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청색종이 2024년 여름호(제12호)
청소년이라는 서발턴과 새로운 영어덜트 시 : 청소년 문학의 현재와 미래
청소년은 말할 수 있는가?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와 학교는 중요하지만, 없어야 할 존재다. 니콜라예바는 서구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 혹은 교사를 포함한 ‘부모 대리인’은 인물을 부정하거나 방해하는 무능한 존재로 등장한다면서 이것이 아동청소년 인물을 성장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고통”이자 “불가피한 불행(inevitable evil)”의 무대라고 표현되었던 ‘학교’는 대체로 부조리하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학교는 서구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대개 주변적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1)
그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와 학교의 존재감은 매우 크며 근대 가족, 제도, 학교 시스템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는 유교 사회부터 내려온 사회적 이데올로기, 오랫동안 한국에서 강력하게 작동해 온 국가주의, ‘입시’라는 목표 하에 청소년의 삶이 교육제도에 포섭되는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로 인해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은 오랜 시간 보수성을 견지해 왔고, 교양 담론적 성격도 강했다.
한국에서 1930년대 이후 중산층 핵가족이 이상적 가족 모델로 제시되며 아동은 ‘보호’의 존재로 위치2) 지어졌다. 아동이 가족 내 위계에 맞게 ‘피보호자’의 위치로 배치되는 과정에서 소위 “어린이다움”이 고착되는 과정을 거쳤고,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고 규제하며 사회와 국가의 규범을 전수시켰다. 공교육은 국가의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와 공조해왔는데, 청소년 문학 역시 이 과정에서 “청소년다움”을 형성했다.3) 이로 인해 한국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가족, 학교가 문학의 전면에 드러나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고 ‘어른’들이 개인의 성장을 돕거나 가치관이 형성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거나 작품 속 주체, 화자가 되곤 하였다. 어린이 청소년이 화자인 경우에도 사실상 “어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말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2024년인 지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청소년 독자의 정체성, 출판의 지형도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오세란은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청소년소설의 형식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청소년다움”을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위 ‘청소년다움’의 보수성과 대립하여 “언뜻 진보 담론을 펼치는 듯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조차 일종의 ‘청소년소설다움’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4)
이융희는 청소년 소설이 2000년대 초, 그림책과 판타지 동화를 읽은 어린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갑작스러운 입시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는 비판적 인식 하에 등장했으므로 사실 청소년의 현실을 돌아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소위 ‘어른’이라고 불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화자 집단”이 기성세대가 만든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결국 문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을 강화한다고 비판5) 했다.
오세란은 근대 사회가 형성될 때 요구되었던 단일한 정체성이나 성장, 사회화 같은 가치가 이제는 자신의 다양한 내면을 깨닫는 것으로 변화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근대 사회에서 청소년은 미성년이자 주변인으로서 어른들이 원하는 서사를 수용해야 하는 존재였다면 이제는 패턴화된 성장, “온건한 경청자로의 유도”가 공식처럼 되어 버리는 문학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6)
그렇다면 청소년이라는 ‘서발턴’은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스피박 식으로, 이렇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인지적 구도를 통해 청소년을 재현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 말하는 것을 듣자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청소년은 기존과 매우 다른 존재들이며, 2010년대 이후의 시대의 급속한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랐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지금 여기’의 새로운 세대의 경험과 인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는 어떤 시대였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침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이중적 위기를 겪으며 세계 질서가 전진의 행보를 멈추고 뒤로 물러서는 ‘거대한 후퇴’7) 라고 요약할 수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이를 악화시켰다. 고립과 정체(停滯), 우울과 불안의 팬데믹을 겪으며 사회 곳곳에 위기가 심화되었다.
2010년대부터 2023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사람들을 무력감과 공포로 밀어 넣었고, 사회는 양극화되고 사회통합은 약화되었다. 많은 분야에서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며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퇴보가 이루어지고 사회의 부조리함은 깊어지지만 개인의 무력함은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감시자본주의8) 가 일상을 장악해 간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인구감소, 환경파괴와 이상기후, 연금위기,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위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중위기 앞에 놓인 현실 속에 있다. 칼부림 사건과 같은 이상동기 범죄가 불안을 격화시키는 등 사회의 병적 현상들을 지켜보고,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는 가운데 지금의 청소년들이 꿈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통계결과로도 드러난다. 2020년 학생 희망 직업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중등 대상 조사임에도 1위부터 10위까지의 희망 직업 중에는 교사나 군인, 공무원 등의 안정적인 직업, 의사와 같은 고소득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9) 자신의 내적 동기나 희망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한 시대에 안정성 높은 직업을 선택하라는 사회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 휴대폰 소지로 상시 연락이 되고 보호자가 자녀의 위치 추적, 동선 파악까지 할 수 있게 된 기술 발전이 그들을 옭아맨다. 또한 저성장과 계층 사다리 붕괴, 대졸자 증가 등으로 인한 기회의 감소, 높은 청년 실업률 때문에 경쟁이 심화된 현실 속에 놓여 과도한 선행학습 요구와 그에 따른 스케줄링에 소진되며 성취 압박에 시달린다. 스틱스러드와 존슨은 지금의 부모들이 자
녀들에게 사소한 일들의 취사선택부터 하루 일과의 계획, 심지어 장래희망까지 간섭하는 ‘과잉육아’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지나친 통제와 과열되는 경쟁, 게임과 SNS 중독, 불안과 스트레스로 인해 아동청소년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다양한 임상 사례, 연구를 통해 보여 주며 최근 문제시되는 청소년 번아웃과 우울증 등의 문제를 ‘삶의 통제력 부재’에서 찾는다.10) 가혹한 입시현실 속에 놓인 한국에서 이러한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그러나 현실과 불화하며 대응해온 문학의 방식으로, 지금의 아동청소년아동청소년 문학은 다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 그것을 넘어서 보려 한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의 아동청소년들은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다. 디지털원주민이자 포노사피엔스로 불리는 세대이며 소위 ‘디지털이민자’이거나 아날로그 세대인 ‘어른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이 경험과 경륜을 통해 줄 수 있는 지식과 정보, 지혜보다 더 많고 더 구체적인 것들을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부터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연장자의 지혜에 의존 하기보다는, 오히려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뒤처진 기성세대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잘 살아갈 방법을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만약 기성세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낡은 구태의 방식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강요한다면 강한 저항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소위 ‘세월호 세대’이며, 미투와 세월호 사건 등을 겪으며 ‘어른’들이 신뢰할만한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였고,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며 사회의 구태와 민낯들이 드러나는 것을 목도했다. 가족과 사회가 충분한 보호망이 되어 주지 못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여실히 경험했다. 그리고 학교가 그리 견고한 제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팬데믹 시기의 유연한 학사제도,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는 교실의 풍경을 많이 바꾸었고 곧 실시될 고교학점제는 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어른’을 지워 버린 빈자리에 홀로 서서, 청소년들은 이제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청소년 문학의 변화
니콜라예바는 ‘성장기’란 아동문학의 근본적인 내용11) 이라고 말하며 아동문학을 거울-문학으로 이해할 때 사회를 비추고, 인간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동청소년 문학은 어떤 거울이 되고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대로 비추는 평면거울이 아니라.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는 다면체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제도권 국어/문학 교육 하에서의 읽기가 ‘주제 찾기’의 강박에 시달리게 만든 까닭에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주제’는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다면적 해석이 가능하여 단일한 주제를 갖는 대신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다른 주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확고한 주제의식 아래 의도된 교훈의 프레임을 제시하는 대신, 다양한 관점과 틀을 벗어나는 사고를 권한다.
