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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겨울호(제121호)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

인아영 문학평론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 <진창과 별>(문학동네, 2023)을 출간했다.

   1. ‘미적인 것’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아니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을 때, 그러나 세상은 이런 내 마음 따위는 아무려나 상관없다는 듯 멀쩡하게 굴러가고 있을 때, 그러면서 자꾸만 내게 무언가를 말하라고 요구할 때,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글쎄,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가,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이었다가, 낯익은 방안의 천장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무섭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작은 토끼풀이 마치 토끼라도 되는 듯 머리를 긁는 귀여운 모습. 아마도 현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자꾸만 내게 무언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도 모르겠는 내 마음을 물어본다면, 비록 현실이 아닌 꿈에 불과할지라도 그냥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면 안 되는 걸까? 안 될 것도 없지.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의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문학동네, 2023)에는 현실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눈앞에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에 따라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바라보는 풍경으로부터 현실을 이해하기. 세상에서 관철되는 논리에 꿰맞추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꿈속의 장면으로부터 거꾸로 세계를 재구성하기. 내 마음과 세계를 일치시키기. 내 마음이 된 그 세계를 믿어버리기. 이렇게 꿈 같은 세계에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확인하려는 내향성1)은 오늘날 시에 널리 보이는 하나의 경향이다. 이것은 과거에 풍미했던 서정적 아름다움의 귀환일까, 아니면 현실과 긴밀하게 연루된 시적 흐름에 대한 반동일까, 아니면 시의 문법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리의 현현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넘실거리는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1984)에서 아서 단토는 현대 예술에서 ‘아름다움’ 혹은 ‘미적인 것’은 끝났다고 말한다. 더이상 고전적인 의미의 숭고하고 쾌적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19세기 이후 자신의 본질을 확고하게 인식하려는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이제는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순수하고 무목적적인 아름다움 개념도, 그에 반대하여 추하고 기괴한 것을 아우르는 아방가르드적 아름다움 개념도 유효하지 않다.2) 그러나 진보적인 역사 발전 단계에 따른 양식으로서의 ‘미적인 것’이 더이상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시대에나 ‘미적인 것’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바로 인간이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아무리내향적이라고 해도 미적인 감각에는 나라는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특수성’에 대한 지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개인들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는 ‘보편성’에 대한 예감이 동시에 작동한다. ‘미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이 경합하는 장이며, 이를 통해 개인은 자기동일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 세계와 연루된다.

   이 글은 지난 삼십 년 동안 한국문학에 나타난 ‘미적인 것’의 지도를 그려보려는 시도이다. 비평 용어로서 ‘미적인 것’은 ‘미적 근대성’ ‘미학(성)’ ‘아름다움’ ‘자율성’ ‘형식’ 등 가족 유사성을 지닌 개념들과 함께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도구로 빈번하게 쓰여왔지만, 때로는 내포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때로는 다른 개념의 추상적인 대타항으로서만 제시되어온 경향이 있다. 삼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세세히 담아내기에는 성근 지도가 되겠지만, 유사한 맥락과 용례를 가졌으면서도 정리된 적은 드문 이 범주들이 지나온 궤적을 조망해보는 하나의 문학사적 관점은 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미적인 것’이란 자기동일성을 벗어나게 하는 감성적인 자질이자 경험으로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함, 기괴함, 껄끄러움 등의 가치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보고자 한다.

   이 글의 가설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1990년대 초중반에 제기된 중요한 질문, 즉 ‘모든 것이 끝나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문학은 시대마다 저마다의 ‘미적인 것’을 그 응답으로서 탄생시키고 변주해왔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20년대에서 시작해 1990년대까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보려 한다. 출판 시장이나 매체와 같은 외부적인 조건의 변화를 전제하고 그로부터 변화해온 한국문학의 규모와 테두리를 측정, 분석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문학에 발을 디딘 채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나아가보기 위함이다. 우리가 실제로 읽고 쓰는 문학은 지금 무엇을 향해 있는가? 무엇이 그것을 길러왔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조건 속에서 태어났는가?


