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딩아돌하 2024년 봄호(제70호)
파도들이 남긴 무늬 :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 임유영, 『오믈렛』, 문학동네, 2023.
얼마 전 동네 책방에서 <겨울나기-시인의 첫 시집 읽기> 모임이 있었다. 최승자, 한강, 한여진, 임유영 시인의 시집을 매주 1권씩 읽고 모여, 자신이 마음에 들었던 시를 낭독하고 다른 이들과 감상을 나누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문학평론가’로서 모임의 진행을 맡았는데, 사실 그런 진행이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다. 첫날은 얼마나 긴장했던지, 참여자 중 한 분이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굳이 더 말을 보태지 않더라도, 시집을 읽어온 분들의 감상과 거기서 뻗어가는 대화만으로도 정해진 시간을 항상 초과하곤 했으니까. 각자가 골라온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이미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했던 것마냥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흘러갔다. 그 흐름 속에서 혼자 읽었을 땐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솟아오르며 빛났다. 함께 읽는 시의 맛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순서는 한강 작가였다. 나는 해당 시인의 산문이나 인터뷰 등을 준비해갔던 기존과 달리, 단편소설 한 편을 인쇄해 가져갔다. 제목은 「교토, 파사드」. 작가는 글의 말미에 “에세이로 이름 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선택의 순간이면 늘 그렇게 했듯 소설로 이름 붙였다”고 밝혀놓았는데, 나는 행과 연으로 쓰인 이 글이 ‘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한 면씩 맡아 돌아가며 낭독한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글의 끝 대목을 두고 두 분의 의견이 부딪혔다.
내가 아직도 어리석다는 것.
아직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
우리가 이 삶에 잠시 다녀가는 이유를.
결국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이 모든 사랑과 슬픔의 순간들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를.1)
한 분은 이미 헤어짐을 가정한다면 어떻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고, 다른 한 분은 처음부터 헤어짐을 가정했기에 오히려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말이 맞을까. 이를 두고 또 다른 얘기들도 이어졌지만, 그날 거기 모인 우리가 공유한 생각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만남과 헤어짐은 따로 분리되기 어렵다는 것. 둘은 특정한 시작과 끝으로 나뉘어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 “이 모든 사랑과 슬픔의 순간들” 중의 하나와 하나로서 연결되어 흐르고 있다는 것. 그것은 “이 삶에 잠시 다녀가는” 와중에는 결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흐름으로서 오가고 있다는 것.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 역시 어떤 것과 어떤 것은 다르다고 말하는 어법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이것과 저것을 나눈 뒤 각각에 이름을 붙이고 둘은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구분 짓는 경향이 강하다. 만남과 헤어짐, 시작과 끝, 태어남과 죽음, 나와 너, 우리와 저들, 안과 밖, 현실과 꿈 등등. 그리고 그렇게 한 번 구분한 뒤로 그에 대한 의문은 금지된다. 책상은 책상이라고 명했기에 책상이고, 의자는 의자라고 명했기에 의자인 것이다. 한 번 이름이 매겨지고 그 위로 쇳물이 부어진 이상, 책상이 왜 책상이냐, 책상을 의자라 부를 수는 없는 거냐는 식의 물음은 굳어버린 쇳물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어쩌면 이는 언어의 태생적인 폭력성 혹은 슬픔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로 이 언어의 속성을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언어이기도 하다. 언어는 책상이 왜 책상이냐고, 책상은 의자와 어떻게 다르냐고 저를 사용하여 제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가장 잘 묻는 이들이 시인기도 할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하나의 단어”로 요약해달라는 말에 이런 질문을 품는 자는 시인이다. “나는 의자이며 / 나는 기차고 / 나는 파도라서 // 내일은 갈매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 어떻게 말할까” 2)
1. 지워진 경계를 찾아서
-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물론 그 일은 쉽지 않다. “오후 열두시 오십분”이면 “그만 돌아갑시다 점심시간도 끝났어요”라고 “자꾸만” 되뇌는 이가 동료인 세계. 그렇게 “사람들이 자꾸만 짓고 자꾸만 만들고 자꾸만 낳고 자꾸만 먹어치워서 우리가 서로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들”은 뒤처지기만 하는 세계(「하지」)3). 아마도 그런 세계의 작동 원리는 어떠한 의심도 없이 그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앞으로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일 테고, 이는 “매뉴얼대로 하겠습니다 매뉴얼대로”라는 말 외에 다른 어떤 말(예컨대 “‘좋은 작품을 위해 작가들의 휴식과 산책을 보장한다’”와 같은)도 허락하지 않는, 그 순간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져버리는 세계와 같다. 세계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작업자들이 작성하는 “매뉴얼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오직 그들의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고 말할 것을 요구한다(「혁명과 소음」).
