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딩아돌하 2024년 가을호(제72호)
들끓는 괴물의 태피스트리
1. 혼종 괴물의 탄생
욕동들의 환상적인 야단법석에 놀라고 질겁을 해서
자기 자신이 괴물 같다고 스스로를 비난해 보지 않은 여자가 누가 있겠는가?
기이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고서,
자기가 병든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여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여성의 이 수치스런 병, 그것은 여성이 죽음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다시 꼬아야 할 그토록 많은 실을 준다.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중에서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 가운데에서 의(衣)에 관해서라면 여성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을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그중에서도 모직과 달리 면직은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실잣기는 여성들의 몫으로 할당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즈텍의 여성들은 네 살 무렵이면 방적 도구를 받고, 여섯 살이 되면 첫 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해지는 실잣기 기술은 가혹한 체벌을 통해 습득되었고, 아즈텍 여성들은 생활에서 필요한 면사뿐 아니라 통치자에게 바칠 면사를 만들기 위해 흡사 거미가 된 아라크네처럼 면직을 뽑아낸 것이다1). 살아남기 위해 매번 실을 자아야 하는 손끝에서 나오는 태피스트리는 박물관에 걸린 공예품처럼 웅장한 영웅담과 고결한 종교적 현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이들이 만들어낸 직물들은 끝나지 않는 고통과 생에 대한 한 줌의 의지가 섞여 다듬어지지 않은 무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연희의 시 역시 이들의 태피스트리와 결을 함께 한다.
한연희의 첫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아침달,2020)은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시에서 화자들은 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하며 다른 종이 되기도 하고(“인간에서 다른 무엇으로 발효된다//우리에게 지느러미는 등허리 어디쯤 달려 있어야 한다” - 「정어리」) 인간과 유령의 구분을 무화 시키며(“어린 유령들을 따라 벌판을 벗어나자 … 문득 차가운 손이 나를 잡아당겼다” - 「유령환각」) 기존의 언어에서도 탈피하고자 한다.(“대답하려고 입을 떼자 뜻밖에 슈슈가 튀어나왔다” - 「슈슈」 56쪽)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노력이다.
넥타이를 푸는 남자는 근엄한 척 앉아
나를 길들이려 하지
지성은 다리를 쩍 벌려야 하는 거라면서
역사 전문가 흉내는 집어치워
남자의 콧수염을 떼어내
내 코밑에 붙여버리지
여자가 아니라 인간
남자가 아니라 인간
인간은 털북숭이 사과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신은 늘 불완전함을 꿈꿔왔다구요
신은 우리 같은 존재를 원했다구요
눈썹이 코밑에 달라붙은 기분
콧수염은 나를 길들이지
온몸이 근질거려 벌떡 일어섰어요
(…)
정성껏 쓰다듬는다
말을 걸어준다
이게 세상을 흐르는 비결이에요
걱정은 집어치우고
털북숭이 사과연구회 모임에 가요
제멋대로 구부러진 회원들의 증표로
파인애플 수염을 내밉니다
- 「전격 X 작전」 부분
한연희의 시에서는 성차에 의한 억압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남성 역시 여성인 화자에게 “지성은 다리를 쩍 벌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비틀린 여성상에 화자를 종속시키려 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고 있는 남성의 콧수염을 떼어내 자신에게 철썩 붙여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은 성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시인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의 형상이 ‘털북숭이 사과’라는 점이다. 한연희에게 있어 인간은 털이 달린 과일이나 흑염소(「철학소사전」), 인간 선인장(「코코살롱」)과 같은 혼종적 존재다. 시인이 자꾸만 인간의 모습을 변형시키려는 것은 화자가 사는 세계는 성차의 구획이 너무나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어서이다.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져야만 성별로 나누려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시의 화자들은 성차의 의미가 없는 식물로, 여성을 사랑하는 양성적 존재로(「콧수염 로맨스」), 나이와 성별의 구분이 필요치 않은 톰보이로(「톰보이」) 탈바꿈한다. 시의 화자가 경계를 와해시킬 때 다른 종(種)과의 연결은 필수불가결하다. 뜨거운 퇴비에서 뒤섞일 때2) 성차나 성적지향, 인간으로서의 구분은 모두 무의미해지며 오로지 종과 종 사이의 동등함만이 남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계를 넘어서는 불순함, 기존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무질서함에서 괴물은 탄생한다.3)
다시 시의 화자가 ‘콧수염’에 길들여지는 부분에 주목해보자. 남성에게서 분리된 남성성의 상징인 콧수염은 화자의 신체와 융합되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콧수염은 화자에게 달라붙어 화자의 행동을 촉진하고, 과거를 되짚어보게 하며(「핀란드식 콧수염」), 콧수염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게 하는데(“구두를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요” - 「콧수염 로맨스」) 이는 남성의 신체에서는 발휘될 수 없었던 기능이 화자에게서는 발휘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콧수염과 화자와의 관계는 둘 중의 하나가 사라져서는 안 되는 반려종 관계로4) 화자는 콧수염이 있어야만 활달하게 경계를 건널 수 있고, 콧수염은 화자가 있어야만 잠재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화자는 콧수염의 숙주로서(“콧수염의 하나뿐인 숙주가 된 기분” - 「핀란드식 콧수염」) 콧수염을 정성껏 쓰다듬고 돌보아주는 것이다. 이처럼 남성의 신체를 몸 안에 흡수시키며 경계를 뛰어넘는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혼종 괴물의 출현을 확신하게 된다.5)
여자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슈슈?
내 입술을 벌려 자신의 동그랗고 빨간 혀를 넣어주었다
슈슈!