또한 ‘사회를 비추는’ 기능에 있어, 거울의 선명도가 확연히 높아졌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최근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지금까지 금기시되어 온 청소년의 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기도 하고, 다문화, 디아스포라, 페미니즘, 성 소수자, 빈부격차 등을 심도 깊게 다루는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최배은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아동청소년 문학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하며 2016년 10월 미투운동이 시작된 이후 201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아동청소년 문학장에 있었던 페미니즘에 입각한 작품비평과 토론에 주목12) 한다. 평론가들은 “동화를 쓰는 여성작가, 페미니스트 작가”13) 라고 선언한 이현의 작품이 여성의 욕망에 대해 고찰하고 『그날 밤 우리는 비밀을』(우리학교, 2018)에서 다섯 명의 여성작가가 ‘몸’이라는 키워드 하에 십 대 여성 청소년을 탐구하는 것에 주목했다. 청소년소설은 ‘스쿨미투’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교사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두 소녀의 용기』처럼 근래 일어난 실제 사건들을 환기시키게 되는 리얼리즘적 방식으로 스쿨미투의 현장을 보여 주기도 한다. 국립극단 어린이. 청소년글연구소가 개발한 창작 희곡집 『여학생』(배소현 외, 도서출판 제철소, 2017)에서처럼 “여성청소년의 욕망과 불편을 폭로하고 들려” 주기도 한다.
청소년에게 허용되는 이야기와 그들이 실제 즐기는 이야기 사이의 간극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청소년들의 현실과 그들이 원하는 바를 ‘허용된 청소년 문학’이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공적으로 발화되지 못한 욕망이 이중적이고 폐쇄적인 그들만의 장에서 표출되는 현상이 가져오는 문제14) 도 존재한다. 최배은은 웹 플랫폼 등에서 청소년에게 제공하는 이야기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허용하는 이야기 간의 차이가 커질수록 유해한 콘텐츠로부터 청소년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자신들이 향유하는 이야기의 작품성을 온당하게 인정받지 못한다면서 2019년 8월 포항의 한 중학생이 라이트노벨을 읽다가 교사가 ‘야한 책’을 읽는다며 급우들 앞에서 체벌하자 투신자살한 사건을 언급하고,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하고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제대로 비평하는 일이 긴요15) 하다고 강조했다. 김지은도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소비자인 아동청소년이 독자로서 느끼는 책에 대한 고민이나 소감 등이 생산자인 어른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고, 생산자 역시 자기 작품이 아동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확인할 수 없기에 아동청소년 문학평론이 필요하다면서, 아동청소년이 느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어른들이 없는 사이에 어른들로부터 해방됐던 순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동청소년 문학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6)
일반적으로 청소년 문학은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여겨져 왔으나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무거운 주제의식, 핍진성 강화,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며 동시대를 호흡하고 진화해 나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문학과 청소년 문학 간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이는 청소년들이 관심을 갖는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이며, 실제의 청소년들이 변화한 까닭이기도 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작금의 청소년들이 기존과 매우 다른 세대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멀티미디어와 폭발하는 데이터, 과잉 소통, AI가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고 2010년대 이후의 현실을 경험하며 자랐다. 기존의 청소년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성경험 평균연령도 해마다 낮아지고 있고 디지털성범죄가 확산되며 n번방 사건처럼 청소년이 피해자에 포함되는 사건들도 증가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일어나는 사이버폭력에도 노출되어 있다. 자연히 그들이 느끼는 욕망, 문제의식, 불안의 양상도 변화하게 된다.
청소년 인권행동모임 ‘아수라노’,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위티’, “누구나 스스로 위기를 말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기후 운동단체를 표방하는 ‘청소년 기후행동’과 같이 사회변화를 위해 직접 참여하는 모임이 생기고, 청소년 활동가들이 증가하는 것도 직접적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싶은 청소년들의 욕구가 증대되었음을 드러낸다.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그간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도 폭넓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성소수자의 사랑을 무겁게 그려낸 『오, 사랑』(조우리, 사계절, 2020), 퀴어-되기의 서사를 담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이필원, 사계절, 2021), 청소년 임신과 십대 미혼모를 다룬 『두 번째 달, 블루문』(김고연주, 창비, 2017)과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 그동안 청소년 문학에서 금기시되었던 주제를 진지하게 정면 돌파하며 다루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세란의 지적17) 처럼, 미성년인 아동청소년들에게 비극적 세상의 전망을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없어 청소년 문학이 인간과 세상을 성찰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순간 문학 정신이 부재한 자리를 당위적 교훈으로 메꾸게 될 위험이 발생한다.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이를 과감히 벗어나 사회의 부정성을 그대로 보여 주려 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이미 세계의 비극성에 눈뜨고 있고, 실제로 많은 문제가 청소년들의 삶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발생되며 경험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 문학에서 당사자성이 높아지고 있음도 다수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청소년 문학은 “독서생태계, 사회문화 지형도, 청소년독자의 위상과 밀접히 소통하며 변화를 거듭”18) 한다. 따라서 이 모든 변화들을 폭넓게 살펴보아야 변모양상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작가군의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문학의 작가군은 전보다 넓고 다채로워졌으며 신인 작가들도 대거 등장했고, 일반문학과의 구분도 희미해져 더 다양한 작품이 창작될 수 있게 되었다. 청소년도 여러 경로를 통해 쉽게 자신의 글을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동청소년들이 자신이 소비하는 콘텐츠에 대한 비평과 감상을 공유하기도 쉬워졌다.
실제 청소년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곳도 많아졌다. 국내 최초로 ‘어린이 심사위원제’를 도입한 스토리킹, ‘청소년들이 직접 선정하는 청소년 문학상 프로젝트’(청문상 프로젝트)와 같이 아동청소년들이 직접 후보도서를 읽고 선정해 심사하는 문학상들도 늘어나고 있다. 스스로 읽고 싶은 콘텐츠를 결정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아동청소년은 능동적인 소비주체로 등극하게 되었고 청소년독자의 위상은 확연히 변모되었다.
청소년들에게 청소년의 언어로, 청소년들의 니즈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플랫폼인 북틴넷 (bookteen.net)과 같은 곳들도 늘어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읽고 싶은 주제나 내용을 담은 책을 찾아보고, 원하는 책을 요청하기도 하며 관심 있는 도서를 SNS에 담거나 공유할 수 있다. 북틴넷에 공개된 소개글에 따르면, 청소년은 도서 큐레이션의 모든 이미지(포스트와 썸네일)를 만들고, 게스트 큐레이터로 책을 소개할 수 있다.
그간 한국 청소년 문학에서 “‘온건한 경청자’가 목적화되었”19) 던 이유는 오세란의 지적처럼 청소년 문학이 교과서에 거의 실리지 않는 제도권 국어교육과 청소년 문학의 괴리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김은하의 의견처럼 외국과 비교해서 우리 교육과정에서 자기 서사 쓰기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20) 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서사화하고, 자기 생각을 직접 발화하는 글쓰기를 시도하는 예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문학장에서 청소년은 어떻게 새로운 읽기와 쓰기의 주체가 되어 가고 있을까?
영어덜트 시와 새로운 주체들
청소년 문학에서 그간 시는 사실 잘 다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작가’는 친숙해도 ‘청소년시작가’는 낯설게 느껴진다. 청소년 문학=소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창비청소년 문학상’은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미발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창비와 카카오페이지가 함께하는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역시 소설만을 대상으로 한다.
청소년 문학은 경계인으로서의 ‘청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청소년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관점과 이해 가능한 미학적 형식으로 풀어놓은21) 것을 의미한다. 청소년 시도 이러한 개념 설명 속에 충분히 포함되나, 청소년 소설은 2000년대 이후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데 비해 청소년 시라는 장르는 여전히 낯설고 청소년 시집은 드물게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금씩 청소년 시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조짐이 보인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높아지면서 감정과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 자기만의 표현과 언어로 발화할 수 있는 시 장르에 대한 선호가 생기기 시작했다.
청소년이 주로 10대까지를 의미한다면 영어덜트는 성인기 전반의 사람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제 청소년 문학과 성인문학의 경계가 전보다 흐려진 현실 속에서 ‘영어덜트 시’라는 표현이 ‘청소년 시’보다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청소년 시집들이 기성시인들이 청소년을 위해 쓴 것들인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 청소년 시인들이 낸 시집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한 예인 김소희의 『열여섯 팔레트』(지식과감성#, 2023)는 실제 열여섯 살인 시인이 쓴 청소년 시집이다. 열여섯 소녀의 불안, 우울, 기쁨이 진솔하게 표현된 시집에는 청소년기를 실제로 관통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으로 본 세상이 색깔 이미지와 함께 펼쳐져 있다.
