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겨울호(제63호)
기원석, 낭독회 그리고 우리 : 기원석, 『가장낭독회』
한 시인이 2010년대의 시단을 정리하며 「황인찬, 낭독회 그리고 여성」1)을 제목으로 꼽았을 때, 한 시대가 정말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작가도 독자도 그리고 그 둘의 관계 맺는 방식도 모두 변한 까닭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소위 미래파’에서 ‘황인찬류’로, ‘독자’는 저마다의 진정성을 담보할 ‘내면’에서 여성과 소수자의 ‘실존’으로 바뀌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작가와 독자를 매개하는 ‘관계’ 양상 또한 바뀌었는데, ‘낭독회’와 더불어 작가는 “작품이라는 텍스트에서 목소리를 내는 시인”으로 바뀌었고, “시인은 자기 눈앞에서 독자의 얼굴을 치워버릴 수 없게 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새삼 시인은 어떤 심정으로 저 글을 썼을지 생각해 본다. 그는 “최소한 지난 오 년간은 매 계절 스무 권 이상의 문예지에서 시를 발췌하여 읽어왔”던 성실한 독자였던바, 그런 그가 글을 끝맺으며 그 많은 문예지에 “좋은 시가 정말 없다”고, “똥밭을 구르는 심정으로 독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좋은 작품”은 꼭 있었는데, 2019년 “올해는 이장욱과 신용목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무언가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말한다.
여기에 “10년 단위로 문학사를 묶어 살피는 글이 얼마나 무용한지, 다만 2029년에도 이런 글을 내가 기다린다는 것, 또 읽으리라는 것이 괴롭다”는 마지막 문장을 덧붙여 보면, 소위 시인의 의도가 그리고 그 심정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까닭에 우리는 2010년대를 정리하며 이장욱과 신용목을 꼽은 건 아무래도 좀 고약한 글쓰기가 아닌지 따져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해 못 할 것도 아닐 것이다. 그동안의 시인들이 감내하고 목표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인간들은 그렇다. 그들이 자신을 믿게 하려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 그리고 당신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은 당신의 신념이 믿을 만한 것이라는 보증으로 당신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들은 왜 피 흘리며 씌어진 작품들 앞에서 감탄을 아끼지 않는가? 그것이 그들에게 고통을 면제해 주거나 혹은 면제해 준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이 하는 말 뒤로 피와 눈물을 보고 싶어 한다. 군중이 외친은 감탄사는 사디즘의 발로이다.2)
그간의 시인들, 저 “인간들”을 ‘독자’로 상정하며 피 흘리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내면으로 ‘입장’할 권리를 얻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값비싼 ‘내기’를 걸어야만 했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내기에 성공한 작품들이 결국 독자들의 “고통을 면제해 주거나 혹은 면제해 준다는 환상”으로 전락할지라도, 그건 그다음의 문제. 작품이 최소한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피와 눈물”이라는 입장권을 독자들로부터 획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느덧 너무 많은 것이 변한 것 같다. 작가도 독자도, 그 둘을 매개하고 접속하게 하는 장치까지도 모두 변한 것 같다.
신이 주사위 하나를
시인에게 쥐여준다
(……)
독자들이 훔쳐 갔다
-「현대시작법」
나만의 독서에서 나를 쫓아낸 자가, 이렇게까지 결말에 목말라, 시집이 소진되기만을 앙망하는 인간일 줄은 몰랐소. 나는 보다 격렬한 대화를 원했소. 그러니까 나는 더 치열하게 나와 겨루는, 나의 슬픔과 나의 열망과 나의 생을 걸고 하는 독서, 그리고 반복, 나의 숙명 같은 반복, 그것들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불화와 분쟁과 대립……그런 역동적인 것들을 원했소! (R버튼을 쥔 두 손을 떨며) 그런데 당신은 번지르르하고, 사치스럽고, 슬프고, 무력하고, 인간적인, 헐값의 결말에 모든 걸 팔아넘기려 했소. 이렇게 선뜻 타인에게 넘겨줘서는 안 될 일이었소.
-「마지막 시」 중에서
신이 시인에게 쥐여준 주사위, 그것을 독자들이 훔쳐 갔단다. 그런데 이 절도 사건, 그 전모가 좀처럼 간단치가 않아 보이는데, 아마도 시인이 기대하며 독자에게 쥐여준 주사위는 굴려지지 않은 채 “번지르르하고, 사치스럽고, 슬프고, 무력하고, 인간적인, 헐값의 결말”과 맞바꿔졌기 때문이리라. 시집 속의 ‘나’에 준하는 “나의 슬픔과 나의 열망과 나의 생을 걸고 하는 독서” 같은 것이 도저히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안다. 독자는 저 신의 주사위를 바라지 않았다. 바란 적이 없다. 바랐다면 독자는 더 이상 독자가 아닌 시인이 되어, 또 다른 독자에게 주사위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독자는 시인 “당신의 죽음을 요구”하는 독자들일 뿐이다. 아니 오늘날 독자는 한층 문명화, 주체화되어 시인으로부터 더 이상 사디즘적인 감탄을 요구하지 않는, 동료 시민으로서 시인을 호명하고 기대하는 합리적인 독자들에 가까울 것이다.
누가 날 이런 곳에서 깨웠습니까 부스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더니 텅 빈 카페입니다 (…중략…) 비극도 아니고 불운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아니어서 당황스럽기만 한 슬픔이었는데 텅 빈 카페입니다. (…중략…) 화분에 해바라기가 심어지고 의자의 다리들이 겹치고 비상구 표시는 점점 푸르러지는데 누운 갈대들이 일어나려고 서로를 넘어뜨리고 굴뚝에 비해 잿가루는 진심처럼 희고 바스러지고 철길을 따라 터널의 양 끝으로 기차들이 빨려 들어가고 침묵에서 탄내가 나고 시간은 내연기관처럼 돌아가는데 석류알 같은 눈빛들은 어딘가를 훑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홀로 불이 켜진 카페였습니다. 누가 저런 곳에서 잠들었습니까
-「무인」 중에서
주사위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니 이를 거부하는 독자, 그 안에는 삶과 생활을 살아내야 하는 시인 역시 포함될 것이다. 어쩌면 삶에 자꾸 설득되는 시인이야말로 주사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서둘러 독자에게 주사위를 건넨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에겐 신의 주사위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인간적 진리가, ‘절반의 진리’가 필요할 뿐인 것 같다.
