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여름호(제146호)
움직이는 시 : 김이강, 『트램을 타고』(문학과지성사, 2024) _신수형, 『무빙워크』(아침달, 2023)
1. 시는 움직인다
시는 움직인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는 큰 거부감 없이 나의 의견을 수용할 것이다. 왜일까?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그러나 ‘시의 움직임’ 같은 것이 당연한 문제로, 심지어 그냥 문제로 취급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의 긍정은 시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몇몇 가까운 사람과 이 문제를 상의해보려 했을 때, 누군가는 내게 흐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움직이든가 말든가, 또 시작이네……”
하지만 ‘시가 움직인다’는 문장은 들여다볼수록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보이는 그대로라면 명백히 틀린 진술인 그것은 (시가 무슨 수로 움직이겠는가?) 외견상의 터무니없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말은 독서의 층위에서 진실이다. 우리는 시를 독해하는 동안 실제로 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으며, 더 정확히는 그런 인상을 받음으로써만 시를 읽어나갈 수 있다. 서사적 전개에서 비롯되는 움직임이 아닌, 시가 지닌 전혀 다른 층위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과정이 곧 시의 최소 ‘의미(내용)’를 구해내는 방식인 것이다. 시어가 지닌 함축성은 독자의 읽기 강도에 따라, 시의 움직임을 꽤나 역동적인 수준으로 이끌어내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격차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겪는 것—시간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영화에는 그들이 트램을 타고 도심과 교외 지역을 오가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이동하는 장면을 타고 이동한다.
[……]
그날 본가에 내려가다가 ‘네가 말했던 건물’을 스쳐지나갔어. 기차가 그렇게 했지.
[……]
기차의 객실 창문은 기억 격차의 집합을 안고 있는 장소 그 자체다. 누군가가 ‘그래서 기억 격차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달리는 기차의 창문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1)
최근 읽은 김이강의 시집 『트램을 타고』와 신수형의 시집 『무빙워크』에서 나는 어딘가 독특한 움직임을 발견했다는 막연한 인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우연히 시인 김유림이 발표한 위의 산문을 접하게 되었다. 물론 그의 글은 시에 관한 이야기랄 수 없다. 이것은 기차와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억하기’가 정확한 사실로의 회귀가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던 것으로 돌아왔다는 확신을 느끼는 일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기억은 언제나 격차로서 존재한다. 김유림에 따르면, 이와 같은 ‘기억 격차 이론’은 기차를 타는 상황의 가정을 통해 심화될 수 있다. “객실 창문”은 기차 (만)의 격차 풍경, 즉 기억 격차의 집합을 안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기차는 언제나, 어디론가 이동하고 그러므로 기차 (만)의 움직임을 생성한다.
두 시집과 김유림의 글을 번갈아 읽던 나는 이런 생각에 닿게 되었다. 시는 움직인다. 그런데 어떤 시는 기차의 탑승객, 기차의 운전수, 또는 기차 밖에서 기차를 바라보는 누군가로서가 아니라, “객실 창문”을 지닌 ‘기차가 그렇게 하듯’ 움직인다. 그때 시를 읽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기차와 시의 움직임이라는 이 곤란한 겹침에 관해 말해보기 전에, 김이강의 시를 읽는 동안 자연스레 생성되는 움직임을 직접 따라가보는 게 좋겠다.
성당이나 서점을 지나 걸었다
오래된 다리 위에서 클레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빨리 와.
응. 빨리 갈게.
클레르의 운동화 바닥은 안쪽부터 닳는구나
걷는 사람들의 오른 뺨이 석양을 받고 있다
[……]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였기 때문에 클레르의 얼굴엔
빗금처럼 어둠이 쏟아졌다
잠시 후 우린 잊고 있던 도시락 가방을
클레르의 배낭에서 꺼낼 수 있었다
—「나와 클레르의 오후」 부분
시의 화자는 단순히 “성당이나 서점을 지나”갈 수 있다. 그럴 때면 시를 읽는 이 역시 “성당이나 서점을 지나”가게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화자의 직접적인 ‘걷기’와는 달리 “성당”과 “서점” 사이를 종합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통과해내면서, 그와 동시에 “성당”과 “서점”이라는 단어가 개별화하는 기억-이미지의 연쇄 및 엮임을 통해 그것들을 지나간다. 이 같은 ‘새로운 전체’(엘리엇 )는 시어의 표면적인 움직임이 형성하는 잔상이다. 그런데 이 잔상은 시가 씌어진 지면으로부터 과하게 높이 솟아오를 가능성이 있다. 잔상이 생성한 특정한 심상에 갇힐 때 우리는 사실상 시를 떠난 것이나 다름없다. 시의 움직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시는 읽는 이가 일정량의 자체적인 운동성을 획득하게 하면서, 지면 위를 직접 걷도록 한다. 가령 “성당”이나 “서점”의 잔상에 머물러 있던 우리가 갑작스레 “오래된 다리 위”로 이동하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잡아야 할 때, “빨리 와”라는 시의 거듭되는 재촉 직후,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이 클레르가 아닌 “클레르의 운동화”일 때, 시를 읽는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곳을 걷게 된다. 빠르게 이어지는 장면의 전환을 그리 크지 않은 시의 보폭이 완전하게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두 발이 애매하게 지면에 붙들리는 것이다. 그 어설픈 거리감으로부터 시와의 기묘한 동행이 강제된다. 화자와 우리가 클레르를 향해 다가가는 이동의 과정은 시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운동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와 클레르의 오후」에는 방금 한 이야기들로만은 미처 다 설명되지 않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 “성당”과 “서점”을, “오래된 다리 위”를 지나는 내내 우리를 스쳤으나 끝내 포착되지 못한 움직임. 우리는 곧 그런 것을 클레르의 “안쪽부터 닳는” “운동화 바닥”,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놓인 “클레르의 얼굴”, 그 위로 빗금처럼 쏟아지던 어둠 사이에서 찾으려 한다. 또 하나의 분주한 움직임. 하지만 그 가운데 발생하는 일시적이고 이상한 “조우”(「클레르의 빛」)는 우리의 것이 아닌 듯하다. 마주치는 즉시 그것은 “잊고 있던 도시락 가방”과 “클레르의 배낭” 뒤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이 부단히 잇고/잊는 기억의 격차를 시의 움직임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답을 조금 미루며, 신수형의 시를 보자.