한국의 공교육과 입시 제도는 교실을 매우 억압적으로 만들고, 학생들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성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정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성인초기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곤 한다. 이는 계속 누적된 문제가 되며,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고통받는 20대가 5년 새 각각 127%, 86% 폭증했다는 심평원의 통계22) 에서도 드러나듯 우리 청년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열여섯 팔레트』는 청소년 자신이 시적 주체가 되어 자신의 심리와 상태를 스스로 돌아보는 시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인 자신도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급하게 움직이는 시간에 끌려다니면서 허겁지겁 살다 보니”(4쪽) 일어나게 된 일들을 담담하게 되돌아보고 시에서 자신의 감정에 색깔을 붙인다. 행복은 초록색, 불안은 보라색, 우울은 파란색, 희망은 노란색이라는 식이다. “바닷속 물고기들이 행복해 보여도/결국 모두 상어에게 잡아먹히고 말걸// 나는 바다로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여기가 편해/ 가만히 있어도 밥을 주고/ 가만히 있어도 깨끗한 물로 바뀌거든// 나는 바다로 가지 않을 거야”(「어
항 안 물고기」)라고 좁은 시야 안에 머무르며 자발적으로 미래의 가능성들을 수거해 버리는 삶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내 그림을 완성할 수 있기를/ 나 말고도 세상의 모두가 그렇기를”(「열여섯 팔레트」)하고 기도하며 경쟁을 넘어 “나 말고도 세상의 모두”를 생각하며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살되 연대를 모색하려는 자세를 보여 주기도 한다.
영어덜트 독자들의 시에 대한 관심도 전보다 높아졌다.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성질을 지닌 정서의 잠재태이자 정서적 이미지”23) 인 ‘정동’을 담아내거나 찾아보기에 적합한 장르가 바로 ‘시’이며, 독자들은 시를 통해 스스로를 더 이해할 수 있고, 내면의 감정을 발산할 수 있다. 시인이 남김없이 말하지 않고 남겨둔 빈자리에 자기 경험과 감정, 상상력을 채워 넣고자 하는 영어덜트 독자들이 확연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20대 독자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각종 지표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최근 시집 구매 통계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20대 독자의 약진이며, 예스24 집계 결과를 보면 최근 6년간 시 종합 분야 및 한국 시 분야에서 전체 구매자 중 20대 구매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시 종합과 한국 시 분야의 20대 구매자 비율이 2018년 7%대와 비교했을 때 2023년 14%대로 2배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24) 이는 청소년들이 20대에 진입하며 시집 구매 독자층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위 집계 결과상 2023년 한국 시 20대 베스트셀러에서는 2010년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대거 상위권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시 분야의 중요한 독자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20대가 세대적 공통분모를 가진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경험과 감정, 신선함에 공감하고 몰입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1세기의 변화와 사건들은 그 이전 세대와 잘 겹쳐지지 않는 지금의 영어덜트들의 특성을 형성했고, 그들은 기존과 다른 경험과 감각,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이 처해 있는 시대에 대한 동세대적인 공감대를 원한다.
이에 따라 영어덜트들의 고민과 처해 있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지영 시집 『최고는 짝사랑』(쉬는시간, 2023)은 쉬는시간 청소년시선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미 청소년시집 『넌 아직 몰라도 돼』, 『해피 버스데이 우리동네』 등을 펴낸 바 있는 신지영 시인은 이 시집의 42편의 시를 통해 다양한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재기발랄함, 명랑함, 귀여움 대신 이 시집 속에 불안과 두려움, 무기력이 가득하고 쉽게 위안이나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이 시집의 청소년들은 무기력해 보인다. 그들은 억압되어 있거나 붙들려 있고 정체되어 있다. 그들은 연약해서 “손으로/ 꾸욱/ 누르고// 발로 살짝/ 짓이겨도/ 뭉개진다// 참 쉬워/ 너 같은 아이”(「잎」)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냉혹해서, “여름은 남의 탓/ 차가운 비명이 도로 위에 익어” 가고. “미처 건너지 못한 고양이 한 마리/ 무늬처럼/ 눌려 있다// 썩기 전에 말라붙어 버린 눈알 위로/ 길 잃은 파리들이 내려앉는다”(「한심한 여름」)고 묘사되는 끔찍한 장면이 그저 ‘한심’하게 치부된다. 그러나 죽은 고양이를 보며 청소년 시적 화자는 “자라지 못하는 것들에게 마음을” 준다.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멈춰 있는 중”(「모범수」)이기 때문이다.
“무엇도 망치지 않고/ 누구도 아프지 않지//아무도 상처 입지 않는 사랑/ 최고는 짝사랑!”(「최고는 짝사랑」)이라는 말은 사실 ‘상처 입히고 망가뜨리는 사랑’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반어적 표현이다. 한국 사회의 아동청소년들은 많은 것들에 속박되고 입시 제도 안에 갇힌 채 시스템 안에 규율된 존재들이다. 이 시집 속 아동청소년 인물들은 부조리, 방임,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아래 놓여 있고 무의미하거나 억압적인, 때로 폭력적인 일상 속에 멍들고 상처 입은 모습이다. 이 시집의 2부 “파벨라의 고양이”에서는 아이들은 안전장치 없이 “파벨라(브라질의 빈민촌)”와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나는 깨진 아이//누구도 붙여 주지 않았다.”(「깨진 아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삶은 “뭉개진다는 거 참 쉽더라 (…) 이리저리 치이다/ 속이 다 터져버려/ 뭉개진 내가// 쓰레기통에서 누군가 버린 하루가 썩어가는지/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벌레들이 몰려든다”(「내 자리는 어디에」)는 식으로 그려진다. “세상이// 뺑글/뺑글// 돌아/ 돌아// 작은 방에 한데 엉켜서// 마구/ 마구를 맞은 것처럼”(「빨래」) 어지러움을 느끼며 “어느 날은 나보다 부쩍 커져서/ 언제나처럼 표정은 숨기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 “나보다 더 나같은 어둠”(「그림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문제 없다고// 거친 말처럼/ 나 세상에게 달려갈 뿐인걸”(「말 있는 말」)이라고 말하며 삐뚤어져도, 어긋나서도, 망가져서도 자라난다. 신지영 시인은 시집 끝의 산문에서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벌어진 채로 흉터가 되지 못해도 아이들은 자신을 키워낸다.”라고 쓴다. 미화되지 않은 사실적 고통, 날것의 불안과 어두운 현실, 두려운 미래가 그들이 ‘성장’ 과정에서 마주치는 현실이며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
지금의 영어덜트 독자들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소극적 독자가 아니라 시가 창작되는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최근 독자들이 시를 향유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는데, 이 역시 20대 독자들의 증가와 관련된다.
시를 자기 방식으로 읽고 편집 및 공유, 큐레이션까지 하려하는 적극적인 젊은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점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변화에는 소셜미디어의 활성화가 큰 역할을 했다. 이 독자들은 시를 SNS에 올리며 자신의 독서 취향을 공유하고 소통하려 한다.
강윤정 문학동네 편집부장은 2024년 상반기 문학동네 시인선 판매량 1위를 차지한 고선경의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의 성공을 두고 “SNS에서 10대, 20대로 추정되는 독자들 사이의 입소문만으로 꾸준히 판매된 인상적인 사례”25) 라고 말했다. 김민정 시인은 “흩뿌려진 시구와 단어에서 일부만 취할 수 있는 시는 특히 인스타그램 시대에 독자를 주체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장르”26) 라고 보고 있다.