진리(신)와 삶(인간) 사이의 강에서 탄생하는 섬, 절반의 진리라는 이름의 섬, 그렇다면 그 섬의 모양은 조금 주사위처럼 생겼을까. 사실 우리 모두는 “일과를 씻고 생활을 깎고 육아를 빚고 직장을 널고 // 냉동 보관한 감정을 꺼내”는(「막」) 사람들, “생각이 가고 // 생활이 왔다 // 슬픔이 걷히고 // 신념이 졌다”(「벽 앞에서」)는 문장 앞에서 머리를 긁적일 뿐인 사람들.
그렇기에 우리는 어느덧 “텅 빈 카페”에 있다. “비극도 아니고 불운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아니어서 당황스럽기만 한 슬픔”의 공간, 희망과 파국이 불안하고 무기력한 색조와 파동을 만들어 내는 공간. 비록 우리는 생존과 생활을 위해 세상에 스스로를 내어주지만, 가난한 마음을 되찾기 위해, 보다 인간적인 생존을 위해 저마다의 “어둠 속에 홀로 불이 켜진 카페”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여기서도 삶은 그냥 삶이었습니다. 다만, 육체만 가두는 게 아니라 영혼이나 마음의 일부도 가두게 만드는 ‘교도소’라는 곳은 안전한 동시에 단순하고, 분노와 함께 쓸쓸함이 느껴지고, 삶을 덜 증오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덜 사랑하게 만드는 장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모든 삶은 곧 한 권의 책이며, 모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자기 삶을 써가야 합니다. 아무리 비루하고 참담한 내용일지라도 계속 써야만 한다는 삶의 윤리를,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이따금 선득하게 느끼곤 합니다. 그것은 축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닐 것입니다. 저에게 시집은 삶에 대한 삶이면서, 삶에 대한 튜토리얼이고, 삶에 대한 프로토타입이면서, 삶에 대한 후일담입니다. 삶이 한 권 뿐이니 그것에 대해서 만들어진 무엇이든 근본적으로는 하나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3)
그런데 저 절반의 진리라는 섬, 그리고 텅 빈 카페라는 공간은 ‘신’을 죽였기에 불가피하게 갇혀버리게 된 ‘근대’라는 ‘쇠 우리Iron Cage’와 닮아 보인다. “안전한 동시에 단순하고, 분노와 함께 쓸쓸함이 느껴지고, 삶을 덜 증오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덜 사랑하게 만드는” 그런 ‘교도소’에서의 삶과 닮아 보인다. 탈출구처럼 만들어낸 이곳이 고작 그런 곳이라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어쩌면 이곳은 “아무리 비루하고 참담한 내용일지라도 계속 써야만 한다는 삶의 윤리”가 작동할 수 있는 장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만 하지만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 수도 없다. 우리가 시집을 꺼내어 읽는 이유는 필시 저마다의 “삶에 대한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 비록 그것이 안전한 장소에서 비참하고 비루하게 이루어지는 무엇일지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끝없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비로소 언젠가는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기 이야기가 당장이라도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예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만에 하나
끝나더라도 우리는 다음 이야기
그다음 이야기를
쓰고 기다리고
쓰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복합 건물에서
기다리다가
고갈되고
-「멀티엔딩」 중에서
까닭에 우리는 그곳에서 “다음 이야기 / 그다음 이야기를 / 쓰고 기다리고” 또 쓰고 기다린다. 비록 고갈되고 있을지라도. 혹은 고갈되지 않기 위해 “이윽고 나 역시 하나의 NPC가 되어”(「튜토리얼」, 76쪽)갈지라도. 독자는 시인을 기다리고, 그와 더불어 스스로를 한 권의 책으로 조금씩 만들어 간다. 이쯤에 이르면 피 흘리는 시인에 감탄하는 사디즘적 독자이건, 동료 시민을 호명하는 합리적인 독자이건, 독자는 한 명의 잠재적 시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한 권의 책을 써 내려가는, 삶의 윤리에 충실해지고자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독자는 시인과 더불어 “아무리 비루하고 참담한 내용일지라도 계속 써야만 한다는 삶의 윤리”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까. 한 권의 시집이라 일컬을 수 있는 삶을, 과연 충분하게 살아낼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좀처럼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면, 독자 스스로가 스스로를 좀처럼 믿을 수 없다면, “이렇게 친절하게 하나하나 말해주는 사람도 없어”(「튜토리얼」, 113쪽)라 말하는 시인과 더불어 저 윤리를 하나씩 실행해 가는 것도 손해 볼 것은 없어 보인다.
가판대에 걸터앉은 제빵사가
한마디 푸념을 한다
요즘 누가 바게트를 먹겠어
프랑스인도 아니고
독백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제
바게트로 그의 독자를
두들겨 팬다
(…중략…)
만에 하나라도 그런
바게트를 슬며시 뜯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행여나 그걸
한 입 베어 물다가
콧수염을 쓸며 눈을 부라리는
제빵사에게 무슨 소감이라도
건네야 하는 가련한
독자가 있다면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판대를 물려받아야 한다.
