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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청색종이 | 2024년 여름호(제12호)

절멸의 너머로 증여되는 미래 ― 백무산, 고선경, 성귀옥, 김보나의 시

이은란 문학평론

2022년 오늘의문예비평 겨울호에 「‘감응의 페티시즘(fetishism)’을 위한 제언」을 실으며 비평 활동 시작. 오늘의문예비평 및 리토피아 편집위원. 광운대 및 세명대 강사로 재직 중.

  생태위기와 전쟁, 청년들의 죽음으로 가시화된 근대 자본주의의 한계 상황은 미래에 대한 상상을 중단시키는 무기력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멸망, 절멸, 종말과 같은 키워드들과 환생물, 회귀물들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범람하는 현상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미래’라는 시어는 피로, 불안, 권태, 허무와 주로 결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윤의섭의 시 「곡예」의 “운행의 멈춤과 부질없음이 영원히 공존하는 길을 감상에 젖은 채/유령 같은 기차가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 채/나는 한없이 걸었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곡예」, 『릿터』 2024년 4월호)라는 대목을 보자. 기차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 시간의 위를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근대성의 산물이다. 반면 ‘유령 같은 기차’는 미래의 불투명성과 인간의 축소된 존재성을 환기하는 두려운 망령이다. 현재는 우리의 죽음을 유예한 시간이며 삶이란 그것의 ‘부질없음’을 한없이 더듬고 있을 뿐이라는 윤의섭의 허무는 근대를 견인해온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회의와도 연관된다. “지구 최초의 풍경은 인간이 아니지만 지구 최후의 풍경은 인간이 될 것이다.”(양안다, 「다음 미래」, 『자음과 모음』 2024년 봄호), “오늘도 하천에는 오늘 모양의 종이배가 뜬다/누가 그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드넓은 우주에서 아무런 영향 없는 존재들이 벌이는 짓이란/으레 그런 것”(민구, 「뒤로 걷기」, 『문학동네』 2024년 봄호) 등의 대목들이 그렇다. 이러한 탓일까. 계간지의 봄호에 실린 작품들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시간이나 미래를 다룬 시들이 눈길을 끌었다. 먼저 백무산의 시 「괘종시계」를 살펴보자.


키 큰 괘종시계 하나 길게 추를 빼물고
낡은 사무실 벽에 얼룩처럼 걸려 있다

이곳에서 다방을 열었던 옛 주인이 두고 간 거라는데
이제 그 누구도 쳐다볼 일 없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완행버스 시간표처럼
곰팡이 얼룩진 벽을 한사코 붙들고 있다

석탄 난로와 함께 뜨거웠을 저 시계
금성라디오나 진공관 전축과 함께 돌았을 시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한때는
미인의 얼굴처럼 숨 멎는 시선을 끌었던 때가 있었다
다방은 읍내에서 처음 네온사인을 밝혔을 것이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누구나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달이 차고 기울고 꽃이 피고 지는 걸 보고
닭이 울고 해가 걸리던 쪽을 보고 때를 가늠하던 사람들
시계는 사람들을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갔다
시계는 더 많은 것들을 찾아오게 했다

시계는 먼데 약속을 불러왔다
버스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도
어디선가 가슴 뛰는 소식을 기다릴 때도
언제나 그 얼굴의 표정부터 살폈다

기차만 시간에 맞춰 오가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 것들은 점차 자신의 시간을 이름표처럼 달고 왔다
새를 기다리듯 비를 기다리듯 기다리지 않았다
얼음이 녹고 꽃이 필 때를 기다리던 사람들

새로운 약속을 찾아 사람들은 떠났다
이 낡은 시계 아래에서 더 이상 약속을 잡지 않았다
잠긴 문 어둠 속에서 시계는 혼자 있었다
거리는 낡은 채 저물어가고 대낮인데도 인기척도 드물다
번성하던 읍내 거리 불빛들도 꺼져갔다
골목엔 아이들 떠드는 소리 들리지 않고
시계는 어둠에 담겨 식어갔다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한 채

― 백무산, 「괘종시계」 전문(『푸른사상』 2024년 봄호)



  백무산의 시에서 ‘괘종시계’는 ‘완행버스’, ‘석탄 난로’, ‘금성라디오’, ‘진공관 전축’, ‘네온사인’, ‘기차’ 등 이제는 철이 지난 근대적 사물과 등가에 놓인다. 과거 ‘미인의 얼굴’처럼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을 기계로부터 시인은 문명의 역사를 읽는다. “달이 차고 기울고 꽃이 피고 지는 걸 보고/닭이 울고 해가 지는 걸 보고 때를 가늠하던 사람들”, “얼음이 녹고 꽃이 필 때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같은 구절이 의미하듯이 근대 이전의 시간관은 자연의 순환과 밀착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시계와 문명』(미지북스, 2013)의 저자인 카를로 치폴라(Carlo M. Cipolla)에 따르면 시계의 발달은 근대의 교역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시계는 사람들을 먼 곳으로 데리고 갔다/시계는 더 많은 것들을 찾아오게 했다”는 대목에 암시된 것처럼, 근대화된 유럽인들은 이른바 비문명화된 세계로부터 차, 향신료, 면직물을 들여오면서 값비싼 시계를 팔아 이윤을 챙겼던 것이다. 문명의 논리를 통해 전파된 시계는 사람들의 노동과 일상을 계량화하며 교묘하게 통제하는 물신이 되었다. “시계는 먼데 약속을 불러왔다/버스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릴 때도/어디선가 가슴 뛰는 소식을 기다릴 때도/언제나 그 얼굴의 표정부터 살폈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연인을 기다리는 사랑의 순간까지 시계의 구속을 받는다.

  하지만 낡은 사무실의 한쪽에서 “어둠에 담겨 식어”가는 중인 ‘괘종시계’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와 변별되는 사물이기도 하다. 또한 ‘시계’는 이 시의 장소적 배경과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 한때 번성했던 이곳은 과거 경제성장기에 공장이나 조선소와 같은 산업시설이 들어섰던 장소인 듯하다. 사람들은 “새로운 약속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고 읍내 거리는 몰락해간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이곳은 미래의 희망이 상실되어 버린 장소다.

  흥미롭게도 시인은 이 작품에서 ‘시계’를 끊임없이 의인화한다. 마치 기차처럼 질주하는 탓에 “도무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던(「시계」,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백무산의 ‘시계’가 얼굴과 표정을 가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추를 빼물고”, “곰팡이 얼룩진 벽을 한사코 붙”들며 묵묵히 낡아가는 ‘괘종시계’는 어딘지 모를 쓸쓸함을 환기한다. 이 시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으로부터 추측해본다면, 시인의 변화는 미래를 전망할 수 없는 근대적 시간의 종말과 더불어 그동안 인간을 옭아매어 왔던 ‘시계’와 치열하게 투쟁해온 그의 허무와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한 채” 구석에서 죽어가는 ‘시계’, 소멸만이 남은 텅 빈 ‘읍내’,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화자의 고독한 모습은 서로 닮아 있다.


  멸종 위기 동물을 전시하는 사진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며 나는 웃었다. 맞다. 사람들은 이제 기념 사진이라고 말하지 않고 인증샷이라고 말하지.

  아름다운 것들이 연구되거나 파괴되는 이유는 아름다워서래.
네가 말하고

우리는 불길해하지 않는다.

그저 여기에 있음을 인증
잘 지내고 있음을 인증

기계적으로 웃는 사람에게 영혼이 없어 보인다고 하잖아.
그거 농담 아니었나?

북극여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경올빼미의 눈동자가 진해졌다.
울보카푸친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리의 뒤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울보카푸친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거참, 손이 사람 손 같네.

