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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작 | 2024년 겨울호(제90호)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문학평론, 시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평론집 『침묵의 음』, 산문집 『저녁의 무늬』, 『아름다움에 허기지다』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유심작품상, 풀꽃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추천 콘텐츠

차성환 ‘곁’의 사랑, 사랑의 ‘둥지’ : 김지윤 시집, 『피로의 필요』(청색종이, 2025), 강백수 시집, 『가라 인생』(시인동네, 2025)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인식이다. 다른 이들은 바쁘게 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삶을 잘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은 곧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죽고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시를 쓰게 한다. 여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시집은 세계의 사라짐에 대한 감각을 공통분모로 한다. 중요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속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세계의 소멸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들은 각기 다른 사랑의 일을 도모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일을 꾸민다. ‘곁’의 사랑 김지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지구상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사물들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자신의 눈동자에 맺히도록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목소리가 몸 안에 담기도록 한없이 귀 기울인다. 그것들이 죽고 사라진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꽃이 시들고 노을이 지듯/ 지금 아름다운 것도/ 끝날 것이다”(「오늘의 하늘」)라며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기우는 햇살 아래 꽃 그림자/ 희미하게 남은 노을의 자취/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지”(「피로의 필요」). 시인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쓴다. 시인의 임무는 찰나에 피었던 짧은 생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 끊임없이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서 이름이 없어진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작은 씨앗의 뿌리는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 푸르러질 준비를 하고 바람은 속삭이지, 네 차례야그러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나 우리는 그것들을 신록이라고 부르지 어차피 역사란 그런 것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계간 시작 차성환 김지윤강백수사랑인생둥지 2025
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계간 문학과사회 정의정 유령언캐니애도기억아카이브츠베탕 토도로프환상 문학윤성희느리게 가는 마음정한아3월의 마치 2025
신은조 밝고 수다스러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5) /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열림원, 2025)

1. 젊은이가 아니라 모두의  젊은 세대의 풍조를 향한 기성세대의 염려 섞인 목소리는 언제고 존재했다지만 MZ를 향한 그것은 조금 커 보인다. 이와 같은 우려의 밑바탕에는 결혼이나 독립 같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시기가 이전에 비해 확연히 지연되는 경향이나, 대기업의 취업 경쟁률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데에 비해 중소기업은 인력난을 호소하는 역설, 젠더에 따른 정치적 성향의 양극화가 사회적 현상으로 명명되는 상황 등의 통계·사회적 ‘사실’이 있는데, 이는 다시 초저출생, 역대 최고의 비경제활동인구 비율 등 갖가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결국 MZ의 몫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므로 ‘MZ’는 단순한 세대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멸칭으로 변모한다.  기실 1980년대생부터 2000년대생까지를 전부 한 세대로 묶어 부르는 일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에 출생한 담임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2000년대생의 입장에선 조금 당혹스러운 시도가 아닐 수 없겠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전 세대’와 ‘현세대’ 간 차이에 관한 농담에 공감하고, ‘이전 세대’의 지시에 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이상 ‘MZ스러움’이라고 일컬어지는 속성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워라밸’ 등의 키워드에서 드러나는 개인주의적 관점, 기존 질서 체계에 협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과 선을 긋는 태도, ‘비혼’이나 ‘딩크’의 유행으로부터 미루어볼 수 있는 자기 안위 중심의 가치관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한정된 에너지를 주어진 과제나 언젠가 도래할 장밋빛 미래에 투자하기보다는 자신의 존재 보전에 안배하려는 태도는 일견 매사에 ‘책임감 없이’ ‘대충’ 임하는 것처럼 비치기 쉬운 탓에 MZ 세대에 대한 오해를 한층 더 깊어지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러한 속성들이 과연 ‘지금 젊은 세대’만의 특징일까?  물론 세계에의 불만을 토로하고, 내심 ‘변화’를 소망하는 목소리가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을 단지 ‘젊은 세대의 몫’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젊은 세대’가 사회제도의 정의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범주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단순히 철없는 젊은이의 치기로 격하할 뿐만 아니라 연령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세계와 불화하는 이의 고통을 단지 개인의 정서적인 흠결 탓으로 귀결시키기 쉽다는 점에서 그들에의 적극적인 타자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MZ스러움’은 특정 연령대나 세대의 기질적인 본성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태도 중 하나다. 