일요일이 지나자 모든 게 이해되었다
비닐은 썩지 않았고
[……]
괜찮습니까
어제가 와도
다시 출발하겠습니까
[……]
(깨어납니까)
멈출 때마다 기억이 났으므로
한 발을 들고
자꾸 묻게 되었다
—「시차」 부분
「나와 클레르의 오후」가 이동성을 통해 생성되는 시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면, 「시차」의 방식은 덜 직접적이다. 「시차」는 “일요일이 지나자”와 같이 시간의 변화를 지시하는 구절을 통해 ‘시차’를 운용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요일이 지나자 발생한 일의 성격은 느슨히 흘러가던 시의 전개에 급격한 단절과 전환을 불러온다.
“모든 게 이해되었다”는 선언은 ‘일요일’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문장이다. 하지만 일요일 이후를 결정짓는다는 그 “모든 게” 대체 무엇일까? 사실상 대단한 의미값을 가지지 않는 이 문장은 이어지는 “비닐은 썩지 않았고”와의 접촉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간 미심쩍은 접촉은 ‘일요일 이후’를 무한한 확장을 향해 밀어 넣는 동시에, 비닐이 썩지 않는 비교적 현재의 시간 속으로 가두는 힘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시를 장악하는 이 운동은 단순한 혼란처럼 보이지 않는다. “괜찮습니까//어제가 와도/다시 출발하겠습니까”라는 목소리는 그런 것이 이곳의 규칙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수상하고, 한편으론 불안한 이 이종 (異種)적인 순환[“(깨어납니까)”] 속에서, 우리는 특수한 종류의 ‘조우’가 있었다는 느낌을 끝내 확신하게 된다. 멈출 때마다 반복되는 “기억”은 “모든” 것을 되살려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여기는 데서 내 것이 된다.
『트램을 타고』와 『무빙워크』는 시의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기존의 논리 위에 “순종적으로”(김이강, 「해방촌 언덕」) 자리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시의 ‘기차’를 탄 것이다. 기차를 탔다는 것은 이들 시집이 기본적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과 같은 지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른 뜻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시집에는 시집의 움직임을 떠받드는 토대가 개별 시의 움직임 속으로 태연하게 침입한다는 문제가 추가로 놓인다.
이렇게 말해보자. 시가 말했던 그 건물을 우리는 (기차를 타기만 한다면 ) 언제든 스쳐 지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시집은 그 ‘스쳐 지나가기’를 행한 것이 우리가 아니라 “기차가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각인함으로써 움직인다. 두 시집을 읽는 동안 화자나 시인이 아닌 시가 “이동하는 장면을 타고 이동”하는 종류의 특수한 운동을 체험하게 되는 이유이다. 레이어가 한층 더해진 이 이동성을 통해 ‘시는 움직인다’라는 테제가 다시 움직인다.
2. 제자리걸음을 걸으리라 생각하며 전진
—『무빙워크』의 경우
초록색 가죽 가방을 메고
여자가 지나간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니
이 집은 국수가 일품이다
네 말과는 약간 다른 구석
그 구석에 앉아
오래된 모서리들과 독대한다
이건
꿈속의 꿈이군
계속 갈라지는 길이야
흔들리는 의자처럼
드르륵 문을 밀며 들어오는 얼굴은
어떤 얼굴인지
돌아본다
—「테이블」 전문
『무빙워크』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순환이 하나의 공간 (‘테이블’)을 지배한다. 이런 상황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테이블」의 화자는 정확히 어떤 테이블에 있는 걸까? 우선 그는 “국수가 일품”인 “이 집”에 있다. 하지만 그가 국수를 먹고 있다는, 적어도 국수 가게에 앉아 있다는 확신은 계속해서 미끄러지는데, 그것은 ‘지나가는 여자’나, “꿈속의 꿈”, 혹은 “문을 밀며 들어오는 얼굴”과 같은 “국수”와 이질적인 관계의 단어들 때문은 아니다. 우리의 확신을 주저하게 하는 것은 단어 자체라기보다, 본래 말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집요하게 대체하는 어떤 힘이다. 침묵과 여백의 형태로도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않는 그것을 우리는 말들의 “틈새”(「트라이앵글」)로서 감지한다. 『무빙워크』의 ‘틈새’는 말의 퇴각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 들어찬 말과 밀려난 말의 힘이 생성하는 장소, 그 자체로서 드러난다.
수요일에서 수요일까지 빗금을 그을 때
지금은 가까운 미래입니까
—「무중력」 부분
가령 「테이블」에서 모든 문장은 서로를 향해 “빗금을” 치며 존재하는 다른 “수요일”들처럼 보인다. “초록색 가죽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여자를 (빗금) 바라보는 화자는 (빗금) 그 얼굴이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빗금) 기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언뜻 “가까운 미래”처럼, 서로 닮은 듯 이어지는 시상의 마디마디에 이처럼 미세한 빗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감지하는가? 그것은 “내가 죽는다니”와 “이 집은 국수가 일품이다”의 연쇄, 이들이 생성하는 느리고 육중한 비약 때문에 환기된다. 비약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이 시는 자신의 모든 문장에 빗금을 긋는 것이다.
“빗금”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해석은 그곳이 바로 시의 진리가 숨겨진 장소, 또는 무한한 잠재성의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빗금”은 “객실 창문”의 존재가 그러한 것처럼 시집이 움직이는 원리를 스스로 지시하는 장소처럼 보인다. 무겁고 둔탁한 “제자리걸음”, 도무지 “전진”이란 것을 가능케 하지 않는 “무빙워크”의 원리를 말이다.
