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문학평론 2024년 가을호(제192호)
동양적 세계관과 불교적 사유(思惟) ― 정진채 동화론
Ⅰ. 들어가는 말
정진채(鄭鎭埰)는 1936년 11월 9일(음 9.5) 경북 청도군 금천면 김전동(金田洞)에서 부 정희모와 모 박용특 슬하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모계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시인인 담임교사의 영향으로 시와 시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학교 백일장에 입상하여 청마시집을 상품으로 받으면서 더욱 시에 심취하게 되었다. 1955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원>지에 투고하여 시 「그 냇가에서」로 3회 추천을 완료했다.
그는 1959년도에 향리인 금천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10년간 경북 영일군 관내 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영일군 아동문예연구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지내면서 관내 초등학교의 학생들의 문예지도에 힘썼다. 1965 가을 첫 시집 『꽃밭』을 김성도 선생의 추천으로 발간하고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어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새교실>지에 동시 「익을 때까지는」, 「꽃눈이 텃다」, 「누나야」 등이 3회에 걸쳐 이원수에 의해 천료되었다. 1966년 포항 수산대학(야간)을 졸업하고, 1986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다.
1967년 영남일보에 소년소설 「오리 감나무」가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힌 후, 연차적으로 「옹달샘 둘레의 이야기」, 「감꽃이 필 무렵」이 가작으로 뽑히다, 1970년 마침내 「그 양옥집」이 당선되었다. 1970년 부산으로 전근하여 부산을 터전으로 활발한 문필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연밥」이 당선되어 동화작가가 되었다. 1972년 가을 부산의 원로 이주홍과 조유로를 고문으로 추대하여 부산아동문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회지 <부산아동문학>을 창간했다. 회장직을 연임하면서 부산 아동문학 발전에 힘썼다. 1980년대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동시 「바닷가에서」가 수록되었고, 작곡이 되어 KBS ‘우리들의 새 노래’로 뽑혀 전파를 타기도 했다.
1988년 30년동안의 교직에서 물러나 <정진채 아동문학연구원>을 개설하여 ‘꽃사슴 독서교실’을 열고 어린이 독서 지도에 힘썼다. 이후 ‘부산여성문예대학’을 설립하여 동화, 소설, 수필, 시 등의 강좌도 열고, 이어 ‘부산문예대학’을 경영하며 300여 명의 문인을 배출했다. 1990년에 아동독서교실의 강의록을 묶어 『아동독서지도법』(빛남출판사)을 출간했다. 1990년 동화문학 전문지인 계간 <동화문학>(1997년 종간)을 창간했다.
아동문학에 대한 평론은 1977년부터 1988년까지 10여 년간 계간 ≪아동문학평론≫지에 발표한 평론을 모아 『80년대의 한국동화문학』(빛남출판사)을 간행하였다. 1977년 『무화과 이야기』로 제3회 한국아동문학상, 1985년 『하얀 꽃사슴』으로 대한민국문학상, 1995년 『팔랑이의 한가위』로 제5회 방정환문학상을 받았고, 평론집 『80년대의 한국동화문학』으로 한맥문학 대상을 받았다. 한국아동문학인협회 부회장, 한국아동문학학회 부회장, 부산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출간한 책으로 동시집 『꽃밭』(1965), 『꽃동네』(1971), 동화집 『산소녀』(1974), 『무화과 이야기』(1976), 『초록빛 태양』(1985), 『하얀 꽃사슴』(1985), 『콩밭장군』(1986), 『사랑의 새』(1986), 『꿈꾸는 낙하산』(1996), 『소리를 먹는 열매』(1994), 『이야기가 그친 집』(1996), 『은방울 이야기』(2005) 등이 있다. 이론서로는 『누구나 동화를 쓸 수 있다』(1992), 『현대동화창작법』(1999), 『아동독서지도법』(2000), 『80년대의 한국동화문학』(2007) 등이 있다.
그는 정한길이란 본명을 병용했으며, 아동문학가이며 시인인 임영인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2024년 6월 3일 88세로 영면하여 부산영락공원에 잠들어 있다.
Ⅱ. 정진채의 동화 세계
1. 물과 바다로의 귀소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세상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물질 중 하나이다. 원형 상징으로서의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속성을 지녔으므로 정화와 순결을 상징한다. 물은 생명 탄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화소이다. 또한 농업 생산량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고, 홍수가 날 때에는 파괴와 재앙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소멸과 이별,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과 상징성을 바탕으로 물과 관련된 신앙은 문학작품에 널리 차용되어 왔다.