“볼리비아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으로” 그러다 “다국적 기업”에 팔려 다니며 전 세계를 떠도는 당나귀. 태어나자마자 꼬리를 당기면 쓰러지도록 훈련된 당나귀는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아이들의 웃음거리이자 어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진다. “나는 너무 열심히 살았어”라고 중얼거리며 “아무도 꼬리를 당기지 않아도” 혼자 “픽픽 쓰러”지는 당나귀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하 관리되고 착취당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모습과 닮아 보인다(「본업」). 그럼에도 「인터뷰」의 ‘나’는 위와 같이 획일적인 질서에 맞추길 요구하는 세계에 맞서 “단 하나일 수 없는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전선에 선다. 그런데 이 시의 중간에는 이런 대목도 있어 어떤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바라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바라는 것을 때때로 모르는 척하는 사람 중
내가 어디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고
그도 결국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 “하나의 단어”만을 요구하는 ‘그’와 “하나의 단어”를 거부하는 ‘나’는 분명 대척점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얼핏 구분되는 듯 보이는 ‘바라는 것을 위해 자신을 속이는 사람’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바라는 것을 모른 척 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이제 ‘그’와 ‘나’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분선이 흐려져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어쩌면 한여진 시의 진검승부는 바로 이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를 옮긴다.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읽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결말은 아니니까
가장 많은 미움을 샀던 인물처럼
나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개울에 빠져 죽었다던 그와는 달리
반대편에 잘 도착했는데
돌아보니 사방이 꽁꽁 얼어 있었고
그애는 여름에 죽었겠구나
죽은 이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모여 흐르는 땀을 연신 닦다가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진
텅 빈 구멍을 들여다본다
(…)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서로를 미워하던 인물들은, 마침내 가장 많은 미움을 샀던 이가 죽은 후 모여서 흐르는 땀을 닦는다. 눈엣가시가 사라졌으니, 이제 속 시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진 “텅 빈 구멍”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 구멍은 “검고 아득해서 / 바닥이 보이지 않”아 그 끝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가장 못되고 미움받던 악당 같은 이가 죽었음에도, 이 소설-삶은 좀처럼 빛이 비치거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가 않는다. 오히려 이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는 듯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그 깊어지는 마음 상태는 「Beauty and Terror」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가 “매일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누군가가 끌려가고 사라”지는 세계, 바로 그런 세계를 지배하는 듯한 ‘당신’과, 그런 “당신의 발밑에서 그저 오늘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인 ‘우리’. “당신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의 종류를 떠올리며” 살아온 우리. 그러나, 이 시에서도 화자는 이런 구멍에 닿는다. “그래도 그의 머리를 내리쳐선 안 된다는 생각”.(물론 그 뒤에 “하지만 결국 그리될 거라는 생각”이라는 구절도 있다!). 화자는 명백히 못되고 나쁜 가해자로서의 ‘당신’과 ‘당신’으로 인해 힘들고 괴롭고 아픔을 겪은 피해자로서의 ‘우리’를 구분 짓는 그 경계선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과 ‘나/우리’ 사이의 경계선은 또렷한 것인가? 아니, 그보다 ‘우리’ 속 ‘나’와 ‘너’ 사이에는 정말 어떠한 경계선도 없는가? 어쩌면 ‘나’ 라는 존재 안에서는?
두부를 구우면 겉은 노르스름해지고 바삭바삭해지지만 그 속은 여전히 하얗고 촉촉하게 남아 있다. 겉과 속 둘 다 두부인데, 구운 후에 둘은 조금은 달라져 있다. 어떤 마음을 계속 들여다보는 일. 고정되고 명백해 보이는 사안이나 생각을 다시 한 번 뒤집고 또 뒤집으면서 이리저리 굴려보는 일. 세계에 균열을 내고자 하던 이가,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그 자신을 균열내게 되는 일. 창밖의 세계를 향하던 이의 시선이 어느 순간 창에 비친 자신의 “두 눈을 바로 바라보”(「밤 친구」)되는 순간. 그러니까 세상과 ‘나’ 사이에는 “지나가던 사람”과 “멧돼지”와 “배달 기사”와 “공무원”과 “올리브나무” 등이 “깜빡깜빡 자꾸만” 오가는데, 어느 순간 눈을 뜨는 시인의 앞에는 “빈 노트”가 놓인다. 다시, 지워진 경계를 찾아서 떠날 준비를 마쳤다는 듯이.
2. 견고한 경계를 넘어서
– 임유영, 『오믈렛』, 문학동네, 2023.
임유영 시집의 화자에게 세상은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슬프다. 흔히 ‘웃프다’라고 표현되는 이 감정에는 삶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시선이 내재되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매번 무거운 문을 밀면서 왔습니다……”라는 독백 같은 말 속에는 언어로 쉽사리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빈 종이가 한 장 있을 따름이다.”(「병정들」) 자, 이 빈 종이에 이제 어떤 이야기를, 어떤 말을 해볼 수 있을까. 아니, 빈 종이는 그저 빈 종이로 두어야 하는 것일까.
먼저 던져보아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앞서 한여진 시의 화자가 ‘무엇을 안다’는 것에 대해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어?’ 라고 회의를 표한다면(“순무의 적정 입수 온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인 ‘나’와 순무를 좋아하는 ‘그’에게, 순무를 뽑는 아주머니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들은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만.”(「순무는 순무대로」)), 임유영 시의 화자들은 자신만만해 보인다. “소녀들은 죽음과 눈물과 폭력과 섹스와 오물과 고통을 생각하는 / 완벽한 방법을 알아낸다.”(「헤테로포니」) “우리는 알아.”(「굴은 바다의 우유」) 그러나 여기서 주어 ‘소녀들’과 ‘우리’에 주목해본다면, 그리고 ‘우리’가 시의 내용상 남자로부터 살해 위협을 경험한 여성들임을 떠올린다면, 여기서 안다는 것은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으로서 경험하고 느낀 무엇으로 보인다.4)
흥미로운 것은 임유영 시의 인물들이 무언가를 알아갈 때, 그것은 ‘시선 또는 관계의 역전’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둑들인 우리가 산에서 주운 “스물세 개의 돌”은 내일이 되면 “스물세 사람”이 되고, 이는 도둑들이나 스물세 개의 돌에게서나 “아주 조금 뒤바뀐 세상에서 눈”뜨는 일이 된다(「도둑들」). ‘돌에서 나온 사람’ 연작이라고 할 수 있을 「돌에서」, 「구역」, 「밤에」는 그 내용만 도식적으로 뽑아보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①「돌에서」: 나는 돌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②「구역」: 돌에서 나온 사람은 둘레를 따라 걷는다. ③「밤에」: 우리는 돌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돌에서 나온 사람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①주체의 시선에 의해 생겨난 객체-돌에서 나온 사람이 ②스스로 걷더니 ③거꾸로 주체-돌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본 우리-주체를 구성해주고 있다. 무생물로만 여겨지는 돌이 시선을 갖고, 견고하게 굳어 있는 돌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 나온다.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역전 현상이 시집에서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강렬히 표현되는 대목은 삶과 죽음 사이일 것이다. 시집의 곳곳에는 죽임을 당하거나 당할 것 같은 사람, 죽고 싶거나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 죽은 후 자신이 어떻게 발견될지를 염려하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듯한 사람 등 모든 이들이 죽음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다. 삶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을 바라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기묘한 「꿈 이야기」를 읽어보면 어떨까. 크게 세 문단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첫 문단에서 ‘나’는 “벚꽃이 절정이라기에” 산책을 나선다. 그러다 교복을 입은 한 여자아이를 보고, 역시 교복을 입은 한 남자애가 자전거 뒤에 그 여자아이를 태우고 가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다 사거리에서 그만 사고가 났다고 한다.” 다음 두 문단을 옮긴다.
