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문학평론 2024년 여름호(제191호)
공존과 돌봄의 미학 ― 동시집 『별꽃 찾기』와 『발의 잠』을 중심으로
현재 인류는 돌봄 균형이 깨진 세계에 살고 있다. 인간은 햇살, 공기, 물, 그리고 다양한 식물과 동물에 의존해서 살아왔다. 자연은 인간을 돌보고 있었건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상호 돌봄을 하지 못하고 자연 위에 군림하며 착취하기 시작했다.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돌봄 위기는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인류의 지속이 가능하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1) 이것은 비단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돌봄 필요 내지는 방식이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 평등, 자유에 대한 기여2)와 일치해야 함은 신새별 시인의 작품에 두드러지게 표출되는 의식 중 하나이다. 다음 작품들을 통해 살펴보자.
나무 물 마시는 소리 들었다!
에이, 거짓말.
‘숲 체험’ 하러 가서
나무둥치에 청진기를 댔더니,
꾸루륵 꾸르륵 했어.
나무가 물 먹는 소리로
들
렸
어.
물 마시고 하늘 높이 걸어가는
나무의 발자국 소리와도 같았어.
목말라 칭얼대는
나뭇잎
꽃잎
열매들
달래 주러 가는 소리.
- 「나무 물 먹는 소리」 전문
위의 동시에서 화자는 숲 체험 중 나무둥치에 청진기를 대어본다. 화자는 청진기를 통해 꾸르륵 꾸르륵, 나무가 물 먹는 소리를 듣는다. 일반적으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러나 시인은 꾸르륵 꾸르륵 소리를, 나무가 물마시고 하늘 높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에 비유한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뻗쳐나간다는 거다. 식물은 땅 속 깊은 뿌리에게서 영양소를 공급받아 자라난다. 뿌리는 흠뻑 내린 비를 머금고 있다가 나뭇잎, 꽃잎, 열매들에게 골고루 나눠준다. 물을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려야 하는 뿌리는 얼마나 힘이 들까. 그러나 뿌리는 나뭇잎과 꽃잎, 열매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러한 돌봄 이미지는 조건 없는 봉사와 희생을 말한다. 목말라 칭얼대는 나뭇잎, 꽃잎, 열매들을 달래 주러 가는 나무의 이미지 형상화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적지 않은 가르침을 준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고 욕망을 달성하기보다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 의식은 다음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여름이 떠나면서
가을 산한테 내어준 숙제,
-잎들에겐 고운 옷 입혀 주고
풀벌레 울음 잘 달래줄 것.
가을 잎들 떠나면서
겨울나무한테 내어준 숙제,
- 잎눈 틔우는 시간 맞춰 놓기.
풀벌레 울음 떠나면서
겨울 산한테 내어준 숙제,
-벌레알 잘 품어 줄 것.
누가 감독하지 않아도
꼬박꼬박 해 낸 계절 숙제.
- 「계절 숙제」 전문
위의 동시에서는 사계절 순환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시인은 여름, 가을 산, 가을 잎, 겨울나무, 풀벌레, 겨울 산을 인격화하여 인간의 삶과 관련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돌봄의 대상을 주시한다. 여름은 가을에게 “잎들에게 고운 옷 입혀 주고 풀벌레 울음 잘 달래 줄 것”을 당부한다. 가을 잎은 겨울 나무에게 “잎눈 틔우는 시간 맞춰 놓을 것”, 풀벌레는 겨울 산한테 “벌레알 잘 품어 줄 것”을 부탁한다.
사실 그들은 누가 부탁하거나 당부하지 않아도 돌봄이 필요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힘들다는 내색 한번 없이 해낸다. 무엇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감독을 하기 때문에 돌봄을 수행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서로를 돌보면서 공생하고 다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행위이다. 시인은 아무런 대가 없이 “꼬박꼬박 해 낸 계절 숙제”를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이 자연을 닮아 공생의 삶을 위한 돌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다음 작품에서도 시인은 자연과 인간을 대비하는 것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어깨동무하고 몰려다니는
구름들.