   2. 귀여움과 언캐니의 세계ㅡ2020년대


   황인찬의 시에 드러난 것처럼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은 2020년대의 다른 시들에서도 폭넓게 관찰된다. 복잡한 현실의 논리와는 동떨어진 작고 소중한 대상에 집요한 애정을 가지거나 그러한 애정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내향성의 시’들이다. 이러한 시들에 나타나는 미적 범주를 귀여움이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그러나 도로는 울퉁불퉁하다. 고르게 가다가 울퉁불퉁하다. 멀리 돌이 하나둘 네다섯 흩어져 있다. 흩어져 아무 형상도 이루지 않는 만족스러운 것들. 귀여운 것들.

—「귀여운 것들」 중에서


   머리를 가격당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서 아무것도 아닌 일 존나 큰 고양이에게 머리를 가격당해도 아무것도 아닌 일은 정말 정말 귀여운 아무것도 아닌 일.

—「존나 큰 고양이」 중에서



   김유림의 시집 『별세계』(창비, 2022)에 실린 「귀여운 것들」에서 ‘귀여운 것’은 고르지 않은 도로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작은 돌들이다. 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지도 않고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 자연물. 그러나 그것은 아무렇게나 흩어져 아무 형상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무게도 부담도 주지 않는다.이 작고 가볍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마음에 만족감을 준다. 그런데 귀여움이란 그렇게 안정적이고 일방향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른 시 「존나 큰 고양이」에서 귀여움이란 카페의 뒤편에 있는 커다란 고양이, 아니 정확히는 그 고양이가 내 머리를 치는 일이다. 기분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고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말 정말 귀여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대수롭지 않은 서술과 달리 화자가 이 일이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인가”를 집요하게 고민하고 번복하는 모습은 꽤나 분열증적이고 신경증적이다. 이 귀여움에는 분명 양가적인 무언가가 있다.



   우리가 실제로 읽고 쓰는 문학은 지금 무엇을 향해 있는가?

   무엇이 그것을 길러왔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조건 속에서 태어났는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미적 경험을 분석한 시앤 응아이에 따르면, ‘귀여움cuteness’은 단지 친숙하고 무해한 대상에게 느끼는 애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귀여움은 무력하고 유약한 것을 사랑하려는 욕망인 동시에 그것을 더욱 하찮게 만들고 보호하려는 수동공격적인 욕망이라는 점에서 애초에 양가성을 가진다.3) 이를테면 고선경의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는 슬러시, 초콜릿 바, 토마토 젤리, 메론 소다와 같은 스낵이나 장난감, 부루마불 게임과 같은 귀여운 기호품에 대한 강렬한 애착으로 범벅되어 있지만 그 애착이란 실은 파괴적인 욕망에 가깝다. 생기 있고 달콤해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사물들(“달아빠진 것만 좋아했으니까 노란 비닐 포장지 위로 흘러넘치던 향긋한 냄새 땅콩 박힌 캐러멜을 감싼 초콜릿 표면”)이 유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사탕이나 초콜릿 포장지가 만져진다 내용물이 빠져나가고 없는 것들”) 화자에게는 이런 것들이 언제든지 망가지고 으깨져도 상관없어 보인다(「내가 가장 귀여웠을 때 나는 땅콩이 없는 자유시간을 먹고 싶었다」). 다정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원래 예민하게 날 선 욕망과 불가분하다는 듯이. 아무리 “다정의 효능이나/시의 효능”이 무엇인지 골똘하게 고민해도 결론은 이렇다. “감동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관심……/받겠냐?”(「건강에 좋은 시」)

   귀여움의 미학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에서 끊임없이 교환가치를 거래해야 하는 문학의 위치에 유비되기도 한다. 「스트릿 문학 파이터」에서 우승 상금과 인기, 출간 계약을 얻어내기 위해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에 참가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시인들은 “재치 있는 발상과 첨예한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을 들으려 애쓰지만 시쓰기에 투입한 노동가치와 팔려야 하는 교환가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 안에서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젖”는다.4) 자본주의사회에서 문학은 점점 작아지고 귀여워지고 무력해지고 있는 걸까? 귀여움은 모든 사물을 위험하거나 불편한 구석 없이 기분좋고 쾌적한 상품으로 포장하는 중산층적인 소비 욕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증상적인 미감이지만, 동시에 너무 사소하고 연약해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추상적인 교환 논리에 휩쓸리지 않게 애정으로 수호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제동을 거는 비판적인 수행이 될 수도 있다. 시스템의 질서에 따르는 순응적인 전략인 동시에 시스템의 구멍을 드러내는 전복적인 저항이라는 귀여움의 양가성을 모두 읽어낼 필요가 있다.