사고가 나서 여자아이는 죽어버렸다. 나는 그날 꽃은 못보고 돌아가던 길에 교복집 하는 늙은 남자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죽을 징조를 벌써 보았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그날따라 여자애의 그림자가 무척 옅어서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했고, 둘째, 하얀 토끼인지 개인지 작고 사람은 아닌 것이 날래고도 사납게 그 뒤를 쫓고 있었고, 셋째로 사람이 달리는데도 한 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카락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영감의 말을 곧이 믿지는 않았다. 무릇 꿈이란 뇌에서 배출된 찌꺼기에 불과한데, 그런 꿈을 해몽한다는 자들의 말 또한 사람을 현혹하는 얕은 수일 뿐이다. 그 증거로 나는 사월의 화창한 대낮에 꽤 오래 걸었음에도 전혀 땀을 흘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붓을 들어 이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었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붙여두었다. 후에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았다.
과연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가. 얼핏 보면 산책을 나서는 첫 문단과 늙은 남자로부터 사고 얘기를 듣는 두 번째 문단은 꿈이고, “붓을 들어” 이야기를 옮겨 적는 세 번째 문단만이 현실로 보인다. 그런데 두 번째 문단만 꿈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첫 문단의 마지막 문장인 “사고가 났다고 한다” 이후로 ’나‘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도 듣지 못했으므로, 그 뒷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두 번째 문단은 미지未知로 남는다. 실제로는 사고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설령 사고가 났더라도 둘 다 멀쩡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꿈의 내용은 내가 종이 위에 어떤 이야기를 적을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까?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있다. 두 번째 문단의 ‘나’는 “사월의 화창한 대낮”을 걸었음에도 “전혀 땀을 흘리지 않았”는데, 어쩌면 ‘나’가 이미 죽은 상태인 것은 아닌가. 세 번째 문단의 ‘나’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살아있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가만, 그런데 이 세 문단이 모두, 그러니까 이 시 「꿈 이야기」 전체가 꿈이라면? 그렇다면 독자로서 지금 나는 이 시를 보며 누군가 “죽을 징조”가 보인다고, “꿈을 해몽한”답시고 “사람을 현혹하는 얕은 수”를 부리고 있는 영감인 것일까. 질문은 끝이 없다. 이 시가 꿈과 현실, 죽음과 삶, 작가와 독자가 둘 사이의 경계선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섞어 놓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표제작이 된 「오믈렛」의 첫 문장 “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은 이 시집의 맛을 감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 중립적인 맛은 흰자와 노른자가 따로 구분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한데 섞”일 때에만 발생한다는 것. 어떤 경계선을 넘어서야 가능하다는 것. 임유영의 시에서 자신의 죽음만을 들여다보던 이는, 그 자신의 죽음을 바라볼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떠올려보게 되고, 그 두 시선의 부딪힘은 이전에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을 일을 해낼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던 이가 불현듯 거울 속 다른 존재들-죽어있다고 여겨왔을 것들-의 시선과 돌이킬 수 없이 얽혀버리는 바로 그 순간, “매번 무거운 문을 밀면서” 살아온 한 여성의 앞에는 한 장의 “빈 종이”뿐 아니라 한 자루의 “붓”이 생겨날 것이다. 꿈 이야기가 그렇게 쓰이는 것이라면, 어쩌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리저리 뒤섞여 있으나 단일하고 고정된 것으로만 보일 당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붓을 들어” 옮겨보고자 한다면.
*
모든 것이 정해지고 안정된 상태가 실은 그렇지 않다고, 여러 차이와 갈등을 매끄럽게 봉합하고 마감한 표면 밑에는 잘 보이지 않는-그렇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상태나 지대가 있음을 발견해 내고 말하는 일. 무감하게 굳어버린 세상과,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찔러서라도, 고정된 경계선을 지우고 지워진 경계선을 다시 드러나게 하는 일. 언어에 기대어 그러나 언어를 넘어서며, 시인들은 그 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한다. 바다로부터 태어났으나 저 자신이 되어 사라지는 파도들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가며, 지워진 경계를 찾아내고 고정된 경계를 넘어서는 파도들처럼. 그리고 파도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무늬를 남긴다. 2023년의 끝자락과 2024년의 첫 자락 사이, 나는 한여진과 임유영의 첫 시집이 남긴 무늬를 종종 들여다보며 살았다.