어깨동무하고 뻗어 있는
산들.
어깨동무하고 누워 있는
밭이랑들.
강물도, 파도도
파란 어깨동무.
어깨동무하기
사람들만 힘든가 보다.
- 「어깨동무하기」 전문
하늘에 몰려다니는 구름, 서로 어우러진 산, 어깨를 붙이고 누운 밭, 강물과 파도도 서로를 돌보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연에서 “어깨동무하기 사람들만 힘든가 보다”라는 시구는 의미심장하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점점 개인주의로 치닫는 인간 세계를 단도직입적으로 꼬집기 때문이다.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든 돌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모두 돌봄을 받아 왔고, 받고 있으며, 앞으로 받을 것이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의존하고 아프고 죽는 우리에게 돌봄은 삶의 기반 그 자체다.3) 돌봄의 기쁨이 복원되는 사회가 돌봄이 살아있는 사회일 것이며, 인간은 돌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확장되고 타인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4) 돌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편안함과 만족을 넘어 “어깨동무” 시구와 같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공동체 의식의 생산일 터이다. 다음 작품은 미처 주변을 돌보지 못해 반성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1억 2천만 년 전의 나무가
화석 박물관
의자가 되었다.
<1억 2천만 년 전 살았던 나무가
화석이 되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었다 가세요.>
그 의자에 앉아 쉬면서
거울을 본다.
‘넌 누구의 의자가 되어 주었니?’
앉아 있기 미안해 얼른 일어섰다.
엉거주춤 서 있는 거울 속 내 모습
화석처럼 굳어 있다.
- 「화석 의자 - 화석 박물관에서」
신새별 시인의 시에서 돌봄의 문제는 비단 인간과 자연, 생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의자를 소재로 한 동시에서도 그의 돌봄 의식은 어김없이 표출된다. 사물인 의자와 인간을 대비하면서 인간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위의 시는 앞서 언급된 시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다소 직설적인 어조를 드러낸다. 화석이 된 나무 의자에 앉아 쉬면서 거울에 비친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내면의 나는 화석 의자에 앉아 있는 나에게 “넌 누구의 의자가 되어 주었는지” 묻는다.
돌봄의 참여 관점에서 볼 때, 작품 속 화자는 의자에 앉을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다. 누군가가 편히 쉴 수 있게끔 돌봄을 실천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4연에서는 그에 대한 후회스러운 화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성의 마음과 동시에 “내 모습이 화석처럼 굳어 있다”라는 시구는 화자의 깨달음과 향후 돌봄에 대한 실천 의지를 보여준다.
맹물 더하기 맹물은?
맹물.
맹물 더하기 설탕은?
설탕물.
맹물 더하기 소금은?
소금물.
곁에 온 것들을 안아 주었더니,
그게 내 이름이 되었어.
- 「맹물」 전문
돌봄 관계에서 상호의존은 일반적인 것이며, 이는 동시에 호혜적이다.5) 위의 동시는 돌봄 관계에서 상호의존성을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맹물과 설탕은 스스로 설탕물이 되지 못한다. 소금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무엇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오로지 관계에 의해서 의미가 부여된다. 시인은 이 같은 서로의 돌봄을 인간 공존의 삶으로 확대한다.
개인의 권리나 개인의 선호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인식한 것은 인간을 상호의존적으로 바라본 결과이다.6) 인간 또한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은 자명하다. 이것은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 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본질적으로 인류는 "돌봄이라는 노동이 없이는 하나의 종(種)으로서 존속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긴 영유아기 동안 인간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돌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거나 쇠약해지거나 장애를 입고 있을 때 인간은 돌봄을 필요로 하며, 생애의 마지막, 노년기에 도달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령화로 인한 돌봄에의 의존은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돌봄은 "결국 나의 문제로 귀착"된다.7) 그런 면에서 "곁에 온 것들을 안아 주었더니, 그게 내 이름이 되었어."라는 시구는 의미심장하다. 주변을 돌아보고 돌봄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먼 바다에
오똑 솟은 꽃바위섬.