  사진전을 나와 너와 함께 숲을 걸었다. 비탈이 점점 가팔라졌다. 그런데 멸종 위기 동물은 왜
  위기가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지역에 서식하는 걸까? 툰드라, 사막, 초원 지대…… 중턱에 올랐을 때는 잠시 경치를 내려다 봤다.

인간이 기계화되고 있다는 말이 진실일 리 없다.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 대도시 한가운데였고

  슬퍼 보이지? 너는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을 한 장씩 넘기며 사진 속 동물의 표정을 해석했다. 우리의 오른편에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바닥에 은행이 많았다.

나의 웃음은 무해합니다.
이 말에는 설득이 필요치 않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아늑하다.

노랗게 쌓인 은행잎들
흐리게 보면 무수한 포스트잇처럼 보였다.
뒷면에 기억해야 할 목록이 적혀 있을 것 같았다.

― 고선경, 「아직 남은 은행나무」 전문(『시와사상』 2024년 봄호)


  고선경의 시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은 ‘사진’을 통해 전시되고 소비된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길함조차 느끼지 못하고 SNS에 “잘 지내고 있음을 인증/그저 여기에 있음을 인증”하기 위해 물화된 동물들 앞에서 기계적으로 웃으며 ‘인증샷’을 찍는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 기계화되고 있다는 말이 진실일 리 없다”라는 확언과 함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죄를 저지르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아늑하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고선경의 화자는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기보다 차라리 그 안에 거주하며 비인간 타자와의 공존을 시도한다. ‘나’가 ‘우리의 불길해하지 않음’과 ‘기계적인 웃음’의 폭력성을 인식하는 순간 물화된 동물―타자들이 살아 움직인다. ‘우리의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비인간 타자의 손이 인간의 손과 닮아 있음을 발견하고, ‘너’는 사진전에서 찍은 ‘인증샷’을 응시하며 그들의 표정 과 몸짓을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해석한다. 화자의 눈에 언뜻 기계화된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비인간 타자들의 ‘사진(인증샷)’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나는 고선경의 시를 읽으며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왜 인간은 끊임없이 타 존재에게 인격을 부여하려 하는 것일까? 인간은 과연 비인간 타자들을 기계적으로 소비하는 냉담한 존재에 불과할까? 혹시 ‘인증샷’이라는 가장 물화된 형태의 기호 안에도, 우리의 미래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시에서 ‘사진(인증샷)’은 전시되고 공유되는 기호를 넘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는다. 이러한 시인의 사유는 ‘포스트잇’이라는 사물에도 깃들어 있다. ‘인증샷’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 이르러 ‘포스트잇’은 정치적, 사회적 재난들을 거치며 기억과 연대의 매개물이 되어 왔다. 이것에 적힌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통일되지 않은 개개인의 다양한 글씨체, ‘노랗게 쌓인 은행잎’과 같은 형광색의 강렬함,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무수한 ‘잎’들의 더미처럼 뭉쳐져 형성되는 연대와 공감의 정동(affect)적 연결망이다. 이 ‘사물―기호’의 모자이크는 거대한 정동을 발휘하는 사물로 변신한다. 이처럼 시인은 ‘인증샷’, ‘은행잎’, ‘포스트잇’이라는 일상적인 사물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절멸의 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사진이 미래에 전달되어야 할 ‘기억의 목록’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직 남은 은행나무’라는 작품의 제목이 환기하듯이, 고선경의 화자는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물화된 세계에서 우리가 상실해버린 ‘인간적인 것’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독해된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성귀옥의 화자는 ‘아버지’로부터 증여받은 이름과 투쟁함으로써 부권에 의해 훼손된 ‘여성―타자’의 미래를 구원하고자 한다.


세상에 있으면서 없고
나이면서 모두이며
신청인이면서 사건본인입니다.

지성녀(池姓女)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성녀야!

누가 부르면 사려 깊고 친절하게 돌아본 적도 있습니다. 호적 관련 서류를 보기 전까지.

증조모 박성녀(朴姓女) 조모 김성녀(金姓女)

나는 ‘지씨 성을 가진 여자’의 현재이자 ‘박씨 성을 가진 여자’와 ‘김씨 성을 가진 여자’의 미래인 셈입니다.

미래가 돌림노래도 아니고……

아버지의 저열하고 무성의한 작명 방식에 치를 떨면서 한편으로는 생활하는 것 빼면 시체인 아버지가 나름 이름을 고심하다가 갑자기, 이 세상 사람의 얼굴로 뒷목 잡으며

하나 더 발생한 입, 무섭게 크는 입…… 아, 남아나는 게 없겠구나!

그랬을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되도록 좋은 쪽으로 생각했습니다.


옛날엔 다 그랬다.
이름 없으면 무시당해요, 아버지. 이름은 얼굴이고 옷이고 힘이에요.
너무 많이 가르쳤구나.
곧 고등학교도 가야 하고, 이름을 가져야……
딸년이 무슨……
개명 안 해주면 집 나가요, 저.
나가라.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호적 더럽히는 꼴 못 본다.


첫 모욕을 뒤집어쓴 후, 이름은 이름을 붙여준 자의 품격이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중략)

공장에 가라!

아버지의 말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주문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 것’이라는, 세상이 구조적으로 용인한 찝찝하고 역겨운 ‘지씨 성을 가진 여자’를 지옥에서 빼내는 마법의 암호. 열려라 참깨! 랄까. 니가 가라, 하와이! 랄까. 그런 거, 말입니다.

자유다!

철야를 끝내고 샛별을 볼 때 코피를 틀어막을 때 남들이 안 하는 걸 하고 있다는 벅찬, 역린의 자부심 같은 게 차올랐습니다.

어이, 공순이!

마침내, 돌아보면 대답이 되는 순간이 왔습니다. 내가 나를 끝장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나는 사려 깊고 친절하게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에게 보여줄 얼굴을 이룬 셈입니다. 집에 오는 길이 쉬웠습니다.

(중략)

나는 나의 현재도 누군가의 미래도 바꾸지 못했다는, 나도 나를 유린했다는, 사실에 직면했습니다.

이름을 가져야겠다!

이제야 행동하는 것은 아버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호적에 먹칠하자는 것도 아니고, 나 이름 있는 여자야! 나도 이름값 하고 싶은 여자인가봐! 이름 믿고 까불자는 것도 아닙니다.

조만간 비석 세우는 사람에게 애도 받는 이름이 ‘지씨 성을 가진 여자’들이 아니라 ‘나’ 하나로 족하도록, 이 땅에서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 ‘나’ 하나로 끝나도록……

본 신청에 이른 것입니다.

― 서귀옥,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일부
(『문학동네』 2024년 봄호)


  존재에게 부여된 이름은 그의 고유함과 특별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중한 것일 테지만, 사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에 의해 증여된 성(姓)과 이름은 부권을 보증하는 강력한 물신적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성귀옥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중년 이상의 여성이이자 공장 노동자다. 화자의 이름 ‘지성녀(池姓女)’는 증조모와 조모의 이름을 돌림노래처럼 물려받은 것이며, 그 의미는 “지씨 성을 가진 여자”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저열하고 무성의한 작명 방식”은 딸의 존재성이 그에게 고작 하나의 ‘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은 그저 ‘아버지의 것’임을 지시하는 텅 빈 기호이기에 화자는 스스로를 “이름이 없는 사람”, 즉 타자 그 자체로 지칭한다. “이름은 얼굴이고 옷이고 힘이에요”라는 구절에 드러나듯이 ‘나’는 이름을 자신의 존재성을 증명하는 소중한 징표로 여기지만, 호적을 확인한 화자는 자신의 존재성이 ‘아버지’에 의해 말소되었음을 느낀다. 화자는 ‘개명’을 요구하며 ‘아버지’에게 항의하지만 이는 가장의 권력을 모욕하는 행위로만 여겨질 뿐이다.