-「바게트」 부분
그런데 저 친절한 시인 “바게트로 그의 독자를 / 두들겨” 패며, 기존의 “당신의 이야기에서 당신을 꺼내”오는 시인이다. “어리둥절한 삶이 당신의 슬픔을 잡아채기 전에”(「모자이크」), “진짜 삶이 우리를 죄다 비우기 전에”(「부록」) 문학의 공간으로 우리를 조금씩 초대하는 시인이다. 절반의 진리라는 섬, 텅 빈 카페를 밀물 같은 바다의 어둠으로 밀어내고 우리를 낯선 무대로 이끌고 가는 시인이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친절함인가 싶지만, “시는 시일 뿐이고 // 게임은 게임일 뿐”, “※다만, 진정성 있게 쓸 것.”이라는 명령은 그저 게임과 같은 시 속의 명령일 뿐 아닌가. 게다가 삶이야말로 “튜토리얼에 그쳤”(「튜토리얼」, 108~110쪽)다고 한다면, 이미 삶에 휩쓸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우리에게 바게트를 휘두르는 저 무지막지하게 친절한 게임에 한번 참여해 보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어차피 우리는 시집을 덮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삶이라는 절반의 진리는 안전하지만 어느덧 지긋지긋한 무엇이 아닐 수 없는 거니까.
작가: (독자에게 귀엣말로) 그들의 논리를 비판하거나 대화 주제를 회피하지 마세요. 대신 그들이 진술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상냥하게 물어봅시다.
독자: ……혹시 지금 무슨 기분이 들어요?
우주인: 나가고 싶어요. 열어주세요.
(…중략…)
작가: 무슨 기분이 들어요?
독자는 듣지 않는다 작가의 입을 겨우 틀어막은
백성들이 다시 슈퍼킹을 숨죽이고 관음하는 가운데
먼 국경에서 별빛처럼 들려오는
SOS
우주인: ……세요.
-「막」 부분
다행히 저 낯선 무대는 우리에게 익숙한 ‘낭독회’의 형식을 띠고 있는바, 그러니까 일종의 소설가 소설처럼, 즉 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처럼, 시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대, 독자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무대. 비록 우리 독자가 마주하는 시인은 “나는 이제 작가와 구별되지 않소. 화자는 독자를 고발하고 있소.” (「부록」)라 말하는, 바게트를 휘두르는 시인이지만, 동시에 다정하게 귀엣말을 건네는 시인. 익숙한 ‘낭독회’에서 다시 시작하는 시인.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더불어 비로소 잠재적 시인으로서 저마다의 시집을, 한 권의 삶을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너를 움켜쥐는 어둠, 그것은 한 명의 사람이 되고 있으며, 한 명의 사람이 되어 있으며, // 그것이 나의 내용이다.” (「암시집」) 절반의 진리라는 섬, “어둠 속에 홀로 불이 켜진” 텅 빈 카페(「무인」)에서 시인과 더불어 벗어나는 것, 그렇게 도착한 낯설지만 익숙할 저 『가장 낭독회』의 무대에서 우리는 새로운 “한 명의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지고 싶지 굿나잇 않아” (「네트」)와 같은 보다 격렬해진 긴장과 더불어 ‘새로운 독자’가 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저 마지막 우주인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기존의 작가들을 두들겨 팰 저마다의 바게트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 1) 김상혁, 「황인찬, 낭독회 그리고 여성」, 『모:든시』 2019 겨울호.
- 2) 에밀 시오랑, 「예수 그리스도의 변절」, 『절망의 끝에서』, 김정숙 옮김, 강, 1997, 143쪽.
- 3) 기원석, <[아침달 인터뷰] 기원석 시인 "나의 삶조차 나에게 납득되지 않듯이">, 아침달 블로그, 2024.06.10., https://blog.naver.com/achimdalbooks/223474457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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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1. 한 통계에 따르면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매년 감소하고 있다고 하지만 2023년 기준 신간도서 발행 분포를 보면, 문학(20.1%)은 교육(20.9%)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독자층의 도서 구매 상황은 다르다. 교보문고의 집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소설과 시/에세이 부문의 판매 권수와 판매액 점유율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이다.2) 도서 소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양 서적과 직업 관련 서적이라고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계가 전례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학이 독서 시장에서 유력한 장르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독서 시장이 위축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학을 읽고 경험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해졌다. 문학이 특정한 매체, 특정한 직업군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걷어내면 문학은 어디에나 있다. 매일 접하는 인터넷과 SNS에 게시되는 문학 관련 정보들과 자기 표현 글쓰기에서 비평적 욕구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이 가장 활성화되는 곳은 문예지가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비전문적인 장소들인지 모른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문학은 특별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런 관심만으로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책에 매혹된 독자들이 비평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건 비평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그런 독자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직업 독자로서 비평가가 있지만 모든 문학 종사자들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독자이다. 최근 생태 비평의 화두인 ‘얽힘’(Entanglement)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문학과 독자의 관계에도 필요한 상상력이다. 문학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세계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 강동호의 「새로움의 경제」(웹진 『비유』, 2025. 3-4)는 독자에 관한 글은 아니지만 문화경제학의 관점에서 문학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새로움’을 일종의 경제로 바라보는 이 글은 상품경제와 구별되는 문화경제에 주목한다. ‘새로움’은 동시대 문화 아카이브와 관련하여 작품이 지닌 가치를 측정하는 기호(화폐)로 “‘새로움의 경제’란 문화적 혁신을 독려하고 정당화하는 특수적 통화 체제”이다.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동시대 문화 현상은 새로움의 공급 과잉, 즉 새로움의 인플레이션인데 이는 시장과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의 목적은 시장과 문화라는 ‘새로움’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효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가치 역시 작품을 현실에서 사용하고 체험하는 독자들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교환 행위를, 그리고 그러한 교환 원리가 현실 언어의 경제라는 광의의 체제와 구별되는 지점”과 “자본의 논리에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통상의 사회경제적인 원리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학을 살펴보겠다는 것은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독자와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교환 원리는 주목할 만하다. 강동호는 「새로움의 경제2(1)」(『문장웹진』, 2025. 4)에서도 유사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아직 ‘새로움의 경제’에 관한 가설이 있을 뿐 그 내용이 충분히 전개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글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문화경제 원리에 관한 여러 가정들과 개념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로 검증 가능한 구체적인 사례나 예시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문화경제는 이론인 동시에 실물경제이다. 