고래도
미역귀도 다 잠기는데,
넌 왜 안 잠기니?
달도 잠기고
구름도 잠기고
바람도 잠겨 일렁이는데,
넌 왜 안 잠기니?
파도 찰싹이게 하려고?
새들 놀게 하려고?
꽃들 피게 하려고?
- 「꽃바위섬」 전문
대상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곧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연민을 보낼 때 상대의 고통에 동참하게 되며 자연스러운 자애심이 고통받는 사람에게로 흐른다.8) 그런 면에서 위의 동시는 함의하는 바가 크다. 1연에서처럼 바다에 꽃바위섬은 언제나 오똑 솟은 모습이다. 왜일까? 시인은 꽃바위섬에게서 주변의 것을 돌보려는 따뜻한 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파도와 새들과 꽃들을 위한 행위이다. 꽃바위섬이 없으면 파도는 어디에서 찰싹거리며 놀까? 새들은 훨훨 바다 위를 날다가 어디에서 쉴까? 또 꽃들은 피어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헤맬 것이다. 이들을 돌보느라 꽃바위섬은 늘 빠끔히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인간 또한 타인과의 돌봄에서 분리될 수 없는 시기와 스스로 돌봄을 요구하고 스스로 제공하는 시기 사이에서 살아간다.9) 그런 면에서 인간은 타인의 돌봄으로 생을 시작하고 마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 다음 작품도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다.
강물에 뜬
보름달
징처럼 흔들린다.
그 징을
방아깨비가 때때로 울리고
잎들이 떨어지면 울리고
풀벌레들 악기 들고 나와 울린다.
강물에 번쩍번쩍 번지는
보름달의 징소리.
- 「우리나라 가을 · 3 - 강물」 전문
시인은 강물에 뜬 보름달을 징에 비유한다. 민속 악기 중의 하나인 징은 소리를 낼 때 비로소 존재감이 드러난다. 그러나 혼자서는 소리를 낼 수 없다. 징을 울려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눈여겨본 시인은 방아깨비, 잎들, 풀벌레들을 불러 모은다. 방아깨비가 높이 뛰어오르기를 반복하며 징을 울리고 보름달 위로 떨어지는 잎새가 또다시 징을 울린다. 풀벌레들은 징소리에 맞춰 제각기 악기 소리를 내는 것으로 화음을 맞춘다.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보름달은 강물이 번쩍번쩍 빛이 번지도록 징소리를 낸다.
징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다. 작품에 표출된 공존과 돌봄의 모습이 결코 녹록한 것은 아니다. 돌봄이 필요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아동문학에서 돌봄의 주 대상은 어린이일 터이다. 다음 작품을 통해 살펴보자.
내내 따라다니며
뜨겁게 하더니,
내내 쳐다보지도 못하게
높이높이 떠 있더니,
서산에
내려앉고 나서야
내 눈을 맞춰 준다.
- 「해 · 2」 전문
세상의 낮은 것과 소통하기 위해서 허리를 숙이고 눈높이를 낮춰야 함은 자명하다. 힘없고 소외된 사람은 물론 어린이들을 돌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위의 시에서 화자를 어린이로 가정하면, 해는 어른일 가능성이 있다. 어른은 어린이를 “내내 따라다니며” 어른이 생각하는 잣대에 맞춰 줄 것을 기대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어른이 바라는 것들은 “내내 쳐다보지도 못하게 높이높이 떠 있어” 어린이를 힘들게 할 뿐이다. 어린이의 ‘돌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산에 내려앉고 나서야 내 눈을 맞춰 준” 해처럼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그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제언한 작품이라 하겠다. 다음 작품에서도 어른의 욕심으로 주눅이 든 어린 화자가 등장한다.
“작은 잎은 떼어 버리고
솎아 줘야 잘 자라는 거야.”
우리 엄마
내가 좋아하는 발레도 똑,
전래놀이도 똑,
상춧잎 솎듯이 똑똑 잘라버렸다.
“엄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에서 돋아나요?”