신호가 바뀔 때까지 헛걸음을 걷는다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제자리에서 걷는다 신호가 바뀌고 다시 전진한다 전진한다 돌아가게 될 방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문 닫힌 상점들을 지나고 골목들을 지나고 오래된 가로수들을 지난다 곧 끝날 때까지 최대한 전진한다 전진과 나 사이에 틈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건 전진인가 나인가 전진과 나 사이를 들여다볼 수 없다 저만치 앞에 또 횡단보도가 보인다 전진 중인데 신호가 바뀌지 않고 있다 한 번 더 제자리걸음을 걸으리라 생각하며 전진한다 새해이므로 기꺼이 제자리걸음을 걸으리라 생각하며 전진한다
—「무빙워크」 부분
화자는 “한 번 더 제자리걸음을 걸으리라 생각하며 전진”하거나, “기꺼이 제자리걸음을 걸으리라 생각하며 전진한다”. 이러한 종류의 전진은 제자리걸음과 그냥 걸음과 혹은 그저 걷는다는 생각과 무엇이 다른 걸까? 그는 “전진과 나 사이에 틈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이상한 전진을 반복하지만, “헛걸음”일 수밖에 없는 이것은 그 무수한 어긋남을 통해 다른 것을 한다. “무빙워크”의 둔한 움직임은 맨눈으로는 들여다볼 수 없으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전진과 나 사이”의 빗금, 그것을 딛고서야 우리의 “헛걸음”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3. 사랑을 하는 클레르의 탄생
—『트램을 타고』의 경우
다정하게 네 손을 찾아보기로 했어
내 검은 장갑 한 짝을 끼워놓으니 알맞았지
춥고 그립고 소용없었는데
곧 녹아서 없어질 것 같은 산을 올려다보며
시원하다고 말한 건 너야
그렇긴 했지 아이스크림 같았어
네가 준 두 권의 책
마주 잡은 두 개의 맨손
맨손으로 지어서 맨숀 아파트가 되었다고
어른들이 농담하던 아파트 얘길 했어
너는 깔깔깔
나도 깔깔깔
그런데 그것 참 이상했지
아이스크림 장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했지 않니?
단지 두 개를 사 먹었을 뿐인데
—「운하에 모이기—빗금 친 겨울, 이태원, 남산, 손은 얼어버렸고 와인 바에 당도했을 때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전문
“빗금 친 겨울, 이태원, 남산, 손”과 “와인바”가 모인 이 ‘운하’에는 남다른 규칙이 있는 듯하다. “손”에서 “산”으로, “맨손”에서 “맨숀”으로 구르듯 이어지는 단어의 연쇄는 운하의 규칙을 느슨한 끝말잇기 같은 것으로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곧 녹아서 없어질 것 같은 산”에서 연상된 “아이스크림”이 “맨손”과 “맨숀”을 거쳐 “아이스크림 장수 할아버지”에게로 건너갈 때, 우리는 이곳의 끝말잇기에 상당한 시차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두 단어 사이에 있는 그것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은 아닐 것이다. 산을 보고 생각 난 ‘아이스크림’에서 충분한 시간이 흐른다고 하여 할아버지의 그 “아이스크림”에 닿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의 빗금에는 그보다 더 큰 수준의, 말하자면 무언가가 온전히 망실된 수준의 간극이 있는 듯하다.
클레르에겐 무덤이 없다
클레르의 바다에
오렌지빛 석양이 곧 내릴 것 같은데
그런 걸 클레르의 비석이라고 하면
진전 같은 게 있을까
— 「클레르의 빛」 부분
이 무거운 간극에는 ‘죽음’이랄 수밖에 없는 것이 연상된다. 클레르의 ‘없는 무덤’은 시가 시의 기차 위로 올라탈 때, 그렇게 사랑에 빠진 자들과 같은 위상에 서게 될 때 결정된 문제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오렌지빛 석양”에 언제든 “클레르의 비석이라”는 이름을 붙여볼 수도 있는 화자는 그런 것을 주저한다. 클레르의 없는 무덤에 비석을 세워 죽음을 완료하는 일은 시의 “진전 같은 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의 가능성이란 오직 “이미 이루어진 죽음이라는 기반 위에서만”2) 발생한다. 잇고/잊히며 생성되는 기억의 격차와 같은 것으로서, 트램의 이동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이루어진 죽음”들, 그 “빗금” (「무중력」)과 함께 동시적으로 탄생하는 글쓰기의 장소이다.
다르는 생각한다. 다르는 그 애의 이름을 명으로 기억한다. 아마 정확한 기억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명의 얼굴을 떠올리면 사진에서 본 자신의 어린 얼굴이 그 애의 자리에 들어가 있다. 어느 순간엔 섬뜩해지기도 하는 기억의 형체에는 어떤 실마리도 없다. 그냥 그 자리에 그렇게
다르는 있다. 내내 생각을 한다고 여겨지면서. 시계탑 아래에서 나쁜 일을 목격 중인 듯이. 근처엔 유치원이 있고 놀이터가 있다. 다르는 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음을 깨닫는다.
—「다르의 새벽」 부분
「다르의 새벽」에 이르면 조금 다른 층위의 “빗금”을 마주하게 된다. 시를 읽는 내내 발생하는 것은 새벽의 장면이 매우 근본적인 수준에서 바뀌었다는 이상한 감각이다. 생각하고 기억하던 다르는 마치 우리가 그새 무언가를 놓치기라도 했다는 듯 “그냥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는 사물이 되어 생각을 한다고 여겨진다. 운동의 주체였던 “다르”가 사물로, 사물에서 다시금 의식의 주체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다르”와 “다르” 사이에는 “섬뜩해지기도 하는 기억의 형체”가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생각하는 “다르”는 그 애의 이름을 명으로 기억하는 “다르”와, 그냥 있는 “다르”와, 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음을 깨닫는 “다르”와는 다르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격차로서 존재하는 “다르”들이기 때문이다.