- 1) 한강, 「교토, 파사드」, 문학과사회, 2020년 봄호, 148쪽.
- 2) 한여진, 「인터뷰」,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 3) 「하지」와 「초기화」 연작을 기후 위기와 관련하여 읽어볼 수도 있을 듯하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경계선을 넘어서버리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기후 위기의 ‘티핑포인트’를 그저 지금까지 해오던대로, 매뉴얼대로 하면서 지나쳐버릴 것인가. ‘하지’를 지나 ‘초기화’에 이르고 말 것인가.
- 4) 시집의 해설에서 평론가 조연정은 때로 우리 모두가 “죽음을 생각하는 처참한 기분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따뜻함으로 뒤바꿔줄 누군가”의 ‘부드러운 마음’ 역시 “분명 우리 곁에 있다”며 “미래의 죽음을 서로 기억해주길 바라는 여성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1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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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1. 림보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해가 뜨고 지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예외 없이 반복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 의미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 온전한 구원도 영원한 처벌도 아닌 기이한 경계 위에 놓인 끝모를 유예의 삶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텅 빈 약속에 기대어 자기 몫으로 주어진 무한한 침묵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견디며 서서히 소진되어 갈 뿐이다. 림보가 때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원형이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구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한없이 갈망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으면서도 간절히 희구하는 인간의 오래된 마음과 그 기이한 관성을 림보의 심연으로부터 불현듯 마주치게 되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흐르지 않는 시간의 더미 속을 오늘도 무심히 통과해 간다. 림보 안에 갇혀 있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망각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금까지의 생과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무한한 반복뿐인 오늘의 심부에 거칠게 쑤셔 넣는다. 어떤 부정도 외면도 더는 되풀이할 수 없을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생의 열기를 창백히 소진시켜 하루치의 안도와 평화를 가까스로 얻어낸다. 그렇게 림보의 일부가 되어 간다. 급류에 휩쓸리듯 림보의 심연에 깊이 좌초된 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허방 속을 무한히 배회하며 림보의 중력에 천천히 소화되어 간다. 이번 최호빈의 시편들은 이 림보의 심연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매혹과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화자들은 공허한 반복뿐인 림보의 시간을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살아냄으로써 정보와 명령의 과잉으로 점철된 현실의 앙상한 구조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오래도록 잊어온 살아 있다는 일의 경이와 그 선득한 실재를 회복해내고 있었다. 의미의 부재를 좇으면서도 섣불리 상상적 매개에 의지하지 않는 신중한 견고함으로 림보가 뿜어내는 육중한 중력을 존재의 내부로부터 캄캄히 씹어 삼키고 있었다. 림보의 심연 속을 항해하는 그 투명하고도 예리한 시적 섭생의 한 방식을 따라가 본다. 2. 림보의 출입구를 발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그토록 선명했던 목표도 출발점도 림보의 중력과 그 자장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것이 한없이 모호하고 흐릿해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림보는 단순히 삶만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온 일체의 가치나 의미까지도, 이에 기대어 뿌리내려온 존재의 모든 시간까지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린다. 림보에 갇힌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동력은 관성이며, 이는 삶의 고유성과 의미를 모두 말끔하게 지워버린 현재라는 강력한 동일성의 중심을 향해 어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아간다. 최호빈의 시는 그 맹목의 관성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투명하게 응시하되 어떤 확신도 포기도 신중히 경계하는 이중의 절제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성찰적 시가 도달하기 쉬운 환원론적 경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 낸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체온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혈압을 잰다 폐활량도, 골밀도도, 시력도, 심전도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맥박을 세고, 혈당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기록한다 오늘이 낮이 긴 날인지 밤이 긴 날인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있다 (중략) 체인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차르르, 차르르 하루가 하루를 굴리고 있다 ―「루틴 버그」 부분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맹목적 “루틴”뿐인 삶의 허망함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사유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이 림보의 중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근대적 자각의 형식을 빌린 손쉬운 착각 속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오직 동일한 운동의 “반동”과 그 강도에 기대어 “하루가/하루를 굴리”는 지리멸렬한 삶의 풍경은 명백한 부정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는 우리 삶의 조건이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며 그 삶이 놓여 있는 지배적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계몽적 맥락에서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림보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그 맹목뿐인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호빈의 시는 림보에 갇힌 생의 구체적 세부를 하나하나 주시하고 “기록”해 둠으로써, 그 텅 빈 강박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존재의 깊은 불안과 고독을 읽어낸다. “맥박”, “혈당”, “혈압” 등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수치화한 표백된 추상의 개념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살아가는 뒤틀린 허기뿐인 삶의 중심엔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없는 곳에서/점멸하는 가로등같이 애써 살아가는 오늘이/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나 우리,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닌데, 다음의 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선생님, 저희는 팔을 흔들며 달릴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궁금한걸요 (중략) 마지막 곡선코스를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 친구는 쓰러져 있었고, 한 친구는 울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고, 한 친구는 마치 신호를 듣지 못한 듯 출발선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손에 있었던 것은 건네주고 건네받는 릴레이 바통이 아니라 녹초가 될 때까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0의 릴레이」 부분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경주마의 은유는 이미 우리 생의 보편적 형식이 되었고,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이를 내면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당위적 상식과 표준 내지 윤리적 규율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녹초가 될 때까지” 결코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대의 “릴레이”란 사실 “릴레이”의 형식을 빌린 단독 경주에 불과하다. 