- 「상춧잎 솎듯이」 전문
위의 시에서 어린 화자가 좋아하는 발레나 전래놀이는 그의 엄마에게 사소한 취미에 그칠 뿐이다. 이를테면 수학이나 영어 공부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엄마는 발레 학원과 놀이 학원을 똑, 끊어버린 거다. 시인은 이것을 “작은 잎은 떼어 버리고 솎아 줘야 잘 자라는 거”라는, 평소 엄마가 하시던 말씀에 비유한다. 그러나 화자가 좋아하던 발레와 전래놀이를 못하게 된 상황에서 엄마의 말씀은 모순이 된다. 화자에게 작은 잎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화자가 좋아하지 않거나 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잘 키워야 하는 잎은 뭘까. 바로 발레나 전래놀이다. 그러나 어른은 그들의 잣대에서 작은 잎을 발레와 전래놀이라고 단정 짓는 게다.
그런 면에서 “엄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에서 돋아나요?”라고 묻는 화자의 음성은 더욱 안타깝고 절실하다. 이처럼 ‘보살핌’과 ‘돌봄’의 이유로 권리를 행사하려는 어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대리만족을 위한 대상물로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이것이 과연 정당한 돌봄인지, 어른의 반성을 촉구한 작품이라 하겠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도 그렇다. 그러나 저마다의 속도가 있으니 그것을 믿고 기다려주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다음 작품에서도 표출된다.
느려도 간다,
상춧잎 갉아먹고
느릿느릿,
녹색 똥 누고
느릿느릿.
느려도 한다,
읽기 쓰기
느릿느릿,
실로폰도
느릿느릿.
달팽이표 아이들도.
- 「달팽이표」 전문
위의 시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소위 말해 느린 아이들이다. 시인은 느린 아이들을 달팽이에 비유한다. 성격 급한 어른들 눈에는 달팽이표 아이들이 멈춰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도 나름, 천천히 삶을 배우면서 느려도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달팽이표」는 조급한 어른의 다그침이 오히려 아이들을 망칠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은 물론 어린이를 향한 ‘돌봄’은 기다림임을 피력한다. 어린이의 조력자로서 역할을 다하면서 그들이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돌봄’임을 제언한 작품이라 하겠다.
살펴본바, 신새별 시인은 “현재의 삶을 변모시킬 수 있는 돌봄의 잠재성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10)을 보여주는 작품을 꾸준히 창작해 왔다. “서로를 함께 돌보는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함께 돌봄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치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위해서도 돌봄에 많은 관심과 신경을 써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 1) 조한진희 외, 『돌봄이 돌보는 세계』, 동아시아, 2022, 9~10쪽.
- 2) 조안 C.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김희강 · 나상원 역, 아포리아, 2014, 73쪽.
- 3) 조기현, 『새파란 돌봄』, 이매진, 2022 참고.
- 4) 조한진희 외, 앞의 책, 12쪽.
- 5) 에바 페더 키테이, 『돌봄: 사랑의 노동』, 김희강 · 나상원 역, 박영사, 2021, 85쪽.
- 6) 버지니아 헬드, 『돌봄: 돌봄윤리』, 김희강 · 나상원 역, 박영사, 2017, 29~35쪽 참고.
- 7) 린치, 캐슬린., 『정동적 평등: 누가 돌봄을 수행하는가』, 김순원 역, 파주: 한울아카데미, 2016, 7쪽.
- 8) 크리스토퍼 K. 거머, 『셀프 컴패션』, 한상호 역, 아름드리미디어, 2009, 53~54쪽.
- 9) 조안C.트론토, 앞의 책, 32쪽.