말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애를 알았다
긴 털의 여우가 있었어
새끼를 잃어버린 엄마였는데
지구를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이젠 누가 여우인 걸까
(…)
우리는 입술을 뗐다
눈을 뜨니 여자애는 사라지고 없었다
혀 끝에 아리고 떫은맛이 남아 침이 고였다
온몸이 떨리는데도 춥지 않았다
풀밭인지 개울가인지 모를 자리에 남아
여우가 준 사랑을 어찌할 수 없어서
언덕을 천천히 오르는 다른 여자애를
와락 사랑하고 싶어졌다
그 애에게 슈슈하러 간다
꼬리가 돋아날 것만 같아 입 안이 간지럽다
-「슈슈」 (56쪽) 부분
「전격 X 작전」이 남성의 신체와 뒤섞인 혼종 괴물을 보여주었다면 「슈슈」에서는 비인간 동물과 얽히는 혼종 괴물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긴 머리칼의 여자애를 마주한다. 그런데 여자애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화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슈슈’라는 낯선 음성이다. 경험해보지 않은 언어를 서투르게 연습하는 화자를 보며 여자애는 가까이 다가와 혀를 넣어준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을 통해 화자는 긴 털의 여우였던 여자애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언어가 사회가 받아들이는 실재를 규정하고 생성한다면6) 비인간의 목소리는 사용자 간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 서로의 경계를 허문다. 신체의 일부분을 상대에게 내맡기고 “따뜻하고 축축한” 온기로 감싸 안는 음성은 인간이었던 화자를 새로운 종으로 변화시킨다. 기억만 공유하는 것이 아닌 “꼬리가 돋아날 것만 같”이 신체적으로도 비인간의 형질이 발현되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 역시 비인간과 뒤섞인 후에 행동 변화가 두드러진다. 시의 초반에 더듬더듬 입을 떼던 화자와 달리 시의 후반에 나타나는 화자는 “여우가 준 사랑을 어찌할 수 없어서” 다른 여자애에게 ‘슈슈’를 전하러 가는 적극성을 보여준다. 다만 화자가 얼른 ‘슈슈’를 전하고 싶어 하는 것은 비인간의 목소리가 산발적이기 때문이다. 의미와 대립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언어와는 다르게 비인간의 목소리는 신체와 신체가 맞닿고 서로가 섞이면서 나타나기에 지금의 감정이 시간이 지난 후에도 퇴색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젠 누가 여우인 걸까”라며 여우와 여자애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화자는 지금 느낀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슈슈’를 다른 여자애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이를 보면 혼종 괴물이 가진 특징은 시간의 지속보다 더 넓게 퍼져나가는 전염성에 있는 듯하다. 비인간의 목소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명체를 대상으로 전파된다. 이는 종이나 돌 등에 새겨져 세대 간에 전승되는 기록물과도,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수직적 전승과도 다른 수평적인 움직임이다. 그렇기에 한연희 시의 화자들은 세계를 망가뜨린 콧수염이 난 인간들에게(「카이저에 대한 짧은 소견」) 분노하기보다 하나라도 더 많은 종류의 생명들과 관계 맺기를 원한다. 증오나 혐오를 돌려주는 방식이 아닌 사뿐히 경계를 넘어 사랑하는 이들을 계속해서 늘려가는 것이야말로 혼종 괴물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일테니.
2. 포자처럼 퍼져나가는 괴물들
두 번째 시집 『희귀종 눈물귀신버섯』(문학동네, 2023)이 보여주는 괴물들의 세계는 보다 음습하고 더욱 기이하다. 여우가 준 슈슈를 머금은 여자애나 콧수염 숙녀의 이야기는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듯 온갖 종류의 괴물들과 얽히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특히 첫 번째 시집에서 인간 화자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인간에게 손 내미는 모습이 특징적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비인간들의 행위성이 두드러진다. 비인간들은 인간에게 들러붙어 인간을 새로운 종으로 만드는데(「딸기해방전선」) 콧수염 숙녀가 성차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 인간의 외형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딸기나 귤, 콩, 버섯 등의 비인간과 뒤섞인 화자는 인간의 형상을 버리게 된다.(“인간의 탈을 낙엽 밑에 잘 묻고서/네 개의 발로 다져놓았다”-「사나운 가을 듣기」)
회색깔때기버섯을 먹고 싶어요
그 이름을 차근차근 발음하다보면
어둡고 창백한 면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몸 바깥으로 나온 기다란 촉수를 잡아 뺐어요
어쩌면 버섯이 동물도 식물도 아닌 것처럼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귀물이지 않을까요
눈에 띄지 않는 응달에서 눈에 띄려고 점점 새하얘저서는
(…)
누군가는 미치광이버섯을 먹고 심장이 멎거나
탑 아래로 그저 온몸을 내던져 곤두박질치거나
그렇게 세계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싶어서
새하얗고 투명한 원피스를 골라 입고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춤을 추러 다녀요
전쟁이 났군
죽음의 천사로 불리는 독우산광대버섯은
걸어다니는 유령을 만든다고 해요
(…)
독이 든 포자를 퍼뜨리려고 주름을 펼쳤어요
꼭꼭 숨겨둔 내면이 훤히 드러나 보여요
죽음을 끄집어내요
그렇게
나는 버섯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 「버섯 누아르」 부분
위의 시에서도 버섯과 동화되는 화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버섯을 먹고자 하는 화자의 몸에는 ‘기다란 촉수’가 달려 있다. 이미 인간이기보다 식물에 가까운 몸을 지녔음에도 화자가 버섯에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야생의 버섯이 가진 특성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야생 버섯은 나무둥치나 습지 등 포자가 닿는 습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자랄 수 있다는 점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독버섯을 섭취한 인간은 ‘심장이 멎거나’ ‘탑 아래로 곤두박칠치’며 죽음을 맞는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즉 야생 버섯은 일상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지만 이를 섭취했을 때의 부작용은 인간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인간의 행위성이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혼종 괴물의 특징이 지속이 아닌 확장성에 있는 것을 볼 때, 버섯이라는 균류는 괴물성을 전염시키기에 최적의 형태를 띤다. 그렇게 보면 버섯은 시에 등장하는 어떤 괴물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괴물이 아닐까.