  개명에 실패한 ‘지성녀’는 자신의 이름을 ‘공순이’로 대체함으로써 저항하기도 한다. 공순이’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비하하는 멸칭이지만, ‘나’는 이를 “역린의 자부심”을 주고 “지옥에서 빼내는 마법의 주문”으로 받아들인다. 화자는 ‘공순이’로 불리는 순간 ‘지성녀’라는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생각에 “자유다!”를 외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이 “나의 현재도 누군가의 미래도 바꾸지 못했다는, 나도 나를 유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화자는 “사회가 구조적으로 용인한 찝찝하고 역겨운” 자신의 텅 빈 이름을 구원하기 위해 개명신청서를 쓴다.

  “이름을 가져야겠다!”는 ‘지성녀’의 결심은 다만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얻으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화자는 유령과도 같은 자신의 존재성이 ‘지씨’, ‘박씨’, ‘김씨’ 성을 가진, 나아가 아버지의 성을 증여받은 모든 여성들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작품의 첫 대목이자 개명신청서의 서두이기도 한 “세상에 있으면서 없고/나이면서 모두이며/신청인이면서 사건본인입니다”라는 부분에서, ‘지성녀’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놓인 ‘나’의 (비)존재성을 ‘모두’의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조만간 비석 세우는 사람에게 애도받는 이름이 ‘지씨 성을 가진 여자’들이 아니라 ‘나’ 하나로 족하도록, 이 땅에서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 ‘나’ 하나로 끝나도록……”에 드러나는 결연함처럼, 화자의 개명 신청은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을 위한 투쟁으로 확장된다. 이는 유령처럼 지워져야 했던 ‘나’의 고통이 더 이상 미래에 지속되지 않기를, 그리고 모든 여성들이 소중한 이름을 ‘선물’받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단밤아
아직 금줄에 뭘 달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네가 헤엄쳐 온다고 들었어

유행하는 이름은 싫어
내가 좋아하는 말은

팔레트
삼월, 사월, 시월
버선코
플라이, 배냇니, 한지

디어 노아, 검은 눈동자가 싫어지거나

하루쯤 주일예배를 빼먹고 싶은 날엔
이름을 준 한국 이모를 탓하도록

(중략)

네가 춤출 땐 크게 박수 쳐 줄게
그게 누군가를 응원하는 이들의 작은 기쁨

킴, 왜 낳았냐는 질문은
가끔씩만 하기

이다음에 한국에 오면
손잡고 씨앗 도서관에 가서
과꽃을 빌려오자

어질 인이나 기쁠 희를 갖지 않아도
도깨비처럼 유독 밤에 활발해져도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누가 소리질러도

화분 하나만 있으면
새순도 꽃봉오리를 올리는 건 금방이라고

“넌 시인이니까 아기 이름 좀 지어줘”

빈손으로 오는 단밤아
너희 엄마 목소리 어점 이렇게 큰지
바다 건너 여기까지 향유고래 떼가 헤엄쳐 오네


― 김보나, 「스위트 나이트」 일부(『백조』 2024년 봄호)


  성귀옥의 화자인 ‘지성녀’가 존재성을 말소시키는 증여의 폭력성과 투쟁함으로써 여성들의 미래를 구원하고자 한다면, 김보나의 화자는 증여가 지닌 소중한 힘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소박하면서도 사려 깊게 읽힌다. 증여란 사물에도 ‘영(靈)’이 있다는 믿음, 마르셀 모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인격과 효험’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 행위다. 가령 무언가를 선물한다는 것은 ‘나’의 일부를 주는 것과도 같다. 증여의 원리 안에서 전달되는 사물이나 이름은 받는 이에게 기억과 답례의 의무를 함께 주며 유대감을 형성해 나간다.

  물론 김보나의 시가 펼치는 증여의 상상력은 반드시 되돌려 주어야 하는 보상의 의무와 무관하다. 이 시에서 포착되는 것은 이름이 “빈손으로 올” 아이(단밤이)의 미래를 포근하게 껴안아주기를 꿈꾸는 화자의 마음이다. 아이에게 증여될 이름에는 ‘한국이모’의 축하와 응원이 미래에 선물처럼 전달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잠재해있다. 이름을 고심하는 화자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나 ‘좋아하는 낱말’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아이를 ‘단밤’, ‘노아’, ‘킴’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보기도 한다. “검은 눈동자가 싫어지거나”,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누가 소리질러도”와 같은 구절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외국에서 태어날 아이의 미래는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국에서 마주해야 할 고독과 질곡 속에서도 아이가 무언가로부터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무언가란 바로 누군가가 소중하게 지어준 이름이 아닐까? “화분 하나만 있으면/새순도 꽃봉오리를 올리는 건 금방이라고”라는 화자의 전언처럼, 이름은 아이를 표상하는 ‘새순’의 집이자 미래의 ‘꽃봉오리’를 틔워내는 양분의 그릇이다.

  백무산, 고선경, 성귀옥, 김보나의 시는 현재 물화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를 각기 다른 상상력으로 펼쳐낸다. 네 편의 시들을 톺아보며, 한편으로 나는 “과연 인간에 대한 낙관적 희망 없이 미래에 대한 상상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부질없음’으로 끝나지 않는 삶은 인간이 변화할 수 있으며, 타자와 연대하고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시는 절멸의 위기 속 미래를 상상하는 원동력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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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훈 세상의 모든 추한 것들에게 바치는 헌사