작품의 가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자, 작품 생산과 수용 과정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교환의 원리를 문학 현장의 사례로 논증하는 과정 없이 ‘새로움의 경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강동호의 글은 독자가 포함된 문학을 역동적인 경제 교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그 새로움의 발생지, 현장의 실체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노태훈의 「한국문학의 현장」(『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은 한국문학의 현장을 생산과 유통, 수용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어 강동호의 글과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한국문학의 생산은 ‘등단’과 ‘문학상’이라는 집단적 승인을 전제하고 있으며,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문학의 유통은 수용의 현장과 분리되어 있다. 특히 문예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전의 작품들을 게재하는 것은 상품으로서 문학을 예비하는 과정이며 그 점에서 문예지는 생산 현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용의 단계는 어떤가. 문학의 현장은 결국 수용자인 독자에게 그 핵심이 달려 있다. 문학의 현장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읽히고 공유되는 순간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곳만을 현장이라 칭한다면 사실 그것은 아주 왜소해질 것이다. 여타의 모든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생산자는 작품의 유통과 수용에 있어 결국 철저하게 보호적인 존재로 남게 된다. 작가의 강연, 낭독회, 사인회 등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문학의 현장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문학에서 현장은 사후적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수용 이후, 작품의 감상 이후에 현장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작가와 작품은 필요조건이 될 뿐, 현장의 주체는 오로지 독자의 행위에 달려 있다. 그런데 또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현장성이 생겨나지는 않아서 이를테면 도서관을 두고 문학의 현장이라 명명하기는 다소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3) 노태훈의 글에서 독자는 중요한 존재지만 작가와 작품, 독자가 만나는 현장은 아직 현장으로서 불충분하다. 이 글은 도서관을 비롯해 문학작품을 향유하는 공간을 언급하면서도 문단 시스템을 벗어난 현장을 의미 있게 고려하지 않는다. 독자를 현장의 핵심에 두고 있으면서 독자와 현장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발생한다. 이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현장’은 비평적 태도의 유무인 듯하다. “핵심은 문학작품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평’”이며 문학의 현장이 고민할 것은 “인정이나 승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비평적 태도, 즉 독자讀者/獨自적인 것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전통과 관습을 비트는 방식으로, 아카이브라는 저항의 형태로, 즉흥적인 아마추어리즘”으로 나타나는 문학 현장이지만 그 주체가 문예지와 전문 독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생산과 유통, 수용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전문/비전문, 중심/주변의 경계는 여전히 뚜렷하다. 3. 한국 문학의 생산과 유통에서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문학 제도의 오래된 관성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스템에서 보면 한국문학은 ‘극소수’의 작가를 생산하고 연구하고 비평해 왔으며 ‘대다수’의 독자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이 한국문학 연구에서 독자 연구가 희소한 이유이며 같은 이유에서 비평의 관심도 작가나 작품으로 향한다. 문학을 향유하는 현장에서 독자를 배제할수록 독자는 추상적인 집합명사로 취급될 확률이 크다. 이를테면 낭독회와 같은 문학 이벤트를 의미 있는 문학 현장으로, 작가와 독자 간의 수평적 연대의 실천으로 돌아보기란 아직 한국문학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황유원 시인은 최근 낭독회에 참여했던 경험을 놀랍고 반가웠다고 말한다. 직접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과 만나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겹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에게 “낭독회는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목소리들이 부유하는 시간”이며 서로 다양한 “목소리들이 구름처럼 희미하면서도 분명하게 시각화되는 시간”4)이었다. 아직 낭독회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시인의 소감은 중의적이다. 낭독회는 일회적인 문학 이벤트지만 작가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과 감응은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를 다른 사람이 낭송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가 나를 떠났다는 것과 떠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다.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유는 굳이 따져보지 않았는데, 사실 나는 내 시를 낭송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늘 거리 조준에 실패하고 마는 느낌이다. (중략) 참석하신 분들이 낭송해준 8편은 좋았다. 호흡과 리듬이 나와 달라서, 시에 첨가된 이질적인 분위기가 시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낭송이 끝나고 토크가 이어졌다 (중략) 나는 난감한 질문을 선호하고, 난감함 속에 생각이 촉발되는 울퉁불퉁한 흐름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대답은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에 힘입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5) 낭독회는 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지는 시간이다. 낭독회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만나고 말하고 새롭게 듣는 시간이다. 현장의 즉흥성은 다른 생각을 촉발시킨다. 낭독회는 서로 함께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발신자가 수신자가 되고 생산자와 수용자의 자리바꿈도 일어난다. 이수명 시인이 말하는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은 문학의 현장이 상호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산성에 힙입어 나아가는 문학의 현장이 문예지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문학의 현장을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기존의 제도가 아니라 ‘작가-작품-독자’의 연결을 만드는 이질적인 리듬과 시간이다. 낭독회를 기획한 이성주 평론가는 시민들과 문학 작품을 함께 읽을 때 종종 ‘요즘 문학’이 ‘그들만의 문학’이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시민들은 동시대 문학 작품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문학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6)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낭독회에 관한 수많은 후기와 감상은 모두 그런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 문학 독자가 문학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크고 작은 낭독회와 강연, 독서 모임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이, 더 다양한 작가와 일반 독자들이 문학 현장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 문학에 유익한 일이지만 이런 교류를 기획하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제한이 따른다. 