‘청소년 문학’은 새롭게 점검되고 고찰되며 그 외연이 확장될 필요가 있고, 그에 대한 비평 역시 더 진화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영어덜트들은 새로운 읽기 주체와 창작 주체로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영어덜트들의 일상과 문화, 감각은 이미 한국 현대시에 스며들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 문학에 대한 검토와 논의는 더욱 활성화되어야 하며 새로운 미래 주체가 될 영어덜트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며 그들의 진짜 목소리가 담긴 작품들이 창작되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들의 감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앞으로의 문학에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2010년대 중후반 시집들이 “세월호 이후 처음 등장한 세대의 첫 발화를 목격”27) 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던 것처럼, 이들은 문단의 새로운 창작 주체가 되어가고 있고,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이미 문학장 안에 들어와 있다.
- 1) 마리아 니콜라예바, 조희숙 외 역,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 교문사, 2014, 104~105쪽.
- 2) 이재경, 『가족의 이름으로: 한국근대가족과 페미니즘』, 또하나의문화, 2003, 111쪽 참조.
- 3) 오세란, 「청소년소설 속 아이들은,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고 싶다」, 『어린이와 문학』 2016년 7월호 참조.
- 4) 오세란,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 문학의 세계』, 사계절, 2021, 59쪽.
- 5) 이융희, 「순문학이란 없다 2」, 웹진 《텍스트릿 TEXTREET》, 2019. 9. 7.
- 6) 오세란, 앞의 책, 2021, 133쪽.
- 7) 사회학자 김호기의 표현이다.(김호기, 「굿바이, 2010년대!」, <경향신문>, 2019.12.1.)
- 8) 하버드 대학 교수 쇼샤나 주보프의 용어로,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는 인간 행동이 만드는 데이터를 기업이 직접 수집해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 9) 『초·중등 진로 교육 현황 조사』, 교육부,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20.
- 10) 윌리엄 스틱스러드, 네드 존슨, 『놓아주는 엄마 주도하는 아이(‘자기주도성’은 ‘성공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 11) 위의 책, 124쪽.
- 12) 최배은, 『오래된 백지』, 소명출판, 2024, 137쪽.
- 13) 이현, 「나는 여성 작가입니다」, 『창비어린이』 여름호, 창비, 2017, 70쪽.
- 14) 최배은, 앞의 책, 225쪽.
- 15) 위의 책, 같은 쪽.
- 16) 송석주 기자, “[인터뷰]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어린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조금씩 자랍니다”, <독서신문>, 2020. 3. 3.
- 17) 오세란, 앞의 책, 2021, 169~170쪽.
- 18) 위의 책, 81쪽.
- 19) 김영희·김은하·오세란·김건형 대담, 「독서들로부터- 페미니즘과 청소년 독서 교육 현장」, 『문학동네』 봄호, 2021 중 김건형의 말.
- 20) 위의 글.
- 21) 오세란, 「청소년소설의 장르 용어 고찰」, 『아동청소년 문학연구』 통권 6호, 2010, 149쪽.
- 22) 박양명 기자, “우울한 20대, 우울증·불안장애 5년새 127%·86% 폭증”, <메디컬타임즈>, 2022. 6. 24.
- 23) 김금내, 「시 텍스트 감상에서 독자 정동의 교육적 접근 방향 탐색」, 『한국문학교육학회』 75, 2022, 47쪽.
- 24) 김태완 기자, “오늘은 “세계 시의 날”… 최근 6년간 20대 시집 구매 비율 늘어”, 『월간조선』, 2024. 3.21.
- 25) 오경진 기자, “인스타그램 시대, 詩가 변했다… 한없이 가볍고 감각적으로”, <서울신문> 2024. 7. 16.
- 26) 위의 기사.
- 27) 김소연. 김영찬. 백지연 대담,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 비평』 2016년 여름호, 442쪽 중 김소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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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나’ 아닌 것들이었다. 타오르듯 싱그럽던 나무의 잎사귀 같은 것들이나 그 아래의 무수한 기척 같은 것들, 땡볕 아래 타오르듯 일렁이듯 작은 돌멩이나 창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같은 것들, 혹은 녹아내리는 시간 속에 서 있던 한 사람까지.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은 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손쉽게 사로잡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그물 삼아 ‘나’ 아닌 것들을 손에 넣고자 무던한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어서, 그 숭숭 뚫린 구멍들로 정작 우리가 사로잡으려던 것들은 쏟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궁색한 언어만이 슬픈 흔적으로 남곤 한다. 그러니 ‘시’란 근원적으로 편린들, 혹은 우리가 사로잡고자 했던 바의 부스러기들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손에 넣고자 했던 바로 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잡고자 무던한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던 시간의 허물에 진배없으니 말이다. 영혼 잃은 육체처럼 허물어지듯 남겨진 언어의 잔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사로잡으려한 나머지 그에 미달하는 언어만이 남겨진 슬픈 실패의 기록.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이 언어들을 바라보며 실패의 쓴맛을 들이키며 그것을 증오하듯 사랑하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추함은 단지 ‘醜’한 것이라고만은 말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 추함은 한때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는 실패의 기록일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전동균의 시가 특별한 까닭도 그와 같으리라.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은 모두 망가지고 부서진, 흡사 세계의 부스러기와 같은 모습들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그리하여 시간 속에 유폐되어 있는 듯 보이는 사물들은 제 자리를 영원토록 잃어버린 모습으로 이 시적 세계 곳곳에 허물어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언어로 포획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 허물어지고 유폐된 시간의 기록들. 그렇기에 그의 시는 한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홀로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아로새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을밤의 손바닥에 철철 넘쳐나는 달빛 속의 얼룩들, 몸부림치며 빛이 빠져나간 흔적 같은 내 눈이 빛을 얻고 내 입술이 말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靈)들이 나를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을 생각합니다 지도 밖으로 흘러나간 길들 바다에 가라앉은 화산들 육지를 처음 걸어다닌 물고기 틱타알릭과 그 지느러미 같은 것들 어딘가에 숨어 한 방울 눈물의 온기로 견디며 나를 부르는 이 모든 것을 데리고 온 운명 혹은 우연 - 「슈퍼 문」, 전문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특질은 많은 경우 무수한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시작된다. 툭하니 내버려진 듯 무심히 존재하는 사물들의 모습은 그 쓸쓸함을 원인 삼아 다른 무수한 사물들로 이어지며, 화자의 진술을 통해 고독한 원환성을 완성시킨다. 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정서는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화자의 진술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에 덧붙여진 표현들, 예컨대 “빠져나간”,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 “흘러나간”, “가라앉은”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한 정서를 강화시킨다. 사물과 그에 대한 화자의 진술이 한 데 어울리면서, 5연에 배치된 시어들에 이르러서는 진술의 주체인 화자를 포함한 이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시간이 지나버린, 제 자리를 끝내 잃어버리고 만 존재들임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 모든 사물들과 자신이 하나의 “운명” 혹은 “우연”으로 묶여 있음을,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존재론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 속에 유예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쓸쓸하고 외로운 형상들을 단지 슬픔이라 말하는 것은, 혹은 그 슬픔을 단순히 일차원적인 감각적 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화자를 포함한 그 모든 사물들을 한 데 묶는 요소로서 ‘슬픔’이란 감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써,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의 양태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지막 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견딤’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 외롭고 쓸쓸한 형상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기 위한 자세인 것이라면,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 모든 사물들의 망가지고 부서진 형상이란, 서로 다른 시간을 경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면서, 서로 다른 자기만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그 무수한 기억들을 독립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의 형상, 그것들의 부서지고 망가진 모습들은 한편으로 시가 가진 본질적인 추함과 서로 공명하고 있다. 그 모든 상흔들은 결국 제 스스로 가닿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실패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동균의 시는 그 자체로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메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말해보고 싶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추함, 혹은 망가지고 부서진 자국들, 그 모든 상흔과 유폐된 시간들은 단순한 실패의 산물로써 자기 위로나 혐오를 위해 동원되는 수사적 사물들이 아닌 것이며, 비록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부스러기 같은 모습에 불과할지 몰라도 제각각의 기억 속에서 한 때나마 찬란했던 혹은 찬란하고자 했던 실패의 순간을 보존하고 있는 사물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러한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형제라 호명함으로써 그 무수한 사물들의 모습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쓰며, 찬미의 대상으로 아로새긴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 「빗소리」, 부분. “사랑”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사물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라 호명되는 사물들은 모두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찰나의 사물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같은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사랑하였노라 말한다. 