- 10) 위의 책, 28~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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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908년 <소년> 창간호에 실린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한국 동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어느덧 한국 동시의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었다. 한국 동시가 걸어온 길을 찬찬히 돌아보니, 각 시대의 하늘마다 별이 되어 빛나는 작품이 많다. 이것들은 모두 앞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동시인들이 내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남겨준 귀중한 정신문화유산이다. 각 시대를 살다 간 시인들을 떠올리며 대표 작품을 음미해 본다. 비록 어린이를 독자로 쓴 동시이지만 어느 작품인들 지난한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온 민족의 삶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래서 한 편 한 편이 그 무엇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동시 작품이 많다고 해도 우리가 자꾸 불러내고 되새기지 않으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세대를 뛰어넘는 민족의 노래가 되어 오래 기억되고, 널리 불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920년대 동시를 순차적으로 소개한다. 창작 동기, 사연, 역사적 사실 등을 곁들여 해설을 덧붙인 까닭은 동시가 독자의 마음에 각인되어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더 많은 동시 작품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다만 아쉽다. □ 1923년 청개구리 백기만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장마 때에 슬프게 운다. 장마 때에 목이 아프도록 운다. 청개구리는 불효한 자식이었다. 어머니의 시키시는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개구리가 ‘오늘은 산에 가서 놀아라’ 하면 청개구리는 반드시 물에 가서 놀았었다. 또 ‘물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기어이 산으로만 갔었느니라. 어머니 청개구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죽을 때에, ‘나를 강가에 묻어라’ 하였다. - 이 말은 ‘산에 묻어라’는 말이어니. 청개구리는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볼 때, 조고마한 가슴이 슬픔에 무너졌었다. 넓고 넓은 천지에 다시는 그를 사랑하여 줄 이가 없었음이다. 그때에 청개구리는 어머니의 생전에 한 말씀도 들어보지 못하였음을 뉘우쳤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 돌아올 줄을 모르는 지난 일이다. 그는 어린 가슴에 슬픔과 아픔을 안고, 그의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을 쫓아 어머니의 시체를 물 맑은 강가에, 떨어지는 눈물과 한가지로 묻었더라. 그 뒤에 장마 때가 될 때마다, 그는 어머니의 무덤을 생각한다. 싯뻘건 황토물이 넘어 어머니의 시체를 띄워갈까 염려이다. 그리하야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비 맞은 나뭇잎에서 몸을 적시우면서 어머니를 생각하고는, 슬프게 슬프게 소리쳐 우느니라. 아이들아. 너희들이 일찍이 장마비 오는 날, 또는 밤 청개구리의 우는 슬픈 노래에, 귀를 기우려들어본 적이 있느냐. (이것은 우리의 어떤 지방에 전해오는 아이들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청개구리… 나라를 빼앗기고 슬퍼 통곡하는 우리 민족으로 비유 백기만의 「청개구리」는 손진태의 「별똥」, 「달」과 함께 <금성> 1923년 11월호에 발표되었다. 한국동시문학사에서 동시 장르명을 표기해서 발표한 첫 작품이다. 백기만은 친구인 이상화와 함께 대구에서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등 항일저항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이상화가 죽은 뒤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고,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하여 『상화와 고월』을 간행했다. 그의 시 세계는 신선한 감각과 신비주의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산문적인 호흡을 내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1998)에 의하면 「청개구리」는 일제강점기에 나라 빼앗긴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통곡하듯 노래하는 시로 소개한다. 어머니 청개구리가 살아계셨을 때, 어머니 청개구리가 시키는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불효자였던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이후 장마 때마다 슬피 우는 것을 나라 빼앗긴 쓰라린 슬픔과 후회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장마를 일제의 탄압으로 보고, 청개구리를 나라를 빼앗긴 후 슬퍼하고 통곡하는 우리 민족으로 묘사했다. “특히 끝의 두 연은 조국 잃은 후회와 일제의 횡포에 조국을 영원히 상실할까 염려하며 통곡하는 민족의 발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청개구리」에 최초로 동시라는 장르명은 밝혀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는 전 국민 동요 개창 시대라고 할 만큼 창가와 계몽 동요 그리고 7·5조, 4·4조 등 정형적 리듬을 차용한 동요시가 대유행하던 때였다. 