이 잊히며 이어지는 “다르”들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다르”들의 “기억 격차의 집합을 안고 있는” 장소, 트램의 창문이다. 창문의 존재가 부각될 때, “다르”는 단지 그 창문 속의 인물만은 아닌 방식으로도 있을 수 있다. “다르”는 무수한 죽음의 중첩을 안고 있는 기차의 객실 창문을 지시하는 것으로 존재하며, 그것은 곧 “자기 언어 행위의 지리학”3)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종류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4. 시는 움직인다
꿈도 아니고 전생도 아닌 곳에서
우린 조우 중이다
—「클레르의 빛」 부분
이들의 시는 움직인다. 기차의 탑승객, 기관사 또는 기차 밖에서 기차를 바라보는 누군가로서가 아니라, “객실 창문”을 지닌 “기차가 그렇게 하듯” 움직인다. 시가 이런 식으로 움직일 때 우리는 하나의 바로 선 ‘나’로서가 아니라 시가 이동하는 장면을 타고 이동하는 “다르”처럼 움직일 수 있다. 단순한 말의 차이처럼 보이는 이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로 생각된다. 문학이, 시의 격자가 우리에게 기차의 안과 밖에 거주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고 믿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실의 구석구석을 생생하게 활보하는 트램을 선택하거나 세계와 차단된 트램이라면 차라리 타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런데, “시간의 원활한 흐름을” 기꺼이 “방해받는” 자로서, 끝없는 망실을 통해 움직임을 이어가는 자로서, 우리 모두가 이미 어떤 종류의 기차에 올라타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이들의 시는 거기서 출발하고 이렇게 질문한다. 기차라는 세계의 끝에 고집스레 머무르며, 그것을 타고 움직이는 방식으로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나가서 그 속으로 들어가고, 나가서 그 속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살며 기다릴 수도 있을까? 그 모든 행위를 섣불리 기각하거나 반대로 기념하는 일만큼은 단호히 거부한 채로 말이다.4)
두 시집은 분명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을 하는 클레르’는 “꿈도 아니고 전생도 아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이 무한한 잇고/잊기에 대해 “우린 조우 중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1) 김유림·임효진, 「기억 격차」, 〈비유〉 2024년 5/6월호.
- 2) 미셸 푸코, 『상당한 위험』, 허경 옮김, 그린비, 2021, p. 30.
- 3) 필립 아르티에르, 해설 「말의 체험을 만들기」, 같은 책, p. 91.
- 4) 필립 로스, 『왜 쓰는가』,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23, p.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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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1. ‘자명한 것이 없는’ 목소리들은 지금 우리 시문학장에 새로이 등장한 신인들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물론 2025년 올해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세계는 이제 막 출발점에 위치한 셈이다. 그러니 각각의 시인들이 최소한 한 권의 시집으로 대변될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어느 정도 드러내기 이전까지 그것을 규정하는 일은 그닥 의미를 갖기 어렵다. 한 명의 시인이 지니는 시세계를 겨우 2편의 시로 설명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주어진 원고를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어떠한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지닌 기묘한 고유함에 대한 증명이자 그 욕망이다. 미래파 시기의 2000년대와 포스트-미래파의 201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이란 카테고리에 종종 부여되는 키워드인 난해성과 추상성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의 문장을 조금 바꿔 말해본다면 ‘시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미학이론』)는 맥락을 분명히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개인적이고 독자적인 사유행위에 속한다는 점 역시도. 그렇기에 이번 글에서 다루어야 하는 시인들의 시를 하나의 통일된 경향으로 정리하는 것은 더더욱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지금의 젊은 시인들이 어떠한 감각과 인식 혹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란 층위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일에 있다. 왜 이들은 낯설고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선으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가. 그 고유하고도 기묘한 감정과 마음은 그들의 언어가 지닌 깊은 심연이기도 하다. 이 심연은 (앞으로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현재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부를 향한 AI의 열풍 그리고 주가 5000선 달성과 강남 아파트값 폭등이란 먹고사니즘의 거센 파도와는 무관할 것이다. 즉 실제하지만 실제하지 않는 거대하고도 치밀한 압력들 속에서도 문학을 하는 우리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낯선 무언가들을 들리지 않더라도 발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에게 도착한 시인들의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는 이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어이 쓰고자 하는 언어이자 증명이며 욕망인 것. 언제나 알 수 없고도 이상한 우리의 세계 속에서 시를 쓰는 인간들은 여전히 있다. 과거와 지금에도 그리고 예측하기 불가능한 미래에서도. 하면 그들은 도대체 왜 쓰고 왜 말하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명확한 답이란 없겠지만 중요한 맥락은 언어의 표면이 아닌 이면이자 심연이며 각기의 시인들이 지닌 기묘한 나로서의 고유함이란 무엇인가를 섬세하게 살펴보는 것에 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명심해두자. 이 글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시라는 굳어진 규정이 아닌 시적인 것은 모든 시인들에게 깊숙이 그리고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명명 불가능한 무엇일 따름이니까. 2. 세계에 대한 깊은 절망의 알레고리란 언제나 중요한 지점은 시인들은 세계에 대해 절망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굳이 보들레르나 이상을 끌어들여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이 측면에서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은 분명 주목되는 흥미로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이 시속에서 줄기차고 집요할 정도로 반복하는 “아주 많은 복숭아”란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실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다음의 구절을 보자. 유일하고 거대하다. 복숭아와 숲 사이 숲속에서 복숭아로 가는 길을 삽으로 찌르는 사람들 복숭아로 가는 사람들 구덩이에 쪼그려 앉아 말한다. 그의 위로 복숭아나무 가 자랄 것이라고 만들 것이라고 아주 많은 복숭아를 (…) 불어나는 숲으로 가려지는 길 불어나는 숲으로 가로막힌 다 막힌 길의 끝에서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복숭아 하나 상 해가며 무너진다 무너지며 쏟아지는 복숭아 아주 많은 복숭아 길의 끝이 비어 있다 그리고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 방성인, 「복숭아로 가는 길」, 부분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에서 복숭아란 단어가 주는 느낌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복숭아란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처럼 ‘유일하고 거대한’ 복숭아들로 가득한 우리의 세계. 달고도 맛있는 복숭아는 일견 먹고사니즘과 더 많은 돈에 대한 당연하고도 평범한 욕구의 존재를 우리에게 기묘하게 비틀며 가리킨다. ‘숲을 빠져나오고 다음 숲으로 향하더라도’ 우리는 복숭아가 주는 달콤함과 쾌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렇다면 “복숭아 없는 복숭아나무들이 모여 복숭아 없는 숲”이란 것은 사실상 우리의 세계 전체가 이미 ‘유일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복숭아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 되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또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복숭아들인지 혹은 아닌지를. 