하지 않는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와 이곳에 섰다. 그의 말은 여전히 건재하고 한결 원숙하다. 사라질 것만 같던 어둑한 마음에서 빛나는 말이, 그리하여 비로소 작고 작은 것이 뻗어 나온다. 살 것만 같은 사랑이, 사랑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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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황선희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계간 딩아돌하 황선희 한국현대시시계간평광장정치연대공동체정동걱정 2025
하혁진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계간 문학인 하혁진 윤은성유리 광장에서광장공동체동일성타자성연대시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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