우리가 참고 견뎌온 공동체의 경주가 실은 어떤 것도 서로에게 “건네주”거나 “건네받”지 못하는 “0의 릴레이”였다는 깨달음은 날카롭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물론 최호빈의 문장은 그와 같은 체념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비록 영원한 “0의 릴레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릴레이 바통”을 단 한 번도 서로에게 건넨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트랙을 도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이 공통의 운명에 처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였음을 아프게 지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번도 온전히 발설된 적 없는 “우리”가 림보 바깥의 시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면, 다음 절의 시편들은 이를 존재에 대한 질문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전환해내는 시적 사유의 깊이와 그 견고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3. 앞서 다룬 시편들이 림보에 갇힌 삶의 구체적 세부와 그 표면에 비교적 밀착해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다음의 시편들은 성찰적 거리의 매개를 통해 림보의 바깥을 좀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사유한다. 이에 따라 시의 무대 역시 성격이 조금 달라지는데 이들 시편들에서 림보는 맹목의 관성과 공전(空轉)의 열기로 위태롭게 굴러가는 타성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매혹적인 탈경계적 공간으로 변모된다. 그럼에도 이를 림보의 차원에서 일컫는 까닭은, 이 마력의 공간이 언제나 경계와 경계 사이에 놓인 항구적 임시의 공간이며 오직 경계를 넘기 위한 갈망의 깊이만이 그 내부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최호빈의 다음과 같은 시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림보의 중심에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 림보 너머를 사유하고 매개하려는 존재 탐구의 의지를 드러낸다.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겠지. 별생각 없는 이마를 쓰다듬고 사라진 건 누굴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겹쳐 쥔 채, 조금씩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하는 너의 시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가 거기서 깨어난 적이 있다. 오늘도, 내일도. 네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오랜 꿈을 다시 꾸듯 네게 짖고 싶어. 그게 내 운명이라면, 컹컹. ―「데자뷰」 부분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또 건너왔다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돌 하나 정말 내 꿈에 누가 또 있는 걸까 세 번째 돌을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건너오다가 가라앉은 걸까 아니면 그냥 가져간 걸까 그냥 돌아간 걸까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물수제비」 부분 세계는 “미심쩍은 그림자들”로 대표되는 무의미한 일들의 무한한 반복과 단 하나 강렬한 사건적 의미의 출현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적대적 요소들의 대립으로 삶과 세계를 거칠게 이분화하여 환원시키려는 폭력적 의지와는 별 관련이 없는데, 의미의 부재와 결여는 상실된 존재의 시원을 회복하기 위한 인식의 토대이자 판단의 근거일 뿐, 무구한 세계에 죄를 물으려는 핏빛 단죄나 원한의 투사가 아닌 까닭이다. 그의 화자들은 “너”가 “날 선택했”다는 명료한 판단과 전제 위에서,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타자의 방문과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위에서 ‘너머’의 감각과 그 물성을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만, 이 간절한 열망은 언제나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라는 질문의 형식으로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라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기다림의 언어로만 발화되고 매개된다. 최호빈의 시에서 의미는 그렇게 찾아온다. 림보 바깥으로부터 건너온 환대와 초대의 몸짓들은 오로지 그 너머와의 맹약에 사로잡힌 화자의 절대적 갈망과 의지로 인해, 기다림에의 헌신과 그 오랜 견딤의 밀도로 인해 비로소 고유한 얼굴과 목소리를, 체온과 무게를 갖게 된다.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라는 시적 전언은 그러므로 또 하나의 절대적 기다림에 대한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 ‘나’를 투신하여 나를 지우려는 것도, ‘나’의 두터운 중력으로 꿈의 물성을 구부려 억지로 집어삼키려는 것도 아닌 이 투명한 기다림의 자세가 최호빈 시의 고유한 호흡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기다림이 있는 한, ‘너머’는 어디에서나 출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곳도 ‘림보’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다음의 시에서 림보는 세계를 집어삼키는 적대적 미로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 바깥을 상상하고 잉태하는 무수한 ‘너머’들의 자궁이자 그 기미들로 흘러넘치는 경계들의 성소로 현현된다. 조문하러 가는 장례식장은 얼마 전에도 갔던 곳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갔던 곳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아, 맥도날드 모든 불행은 멀리 있다는 듯 웃고 있는 맥 도 날 드 불 고 기 버 거 한참 뒤에 나타난 경찰이 정리를 해봐도 한번 막힌 도로는 쉽게 뚫리지 않고 눈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호루라기 소리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아, 글자 하나하나가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것처럼 묵묵히 솟아오르는 M c d o n a l d ’ s ―「이방인-맥도날드 불고기버거」 부분 “맥도날드”는 평소엔 아무런 문제도 의문도 일으키지 않는, 편리하고 무감한 숱한 일상의 장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퇴근길 막힌 도로처럼 꼼짝없이 림보에 갇히고 만 삶의 실재를 차분히 응시하려는 화자의 시선에 인해 일순간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처럼 분리되어 “묵묵히 솟아오”른다. 일상의 허기(“시장기에서 오는 쓸쓸함”)와 존재의 허기(“쓸쓸함에서 오는 시장기”)가 엇갈리며 뒤엉키는 이 기이한 경계적 시간 속에서 화자는 “맥도날드”라는 일상의 공간이 불현듯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무수한 “통로”들로 변신하는 시적 도약의 비일상적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맥도날드” 자체는 물론 어떤 숭고한 의미도 약속도 제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이하게 뒤틀린 경계적 공간들은 림보 너머의 삶과 그 선연한 물성들을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받아들이고 예감하게 한다. 이 너머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과 존재론적 갈망이 최호빈 시의 화자들이 ‘림보’의 심연을 헤매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것이 “너”라는 인칭으로 호명되든 “돌”이라는 존재론적 사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든, 불길하고 불가해한 실재에의 매개나 교차로로 묘사되든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최호빈의 화자들은 이 ‘너머’에 대한 사유와 갈망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실재들을 림보 속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림보’는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조건이자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 혹은 이미지이기에 앞서, ‘너머’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그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림보와 맺고 있는 곤경의 특수성을 얼마쯤 정확히 짚어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림보 안에서 태어나 ‘너머’를 꿈꾸고 갈망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림보는 우리를 가두지만, 동시에 그 가둠을 통해 깨어나게 한다. 깨어남을 갈망하게 한다. 림보는 우리의 적이면서 자궁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림보의 바깥은 림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림보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만 림보의 바깥으로 향할 수 있다. 최호빈의 시는 이 ‘림보’의 생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림보 안에서가 아닌 림보 속으로 쓰여진 기나긴 울음의 내력들을 그의 문장들로부터 뜨겁게 읽는다.
