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겨울호
비평의 자리
담화는 무에 맞서서, 혹은 순수 무의미에 맞서서, 폭력적으로 굴고,
철학의 안에서라면 허무주의에 맞서서 그렇게 한다.
—자크 데리다
1
재현, 문학, 폭력, 윤리, 허구, 삶, 서사의 탈취와 그로 인한 가해, 창작의 자유와 독자의 권리…… 지난여름 이후 ‘온라인 공론장’이라 일컬어지는 곳의 담론적 흐름을 지배했던 용어들이다. 김현지가 소설가 정지돈의 작업에 자신의 삶이 쓰여왔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직후, 구체적으로는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 2019)에서 “사실과 그가 만들어낸 허구가 온통 뒤죽박죽으로 섞여” 제시되었던 김현지 삶의 특정성,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에서 “얄팍한 소설적 비유를 거”쳤으나 “현지”라는 고유명사를 통해 부당하게 각인된 김현지 삶의 서사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광장”의 “참여”를 독려한 직후부터 형성된 “참여”1)의 풍경이었다.
‘동의 없는 소설적 재현’이라는 문제 설정을 중심으로 분기한 여러 언어는 재현에 관한 논쟁에서 유구하게 반복되어온 질문에 더해 문학 개념에 관한 다양한 (재)정의를 촉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관련 사안이 ‘온라인 공론장’을 중심으로 전개될 경우 쉽게 제기될 수 있는 비판, 이를테면 다기한 형태의 논의를 ‘플레이밍 사회’나 ‘캔슬 컬처’의 병폐로 흡수하거나,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손쉬운 판단을 강제하는 압력으로 상상하는 비판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라인 공론장’의 흐름이 이전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던 주된 이유는 제기된 주장들의 실제로 ‘다른’ 내용 때문이라기보다2) 김현지가 소설과 연계된 제 삶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논의하자고 직접 제안한 데서 기인한다. 이때의 ‘문학적’이라는 범주 설정은 문학을 둘러싸고 그간 형성되어온 여러 담론의 흐름 위에, 또한 그것을 적극 비껴나는 위치에 해당 사안을 배치하기 위한 부표 같은 것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최초 입장문을 통해 작가의 공적 사과와 “재발 방지를 촉구”한 그는 동시에 “이야기는 우리가 참여하는 한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3)임을 강조하며 ‘문학장’의 적극적인 담론 개입을 요청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과거 그 어느 사안 때보다 이번 상황의 흐름에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그것은 숨 가쁘게 쏟아지는 입장들 가운데 과거의 경험을 반성적으로 경유한 ‘문학적’ 입론을 즉각 제출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데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혼란은 말의 열기로 뜨거운 논쟁의 한복판에서 비평(장)이 소환되는 논리를 지켜보며 느낀 당혹감 같은 것이었는데, 그러한 요청이 ‘비평’에 근본적인 수준의 도전을 야기한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혼돈 속에서 내 나름으로 골몰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예기치 못하게, 작품을 초과하여 돌발하는 이러저러한 사건들 앞에서 비평이 취해야 하는 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별 사태, 혹은 사안에 직접 개입하여 논쟁의 흐름과 내용을 비틀고 심지어 생성하는 일인가? 이때 ‘제도권’ 평론가라는 가시화된 자리는 ‘공론장’으로의 출현 여부 그 자체를 통해 비평의 (올바른) 태도에 관한 특별한 무언가를 수행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비평(가)의 자리는 이번 사안이 문학적으로, 다시 말해, 문학에 관해, 문학을 거쳐, 문학에 의해, 문학에 반해, [……] 말해지는 문제와 어떤 특수한 관련이 있는가?
다름 아닌 ‘재현의 윤리’에 관한 사유의 일부로서 ‘비평의 자리’를 숙고하려는 이 글은 온라인 공론장의 조건적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 말하자면 사태에 대한 시공간적 거리감을 유실한 ‘보편적 앎’에 ‘비판적 앎’을 맞세우고 그것의 특권을 호소하는 원론적인 입장처럼 보일 여지가 있다. 물론, 이번 사태의 당사자들에게 끊임없이 강제된 입장 표명이 우리로 하여금 오직 그 언어의 표면만을 부유할 수 있는 한정적인 조건을 간과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의구심,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론장’이 표면 너머를 부단히 추론하고 막연하게 상상하며 만들어낸 ‘윤리적’ 기준에 대한 내 개인적 불신이 이와 같은 글을 쓰게 한 주된 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비평의 자리가 거듭 숙고되고, 심지어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글의 당위가 되기는 어렵다. 나는 ‘더 나은’ 공론장의 흐름을 위해, 혹은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을 비판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비평의 개입을 소환하는 일련의 요구를 향하여 하나의 ‘비평적’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시간을 내어 시간을 생각하는’(데리다) 비평의 자리를 확보하는 일이 ‘문학과 현실’을 사유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무엇보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한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 한다.
2
소설가 천희란은 “반복되는 소설 속 동의 없는 재현을 둘러싼 문제들을 제도의 안팎에서 장기적으로 공론화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4) 하나의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최근 발표된 글에서 그는 해당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그간 이러한 문제 제기가 발생했을 때 제도는 독자의 불매 운동에 대한 대
응으로 판매중지 및 회수를 결정해왔다. 문제가 된 출판물의 유통 제한이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출판사의 내적 기준이나 판단 없
이 불매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처리 방식은 출판물의 공공적 가치를 위
협할 수 있다. 동시에 출판사가 독자의 불매를 이유로 이러한 처리 방식을
택함으로써 윤리적 독자의 목소리를 소비자성으로 폄하하고, 출판사나
제도권 비평이 이러한 문제들에 연루된 스스로의 책임을 은폐한다는 문
제의식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출판사나 비평이 작가와 피해자를 매개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때, 비로소 작가도 피해자도 무
분별한 의견에 노출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느꼈다.