   동시대 시의 미학적인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귀여움이 있다면 다른 쪽 끝에는 언캐니uncanny가 있다. 이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가속류 시’라고 호명되는 일군의 시들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가속류는 추상적인 단문, 반복적인 패턴, 우연적인 배치, 무한한 재귀 루프 등 자동화된 기계의 작동 원리를 알고리즘으로 구축한 최근의 시적 경향을 가리키기 위해 제안된 개념이다. 배시은, 김뉘연, 성다영, 한재범, 문보영, 이유야, 변혜지 등의 시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경향은 얼핏 내면의 욕구가 희박해 보이고 사유의 깊이가 얕아 보이지만 과잉 데이터가 눈앞에 쇄도하는 시대에 디지털 가분체가 된 주체의 달라진 인지 방식을 반영하며 새로운 시 창작 알고리즘을 갱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5) 그런데 일인칭 화자의 메타적 중첩, 망각으로 인한 단절, 현재의 무한한 영속화같은 가속류 시의 스타일이 만일 독자들에게 낯섦과 껄끄러움이 동반된 언캐니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단지 지금까지의 익숙한 시적 체험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시들에는 무언가 비인간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끼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천천히 곱씹어 표현하는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자동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응답하는 기계적인 방법은 이러한 시들이 닮아 있는 사고방식이자 무의식적 회로로서 시전반을 장악한다.

   무언가 불순하며 알 수 없는 것이 끊임없이 끼어들고 있다는 감각은 현재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간으로 인지하게 만든다. 영원히 불변하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태. 온전한 인간도 온전한 비인간도 아니라 둘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는 상태.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미래에 대해 열려 있는 감각을 동반하며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비한다. 이러한 현상은 동물, 식물, 사물과 같은 비인간 타자들이 대거 등장한 2020년대 시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탐문을 읽어내는 독법과는 다른 독법을 요구한다.6) 여기에서 유효한 질문은 ‘우리는 얼마나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 이후에도 ‘우리는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다. 서론에서도 언급한 이 질문에 이 시대의 시들은 ‘내가 아닌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다. 혹은 되고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드러내고 있다. 의도와 무관하게 갱신되고 있는 새로운 인간성은 우리가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무한한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3. 시공간적 좌표의 변화와 갱신ㅡ2000년대와 2010년대


   2010년대 중후반 우리에게는 ‘미학적 올바름’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7) ‘올바름’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지양한다는 의미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이라는 단어로 주로 사용되지만, 이 단어가 예술의 자율성이나 아름다움을 억압하는 부정적인 근거로 오염된 맥락을 고려하여 반대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에서 명료하게 알 수 있듯 이 시기에 ‘미학성’이라는 비평 용어는 ‘정치성’의 이분법적인 대타항으로 쓰이곤 했다. 하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이 소상하게 논구되기보다는 정치적인 맥락의 부재, 메시지로 환원되지 않는 형식, 예술의 본령 등 추상적이고 ‘올바른’ 가치로 전제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2010년대 문학의 ‘미적인 것’을 분석하기 위해 우선 미학성은 반정치적이며 정치적인 문학은 반미학적이라는 통념8)을 지우고 실제로 문학작품에서 분출했던 미적 감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펴보자.

   강화길의 단편소설 「음복」이 “앎과 모름이라는 인지의 시차를 이용”하면서 “앎은 온전히 젠더화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서사라는 해석9)이 명쾌하게 보여주듯 이 시기 문학에서 결정적으로 다루어진 요소는 인식론적인 가치다. 앎은 새로운 무언가를 깨닫거나 배운다는 의미에서 엄밀하게 미적 범주는 아니지만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이것을 경이라는 감각과 연결한다.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어떤 대상이 (……) 우리가 그전까지 알고 있던 내용이나 갖고 있던 믿음과 상당히 다를 때 (……) 나는 경이가 모든 정념 가운데 가장 우선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한 데카르트의 논의를 빌려 사라 아메드가 정리했듯 ‘경이wonder’는 이미 알고 있던 익숙한 세계를 마치 처음처럼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페미니스트의 자원이다.10) 그렇다면 이 시기에 융성한 퀴어 페미니즘 문학은 ‘경이’라는 미적 감각을 활용하면서 이 세계가 반드시 지금과 같은 모습일 필요가 없으며 얼마든지 새롭게 갱신될 수 있다는 역사적인 시야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시앤 응아이라면 흥미로움interesting이라고 이름 붙였을 이 감각은 대상에 대한 느낌을 일시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체험이라기보다는 세계를 지속적이고 능동적으로 탐구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가까워 보인다.11)