생각해보면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나’ 아닌 것들이었다. 타오르듯 싱그럽던 나무의 잎사귀 같은 것들이나 그 아래의 무수한 기척 같은 것들, 땡볕 아래 타오르듯 일렁이듯 작은 돌멩이나 창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같은 것들, 혹은 녹아내리는 시간 속에 서 있던 한 사람까지.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은 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손쉽게 사로잡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그물 삼아 ‘나’ 아닌 것들을 손에 넣고자 무던한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어서, 그 숭숭 뚫린 구멍들로 정작 우리가 사로잡으려던 것들은 쏟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궁색한 언어만이 슬픈 흔적으로 남곤 한다. 그러니 ‘시’란 근원적으로 편린들, 혹은 우리가 사로잡고자 했던 바의 부스러기들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손에 넣고자 했던 바로 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잡고자 무던한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던 시간의 허물에 진배없으니 말이다. 영혼 잃은 육체처럼 허물어지듯 남겨진 언어의 잔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사로잡으려한 나머지 그에 미달하는 언어만이 남겨진 슬픈 실패의 기록.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이 언어들을 바라보며 실패의 쓴맛을 들이키며 그것을 증오하듯 사랑하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추함은 단지 ‘醜’한 것이라고만은 말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 추함은 한때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는 실패의 기록일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전동균의 시가 특별한 까닭도 그와 같으리라.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은 모두 망가지고 부서진, 흡사 세계의 부스러기와 같은 모습들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그리하여 시간 속에 유폐되어 있는 듯 보이는 사물들은 제 자리를 영원토록 잃어버린 모습으로 이 시적 세계 곳곳에 허물어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언어로 포획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 허물어지고 유폐된 시간의 기록들. 그렇기에 그의 시는 한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홀로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아로새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을밤의 손바닥에 철철 넘쳐나는 달빛 속의 얼룩들, 몸부림치며 빛이 빠져나간 흔적 같은 내 눈이 빛을 얻고 내 입술이 말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靈)들이 나를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을 생각합니다 지도 밖으로 흘러나간 길들 바다에 가라앉은 화산들 육지를 처음 걸어다닌 물고기 틱타알릭과 그 지느러미 같은 것들 어딘가에 숨어 한 방울 눈물의 온기로 견디며 나를 부르는 이 모든 것을 데리고 온 운명 혹은 우연 - 「슈퍼 문」, 전문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특질은 많은 경우 무수한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시작된다. 툭하니 내버려진 듯 무심히 존재하는 사물들의 모습은 그 쓸쓸함을 원인 삼아 다른 무수한 사물들로 이어지며, 화자의 진술을 통해 고독한 원환성을 완성시킨다. 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정서는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화자의 진술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에 덧붙여진 표현들, 예컨대 “빠져나간”,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 “흘러나간”, “가라앉은”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한 정서를 강화시킨다. 사물과 그에 대한 화자의 진술이 한 데 어울리면서, 5연에 배치된 시어들에 이르러서는 진술의 주체인 화자를 포함한 이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시간이 지나버린, 제 자리를 끝내 잃어버리고 만 존재들임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 모든 사물들과 자신이 하나의 “운명” 혹은 “우연”으로 묶여 있음을,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존재론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 속에 유예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쓸쓸하고 외로운 형상들을 단지 슬픔이라 말하는 것은, 혹은 그 슬픔을 단순히 일차원적인 감각적 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화자를 포함한 그 모든 사물들을 한 데 묶는 요소로서 ‘슬픔’이란 감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써,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의 양태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지막 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견딤’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 외롭고 쓸쓸한 형상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기 위한 자세인 것이라면,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 모든 사물들의 망가지고 부서진 형상이란, 서로 다른 시간을 경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면서, 서로 다른 자기만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그 무수한 기억들을 독립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의 형상, 그것들의 부서지고 망가진 모습들은 한편으로 시가 가진 본질적인 추함과 서로 공명하고 있다. 그 모든 상흔들은 결국 제 스스로 가닿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실패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동균의 시는 그 자체로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메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말해보고 싶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추함, 혹은 망가지고 부서진 자국들, 그 모든 상흔과 유폐된 시간들은 단순한 실패의 산물로써 자기 위로나 혐오를 위해 동원되는 수사적 사물들이 아닌 것이며, 비록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부스러기 같은 모습에 불과할지 몰라도 제각각의 기억 속에서 한 때나마 찬란했던 혹은 찬란하고자 했던 실패의 순간을 보존하고 있는 사물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러한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형제라 호명함으로써 그 무수한 사물들의 모습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쓰며, 찬미의 대상으로 아로새긴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 「빗소리」, 부분. “사랑”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사물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라 호명되는 사물들은 모두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찰나의 사물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같은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사랑하였노라 말한다. 화자가 이러한 사물들을 사랑하였노라 말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려져/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화자가 세상에서 버려져 깊은 슬픔에 빠져있으며, 그 슬픔을 차마 견딜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술들을 하나로 묶는 감정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은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슬픔은 단지 슬픔으로, 실패를 단지 실패로 쓰고 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시인의 언어를 통해 그 잔여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비로소 갖게 되며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후에도 부서지고 기울고 유예되며 미끄러지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은 사물들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하지만 시적 언어를 통해 잠시나마 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사물들의 형상은 이제 견딤의 모습으로, 자신의 찬란했던 기억을 놓지 않고자 분투하는 ‘혼자’들로 거듭난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를 읽으며 전달받는 쓸쓸함과 고독, 슬픔의 정서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며, 늘 전부를 초과하는 감정적 잔여를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약 없고 대가 없는 헌신이 바로 그 쓸쓸함과 고독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1 창문들은 어떻게 저렇게 환한 표정으로 지는 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이 나는 이 물병은 무엇일까 구겨진 휴지 같은 이 그림자는 내가 사라지면 어디로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2 찬미 받으소서, 먼지들은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은 빈 소주병과 노숙의 새까만 발들은 감겨진 눈의 눈물,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은 언제 어디서나 오로지 제 몸 하나로 저의 가난과 추위를 지키는 것들은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 찬미 받으소서 3 밥냄새, 살냄새 좇아왔습니다 저희 피가 이끄는 대로, 저희가 저희를 잊고 깨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는 진흙처럼 목이 쉬었고 어느 하루도 돌을 가슴에 얹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습니다 - 「미제레레」, 전문. 그러한 윤리성은 위의 시 「미제레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무수히 호명되는 저 많은 주어들은 마땅한 자리를 ‘지금 여기’에 갖지 못한 사물들이기에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유예되며 또 다른 부서지고 깨어진 쓸쓸한 것들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화자는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찬미 받으소서”라 말하며, 이 모든 사물들이 행하는 견딤의 시간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헌사는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물들에게 마땅한 몸피를 부여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언어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주체적인 능동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을 향한, 높은 곳에 위치한 성스러운 존재들이 아닌 낮은 곳에 위치한 비천한 사물들을 향한 그의 찬미와 사랑을 통해 그는 비로소 ‘혼자’이되, 자신과 같은 무수한 형제들을 가진 ‘혼자들’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에 있어 ‘견딤’이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간의 부피를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 ‘견딤’이란 돌이킬 수 없는 찰나 이후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가진 고유한 쓸쓸함을, 그 고독의 시간을 감각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슬픔을 견디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비추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언어는 보편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는 태양이나 달, 별과 같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 사물들이 아니라 “먼지들”,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 “빈 소주병”, “노숙의 새까만 발들”, “감겨진 눈의 눈물”과 같이 유폐된 존재들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것들이 화자에게는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일지니. 이와 같은 화자의 특수한 시선은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을 향한 섬세한 감각들이 언어로 피어나는 까닭과도 이어진다. 가령 「천지간」에서 “흙들의 밤이 두리번두리번 몰려왔다” 말하며 자연에 새겨진 고유한 슬픔을 읽어내는 것이나, 「다대포」와 같은 시에서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새겨진 영겁에 가까운 고통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에서 무의미한 존재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기 다른 슬픔과 고통을,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것일 뿐인 고독을 모두 다른 모습으로 시간의 부피를 견뎌내고 있는 위대한 ‘혼자’들이기 때문이다. 시궁창의 구더기다 깨진 유리 조각이다 짓이겨진 담배꽁초다 이것들을 다정한 나의 형제여, 라고 부르는 실성한 입술이다 - 「이 밤은」, 부분. 그렇기에 화자는 심지어 “시궁창의 구더기”와 “깨진 유리 조각”, “짓이겨진 담배꽁초”와 같이 한없이 낮은 존재들을 향해 “이것들을/다정한 나의 형제여”라 호명한다. 상식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없는 자기혐오에 가까운 일일 테지만, 그의 시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호명은 자기혐오를 초과하는 여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혐오도, 자기중심적인 고백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로써,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으로 다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언어란 그 모든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견딤을 향한 헌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삶의 양태란 결코 명확한 상징이나 명제로는 표현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견딤의 형상을 말함으로써만, 그리하여 부서지고 망가진 쓸쓸하고 홀로된 모습을 언어를 통해 비출 때에야, 사람의 양태란 초과 혹은 결여의 형태로써 우회적으로나마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쓸쓸함은 결코 쓸쓸함만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실패들은 단지 실패인 것만이 아닌 것이고, 이러한 사물들의 양태를 언어로 비추는 것은 그 고유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양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뎌나가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함은 고독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본질적으로 홀로된 세계는 무수한 ‘혼자’들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다. 이 모순되고도 상반된 세계의 모습.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비추는 세계의 모습이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생의 긍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흡사 그가 화자의 입을 빌려 “왜 세상 모든 곳은/무덤이며 성전인지”(「해가 지면 다시」)라 질문했던 것처럼. 그 질문 자체가 결국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그의 시는 단단하지 않고 때때로 깨어지고 흩어지며 중얼거리듯 간신히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도착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다시금 깨어지고 흩어지며 때로는 바스라지듯 간신히 이어지더라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모든 존재의 홀로된 생에 대한 사랑이자 헌사이며 찬미이기도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 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잊혀진 것들을 다시 데려오려 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기록의 모습으로, 때로는 기도의 형태로, 때로는 고백이자 슬픔의 토로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시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계간 청색종이 임지훈 전동균「미제레레」서정 2025
이성천 ‘어제’를 봉합하는 거듭나기의 시(詩)