1. 파수의 다시 쓰기 (서윤후,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2025, 04) 경계하여 지킨다는 뜻의 파수(把守)의 한자어를 달리하여 派收로 써볼까? 여러 번 중의 어느 한 번을 뜻하는 파수(派收)를 다시 破水로 쓰면 파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물 혹은 분만 전에 쏟아지듯 터지는 양수를 일컫는 힘찬 말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유리가미」)라고 운을 뗀 시집을 펼치며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지 않으려고”“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는 문장을 만난다. <시인의 말>에 기대어 이 시집이 악몽의 받아쓰기, 오래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켜온 자의 고단함을 옮겨놓은 파수(把守)의 고백임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그러나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 수 있을까? 이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어떤 금기를 어기는 심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돌아보았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야 조금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떻게 변해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 시집의 관건 중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꾸만 ‘나’를 유기하고 가버린다.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앞에서 종종 나만이 오도카니 남겨졌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린 때도, 선생의 질문에 더 좋은 답을 궁구하느라 우물거리며 대체로 수용될만한 밋밋한 답을 제출한 때도, 누군가의 결정에 맞서 당차게 의견을 설파하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만 있던 때도 시간은 나만 놓고 표표히 흘러가곤 하지 않았나. 그럴 때면 어떻게 했던가? 돌아와 누운 밤에 후회와 함께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꼼꼼하게도 새겨넣지 않았나. 여기서 서윤후는 “나를 눌러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시인에게는 곧 ‘다시 쓴다’는 말이다. 제때 행하지 못한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라서 그는 시간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다만 그 시간은 망쳐버린 이야기의 시간이기에 주요 인물일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다린다. 이미 내가 종료해버린 이야기의 장면에는 그러나 나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도리 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리하여 장면 안의 이들이 행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세계는 온통 구겨지고 주름진 것들이다. 전단지 속 예수를 접었을 때 가방 속에서 툭 펼쳐지는 전단지의 주름은 전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전능도 나를 데리고 갈 순 없어서 그저 이 망가진 이야기가 끝이 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더 나빠지길 기다린다. 시간과의 결별이라는 결심은 한편 시인의 권능이기도 해서 여러 번 중 한 번을 겪을 기회, 다시는 가능해진다. 다시 쓰기라는 파수(派收)의 쓰기이다. 그러나 부적응의 시간은 상처로 오롯해서 왠지 씁쓸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망가진 것들은 저들끼리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세계의 주름일까. 주름만이 시가 될 것을 아는 자는 그렇게 “나빠지길 기다린다”. 창밖엔 멀쩡한 걸음으로 들고 온 목발을 다시 어디선가 절뚝이며 나타난 이에게 건네고 지폐를 주고받은 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또박또박 걸어가는 장면 균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구나 세상의 부목은 여기저기 출렁이면서 부러진 일순간을 잡아주면서 -「나빠지길 기다린다」 부분 다시 말해 세계의 균형이란 좋은 것만 있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한 시간마다 스프링클러가 열”린 후 나오는 햇빛은 외려 식물을 죽게 만들 수 있듯이(「독화살개구리」), “호주머니 속에”“젖은 돌멩이”를 가진 사람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임을, 그 고독한 세계로의 재입장(入場)의 입장(立場)이 매우 난처함을 헤아림이 필요하듯이(「고독지옥」), “살려주는”일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듯이(「견본 생활」)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절반씩 유효하다. 또 하나의 관건은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랑이다. 그건 타고난 체질인 양하다. 이를테면 「물길 빈티지」와 「유리가미」는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인과관계를 이룬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 관리를 맡기고 흘러갔다”. “이미” 물도 다 “말라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아……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음을. “서로 헤어진 적 없는 물의 우정”은 나를 배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은 이를테면 쓸모에 대한 발견이면서도 소망하던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하다(「물길 빈티지」).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다.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기억의 뒤뜰”이다. 이 뜰에서 숱하게 끊어진 연을 떠나보냈을 것이나 기어이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고 싶어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사람들을 모으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연줄을 죄 끊어버릴 참인 게다. 그리고 알게 되는 건 이 억지스러운 연(緣) 놀이가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인연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유리가미」).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사랑의 천재」)다는 고백은 그 말의 주인 역시 사랑의 천재라는 말로 들린다. 정말이지 사랑이 체질. 그런 그가 사랑을 부조하는 방식은 마지막 시편, 「비로소 함께할 것」의 목록으로 더욱 선명히 융기한다.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 부르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쓴 이 참여의 목록은,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대상들이 아름답게 박제된 완결의 이야기 쪽이 아닌 미완과 실패의 조금은 남루한 조각들 쪽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둡기만 하던 흑백의 시퀀스는 이제는 보내야하는 어떤 끈질긴 마음의 한 장면을 아스라하게 닫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자 그 시간을 닫는 이별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끝내 홀로 꾸던 악몽의 시간 속에서 다음의 이야기는 마냥 나쁘게만 쓰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그런 시간,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이 결코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님을 이 악몽의 파수꾼은 지키고 쓰고 지우고 쓴다. 