또 주목해볼 것은 한연희 시에서 나타나는 버섯은 비인간이면서도 인간 여성과 매우 닮아있다는 점이다. 이미 시집의 제사(題詞)에서 시인은 “여자를 닮은 이름 모를 야생 버섯들은 홀로 나거나 무리 지어 난다. 대개 순하지만 독이 든 경우가 더 많다. 함부로 취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한 바 있다. 그렇기에 비인간 버섯과 인간 여성은 종을 뛰어넘은 친척과 같으며 보다 쉽게 연결된다. “순하고 여린 치유자로서”(「버섯 누아르」) 식탁에 오르는 버섯과 “여리고 순한 여성들”(「에밀리 껴안기」)은 외형적으로 닮아있을 뿐 아니라 모두 ‘독’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끈끈하게 연결된다. 사람굴을 먹어치우는 소녀나(「굴 소녀 컴백 홈」) 자신을 먹어치운 사람들을 죽이는 도깨비 소녀(「시옷과 도깨비」), 익사자들을 늘려나가는 원혼(「계곡 속 원혼」) 등 시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자신을 파괴하려는 가해자들에게 자신의 괴물성을 가감 없이 발휘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 버섯과 여성들의 괴물성이 합쳐질 때 각자가 가진 괴물성은 배가되며 화자가 인식하는 세계를 더욱 확장 시킨다. 화자는 독우산광대버섯과 같이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곳곳을 누비면서 이전엔 듣지 못했던 목소리들을 듣는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꺾이는 버섯들, 폭력에 쓰러지는 어느 여자와(「호두정과」) 이른 죽음을 맞은 아이들의 이야기에(「12월」) 귀 기울이는 것이다. 작은 목소리들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커다란 귀를 준비한(“귀 둘로는 모자라 커다란 귀 하나를 들여왔습니다” - 「시인의 말」) 존중의 자세는 화자와 버섯을 단단하게 얽히게 만들며 마침내 화자를 버섯의 일원으로, 혼종 괴물로 변화시킨다.
발바닥 아래에 점이 생겨났어요 쭈그려앉아 발을 잘라둡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오래도록 점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무수한 벌레들이 꿈틀거립니다 아름답습니다 비로소 나를 거두어갈 소용돌이 덩굴손이 비집고 나와요 순록 뿔이 솟아나요 남은 발 하나도 잘라냈어요 나는 폭삭 무너져내려요
(…)
어쩌면 평생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 같아요 족제비가 물고 가는 나의 검은 머리 아주 짙은 혐오로 물들어버린 이파리들 사이로 선명한 색이 보여요 서서히 나를 찢고 나오는 걸 봐봐요 전혀 다른 물질이 되어요 안개에 가까운 나를 내버려둬요 이제야 아주 명징해져요 폭력에 이유란 건 없어요 거기에 대항할 마지막 임무였어요 내가 청록색 괴물이 되는 일은 말이죠 날 선 감각이 가시처럼 자라나요 손과 발이 뭉뚱그러져 허공에 머물다 흩어져요
- 「청록색 연구」 부분
위의 시에서 화자는 ‘덩굴손’과 ‘순록 뿔’이라는 식물과 동물의 신체가 결합 되어 있으며, ‘족제비로부터 돋아난’ 동물의 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혼종 괴물이다. 화자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인간과 동물, 식물의 만남은 남아있던 인간의 발을 마저 잘라내게 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와해시킨다. 그리고 인간과 식물, 동물들이 섞이는 가운데 첫 시집의 화자에게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졌던 성차의 문제는 잠시 자취를 감춘다. 종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은 성차의 문제를 포괄하는, 다른 무엇보다 더 선행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괴물들은 사회가 규정한 이원론을 벗어나며 진흙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인다.
비인간과 얽힌 화자의 신체는 “전혀 다른 물질”이 되며 구체적인 형태를 잃어간다. 신체를 버리고자 했던 화자의 다짐이(“멀지 않은 시대엔 신체를 버려야 하는 게 맞겠지”-「미래에 없는」)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감각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지만 인간으로 보이는 ‘손과 발’은 뭉개지고 안개에 가까운 상태가 된 화자의 모습은 종과 종의 경계의 무너짐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신체가 없어지고서야 화자의 목적은 더 명징해지고, 화자는 비로소 완전한 ‘청록색 괴물’이 된다. 이렇듯 비인간과 함께 ‘너덜너덜해지고 실체가 사라지는’7) 것은 화자가 경험한 억압과 폭력에 대항하는 일이자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다.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때 반복되던 분노는(“인간에 가까울수록 뜨거운 피로 분노에 자주 빠져든다” - 「미래에 없는」) 비인간과 얽히며 사그러들고(“벽이 되어가는 일은 … 인간을 덜 싫어할 수 있을 것 같아” - 「취미생활」) 낮은 자세로 땅에서 살아가는 다종의 생명들에게 더 많은 시선을 보낼 수 있기에 화자의 내면은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실체가 없어진 화자의 모습은 지구에 펼쳐져 있는 버섯의 포자와 같다. 성층권을 날아다니며 지구 곳곳에 포자를 퍼트리고 발아하는 버섯 앞에서8) 인간이 정해놓은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인류학자 애나 칭은 “버섯은 많고 많은 포자를 생산하고 오직 몇 개만이 발아”하지만 “그 어떤 ‘하나’의 곰팡이 몸체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마주침에서 제외된 채 자급자족해 살지 않”으며 “곰팡이 몸체는 나무, 다른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다른 형태로 바뀐 곰팡이와 역사적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고 강조한다.9) 이를 보면 청록색 요괴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포자를 퍼트릴 수 있다는 데 있다. “버섯을 따자 버섯이 되자 버섯을 먹자”(「표고버섯 키트」)라며 버섯을 건네는 화자의 모습은 닿는 것이 남자든 여자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물이든 기계든 지구에 발붙인 것이라면 누구든 버섯의 숙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다. 독이 든 포자는 경계를 뛰어넘어 포자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리를 잡고 숙주를 만들어내며 동족을 늘려 나갈테니.