1. 소월이 그러하듯, 황동규 시인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 것인가. 황동규는 1958년 미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시력 67년을 지나는 시인이다. 그는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을 발표한 후 『풍장』(1995)을 거쳐 지난번 『봄비를 맞다』(2024)에 이르기까지 도합 열여덟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1,000편에 거의 근접한 그의 시세계는 이번 근작 시편에도 등장하는 평론가 이숭원의 일전 언급대로,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춤”(『꽃의 고요』 해설)이라고 일단 상징적으로 명명할 법하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지난 세월동안 시인이 꿈꾸며 가꿔온 삶의 시간들이 때로는 황홀한 감각과 사유로, 또 서늘하면서도 생기 있는 언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몸짓을 극서정시가 견인하고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황동규 시의 독특한 구성 원리이자 시세계 전반을 추동하는 극서정시는 단적으로 말해 ‘극’을 내장한 서정시이다. 시에 극적 구조를 연출함으로써 반전이나 시적 자아의 깨달음과 거듭남 같은 내적 변화를 유도하는 시인 특유의 창작 방식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극서정시는 “극(劇)적 구조를 지니고 싶다”라는 시인의 선언적 문구가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표사에 실리면서 한국 시사에 본격적으로 등재된다. 이후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 『우연에 기댈 있었다』(2003), 『꽃의 고요』(2006)는 물론 최근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황동규의 시편들은 극서정시의 계보를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이전 그의 시가 ‘시 안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시’의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도 시인의 말마따나 “명칭은 나중에 붙였지만,” “극서정시는 초기부터 있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가령 황동규 시세계의 중심축을 떠받치던 일련의 사랑 시편은 기존의 전통 서정시와 달리 극적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들에서 ‘사랑(이야기)’는 극서정시 구조를 통해 새롭게 변주되고 그때그때마다의 정황적 의미를 획득한다. 데뷔작 「즐거운 편지」를 위시한 황동규의 사랑 노래는 재래의 수동적이고 추상화된 주제 영역을 벗어나 생활세계에서 ‘사소’하고 ‘조그만’하며 ‘비리고’ ‘쨍한’ 극적 사랑의 계기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시간 속에 비치는 시간’의 감지와 ‘홀로움(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의 정서, 그리고 세계의 필연성과 필연적으로 동행하는 우연성의 수용은 사랑주의자 황동규가 자신의 사랑 시편들과 함께 극서정시를 가동해온 의식/무의식의 흔적들이다. 아울러 일상의 규범을 벗어나 지각의 갱신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한 여행(시)과 시인의 타고난 예술적 정열은 그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련해왔다. 여기에 죽음에의 선주(先走)를 감행하여 확보한 삶과 죽음의 인식론적 전환 사유와 선(禪)에의 깊은 관심은 그의 시에 세계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기 위한 시적 장치이자 방법론으로 주어져 있다. 이렇듯 황동규의 시는 일상과 탈일상의 세계를 분주하게 오가며 시와 삶이 하나 되는 극적인 순간의 풍경을 연출해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마치 ‘외계인’과도 같은 낯선 시선과 호기심으로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의 진면목을 환하게 그려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시는 알레고리와 상징의 밀회를 적극적으로 주선하며, 황홀하면서도 서늘한 삶의 풍경들을 노래하고 있다. 2. 황동규의 주요 시편들이 극적 구조를 거느린다고 했거니와, 이는 근작시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그의 「벽오동」은 작품의 말미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글귀를 위치시킴으로써 이즈음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밑그림”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 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 같이 물드는가 했더니 벽오동이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쁜데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다. 몸에 걸쳤던 것 낌새 못채게 털어버리고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서었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 아니겠나? 「벽오동」 전문 시 「벽오동」의 도입부에는 세 개의 나무가 등장한다. “은행, 벽오동, 벚” 나무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시의 제목이 ‘벽오동’으로 제시된 이유는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쁘”고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유독 ‘벽오동’만 “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기 때문이다. “벽오동”만이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벽오동」의 시적 반전은 이 부근에서 준비된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와 같은 화자의 의도 섞인 물음은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의 상황 묘사로 일관했던 이 시를 급기야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과 자기 확인의 지대로 인도한다. 이때 10행의 접속 부사 “하지만”은 시적 자아가 겪는 거듭남의 여정을 노골적으로 주도하고 암시한다. 그 거듭남이란 “엇박자”와 정박자의 구분이 없는, 아니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자세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이 시는 평범한 생활세계의 한복판에서 “세상의 리듬”과 “같이” 하지 않은 자연생명을 통해 시적 화자의 변화된 생각을 명쾌하게 전달한다. 이를테면 우리 삶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공존한다든가, 초월은 결국 초월하지 않는 곳에 있다든가, 더하여 죽음은 삶의 시간에서 분리된 이원화된 공간이 아니라든가 등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저 찬란하면서도 심오한 구문이 간직한 모든 가능태의 해석들로 말이다. 이 대목을 특히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색즉시공(色卽示空) 살기”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어지는 「시에 대한 단상들」에도 재차 변주되어 나타나는 까닭이다. 가령, 최근 시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렇다. “시 쓰는 일은” “우연 같은 우연, 우연 아니게 만나는” 길이고, “더 이상 다르게 말할 필요가 없을 때/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이 꿈틀”대는 순간이며, “명동 간다는 게 충무로역에 내렸”지만 가끔씩은 “그런 시가 생각보다 더 실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날것 보다는 제대로 익힌 시가 그래도” 좋겠으나 “익힌 날것도 있”다는 생각. “시인과 대상과의 관계는 늘 1:1”이지만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쉬고 있는 곤줄박이”를 “안 본다 안 본다 하면서 더 보고 싶은 사람”처럼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다는 생각 등등. 이렇듯 황동규에게 시는 고정불변의 규율과 법칙으로 규정되거나 강제되지 않는다. 인과론적 사유로만 구성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시는 이 세상 모든 걸 다 맛보려”(「시가 사람을 홀리네」, 『오늘 하루만이라도』, 2020) 드는 생감각의 집결지이고, 변화무쌍한 색(色)이자 공(空)의 세계다. 삶의 실제가 그러하듯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이치가 투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전이되어 황홀하게 펼쳐지는 구체적 장이다. 그리하여 다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앞문으로 들어가/뒷문을 찾지 못하는 시도 시다.” 