문학을 경험하는 일은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연계되어 있다. 2024년도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한국의 독서량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책을 선택할 때 서점이나 도서관 등에서 책을 직접 본다고 응답한 비율(26.8%)은 제일 높았다. 인터넷과 SNS의 책 소개나 광고를 본다는 비율(21.2%)은 그 다음으로 높다.7) 그러나 문학 현장의 전망은 밝지 않다. 2023년 정부는 지역서점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앞으로 서점 문화활동 지원 예산 역시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8) 코로나 상황의 종식 이후 다양한 도서 행사들이 활기를 되찾았지만 서점을 중심으로 한 도서 문화활동은 위기를 맞고 있다. 잡지 산업 역시 지속되는 경제 침체로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AI 기술과 디지털 시대라는 변환점을 준비하고 있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증진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발전에 중요한 기준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변화가 현행하는 문학 생산과 유통 방식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 핵심은 독자와의 상호 작용이다. 문학을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고민은 더 필요하다. 5. 기존 문단의 시스템이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익숙하다. 한 좌담에서 육호수 시인은 최근의 SNS를 통한 문학의 확산이 등단 제도를 거친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향유자’로서 현대시에 대한 진입장벽과 문턱을 낮추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독자들이 한국 시에 유입되어야 한국 시도 활성화된다고 말한다.9) 김건영 시인은 SNS에서 매체의 홍보나 자본을 업지 못하면 아예 독자의 손에 닿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SNS의 과도한 상업주의 경계한다.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김연덕 시인은 홍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면 SNS가 시 쓰기나 운용 방식에서 개개인의 질서나 미감을 즐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좀더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모두 일리 있는 발언들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문학은 디지털 시대와 얽혀 있다. 한국의 독서 문화에서 종이책 선호도는 월등히 높지만 정보 습득 선호 경로는 포털 사이트와 유튜브, TV/라디오, SNS 순으로 나타났다.10)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책을 선택할 때 정보를 얻는 방법에서는 서점이나 도서관 다음으로 SNS의 영향이 컸다. ‘종이책’과 ‘디지털 문화’의 공존 속에서 한국 문학에 필요한 것은 문예지의 쇄신만이 아니다. 한국 문학은 ‘종이책’ 바깥의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좌담에서 알 수 있듯 SNS는 창작자와 독자가 서로의 존재를 생생하게 마주하는 곳이다. 단순히 홍보를 목적으로 한 경우라도 SNS는 문학의 존재감을 알리는 편리한 수단이며 그 안에서 자기 표현의 매력과 홍보의 경계가 언제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시와사상』(2025년 봄호)에 실린 「동시대 패러디스트의 밈적 욕망」(최다영)과 「사람이 사는 무인도-시와 패러디, 육호수와 고선경의 시를 중심으로」(하혁진)는 변화된 문학 환경에서 시가 어떻게 동시대의 문화와 교류하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인터넷 밈을 섞어놓은 ‘힙한’ 시가 그 자체로 또 다른 밈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싸이월드’의 ‘감성체’를 활용한 시는 학습을 요구하는 대신 비슷한 시대와 문화 감각을 지닌 독자를 초대한다. 이 글들은 현대시와 패러디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대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의 변화로 읽는 것이 유용하다. 디지털 시대의 파편화된 문화를 수용하는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인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가 먼저 존재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만드는 문학 현장이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저변을 축소하기는커녕 더 독특한 취향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입구처럼 보인다. 보편성과 진지함, 엘리트주의와 전문 독자에 둘러싸인 시가 아니라 비록 소수의 지지를 받더라도 가벼움과 귀여움, 사랑스러움, 놀이와 유머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그 안에서 전파되는 중이다. 전문 독자에게 다소 부족했던 자질들, 문학 제도가 배제해 온 요소들이 새로운 호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가 밈이 되고, 문학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감성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향유하는 시대적 현상이다.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거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통의 보편성이나 대중성이 아니라 다양하고 고유한 소통의 방식을 만드는 일은 이제 능동적인 문학 행위이다. 시가 자신의 독자를 스스로 불러 모으는 일도 그러하다. 그것은 시에 좋은 일이다. 매일 접하는 수많은 콘텐츠들 사이에서 문학이 잠시 눈길을 끌고 멈추는 순간이 되는 일, 문학이 독자에게 이동하는 울퉁불퉁하고 즉흥적인 현장이 되는 일은 문학의 다양성, 문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의 목적이 불확실한 즐거움에 있다고 했다. 종이책 바깥에서도 시는 그 목적에 충실하다. 작지만 다양한 문학들의 난립과 행진 속에서 그 즐거움이 커진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서의 문학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닐 것이다. 1)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출판시장 통계」, p.67.(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2)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p.154. 3) 노태훈, 「한국문학의 현장」, 『자음과모음』 2025.봄, p.27. 4) 황유원,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는 중-소하서점 낭독회 후기」, 『포지션』, 2024.겨울호, p.248. 5) 이수명, 「소하의 밤」,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소하서점 낭독회 자료집, 2024, pp.75-77. 6)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p.172. 7)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292. 8)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181. 9) 김건영·육호수·김연덕, 「이달의 시 현장점검-그 평론가는 이제 출판사 마케터 아냐?」, 『현대시』, 2025.3, p.53. 10)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독서정책연구소, 「2023년 독서문화 통계」, p.17. ( 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비평 작품론1) 2) 1. 전환 서사들과 포스트 비평 최근 ‘포스트 비평’의 담론 지형3)에 동물·몸·정동·존재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환(turn) 서사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사유 및 원리와 부대끼는 과정에서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이어가는 와중에, 잠정적으로는 사물 세계의 ‘얽힘·연루됨’을 언어화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질문을 전환해 가던 차였다.4) 문제는, 이 전환의 사유들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볼 실마리를 명백하게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글쓰기로 육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체감에 있었다. 