3. 순하고 위험한 괴물들의 미래
해러웨이가 “모든 종은, 살아있든 죽었든 관계없이 주체와 대상을 형성하는 만남의 춤을 춘 결과 생기는 존재”10)라고 말한 것처럼 한연희의 시는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정신과 육체, 문명과 원시,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며 모든 종이 실뜨기(string figures)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실뜨기 속에서 순하고 위험한 괴물들은 자신의 친척들을 늘리며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멀리 날아가는 포자를 볼수록 괴물들의 미래를 자꾸 가늠해보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무의 밑동이 되는 거지
두껍고 속을 알 수 없는 표면으로 결단코 서사의 한복판에 서서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듯
거실엔 당산나무로 만들었다는 방망이가 놓여있다
나는 자주 그것으로 허공을 부순다
- 「공무도하」 부분
다행히 최근작 「공무도하」에서 우리는 이 괴물들의 미래를 잠시 엿볼 수 있다. 울고 있는 화자 앞에 나타난 방망이에는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서사가 응축되어 있다. 물에 빠져 죽은 광인을 따라 죽었다는(사실은 따라 죽어야만 했을) 광인의 아내와 하굣길에 범죄의 대상이 된 여성, 연인에게 죽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방망이에 담겨 방망이를 쥔 화자를 ‘고요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이를 보면 괴물의 포자는 사물에게도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다짐의 반복은 화자가 경계를 넘어선 후에도 혼종 괴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하지만(“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살아내기” - 「두고 간 샌들」, “사천왕일지 모를 이상한 형상 앞에서/그래 죽지 말자” - 「한숨 덧붙이기」 , 문장웹진, 2024년 3월)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는 이유는 지금껏 화자와 얽힌 다종다양한 반려종들이 그를 지탱해줄 것을, 비인간과 연결된 화자가 “허공을 부”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이제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가 아닌, “서사의 한복판에 서서” 기기묘묘함을 퍼트리는 괴물에게 우리는 속절없이 끌려갈 것을 예감하게 된다. 씨실과 날실을 거침없이 오가는 괴물들과 오염된 태피스트리에서 각자의 귀형(鬼形)을 드러내며 연결되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울지. 몸에서 돋아난 실을 꺼내 들고 괴물의 손을 잡을 차례다.
- 1) 버지니아 포스트렐, 『패브릭』, 이유림 역, 민음사, 2024, 94-95쪽.
- 2)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역, 마농지, 2021, 13쪽.
- 3) 해러웨이는 경계의 존재들을 괴물(monster)이라 말하는데 이때 괴물은 잘 정의된 카테고리의 사랑스러운 유기체를 낳는 것이 아니라 기묘한 연결들을 낳는다. 도나 해러웨이,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황희선·임옥희 역, 아르테, 2023, 10-14쪽; 최유미,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도서출판b, 2020, 251-252쪽.
- 4) 반려종(companion species)’은 해러웨이의 저서 『반려종 선언』(2003)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반려동물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이는 생물학적 분류군의 범주와 무관하게 여러 종을 횡단하면서 서로 단단히 얽혀 있는 자들을 분류하는 명칭으로 유기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반려종은 서로를 이용해야 하지만 또 그만큼 서로를 돌봐야 하는 세속적인 관계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21쪽; 도나 해러웨이, 『종과 종이 만날 때』, 최유미 역, 갈무리, 2022, 206, 374쪽.
- 5) 필자는 한연희 시에 나타나는 화자를 혼종 괴물로 파악한 바 있다. 졸고, 「발아하는 괴물들의 세계」, 『포지션』 2024년 겨울.
- 6)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142쪽.
- 7)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321쪽.
- 8)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노고운 역, 현실문화, 2023, 404-405쪽.
- 9) 같은 책, 427쪽.
- 10) 『종과 종이 만날 때』,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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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림보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해가 뜨고 지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예외 없이 반복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 의미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 온전한 구원도 영원한 처벌도 아닌 기이한 경계 위에 놓인 끝모를 유예의 삶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텅 빈 약속에 기대어 자기 몫으로 주어진 무한한 침묵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견디며 서서히 소진되어 갈 뿐이다. 림보가 때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원형이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구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한없이 갈망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으면서도 간절히 희구하는 인간의 오래된 마음과 그 기이한 관성을 림보의 심연으로부터 불현듯 마주치게 되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흐르지 않는 시간의 더미 속을 오늘도 무심히 통과해 간다. 림보 안에 갇혀 있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망각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금까지의 생과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무한한 반복뿐인 오늘의 심부에 거칠게 쑤셔 넣는다. 어떤 부정도 외면도 더는 되풀이할 수 없을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생의 열기를 창백히 소진시켜 하루치의 안도와 평화를 가까스로 얻어낸다. 그렇게 림보의 일부가 되어 간다. 급류에 휩쓸리듯 림보의 심연에 깊이 좌초된 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허방 속을 무한히 배회하며 림보의 중력에 천천히 소화되어 간다. 이번 최호빈의 시편들은 이 림보의 심연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매혹과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화자들은 공허한 반복뿐인 림보의 시간을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살아냄으로써 정보와 명령의 과잉으로 점철된 현실의 앙상한 구조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오래도록 잊어온 살아 있다는 일의 경이와 그 선득한 실재를 회복해내고 있었다. 의미의 부재를 좇으면서도 섣불리 상상적 매개에 의지하지 않는 신중한 견고함으로 림보가 뿜어내는 육중한 중력을 존재의 내부로부터 캄캄히 씹어 삼키고 있었다. 림보의 심연 속을 항해하는 그 투명하고도 예리한 시적 섭생의 한 방식을 따라가 본다. 2. 림보의 출입구를 발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그토록 선명했던 목표도 출발점도 림보의 중력과 그 자장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것이 한없이 모호하고 흐릿해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림보는 단순히 삶만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온 일체의 가치나 의미까지도, 이에 기대어 뿌리내려온 존재의 모든 시간까지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린다. 림보에 갇힌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동력은 관성이며, 이는 삶의 고유성과 의미를 모두 말끔하게 지워버린 현재라는 강력한 동일성의 중심을 향해 어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아간다. 