   경이(사라 아메드) 또는 흥미로움(시앤 응아이)이라는 미적 감각은 퀴어 페미니즘 문학을 독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비평적 자원이다. 이를테면 이 시기 본격적으로 축적되기 시작한 퀴어 비평에서 텍스트를 독해하는 주요한 방법론 중 하나는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 중심주의로 구획된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인 확장이다. 게이, 레즈비언 등 작중인물 또는 작가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퀴어 문학의 범주를 구획하는 ‘당사자주의’나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 퀴어 시민권과 성원권에 대한 인식을 탐문하는 독법을 강조하는 비평,12) 여성 서사에서 여성의 욕망을 무해한 멸균 지대로 상상하거나 오리지널한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가 있다고 가정하는 대신 이들이 서로를 오염시키는 종류의 친밀성을 더욱 읽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비평13)이 적실한 예다. 퀴어 문학 텍스트를 인물의 정체성에 의해 완결되고 고정된 범주로 받아들이면서 그 내적인 작동 원리를 분석하기보다는, 독자의 해석에 열려 있는 유동적인 범주로 받아들이면서 그로부터 이어지는 새로운 인식론적 갱신을 요청하는 독법이다. 이때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성적 규범을 벗어나 퀴어 로맨스를 ‘연성’하면서 얻는 향유의 쾌락이 “이미 인식하고 있는 평범한 것을 특이한 것으로 바꿔”14)냄으로써 우리가 지각, 감각하는 세계의 형상을 쇄신하는 강렬한 미적 체험이라는 사실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인식론적인 확장에 대한 주목은 자연스럽게 ‘새로움’이라는 문학사적 가치의 조명으로 이어진다. 경이 혹은 흥미로움이라는 미적 감각은 세계를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이 세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상상하고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때 새로움이란 문학사적으로 “현재와 가까운 물리적 시간이나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단절, 혹은 강박적으로 추동되는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어진 현실을 반복하는 대신 저마다의 특수한 경험 속에서 우리가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재설정하는 자기 갱신에 가깝다”.15) 이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시공간적인 좌표를 객관적, 상대적으로 인지하고 그에 따라 문학(성)을 탈신비화된 산물로 바라보는 역사주의적인 독법을 정교하게 발달시키기도 했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성, 이성애 중심주의와 같은 기율을 비판적으로 쇄신하는 ‘새로운’ 문학의 가치, 역할, 의의에 대한 뚜렷한 확신과 충만한 기대가 깔려 있으며 그러한 갱신이 이루어지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시간적 감각과 유토피아적인 세계에 대한 희구가 동반된다. 앞서 제시된 ‘우리는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 시대의 주체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내가 되었다’라는 응답을 제출한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이 언제나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2010년대의 ‘미적인 것’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 대한 정확한 시공간적 좌표 위에서 성립했다면,2000년대의 ‘미적인 것’은 그 좌표가 비교적 모호하거나 무너진 지대 위에서 창발되었다. 이를테면 ‘미래파’ ‘다른 서정’ ‘뉴웨이브’ 등으로 불린 일군의 시들은 이전 시대 서정시의 메커니즘과 다른 미학적 전위를 선보였다는 비평적 지지를 얻었지만, 2000년대 후반 ‘시와 정치’ 논쟁의 국면에서는 랑시에르의 예술론 수용과 맞물리면서 “세계의 낡은 감각적 분배를 파괴하고 다른 종류의 분배로 변환시킴으로써 삶의 새로운 형태들의 발명을 동반”16)하는 정치성으로 나아갔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그 가치가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쟁이 기대고 있었던 ‘미학성’과 ‘정치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잠시 괄호에 넣어본다면 이 시기의 시에서 실제로 나타났던 ‘미적인 것’을 표류의 감각이라고 정리해볼 수도있을 것이다. 시대와 적극적으로 동기화하려는 의지가 보이지는 않지만 단지 무의미나 무기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역사의 장력과 위계로부터 벗어나 언어와 사물을 평면화된 세계 속에서 이동, 변형, 재맥락화하려는 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감각은 세대, 성별, 계급, 이념과 같은 정체성을 가볍게 벗어던질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경계도 거침없이 지우는 시적 주체의 미학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 시대 주체들의 응답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감각은 비슷한 시기 ‘무중력’이라는 비평 용어로 적실하게 설명되었던 소설적 흐름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김중혁, 편혜영, 한유주, 김애란, 천명관 등의 2000년대 소설이 리얼리즘적인 규율이나 현실적인 중력으로부터 과감하게 자유로워진 서사적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비평이 대표적이다.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특권화하는 대신 다양한 미디어와의 상호작용을 서사의 재료로 삼기 때문에 일상성, 내면성, 미시 서사와 같은 가치가 중요했던 1990년대 소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미학적 가능성이 탄생했다는 주장이다.17) 그러나 그 어떤 중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감각,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감각, 현실에 대한 시공간적인 좌표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은 1990년대 문학으로부터 뚝 떨어져나온 생경하고 단절적인 자질이 아니라 어쩌면 세기말에 앞선 세대가 이미 불길하게 감지했던 예감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익숙하고 연속적인 자질일지도 모른다. 바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모든 것이 끝나버린 세계에서 더이상 흥미로운 것도 중요한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는 1990년대적인 인식 말이다.