당연히 문예지를 보유한 출판사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권 문학 장이 적절
한 프로세스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유사한 문제 제기들과 함께 회자되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심층적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 재현의 과
정에 필연적으로 타자를 대상화하는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유의할
때, 의도적 가해의 여부가 불분명한 명백한 피해를 수용하고, 작가를 악
마화된 가해자로 설정하지 않고도 논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서는 다양한 비평적 언어들이 교차하며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경험이 필
요하다고 느꼈다.5)
온라인 공론장에서 비평은 줄곧 ‘제도’를 대표할 공적 언어로서 상상되었다. ‘공적 언어’인 비평이 스스로가 생산하는 ‘언어적 불평등’을 반성적으로 인지하면서, 제기된 문제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즉 사안을 둘러싼 모든 당사자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작동되어야 한다는 위와 같은 입장에 대해 나는 강한 의구심을 느낀다. 물론 천희란의 말로 대표되는 ‘비평(장)’을 향한 일련의 요청은 비판 내용과 논쟁의 성격에 있어서의 안전성, 건강함 등을 요구하는 단순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평의 토대를 질문하는 비평의 비판적인-중대한-위태로운 critical 가능성을 간과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요구이며, 내게 이 문제를 파고드는 일은 해당 소설의 미학적·정치적 성공 여부를 말하는 일이나 가해와 피해의 정도를 세심하게 가늠하는 일만큼이나 비평적으로 중요해 보인다.
비평의 행위, 비평의 태도, 비평의 방향. 위의 글에서 비평이 처한 것으로 짐작되는 자리는 이 문제를 문학적으로 풀어가 보자는 애초의 제안과 관련될 때 더욱 문제적이 된다. 쟁점을 ‘문학적으로’ 설정하고 설명하는 비평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가? 앞선 비평의 자리에서 가능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둘은 그저 동일한 종류의 것인가?
비평의 ‘당위’와 ‘가능성’에 대한 두 질문이 혼동될 때, 하나로 상상된 비평은 작가와 문학장, 문학성을 역시 하나로 축소하고, 반대편에 김현지와 독자,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이들을 하나로 두는 문제틀로 수렴된다. 이때 비평의 ‘문학적’ 소명은 소설의 내용과 형식적 요소들을 근거로 하여 그 재현이 미학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성공 및 실패한 부분을 세심하게 가려내는 일이 되거나 문학과 삶의 선명한 분리선 위에서 둘 중 하나의 우위를 보다 전문적인 언어로 지지하는 일로 환원된다. 이때의 지지 혹은 반대는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이전과 이후를 기점으로 자신의 문학론을 선택 및 표명하는 전선의 연장선에 위치된다. 여기까지가 혼동된 질문의 여파 속에서 가능한 비평의 최대 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내게 더욱 문제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때 마련된 비평의 자리가 고도의 합리성, 혹은 선의나 대의 같은 것을 비평‘본래’의 것으로 전제하며 상상되고 있다는 점이다. 천희란의 글이 제안하듯 ‘공론장’의 입장을 하나하나 사려 깊게 헤아리고 제도의 안팎이라는 가상의 분할선을 전복적으로 넘나들며 독자의 언어와 문학장의 언어를 뒤섞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보다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언어를 중재하는 것, 그리하여 다수가 공통적으로 합의할 만한 ‘문학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달라진 비평의 궁극적인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전제 말이다.
비평에 관한 이 모든 상상적 배치가 문제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겉보기와 달리 이것이 비평의 책임을 당위와 가능성 양쪽 모두로부터 강력하게 제한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비평이라는 ‘공적 언어’를 ‘비-공적 언어’와는 다른 종류의 합리성을 지닌 언어로 구별하고 특권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안에 개입한 모두를 “무분별한 의견 노출”의 부담으로부터 구출하여 담론적 재분배와 재생산이 효율적으로, 가능하다면 ‘비판적으로’ 이루어지게 만드는 바람직한 과정, 혹은 진화론적 가치를 내재한 과정으로 비평을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한편으로는 완전히 동질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서로 모순된 관심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갈래의 질문, 즉 비평의 ‘당위’와 ‘가능성’에 앞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비평의, 나아가 문학의 ‘존재’에 관한 질문 같은 것. 여기서 ‘존재’라는 변별적 단어로 지시하고 싶은 것은 문학과 현실을 동시에 움직이는 원리, 그러나 그것을 분리된 것으로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원리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다.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논쟁이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해 그간 비평 담론장이 정교화해왔던 질문의 갈래란, 천희란
의 글에서 주장되는 바와는 달리 문학과 현실의 위계를 흔들거나 역전시키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그간 축적된 여러 비평적 각론은 재현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서 요동친 예술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재현에 관한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문화적 담론과 적극 연계해 사유되었다. 재현물의 달라진 위상, 다시 말해 대신하고-대표하며-재현하는-대체물과 사물-자체라는 변별이 더는 불가능해진 시대에 재현물이 놓인/놓일 수 있는 변화된 위치와 조건을 논의의 장내로 적극 끌어들이면서, ‘문학’의 존재론적 내/외연을 말 그대로 ‘현실’의 그것과 동시적으로 연루시키면서 말이다.
재현은 “문학과 현실을 인식론적으로 식별 가능한 대상으로 분리하는 언표 기능이”자, “이분화된 문학과 현실을 메타적으로 지시하는 언어들의 존재론적 조건을 제공하면서, 문학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작동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화의 기제”6)이다. 그간 정통 문학장이 소외시킨 것으로 말해진 독자의 새로운 지위가 재현의 시간을 뒤흔드는 주된 요인이라는 인식은 재현에 관한 논의의 질적/양적 축적을 통해 도출된 결과로서, “독자가 ‘어떻게’ 텍스트를 사후적으로 발견하고, 생산하고, 의미화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천되는 욕망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지와 연계”7)되는 비평적 방법론의 필요를 이끌어냈다.