화자가 이러한 사물들을 사랑하였노라 말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려져/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화자가 세상에서 버려져 깊은 슬픔에 빠져있으며, 그 슬픔을 차마 견딜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술들을 하나로 묶는 감정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은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슬픔은 단지 슬픔으로, 실패를 단지 실패로 쓰고 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시인의 언어를 통해 그 잔여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비로소 갖게 되며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후에도 부서지고 기울고 유예되며 미끄러지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은 사물들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하지만 시적 언어를 통해 잠시나마 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사물들의 형상은 이제 견딤의 모습으로, 자신의 찬란했던 기억을 놓지 않고자 분투하는 ‘혼자’들로 거듭난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를 읽으며 전달받는 쓸쓸함과 고독, 슬픔의 정서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며, 늘 전부를 초과하는 감정적 잔여를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약 없고 대가 없는 헌신이 바로 그 쓸쓸함과 고독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1 창문들은 어떻게 저렇게 환한 표정으로 지는 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이 나는 이 물병은 무엇일까 구겨진 휴지 같은 이 그림자는 내가 사라지면 어디로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2 찬미 받으소서, 먼지들은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은 빈 소주병과 노숙의 새까만 발들은 감겨진 눈의 눈물,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은 언제 어디서나 오로지 제 몸 하나로 저의 가난과 추위를 지키는 것들은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 찬미 받으소서 3 밥냄새, 살냄새 좇아왔습니다 저희 피가 이끄는 대로, 저희가 저희를 잊고 깨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는 진흙처럼 목이 쉬었고 어느 하루도 돌을 가슴에 얹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습니다 - 「미제레레」, 전문. 그러한 윤리성은 위의 시 「미제레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무수히 호명되는 저 많은 주어들은 마땅한 자리를 ‘지금 여기’에 갖지 못한 사물들이기에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유예되며 또 다른 부서지고 깨어진 쓸쓸한 것들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화자는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찬미 받으소서”라 말하며, 이 모든 사물들이 행하는 견딤의 시간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헌사는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물들에게 마땅한 몸피를 부여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언어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주체적인 능동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을 향한, 높은 곳에 위치한 성스러운 존재들이 아닌 낮은 곳에 위치한 비천한 사물들을 향한 그의 찬미와 사랑을 통해 그는 비로소 ‘혼자’이되, 자신과 같은 무수한 형제들을 가진 ‘혼자들’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에 있어 ‘견딤’이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간의 부피를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 ‘견딤’이란 돌이킬 수 없는 찰나 이후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가진 고유한 쓸쓸함을, 그 고독의 시간을 감각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슬픔을 견디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비추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언어는 보편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는 태양이나 달, 별과 같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 사물들이 아니라 “먼지들”,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 “빈 소주병”, “노숙의 새까만 발들”, “감겨진 눈의 눈물”과 같이 유폐된 존재들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것들이 화자에게는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일지니. 이와 같은 화자의 특수한 시선은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을 향한 섬세한 감각들이 언어로 피어나는 까닭과도 이어진다. 가령 「천지간」에서 “흙들의 밤이 두리번두리번 몰려왔다” 말하며 자연에 새겨진 고유한 슬픔을 읽어내는 것이나, 「다대포」와 같은 시에서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새겨진 영겁에 가까운 고통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에서 무의미한 존재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기 다른 슬픔과 고통을,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것일 뿐인 고독을 모두 다른 모습으로 시간의 부피를 견뎌내고 있는 위대한 ‘혼자’들이기 때문이다. 시궁창의 구더기다 깨진 유리 조각이다 짓이겨진 담배꽁초다 이것들을 다정한 나의 형제여, 라고 부르는 실성한 입술이다 - 「이 밤은」, 부분. 그렇기에 화자는 심지어 “시궁창의 구더기”와 “깨진 유리 조각”, “짓이겨진 담배꽁초”와 같이 한없이 낮은 존재들을 향해 “이것들을/다정한 나의 형제여”라 호명한다. 상식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없는 자기혐오에 가까운 일일 테지만, 그의 시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호명은 자기혐오를 초과하는 여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혐오도, 자기중심적인 고백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로써,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으로 다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언어란 그 모든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견딤을 향한 헌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삶의 양태란 결코 명확한 상징이나 명제로는 표현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견딤의 형상을 말함으로써만, 그리하여 부서지고 망가진 쓸쓸하고 홀로된 모습을 언어를 통해 비출 때에야, 사람의 양태란 초과 혹은 결여의 형태로써 우회적으로나마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쓸쓸함은 결코 쓸쓸함만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실패들은 단지 실패인 것만이 아닌 것이고, 이러한 사물들의 양태를 언어로 비추는 것은 그 고유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양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뎌나가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함은 고독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본질적으로 홀로된 세계는 무수한 ‘혼자’들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다. 이 모순되고도 상반된 세계의 모습.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비추는 세계의 모습이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생의 긍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흡사 그가 화자의 입을 빌려 “왜 세상 모든 곳은/무덤이며 성전인지”(「해가 지면 다시」)라 질문했던 것처럼. 그 질문 자체가 결국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그의 시는 단단하지 않고 때때로 깨어지고 흩어지며 중얼거리듯 간신히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도착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다시금 깨어지고 흩어지며 때로는 바스라지듯 간신히 이어지더라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모든 존재의 홀로된 생에 대한 사랑이자 헌사이며 찬미이기도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 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잊혀진 것들을 다시 데려오려 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기록의 모습으로, 때로는 기도의 형태로, 때로는 고백이자 슬픔의 토로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시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1. 소월이 그러하듯, 황동규 시인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 것인가. 황동규는 1958년 미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시력 67년을 지나는 시인이다. 그는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을 발표한 후 『풍장』(1995)을 거쳐 지난번 『봄비를 맞다』(2024)에 이르기까지 도합 열여덟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1,000편에 거의 근접한 그의 시세계는 이번 근작 시편에도 등장하는 평론가 이숭원의 일전 언급대로,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춤”(『꽃의 고요』 해설)이라고 일단 상징적으로 명명할 법하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지난 세월동안 시인이 꿈꾸며 가꿔온 삶의 시간들이 때로는 황홀한 감각과 사유로, 또 서늘하면서도 생기 있는 언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몸짓을 극서정시가 견인하고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황동규 시의 독특한 구성 원리이자 시세계 전반을 추동하는 극서정시는 단적으로 말해 ‘극’을 내장한 서정시이다. 시에 극적 구조를 연출함으로써 반전이나 시적 자아의 깨달음과 거듭남 같은 내적 변화를 유도하는 시인 특유의 창작 방식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극서정시는 “극(劇)적 구조를 지니고 싶다”라는 시인의 선언적 문구가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표사에 실리면서 한국 시사에 본격적으로 등재된다. 이후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 『우연에 기댈 있었다』(2003), 『꽃의 고요』(2006)는 물론 최근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황동규의 시편들은 극서정시의 계보를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이전 그의 시가 ‘시 안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시’의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도 시인의 말마따나 “명칭은 나중에 붙였지만,” “극서정시는 초기부터 있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가령 황동규 시세계의 중심축을 떠받치던 일련의 사랑 시편은 기존의 전통 서정시와 달리 극적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들에서 ‘사랑(이야기)’는 극서정시 구조를 통해 새롭게 변주되고 그때그때마다의 정황적 의미를 획득한다. 데뷔작 「즐거운 편지」를 위시한 황동규의 사랑 노래는 재래의 수동적이고 추상화된 주제 영역을 벗어나 생활세계에서 ‘사소’하고 ‘조그만’하며 ‘비리고’ ‘쨍한’ 극적 사랑의 계기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시간 속에 비치는 시간’의 감지와 ‘홀로움(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의 정서, 그리고 세계의 필연성과 필연적으로 동행하는 우연성의 수용은 사랑주의자 황동규가 자신의 사랑 시편들과 함께 극서정시를 가동해온 의식/무의식의 흔적들이다. 아울러 일상의 규범을 벗어나 지각의 갱신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한 여행(시)과 시인의 타고난 예술적 정열은 그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련해왔다. 여기에 죽음에의 선주(先走)를 감행하여 확보한 삶과 죽음의 인식론적 전환 사유와 선(禪)에의 깊은 관심은 그의 시에 세계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기 위한 시적 장치이자 방법론으로 주어져 있다. 이렇듯 황동규의 시는 일상과 탈일상의 세계를 분주하게 오가며 시와 삶이 하나 되는 극적인 순간의 풍경을 연출해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마치 ‘외계인’과도 같은 낯선 시선과 호기심으로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의 진면목을 환하게 그려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시는 알레고리와 상징의 밀회를 적극적으로 주선하며, 황홀하면서도 서늘한 삶의 풍경들을 노래하고 있다. 2. 