우선 어떤 이론이 근본적으로 사유의 관점을 조정케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시키는 글쓰기는 여전히 근대의 제도적 지식 체계나 원리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그러한 조건과 교섭하며 쓰는 몸 스스로의 행위 도식이 바뀌어야 가능할 터이지만, 몸이야말로 결코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관성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개인적 딜레마로 여겨진 것이 실은 어딘가에서 차근차근 내파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은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작업을 다시 살피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내내 ‘독자’ ‘읽기’ ‘쓰기’ 등의 문제를 통해 오랫동안 한국문학 비평 현장을 풍요롭게 증거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그 비평 행보를 찬찬히 살피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독자-읽기-쓰기를 주제화해 온 그녀의 작업이 실은 스스로의 몸을 바꾸고 그 몸과 연결된 배치를 바꾸는 과정 자체이기도 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개인적 문제의식 하에서 조금 구부러뜨리는 일이 허용된다면, 예컨대 어떤 연루됨(이때의 연루됨은 주체/객체를 넘어서는) 속 자기 위치를 감각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드는 과정을 글쓰기 자체가 수행해 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잠시, 과거 그녀의 말도 떠올려본다. 그녀는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5)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때는 평범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거느릴지는, 이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었다. 백지은 글쓰기의 이러한 수행적 의미를 ‘비평’이라는 장르의 특징과 관련해서 좀더 생각해본다. 비평이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주체/대상(객관)이라는 근대적 도식이 선명하게 구현되는 장르인 것 같다. 비평의 ABC에 대한 글들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듯, 비평은 대상(객관)으로 놓여 있는 텍스트를 경유하면서 말해지는 주체의(주관적) 형식이라고 여겨져 왔다. 즉, 자기를 말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출발하더라도 거기에는 늘 ‘주체/대상’ 구도의 긴장과 역학이 놓여 있는 것이 비평이다. 대상이 선행되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의미가 감상하는 이의 주관과 연동된 장르라는 특징 탓에, 종종 비평에 덧씌워진 고압적 이미지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백지은 비평에서 언젠가부터 이러한 ‘주체/대상’의 도식성이 여러모로 미미해지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다. 예컨대 (본문에서 다루겠지만) 역사를 ‘감각’하는 방식으로서의 ‘산책’을 주제화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의 도입부는, 대상 텍스트와 필자가 어떻게 얽히고 서로 스며들어 가는지 생생하게 감각시키는 퍽 드문 대목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다 읽고 나서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 산책이 뭐가 좋은 것일까”와 같은, 평범한 말들인데다가 어딘지 비평의 단호하고 명료한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이 진술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상의 호흡에 밀착한 이 조곤조곤한 말들은 읽는 이마저 부지불식중 그 활자에 스며들게 한다. ‘주체(필자)/대상(소설)’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듯한 서술 장면, 그리고 그러한 문장에 읽는 이까지 연루시키는 장면에서 누군가는 ‘비평은 텍스트와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나 최근 에세이적 비평 경향 같은 것을 얼핏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녀의 문장은, 어떤 망설임이나 흔들림이 감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언표화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명료하게 의미화하기 이전의 웅성거림을 감지시킨다. 기존의 장르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백지은의 글에는 여느 비평에서와 같은 단호하고 결연한 어조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확신에 찬 말로 스스로를 주장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향도 백지은의 비평과 거리가 멀다. 이런 특징들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백지은의 글에서 ‘마음’ ‘감정’ ‘기분’ ‘정동’ ‘객체’ 같은 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유물론의 사유가 백지은의 비평을 관통하고 있음도 확인해 두자. 그것은 ‘글 속 내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글 자체로 체화’되고 있는 중이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종국에는 ‘비평이라는 장르’의 성격마저 갱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앞서 적었듯, 비평 장르가 강하게 전제해 온 주체/대상의 근대적 도식은, 그녀가 천착한 ‘마음론’이 오히려 질문하는 것에 다름아니고, 그녀의 글쓰기는 곧 그러한 마음론의 사유를 체현한(emboded)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쓴다’는 일을, 자기로부터 무언가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다시 자기를 세우는 과정으로 설명했던 백지은의 말은 지금 스스로의 비평 궤적에서 활물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글쓰기의 특징이 그녀 자신이 골몰해 온 비평 주제와 관련해 필연적이리라는 점은 다음 장에서 좀더 살펴보겠다. 2. ‘마음’의 조건에 대해 :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2024) 읽기 백지은 비평의 주제와 방법을 최전선에서 확인시키는 글의 하나가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이다. 이 글은 김화진의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된 소설들을 중심으로 ‘마음’의 존재론을 그려간다.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통해 작동하는지 고찰하는 글이다. 이 글의 화두인 ‘마음’은 장르를 불문하고 최근 한국문학의 여러 작품을 통해 언표화되어 왔다. 그것을 ‘감정’ ‘정동’ ‘감응’ 같은 개념을 통해 접근하고자 한 비평적 논의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백지은의 글은, 그러한 개념, 이론들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마음’의 정체를 섬세히 풀어나간다. “적다보니 ‘마음은 대체 뭘까’ 싶은 의문이 소박하게 일어난다”는 식으로, 다루는 주제에 스스로 연결되는 과정을 솔기없이 노출하기도 한다. 물론 그녀의 글에는 마음을 둘러싼 최근의 인지과학, 정동이론, 문화연구 등의 사유가 행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경하게 전경화하지 않으며 정합적 논리로 이어가는 이런 장면에서, 비평도 하나의 작품(이라 말해지는 것)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는 마음이나 감정 등과 같은 것이 어떤 개체적 신체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겨온 우리의 통념을 먼저 뒤집는다. 이 글에 따르자면 마음은 단지 개인의 내부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다. 마음은 “누군가의 가슴속이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한다. 마음이나 감정이 누군가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실은 어떤 무수한 타자들과의 마주침과 연결 속에서 빚어지는 산물이라는 통찰이 저 말에 담겨 있다. 이때 “마음”이란 “이러한 연결 작용 및 상호 조절의 무수한 경우의 수로 된 결과물”에 가깝다. 즉 “마음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그녀는 이렇게 적는다. “내 마음은 물론 나라는 한 사람의 성격과 내가 처한 상황과 나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생겨난 사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생겨나기까지 벌어진 일들은 개인에 귀속되지 않는 집단의 또는 공동의 조건 안에서 복잡하게 출몰하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움직인 결과이므로 또한 사회적인 산물”이다. 단,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다. 