최호빈의 시는 그 맹목의 관성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투명하게 응시하되 어떤 확신도 포기도 신중히 경계하는 이중의 절제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성찰적 시가 도달하기 쉬운 환원론적 경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 낸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체온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혈압을 잰다 폐활량도, 골밀도도, 시력도, 심전도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맥박을 세고, 혈당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기록한다 오늘이 낮이 긴 날인지 밤이 긴 날인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있다 (중략) 체인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차르르, 차르르 하루가 하루를 굴리고 있다 ―「루틴 버그」 부분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맹목적 “루틴”뿐인 삶의 허망함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사유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이 림보의 중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근대적 자각의 형식을 빌린 손쉬운 착각 속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오직 동일한 운동의 “반동”과 그 강도에 기대어 “하루가/하루를 굴리”는 지리멸렬한 삶의 풍경은 명백한 부정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는 우리 삶의 조건이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며 그 삶이 놓여 있는 지배적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계몽적 맥락에서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림보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그 맹목뿐인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호빈의 시는 림보에 갇힌 생의 구체적 세부를 하나하나 주시하고 “기록”해 둠으로써, 그 텅 빈 강박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존재의 깊은 불안과 고독을 읽어낸다. “맥박”, “혈당”, “혈압” 등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수치화한 표백된 추상의 개념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살아가는 뒤틀린 허기뿐인 삶의 중심엔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없는 곳에서/점멸하는 가로등같이 애써 살아가는 오늘이/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나 우리,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닌데, 다음의 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선생님, 저희는 팔을 흔들며 달릴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궁금한걸요 (중략) 마지막 곡선코스를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 친구는 쓰러져 있었고, 한 친구는 울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고, 한 친구는 마치 신호를 듣지 못한 듯 출발선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손에 있었던 것은 건네주고 건네받는 릴레이 바통이 아니라 녹초가 될 때까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0의 릴레이」 부분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경주마의 은유는 이미 우리 생의 보편적 형식이 되었고,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이를 내면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당위적 상식과 표준 내지 윤리적 규율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녹초가 될 때까지” 결코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대의 “릴레이”란 사실 “릴레이”의 형식을 빌린 단독 경주에 불과하다. 우리가 참고 견뎌온 공동체의 경주가 실은 어떤 것도 서로에게 “건네주”거나 “건네받”지 못하는 “0의 릴레이”였다는 깨달음은 날카롭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물론 최호빈의 문장은 그와 같은 체념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비록 영원한 “0의 릴레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릴레이 바통”을 단 한 번도 서로에게 건넨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트랙을 도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이 공통의 운명에 처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였음을 아프게 지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번도 온전히 발설된 적 없는 “우리”가 림보 바깥의 시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면, 다음 절의 시편들은 이를 존재에 대한 질문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전환해내는 시적 사유의 깊이와 그 견고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3. 앞서 다룬 시편들이 림보에 갇힌 삶의 구체적 세부와 그 표면에 비교적 밀착해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다음의 시편들은 성찰적 거리의 매개를 통해 림보의 바깥을 좀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사유한다. 이에 따라 시의 무대 역시 성격이 조금 달라지는데 이들 시편들에서 림보는 맹목의 관성과 공전(空轉)의 열기로 위태롭게 굴러가는 타성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매혹적인 탈경계적 공간으로 변모된다. 그럼에도 이를 림보의 차원에서 일컫는 까닭은, 이 마력의 공간이 언제나 경계와 경계 사이에 놓인 항구적 임시의 공간이며 오직 경계를 넘기 위한 갈망의 깊이만이 그 내부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최호빈의 다음과 같은 시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림보의 중심에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 림보 너머를 사유하고 매개하려는 존재 탐구의 의지를 드러낸다.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겠지. 별생각 없는 이마를 쓰다듬고 사라진 건 누굴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겹쳐 쥔 채, 조금씩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하는 너의 시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가 거기서 깨어난 적이 있다. 오늘도, 내일도. 네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오랜 꿈을 다시 꾸듯 네게 짖고 싶어. 그게 내 운명이라면, 컹컹. ―「데자뷰」 부분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또 건너왔다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돌 하나 정말 내 꿈에 누가 또 있는 걸까 세 번째 돌을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건너오다가 가라앉은 걸까 아니면 그냥 가져간 걸까 그냥 돌아간 걸까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물수제비」 부분 세계는 “미심쩍은 그림자들”로 대표되는 무의미한 일들의 무한한 반복과 단 하나 강렬한 사건적 의미의 출현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적대적 요소들의 대립으로 삶과 세계를 거칠게 이분화하여 환원시키려는 폭력적 의지와는 별 관련이 없는데, 의미의 부재와 결여는 상실된 존재의 시원을 회복하기 위한 인식의 토대이자 판단의 근거일 뿐, 무구한 세계에 죄를 물으려는 핏빛 단죄나 원한의 투사가 아닌 까닭이다. 그의 화자들은 “너”가 “날 선택했”다는 명료한 판단과 전제 위에서,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타자의 방문과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위에서 ‘너머’의 감각과 그 물성을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만, 이 간절한 열망은 언제나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라는 질문의 형식으로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라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기다림의 언어로만 발화되고 매개된다. 최호빈의 시에서 의미는 그렇게 찾아온다. 림보 바깥으로부터 건너온 환대와 초대의 몸짓들은 오로지 그 너머와의 맹약에 사로잡힌 화자의 절대적 갈망과 의지로 인해, 기다림에의 헌신과 그 오랜 견딤의 밀도로 인해 비로소 고유한 얼굴과 목소리를, 체온과 무게를 갖게 된다.