   4. 기믹으로서의 문학ㅡ1990년대


   이 세계에 더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쓸쓸한 예감은 1990년대에 ‘환멸’이라는 비평 용어로 이미 정확하게 포착된 적이 있다. 1980년대는 독재 정권이라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항해야 했지만 “피투성이의 포복 속에서도 역동적인 힘으로 충일했었”으며 오히려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가까이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반면, 1990년대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는 싸워야 하는 적대의 전선이 사라지면서 “환멸의 시간”이 찾아왔다는 진단이다.18) 탈이념이라는 지향, 거대 서사에 대한 거부, 개인적인 욕망의 분출,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1990년대 문학이 이전 시대의 미학과 결별하면서 “거대한 환멸에 대항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확정지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도 같은 맥락이다.19) 이 허무라는 감각은 당대 한국문학뿐만이 아니라 포스트 냉전기 이후 오로지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사실만이 확실”20)하다는 인식을 폭넓게 공유한 동아시아 혹은 전 세계의 공통적인 미적 정조이기도 하다.

   이는 끊임없는 새로움으로 작동되는 미래지향적인 체제인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모더니즘이 갑자기 펼쳐진 광대한 세계에서 느끼는 기대, 흥분, 공포라는 감각을 동반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것이 반복되는 세계에서 느끼는 지루함, 허무함, 덧없음이라는 감각을 자아낸다. 무언가 새롭고 좋은 것이 시작되리라는 희망찬 기대가 아니라 거대한 폐쇄회로에 갇혀 있다는 비관적인 낙담이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21)고 말해지는 대안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었으며, 그마저도 이 시스템의 작동 원리에 맞아떨어지는 잘나고 번듯한 개인이 아니라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고장난 하찮고 비루한 개인이 된다. 그러나 앞뒤가 막힌 폐쇄회로라고 해서 개인이 시도할 수 있는 대응 전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선 비평들이 보여주었듯이 1990년대 문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느끼는 허무함을 동력 삼아 진지한 엄숙주의를 비집고 활기를 만들거나, 시스템으로부터 일탈하여 균열을 내거나, 소외된 자아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주체를 새롭게 일깨우는 미적 경험을 만들어냈다. 시스템에 속박되어 패배할 것이 분명하지만 시스템과 자아의 불일치를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실현하는 주체를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원칙과 일치하는가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자아, 감정, 신념과 일치하는가”22)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더이상 새로운 것이 없는 세계에서도 자기를 실현하는 자신만은 언제나 새로울 수 있다. 1990년대는 이후 삼십여 년 동안 한국문학에 울려퍼진 ‘모든 것이 끝나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강력하게 제기된 시대이자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다’라는 응답이 끓어오른 시대였다.