균일하고도 단일한 욕구들이자 이데올로기이며 상징계적 질서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세계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복숭아 그려진 팻말이 흐려지’더라도 끊없이 “불어나는 숲”과 같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이질성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는 진실. 시인은 이를 이렇게 말한다. “막힌 길의 끝에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당연한 욕구로 교환될 수 없는 ‘상한 복숭아’. 내 자신이 사실은 복숭아였다는 점을 손쉽게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한’ 이질적이고도 기묘하며 다른 ‘상한’ 복숭아가 되려는 마음. 이 같은 미묘한 차이를 생산하려는 욕망이 내재된 ‘상한 하나의 복숭아’는 복숭아들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쏟아’버릴 것이다. 시인은 안다. 이 정상적인 복숭아들의 욕구가 끊임없이 도달하고자 하는 길은 결국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자 욕망하는 ‘하나의 상한 복숭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꽃의 대기」에서 이야기되는 “피어오르는/ 꽃의 대기에서/ 흐트러지는 꽃 충돌하는 꽃/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환희/ 꽃의 멜랑콜리 꽃의 비애 꽃의 회환/ 피고 지는 꽃 옆으로 피고지는 꽃”이란 것은 자연에 대한 단순한 표현일 리는 없다. 세계에 대한 절망이자 고통인 멜랑콜리를 품은 존재. 그리하여 ‘흐트러지고 충돌하여 만들어지며 사라지는 비애’란 것은 사실상 시인의 근본적인 무엇이자 ‘상한 것’으로 존재하려는 욕망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복숭아들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손쉽게 확언될 수 없는 기묘하고도 고유한 이질성을 기어이 형성하겠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향해 있다. 요컨대 시인은 절망이란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가 지닌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을 뿐이다. 어릴 적 배웠는데 분명 열심히 꼭꼭 씹어서 삼키면 소화된 것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거름이 되어 밭을 가꾸고 나무를 키우고 집을 짓는다는데 왜 우리 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걸까? 비가 내린다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다 비가 얼마나 올지 모르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 멀리 하늘을 내다보다가 다시 걷는데 목이나 축이려 들여다본 못에 비친 나, 자세히 보니 민달팽이다. - 안수현, 「굳은 살」, 부분 시인이 근본적으로 절망하는 자라면. 그렇다면 문제는 이 절망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연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안수현 시인의 「굳은 살」은 이 측면에서 우리의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위치한 시인의 태도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손쉬운 절망도 손쉬운 희망도 아닌 무언가를 행하는 자로서 존속하기. 시 전체를 아우르는 “집을 이고 살아가는 족속”인 민달팽이의 이미지는 이와 직결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핵심은 이 집의 구체적인 형상 속에 담겨져 있는 시인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겠다.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내 등 뒤에 있는 것은 흙벽이다/ 집 안에는 심장도 있고/ 그 박동 가까이 붙여둔 꿈도 있고/ 내가 먹은 삶들 사랑한 사람들 아껴둔 말들이 있고/ 구멍 나 비워둔 자리도 있고 일부러 남겨둔 자리도 있”다고. 규정될 수 없으며 언어의 표면으로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희미한 마음이라고 칭해야 하는 영역들. 비록 “지붕은 올리지 못해서 비가 오면 그대로 다 맞는” 것처럼 초라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버릴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이 여기에 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나 역시도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속한 존재라는 점 역시도. 하여 시인이 가진 집이자 나의 영역은 돈과 풍요로움만을 강제하는 우리의 정상적인 세계와 무관하게 존속하려 한다. 시인은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끌려갈’ 테고 그 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려 한다. 비록 “우리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것처럼 보일 뿐일지라도. 세계가 강제하고 동시에 보장하는 행복의 의미와 무관한 층위에서 머무르기. 당연하게도 우리의 세계는 이 마음의 이끌림 따위에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화폐의 단위로 명확하게 환산될 수 없는 보이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무엇이니까. 이처럼 비가 내리는 세계 속에서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도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겠지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간절한 중얼거림. 이 처절한 마음을 지속해내겠다는 하나의 다짐으로서. 이것은 시인이 발견해낸 자신의 고유한 마음이자 욕망이기도 하다. 절망적이고 무가치한 세계 속에서 나에게로 이어지는 마음의 계보들을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의지일 것. 바로 그러한 마음과 나이며 “너와 내가 함께하는 미래가/ 오래도록 높이 길게 멀리 뻗어가기를.// 비로소/ 나는 홀씨가 되어 날아갈 궁리를” 꿈꾸는 자. 그러니 도처에 퍼져있는 “도저히 씹어삼켜지지 않을 만큼 큰 고민”(「룸메이트」)을 행하는 자는 결국 나의 친구이자 또 다른 내가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이자 존재로서의 사유를 향한 시인의 마음이 이렇게 명확하다면 이 민달팽이의 걸음은 느리지만 진중하며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 기묘한 걸음이 절망적인 세계를 언젠가는 횡단하리라는 점 역시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여기 또 하나의 절망을 대하는 고집스러운 태도가 있다. 이솔 시인의 「검은 돌, 악보, 가계」이다. 이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들의 납득 가능한 연속성이나 인과관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에 있다. “저는 매혹되었습니다”라는 돌출된 것처럼 보이는 문장은 그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무의미하며 동질적으로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기어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시인의 언어는 그것을 잡아내려 한다. 그 순간의 ‘장면’들은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습니다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하니 나쁘지 않습니다 담을 오른편에 둔채 계속 가다보면 큰 건물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바다에서 표류하던 그물을 걷어 올려 벽에다 걸어놓았다고 하네요 무슨 맛이 나는 해조류들이 매달려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주 큰 거미가 허공에 떠서 여러 개의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아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하거든요 일련번호도 없이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저는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를까 봐 무섭거든요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 이제 저는 정말로 배가 고파진 상태입니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우중충한 목소리가 들리고 똑같이 생긴 문들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축 처진 저것의 아랫부분을 밀고 나가볼가요 그녀가 주름진 입가를 힙겹게 끌어올리듯이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이 이마부터 뒷덜미 그리고 등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녀가 쓰다듬어줄까요 그녀의 치마 안으로 들어가듯이 따듯한 바람 속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위의 시에서 어떤 명확한 서사를 확인해보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부분은 시인이 느끼고 있는 일종의 세계감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란 갑자기 튀어나온 문장이 의미하는 것. 