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라는 시적 전언은 그러므로 또 하나의 절대적 기다림에 대한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 ‘나’를 투신하여 나를 지우려는 것도, ‘나’의 두터운 중력으로 꿈의 물성을 구부려 억지로 집어삼키려는 것도 아닌 이 투명한 기다림의 자세가 최호빈 시의 고유한 호흡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기다림이 있는 한, ‘너머’는 어디에서나 출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곳도 ‘림보’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다음의 시에서 림보는 세계를 집어삼키는 적대적 미로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 바깥을 상상하고 잉태하는 무수한 ‘너머’들의 자궁이자 그 기미들로 흘러넘치는 경계들의 성소로 현현된다. 조문하러 가는 장례식장은 얼마 전에도 갔던 곳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갔던 곳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아, 맥도날드 모든 불행은 멀리 있다는 듯 웃고 있는 맥 도 날 드 불 고 기 버 거 한참 뒤에 나타난 경찰이 정리를 해봐도 한번 막힌 도로는 쉽게 뚫리지 않고 눈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호루라기 소리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아, 글자 하나하나가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것처럼 묵묵히 솟아오르는 M c d o n a l d ’ s ―「이방인-맥도날드 불고기버거」 부분 “맥도날드”는 평소엔 아무런 문제도 의문도 일으키지 않는, 편리하고 무감한 숱한 일상의 장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퇴근길 막힌 도로처럼 꼼짝없이 림보에 갇히고 만 삶의 실재를 차분히 응시하려는 화자의 시선에 인해 일순간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처럼 분리되어 “묵묵히 솟아오”른다. 일상의 허기(“시장기에서 오는 쓸쓸함”)와 존재의 허기(“쓸쓸함에서 오는 시장기”)가 엇갈리며 뒤엉키는 이 기이한 경계적 시간 속에서 화자는 “맥도날드”라는 일상의 공간이 불현듯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무수한 “통로”들로 변신하는 시적 도약의 비일상적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맥도날드” 자체는 물론 어떤 숭고한 의미도 약속도 제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이하게 뒤틀린 경계적 공간들은 림보 너머의 삶과 그 선연한 물성들을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받아들이고 예감하게 한다. 이 너머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과 존재론적 갈망이 최호빈 시의 화자들이 ‘림보’의 심연을 헤매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것이 “너”라는 인칭으로 호명되든 “돌”이라는 존재론적 사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든, 불길하고 불가해한 실재에의 매개나 교차로로 묘사되든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최호빈의 화자들은 이 ‘너머’에 대한 사유와 갈망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실재들을 림보 속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림보’는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조건이자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 혹은 이미지이기에 앞서, ‘너머’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그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림보와 맺고 있는 곤경의 특수성을 얼마쯤 정확히 짚어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림보 안에서 태어나 ‘너머’를 꿈꾸고 갈망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림보는 우리를 가두지만, 동시에 그 가둠을 통해 깨어나게 한다. 깨어남을 갈망하게 한다. 림보는 우리의 적이면서 자궁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림보의 바깥은 림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림보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만 림보의 바깥으로 향할 수 있다. 최호빈의 시는 이 ‘림보’의 생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림보 안에서가 아닌 림보 속으로 쓰여진 기나긴 울음의 내력들을 그의 문장들로부터 뜨겁게 읽는다.
1. 파수의 다시 쓰기 (서윤후,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2025, 04) 경계하여 지킨다는 뜻의 파수(把守)의 한자어를 달리하여 派收로 써볼까? 여러 번 중의 어느 한 번을 뜻하는 파수(派收)를 다시 破水로 쓰면 파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물 혹은 분만 전에 쏟아지듯 터지는 양수를 일컫는 힘찬 말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유리가미」)라고 운을 뗀 시집을 펼치며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지 않으려고”“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는 문장을 만난다. <시인의 말>에 기대어 이 시집이 악몽의 받아쓰기, 오래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켜온 자의 고단함을 옮겨놓은 파수(把守)의 고백임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그러나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 수 있을까? 이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어떤 금기를 어기는 심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돌아보았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야 조금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떻게 변해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 시집의 관건 중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꾸만 ‘나’를 유기하고 가버린다.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앞에서 종종 나만이 오도카니 남겨졌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린 때도, 선생의 질문에 더 좋은 답을 궁구하느라 우물거리며 대체로 수용될만한 밋밋한 답을 제출한 때도, 누군가의 결정에 맞서 당차게 의견을 설파하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만 있던 때도 시간은 나만 놓고 표표히 흘러가곤 하지 않았나. 그럴 때면 어떻게 했던가? 돌아와 누운 밤에 후회와 함께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꼼꼼하게도 새겨넣지 않았나. 여기서 서윤후는 “나를 눌러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시인에게는 곧 ‘다시 쓴다’는 말이다. 제때 행하지 못한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라서 그는 시간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다만 그 시간은 망쳐버린 이야기의 시간이기에 주요 인물일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다린다. 이미 내가 종료해버린 이야기의 장면에는 그러나 나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도리 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리하여 장면 안의 이들이 행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세계는 온통 구겨지고 주름진 것들이다. 전단지 속 예수를 접었을 때 가방 속에서 툭 펼쳐지는 전단지의 주름은 전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전능도 나를 데리고 갈 순 없어서 그저 이 망가진 이야기가 끝이 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더 나빠지길 기다린다. 시간과의 결별이라는 결심은 한편 시인의 권능이기도 해서 여러 번 중 한 번을 겪을 기회, 다시는 가능해진다. 다시 쓰기라는 파수(派收)의 쓰기이다. 그러나 부적응의 시간은 상처로 오롯해서 왠지 씁쓸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망가진 것들은 저들끼리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세계의 주름일까. 주름만이 시가 될 것을 아는 자는 그렇게 “나빠지길 기다린다”. 창밖엔 멀쩡한 걸음으로 들고 온 목발을 다시 어디선가 절뚝이며 나타난 이에게 건네고 지폐를 주고받은 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또박또박 걸어가는 장면 균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구나 세상의 부목은 여기저기 출렁이면서 부러진 일순간을 잡아주면서 -「나빠지길 기다린다」 부분 다시 말해 세계의 균형이란 좋은 것만 있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한 시간마다 스프링클러가 열”린 후 나오는 햇빛은 외려 식물을 죽게 만들 수 있듯이(「독화살개구리」), “호주머니 속에”“젖은 돌멩이”를 가진 사람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임을, 그 고독한 세계로의 재입장(入場)의 입장(立場)이 매우 난처함을 헤아림이 필요하듯이(「고독지옥」), “살려주는”일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듯이(「견본 생활」)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절반씩 유효하다. 