그 시들 속에는 “무심히 돌다 뒤꼍에서 만나는/이끼, 환한 빛의 섬들”이 존재한다. “이크 밟을 뻔!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앉아 쉬고 있는 곤줄박이”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 3. 아무래도 황동규의 근작 시편을 읽다보면, 노년의 시인을 자주 만나게 된다. 노년은 많은 것들을 서서히 세상에 내려놓는 마음의 시간대다. 인간에게 죽음이 가장 확실한 미래의 사건으로 고지되듯이, 노년은 유한 존재가 어쩔 수 없이 겪는 예고된 시간의 절차이자 필연의 변화이다. 감각기관의 퇴화와 기억력의 감퇴는 필연적 변화의 대표적 항목이다. 거기에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이 필연적 변화의 끄트머리를 실시간으로 경험하게 한다. 지난밤 꿈에 너와 나 너무 많은 말을 주고받았어. 너 어제 세상 뜨고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 어제 저녁 네 빈소에 갈 때 현관서부터 가을비 추적추적 뿌렸지.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나란히 서 있던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 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말보다 더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너무 많았다」 전문 「말이 너무 많았다」는 죽음을 경험한 시인의 차분한 언어들이 동원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어제 저녁” 가까웠던 이의 부음을 접하고 “빈소”에 다녀왔다.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다.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일 게다. “이제”, “어제”의 “너와 나”는 꿈속에서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현관서부터” “추적추적 뿌렸”던 가을비는 이런 화자의 공허한 심리상태를 우회적으로 반영한다.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라는 화자의 읊조림에는 ‘너’를 향한 그리움과 아쉬움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너와 나”의 “어제”와 “이제” 사이에는 느닷없는 죽음이 가로 놓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너’의 죽음을 처연한 슬픔의 분위기로 몰아가지 않는다. 애도의 마음을 부러 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시인은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을 모나지 않게 적재함으로써 “말보다 더한 말”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유도한다. 죽음을 계기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많았던 “어제”를 봉합하고 “이제”의 내 삶에서 ‘너’와의 진정한 관계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기실 황동규에게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단절도, 우리의 현재와 무관한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본원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절대적인 계기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죽음은 “어제”의 일상적 시간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마감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인간의 짧은 삶에 ‘그때그때마다’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시 「말이 너무 많았다」가 ‘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말보다 더한 말”의 진실을 “이제”의 삶에서 환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입춘 가까워 추위 잠깐 풀린 어제 저녁 시의 혈관 건강 살피는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 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그만 내 뇌혈관 상태 들키고 말았다. 운 떼려다 멈칫하게 만든 낱말, 신문이나 휴대폰에서 매일 두세 번씩 만나고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모일 때 내가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 즉시 요양원 보내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그 말,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 디멘셔(dementia) 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설명하니 이교수가 치맵니다, 했지.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셈이지만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별일은 참 별일이다.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 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쓰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 센강에 몸 던진 시인 파울 첼란, 그가 독일어로 마신 ‘검은 우유’가 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다.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 전문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는 노년의 시인이 겪은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모처럼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노년의 불편함에 난감해 한다. “아무리 해도” “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교수가 치맵니다,” 말하고 나서야 세월의 늙음이 “지워버린” “그 말”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시인이 경험하는 노년의 불편함이란 당연히 기억력의 감퇴이다. “뇌혈관”의 노화가 야기하는 이런 불편함은 사실 “참 별일이다”라며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정도에 따라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즉시 요양원 보내”야 할 만큼 걱정스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 낱말이 “신문이나 휴대폰에서/매일 두세 번씩 만나”는 흔한 모국어라면 사태는 보다 심각하다. 그렇기는 하나 시의 화자는 이 난감하고 걱정스러운 국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쾌하게 돌파하는 듯하다.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음에도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영단어 “dementia”가 아니라 “치매”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분히 혼란스럽기는 하되, 이마저도 삶의 “별일”로 인정하고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로써 “지워버린 말”의 사소함과 심각함 사이의 긴장감은 “별일은 참 별일이다”라는 시인의 무심한 독백으로 무리 없이 해소된다. 이 시가 노년의 불편함과 난처함을 호소하는 차원에서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소환하는 극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어제 저녁”부터 “아침”까지 시인에게 발생한 일종의 이중 언어(정체성) 문제는 곧바로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쓴 시인 파울 첼란의 삶으로 이월되는 것이다. 특히 파울 첼란의 「죽음의 둔주곡」(Todesfuge)이 음악적 형식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적 모티프의 반복·변형 구조를 취한 작품임을 염두에 두면, ‘과거’ 시적 화자와의 친연성마저도 확보된다. “검은 우유가/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라는 시구가 전혀 어색하거나 새삼스럽지 않다. 이렇듯 황동규의 근작 시편들은 여전하다. 여전히 그의 시는 “밝고 생생한”(「프리지아」) 생명과 마주하고 실존의 삶을 향유하며 환한 생의 감각으로 세계를 노래한다. 만년에 들어서도 시인은 “어제”를 봉합하며 거듭나기를 꿈꾼다. 어쩌면 저 근작 시편들 뒤에서 시인은 속엣 말로 이렇게 되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년의 필연적 변화, 하지만 그 불편함과 난처함마저도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맛’이고 ‘사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라고.