그럴 때 그 시간과의 결별 후 찾아올 새로운 시간은 무언가 한꺼번에 물꼬를 틀 파수(破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밝은 쪽에 있다고 믿는 나의 눈부심은 실은 항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스레 어둠 쪽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과 함께 다음의 시간은 올 것만 같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경적을 울리며 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부분 2. 유동하는 물질들의 시론 (서동욱, 『유물론』, 민음사, 2025, 03) 서윤후의 시가 그런 시간과 기억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숱하게 썼다 지우는 이야기라면 그 미덕은 극복에만 있지 않다. 미덕이라면 저 반복적인 쓰고 지우기 쪽에 더 있달 수 있는데, 서동욱의 「시론」에 기댈 때 그건 “낯선 것과의 조우”를 요청하는 “무의미”, 쓰는 자가 유의미로 포착한 그 무의미 속에서 생소한 무엇을 만나기 위한 “응답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는 시를 잉태하는 인간의 말, 실용성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쉽사리 “소통을 져버”리는 “고립”의 언어다. 이런 서동욱의 시론은 어쩌면 이 시집이 횡단하고 건너뛰며 출렁이는 물질성의 다양함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서동욱의 자서는 이러하다. “아스팔트 창밖으로 쓰레기장이 파랗게 빛난다 벼락을 맞아 충전된 건전지들이 폐건전지 통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친다 벼락이 밤새 한 인간을 찾는다”. 자서 속 인간은 벼락을 받을지도 모르는 물질의 한 유(類)로 존재한다. 벼락의 내려침에 인간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함은 저 쓰레기장의 폐건전지와 인간을 나란히 놓게 한다. 한편 인간이 폐기한 건전지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인 듯 쓰레기장에 놓여 벼락의 힘으로 충전됨으로써 재생의 물질로 전환되어 인간을 역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확장되는 행위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은 의도나 욕망과 같은 지향을 지닌 존재를 ‘두꺼운 행위자’로, 지향이 없는 것을 ‘얇은 행위자’로 나누기도 하지만(대니얼 C. 데닛, 『마음의 진화:대니엘 데닛이 들려주는 마음의 비밀』,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6, 49쪽), 시가 되기도 전 저 날것의 언어에서 이미 벼락은 어쩐지 의도를 품은 듯 “한 인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좀 더 인간의 권위를 내려놓고 싶은 내 과도한 마음일까, 저 구획과 분류의 틀에서 인간의 자리를 좀 더 지울 수 있다면 하는 심정. 시인과 함께 걷는 “동네에는 내가 하나” 있으면 “길이 하나” 있고, “공실이 된 상점”도 “하나가” 있다. “공실이 편의점이었을 때” 그는 “매일 술을” 샀는데, “점주 여인은 교회 나가자고” 권한다. 길과 상점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 길과 상점은 나의 산책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그리고 상점 안의 술이라는 물질은 나와 여인 사이에 신앙을 삽입하여 일종의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끔 추동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주 여인을 떠올리는 건””생뚱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이를 포함한 것이 저 산책길의 풍경이기 때문에 유독 그이만 빼는 게 더 어색하다. 이제 “전단지 나눠 주는 알바가” “나의 도착을 기다리”는 길에서 며칠 뒤엔 전단지와 알바를 떠올릴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동네의 본질”. 산책의 본질이 아닐까.(「산책」) 그런가 하면 여덟 편에 이르는 ‘생일과 명절에 관한 연애시’ 연작은 ‘날’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자정이 오자 생일 같은 명절이 되었고 생일들은 답안에 도달한 수학자의 숫자들처럼 서로 꼭 들어맞으며 연애의 첫 기쁨을 잔잔한 나날로 만들었고 생일이 된 명절은 아기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늙은 인간을 새 이야기로 놀라게 하리 -「한 해의 마지막 저녁」 부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해는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니 생일인 셈이기도 하다. 1월 1일은 데칼코마니 배열이고 ‘오늘부터 1일’은 설렘이 폭주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날’들은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걸까, 우리가 수없이 매달았던 날들의 의미를 되뇌어보자. 그때 인간의 행위는 그 감정까지도 꽤 수동의 모양이기도 하다. “철학도 정치도 자비심도” 호르몬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호르몬」). 우리는 파손된 기계 속았다고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넌 내게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중략) 우리는 파손된 기계 치킨과 소주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아주 살짝 그러나 엄연히 눈물이었지 -「사랑」 부분 그러고 보면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추억을 간직할 지성도 없”는 “순수 존재”인 그것은 기실 “그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영혼이 아니다”(「유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사랑했으므로(아직 사랑하므로) 거짓말조차 네가 내게 준 전부라고 믿는 이 무지성적 현상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인간은 “파손된 기계”일 따름이다. 사랑도 그러할진대 “시 쓰기는 욕망이 창끝에 매단 토템 같은 것”(「시론」)이라면, 이 시집은 온통 출렁대는 물질의 유동성, 그러한 유물론(流物論)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식용’ 식물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차현준, 『온몸일으키기』, 2025, 04) 물질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 표제작인 「온몸일으키기」는 보도블록의 이야기지만, 이 블록은 사고하고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결코 ‘얇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록은 다만 하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없”을 뿐이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기에 스스로 “망각”을 택하기도 하는 블록은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실패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와 손은 잡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블록은 “태풍이나 지진”을 틈타 “흔들리”거나 “전력 질주”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안간힘을 통해 블록은 벌떡 일어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꿈꾼다. 