이를 고려할 때 이번 사안은 ‘재현’을 둘러싸고 끈기 있게 전개된 비평 담론의 장(場), 그것의 내재적 전유 및 비판과 무관한 문제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재현이야말로 문학의 통치성을 작동시키는 비평의 무의식이라”8)는 말을 경청한다면, 그간 축적된 비평적 논의는 다름 아닌 ‘문학의 통치성’을 분석할 수 있는 유효한 근거로 이해될 수도 있다. ‘동의 없는 소설적 재현’ 논의의 ‘폐쇄성’이라고 말해지는 문제는 고립된 비평이 ‘바깥’에 개입하고 ‘바깥’을 연계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손쉬운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재현의 윤리가 ‘더 구체적으로’ ‘더 리얼하게’라는 삶에 대한 우위의 질문으로 전환될 때 비평은 그 리얼함의 성격과 양상, 그것이 동요시킨 재현/대의의 원리에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한 것의 참칭’에 은폐된 정치적 보수성을 의문시하며 문학의 ‘허구성’과 ‘가상성’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수행했다. 이번 사태에서 부각된 외침, 즉 ‘더 허구적으로 재현하라’는 요청은 바로 이 허구성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에서, 바로 그러한 종류의 분석을 촉발하고 요구하는 형태로 그것에 얽혀 있는 독자의 읽기-쓰기 행위와 더불어 사유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고작 ‘공론장’의 중재자 정도로 상상되는 비평은 문학을 중심으로 실천되는 온갖 종류의 담론적 네트워크를, 말하자면 문학에 관해 생산되고 폐기되며 경합하고 충돌하는 담화 및 담론의 복잡성을 단일한 입장을 지닌 개체들의 연합으로 균질화하며 수행된다. 이처럼 간편한 구상 속에서 요구되는 비평의 책임은 문학에 관해, 그리고 현실에 관해 해소될 수 없는 문제들을 해소할 수 없는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일 이상이 되기 어렵다.
비판적인-중대한-위태로운 비평 ‘적’ 언어는 문학을 둘러싸고 제기된 문제에 관해 당사자들을 ‘보호’하고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며 ‘건강한’ 문학 담론을 상상할 것이 아니라, 보호를 불/가능케 하는 장치와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완강하고 예민한 분석을 요구받아야 한다. ‘분석’은 원리상 폭력적이다. 비단 비평적·문학적 글쓰기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담화와 담론을 가능케 하는 에크리튀르의 원리가 필연적으로 모든 폭력에 앞선 폭력, 즉 원-폭력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9)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지닌 고유한 윤리성에 관해 지난하게 펼쳐질 사유의 시간마저 봉쇄한다면, 우리는 문학의 자율성은 물론이며 그것의 대타항으로 위치시킨 한 개인의 개별적 삶을
물질적 차원에서도 관념적 차원에서도 온당하게 다룰 수 없다. 즉각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누군가를 구제 혹은 구원하는 일이 ‘공론장’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말이다.
3
소설가의 작법을 향해 또한 문학의 재현에 관해 ‘허구적인 변형’을 요청하는 입장의 바탕에는 ‘고유명(사)’이라는 쟁점이 놓여있다. 김현지가, 나아가 일부 독자들이 정지돈의 소설이 소설적으로 실패했으며 타인의 삶을 함부로 탈취한 것이라고 판단한 바탕에는 다른 무엇보다 ‘현지’라는 기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이브 뉴 휴먼』의 ‘권정현지’의 삶은 “사랑을 잘 모르는 어머니에게 헌신하고 가족을 유지해 보려고 평생 노력했”10)다는 사실 자체보다 ‘현지’라는 고유명사에 전제되어 있다고 믿어지는 한 개인의 고유성을 근거로 하여 허구적 위치를 초월할 수 있었다. 고유
성의 유린은 ‘권정현지’에 잠재된 문제가 『야간 경비원의 일기』의 ‘에이치’에도 소급적으로 적용될 수 있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분명 이번 사안을 유사한 문제 제기로 촉발된 그간의 사안들과 다른 장소에 배치하게 만드는 독특한 요인이다.
그런데 고유명과 고유성의 관계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겉보기와 달리 의심의 여지가 없는 투명한 관계일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는 그것의 의미를 온전히 초과하고, 그럼에도 그것에 사로잡히며, 느슨한 공통성으로 붙들고 이어지는 산만한 의미 작용이 혼재해 있다. 고유명-고유성의 관계를 논의의 쟁점으로 삼고자 할 때, 각 개념을 구성하는 모든 층위의 요소가 철저하게 분석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이들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성을 외면한다면 재현의 윤리는 ‘현지’라는 기호가 유발할 수 있는 고통의 정도를 고유성에 한정하고, ‘현지’라는 이름이 노출한 그것의 크기를 저울질하는 일로 환원된다. 이때 고유성에 전제된 특유하고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진실’은 진실을 알고 있는 작가가 그것을 외면하거나, 누군가의 삶을 훼손하고 심지어 기만하기 위해 왜곡한다는 식의 문제틀 속에서만 지지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소설 속 ‘현지’가 탈취한 고유성을 입증할 만한 개별적 사실을 김현지(혹은 그의 ‘지인들’)에게 직접 요구할 것을 택하거나, 혹은 정반대로 그것에 완전히 무관심할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이쯤에서 사안 종결 및 지속을 위해 당사자들에게 끝없이 입장 표명이 강요되었던 지난 풍경을 떠올려본다. 어쩌면 우리는 공론화 이후 긴 시간 동안 문학과 현실이라는 이항 대립 이전에 진실과 거짓이라는 보다 순진해 보이는 문제틀 속으로 담론 전체를 견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 같은 편향성이 ‘공론장’을 구성하는 특정 누군가의 잘못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는 “플라톤적 이데아부터 하이데거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심급에 대해 냉소가 준비”된 ‘비판’을 향한 시대적 환멸과 더불어 해석 자체가 비효율적이고 무가치하게 인식되는 ‘온라인 공론장’ 특유의 급박한 흐름 속에서 ‘이론에 대한 이론’ 나아가 ‘이론을 위한 이론’을 위한 자리, 즉 “사유가 운신할 어떤 두께”11)를 확보할 비(非)공론장을 마련하는 일이실패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에 가깝다.