「청개구리」가 비록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쓴 작품이기는 하지만 글자수를 맞춰 쓴 동요라고 할 수 없어 동시라고 새롭게 표기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더구나 전래동화를 소재로 차용한 산문시이기에 더 그렇다. ● 백기만(1902 ~ 1967). 호는 목우(牧牛) 필명 백웅(白熊)·흰곰.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고등보통학교와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양주동·유엽·이장희 등과 『금성』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 1923년 별똥 손진태 어머니, 제게 말하셨지요. 어젯밤에 별똥이 떨어졌을 때, ‘저 별똥을 먹으면 죽잖는다’고. 새벽에 나 혼자 앞산 넘어로 그 별똥을 주으러 갔다 왔어요.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어요 어머니, 별똥이 어찌 생겼소? 영원 불멸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염원… 그러나 예견된 좌절 ‘저 별똥을 먹으면 죽잖는다’고 해서 시적화자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앞산 넘어 별똥을 주으러 갔다. 그러나 별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께 별똥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고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영원 불멸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염원, 그러나 아직 준비되지 않은 자세로 열정만을 갖고 추구했기에 좌절 또 실패는 예상된 결과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아갈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 고심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별똥」은 손진태가 백기만의 「청개구리」와 함께 <금성> 창간호(1923.11.)에 동시라고 장르명을 표기해서 발표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동시라는 장르명을 개인적인 자각에 의해 표기했다기보다는 <금성> 편집진이 협의해서 표기한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겠다. 백기만, 손진태가 양주동, 유엽, 이장희 등과 <금성> 동인으로 참여하여 발간했으니까 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표기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손진태는 <금성> 창간호(2023.11)에 동시 「별똥」, 「달」을 발표한 것 이외에 「신선 바위에서」(<금성> 2호)와 「키쓰와 포옹」, 「옵바, 인제는 그만 돌아오세요」(<금성> 3호)도 발표했다. 그러나 <금성>은 3호로 종간된다. 「별똥」과 함께 발표한 「달」도 소개한다. 「별똥」과 「달」은 1923. 10. 12 밤에 쓴 것이다. □ 1923년 달 손진태 달아 너는 몇 살 먹었니? 몇 살에 너 어머니 돌아가셨니? 나는 다섯 살에 돌아가셨다! 달아 너 혼자 어디로 가니? 이 밤중에 너 혼자 어디로 가니? 너의 집은 너의 집은 어디에 있니? 달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집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슬픔의 주체는 누구인가? 달인가? 나인가? 달은 밤하늘 높이 떠 있다. 달은 유기체가 아니라서 슬픈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시 속의 달은 슬픈 내 마음을 투사한 감정의 등가물이다. 그래서 시에 등장하는 달과 하늘에 뜬 달은 같은 달이 아니다. 즉, 시 속의 달은 내 가슴에 새롭게 뜬 나만의 슬픈 달이다. 1연에서 달은 내가 다섯 살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되고 2연에서는 밤중에 집도 없이 혼자 어디론가 가는 처연한 모습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연에서 보면 시인은 달에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달은 나와 같이 어머니가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심정적 동일체가 된다. 즉, 달은 곧 나이다. 그래서 달에게 이 밤중에 혼자 어디로 가느냐고 안타까이 묻고 또 너의 집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지극한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달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달은 집이 없기 때문이다. “삼심 년대 한국시의 두드러진 문학적 징후의 하나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극심한 고향상실의식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명백하게 그들 자신에 의해 언표되든 안 되든, 일정한 삶의 근원으로부터 뿌리가 뽑혀진 채로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수많은 시인들의 심정의 밑바닥에 있었다.”(김종철, 『시와 역사적 상상력』, 1978. p.11)라고 간파한 김종철의 견해가 이 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달은 시인과 감정의 등가물로써 시대적 상황과 관련지어 무엇의 상징일까 곰곰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윤극영의 「반달」처럼 달을 잃어버린 조국의 상징이라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합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 손진태(1900~1960년대). 일제강점기의 사학자, 민속학자로 더 많이 알려졌다. 1927년 와세다 대학교 법문학부를 나왔으며 해방 후에는 우리 민족사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정리했다. 그러나 후에 친일 작품을 쓴 것으로 밝혀졌고, 6·25 전쟁 중에는 납북되어 1960년대 후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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