첫째, 백지은이 말하는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은 어떤 균질적 덩어리(mole)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마음론은 마음의 보편성이나 균질성이 아니라, 고유한 마음들이 단지 개인적, 사적인 것으로 귀속되기 이전 구체적인 마주침과 연결을 통해 각각 다르게 발현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녀는 “우리가 몸짓이나 표정으로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마음에 보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주요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녀의 말처럼 구체적 조건과 무관한 보편적 마음이나 감정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마음, 감정, 정동 등은 살아있는 존재 모두가 지니고 있다해도, 그럼에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나 특정 조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발현되게끔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확인하지 않는 마음 이야기는 어딘지 불순하고 불철저한데, 백지은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을 말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그녀의 마음론이 존재의 자기구성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음은 분명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정동이나 역량과 무관하게 그저 수동적으로 결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마음론’은 기계적 구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관련하여 ‘나’라는 감각 행위자의 고유성 역시 각별히 강조되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잠시 이런 대목을 보자. “우리의 마음이 사회적 구성물이라 해도, 어떤 공동의 지평에서 바로 그러한 마음이 ‘내’게 지어져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내’가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고유한, 중요한 사실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으로 인해 ‘나’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과거 백지은의 말, 즉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이라고 했던 것이 오버랩된다. 자기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이 단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세계관은 여기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이러한 마음론이 어떤 사유와 고민으로부터 전개된 것인지 그 시간의 궤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의 마음론은 단지 비평에 소용되는 이론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자 그것이 만들어낸 세계관의 한 발현인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내 몸 어딘가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신체 활동에서 구성된 산물이고,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나 경험을 통해 해석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를 움직이고 또한 내가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여 간다는 이 논의의 정합성은 ‘이론’이라는 말에 대한 항간의 오해를 교정하는 데에도 큰 참고가 될 것 같다. 더욱이 대상으로 다뤄진 김화진 소설이 마음론의 매개, 도구로만 소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히 소중하다. 백지은의 글은 쓰는 이(주체) 스스로 소설(대상)에 스미고 얽히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대상(소설)의 고유성은 내내 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따뜻한 공감을 상찬하거나 낭만화하는 식으로만 읽히기 쉬운 김화진 소설을 구출하고, 작품이 지닌 “‘마음’에 관한 탐구 서사”로서의 의미를 풍부히 드러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각 텍스트가 지니고 있을 고유한 의미를 발하도록 하면서, 그럼에도 저변의 관통하는 논리를 발견-전달하는 이 장면은 오늘날 비평적 글쓰기 자체가 전환(turn)하는 한 사례로 읽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 감각하는 역사에 대해 : 「안으로 나가는 역사」(2019) 읽기 한편 백지은 식의 마음론은, 역사를 보는 관점과도 흥미롭게 연결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보다 앞서 발표되기는 했으나, 텍스트를 따라 걷는 이의 심상과 호흡을 그대로 노출하며 시작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이 글은 박솔뫼 장편소설 『미래 산책 연습』을 통해 역사와 나/우리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지 찬찬히 짚어간다. 이 글 역시, 무언가를 장악하고 자기화하여 독자에게 보여주겠다는 비평적 자의식 등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백지은 글의 특징, 즉 텍스트와 나란히 혹은 그것에 스며들어 발화를 이어가려는 비인칭적 발화자의 흔적도 이 글에서 어김없이 엿보인다. ‘비재현’ 사유와 역사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특정 개념이나 이론이 박솔뫼 소설을 압도하거나 유리시키는 법은 없다. 『미래 산책 연습』에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제재로 등장하지만 박솔뫼 소설이 그러하듯 그것은 직접 재현되거나 의미화되지 않는다. 단지 ‘산책’이라는 행위와 그 동선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백지은의 결론부터 적어두자면, 소설 속 산책은 단지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리로 하는 명상”이고 사유의 기반이자 감각-접촉의 형식이다. 그녀의 분석을 통해 주인공의 산책은 부산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과거 사건과 접속하고 미래를 기억하며 현재를 질문하는 역사적 행위성으로 의미화된다. 여기에서 부산 역시 단순한 소설적 배경이 아니다. ‘부산’은 사건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고 교차하며 구성되는 유동적 장이다. 부산은 과거의 역사-현재의 만남-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서로 얽히는 시/공간적 밀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세계가 복수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증거하는 장소다. 박솔뫼 소설 속 자기, 나, 역사 등에 대한 백지은의 설명은 예컨대 일종의 연결신체(assemblage)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론’과 연동되는 것임도 물론이다. 이 글의 출발지점은 ‘이야기가 곧 역사/세계가 아니’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소박한 지점이다. 도입부는 “소설에 드러난 역사/세계는 역사/세계에 대한 ‘인식’”일뿐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본격적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때, 박솔뫼 소설과 역사 제재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등장함직한 ‘재현’ ‘표상’ 같은 개념은 일절 구사되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백지은의 글에서 개념이나 이론은 구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감각과 경험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이 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의 글을 포함하여, 그간 많은 비평은 강단(논문)의 언어와 친연성을 떨치지 못하며 본의 아니게 개념과 이론의 생경함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점은 비평의 독자와 장(field)을 제약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도 여겨진다. 또한, 오늘날 많은 비평 논의가 근대적 재현·표상 너머를 역설할 때조차, 어쩔 수 없이 재현·표상의 언어를 경유하고, 의도치 않게도 다시 기존 재현·표상의 원리가 강화되거나 재생산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서 적었듯 여전히 비평이 근대의 제도적 글쓰기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탓이 우선은 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백지은의 글은 이러한 곤경을 가뿐히(물론 치열한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한) 넘어서는 듯 보인다. 