나는 지금 고유명-고유성의 관계를 재질문하는 일을 바로 그 재질문의 여유와 역량을 잃어버린 ‘공론장’의 한계에 연결하고, 일종의 대안으로서 ‘비평의 자리’를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답을 내리게 되면 이 문제에 내재해 있는 그보다더욱 중요하고 근원적인 차원의 연결성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거짓말의 고전적 정의, 이를테면 무지나 실수, 오류나 악의적 행위라는 정의에 따라서는 도무지 ‘거짓말’로 분류되지 않는 현대적 문제들을 ‘반-진실’이라는 이름으로 거론한바 있다. 그는 우선 반-진실로 분류되지만 그것으로도 선명하게 구분될 수 없는 미묘한 차이들을 세분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나아가 진실의 존재를 가정해야만 가능한 ‘거짓말’이라는 개념을 포기할 것, 그보다 거짓-진실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거짓말하기’의 수행적 측면이 지닌 윤리성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연루시킬 것을 주장한다.12) 이는 객관적 진실이라는 위험하고도 끈덕진 허상이 논의의 핵심에 개입하는 일을 뿌리부터 거부하기 위한 해체적 작업이다. 약간의 논리적 도약이 허용된다면 여기서 우리는 “현실이라는 개념에 형이상학적 전제들이 과다하게 적재되어 있”13)는 사실을 무시한 채로, 텍스트의 바깥에 그것과 무관한 ‘실재’나 ‘현실’이 있다고 주장하는 온갖 종류의 사유를 근본부터 거절하는 데리다의 악명 높은 테제, ‘텍스트 바깥은 없다’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언어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문학의 원리 및 존재를 질문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은 그의 철학이 ‘고유성’이라는 현재 우리의 쟁점은 물론이며, 폭력과 폭력에 맞선폭력들로 구성되는 ‘역사성’의 문제로까지 우리를 이끄는 다음의 장면은 흥미롭다.
자신을 둘러싼 질문들과 이론적 규칙들을 형식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힘
을 가진 특이성의 사건에 저는 매우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이 단어, 힘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부연하겠지만 일단 이는 언어가 감당할 수 있는
“힘”, 언어로서든, 글쓰기로서든 거기에 있는 힘이라는 것은 마땅히 표지
로서 반복 가능한, 반복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이는 자신
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나 전형적으로 됨으로써 일종의 일반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전형적 반복 가능성의 효율성은 스스로를 형식화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역사를 형식화하거나 응축시킵니다. 조이스의 텍스
트는 거의 무한대적 역사의 응축본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역사와
언어, 만물의 응축화는 여기서 절대적으로 특이한 사건, 절대적으로 특이
한 서명, 그렇기에 어떤 날짜, 언어, 어떤 자전적 새기기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머무르게 됩니다. 가장 최소한의 자전적 특성으로 가장 막대한 역
사적, 이론적, 언어적, 철학적 문화의 잠재성을 띠게 되는 것. 이것이 정말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
이 모든 것들은 무엇보다도 “문맥”을 여러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줍
니다. 문학의 “효율성”은 때때로 제게는 다른 종류의 담론보다, 예를 들어
역사적 또는 철학적 담론보다 더 강력해 보입니다. 때때로, 특이성과 문맥
에 따라서. 문학은 잠정적으로 더 잠재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14)
문학이 때때로, 그 특이성과 문맥에 따라서, “잠정적으로 더 잠재성이 있을 수 있”다는 데리다 주장의 바탕에는 “언어가 감당할 수 있는 ‘힘’, 언어로서든 글쓰기로서든 거기에 있는 힘”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있다. 이때 언어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은 어떤 신비스러운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표지로서 반복 가능한” ‘반복 가능성’이라는 제 기본 원리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는 이 ‘반복 가능성’이 그 자체로 언어를 “특이성의 사건”으로 만들 수 있는 중대한 잠재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특별히 중요하다. 가령 ‘서명’과 같이 철저히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난 무언가가 원리상 자연히 ‘반복 가능성’ 속에 연관될 때,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나” 일종의 전형성과 일반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동시에 ‘서명’이 그 동일한 힘에 의해 “절대적으로 특이한 사건, 절대적으로 특이한 서명”과 쉽게 구별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고유성’은 “가장 최소한의 자전적 특성으로 가장 막대한 역사적, 이론적, 언어적, 철학적 문화의 잠재성을 띠게” 된 것으로 재의미화된다. 특히 이러한 종류의 고유성이 다름 아닌 ‘역사’, 즉 스스로를 반복 가능성 속으로 형식화하며 진행되는 역사와 동일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주장에는 고유명-고유성의 문제가 온전히 다시 이해될 단초가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반복 가능성 속으로 내던져진 ‘고유명-고유성’은 언어의 생을 철저히 중단시키는 두 가지 죽음 사이에서,말하자면 “무의미와 진리라는 두 죽음의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의 역사15)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역사’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방식의 존재야말로 고유명-고유성의 다른 의미—물질적인 죽음과 이념적인 죽음 사이에서 두 죽음을 미루며 지속되는 생이라는 의미—가 생성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의 고유한 ‘생’을 현실에서의 삶과 문학 텍스트 속으로의 삶 그 어느 쪽 으로도 쉽게 환원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방식으로 살게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이 독특한 ‘살아남기’는 그 자체로 언어를 제 토대로 삼는 문학의, 나아가 언어를 매개로 만물을 재현과 연루시키는 온갖 종류의 분석·이론·담론·담화의 존재론이다. 이 역설적 존재론의 ‘문맥’을 여러 방식으로 사유하게 하는 힘이 바로 그 존재의 방식 속에 내재해 있다면 때때로, 잠정적으로 더욱 잠재적일 수 있는 그 ‘사이’를 주목하고 응시하는 것이 내게는 비평의 빼앗길 수 없는 자리로 보인다.