가능성, 차현준의 시는 공간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연다. 그 방법의 한쪽 손아귀는 육체이고 다른 한쪽은 미끄러짐이다. 그는 아무 데서고 미끄러져 여기와 저기를 불쑥 열어젖힌다. 그러한 공간은 “니트릴 장갑에 물을 채운 다음 비워내”기 위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접속 가능해지는 식이다. 장갑 하나 뒤집었을 뿐인데 “난생처음 보는 들판에 엎어”질 수 있다(「적재접속」). 만약 당신이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그런 다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당귀 방」). 아무런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앨리스가 그리하던 것처럼 쑥 미끄러지고 착 당도한다. 그럴 때 육체란 하등 방해의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되레 육체는 그 통로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럼 거기 가서 무얼하느냐? “들판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여기서 몇십 년 지낸 뒤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니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한마디로 시적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적재접속」). 그는 온통 푸릇한 것을 기르고자 한다. 당귀를 비롯해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방울토마토 등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기르는 푸른 것들은 온통 먹을 수 있는 것들,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채소류이다.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고창의 청보리밭을 꿈꾸게 하는 것처럼(「청보리밭」), 그가 보는 것들의 목록은 몇몇 나무 이름을 제외하고는 먹거리로 무성하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그건 새삼스레 식물을 키우며 그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필수적이다(서동욱의 「병원 밥」에서 병원이 죽음이 아닌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밥’으로 이야기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이 지속되는 물질의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식물성에 접속하기 위해 육체를 경유하는 것을 차현준이 공간을 창조하는 독자성이라 말한다면, 차현준의 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접맥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을 먹는 행위는 식물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다(이 구분이 인간 중심적일 수는 있겠다, 다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물컹해진 치커리”는 “퀴퀴한 냄새”로 변환되고 “뭉쳐지고 물컹해진 당귀들”은 “진물”을 내놓는다「당귀 방」). 식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먹는 행위는 인간을 배설하게 하는데 이 식물성의 배설은 “유기물이 풍부하다”(「밟아보기」). 유기물은 미래의 식물성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태 순환 고리 안에 인간의 자리, 역할을 마련해준다. 이런 배치는 인간의 행위와 임무를 결코 인간중심으로 놓지 않으면서 그 연결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게끔 만든다. 이런 식용의 식물성은 인도어팜이나 주말농장 등 어디 먼 농촌의 들녘이 아닌 “7호선 상도역”(「인도어팜 방문기」)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식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도시의 식물성은 어쩌면 ‘농촌상’ 보다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창조주이기라도 한 양 빛과 산소,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것은 자주 망하고 물크러지는가 하면 엄청난 자생력으로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신드롬」 같은 현상 말이다. 방마다 방울토마토가 들끓었다. 방울이라는 말이 없어 말이 되는 토마토가 무르익어 있었다. 굳이 자신을 방울토마토라고 우기 길래 그래, 그래. 상자에 들어가 있어. 나는 방마다 방울진 방울토마토들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중략) 이렇게 다 담아도 방마다 한 번씩 더 돌아다녀줘야 한다. 과즙이 묻은 초록 계열의 잎들을 떼어내기로 했다. 쌈 싸 먹을 수도 없게 구린내가 나니까. (중략) 이 방울토마토들은 대체 왜? 어떻게? 방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내가 왜 방울토마토를 채집하고 다녀야 하는지 난감했다. 방에 있는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밭. 거기서 또 생겨나지. 기어이 생겨나니. 아주 기꺼이 생겨나지. 화가 났다. 방울토마토는 농락하듯이 더 커져만 갔다. (중략)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는다. -「방울토마토 신드롬」 부분 먹는 행위로 식물과 도시의 인간은 연결된다. 인간은 식물을 먹기 위해 키우고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계의 일원이 된다. 키우는 것과 자라나는 것, 만드는 인간과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결국 한 몸이다. 그건 방울토마토의 초과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는 확실히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은 식물이 가진 생동성, 그 생장과 번식 심지어 짓무르는 죽음으로 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은 식물의 포식자이지만 홀로 행위자이지만은 않아서 키우고, 먹고, 배설하지만, 자라거나 짓무르고 확장하고 팽창하는 힘은 식물 쪽이 더 세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싱그럽지만 매서운 사실을 껴안고 있는 셈이다. 이 식물성이 없을 때 인간의 배설은 오염이다. 인간은 잘 먹고 좋은 배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돌보아야 하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든지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시집은 변화하는 생태와 인간의 연결을 전혀 새로운 감각, 그 독자성으로 써나간다, 확장해간다. 사물과 인간사가 타자, 난입자에 의해 계속 바뀌어 간다는 서동욱의 「시론」은 함께 읽은 시들을 관통하는 시간과 물질, 인간의 사유에 대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바꿔 쓰기가 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시에는 애초 중심과 경계를 나누고 의미와 그 속에 머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계라는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세계의 바깥 역시 없다는 통찰은 지금 우리의 시가 읽어내는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음을, 바뀐 그것 역시 누군가의, 무엇의 영구적인 자리가 아님을 적시하며 그간의 위계와 같은 폭력을 지워나가는 ‘시’라는 언어를 보다 부드럽게 연마하는 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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