정진채 동화에는 물이 중요한 화소로 등장한다. 이러한 동화로는 「그 여름 빈지늪」, 「몸빛」, 「오리여자」, 「남해바다 이야기」, 「동해바다 왕국」 등이 있다. 정진채가 작품에 물을 소재로 즐겨 사용하는 것은 카를 융이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원형(Archetype) 때문으로 파악된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개인의 경험, 생각, 감정이 억압된 그림자도 있지만, 태어날 때 이미 간직한 선험적인 인류보편의 무의식도 존재한다. 이것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여러 원형들로 구성되어 있고, 원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 유형이다. 정진채에게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토속신앙1) 때문에 물의 원형 이미지2)가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원형으로 인해 그는 물을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내륙에서 태어난 정진채는 바다를 동경하고 선호했다. 그 때문에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다수 창작하였다. 그 중에는 「남해바다 이야기」(아동문예사, 1985), 「동해바다 왕국」(윤성, 1991)과 같은 스케일이 큰 장편도 있다. 「남해바다 이야기」에는 용궁과 용왕이 등장하고, 소라게, 돔, 문어, 거북, 진주조개 등이 등장하여 산호숲이 있는 바닷속을 배경으로 ‘별주부전’ 류의 의인화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진채의 장편 동화는 바닷속 세계를 그렸다. 용왕에 대한 이야기는 서구의 신화에도 등장하지만, 우리처럼 바다 속에 인간 세계와 닮은 세상은 없다. 정진채의 장편 동화를 통해 독자들은 동양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으며, 한국 전래동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정진채는 바다속 세계를 배경으로 한 단편도 다수 창작했는데, 「달녀와 목동」, 「동백꽃 이야기」, 「인어 이야기」, 「먹보와 문어탈」, 「몸빛」, 「바다거북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동화들은 한국의 해양문학 발전에 기여한 순기능도 있다.
산호 숲의 낮과 밤이 달랑게의 옆 걸음만큼이나 빨리 지나갔습니다./그동안 진주조개 아주머니는 수많은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자식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았지마는, 자식들은 자라나면 모두 엄마 곁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몸빛」 부분
이 동화의 공간적 배경은 산호초의 군락지인 바닷속 산호 숲이다. 산호초는 바다에 사는 산호충의 유해나 분비물들이 얕은 바닷속에 쌓여 만들어진 석회질의 작은 암초를 말한다. 산호 숲은 산호충의 유해가 쌓여 만들어진 암초가 숲처럼 느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호숲 사이에는 물고기들이 은거하기에 좋아 즐겨찾는 어족들도 많다. 그 중에는 폭군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불구가 된 바위게, 참새우, 날치도 있다. 산호숲에 사는 진주조개는 수많은 자식들을 낳아 온갖 정성을 다해 기른다. 하지만 다 자란 자식들은 어미 곁을 떠나 제 갈길로 흩어진다. 세상 어미와 자식간의 관계가 대부분 비슷한 결과로 이어지듯이 망운지정(望雲之情)이나 반포지효(反哺之孝)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인 것이다.
진주조개는 산호 가지에서 바위 위로, 바위 위에서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번갯불이 번쩍하고, 그리고 콰앙! 그것으로 진주조개는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그러나 목숨은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게 아닌 모양이었습니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랫바닥 위에 자신이 나동그라져 있었습니다. 가슴 밑 부분이 따끔따끔 저려 왔습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점점 맑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슴 밑에 입었던 생채기 부분에서, 말할 수 없으리만치 커다란 어떤 기쁨 같은 것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바로 일곱 빛 진주의 광채가 되어 먼 이웃까지 화안하게 밝혔습니다.
「몸빛」 부분
「몸빛」은 큰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살점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몸 속에 진주의 씨앗을 품고 살을 에는 아픔으로 보석을 키우는 진주조개의 희생 정신은 찬란한 광채로 빛난다, 성경에도 죽으면 살리라는 구절3)이 있다. 살이 타들어가는 아픔을 감내하며 자신을 희생한 삶이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이 동화에는 바위게, 참새우, 날치, 복어, 멸치 등이 차례로 등장하여 진주조개로부터 도움을 받고 위로받는다. 힘을 잃어버린 바위게의 집게발 하나,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참새우의 왼쪽 수염 하나, 자유를 잃어버린 날치의 왼쪽 날개 하나 등이 진주조개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처럼 진주조개의 일생은 봉사와 자비로 이어지는 보시적 삶이다. 진주조개가 일곱빛 광채로 빛을 내자 상실의 아픔을 겪었던, 바위게, 참새우, 날치가 찾아와 부르짖는다. “여어! 저것은 우리를 구할 때 아주머니가 보여 주던 그 몸빛이다.” 결국 이들의 상처도 씻은 듯이 나으며 막을 내린다.
2. 성인을 위한 사유적 동화
정진채 동화에는 1차독자인 어린이 용보다 2차독자인 성인을 위한 작품들이 많다. 이야기의 중심인물도 주로 성인이 등장하는데, 미모와 신비성을 겸비한 여인들 일색이다. 어른들에게 던지는 철학적 사유가 깃들어 있고, 다분히 종교적 깨우침도 요구하는 작품들이다. 이는 동화의 독자층을 넓힌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어린이 독자들에게 외면받을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문학성과 환상성이 조화를 이루며 성인들이 공감하는 동화라도 정작 주독자인 어린이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어른들의 취향인 탐미적이고 관능적인 묘사를 즐겨 사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정진채 자신도 이러한 문제를 십분 인식4)하고 있었다. 정진채 동화에 나타나는 여러 원형5)들 중에는 여성적 요소인 아니마(Anima)가 작용하고 있다. 「무화과 이야기」의 무화 선녀, 「관유와 돌각시」의 돌각시, 「오리여자」의 오리, 「애란과의 약속」의 애란, 「눈썹만 보이는 할배」의 돔궁녀, 「흑띠」의 아리따운 처녀, 「그 봄날의 꽃귀신」의 봄처녀 등을 들 수 있다.