이는 시인이 우리의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어긋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핵심적이다. 시의 제목이 의미하듯 검은 돌과 악보와 나의 가계도는 모두 ‘거미’로 표상되는 그 따뜻해 보이는 세계와 무관할 따름이니까. 그러니 시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가까이 있는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것을 볼 수 없는 곳이자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할 뿐이라고. 요컨대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듯 그리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한 세계인 것.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은 나만의 영역과는 다른 “우중충한 목소리”이자 “똑같이 생긴 문들”의 구별하기 어려운 무한하고도 반복적인 세계. 이 무가치한 세계와 직결되어 있는 존재는 아마도 ‘여러 개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주 큰 거미’라 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거미에게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대립하려는 자. 때로는 그 세계에 뒤섞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질성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자. 그것이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여 거미의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은 나의 온 육체를 꼼꼼히 묶어두듯이’ 나를 통제하며 제어할 것이다. 그 따뜻해 보이는 속삭임의 말들은 말하자며 시인을 유혹하고 이 평면적 세계에 손쉽게 잠겨 들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시에서 말해지지 않는 무엇들. 요컨대 “일련번호도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내가 진정으로 원해야 하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르는 어떤 고유한 순간이 아닐까. 짐짓 시인의 엄살처럼 ‘무섭다’라는 말은 그렇기에 큰 의미가 없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얼굴을 지닌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나의 영역은 “매혹”적이자 낯설고 두려운 무언가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존재들은 여러 개의 눈을 가진 거미의 ‘쓰다듬’이자 ‘따듯한 바람’과는 무관해야만 한다. 그러한 마음만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나만의 악보’이자 어떤 기묘함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 한다. “빛을 찢으며/ 마지막으로 온 사람을/ 조급할 이유 없이/ 천천히 안아”보는 마음을 가지고 “이 순간 이라고 발음”하게 될 어떤 순간을 기다리면서. 여전히 “식물은 숨을 들이마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차창으로 지나가는 배경이 되고/ 주먹이 책상을 내리”(「훔치고 싶은 것들이 있다」)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가난한 집의 문”의 이면 속에 있는 무언가들. 일종의 깊은 어둠이라고 해야 할 언어의 심연 속에 위치한 시인의 언어가 지닌 본질적 욕망. 그 끈질긴 태도이자 형상들은 ‘거미들’이 제공하는 따뜻하고 편안한 ‘치마폭’의 안락함으로부터 이탈할 한 가지 방법이기에. 3. 언어의 심연을 고통스럽게 사랑함으로 그러니 절망 앞에서 선 인간들의 무기는 어떤 점에서 언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우리의 세계이자 의미들로 가득 찬 언어의 표면이 아닌 오직 내가 구축하고 형성하며 존재시켜야 할 고유하고도 기묘한 언어의 심연. 시인의 무기이자 고통이며 동시에 깊숙하고도 알 수 없으며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존재여야만 하는 것. 그것만이 시인들에게 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를 한 번 살펴보자.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었다. 안으로 자라나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의 눈빛이 누군가의 손짓이 팔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 금속으로서. 움트기 시작했다.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한 사람을 이룬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어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 무딘 날에 베인다면 낫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게 되자 안으로 희디흰 날들이 쏟아진다. 길을 걸을때면 앞서가는 사람의 발소리에 맞추어 칼날이 흔들린다. 발돋움하며 머리카락 휘날리며.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춤을 멈출 수가 없다. 죽지 않도록 파고들었다가 흐를 듯 녹아 고인 흰 날이. 뜨겁게 끓고 있을 때. 변해볼 마음이 있어? 그러자 흰 날은 냄비 안의 죽이 되어 끓어오르다 우묵한 그릇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와 있다. 먹어야 나아, 말하는 목소리가 되어 다시 하얗게 끓어오르는 것을 본다. 목소리가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나를 베지 않는 쪽으로 날을 만들어볼 수 있을까요. 칼등 위로 걸어볼 수 있을까요. 칼이 나를 뚫고 나가, 무뎌진 채 멈춰 있다면.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아주 커다란 압정인가 봐요. 말하며 튀어나온 날에 시래기 같은 것을 걸어 말리고 있다. - 박연, 「최선의 칼집」, 전문 박연 시인의 이 시는 또 어떠한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여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라는 중얼거림에서 느껴지는 중요한 맥락은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는 점에 있다. 물론 이는 상처가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시인은 절망 속으로 더욱 뛰어들고 그 고통을 섬세하게 느끼며 인식해야 한다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고통스러움과 두려움을 통해 형성되는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란 언어에 어떻게든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칼은 곧 나일 따름이니까. 흔히 생각해보듯 시인을 언어를 편하고 자유롭게만 사용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여길 수는 없다.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시적인 것들의 희미한 형상. 그러니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는 것처럼 통제불가능한 언어들은 내 속에 위치한 내면의 칼로서 나를 상처 입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통과 상처 그리고 환희와 열광을 결코 구분하지 않는 나의 근본적 욕망일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다. 언어가 나에게 부여한 칼은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이자 ‘멈출 수 없는 춤’과 같다는 것을. 하면 이 시인은 그러한 언어의 존재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자가 아닐까. “안으로 자라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는 철저한 고백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아프며 아파야만 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 측면에서 ‘최선의 칼집’이란 시의 제목은 언어라는 칼을 담고 있는 자기 자신이자 되어야만 하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냄비 안의 죽’이자 ‘하얗게 끓어 오르는 목소리의 강’으로 무한히 분열되고 파편화되는 그러나 오직 나라는 존재의 고통이자 숙명을 담아낼 언어를 어떻게든 붙잡아내고 형성하기. 손쉽고도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언어가 아닌 언어의 심연이자 고통을 그리고 칼날 위에 선 샤먼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투쟁한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커다란 압정”으로 오독하면서 시래기를 말리겠지만 그와 무관하게 나는 나의 언어를 존재케 하겠다는 것. 이는 한 시인으로서 세계에 대한 절망과 동시에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고유한 욕망인 셈이다. 그것은 「도움받기」에서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동물에겐 끝없는 온기가 필요한” 이 세계 속에서 “배의 어둠에 관해 상상”하면서 그 어떤 언어도 손쉽고 자유롭게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인은 나의 절망 속에서 생성된 언어라는 날카로운 칼이 사실은 나 이상의 무언가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배의 안쪽에 작은 배들이 살고 있다면. 