나는 이번 사안을 통해 ‘비판의 무력한 힘’에 내보이는 우리 시대의 조급한 냉소, 과도한 우려, 다양한 이론적 불만 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적 경합, 언어적 특권을 내면화한 ‘제도권’ 평론가들의 인식론적 투쟁 등이 현실의 아무것에도 영향을 끼칠 수 없고, 심지어 현실을 명백한 폭력의 상태에 방치한다는 등의 주장은 우리에게 비판의 ‘바깥’을 가리키며 그것에 주목할 것을 장려한다. 그러한 제안은 “견고한 사실의 문제가 존재하고, 그다음 단계로 우리가 그것들이 어떤 설명에 활용될지 결정하는 그러한[소박한 실재론 naive realism의] 경우를” 경계하라고, 그러나 무엇보다 “사실의 문제를 공격하고, 비판하고, 폭로하고, 역사화하여 그것들이 만들어졌다는 것, 해석된다는 것, 유연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해결책[비판 이론]을”16) 요청하는 시간과 거리감 역시 이제는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곤경 속에서, 그러니까 자연학으로의 환원과 형이상학의 승인 그 어디에도 발붙이지 않고 현실에서의 ‘활용’ 능력과 끝없는 ‘거리 두기’ 사이에서 굼뜨게 운동하는 것이‘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는 무의미와 진리라는 절멸의 폭력에 맞서야 할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종류의 유일한 폭력일 것이다.
- 1) 김현지, 「[공지] 김현지, 김현지 되기”」, 네이버 블로그, 2024. 6. 23(https://m.blog.naver.com/pasilda/223488600534).
- 2) 이번 사태를 두고 경솔한 판단을 유보하는 신중한 입장들이 존재한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당사자들을 향한 인격 모독 수준의 비하, 사건과 무관한 추론과 비방, 무분별한 음해와 공격 등이 ‘객관적’ 언어로 둔갑하여 흐름의 일부를 이끌어가기도 했다.
- 3) 김현지, 같은 글.
- 4) 천희란, 「프로젝트-횡단: 제도의 안과 밖을 횡단하기」, 원드라이브 공유 문서(https://docs.google.com/document/d/1C4YbdpoWfd83PcogOJ6bl9NdpIjaUNZal7oWrGeBV8o/edit?tab=t.0).
- 5) 천희란, 「문학의 역사는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쓺』 2024년 하권, pp.155~56.
- 6) 강동호, 「문학의 정치: 재현·잠재성·민주주의」,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문학의 동시대성과 비평의 정치』, 문학과지성사, 2022, p. 36.
- 7) 강동호, 같은 글, p. 44. 그는 다음의 비평들이 수행한 ‘문제틀의 전환’ 위에서 ‘재현’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다. 허윤, 「로맨스 대신 페미니즘을!: ‘김지영 현상’과 ‘읽는 여성’의 욕망」, 『문학과사회 하이픈』2018년 여름호; 오혜진, 「지금 한국 퀴어문학장에서 ‘퀴어한것’은 무엇인가 (1): 한국 퀴어 서사의 퀴어 시민권/성원권에 대한 상상과 임계」,『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겨울호;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2017년
- 8) 강동호, 같은 글, p. 42.
- 9) ‘에크리튀르’에 관한 데리다의 철학을 역사성과 연결하는 이 글의 읽기 전반은 김민호의 해석에 기대어 있다. 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데리다 철학에 대한 하나의 입문』, 에디스코, 2024.
- 10) 김현지, 같은 글.
- 11) 김민호, 「사유의 시간들: 데카르트와 데리다의 경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7년 가을호, p. 111. 이 글에서 사유와 이론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 곧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 일과 같다고 말할 때 김민호가 근거하는 데리다의 입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기술 우위의 시대라는 조건과 가능성 및 한계 속에서 ‘비판적 근거지’를 모색하는 작업과 겹치는 것처럼 보인다(자크 데리다,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관하여』, 김재희·진태원 옮김, 민음사, 2014).
- 12) 자크 데리다, 『거짓말의 역사』, 배지선 옮김, 이숲, 2019 참조.
- 13) 자크 데리다, 『비밀의 취향』, 마우리치오 페라리스·김민호 옮김, 이학사, 2022, p. 12.
- 14) 자크 데리다, 『문학의 행위』, 정승훈·진주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pp. 61~62.
- 15) 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데리다 철학에 대한 하나의 입문』, p. 39.