아예 비재현, 비표상의 언어를 고안하고 발명하는 과정 자체가 그녀의 글쓰기에 함축된 듯 보인다. 예를 들어 그녀의 글은, 박솔뫼 소설 속 ‘역사’는 “생각-가정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가정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백지은 식 조어(造語)인 ‘생각-가정’은 단지 “상상으로 꾸며진 가상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음과 불확정의 상태를 가정한 채로 존재하여 알 수 있음과 확정의 상태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위치의 역사/세계”다. 기록, 증언과 같이 익숙한 재현 개념의 한계를 사유하면서 그 너머를 말로 움켜쥐려는 그녀의 고투는 분명 박솔뫼 소설을 포스트 재현, 포스트 메모리의 개념을 통해 읽는 방법과 닿아 있지만 그 목적이나 효과는 분명 다르다. 이 “생각-가정하는 역사”는 어떤 유일무이한 진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이탈시킨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감각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이때 ‘역사적 사실’은 “다만 느슨하게 연계되어 세계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부로서 전체를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통상, 부분의 합이 전체라거나 전체가 곧 부분의 우주를 품고 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통념은 이 글에서 낡은 것이 된다. 백지은이 부상시키는 이러한 연결적 관계들은 어떤 중심/주변의 위계도 없고 총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병렬적인 흐름으로 이미지화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이른바 주체/대상 도식 속에 배치되어 사유되던 이 세계를 다르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인다. 백지은은 박솔뫼 소설 속 “‘나’의 생각-가정”은 “대상에 대한 통제나 지배의 가능성을 거의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의 관점을 주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것도 중심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이 곧 ‘자기’에 대한 근대 이래의 서사를 다시 쓰는 장면의 하나임도 기억해 두고 싶다. 그녀가 말하는 ‘생각-가정’은 흔한 ‘자기’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너머로 개방되며 연결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거나 중심적이거나 주변적이거나 하는 상이한 위상”이 두어지지 않는다. ‘안으로 나가는 역사’라는 제목의 수수께끼도 이제 풀리는 듯하다. 공식 기록 혹은 객관화된 기록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 역사는 그녀의 글에서 오히려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을 향해 접속하려는 움직임, 방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은 어떤 진공 상태의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산책자 역시 단지 걸으며 보는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안의 감각, 사유, 몸의 미세한 반응 속에서 사건을 감지하는 자다. 이때 역사는, 바깥에 그저 놓여 있는 진실이 아니다. 역사는, 삶과 함께 유동하며 점점 안으로 향해오는 감각의 기원에 가깝다. 거칠게 말해, ‘역사/내면’이라는 말처럼 정반대의 벡터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범주들이 이 글에서는 서로를 향해 작동하고 있고, 그 얽힘의 관계가 섬세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이제까지 살핀 백지은의 글과 말에도 상응한다. 그녀가 밀어붙인 비재현·비표상의 말들은 곧 이 세계의 원리를 찬찬히 응시해 온 그녀의 마음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만든 것이 또한 재현·표상을 흘러넘치는 어떤 세계였을 터였다. 비록 재현 체계 안에서 쓰여지는 글이지만, 그럼에도 재현 체계·제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감각시키려는 고투가 백지은 비평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4. 균열을 내고 거기에서 장소를 만드는 비평 백지은의 글들을 읽으며, 이 세계 속 존재나 사건의 연루됨을 발견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들어가는 글쓰기에 대한 개인적 고민을 더 밀어붙여도 될 용기를 얻는다. 읽기-쓰기의 순환적 수행성에 대해서도 큰 자극을 받는다. 읽기(듣기) 없이 쓰기(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당연하지만 오늘날 새삼 중요한 사실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사실 전환(turn)을 둘러싼 이론, 담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말과 담론은 자주 인플레였고, 정작 그것이 제대로 체현, 수행되어 본 일은 썩 많지 않았다고도 생각된다. (과거라면 ‘실천’ 같은 말로 표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체현과 수행이 어쩌면 늘 이 세계의 궁극적 과제이자 관건일 터였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좀처럼 관성과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글은 종종 제자리를 맴돈다.지금, 백지은 작업의 극히 일부분만 읽은 셈이지만, 제도적 비평의 현장에서 그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엿보았다고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유례없는 고민이 이어진 지난 십여 년을 백지은의 행보가 이렇게 증거해 주는 것 같다. 포스트 비평의 형질 변환이 선언이나 논쟁이 아니라 이렇게 글자의 안쪽에서부터 차분하게 진행되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제도의 관성, 시스템의 회로에 균열을 내고 빈틈을 만들며 그곳을 장소화해 온 그녀의 작업에 많은 언어들이 닿고 연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을 기존 방식의 ‘비평’ 같은 말로 반드시 명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하는 편이어서 적는 말이기는 한데, 분명한 것은 늘 각 시대마다 요청되거나 그 시대와 정합적인 글쓰기 양식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백지은의 작업에서 엿본 것도 바로 그에 대한 도약의 한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1)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현대비평』, 2025년 여름호)을 수정 보완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2)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백지은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 /「안으로 나가는 역사」(『문학동네』, 2022년 봄호)이다. 3) ‘포스트 비평’이라는 말의 문제의식 및 그 정황에 대해서는 2010년대 이래 영미 비평-이론계 맥락에서의 논의가 선행한다. 예컨대 브뤼노 라투르의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Critical Inquiry Vol. 30, No. 2, Winter 2004)이 제기한 쟁점이 서구 비평-이론계에서 본격 맥락화되는 것은 Elizabeth S. Anker, Rita Felski, Critique and Postcritique(Duke University Press, 2017)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론을 한국적으로 맥락화하고자 하는 최근의 논의들(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 하권 / 인아영, 「비평과 사랑 : 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을 포함하여, 현재 한국어 문학 비평에서 기존과 다른 패러다임의 글쓰기가 전개되고 있는 양상 전반을 지칭한다. 4) 이에 대해서는 졸고, 「비평, 플러스 알파 : ‘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 「마음의 유물론」(강우근 시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해설) 등. 5) 백지은, 「독자 시대의 문학과 쓰는 개인의 형식」,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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