단 하나의 배를 환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언어의 무한한 분열과 나누어짐을 오롯이 지켜보려는 자. 하여 ‘온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열기를 식히며’ 우리의 세계 속에서 ‘초파리가 몰려드는 무른 배’이자 썩어가는 자로서 기어이 존재하겠다는 욕망. 이 역시도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기묘한 고유성만을 긍정하고 탐구하려는 시인의 존재방식일 것이다. 유키는 미움받아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래도 두렵지 않았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긴 하지만 유키는 파랗다 선생님, 이게 병이 하는 생각이라면서요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건강에 있어선 모든 방면으로 분주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게으르고 증상이란 건 너무 무섭고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고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겁다가도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는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이 멀리 와버린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 의지도 없이 여기 머무르고 있다 가깝게 사랑하며 - 백아온, 「사랑을 담아, 유키가」, 부분 백아온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바를 말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말이지 파랗다’라는 것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적인 이성애적 ‘사랑’으로 이해할 필요는 당연히 없겠다. 왜냐하면 시인이 “우리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들이라서 자기 파괴적인 유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기파괴’적인 기묘하고도 이해되기 어려운 유키의 사랑은 어떤 측면에서 시인 자신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해야 한다. 즉 “유키는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나 딱 하나 재능이 있다면/ 그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모두들 사랑해요”라는 문장은 가리키는 바는 유의미하다. ‘사람으로서 지니는 딱 하나의 재능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는 유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시인됨이란 존재가 아닐까. 나 이외의 다른 모든 타자들이자 언어의 심연에 가닿고자 하는 사랑의 욕망을 지닌 고유한 형상으로서. 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욕망은 정상적인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저 무의미하고 ‘병든’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말하자면 이해될 수 없는 유키를 규정하려고만 한다. ‘평생 가볍고 간단해지길 바라는’ 유키의 존재는 그저 “발직한 여자애”로서만 판단될 뿐. 그 세계의 존재방식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자가 유키에 대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심리치료사일 것이다. 달팽이에 대해 ‘눈이 붉어지고 마음이 아프며 지금 몹시 슬프군요 그랬다고 달팽이를 밟으면 됩니까?’라고 질문하는 자. 그리하여 이 ‘병든’ 유키를 “유키씨 정말 끔찍한 사람이군요”라면서 규정하고 치료하여 정상화시키려는 자. 따라서 유키의 시선이 이러한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세계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이 정상성으로부터 단 하나의 예외조차 없는 ‘여기’가 “지옥”이라면. 우리의 ‘여기’가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할 필요조차 없고 인식하려는 생각조차 없는 플랫한 세계라면.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이자 욕망을 통해 우리들의 무의미한 세계를 거부할 것이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으며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 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이 플랫한 지옥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두자. 그 지배하에서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으로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존재일 따름이다. 오직 ‘파란 가슴’만을 믿으며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수 있는 자. 우리의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자. 그리하여 ‘걷잡을 수 없이 멀리 가버리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자. 이것이 시인이 유키라는 자신의 분신적 존재에게 근본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진정한 욕망일 것이다. 먹고사니즘으로 통칭되는 정상적이고 당연한 ‘의지 없이’ 타자들과 언어들의 심연이란 욕망 속에서만 ‘머무르기’. 그렇다면 유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인 것이 아닐까. 모든 보이지 않고 명명되지 않는 영역들을 “가깝게 사랑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러니 이 욕망하는 자는 ‘엉뚱한 슬픔이 차오르는’ 마음을 끝까지 지니려 할 것이다. ‘길고 게으른 문제’이자 어떻게든 ‘오래 살자’는 대화를 간직한 채. “언젠가 온 세상의 슬픔을 다 껴안으며 죽”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욕망한다는 것. 들리지 않는 “거대한 지구의 울음”을 듣고 “엉뚱한 슬픔”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그 “울음의 밑바닥에서는 하나의 지층”을 기어이 만들어내려는 존재. 그런 시적인 인간의 형상이란 “상자를 열면 단숨에 사라질 것 같”은 존재들을 소중히 품으면서 이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에게 “한 움쿰 포도 씨 뿌리고/죽지마 /목소리를 보태어 주”(「자처하는 사람」)는 간절한 욕망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는 시인이 지닌 기묘하고도 고유한 사랑의 본질적 형상이기도 하다. 김사라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난폭한 언어의 양상과 그 이면에 느껴지는 멜랑콜리의 감각은 강렬하다. 이 위력적인 언어의 형상은 언어의 표면이자 지시이며 의미와 별다른 상관이 없다는 점 역시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언어의 형상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시의 언어에 접근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파괴적이고 분열적으로 보이는 양태 그 자체가 아니다. 즉 “나는 제대로 말하고 싶고,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ainsi soit – ELLE」)라는 찢어진 육체이자 모순적 형상들이 구축하는 미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핵심적이다. 왜 시인은 시적인 것을 위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라는 기묘한 알레고리적 언어를 구축하려 하는 것일까. (…)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 믿을 수 없다. 그는 연필로 칼 깎는 법을 알려주었다. 보랏빛 나사와 재단된 나무들이 가득했던 곳. 손으로 쥐는 것부터 배웠다.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봤던 것 중 가장 더러운 집을 보았고 거기 살던 여자는 반갑게 문을 열어주었네. 그녀는 방 가운데에 달콤한 간식이 든 멋진 상자를 가지고 있었고 내 손이 그쪽을 향할 때마다 자기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 줄 때까지 기다려. 여자의 뱃속에서 미끼가 쿵쾅대며 숨을 쉬었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 이유 없이 슬픈 밤을 보낸 난쟁이를 위한 철제문. 신고하지 않은 여름이 있었다. 일을 마치면 매일 같은 곳으로 국수를 먹으러 갔지.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았다. 맛이 변해도 몇 번이나 더 믿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알던 맛의 국물이 간절해진 겨울이 왔어도. 징계가 결정되고 술을 몇 병 사고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지. 난 눈을 꼭 감고. 정말이지. 그거면 됐어. 포근했던 교차로의 눈밭.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약속! 