- 16)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문학과사회』 2023년 가을호, p.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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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타인의 집은 언제나 무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벽지와 바닥재의 색깔부터 배치된 가구의 종류와 재질, 그 위에 놓인 소품과 집기의 모양새들은 공간을 채우고 집의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집안에 존재하는 아주 큰 것부터 무척이나 작은 것까지, 무엇 하나 집주인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 없기에 누군가의 집에 발을 들이는 일은 그가 정성스레 가꿔 온 자의식으로 진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교하게 구축된 그 공간으로부터 한 자리를 내어 받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때, 어쩐지 스스로의 음습한 욕망을 마주하게 되는 이가 비단 나뿐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여기저기를 파헤치며 책장에 꽂힌 책과 서랍을 채운 잡동사니들을 실컷 구경해버리고 싶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눈알만 도로록 굴리면서 집안의 곳곳을 탐색하고 또 가늠해보는 소심한 악취미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제발 다들 끄덕여주었으면. 이런 보편적(이기를 바라는) 관음증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차현준과 박술의 첫 시집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집들이를 예고한다. 한 권의 책이 담지하고 있는 사적인 세계를 비유하기 위해 가상의 집 한 채를 세우는 일은 전혀 새롭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두 권의 시집으로부터 감지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감이나 그 안에 조밀하게 들어차있는 생활의 흔적은 못 이기는 척 닳고 닳은 메타포를 꺼내들도록 한다. 마침 두 시인이 개방한 아공간은 방문객들에게 무척이나 관대하고, 우리는 들뜨는 마음으로 그곳을 발발거린다. 집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은근슬쩍 두리번대던 날들이여, 안녕. 너희들에게 보이어리즘의 자유를 허하노라. 그러나, 가만한 감시와 암묵적 규칙으로부터 해방된 채 시의 행간과 시어를 넘나들며 잔뜩 들쑤신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마 묘한 패배감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보고도 아주 적은 것만을 간신히 짐작할 뿐인 불가해의 심정과 아무튼 실패한 것만 같다는 예감. 왠지 모를 기대에 찬 눈으로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을 집주인에게 뭐라고 선뜻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다. 이 서글프고도 기이한 감각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 차현준의 시집 『온몸일으키기』는 아주 촘촘하게 구상된 설계도에 기반해 지면을 구획하고 공간을 채운다. 시인에게 이끌려 당도한 낯선 곳에는 수평선처럼 이어지는 복도와 그 옆으로 딸린 무수한 방들이 있으며, 각각의 방에서는 농작물들이 무럭무럭 자란다(「구조조정」). 어림잡아도 꽤 큰 규모와 텃밭이 아닌 방 안에서 경작되는 각종 작물들의 모습은 기상천외하다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난생 처음 맞닥뜨린 광경이다. 그러나 우리를 이 집으로 데려온, 무척이나 계획적인 듯 보이는 이는 놀란 기색을 보이는 손님들을 내버려둔 채 방과 방을 옮겨다니며 밭일에 열심이다. 손바닥에는 방이 있다 둘렀던 벽 하나를 열면 다음과 같은 광경이 있을 것이다 바닥에는 밭이 있을 것이다. 흙을 촉촉하게 고른다. 이랑과 고랑을 가른다. 손바닥에서 흙내가 난다 흙내와 잘 어울리는 작물들이 차례대로 오고 있다 손바닥과 방 곁에는 먼저 만든 방들이 널려 있다 밭에서 무언가 기르기 전에 방부터 충분히 길러낸다 - 「키트」 부분 예상치 못한 홀대에도 꿋꿋하게 복도를 거닐던 방문객은 복도 어딘가에 떨어져있던 키트 하나를 무심코 줍게 된다. “바닥”과 “네 벽”, “천장”과 “설명서”로 구성된 키트는 방 한 칸을 조립하기 위한 것인데, 설명서를 읽어내려가며 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해보다가 우리는 문득 이 아리송한 공간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얻는다. “밭에서 무언가 기르기 전에 방부터 충분히 길러”내야 한다고 말하는 화자는 분명 “방”과 “밭”을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는 듯 보인다. 확실히 방과 밭은 ‘안’과 ‘밖’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작물들이 자라는 곳이 밭이라면 이 시집에 줄지어 등장하는 여러 방들은 밭과 다름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시인이 창조해낸 기묘한 공간을 헤집어 “집에 도착해 / 이제 밭에 가는 길”(「도움밭」)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밭 이전에 잘 가꾸어진 방이 있어야 한다는 「키트」의 진술을 이제 차현준이 시를 쓰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 읽어본다면 어떨까. 손바닥 위에 조심조심 방 하나를 세운다. “니트릴 장갑을 갈아 끼고 셔츠 단추들 사이를 지나 단숨에”(「당귀 방」) 손을 뻗어 고립되어 있던 하나의 생각을 끄집어낸다. 실체 없는 발상에 물성을 부여한다. 어느새 생명력을 지니게 된 심상에 기뻐하며 그것을 살금살금 방에 옮겨심을 때, 한 편의 시가 움을 튼다. 차현준에게 시 쓰는 일은 무언가 촉발된 순간이 한 칸의 방을 꽉 채울 만큼 무성해질 때까지 정성으로 보살피며 길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돌연 / 설명할 수 없”(「아이솔레이션」)이 조우한 감각을 잘 다듬고 벼려낸 끝에 언어의 옷을 입혀 바깥으로 내놓는 일. 부지런한 집주인이 방과 방, 마음의 안과 밖을 오가며 “그간 안팎으로 운반한 것들”(「셀프 캠코더」)이 쑥쑥 자라 온 집에 그득해지고 “1층과 6층에서도 16단지와 16동에서도”(「쑥대밭」)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싱그러워질 때 방은 밭이 된다. 이 집에서는 안도 밖이 된다. 