또 하나의 관건은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랑이다. 그건 타고난 체질인 양하다. 이를테면 「물길 빈티지」와 「유리가미」는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인과관계를 이룬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 관리를 맡기고 흘러갔다”. “이미” 물도 다 “말라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아……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음을. “서로 헤어진 적 없는 물의 우정”은 나를 배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은 이를테면 쓸모에 대한 발견이면서도 소망하던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하다(「물길 빈티지」).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다.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기억의 뒤뜰”이다. 이 뜰에서 숱하게 끊어진 연을 떠나보냈을 것이나 기어이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고 싶어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사람들을 모으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연줄을 죄 끊어버릴 참인 게다. 그리고 알게 되는 건 이 억지스러운 연(緣) 놀이가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인연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유리가미」).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사랑의 천재」)다는 고백은 그 말의 주인 역시 사랑의 천재라는 말로 들린다. 정말이지 사랑이 체질. 그런 그가 사랑을 부조하는 방식은 마지막 시편, 「비로소 함께할 것」의 목록으로 더욱 선명히 융기한다.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 부르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쓴 이 참여의 목록은,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대상들이 아름답게 박제된 완결의 이야기 쪽이 아닌 미완과 실패의 조금은 남루한 조각들 쪽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둡기만 하던 흑백의 시퀀스는 이제는 보내야하는 어떤 끈질긴 마음의 한 장면을 아스라하게 닫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자 그 시간을 닫는 이별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끝내 홀로 꾸던 악몽의 시간 속에서 다음의 이야기는 마냥 나쁘게만 쓰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그런 시간,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이 결코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님을 이 악몽의 파수꾼은 지키고 쓰고 지우고 쓴다. 그럴 때 그 시간과의 결별 후 찾아올 새로운 시간은 무언가 한꺼번에 물꼬를 틀 파수(破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밝은 쪽에 있다고 믿는 나의 눈부심은 실은 항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스레 어둠 쪽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과 함께 다음의 시간은 올 것만 같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경적을 울리며 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부분 2. 유동하는 물질들의 시론 (서동욱, 『유물론』, 민음사, 2025, 03) 서윤후의 시가 그런 시간과 기억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숱하게 썼다 지우는 이야기라면 그 미덕은 극복에만 있지 않다. 미덕이라면 저 반복적인 쓰고 지우기 쪽에 더 있달 수 있는데, 서동욱의 「시론」에 기댈 때 그건 “낯선 것과의 조우”를 요청하는 “무의미”, 쓰는 자가 유의미로 포착한 그 무의미 속에서 생소한 무엇을 만나기 위한 “응답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는 시를 잉태하는 인간의 말, 실용성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쉽사리 “소통을 져버”리는 “고립”의 언어다. 이런 서동욱의 시론은 어쩌면 이 시집이 횡단하고 건너뛰며 출렁이는 물질성의 다양함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서동욱의 자서는 이러하다. “아스팔트 창밖으로 쓰레기장이 파랗게 빛난다 벼락을 맞아 충전된 건전지들이 폐건전지 통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친다 벼락이 밤새 한 인간을 찾는다”. 자서 속 인간은 벼락을 받을지도 모르는 물질의 한 유(類)로 존재한다. 벼락의 내려침에 인간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함은 저 쓰레기장의 폐건전지와 인간을 나란히 놓게 한다. 한편 인간이 폐기한 건전지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인 듯 쓰레기장에 놓여 벼락의 힘으로 충전됨으로써 재생의 물질로 전환되어 인간을 역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확장되는 행위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은 의도나 욕망과 같은 지향을 지닌 존재를 ‘두꺼운 행위자’로, 지향이 없는 것을 ‘얇은 행위자’로 나누기도 하지만(대니얼 C. 데닛, 『마음의 진화:대니엘 데닛이 들려주는 마음의 비밀』,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6, 49쪽), 시가 되기도 전 저 날것의 언어에서 이미 벼락은 어쩐지 의도를 품은 듯 “한 인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좀 더 인간의 권위를 내려놓고 싶은 내 과도한 마음일까, 저 구획과 분류의 틀에서 인간의 자리를 좀 더 지울 수 있다면 하는 심정. 시인과 함께 걷는 “동네에는 내가 하나” 있으면 “길이 하나” 있고, “공실이 된 상점”도 “하나가” 있다. “공실이 편의점이었을 때” 그는 “매일 술을” 샀는데, “점주 여인은 교회 나가자고” 권한다. 길과 상점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 길과 상점은 나의 산책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그리고 상점 안의 술이라는 물질은 나와 여인 사이에 신앙을 삽입하여 일종의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끔 추동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주 여인을 떠올리는 건””생뚱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이를 포함한 것이 저 산책길의 풍경이기 때문에 유독 그이만 빼는 게 더 어색하다. 이제 “전단지 나눠 주는 알바가” “나의 도착을 기다리”는 길에서 며칠 뒤엔 전단지와 알바를 떠올릴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동네의 본질”. 산책의 본질이 아닐까.(「산책」) 그런가 하면 여덟 편에 이르는 ‘생일과 명절에 관한 연애시’ 연작은 ‘날’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자정이 오자 생일 같은 명절이 되었고 생일들은 답안에 도달한 수학자의 숫자들처럼 서로 꼭 들어맞으며 연애의 첫 기쁨을 잔잔한 나날로 만들었고 생일이 된 명절은 아기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늙은 인간을 새 이야기로 놀라게 하리 -「한 해의 마지막 저녁」 부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해는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니 생일인 셈이기도 하다. 1월 1일은 데칼코마니 배열이고 ‘오늘부터 1일’은 설렘이 폭주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날’들은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걸까, 우리가 수없이 매달았던 날들의 의미를 되뇌어보자. 그때 인간의 행위는 그 감정까지도 꽤 수동의 모양이기도 하다. “철학도 정치도 자비심도” 호르몬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호르몬」). 우리는 파손된 기계 속았다고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넌 내게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중략) 우리는 파손된 기계 치킨과 소주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아주 살짝 그러나 엄연히 눈물이었지 -「사랑」 부분 그러고 보면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추억을 간직할 지성도 없”는 “순수 존재”인 그것은 기실 “그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영혼이 아니다”(「유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사랑했으므로(아직 사랑하므로) 거짓말조차 네가 내게 준 전부라고 믿는 이 무지성적 현상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인간은 “파손된 기계”일 따름이다. 