계간 청색종이 이성천 황동규죽음에의 선주극서정거듭남노년시 2025
신은조 밝고 수다스러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5) /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열림원, 2025)

1. 젊은이가 아니라 모두의  젊은 세대의 풍조를 향한 기성세대의 염려 섞인 목소리는 언제고 존재했다지만 MZ를 향한 그것은 조금 커 보인다. 이와 같은 우려의 밑바탕에는 결혼이나 독립 같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시기가 이전에 비해 확연히 지연되는 경향이나, 대기업의 취업 경쟁률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데에 비해 중소기업은 인력난을 호소하는 역설, 젠더에 따른 정치적 성향의 양극화가 사회적 현상으로 명명되는 상황 등의 통계·사회적 ‘사실’이 있는데, 이는 다시 초저출생, 역대 최고의 비경제활동인구 비율 등 갖가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결국 MZ의 몫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므로 ‘MZ’는 단순한 세대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멸칭으로 변모한다.  기실 1980년대생부터 2000년대생까지를 전부 한 세대로 묶어 부르는 일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에 출생한 담임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2000년대생의 입장에선 조금 당혹스러운 시도가 아닐 수 없겠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전 세대’와 ‘현세대’ 간 차이에 관한 농담에 공감하고, ‘이전 세대’의 지시에 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이상 ‘MZ스러움’이라고 일컬어지는 속성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워라밸’ 등의 키워드에서 드러나는 개인주의적 관점, 기존 질서 체계에 협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과 선을 긋는 태도, ‘비혼’이나 ‘딩크’의 유행으로부터 미루어볼 수 있는 자기 안위 중심의 가치관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한정된 에너지를 주어진 과제나 언젠가 도래할 장밋빛 미래에 투자하기보다는 자신의 존재 보전에 안배하려는 태도는 일견 매사에 ‘책임감 없이’ ‘대충’ 임하는 것처럼 비치기 쉬운 탓에 MZ 세대에 대한 오해를 한층 더 깊어지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러한 속성들이 과연 ‘지금 젊은 세대’만의 특징일까?  물론 세계에의 불만을 토로하고, 내심 ‘변화’를 소망하는 목소리가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을 단지 ‘젊은 세대의 몫’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젊은 세대’가 사회제도의 정의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범주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단순히 철없는 젊은이의 치기로 격하할 뿐만 아니라 연령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세계와 불화하는 이의 고통을 단지 개인의 정서적인 흠결 탓으로 귀결시키기 쉽다는 점에서 그들에의 적극적인 타자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MZ스러움’은 특정 연령대나 세대의 기질적인 본성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태도 중 하나다. 일찍이 ‘꼰대’라는 단어가 그렇게 되었듯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 이질감을 느끼는 자라면 누구나 MZ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화제는 ‘MZ스러운’ 태도를 촉발하는 ‘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MZ스러움’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발현되는 것이냐는 질문으로까지 확장될 터, 지금이야말로 현실에 발붙인 채 그를 재현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온 문학이라는 장르가 앞에 나설 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어떤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품에 안고 두 권의 시집을 펼친다. 두 시집은 지금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적지 않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두 시집의 화자들이 취하는 태도가 같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아침부터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서 “창문을 열지 않”(「골목의 증식」)고,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는 남현지의 화자와, “단돈 칠만 원”이라는 호객 행위에 굳이 “없어 인마”(「신년 운세」)라고 엄포를 놓고, 소비자에게 자신—혹은 자신이 만든 상품—이 어떤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지 어필해야 하는 “홈쇼핑” 방송에서 대뜸 “귀엽다”(「도전! 판매왕」)는 말을 꺼내놓는 고선경의 화자는 일견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현지의 시 중 “고통 없는 세계” 같은 건 “상상을 안”(「빛의 생산」) 한다는 말이나, 고선경의 시 중 “진정한 서울 시민은 1호선에 출현하는 빌런들에 익숙해”(「남영」)진 사람들이라는 견해와 같이 시집 곳곳에 산재한 증언들로부터 한 줄기의 비관을 발견해낸 독자라면 이들 사이에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공통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대들, 어떻게 살고 있는가? 2. 서랍 속 테라리엄  남현지의 시에서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소망은, 시집의 해설이 언급하고 있듯 화자 자신을 안전한 공간에 ‘안치’하려는 감각이다. 안정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 소망은 ‘집’ ‘실내’ ‘직업’ ‘소속감’ 등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나며, 화자가 의도적으로 타자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끔 한다. 이처럼 극도로 정돈된 남현지의 세계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마음에게는 미안하지만 / 그것은 이미 / 언어의 것이 아”(「골목의 증식」)니냐는 물음에서부터 드러나듯, 남현지의 시 세계에서 ‘마음’은 더는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래도 정제되지 않은 마음이 인간을 뒤흔들기 쉽다는 점에서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이 곤란에 빠진 자에게 건넬 만한 가장 보편적인 조언으로 손꼽히는 세계에서 마음이 설 자리는 너무도 비좁다. 그래서일까? 남현지의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는 대체로 “고뇌, 열망, 후회”(「피서」) 같은 건 알 게 뭐냐고 되묻거나, “아줌마가 싫”다는 이에게 “아줌마도 싫어하는 것이 많”(「복도식으로」)으니 괜찮다고 되받아치는 식으로 마음의 진동을 애써 묵살하곤 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마음이 소거된 도시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행복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요가 매트를 찾으며 더 건강하게 튀긴 이 감자칩과 저 감자칩 사이 최저가와 할인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에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번에 한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전문  표제작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마트를 거닐며 어떤 “감자칩”을 구매할지 고민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이때 화자는 선택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체험을 하는데, 그것은 화자에게 아주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변화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소비자에게 끊임없이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선택 한 번 한 번의 영향이 막강함은 구태여 나비 날갯짓과 태풍의 비유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자명한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이 / 나의 선택이었다고 /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는 화자와 “투자에 성공”하고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화자 사이에는 어떤 선택의 차이가 있었을까?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화자는 끝도 없이 신중해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안녕을 물어도 되는 상황인가 / 호칭은 적절한가 / 무례한 단어는 없었는가” 지속적으로 자문하면서도 “이토록 신중해도 /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이해”(「거래처에서 배운 것」)하는 화자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선택이라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극한까지 보장하는 것으로 언뜻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과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사회구조나 시스템의 책임을 축소하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되기 쉽다. 다시,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는 목소리로부터 ‘누칼협’1)이라는 조롱이 힘을 얻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자에게 모두 너의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냐 일갈하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복도’ ‘골목’ ‘마트’…… 인간의 몫로는 오직 비좁은 통행로만을 남겨둔 채 고통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남현지 시집의 공간들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현실의 은유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집을 두고 세계를 비관한다거나 자신만의 작은 낙원에 숨어든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인데, 그것은 남현지 시집의 화자들이 끝내 버리지 못한 한 줄기 마음의 잔재 때문일 것이다. 남현지의 화자는 세계와의 거리를 두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곁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내심 품고 있다. 예컨대 「가이드」에서 화자는 특정 모임의 맞춤 티셔츠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 티셔츠를 세탁기에 돌리며 “소속이 있다면 기쁠 것이”라고 되뇐다. 하지만 티셔츠가 줄 수 있는 소속감은 그것을 벗는 순간 사라지고 말 정도로 얄팍하다. 세탁기와 같은 기계가 티셔츠를 깨끗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담보하는 반면, 인간은 그럴 수가 없어서 안내문을 동봉한다고 이야기하는 남현지의 화자는 얼핏 인간에 대한 어떠한 낙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자는 시의 마무리에서 이미 “없어진 단체의 티셔츠를 입고 잠든다”. 면으로 만든 티셔츠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내면에 미래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음은 자명하다. 동네에서 은행이 철수하고 있다 은행은 이제 우리가 귀찮구나 교회는 더 늘어났으니까 신은 아직 우리가 필요한 거 같지 핸드폰 가게처럼 아직도 우리를 원해 커피도 준다 마시고 가 마셔도 돼 더 달라고 해도 돼 쓸데없는 걸 사라고 하지 않아 우리가 사 모으는 건 마지막 모자 마지막 손가방 마지막으로 짜인 부드럽고 질기며 화사한 것이다 아침마다 침을 흘리면서 꽃을 보게 돼 사진을 찍어서 보내 좋은 말만 하고 싶어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싶어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도록 달콤한 것으로 다 발라버리고 싶어 티브이를 틀어봐 설악산이 우리를 모집해 단풍이 붉게 들었대 날씨가 아주 좋대 좋은 것을 줄게 오래 간직했던 것을 줄게 말린 나물을 줄게 보험도 줄게 이건 수를 놓은 손수건이고 네 배냇저고리야 옷은 잘 다려 입고 햇볕을 많이 쫴야 돼 그런 걸 자꾸 잊어버리게 돼 — 「철수」 전문  오직 필요와 쓸모만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쓸데없는” 것들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화자는 은행이 “우리”를 두고 철수하고 오직 “교회”라는 믿음의 장소만이 건재한 동네에서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을 만큼 미약하지만, 그래서 “달콤한 것” “꽃” “단풍” “햇볕”…… 전부 한순간 우리에게 찾아왔다 사라지는 것뿐이지만, 그래서 이득이나 필요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세상에 쓸모의 유무나 필요의 정도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런, 간직할 수도 박제할 수도 없게 증발해버리는 한순간의 기쁨 같은 것이 아닐까? 