무화선녀는 꽃보다도 더 아름다워서, 꽃 앞에서면 꽃이 빛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무화과 이야기」 부분
세상에, 깊은 산속에는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을 한다더니 저렇게 어여쁜 각시가 하필이면 이러한 시간에 초막에 나타날 이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자세히 살펴보니 분명 치마 밑으로 보여야 할 꼬리는 없었습니다.
「관유와 돌각시」 부분
가느다랗게 비명을 울릴만큼 그 여인은 너무나 아름답고 인상적인 모습이었다./고운 이마, 우수에 잠긴 듯한 두 눈동자, 그리고 약간은 앞쪽으로 나온 듯한 둥근 입술… 난렵한 몸매, 스물대여섯, 그런 나이였다.
「오리 여자」 부분
그리고 이어 인기척이 났고, 한 사람의 여인이 내 곁으로 천천히 걸어왔다./얼핏 보아도 입은 옷이며 생긴 모양이 범상치 않았다. 앉는 매무새 또한 정숙하고 고왔으며 은은한 향기도 바위 굴속을 메우리만치 독특했다.
「애란과의 약속」 부분
달덩이같이 고운 목동의 아내가 함박꽃같이 웃으며 사뿐사뿐 걸어온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코앞에 와 닿는다.
「눈썹만 보이는 할배」 부분
그 때 준배 바로 앞에 아리따운 모습의 처녀가 다가왔습니다. 처녀는 먼빛에서도 미인이었습니다.
「흑띠」 부분
돌아다보니까 참으로 요염한 자태의 아가씨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연분홍의 치마저고리에 비췻빛 브로치를 앞가슴에 달고 있는 모습이 꼭 선녀 같았다.-중략- 내가 묻자 그녀는 방긋 웃었는데 가지런한 이가 백옥 같이 예뻤다.
「그 봄날의 꽃귀신」 부분
이처럼 선녀나, 아리따운 처녀, 미소가 아름답고 요염한 자태의 아가씨, 달덩이 같이 고운 여인, ‘비명을 지를만큼’ 아름다운 여인들이 등장한다. 동화에 이런 관능적 미인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어린이 독자보다는 어른 독자들을 겨냥한 포석으로도 보인다.
3. 변신 모티브를 통한 환상의 구현
정진채는 변신모티브를 통해 작품에 환상성을 불어 넣어 스토리의 흥미를 높이고 있다. 수석을 좋아하는 관유가 주워온 돌에서 각시로 변신해 나오는 「관유와 돌각시」의 돌각시, 자생란을 채취하려다 독사의 공격으로 정신을 잃은 화자가 바위굴 속에서 만난 난초의 변신여인 애란, 수영장에서 만나 동화작가인 화자와 함께 을숙도 갈대밭을 찾아가는 오리 여자, 「눈썹만 보이는 할배」에 등장하는 용궁의 궁녀와 옥황상제, 목동의 피리소리를 듣고 용궁궁녀가 변신한 바다여인, 목동이 돌보던 점박이 염소가 변신한 하늘빛 산새 역시 변신 모티브의 화소(話素)들이다.
그때였다./ 언제 물에서 나왔는지 여인이 내 앞에 슬픈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춥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아, 아니요, 아무리 물에 잠겨도 가슴은 그냥 타는걸요.”/ 말을 마치자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중략- ‘그래, 그래.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야. 그건 진정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니까.’/그리고 여인은 강물로 뒤뚱거리며 뛰어들었다./한동안 신나게 물을 저어 강 가운데로 나가다가 드디어 물을 박차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그녀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오리 여자」 부분
「오리 여자」의 화자는 동화작가이다. 수영장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은 화자는 수영장에 간다. 수영교실에서 오리 소리가 들리고 나면 사고가 나고, 앓는 어린이들은 오리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화자인 동화작가는 비밀을 밝히기 위해 잠복을 하게 되고, 어느날 새벽 풀장에 들어와 수영을 하는 미모의 여인을 만나 대화한다.
이 동화는 오리가 여인으로 변신하는 모티브로 짜여 있어 흥미롭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동화속 화자의 환상속에 나타나는 여인이다. 동화작가는 을숙도의 갈대밭에서 일출을 보고 싶다는 여인의 요청으로 함께 을숙도로 간다. 여인은 을숙도에서 두 아이와 남편을 잃었다고 고백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동화작가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놓아둔 덫에 걸려 죽어간 오리들의 시체, 물고기를 먹다가 그것을 미끼로 끼워 놓은 낚싯줄에 걸려 무참히 죽어간 철새들의 사체를 보고 인간이 미워진다. 변신한 여인은 다시 오리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방금 바다에서 솟아오른 붉은 돔은 물을 박차고 솟아올랐다가 첨벙하고 소리를 내면서 도로 바닷속으로 잠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그렇게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은 붉은 돔은 놀랍게도 아름다운 바다 여인으로 몸을 바꾸었다.
「눈썹만 보이는 할배」 부분
이 동화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동화작가인 화자(금방울)는 허공중에 보이는 하얀 눈썹을 발견하고 대화를 한다. 금방울 작가는 하얀 눈썹의 주인공인 할배에게 암소갈비를 대접하고, 그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옛날 달맞이고개에 퉁소를 잘 부는 목동이 살았는데, 퉁소 소리를 듣고 용궁의 궁녀들도 춤을 춘다. 목동은 어느날 만난 거지 노인에게 퉁소보다 좋은 게 있다면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목동의 퉁소 소리에 반한 용궁의 궁녀는 붉은 돔은 목동의 퉁소 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목동에게 다가온다. 목동은 이 바다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목동은 행복에 겨워 염소를 치지 않고 퉁소 부는 일도 멀리한다. 어느날 만난 거지노인은 목동에게 퉁소를 불면 아내의 정체를 알게 될거라고 귀뜸한다.