일찍이 ‘꼰대’라는 단어가 그렇게 되었듯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 이질감을 느끼는 자라면 누구나 MZ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화제는 ‘MZ스러운’ 태도를 촉발하는 ‘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MZ스러움’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발현되는 것이냐는 질문으로까지 확장될 터, 지금이야말로 현실에 발붙인 채 그를 재현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온 문학이라는 장르가 앞에 나설 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어떤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품에 안고 두 권의 시집을 펼친다. 두 시집은 지금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적지 않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두 시집의 화자들이 취하는 태도가 같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아침부터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서 “창문을 열지 않”(「골목의 증식」)고,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는 남현지의 화자와, “단돈 칠만 원”이라는 호객 행위에 굳이 “없어 인마”(「신년 운세」)라고 엄포를 놓고, 소비자에게 자신—혹은 자신이 만든 상품—이 어떤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지 어필해야 하는 “홈쇼핑” 방송에서 대뜸 “귀엽다”(「도전! 판매왕」)는 말을 꺼내놓는 고선경의 화자는 일견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현지의 시 중 “고통 없는 세계” 같은 건 “상상을 안”(「빛의 생산」) 한다는 말이나, 고선경의 시 중 “진정한 서울 시민은 1호선에 출현하는 빌런들에 익숙해”(「남영」)진 사람들이라는 견해와 같이 시집 곳곳에 산재한 증언들로부터 한 줄기의 비관을 발견해낸 독자라면 이들 사이에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공통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대들, 어떻게 살고 있는가? 2. 서랍 속 테라리엄  남현지의 시에서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소망은, 시집의 해설이 언급하고 있듯 화자 자신을 안전한 공간에 ‘안치’하려는 감각이다. 안정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 소망은 ‘집’ ‘실내’ ‘직업’ ‘소속감’ 등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나며, 화자가 의도적으로 타자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끔 한다. 이처럼 극도로 정돈된 남현지의 세계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마음에게는 미안하지만 / 그것은 이미 / 언어의 것이 아”(「골목의 증식」)니냐는 물음에서부터 드러나듯, 남현지의 시 세계에서 ‘마음’은 더는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래도 정제되지 않은 마음이 인간을 뒤흔들기 쉽다는 점에서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이 곤란에 빠진 자에게 건넬 만한 가장 보편적인 조언으로 손꼽히는 세계에서 마음이 설 자리는 너무도 비좁다. 그래서일까? 남현지의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는 대체로 “고뇌, 열망, 후회”(「피서」) 같은 건 알 게 뭐냐고 되묻거나, “아줌마가 싫”다는 이에게 “아줌마도 싫어하는 것이 많”(「복도식으로」)으니 괜찮다고 되받아치는 식으로 마음의 진동을 애써 묵살하곤 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마음이 소거된 도시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행복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요가 매트를 찾으며 더 건강하게 튀긴 이 감자칩과 저 감자칩 사이 최저가와 할인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에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번에 한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전문  표제작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마트를 거닐며 어떤 “감자칩”을 구매할지 고민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이때 화자는 선택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체험을 하는데, 그것은 화자에게 아주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변화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소비자에게 끊임없이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선택 한 번 한 번의 영향이 막강함은 구태여 나비 날갯짓과 태풍의 비유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자명한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이 / 나의 선택이었다고 /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는 화자와 “투자에 성공”하고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화자 사이에는 어떤 선택의 차이가 있었을까?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화자는 끝도 없이 신중해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안녕을 물어도 되는 상황인가 / 호칭은 적절한가 / 무례한 단어는 없었는가” 지속적으로 자문하면서도 “이토록 신중해도 /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이해”(「거래처에서 배운 것」)하는 화자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선택이라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극한까지 보장하는 것으로 언뜻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과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사회구조나 시스템의 책임을 축소하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되기 쉽다. 다시,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는 목소리로부터 ‘누칼협’1)이라는 조롱이 힘을 얻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자에게 모두 너의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냐 일갈하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복도’ ‘골목’ ‘마트’…… 인간의 몫로는 오직 비좁은 통행로만을 남겨둔 채 고통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남현지 시집의 공간들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현실의 은유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집을 두고 세계를 비관한다거나 자신만의 작은 낙원에 숨어든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인데, 그것은 남현지 시집의 화자들이 끝내 버리지 못한 한 줄기 마음의 잔재 때문일 것이다. 