이제야 이 이상한 집에 대해 조금 알 것만 같다고 자만하는 순간, 집주인은 우리를 놀리듯 “여기서부터 당신이 살던 행정구역이 낯설어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얼마간 흘려보내보기」) 말하고는 손을 끌어 밖으로 향한다. 총 5부로 구성된 『온몸일으키기』는 3부의 마지막 시인 「얼마간 흘려보내보기」를 기점으로 하여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당귀와 깻잎, 루콜라 등을 키우느라 집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차현준이 4부에서 “쿠바 여정 소속 현준”(「나의 나의 라임 라임」)이 되어 쿠바의 비냘레스와 잉헤니오스, 아바나를 거쳐 “아르헨티나”(「남쪽물결」)로 이어지는 여행길에 오르기 때문이다. 우수아이아 택시에 타고 Corea만 말해도 Vivero los coreanos? (중략) 아주 질긴 아킬레스건은 여전한 한국에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이곳까지 늘어난 발목이 이어진 동안 망친 기분은 너무 많이 겹쳐서 나는 결국 망망해졌다 드디어 이제껏 한국에 있었던 발바닥 떼자 첫발을 내딛는다 남극 - 「도착하기」 부분 그로 하여금 살던 곳을 훌쩍 떠날 마음을 먹게 한 것이 무엇인지,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한국행 항공권을 취소”(「남쪽 물결」)하며 그가 느꼈을 감정이 후련함일지 서러움일지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한국이 / 좀 빨라”서 “거기에 가면 / 제가 저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아바나 일화」) 말하는 차현준의 모습으로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운반하느라 어느새 “오래된 건초”(「잉헤니오스」)처럼 메말라버렸을 시인의 마음 한 자락을 짐작만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아주 멀리로 떠나왔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에 딱 붙어 있는, “아주 질긴 아킬레스건”처럼 운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얄궂어서 차현준은 그 먼 아르헨티나에서도 기어이 드넓은 농장을 마주한다. 비베로 로스 꼬레아노(Vivero los Coreanos). ‘한국인의 농장’이라는 뜻으로, 아르헨티나의 가장 남쪽 도시인 우수아이아에 실제 위치하고 있는 농장이다. 이 농장을 처음 세운 이민 1세대 한국인은 비닐하우스 농법으로 채소들을 무럭무럭 길러내다가, 더 이상 채소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오자 “망했던 자리를 꾹꾹 밟”고 일어선 끝에 농장을 꽃천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망망한 마음으로 세상의 끝자락에서 피워냈을 꽃들과 마주한 차현준은 “드디어 이제껏 한국에 있었던 발바닥”을 떼어 자신만의 “남극”으로 향할 결심을 한다. “여길 돌아다녔던 발바닥”을 데려가 “오래 써먹”어(「아바나 일화」) 보겠다는 다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분주하게 “다대포”(「DDP」)와 “우이동 계곡”(「채소 콜키지」)을 걷는 집주인의 발걸음으로부터 왠지 모를 홀가분함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안도 밖이 되는 이상한 집에서는 바깥의 것들을 안으로 들여와 울창해질 때까지 가꿔내는 일도 물론 가능함을 우리의 집주인은 비로소 알았으므로, 홀가분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방에서 시작해 쿠바, 아르헨티나, 다시 한국을 경유하며 완성된 『온몸일으키기』의 지형도는 「아이솔레이션」이 「다-체-rium」으로 향하는 여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고립되었던 마음과 다종한 바깥의 언어를 얽어내어 한 접시의 “다중생활체”로 만들어내는 조리법은 사실 정해진 것이 없다. 다만 손이 기억하는 “떠드는 감각”을 믿으며 계속해서 부지런히 떠들다보면 이 생활체는 끈끈하고도 근근하게 자라 “점점 확장된다. 사방팔방으로”(「다중생활체」). 초록의 빛깔로 무성한 집을 뒤로 하고 집들이를 끝내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슬쩍 “어느 모종” 하나를 건넨다. 이곳저곳을 오가느라 소홀했던 것에 대한 사과의 표시인가 생각하며 우리는 그 모종을 받아들기로 한다. 그 모종에서 무엇이 자라날지를 기대하며, 또한 자신이 부여받을 방을 기다리면서 숨죽이고 있을 “반백여 모종 샘플러”를 끝내주게 성실한 우리의 집주인이 “끝내주게 잘 길러내”(「다-체-rium」)어 언젠가 또 우리에게 선보여주기를 바라며. * 이상하고도 싱싱했던 초록의 집을 나와 우리는 또 다른 집의 문지방을 밟는다. 이 집은, ‘진공 같은 곳’. 시인이 살아온 날들로부터 그의 시를 가늠해보는 일은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20여 년 전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해 독일어로 말을 하고 사유해왔다는 박술의 내력은 『오토파일럿』을 잘 읽어내기 위한 단초가 된다. 시와 번역과 철학, 그리고 한국어와 독일어, 가끔은 영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를 재료로 축조된 시인의 집은 굉장한 밀도를 자랑하지만 왠지 선뜻 다가서기에는 어렵다. “푄 Föhn 바람”과 “뵈엔 Böen 바람”(「란스 Lans」)으로부터 불어오는 풋내와 짠내의 차이를 사전에 의존해서만 더듬더듬 감각할 뿐인 이 방문객은 잘 읽어내고 싶은 마음과 근사하게 읽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오가며 찬찬히 집의 곳곳을 살핀다. 혼자서 집을 짓고 방울뱀처럼 네 가슴을 두드려보니 한국말로 울기에 좋았다 사랑이란 나라말을 몸에서 벗겨내는 일 삭발을 앞둔 메두사의 심정으로 거울 앞에서 발화를 연습한다 안녕, 내 이름은, 안녕. 이것은 우리말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쟤네나라사람이야 네 마음도 둘이니 - 「쟤네말」 부분 방울뱀은 허물을 벗을 때마다 더 크게 울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의 언어도 저곳의 언어도, 그렇다고 “우리말”도 아닌 시어가 부유하는 벽간에서 어쩐지 슬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까닭은 이 집이 진공 상태가 되기 전 고여있었던 “한국말”이 도처에 스몄기 때문일까. 박술은 시집의 끝에 실린 산문에서 「쟤네말」이 “우리말이 낯설어지고 외국어가 모국어를 밀어내던 시절, 그러나 자리를 빼앗긴 말들이 아직 경련하던 시절”에 쓰인 시라고 고백한다. 이 말로부터 거울 앞에 선, “삭발을 앞둔 메두사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지를 감히 짐작해본다. 자신을 지키던 가장 큰 무기를 제 손으로 버리기 위해 돌처럼 굳어가는 마음. 