목동이 보름날 밤에 퉁소를 불자 목동의 아내는 물위로 떠오른 달 속으로 들어간다. 아내를 잃고 슬픈 나날을 보내던 목동에게 새로 변한 꼬마염소 점박이가 나타난다. 새는 퉁소를 불어주면 하늘나라에 가서 목동의 아내를 데려오겠다고 한다. 목동이 애절하게 퉁소를 불자, 하늘빛 새는 달나라로 가서 아내를 데리고 온다. 목동은 달맞이고개에서 선녀가 되어 내려온 아내를 다시 만난다.
돔이었던 궁녀가 여인으로 변신하고, 꼬마염소는 하늘빛 새로 변신한다. 보름날 밤 달속으로 들어가 하늘나라로 갔던 궁녀는 다시 선녀가 되어 달맞이 고개로 내려온다. 이처럼 이 동화는 변신 모티브를 활용하여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배경으로 작가가 창작한 전설담이다. 달맞이 고개에 얽힌 전설은 없다. 다만 달맞이하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에 1980년대에 해운대 구청장이 붙인 고개 이름이라고 한다.
이러한 류의 동화에 등장한 변신 인물들은 화자가 동화작가임을 미리 알고 그에게 희원이나 부탁, 언약을 하게 하는 공통점이 있다. 작품마다 동화작가의 이름은 ‘금방울’로 설정된다. 금방울은 정진채 자신을 지칭한다. 변신의 양상은 다양한데 선녀가 나무로 변신하는 「무화과 이야기」, 식물인 난(蘭)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애란과의 약속」, 돌이 사람(돌각시)으로 변신하는 「관유와 돌각시」, 바위가 사람(돌각시)으로 변신하는 「내가 만난 초록사람」, 뱀이 처녀로 변신하는 「흑띠」 등이다.
“인간들의 가슴에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샘솟게 하는 동화를 써 주세요.”-중략-나는 얼른 오른쪽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애란과의 약속」)
“선생님은 동화작가시고 낙동강의 을숙도를 무대로 한 <청둥오리 일가>라는 작품을 쓰신 분이잖아요? 나는 그 작품을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한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여인은 타월로 몸을 닦고 있었다.(「오리 여자」)
할배는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금방울 자네는 아까 그 이야기 속에 나온 노인을 알고 있겠지. 그 노인이 바로 나야. 요즈음은 하도 믿음이 없어 몸을 감추고 다닌다네. 금방울 같은 동화작가라도 없다면 눈썹도 않아야 되겠지. 어서 옛날처럼 사람들이 참사랑을 지니고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비네, 의심하지 말고.”(「눈썹만 보이는 할배」)
“금방울님, 당신은 지금 참다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냥 허전할 뿐이에요. 마음이 비었다는 건, 우리의 말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로도 증명이 된답니다.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거든요.” 사슴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그 봄날의 꽃귀신」)
“그래,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에 이르기까지 목숨은 소중한 것이지. 그 때 흑띠에게 한 철없던 일을 후회하고 있으니 좋은 데로 가라고 빌어. ‘부디 좋은 데로 가십시오!’라고.”/그 때 준배는 처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흑띠」)
“욕심이 있는 편인가요, 없는 편인가요?”/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중략-“욕심이 있는 편입니다.”/내 대답을 들은 돌각시는,/“당신은 처음부터 잘못 찾아온 손님이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보자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할 때 내 대답은 ‘천만에요’였던 것을 기억해 주세요. 그것이 보통 사람과 초록사람의 차이인 것 같군요. 편안히 가세요.”/하고 인사를 마치자 바위 속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내가 만난 초록사람」)
나는 얼른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여인의 손가락은 찬 듯한 느낌이었으나 금방 우리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하나가 된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졌다./이름 모를 향기와 아늑한 분위기가 구름 위에 둥실 나를 뜨게 했다./나는 너무도 황홀하여 눈을 지그시 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애란도 바위굴도 사라지고 없었다./내 손에는 춘란 사피가 뿌리째 들려 있었고, 노란 바탕 위에 초록빛 난점이 하르르 떨리고 있었다.(「애란과의 약속」)
그의 동화에는 시에서 특별히 요구하는 언어적 자의식(自意識)6)과 소설 장르에서 필요로 하는 서사 구성능력이 빈번히 감지되고 있다. 정진채 동화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감각과 속도감 있는 서사의 전개 방식이다. 또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건의 치밀한 구성이다. 이는 시와 소설, 동화 장르를 두루 섭렵한 정진채의 문학적 역량이 발휘된 결과라 하겠다.
4. 불교적 사유의 철학동화
정진채는 일찍이 불교에 귀의했다. 그 때문에 그의 동화에는 불교의 정토사상이 많이 녹아있다. 「연밥」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그의 동화 세계를 밝히는데 단초가 되는 작품이다. 진흙 속에서 연잎이 솟아나와 연꽃이 피고, 연밥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시적 판타지로 그리고 있다. 미시적 관찰을 통한 사실적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맑고 깨끗한 세상의 실현을 추구하는 불교의 정토사상을 잘 담아내고 있다.