   이러한 미적 감각은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을 맞닥뜨린 시대에 문학(성)이라는 가치의 근거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이 시기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미적 근대성’이었다. 미적 근대성은 근대문학이라는 자율적인 영토에서 발생하는 내재적인 자기반성 능력을 통해 근대성을 변증법적으로 탈구축하는 체제이자 매개이다.23) 이때 ‘미적인 것’은 감성적인 자질이나 예술적인 체험이라기보다, 모순을 끌어안고 자기동일성을 탈구축하는 문학의 내적 원리로서 ‘문학의 자율성’ 개념과 거의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이 ‘미적인 것’ 덕분에 문학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상업주의 시장에 꼼짝없이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내적인 거점을 근본적으로 마련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내적 모순을 감당하면서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가치를 획득한다는 문학(성)은 문학이 어떠한 허점이나 오류도 자기 갱신의 연료로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자동적인 반성 기계로서의 문학주의를 구축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쩌면 그러한 자동적인 반성 기계로서의 허점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것이야말로 1990년대 문학일지도 모른다. 미적 근대성이라는 개념의 논리적인 완결성과 별개로 1990년대 문학이 주목한 하찮고 비루한 개인들의 욕망은 자기반성을 통해 끊임없이 갱신하는 문학(성)에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불안과 허무함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시스템에 들어맞지 않아 언제나 불확실한 과잉이나 결핍으로밖에 감지되지 않는 이 개인들은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자신들이 속한 시스템의 가치 체계를 흩뜨릴 뿐만 아니라 그 균열을 노출한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문학은 일종의 기믹gimmick으로 작동했다는 명제도 가능하다. 기믹은 허황된 가치 상승을 보장하는 사기나 과장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알아보는 감식안이자 그것을 드러내는 테크닉이기도 하다.24) 얼마간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키치와 유사하게 간주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25) 아무리 잘나고 번듯해 보여도 이 시스템 안에서는 누구나 하찮고 비루할 수밖에 없고 그 가치는 정당하게 인정되는 일 없이 과잉 또는 결핍으로 매겨지며 문학 역시 불안정한 가치 창출의 매트릭스 위에 있다. 더이상 문학은 진보적인 역사의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미적인 것을 담아내는 투명하고 매끄러운 그릇일 수 없으며, 대신 확실하거나 유일할 수 없는 다양한 ‘미적인 것’들을 경합시키는 장으로서 세계의 허점을 드러내는 기믹으로 작동한다. 이 불안정한 운동이야말로 문학의 자율적인 가치판단을 보장하는 기본 조건이다. 이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보충해온 것이 1990년대 문학의 성과 중 하나다.


   5. 나가며


   시간순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1990년대에 제기된 ‘모든 것이 끝나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한국문학에서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다양한 ‘미적인 것’을 탄생시키고 변주해왔다. 더이상 새로운 것이 없는 폐쇄회로에 갇혔다는 허무함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주체를 탄생시켜온 1990년대 문학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다’라는 응답을, 이러한 허무함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표류의 감각으로부터 가볍고 자유로운 주체를 만들어낸 2000년대 문학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는 응답을, 자신이 서 있는 시공간적인 좌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2010년대 문학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내가 되었다’라는 응답을,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 이후 2020년대 문학은 ‘내가 아닌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다. 혹은 되고 있다’라는 응답을 말이다.

   지난 삼십여 년간 ‘미적인 것’이 변화해온 양상은 이 세계뿐만 아니라 ‘나’라는 주체를 새롭게 인식하고 규정하는 도구로서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미적인 것’이란 자기동일성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방식인 동시에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새롭게 발명하게 만드는 방법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지배적인 감각으로서 ‘미적인 것’은 있기 마련이며 이는 시대를 비추는 동시에 시대로부터 비져나와 우리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든다.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깨진 곳에서 미적인 범주는 새롭게 갱신되고 격렬하게 재구성된다. 역사가 필연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역사로부터 우리가 새로움을 스스로 갱신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아름다움의 길은 어디로든 열려 있다.