사랑도 그러할진대 “시 쓰기는 욕망이 창끝에 매단 토템 같은 것”(「시론」)이라면, 이 시집은 온통 출렁대는 물질의 유동성, 그러한 유물론(流物論)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식용’ 식물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차현준, 『온몸일으키기』, 2025, 04) 물질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 표제작인 「온몸일으키기」는 보도블록의 이야기지만, 이 블록은 사고하고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결코 ‘얇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록은 다만 하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없”을 뿐이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기에 스스로 “망각”을 택하기도 하는 블록은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실패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와 손은 잡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블록은 “태풍이나 지진”을 틈타 “흔들리”거나 “전력 질주”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안간힘을 통해 블록은 벌떡 일어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꿈꾼다. 가능성, 차현준의 시는 공간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연다. 그 방법의 한쪽 손아귀는 육체이고 다른 한쪽은 미끄러짐이다. 그는 아무 데서고 미끄러져 여기와 저기를 불쑥 열어젖힌다. 그러한 공간은 “니트릴 장갑에 물을 채운 다음 비워내”기 위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접속 가능해지는 식이다. 장갑 하나 뒤집었을 뿐인데 “난생처음 보는 들판에 엎어”질 수 있다(「적재접속」). 만약 당신이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그런 다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당귀 방」). 아무런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앨리스가 그리하던 것처럼 쑥 미끄러지고 착 당도한다. 그럴 때 육체란 하등 방해의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되레 육체는 그 통로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럼 거기 가서 무얼하느냐? “들판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여기서 몇십 년 지낸 뒤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니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한마디로 시적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적재접속」). 그는 온통 푸릇한 것을 기르고자 한다. 당귀를 비롯해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방울토마토 등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기르는 푸른 것들은 온통 먹을 수 있는 것들,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채소류이다.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고창의 청보리밭을 꿈꾸게 하는 것처럼(「청보리밭」), 그가 보는 것들의 목록은 몇몇 나무 이름을 제외하고는 먹거리로 무성하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그건 새삼스레 식물을 키우며 그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필수적이다(서동욱의 「병원 밥」에서 병원이 죽음이 아닌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밥’으로 이야기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이 지속되는 물질의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식물성에 접속하기 위해 육체를 경유하는 것을 차현준이 공간을 창조하는 독자성이라 말한다면, 차현준의 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접맥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을 먹는 행위는 식물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다(이 구분이 인간 중심적일 수는 있겠다, 다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물컹해진 치커리”는 “퀴퀴한 냄새”로 변환되고 “뭉쳐지고 물컹해진 당귀들”은 “진물”을 내놓는다「당귀 방」). 식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먹는 행위는 인간을 배설하게 하는데 이 식물성의 배설은 “유기물이 풍부하다”(「밟아보기」). 유기물은 미래의 식물성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태 순환 고리 안에 인간의 자리, 역할을 마련해준다. 이런 배치는 인간의 행위와 임무를 결코 인간중심으로 놓지 않으면서 그 연결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게끔 만든다. 이런 식용의 식물성은 인도어팜이나 주말농장 등 어디 먼 농촌의 들녘이 아닌 “7호선 상도역”(「인도어팜 방문기」)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식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도시의 식물성은 어쩌면 ‘농촌상’ 보다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창조주이기라도 한 양 빛과 산소,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것은 자주 망하고 물크러지는가 하면 엄청난 자생력으로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신드롬」 같은 현상 말이다. 방마다 방울토마토가 들끓었다. 방울이라는 말이 없어 말이 되는 토마토가 무르익어 있었다. 굳이 자신을 방울토마토라고 우기 길래 그래, 그래. 상자에 들어가 있어. 나는 방마다 방울진 방울토마토들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중략) 이렇게 다 담아도 방마다 한 번씩 더 돌아다녀줘야 한다. 과즙이 묻은 초록 계열의 잎들을 떼어내기로 했다. 쌈 싸 먹을 수도 없게 구린내가 나니까. (중략) 이 방울토마토들은 대체 왜? 어떻게? 방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내가 왜 방울토마토를 채집하고 다녀야 하는지 난감했다. 방에 있는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밭. 거기서 또 생겨나지. 기어이 생겨나니. 아주 기꺼이 생겨나지. 화가 났다. 방울토마토는 농락하듯이 더 커져만 갔다. (중략)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는다. -「방울토마토 신드롬」 부분 먹는 행위로 식물과 도시의 인간은 연결된다. 인간은 식물을 먹기 위해 키우고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계의 일원이 된다. 키우는 것과 자라나는 것, 만드는 인간과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결국 한 몸이다. 그건 방울토마토의 초과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는 확실히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은 식물이 가진 생동성, 그 생장과 번식 심지어 짓무르는 죽음으로 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은 식물의 포식자이지만 홀로 행위자이지만은 않아서 키우고, 먹고, 배설하지만, 자라거나 짓무르고 확장하고 팽창하는 힘은 식물 쪽이 더 세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싱그럽지만 매서운 사실을 껴안고 있는 셈이다. 이 식물성이 없을 때 인간의 배설은 오염이다. 인간은 잘 먹고 좋은 배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돌보아야 하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든지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시집은 변화하는 생태와 인간의 연결을 전혀 새로운 감각, 그 독자성으로 써나간다, 확장해간다. 사물과 인간사가 타자, 난입자에 의해 계속 바뀌어 간다는 서동욱의 「시론」은 함께 읽은 시들을 관통하는 시간과 물질, 인간의 사유에 대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바꿔 쓰기가 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시에는 애초 중심과 경계를 나누고 의미와 그 속에 머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계라는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세계의 바깥 역시 없다는 통찰은 지금 우리의 시가 읽어내는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음을, 바뀐 그것 역시 누군가의, 무엇의 영구적인 자리가 아님을 적시하며 그간의 위계와 같은 폭력을 지워나가는 ‘시’라는 언어를 보다 부드럽게 연마하는 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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