활짝 열린 하늘./부드러운 바람./시원스레 소곤대며 내리는 빗방울./빗방울로 반짝반짝 세수를 하노라면, 잎들은 정신이 초롱초롱 맑아집니다./별들이 연못에 내려오는 밤이면 꿈처럼 아름답고 서러운 세상 얘기들이 연잎에 이슬로 맺힙니다./(무엇인가 나도 아름다운 꿈을 피워야겠다!)/연잎들은 안테나가 되어 진흙 속의 줄기로 생각을 내려보냅니다./진흙 속의 줄기는 리시버처럼 연잎들의 얘기를 한데 모읍니다. 줄기 속은 길게 누운 여러 개의 방마다 생각들이 모입니다./(어떤 꿈을 내보낼까?)/진흙 속의 줄기는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연밥」 부분
작가는 넓은 연잎을 초록빛 손에 비유하고, 연분홍으로 피어나는 연꽃을 피우기 위해 하늘에서 무지개가 내려온 것으로 설정했다. 주지하다시피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연꽃 한 송이로 불교의 궁극적 진리를 다 표현할 수 있다. 흔히 연꽃을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로 수식한다. 연꽃은 깨끗한 물에서는 피지 않는다. 더럽고 오염된 물에서만 피어나지만, 그 남루한 환경을 극복하고 아름답게 승화하는 꽃이기에 부처처럼 숭상을 받는다.
연못을 찾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갔습니다./이즈음은 개구리의 울음소리도 멎어버린 듯 했습니다./연꽃잎이 뚝 뚝 떨어져 작은 꽃잎배로 물 위를 떠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꽃잎의 옛 자리에는, 보살님의 은혜에 안기듯 둥근 방의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은행알처럼 흰 속살로 밤알처럼 고동색의 윤기 흐르는 껍질에 싸여 연밥이 더 높은 꿈으로 익어갔습니다.
「연밥」 부분
「연밥」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동화는 진흙 속에서 연잎이 솟아 나와 연꽃이 피고 드디어 연밥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시적인 문체로 그리고 있다. 적절한 의인화와 생태적 접근과 미시적 관찰을 통한 사실적 묘사, 철학적 메시지의 제시로 문학성을 높이고 있다. 연꽃은 화과동시(花果同時)이다.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연밥(蓮實)”이라 하는데, 꽃은 열매를 맺는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원인(因)과 결과(果)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인과(因果)의 진리는 곧 불교교리의 근본이자, 가르침의 정수이다. 연꽃 봉우리는 합장한 모습과 똑같다. 사람 얼굴에서 피어나는 웃음꽃이나, 두 손을 고이 모아 가슴에서 피어나는 합장 모습은 아름다운 연꽃 그 자체이다. 합장이 피워내는 가슴의 연꽃은 부처와 중생이 하나가 되고,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될 때 피어나는 가장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인 것이다.
「무화과 이야기」는 무화선녀가 극락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다시 인간 세상에 이르는 노정 (路程)을 통하여, 무화선녀가 한그루 무화과나무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열매 맺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동화는 대승불교적7)이며 원효의 정토사상이 바탕을 이룬 작품이다. 정토사상은 부처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정토의 실현을 추구하는 불교교리이다. 정토란 괴로움으로 가득찬 세상인 예토의 반대 개념으로 아미타불의 서방 정토가 대표적이다. 정토는 청정한 불국토로 즐거움으로 충만한 극락세계이다. 본원력이란 불·보살이 이타적 자비심으로 세운 서원의 힘이다. 정토사상은 이 힘에 의지해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의 경지에 도달함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으로, 자력신앙이 아닌 타력신앙의 토대가 된다. 우리나라는 신라의 원광에 의해서 들어왔으며 이후 원효 등 여러 고승들의 노력으로 더 깊은 의미와 체계가 갖춰진 신앙으로 이어져 왔다.
무화선녀가 눈이 동그래져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까, 연꽃 한 송이가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오! 연꽃이었구나. 그래, 왜 불렀지?”/무화선녀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반가웠습니다./“하도 무화선녀님이 딱해서….”/“딱해서?”/“그래요. 심심해하시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연꽃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흔들렸습니다. 「무화과 이야기」 부분
기아지옥의 가마솥 안으로 옥황상제의 복숭아를 던져, 불쌍한 중생을 구하려는 무화선녀의 마음을 옥황상제님은 몰라주시는 것 같았습니다./그날, 무화선녀가 바구니에서 쏟아 놓은 복숭아들이 막 가마솥 안 사람들의 손에 닿기 전이었습니다./“고얀지고 무화는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네가 좋아하는 꽃을 다시는 만질 수 없는 한 그루 나무가 될 것이니라.”/옥황상제님의 무서운 호령이 무화선녀의 귀를 때렸습니다.