미나. 눈앞에서 사라져 줄게.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배웅하러 나가는 내 다리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려 놓았다. 믿을 수 없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하겠지. 난 살살 녹여 먹어도 악다구니를 써. 못쓰게 됐어.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저 애를 위해 얼굴을 뜯어버리고 있어. 이러다가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 - 김사라, 「기분파 미나 제이코」, 부분 이 시에서 우리가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 속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확연하다는 것. 즉 이 시속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이 또한 시인이며 시인의 욕망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폭력적으로 보이는 시인의 언어가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모순성 그 자체이며 동시에 시인의 ‘나쁜 행실’을 비난하는 남성들이 구축한 우리의 세계이기도 하다. 요컨대 시인의 존재는 ‘나쁜 행실’을 행하며 “나도 모르게 새 생각에 잠”길 수 있어야 하는 기묘하게 슬프며 그렇기에 고독한 자이다. 이 세계가 보려 하지 않고 알고자 하는 생각조차 없는 “버러지 같은 고통”의 존재를 묻고 기억하며 떠올리며 자신의 육체로 받아들이려는 자. 그 고통 속에서 모순되고도 찢겨져 있으며 웅얼거리는 발화들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선 확인해보자. “미나. 어째서 입 맞출 때 날 보지 않지?”라고 말하는 세계의 시선이 얼마나 당연하고도 폭력적인가를. ‘살아 있는게 너무 징그러운’ 것과 같은 폭력의 정상성과 당연함. 그러한 세계의 영역 속에 놓여있는 나의 존재는 말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널부러져 있다. “따가워. 따가워. 숨이 차서 괴로워하며.” “깨물지 마!”라는 표현처럼 이 시속에서 등장하는 남성이자 세계의 언어는 단지 명령하려고만 한다. 그러한 억압적인 규정과 판단의 결과란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이라는 비웃음과 더불어 자신이 듣지 못하는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라는 이해할 수 없음이란 반응일 뿐. 그러니 ‘기분파’인 미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울함과 가난함과 싸우지 않음의 이면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알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더욱 문제인 부분은 이 남성이자 세계의 폭력성이 모순적이게도 내 안에 이미 새겨져 있으며 아주 철저하고 당연하게 작동하려는 하나의 질서이자 체계로 자리잡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가장 더러운 집”의 여자를 고려해보자. 모순되고 찢겨져 있는 “나를 쳐다보려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이 여자는 또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남성과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명령한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리고 “줄 때까지 기다려”라고 말하는 또 다른 나. 이 분열된 나들의 모습은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이 또 다른 나의 존재의 형상은 남성이자 세계의 규칙이자 법칙이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우리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이지만 남성에 의해 지배받으며 동시에 여성일 수밖에 없는 모순성의 기묘하고도 복합적인 중첩. 그러니 시인이 드러내려고 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의 입은 ‘찢어져’ 있을 수밖에.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처럼. 이러한 미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지점. 그것은 남성이자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또 다른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다고 말이다. 당연하고도 정상적이며 억압됨을 모르는 그러한 현실 속의 내가 아니라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되려는 ‘나쁜 행실’이자 기이한 변신술적 욕망.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내가 ‘교차’하는 길 위에서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진실만이 오직 나를 고유하게 형성해내는 방법일 따름이다. 그 강력한 의지이자 나를 존재케 하는 결정적 욕망인 것. 이것만이 남성이자 세계의 존재를 파괴시킬 수 있다.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라는 남성들이자 세계를 가볍게 무시해버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또 다른 나를 위해 무언가를 발화하기.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타자이자 억업된 모든 것을 위해 나의 언어가 존재해야 한다는 마음. 그 굳건한 언어의 욕망으로 인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남성들이자 세계인 그 당연한 모든 것들을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바라보는 우리들이자 남성들의 세계는 그저 ‘돼지 같은 바보들’이자 “술맛 떨어지는 계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세계 속에서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기에 모든 것을 “제대로 말하고 싶”다는 일종의 모순적인 분노. “잘린 성기가 든 포르말린 유리병”처럼 박제되어버린 또 다른 나의 목소리를 진정으로 듣고 발화하려는 시적인 것에 대한 고유한 욕망. 그 의지를 알아챌 수 없는 남성이자 세계는 언제나 ‘소문이라는 소문’을 흩뿌리겠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다가가니 수 천개로 갈라지고 있”는 무수한 나들의 발화들을 품어 안으며 ‘이토록 분명한 예감’을 감각하려는 자. 이것이 자신의 육체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리는 시인이 품고 있는 분열증적 언어의 파괴적 원천일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내가 보고 싶은 공동묘지 쓰레기통에 처박혀 딸기처럼 부푸는 죽은 꽃다발’(「ainsi soit – ELLE」)이란 언어의 심연이자 시적인 것은 알아듣지 못할 기묘한 목소리로 발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의 세계와 고유하게 무관하도록. 4. 단지 자유를 향한 욕망과 의지로서 앞서 지적해두었듯 지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시인들에 대한 말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글은 그저 한 개인의 아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해일 뿐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은 왜 쓰고자 하는가에 대한 젊은 시인들의 마음이었다. 고유하고도 기묘하여 그러하여 수수께끼와 같은 언어의 미궁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의 원천. 언어의 표면이자 규정하고 판단하려는 모든 것들에 대한 투쟁. 우리의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세계로부터 이탈하고 도래할 언어의 심연을 어떻게든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의지. 그러니 우리는 시라는 규칙과 시인이란 이름과 정의와는 무관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시적인 것이자 시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시적인 것이란 오직 언어의 표면을 정지시키고 파괴할 때 그 심연 속의 거대한 꿈틀거림과 함께 도래하게 된다는 점만은 ‘자명’해 보인다. 필요한 것은 규정과 판단이란 명령이 아닌 모든 방식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자유로움이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엇일 따름이다. 단순한 허명이 아닌 시인됨이란 실존적 영역 속에서 이는 나이의 문제도 등단 여부와 시기의 문제도 어떤 위치에 내가 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하여 쓸데없는 첨언을 굳이 덧붙여 보고 싶다. 언젠가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던 푸코의 문장을 말이다. “나는 당신들이 노리고 있는 그곳에 있지 않다. (…)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그렇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쓴다는 욕망이자 의지이며 그로부터 가능할 자유일 뿐이다. 시라고 부르는 이 기묘하고도 고유한 실존의 형식은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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