방울뱀처럼 울고 싶지만 울어버릴 언어조차 굳어 그저 황망하기만 했던 기억이 박술의 시를 지탱한다. 중력이 없는 이 집에서 사물의 제자리를 찾아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집주인이 어딘가에 내려놓은 시어들은 그 자리에 가만 있지 못하고 공중을 둥둥 부유하다가 우연히 우리의 손 끝에 걸리게 된다. “향수를 뿌려서 집을 지”은 것마냥(「Åhus」) 쉬이 부서지려는 말들은 아마 “나라는 나라”(「밤」)에서 온, 오직 한 사람만이 능통한 모국어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쟤네나라사람”이다. 스스로만 알고 있는,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역사 위에 재건된 각자의 모국어를 발화하는 한, 우리 모두는 서로의 “쟤네나라사람”이 될 운명이다. 그러니, “사랑이란 / 나라말을 몸에서 벗겨내는 일”이라면, 생경한 언어를 입고 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읽기는 무엇이라 칭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가 말했듯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면, 타인의 언어를 더듬거리며 나의 한계를 감각하고 그의 가장 내밀한 공간으로 들어가려는 몸부림에는 어떠한 이름을 붙여야 마땅한 것일까. 그 집의 구조는 미궁과 같아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이지만 그 안은 짐승의 내장처럼 복잡했다. (중략) 집의 크기는 무한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의 수는 무한하다. 어린 우리는 집 안에서 길을 잃으면서 마음에서 피를 흘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요하고 따뜻한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걸으면서 그것을 되찾으려고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중심에서 멀어졌다. 멈추어 있으면 집 그 자체가 움직이면서 우리 주위를 맴돌았고,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 「망치의 방」 부분 박술의 『오토파일럿』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일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사유한다. 모든 이들은 이방인의 신분으로 산다. 고국을 떠나 독일 땅을 밟았을 어느 날의 박술만이 이방인이 아니며,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으로 남은 채 서로의 집을 헤매는 이방인의 처지를 우리 모두가 타고났다. 이런 우리가 “길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의 수”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집을 거닐 때, 사람들 사이로 어떠한 원심력이 작용하게 된다. 세계의 중력과 구심력을 무화시키고 “누군가에게 절을 올리고 싶”(「윤회」)게끔 하는 이상하고도 숭고한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눈먼 언어의 집”(「바실리카타 여행기」)을 배회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누가 집주인이고 방문객이랄 것도 없이 집안을 마냥 감돌던 우리는 어느 방 앞에 멈춰 선다. 「망치의 방」은 “미궁”과도 같게 느껴지는 이 집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뜻모를 곳이다. 이 방의 막대한 부피는 마치 소설 같기도 하고, 오래된 괴담 같기도 하다. “기억이 다가오면 기억을 쓰고 생각이 다가오면 생각에게 지면을 내어주고자”(「산문」) 했다는 글. 혼란한 공간에 놓인 언어들은 시집의 제목인 “오토파일럿”에 의해 기술되기라도 한 것처럼 산만하며 방대하지만, 그곳에서 박술이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얻어볼 수도 있다. “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너만을 위한 망치를 만들어 가지는 일이라는 것”. “망치”가 은유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내기란 어렵겠으나, 분명한 것은 망치의 본질은 부수는 일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방인을 나의 안으로 초대할 때, 우리는 그만을 위한 망치를 만들게 된다. 그 망치로 내려치게 될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즐거운 나의 집 한 귀퉁이를 허물고 그가 들어올 구석을 마련하는 일은 더욱 즐겁다. 한계의 지평선을 넓히며 “백만 개의 어둠”(「휘어진 빛」), 그 미지의 가능성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로부터 존재와 불가해와 사랑이 태어난다.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두워질수록 너에게 가까워진다는 감각”(「횔덜린 변주곡 6」)에 몸을 맡긴 채 이 희미하고 까다로운 무중력에서 기꺼이 휘청거리는, 우리. “은어로 지은 집”(「페를라흐 Perlach」)을 누빌 때의 우리는 이제 절대적인 이방인에서 벗어나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방황하는, 오토파일럿 모드의 비행사가 된다. 결코 도달하지 못할 건너편의 세계에서, 진공 상태를 뚫고 반가운 소리가 전해진다. “있지, 잠결에 한국말이 들려왔다. 언제 거기에 한번 데려다줘”(「망치의 방」). * 초록이 무성해지는 집과, 뜻모를 언어가 부유하는 집. 차현준과 박술이 내보인 첫 시집으로부터 우리는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세계의 안과 밖을 허무는 작업임을 다시금 감각한다. 바깥에 서 있는 당신을 나의 안으로 초대하고 당신을 위해 나의 안을 바깥으로 꺼내어놓을 때, 경계는 희미해진다. 흐려질지언정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대신 우리의 사이에 탄생한 새로운 만유인력을 나와 당신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 “한 번도 안 적도 온 적도 없었던 곳”(차현준, 「대저택」)을 궁금해하며 자꾸만 그 이상한 집으로 향하게 되는 발걸음은 기이하다. 그러니, “지금, 여기말에, 자기말을, 내어주기”(박술, 「도움닫기 없이 날기」).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은 고립되어 꽉 닫혀있던 나를 조금 허물어 나와 당신이 먹고, 자고, 사랑하며 무성해질 곳을 마련하고 싶다는 뜻에 다름 없을 것이다. 안과 밖, 나와 당신의 가운데에 놓인 ‘우리’의 집은 침범과 침입을 반복하며 기이하게도, 무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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