아픔이 맺혀 생채기가 진 자리마다 볼록볼록 초록빛 열매가 커 갔습니다./마침내 무화선녀 나무의 힘줄이 거칠게 선 손바닥 위에 향기 높은 과일이 들리게 되었습니다./무화선녀의 넋이 검은 자줏빛 열매로 익은 것입니다./소년이 기쁜 얼굴로 노인의 꿈나무에서 열매를 따던 날, 비로소 무화선녀는 가슴이 짜릿하도록 행복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무화과 이야기」 부분
무화선녀는 옥황상제로부터 무화라는 이름을 받고 극락에서 행복하게 산다. 어느날 연꽃의 이야기를 듣고 지옥 구경을 하러 옥황상제 몰래 내려간다. 지옥에 온 무리들로부터 인간세상에는 굶주리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을 듣는다. 무화선녀는 옥황상제의 복숭아밭으로 가서 복숭아를 따 구제하려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산다. 결국 인간세상으로 쫓겨나 꽃도 피우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가 된다. 이 동화에서 묘사한 극락은 늙어가는 괴로움도 없고, 병드는 아픔도 없고, 죽는 슬픔도 없는 곳이다. 배고픈 일도 배부른 일도 없이 따분한 일상이 싫증이 나자 무화선녀는 옥황상제 몰래 지옥으로 내려 간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옥황상제는 도교적 인물이고 염라대왕은 불교적 인물이다. 극락은 아미타불이 살고있는 정토를 말한다.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다. 민간 신앙에서는 흔히 도교와 불교가 혼재하기도 한다. 이 동화의 스토리는 다분히 불교적이지만 무화과나무는 성서8)에 등장하는 나무이다. 무화과나무는 성경에 60회가 넘게 나온다.
그런데 정진채는 이 무화과 화소를 불교 이야기로 새롭게 차용하고 있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인간세상으로 쫓겨난 무화선녀는 어느 산기슭에 내려와 한 그루 나무로 변한다. 그 곳 초가에는 눈먼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살고 있다. 무화선녀 나무는 다른 나무들처럼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을 슬펐지만, 참고 견디는 법을 노인과 소년에게 배운다. 마침내 무화선녀의 넋이 무화과가 되어 자줏빛 열매로 익게 된 것이다.
5. 동양적 세계관과 토속 신앙
정진채 동화에는 하늘을 지배하는 옥황상제와 바다를 지배하는 용왕을 비롯하여 선녀, 신선, 신령, 귀신 등이 많이 등장한다. 이는 어린 시절 그의 가정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어머니는 민속신앙에 물든 불자로 어린 그를 냇가 바위 옆에 데려다 놓고 용왕제를 올렸다.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용왕의 아들9)이라 불렀다.
정진채 동화선집을 예로 들어도 「무화과 이야기」의 무화선녀, 신선들의 귀여움을 받던 「하얀 꽃사슴」, 「관유와 돌각시」에서 학을 타고 내려오는 백발의 신선, 「애란과의 약속」에 나오는 운당 신선의 딸 애란, 「눈썹만 보이는 할배」의 하늘나라 옥황상제, 「그 봄날의 꽃귀신」의 봄처녀 귀신 등이다.
내가 손전등의 스위치를 올리고 바라본 얼굴! 그것은 분명히 처음 보는 여자였다./“아아아아-.”/하고 가느다랗게 비명을 올릴 만큼 그 여인은 너무나 아름답고 인상적인 모습이었다./고운 이마, 우수에 잠긴 듯한 두 눈동자, 그리고 약간은 앞쪽으로 나온 듯한 둥근 입술… 날렵한 몸매, 스물대여섯 그런 나이였다. 「오리 여자」 부분
처녀는 준배의 둘레를 세 바퀴나 돌면서 천천히, 그러나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너를 해치려던 마음을 돌이키지 마. 원한은 또 원한을 낳는 거니까. 하지만 앞으로 생명은 그 어느 것이나 소중하다는 걸 잊지 말아 주렴. 잘 잊거라. 그리고 네 행복을 빌게.”
처녀는 말을 마치자 모습이 흐물흐물 무너지더니 안개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흑띠」 부분
지금 내 기억으로는 초록사람의 바위 동굴을 나올 때는 구멍이 작아서 혼이 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들어갈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일이었지요./ 아무튼, 초록사람은 유별나게 사는 게 아니라, 편안하게 정말 편안하게 산다고 나는 요즈음 자꾸 그런 생각을 합니다./ 초록사람을 만나 뒤부터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 욕심들은 줄이기로 했습니다./ 욕심을 덜어내어 조금씩 버리니까 조금씩, 조금씩 편안해지더군요. 「내가 만난 초록 사람」 부분
이 동화에서 초록 숲속에 사는 초록 사람은 온몸이 초록색이고 300살을 먹었는데도 어린 소년처럼 보인다. 동화의 화자가 산을 오르다 작은 단풍나무 가지 하나를 잡고 흔들었는데, 그게 초록 사람의 팔목이다. 그 초록 사람은 아기만한 키에 아기 같은 얼굴이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바위속이나 나무속은 물론 사람의 마음속도 드나들 수 있는 초인이며, 그와 함께 사는 배우자(각시) 또한 신통력을 발휘한다. 이 동화는 과욕을 부리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오래 살고 싶으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주제가 녹아 있다.
할배는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금방울 자네는 아까 그 이야기 속에 나온 노인을 알고 있겠지. 그 노인이 바로 나야. 요즈음은 하도 믿음이 없어 몸을 감추고 다닌다네. 금방울 같은 동화작가라도 없다면 눈썹도 보이지 않아야 되겠지. 어서 옛날처럼 사람들이 참사랑을 지니고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비네. 의심하지 말고.”/할배는 그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는 전래동화의 전승적 판타지를 수용하여 이야기의 흥미를 높이려는 작의로 보인다. 옥황상제가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달녀와 목동」, 「반디야 반디」, 「무화과 이야기」 등이고, 용왕이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동백꽃 이야기」, 「인어 이야기」, 「먹보와 문어탈」 등이다.