배냇저고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고 해서 그때의 상황이 재현되는 것이 아님에도 오래된 배냇저고리를 건네주는—높은 확률로 부모님일—이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그런 “마음”들이야말로 체념과 절망의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는 자가 내일을 꿈꿀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보험”이 아닐지 조심스레 곱씹게 된다. 3.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2)  일찍이 프리드리히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실로 인간은 고통받으며 강해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미 흉터가 된 상처에도 종종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강해졌다는 사실만을 위안 삼아 지난날의 고통을 전부 ‘필요한 것’이었다고 정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선경의 두번째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은 그것이 ‘살아남은’ 청년이 지난 1년을 기록한 수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구태여 ‘살아남은’ 청년이라고 호명하는 이유는 그의 주변에 많은 이별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별은 종종 연인 간의 헤어짐처럼 관계의 단절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죽음의 형태를 띤다. 「신년 운세」로 시작해 「망종」을 지나, 「핑크 뮬리」가 만개하는 10월을 경유하여 다시 “12월 31일”이 오는 동안 화자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기차”(「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를 타고, 이미 “죽은 친구”를 “햄버거 배달”(「가벼운 노크」)원으로 다시 만나기도 하며, 심지어는 “내가 죽”(「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어버리는 식의 기묘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시 속 청년의 1년 중 대부분을 아우르는 감각은 다소 염세적이라고 읽을 수 있을 만큼 통렬한 현실에의 반감이다. 침대에 모로 누워 울다가 씨발! 하고 외쳤다 씨발…… 나직하게 읊조릴 수도 있었지만 누구라도 들어 주었으면 해서 소리를 질렀어 검은 고양이를 제외하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가 울든 말든 검은 고양이는 똥 싸고 물 마시고 제 몸을 할짝거렸다 왜 아무도 없지? 집을 나설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과하면서도 세상이 나를 자객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숨지 않아도 세상은 나를 숨겨 준다는 것, 아아 안전해 그런데 나는 왜 한겨울에도 맨발에 슬리퍼만 신는 걸까 발끝에서 가볍게 달랑거리는 슬리퍼를 신고 빗길 위로 미끄러진 적이 있는데 누구라도 죽이고 싶은 날에는 세상이 온통 자객 같았다 그런데 그냥 누워서 비 구경 했어 창가의 침대에서도 비 내리는 거리에서도, 아아 시원해 고양이가 물 먹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검은 고양이는 빗물을 좋아하는지 깨끗한 물을 좋아하는지 아니 물을 좋아하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 태어난 지 서른 해가 되어 가는데 여전히 태어난 게 저주스럽다 나에게 어떤 세상을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우선 세상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 「검은 고양이와 자객」 부분  「검은 고양이와 자객」에서 화자는 노골적으로 세상에 대한 불호를 드러낸다. 그것은 세상이 화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존재를 숨겨버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아무리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눈물을 쏟아도 세상이 그것을 묵살하므로 화자는 세상에 뜬소문으로만 존재하는 “자객”에 비견된다. 함께 사는 검은 고양이에게조차 애정 어린 관심을 받지 못하는 화자가 원하는 것은 일정 수준의 유대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심이 주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고선경의 화자들이 “집이나 학교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생각이 착각인 것을 아는”(「핑크 뮬리」)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살을 취하기 위해 뼈를 내줄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고선경의 화자가 선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머, 즉 현실을 웃어넘겨버리는 가벼운 태도다.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럭키슈퍼」)이라는 말처럼, 유머를 유머로 만들어주는 것은 껍질처럼 쓰디쓴 현실이다. 이 세계가 분명히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세계를 비꼬는 유머로 웃을 수 있다. 때로는 세계를 깎아내리고, “1호선 빌런”(「남영」) 혹은 자기를 비하하며 함께 웃고, 그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 그리하여 누군가와 함께 웃는 일은 양자 간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느 정도 합치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세계를 비꼬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함에 더불어 적어도 그 기분만은 조금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남현지의 시집이 세계를 버텨나가는 힘으로 ‘기분’ ‘마음’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건넸던 것처럼, 고선경의 화자에게 있어 유머는 “공이 날아오기 전에 / 나를 먼저 깨뜨려 놓는”(「산성비가 내리는 대관람차 안에서」)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가려는 나름의 생존 전략처럼 느껴진다. 더하여 고선경의 화자가 단지 세계를 증오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불행과 불운 사이를 거닐다 문득 거기에 온기가 있다는 것”(「체리의 서약」)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얀 머그잔 속 부풀어 오른 우유 거품을 바라본다 왜 이런 것이 나를 끓게 하는지 넘치게 하는지 알 수 없다 기다리라는 문자 메시지 하나에 시간은 무수히 알을 까게 되는데 씁쓸한 시나몬 향을 맡다 보면 담배를 배우고 싶어져 그런 것이 나의 최선은 아니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태어나는 기분 우유 거품 아래에는 커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도 같다 침착하게 식어 가기 최선을 다해 가라앉기 나는 이제 그런 것을 배우고 싶어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은색 스푼이 거품을 걷어 내면 날벌레 한 마리 떠올라 있을지라도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남은 거품의 자세 넘치지 못하지만 부푼 채로 멈춰 있다 빈 잔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어 내 어깨를 붙잡는 차가운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부드럽게 감싼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 — 「카푸치노 감정」 전문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침착하게 식어”가는 삶을 배우고 싶다는 화자. 하나의 시기가 끝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임을 스스로 선고하고 있는 화자는 이제 “거품”으로 표현되는 지난날을 청산하고자 한다. 정말이지 그의 말대로,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다. 그 잔여물이 새롭게 따라 넣을 음료의 맛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듯 새로 시작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지난날이 전혀 돌아볼 것이 못 될 만큼 끔찍하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삶을 견디려 안간힘을 쓰는 청년이 1년간 남긴 기록에는 끝없는 자기 비하나 체념의 유머뿐만 아니라, 그가 그 1년을 버티게 만든 아름다운 지점 또한 무수히 존재한다. “무수한 별, 아름다움 /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 아닌 아름다움 /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처럼 읽는 이의 머릿속을 선명하게 채우는 시청각적 감각들은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독자의 가슴속에 심장처럼 남아 온기를 더해준다.  그리하여 시집의 마지막 시, 「팬레터—12월 31일」에 다다라 화자는 “이걸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기대하자 더 많은 걸”이라고 속삭인다.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은 친구를 추억하며 적어 내려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해당 시에는 친구와의 아름다웠던 추억과 더불어 혼자 남겨진 화자의 외로움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 외로움에 천착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해도 충분해지지 않으니 기대해보자며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새해는 기다려지고, ‘나’는 “너의 팬”이라고. 이토록 단단한 심장을 가진 화자에게 응원의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것은 제 삶을 견뎌내는 것조차 힘에 부쳤던 시기가 우리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4. 내일의 태양  영화 「해피엔드」(네오 소라 감독, 2025)에서 주인공 ‘유타’는 말한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즐겁게 죽자.” 근미래의 일본,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지진과 오보 사이를 방황하며, 사람들은 강력한 통제와 결속을 원하는 쪽과 시민을 옭아매려는 공권력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촉구하는 쪽으로 분열한다. 유타는 그중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만 몰두하는데, 이러한 동태는 앞서 언급한 그의 발언과 얽혀 그를 세간에 대한 ‘유의미한’ 관심은 하나도 갖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회의주의자로 보이게 만든다. 유타의 음악 파트너이자 소꿉친구 ‘코우’ 또한 이러한 판단에 공감하여 ‘조금은 생각을 하라’는 일갈을 하는데, 소위 말하는 ‘MZ 세대’의 일원으로서, 유타의 위와 같은 발언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결과’라는 평가에는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의 결말부에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기와 불안, 양극화…… 이 영화의 배경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와도 상당히 닮았다는 것을 상기하면 작중 선생님의 대사를 끊임없이 곱씹게 된다. ‘너희 세대에 조금 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젊은 두 혁명가를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 그 대사를 말이다.  ‘희망에 대한 믿음’. 희망이라는 관념에 또 하나의 관념을 덧댄 이 마음은 훼손되기 쉽고, 그래서 세계의 척박함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득세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현지와 고선경의 시집에서 명확하게 빛나는 인간의 마음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렇듯 눈부신 희망의 증표에 대고, “우리의 불행도 우리를 이해시키지 못하”(고선경, 「눈도 내리지 않는데 고백」)는 세상에서 위로랍시고 ‘어쨌거나 다 괜찮아질 거야’ 따위의 근거 없는 전망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세상은 앞으로도 줄곧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시험할 테고 괜찮지 않아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러므로 두 권의 시집을 통과한 독자가 붙일 수 있는 것은 아주 미약한 마음뿐이리라. 그리하여 지금, 인간을 숨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밝고 수다스러운 세계의 한복판에서,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그대들, 잘 지내시나요? 1) '누가 그거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하기라도 함?'의 줄임말. 주로 부당함이나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 모든 일이 전부 피해자의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므로 그에 딸려 오는 고통도 모두 본인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조롱하는 데에 쓰인다. 2) 2012년 TV 예능 프로그램 에서 하하의 콩트 캐릭터인 '하이브리드 샘이 솟아 리오레이비'가 지은 정형돈의 딸 이름. 해당 장면을 캡처한 사진은 2025년 현재까지도 삶의 팍팍함을 유머로 승화할 때 곧잘 인용되고 있다.

계간 문학과사회 신은조 남현지고선경MZ희망마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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