황동규의 주요 시편들이 극적 구조를 거느린다고 했거니와, 이는 근작시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그의 「벽오동」은 작품의 말미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글귀를 위치시킴으로써 이즈음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밑그림”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 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 같이 물드는가 했더니 벽오동이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쁜데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다. 몸에 걸쳤던 것 낌새 못채게 털어버리고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서었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 아니겠나? 「벽오동」 전문 시 「벽오동」의 도입부에는 세 개의 나무가 등장한다. “은행, 벽오동, 벚” 나무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시의 제목이 ‘벽오동’으로 제시된 이유는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쁘”고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유독 ‘벽오동’만 “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기 때문이다. “벽오동”만이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벽오동」의 시적 반전은 이 부근에서 준비된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와 같은 화자의 의도 섞인 물음은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의 상황 묘사로 일관했던 이 시를 급기야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과 자기 확인의 지대로 인도한다. 이때 10행의 접속 부사 “하지만”은 시적 자아가 겪는 거듭남의 여정을 노골적으로 주도하고 암시한다. 그 거듭남이란 “엇박자”와 정박자의 구분이 없는, 아니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자세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이 시는 평범한 생활세계의 한복판에서 “세상의 리듬”과 “같이” 하지 않은 자연생명을 통해 시적 화자의 변화된 생각을 명쾌하게 전달한다. 이를테면 우리 삶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공존한다든가, 초월은 결국 초월하지 않는 곳에 있다든가, 더하여 죽음은 삶의 시간에서 분리된 이원화된 공간이 아니라든가 등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저 찬란하면서도 심오한 구문이 간직한 모든 가능태의 해석들로 말이다. 이 대목을 특히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색즉시공(色卽示空) 살기”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어지는 「시에 대한 단상들」에도 재차 변주되어 나타나는 까닭이다. 가령, 최근 시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렇다. “시 쓰는 일은” “우연 같은 우연, 우연 아니게 만나는” 길이고, “더 이상 다르게 말할 필요가 없을 때/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이 꿈틀”대는 순간이며, “명동 간다는 게 충무로역에 내렸”지만 가끔씩은 “그런 시가 생각보다 더 실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날것 보다는 제대로 익힌 시가 그래도” 좋겠으나 “익힌 날것도 있”다는 생각. “시인과 대상과의 관계는 늘 1:1”이지만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쉬고 있는 곤줄박이”를 “안 본다 안 본다 하면서 더 보고 싶은 사람”처럼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다는 생각 등등. 이렇듯 황동규에게 시는 고정불변의 규율과 법칙으로 규정되거나 강제되지 않는다. 인과론적 사유로만 구성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시는 이 세상 모든 걸 다 맛보려”(「시가 사람을 홀리네」, 『오늘 하루만이라도』, 2020) 드는 생감각의 집결지이고, 변화무쌍한 색(色)이자 공(空)의 세계다. 삶의 실제가 그러하듯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이치가 투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전이되어 황홀하게 펼쳐지는 구체적 장이다. 그리하여 다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앞문으로 들어가/뒷문을 찾지 못하는 시도 시다.” 그 시들 속에는 “무심히 돌다 뒤꼍에서 만나는/이끼, 환한 빛의 섬들”이 존재한다. “이크 밟을 뻔!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앉아 쉬고 있는 곤줄박이”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 3. 아무래도 황동규의 근작 시편을 읽다보면, 노년의 시인을 자주 만나게 된다. 노년은 많은 것들을 서서히 세상에 내려놓는 마음의 시간대다. 인간에게 죽음이 가장 확실한 미래의 사건으로 고지되듯이, 노년은 유한 존재가 어쩔 수 없이 겪는 예고된 시간의 절차이자 필연의 변화이다. 감각기관의 퇴화와 기억력의 감퇴는 필연적 변화의 대표적 항목이다. 거기에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이 필연적 변화의 끄트머리를 실시간으로 경험하게 한다. 지난밤 꿈에 너와 나 너무 많은 말을 주고받았어. 너 어제 세상 뜨고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 어제 저녁 네 빈소에 갈 때 현관서부터 가을비 추적추적 뿌렸지.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나란히 서 있던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 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말보다 더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너무 많았다」 전문 「말이 너무 많았다」는 죽음을 경험한 시인의 차분한 언어들이 동원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어제 저녁” 가까웠던 이의 부음을 접하고 “빈소”에 다녀왔다.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다.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일 게다. “이제”, “어제”의 “너와 나”는 꿈속에서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현관서부터” “추적추적 뿌렸”던 가을비는 이런 화자의 공허한 심리상태를 우회적으로 반영한다.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라는 화자의 읊조림에는 ‘너’를 향한 그리움과 아쉬움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너와 나”의 “어제”와 “이제” 사이에는 느닷없는 죽음이 가로 놓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너’의 죽음을 처연한 슬픔의 분위기로 몰아가지 않는다. 애도의 마음을 부러 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시인은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을 모나지 않게 적재함으로써 “말보다 더한 말”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유도한다. 죽음을 계기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많았던 “어제”를 봉합하고 “이제”의 내 삶에서 ‘너’와의 진정한 관계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기실 황동규에게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단절도, 우리의 현재와 무관한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본원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절대적인 계기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죽음은 “어제”의 일상적 시간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마감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인간의 짧은 삶에 ‘그때그때마다’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시 「말이 너무 많았다」가 ‘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말보다 더한 말”의 진실을 “이제”의 삶에서 환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입춘 가까워 추위 잠깐 풀린 어제 저녁 시의 혈관 건강 살피는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 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그만 내 뇌혈관 상태 들키고 말았다. 운 떼려다 멈칫하게 만든 낱말, 신문이나 휴대폰에서 매일 두세 번씩 만나고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모일 때 내가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 즉시 요양원 보내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그 말,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 디멘셔(dementia) 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설명하니 이교수가 치맵니다, 했지.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셈이지만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별일은 참 별일이다.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 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쓰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 센강에 몸 던진 시인 파울 첼란, 그가 독일어로 마신 ‘검은 우유’가 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다.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 전문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는 노년의 시인이 겪은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모처럼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노년의 불편함에 난감해 한다. “아무리 해도” “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교수가 치맵니다,” 말하고 나서야 세월의 늙음이 “지워버린” “그 말”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시인이 경험하는 노년의 불편함이란 당연히 기억력의 감퇴이다. “뇌혈관”의 노화가 야기하는 이런 불편함은 사실 “참 별일이다”라며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정도에 따라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즉시 요양원 보내”야 할 만큼 걱정스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 낱말이 “신문이나 휴대폰에서/매일 두세 번씩 만나”는 흔한 모국어라면 사태는 보다 심각하다. 그렇기는 하나 시의 화자는 이 난감하고 걱정스러운 국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쾌하게 돌파하는 듯하다.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음에도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영단어 “dementia”가 아니라 “치매”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분히 혼란스럽기는 하되, 이마저도 삶의 “별일”로 인정하고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로써 “지워버린 말”의 사소함과 심각함 사이의 긴장감은 “별일은 참 별일이다”라는 시인의 무심한 독백으로 무리 없이 해소된다. 이 시가 노년의 불편함과 난처함을 호소하는 차원에서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소환하는 극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어제 저녁”부터 “아침”까지 시인에게 발생한 일종의 이중 언어(정체성) 문제는 곧바로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쓴 시인 파울 첼란의 삶으로 이월되는 것이다. 특히 파울 첼란의 「죽음의 둔주곡」(Todesfuge)이 음악적 형식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적 모티프의 반복·변형 구조를 취한 작품임을 염두에 두면, ‘과거’ 시적 화자와의 친연성마저도 확보된다. “검은 우유가/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라는 시구가 전혀 어색하거나 새삼스럽지 않다. 이렇듯 황동규의 근작 시편들은 여전하다. 여전히 그의 시는 “밝고 생생한”(「프리지아」) 생명과 마주하고 실존의 삶을 향유하며 환한 생의 감각으로 세계를 노래한다. 만년에 들어서도 시인은 “어제”를 봉합하며 거듭나기를 꿈꾼다. 어쩌면 저 근작 시편들 뒤에서 시인은 속엣 말로 이렇게 되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년의 필연적 변화, 하지만 그 불편함과 난처함마저도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맛’이고 ‘사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라고.