정진채 동화에는 노인 캐릭터도 자주 등장한다. 차림새는 신선처럼 고상하거나 단아하지 않고 거지 형상이다. 하얀 수연이 길고 눈썹이 하얀 모습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동백꽃 이야기」와 눈썹만 보이는 할배이다. 「동백꽃 이야기」에서 눈썹이 하얀 거지 노인은 아버지인 용왕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인어 공주의 소원을 들어준다. 지팡이를 바위에 꽂고 치료법을 알려준다. 인어공주는 결국 동백꽃이 되고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인어 이야기」에서 공주의 병을 고쳐주는 인물도 거지 노인이다. 거지 노인은 행색은 남루하지만, 거지로 변장한 도인이나 초인이라 할 수 있다.
6. 생태 환경과의 상생 모색
정진채 동화 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인간과 자연생태의 상생, 더 나아가 생태환경에 대한 애호사상이 깃든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제를 수용한 작품들은 주로 1990년대를 전후해 발표한 동화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인간들의 가슴에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샘솟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담은 「애란과의 약속」, 생태 환경 훼손에 대한 경각심을 환상과 현실의 조합으로 엮어낸 「오리 여자」, 환상적 상상력을 매개로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에 이르기까지 목숨은 소중한 것임을 강조한 「흑띠」, 사육에 길들여져 야생의 본성을 잃은 새에 대한 안타까움과 인본주의를 질타한 「새를 사랑하는 사람」 등이다. 그의 동화에는 방울새, 콩새, 딱새, 박새, 어치, 까치, 메새, 종다리, 할미새, 때까치, 산솔새, 황여새, 크낙새, 팔색조, 개개비, 지빠귀, 오목눈이, 휘파람새, 딱따구리, 뜸부기, 물닭, 물총새 등 수많은 새가 등장한다.
“난 죽을 때까지 내 뿔을 지킬거야.”/아기 사슴은 다시 한 번 아빠 사슴의 뿔을 쳐다보았습니다. 무지개 한쪽 끝이 스르륵 풀려 아빠의 뿔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 때였습니다./“넌 꼭 뿔을 지켜라. 아무에게도 주어서는 안 돼!”/ 아빠 사슴이 울부짖듯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사슴 목장의 관리실 앞으로 자가용이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중략-/그렇게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르자, 아빠 사슴이 비틀거리면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흐윽, 아빠아... 뿔!”/ 아기 사슴은, 뿔을 잃어버린 아빠 사슴의 머리 위에서 새빨갛게 응어리져서 번져 나오는 분노를 읽었습니다. 「하얀 꽃사슴」 부분
꽃사슴 목장에서 하얀 아기 사슴이 태어났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습니다.-중략- 사람들이 하얀 꽃사슴을 구경하려고 구름처럼 울타리 꼍으로 몰려들자, 꽃사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얀 아기사슴을 에워쌌습니다. -중략- “와아!”하고 울타리 안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사슴들은 때를 만나듯 울타리 넘어 초록빛 산등성이로 치달렸습니다./ 꽃사슴의 무리 앞에 개선장군처럼 하얀 꽃사슴이 눈에 띄었습니다./“야아, 하얀 꽃사슴이다!”/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하얀 꽃사슴」 부분
「하얀 꽃사슴」은 녹용을 채취하러 사슴목장에 몰려드는 인간들이 이기심을 고발한 작품이다. 아기 사슴은 관리인에게 끌려가 사슴을 잃고 바틀거리는 아빠 사슴을 목도하고 분노한다.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는 속설을 믿고 녹용을 잘라 피를 마시고, 보약을 한다며 뿔을 채취해 간다. 그러자 사슴들은 자신들의 뿔을 지키게 해달라고 하늘을 향해 기원한다. 얼마후 사슴목장에 털빛이 하얀 꽃사슴이 태어난다. 사슴들은 하얀 꽃사슴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들의 명예를 지켜주는 사슴이 되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이 하얀 꽃사슴을 구경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울타리가 무너지고 만다. 그러자 갇혀 있던 사슴들은 하얀 꽃사슴을 앞세우고 산등성이로 치달리며 막을 내린다.
“자아, 이제 너희들은 저 하늘 높이 마음껏 날 수도 있고, 저 초록빛 들판에서 마음 놓고 먹이를 찾아 먹을 수 있다. 어서 날아가거라.”/나무꾼은 남몰래 좋은 일을 할 때처럼 기뻤습니다./조공이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산비탈의 움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조공은 새가 보고 싶어서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움막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무척이나 피로하였습니다./“아,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 그동안 잘 있었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를 거야. 너희들이 나를 마중하러 나왔구나.” -중략- 조공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새장 안팎에 즐비하게 널린 새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습니다. 새들이 그사이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를 사랑하는 사람」 부분
이 동화에는 새를 몹시 사랑하는 조공(鳥公)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조공은 어릴 적부터 새를 좋아하여 형제들보다 새하고 놀기를 더 좋아했다. 집에서 잡은 참새를 가지고 놀거나 대숲에서 잡은 굴뚝새를 가지고 밥먹는 것도 잊은 채 즐겁게 노는 인물이다. 조공은 결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숲 속의 움막 근처에 크고 작은 수많은 새집을 지어 놓고 새를 기른다. 조공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새들에게 줄 먹이를 구하러 다닌다. 낱알이나 산열매, 여러 곤충이나 벌레, 물고기까지 잡아다 나른다. 마침내 조공은 새들의 말을 알아듣게 되고, 새들도 조공의 말을 알아듣게 된다.