  • 1) 후쿠시마 료타는 바깥 세계에 사실주의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작중 캐릭터의 내면을 우화적으로 그리는 가와카미 히로미, 다와다 요코 등 헤이세이 시대의 소설이 ‘내향’ 문학의 계보에 있다고 분석했다. 이를 동시대 한국시에 나타난 내향적 성향과 등치할 수는 없지만, ‘내향’이라는 개념이 “1990년대 한국문학을 주도했던 ‘내면’과의 차이를 검토하는 데도 유용한 비교점을 마련해준다”는 번역자 안지영의 말대로 한국문학에 적용해볼 만한 참조점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후쿠시마 료타, 『나선형 상상력—헤이세이 일본 문학의 문제군』, 안지영 옮김, 리시올, 2024, 258쪽.
  • 2) Arthur C. Danto, “The End of Art”, The Death of Art, ed. Berel Lang, Haven, 1984.
  • 3) Sianne Ngai, Our Aesthetic Categories: Zany, Cute, Interesting, Harvard University Press, 2012.
  • 4) 박상수는 고선경의 시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버린 폐쇄된 현실감각”이 깔려 있으며 특히 이 시에는 더이상 “화폐로 환산될 수 없는 시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출구 없는 디스토피아”가 그려진다고 분석한다. 박상수, 「망할 세상에서 농담하기—스트릿 문학 파이터 분투기」,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해설, 문학동네, 2023, 163~166쪽.
  • 5) ‘가속류 시’라는 명칭이 고안된 배경과 그 함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에서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망각지: 채굴 불가—가속류 시 현상에 반영된 인지 자본주의의 (비)상상력」,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 6) 비인간 주체를 다루는 시들에 대해 나는 시적 주체의 인칭, 규모, 양태, 변화 가능성이 아니라 시적 주체가 참여하는 관계 양상을 분석의 단위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인아영,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2020년대 시에 나타난 ‘타자’와 비인간 물질의 정치생태학」, 『문학동네』 2022년 봄호), 최근의 가속류 시의 양상은 (비)인간의 범주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그러한 경계를 무화하거나 갱신하는 주체의 인지 방식에 대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
  • 7) ‘미학적 올바름’이라는 용어는 강지희의 글(「괴로움을 고통으로 다시 쓰기」,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에서 빌려왔다. 이 글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문학이 통념과는 달리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로 단순하게 수렴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올바르지 않은’ 문학들이 활발하게 오염되고 경합하는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일률적인 미학성”에 대한 환상을 재고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 8) 물론 미학성과 정치성을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통념은 이 시기의 전유물은 아니다. 문학사에서 가깝게는 2000년대 후반 랑시에르 수용사, 멀게는 1920년대 카프 문학의 내용 형식 논쟁에서 이러한 이분법적인 통념을 둘러싼 고찰과 분투를 배울 수 있다. 한편 최근에는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에서 나타나는 미학성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소, 「나의 아름다운 사물들—신유물론과 비평에 관하여」,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 9) 오은교, 「여성주의 가족 스릴러」, 강화길, 「음복」 해설,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42~44쪽.
  • 10)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382~387쪽; 김보경, 「경이의 세계, 시라는 경이」,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97~98쪽.
  • 11) Sianne Ngai, op. cit.
  • 12) 오혜진, 「지금 한국 퀴어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한국 퀴어 서사의 퀴어 시민권/성원권에 대한 상상과 임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겨울호.
  • 13) 오은교, 「오염과 친밀성의 경계에서—이성애 공포와 여성 섹슈얼리티 재현의 임계점들」,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 14) 사라 아메드, 같은 책, 383쪽.
  • 15) 인아영, 「비평과 사랑—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84쪽.
  • 16)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76쪽.
  • 17) 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2000년대 문학의 다른 이름들」, 『문학과사회』 2005년 여름호.
  • 18) 서영채, 「환멸의 시대와 소설 쓰기」, 『문학동네』 1994년 겨울호.
  • 19) 신수정, 「환멸의 사막을 건너는 여성적 글쓰기의 세 가지 유형」, 『문학동네』 1995년 가을호.
  • 20) 후쿠시마 료타, 같은 책, 20쪽.
  • 21)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 22) 황종연, 「비루한 것의 카니발―90년대 소설의 한 단면」, 『문학동네』 1999년 겨울호.
  • 23) ‘미적 근대성’ 개념이 1990년대 중후반 한국 문단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으로서 근대성 담론을 이끌었던 맥락에 관해서는 서영채, 「위기의 담론—인문주의와 근대성」, 『세계의문학』 1994년 여름호; 황종연,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 『세계의문학』 1994년 여름호; 이광호, 「문제는 ‘근대성’인가」, 『환멸의 신화』, 민음사, 1995; 황종연, 「근대성을 둘러싼 모험」, 『창작과비평』 1996년 가을호 참조.
  • 24) Sianne Ngai, Theory of the Gimmick: Aesthetic Judgment and Capitalist Form, Belknap Press, 2020.
  • 25) 윤원화, 「땅을 파는 손」, 『쓺』 2024년 상권, 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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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김나현소설계간평리뷰 2025
최다영 유독한 유기농 가족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림 :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양수빈소설계간평리뷰가족 2025
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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