1. 시선의 연금술: 사랑의 집요한 쓰기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소설 『풀베개』(송태욱 역, 현암사, 2015)에서 양갱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모든 과자 중에서 양갱을 가장 좋아한다. 별로 먹고 싶지는 않지만 그 표면이 매끈하고 치밀한 데다 반투명하게 빛을 받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특히 파란 빛을 띠게 이겨서 훌륭하게 다듬은 것은 옥과 납석의 잡종 같아 아무리 봐도 기분이 상쾌하다.”(66쪽) 소설의 화자가 문화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속에서 일본의 양갱을 서양의 과자들과 대조하며 그 빼어남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읽다 보면 독자에게까지 푸른 양갱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는 작가의 글에는 독자를 그 사랑에 동참시키는 힘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만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강보원의 산문집 『에세이의 준비』(민음사, 2024)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싫음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한 탓에 그 자신의 싫음이 가장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128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소세키의 경우와 달리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쓰기가 갖는 힘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작가의 일이란 결국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쓰기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쓰기를 지속하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세 번째 시집을 펴낸 김연덕의 작업 역시 그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집요한 쓰기의 연속이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요컨대 ‘자기만의 작은 공간’과 그 확보에 대한 것으로서 지속되어 왔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작은 공간은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민음사, 2021)와 두 번째 시집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줄곧 탐색되었다. 그 작은 공간은 대부분 유리나 구슬, 얼음처럼 “표면에 맺힌 상이 제각각/다르게 반사되”(「재와 사랑의 미래」, 『재와 사랑의 미래』)는 투명한 물체의 모양을 띠고 있거나, 오래된 주택의 거실(「폭포 열기 열기」, 『폭포 열기』)이나 부엌(「유리빛」, 『재와 사랑의 미래』), 혹은 책상과 의자, 소파(「잘못들」, 『폭포 열기』)처럼 집의 공간과 그것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김연덕의 화자들이 주목하는 이러한 공간은 모두 작고 투명해 언뜻 연약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작음으로 인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공유한다. 이에 더해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화자들에 의해 이것이 일상의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디서든 자신이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해 내는 시선, 곧 무엇이든 귀중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른바 ‘시선의 연금술’이라 할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 이르러 이 시선의 연금술사들은 그 탐색의 영역을 과거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 이번 시집의 화자들은 집, 특별히 화자가 전에 살았던 옛집과 그에 관한 기억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사랑의 대상을 발견해 내기 위해 옛집의 구석구석을 차분히 살피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집을 나설 때 혹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다시금 살펴보는 누군가의 미지근한 눈길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집이라는 공간은 그런 화자들의 눈길 아래 자본화할 만한 대상을 긁어모으는 착취의 현장이기보다 애정의 온기가 훑어나가는 보살핌의 자리, 사랑의 경작지가 된다. 2. 오래된 이야기들의 집 『재와 사랑의 미래』가 얼마간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서는 과거라는 시제가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다 식은 검은 재를 마신 채 그때의 여름 마당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같은 구절은 “재”라는 첫 시집의 시어를 직접적으로 경유하며 이를 통해 과거의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실 과거에 대한 이 시집의 관심은 첫 시에서부터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집의 대문이라 해도 좋을 「소품 가정집」은 거기에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째서 과거의 공간으로 나아가는지, 그것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종이를 열어 나의 오래된 집으로 아직 죽지 않은 먼지 나는 이야기들이 방마다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 「소품 가정집」 부분 화자가 “걸어 들어”가는 “오래된 집”은 그곳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공간, 구석구석에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의 잔여물들이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종이”나 “파본”과 같은 시어들이 책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견인하며 이 시를 시적 기원에 관한 것으로 읽힐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배경이 되는 “오래된 집”은 그 자체로 시인의 시적 작업이 태동된 곳으로서의 근원적 공간으로 이해되기에 적절해 보인다. 이때 시인은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오래된 집”으로 들어가 그 사랑의 탐색을 지속해야 할 일종의 정당성 내지 필연성을 역설하는데, 그 방법은 시적 기원과 비교적 무관했던 기존의 작업들에 대해 거리를 두며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단절감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 재채기는 나지 않는 옷이었던 거야. 하자 없는 이야기는 내가 그랬듯 언제든 나를 버릴텐데. - 「소품 가정집」 부분 아무래도 화자는, 적어도 이 시집에서만큼은 “하자 없는” 말끔한 이야기보다 책이 되지 못한 채 파본으로 남은 어딘지 미진한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 모양이다[“나는 새 코트보다 이것이 좋다.”(같은 시)]. 그것들은 “유통되기에는 컨디션과 완성도가 부족했”지만 “파본 한 권 한 권마다의//야성”(같은 시)이 매혹적으로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야성”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름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된 그들마다의 계단을 떠올리며”(「sparkle」)]. 이번 시집에 유독 옛집에서 화자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엄마와 아빠,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의 존재는 여러 시편들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며, 시집 전체의 흐름 속에 형상화되는 화자의 유년기 기억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오래된 집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오래된 이야기로 구축된 집[“비현실적인 주택의 언어”(「my mushrooms」)]에서 과거에 함께 살던 존재들과 만남으로써 화자들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나간다. 보다 정확히는, 옛집이 바로 그러한 공간으로 재의미화되는 것이다. 가령 「구슬과 번개」에서는 집이라는 공간이 “거실에 놓인 자라 박제”의 “눈에 박힌 싸구려 구슬”로 축소되어 나타나며 이후 “구슬은 가족들의 피부나 얇은 거실의 창” 같다는 화자의 서술이 이어지고,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예민하고 투명한 껍질로 이뤄진 사랑인/앵두를 따러 갈 때마다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곤 했다”는 「앵두 따기」 속 화자의 진술 역시 가족들과의 기억이라는 맥락 위에서 투명한 구슬 모티프를 다시금 변주한다. 이처럼 화자들이 저마다 작은 공간들을 확보해 갈 때, 김연덕의 시는 정확히 그 공간들의 크기만큼 넓이와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된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또박또박 수집하며, 김연덕의 화자들은 그렇게 사랑의 경작지를 넓혀간다. 3. 커튼 치기 흥미로운 점은 시 속에 묘사되는 옛집의 공간들이 많은 경우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일찍부터 시선의 연금술을 체화함으로 “오랜 내구성”(「구슬과 번개」)을 갖추어 둔 김연덕의 화자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집의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오래된 어둠”이야말로 이번 시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이 사랑의 탐색전을 벌이는 주 무대가 된다. 요컨대 어둠까지도 사랑을 경작할 수 있는 영토로 기어이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집에서 과거나 어둠이라는 단어가 현재나 미래, 빛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커튼이라는 소재는 어둠과 빛이 맺는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화자들이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는 이 다중 우주적 옛집에서, 커튼은 주로 할머니의 방에 둘러쳐져 있다[“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브로치」), “할머니는 모직 커튼이 쳐진 낮의 방에 앉아서도”(「낮의 옥상」)]. 그리고 그것은 종종 옛집의 가부장적 분위기를 고발하며 김연덕의 시들이 내장하고 있는 여성주의적 면모를 내비치기도 한다[“평소 모직의 두꺼운 커튼이 사방으로 쳐져 있던/대부분 비어 있던 그들의 어두운 거실에서 언니의 바이올린 선율은”(「낮의 성벽」), “누군가의 부모/아내/친구도 상사도 아닌/딸로 이어진 자만 가볼 수 있는 곳이 있다.”