세월이 흘러 조공이 아버지상을 당하자, 나무꾼에게 새들을 부탁하고 장례를 치르러 간다. 늙은 부모와 처자를 돌봐야 하는 나무꾼은 새를 돌볼 수가 없게 된다. 나무꾼은 새들을 굶겨 죽이는 것보다 날려 보내자는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장문을 연다. 하지만 새들은 혼자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려 날아가지 않는다. 이 동화는 길들여지는 것의 무서움을 경고하고 있다.
그의 동화는 자연 앞에서 겸손하다.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 대상물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과 함께 호흡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배려란 곧, 인간 자신에 대한 배려임을 그의 동화는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다.
Ⅲ. 나오는 말
정진채 동화의 주제를 집약하면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의 정신이다. 정진채는 동식물의 생명과 삶의 터전이 경시되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불교적이고 민속신앙적 성찰을 통해 인간의 원죄를 깨닫고 수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자기희생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눔과 배려의 실천이야말로 가치있는 삶임을 역설하고 있다.
정진채 동화에는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거나,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초인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들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인 존재로 설정되고 있다. 생명을 경시하거나, 욕심이 가득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초인 혹은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나 동물은 그런 인간을 응징하거나, 뉘우치게 하며, 용서해 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정진채가 작품 속에 설정한 공간적 배경은 오염되지 않고 깨끗한 순수의 공간으로 바다속, 산골, 골짜기, 저수지, 전원 등이 가장 많이 나타나 희망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그의 동화는 부조리하고 이기적인 세상사를 고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진실된 인간성의 회복과 삶의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무화과 이야기」, 「몸빛」을 비롯해서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과 헛된 욕망에 대한 경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관유와 돌각시」, 「하얀 꽃사슴」, 「내가 만난 초록사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작품들은 인간사회의 제반 문제를 작가 특유의 동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다.
정진채의 동화는 인간의 욕심과 부조리로 얼룩진 세상을 설파하고 치유하려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이기적이고 사악한 세상인심을 적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또한 인간과 자연은 종속관계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생관계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의 동화 제목에는 ‘이야기’라는 보조 명사가 붙은 작품이 많다. 「동백꽃 이야기」, 「남해바다 연꽃이야기」, 「인어 이야기」, 「꽃사람 이야기」, 「덕보 이야기」, 「무화과 이야기」, 「바다거북 이야기」, 「작은 새 이야기」, 「마남 이야기」, 「하늘사람 이야기」 등이다. 이는 서사가 풍부한 동화창작을 선호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그는 서정적인 소재로 독자의 마음에 따뜻한 위안을 줄 수 있는 장르는 아동문학이라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동시보다 동화 집필에 중점을 둔 이유는 언어를 축약하고 꾸밈말이 중요한 동시에 비해, 표현하려는 바를 솔직하게 풀어쓸 수 있는 동화가 더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10)이다.
- 1) 태어날 적부터 어머니의 팔자에는 내가 없다하여 어머니는 나를 용왕에게 팔았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나를 용왕의 아들이라 불렀다. 「내 문학의 여정」, 『정진채 동화선집』(지만지) 187쪽
- 2) 어머니는 보름날이나 명절에는 동네 앞 시냇물 가운데 놓인 큰 바위 옆에서 나를 데리고 용왕을 먹였는데(용왕에게 대접한다는 뜻) 그럴 때마다 나는 색 헝겊이 둘러쳐진 바위와 그 아래 시퍼렇게 맴도는 시냇물에 압도되어 부지런히 절을 올리고 좋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위의 책 187~188쪽
- 3)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누가복음 9장 24절).
- 4) 쓰기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게 동화입니다. 동화는 아이들에게도 읽혀야 하지만, 독자층이 넓어서 어른들에게 읽혀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아이들만 읽는 동화는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연밥」의 마지막 장면에는 노승이 나와서 목탁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이들은 그 심오한 뜻을 알기 힘듭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른들한테 물어 보면 됩니다. 그렇게 온 가족이 아이, 어른 없이 동화를 읽게 되는 거지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의 작업」, 션(SEAN) 브런치북 인터뷰
- 5) 원형들 중에는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가 있다.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이고,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이다.
- 6)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에 대한 의식
- 7) 대승불교(大乘佛敎)는 대승의 교리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종교로, 자기자신만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치지 않고 많은 중생의 구제를 목적으로 한다.
- 8) 창세기에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자기도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는 구절이 있다.
- 9) 어머니의 팔자에는 내가 없다하여 어머니는 나를 용왕에게 팔았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용왕의 아들이라 불렀다. 어머니는 보름날이나 명절에는 동네 앞 시냇물 가운데 놓인 큰 바위 옆에서 k를 데리고 용왕을 먹였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색헝겊에 둘러쳐진 바위와 그 아래 시퍼렇게 맴도는 시냇물에 압도되어 부지런히 절을 올리고 좋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정진채 동화선집, 지식을만드는지식 177~178쪽
- 10)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의 작업」,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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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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