(「새가 되어」)]. 하지만 기본적으로 커튼이란 빛의 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공간의 따뜻함은 커튼을 통해 미세하게 조정된다. 빛을 차단해 어둠을 만들어 내는 이 도구는 반대로 공간에 빛을 초대함으로 어둠을 차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서 커튼은 기억의 주체인 화자들에게 옛집의 각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의 조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주어진다. 화자들은 옛집의 곳곳에 커튼을 칠 수도 걷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해당 기억을 어둡게도 밝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안방의 커튼이 화자의 기억에 따라 쳐져 있을 때도(「브로치」), 반대로 걷혀 있을 때도[“나는 빛이 나른하게 쏟아지는 할머니의 안방 안에 들어와 소반 위의 호떡을 먹는다.”(「낮의 크레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의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커튼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둠과 빛의 이분화가 만들어 내는 평면성에서 끝내 해방되어 그 자체로 어느 한 가지 성질로만 표현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맥락 위에 “한 평 남짓한 크기 그 안의/어둠”을 보며 그것이 “꼭 고해성사실 같았다”(「철사 천사」)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언니를 떠올릴 때면 그 장면이 “항상/해와 그림자가 기쁨과 후회가 같은 빈도로 길어지던 여름 한가운데서 시작된다”(「sparkle」)는 화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가치 초월적 발화의 구체적인 예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커튼은 어둠을 옹호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할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브로치」의 커튼이 쳐진 안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 그릇”과 브로치들이었고,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튼이 만들어 내는 어둡거나 밝은, 혹은 ‘어둡고도 밝은’ 공간에서 이제 화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슬픔과 즐거움, 어둠의 시간을 좋아한다”(「천국의 개들」)고. 한편 커튼은 물리적 차원뿐 아니라 개념적 층위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어둠과 빛에 대해 그러했듯 부정적 표현과 긍정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언어의 새로운 연금술을 시도하는, 이른바 ‘커튼을 치는’ 식의 발화가 화자들의 서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슬픔”(「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숨 막히게 행복하고 억눌린 느낌으로”(「비좁은 불」), “마당에서 가장 아끼고 무서워하던 꽃”(「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재라는 기쁜 슬픔”, “따뜻하고 슬픈 빛”(「새가 되어」), “얼룩덜룩한 의기양양함으로/눈부신/자신 없음으로”(「낮의 크레페」) 같은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커튼을 쳐서 어둠과 빛을 섞고 그 농도를 흩트리듯, 이 시집의 곳곳에서 화자들이 수행하는 시적 발화들은 언어의 부정성과 긍정성의 구분을 지운다. 이들에게 좋고 싫음의 문제는 밝음과 어두움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이나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이다. 4. 현관을 나서기 전에: 과거에서 길어 올리는 사랑의 미래 옛집과 거기 방치돼 있던, 시적 기원이 되는 오래된 기억들을 부지런히 톺으면서 화자들은 이제 더 넓은 사랑의 경작지,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미래의 자리로 나아간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해 되짚으며 화자들은 과거의 미래, 곧 현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주로 결과론적 반추의 형태로 나타난다[“나는/내 사랑이 한 번에 행복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사랑에서 오는 즐거움을 내가/많이 낭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앵두 따기」), “진동하는 기쁨과 수치라는 과일나무들 사이를 지나게 될 내가 앞으로 어떤 과일들을 먹게 될지 (…) 미리 알고 있었지만”(「vague frame」)]. 특히 「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에서 이러한 발화들은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주로 여성주의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어린 내가 본다 어느 쪽을 응원할지 그래서 미래에 어느/유형의 여자로 클지”, “송출된 화면 속 관중은/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수치만큼//다정한 허무만큼 많았어”, “내가 원 안에서 쏠리고 넘어지는 여자 어른으로 클 줄은”(「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 이때 해당 시의 중심에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 시집의 여러 시편들에서 할아버지가 가부장적 위계를 집안에 흘려보내는 이로 그려지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이 시는 그가 옛집에서 화자를 포함한 집안의 여자들에게 줬던 불편함에 대해 화자가 뭔가를 말하길 시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어둠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바, 그것은 더 많은 사랑이 가능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김연덕의 화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을, 다시 말해 이들이 옛집이라는 어둠-빛의 공간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브로치」를 읽어볼 수 있다. 해외에 다녀오면서 할머니에게 브로치들을 사준 이는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였다. 그는 따뜻한 사랑의 말들을 “할머니에게 해준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화자는 그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무심한/사랑”을 발견해 내며 그를 이해하길 시도한다(“할아버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애석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브로치들은 화자의 엄마와 작은 엄마들에게 나누어지고, “중요한 것들 몇 개는 나의 오래된 거울 속에” 들어와 화자를 구성하며 그를 자신만의 이야기, 시적 기원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한다(“잠에서 가끔 깨어나는 이야기는//나를 종종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둠 속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김연덕 화자들의 연금술이 또 한번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어둠을 대면해 이해를 시도하고 끝내 그것과 화해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화자들은 「낮의 서재」와 「tiny hole」을 비롯한 이후의 몇 시편들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5살 무렵 깊은 우물에 빠졌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덮개 위로 올라가 어린 할아버지의 가장 약한 부분 옆에 누워 있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tiny hole」 속 화자의 모습은 그가 과거의 어둠과 화해하는 장면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우물 속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할아버지를 나의 햇볕 아래 누인다”). 시적 기원을 형성하는 과거의 이야기들로 구축된 오래된 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은 이렇게 사랑할 만한 것들을 끈질기게 길어 올린다. 그 과정에서 파본으로만 굴러다니던 그곳의 이야기들은 커튼을 치는 행위가 가지는 정치적 수행성을 통해 이분화되어 있던 어둠/빛의 영역과 시적 언어의 한계를 이중으로 타파함으로써 이제껏 쓰이지 않았던 시의 여러 가능태로 새롭게 의미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김연덕의 화자들은 사랑의 미래로 뻗어나갈 일단의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마지막 시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은 옛집을 떠나는 화자가 그곳에 남기는 끝인사처럼 읽힌다. 그늘 속에서 편안하게 썩어나가던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가 쉴 수 있을 때, 마지막 사람이 난방을 끄고 나오며 뒤돌아보지 않을 때 괴로운 행복을 좀 늦게 알아채는 방으로 기어 들어가 자존심 강한 파본들을 주워다 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이제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을 시간. -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부분 마지막 연의 “코트”는 물론 첫 시에 등장했던 코트의 변형일 것이고[(“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소품 가정집」)], 이 수미상관의 구조는 곧바로 이 시집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한 채의 집, 예컨대 ‘시로 세운 집’으로 인식되게 하며 독자에게 시인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갔다가 문을 닫고 나오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시인 김연덕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행하는 집요한, 그리고 구체적인 쓰기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나의 음악은 이 모든 사라짐을 집요하고 구체적인/사랑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다”(「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1)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현대문학, 2025. 이후 인용하는 시들은 제목만 적으며, 모든 중략은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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