남현지의 화자는 세계와의 거리를 두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곁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내심 품고 있다. 예컨대 「가이드」에서 화자는 특정 모임의 맞춤 티셔츠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 티셔츠를 세탁기에 돌리며 “소속이 있다면 기쁠 것이”라고 되뇐다. 하지만 티셔츠가 줄 수 있는 소속감은 그것을 벗는 순간 사라지고 말 정도로 얄팍하다. 세탁기와 같은 기계가 티셔츠를 깨끗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담보하는 반면, 인간은 그럴 수가 없어서 안내문을 동봉한다고 이야기하는 남현지의 화자는 얼핏 인간에 대한 어떠한 낙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자는 시의 마무리에서 이미 “없어진 단체의 티셔츠를 입고 잠든다”. 면으로 만든 티셔츠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내면에 미래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음은 자명하다. 동네에서 은행이 철수하고 있다 은행은 이제 우리가 귀찮구나 교회는 더 늘어났으니까 신은 아직 우리가 필요한 거 같지 핸드폰 가게처럼 아직도 우리를 원해 커피도 준다 마시고 가 마셔도 돼 더 달라고 해도 돼 쓸데없는 걸 사라고 하지 않아 우리가 사 모으는 건 마지막 모자 마지막 손가방 마지막으로 짜인 부드럽고 질기며 화사한 것이다 아침마다 침을 흘리면서 꽃을 보게 돼 사진을 찍어서 보내 좋은 말만 하고 싶어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싶어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도록 달콤한 것으로 다 발라버리고 싶어 티브이를 틀어봐 설악산이 우리를 모집해 단풍이 붉게 들었대 날씨가 아주 좋대 좋은 것을 줄게 오래 간직했던 것을 줄게 말린 나물을 줄게 보험도 줄게 이건 수를 놓은 손수건이고 네 배냇저고리야 옷은 잘 다려 입고 햇볕을 많이 쫴야 돼 그런 걸 자꾸 잊어버리게 돼 — 「철수」 전문  오직 필요와 쓸모만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쓸데없는” 것들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화자는 은행이 “우리”를 두고 철수하고 오직 “교회”라는 믿음의 장소만이 건재한 동네에서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을 만큼 미약하지만, 그래서 “달콤한 것” “꽃” “단풍” “햇볕”…… 전부 한순간 우리에게 찾아왔다 사라지는 것뿐이지만, 그래서 이득이나 필요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세상에 쓸모의 유무나 필요의 정도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런, 간직할 수도 박제할 수도 없게 증발해버리는 한순간의 기쁨 같은 것이 아닐까? 배냇저고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고 해서 그때의 상황이 재현되는 것이 아님에도 오래된 배냇저고리를 건네주는—높은 확률로 부모님일—이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그런 “마음”들이야말로 체념과 절망의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는 자가 내일을 꿈꿀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보험”이 아닐지 조심스레 곱씹게 된다. 3.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2)  일찍이 프리드리히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실로 인간은 고통받으며 강해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미 흉터가 된 상처에도 종종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강해졌다는 사실만을 위안 삼아 지난날의 고통을 전부 ‘필요한 것’이었다고 정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선경의 두번째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은 그것이 ‘살아남은’ 청년이 지난 1년을 기록한 수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구태여 ‘살아남은’ 청년이라고 호명하는 이유는 그의 주변에 많은 이별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별은 종종 연인 간의 헤어짐처럼 관계의 단절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죽음의 형태를 띤다. 「신년 운세」로 시작해 「망종」을 지나, 「핑크 뮬리」가 만개하는 10월을 경유하여 다시 “12월 31일”이 오는 동안 화자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기차”(「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를 타고, 이미 “죽은 친구”를 “햄버거 배달”(「가벼운 노크」)원으로 다시 만나기도 하며, 심지어는 “내가 죽”(「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어버리는 식의 기묘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시 속 청년의 1년 중 대부분을 아우르는 감각은 다소 염세적이라고 읽을 수 있을 만큼 통렬한 현실에의 반감이다. 침대에 모로 누워 울다가 씨발! 하고 외쳤다 씨발…… 나직하게 읊조릴 수도 있었지만 누구라도 들어 주었으면 해서 소리를 질렀어 검은 고양이를 제외하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가 울든 말든 검은 고양이는 똥 싸고 물 마시고 제 몸을 할짝거렸다 왜 아무도 없지? 집을 나설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과하면서도 세상이 나를 자객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숨지 않아도 세상은 나를 숨겨 준다는 것, 아아 안전해 그런데 나는 왜 한겨울에도 맨발에 슬리퍼만 신는 걸까 발끝에서 가볍게 달랑거리는 슬리퍼를 신고 빗길 위로 미끄러진 적이 있는데 누구라도 죽이고 싶은 날에는 세상이 온통 자객 같았다 그런데 그냥 누워서 비 구경 했어 창가의 침대에서도 비 내리는 거리에서도, 아아 시원해 고양이가 물 먹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검은 고양이는 빗물을 좋아하는지 깨끗한 물을 좋아하는지 아니 물을 좋아하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 태어난 지 서른 해가 되어 가는데 여전히 태어난 게 저주스럽다 나에게 어떤 세상을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우선 세상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 「검은 고양이와 자객」 부분  「검은 고양이와 자객」에서 화자는 노골적으로 세상에 대한 불호를 드러낸다. 그것은 세상이 화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존재를 숨겨버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아무리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눈물을 쏟아도 세상이 그것을 묵살하므로 화자는 세상에 뜬소문으로만 존재하는 “자객”에 비견된다. 함께 사는 검은 고양이에게조차 애정 어린 관심을 받지 못하는 화자가 원하는 것은 일정 수준의 유대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심이 주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고선경의 화자들이 “집이나 학교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생각이 착각인 것을 아는”(「핑크 뮬리」)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살을 취하기 위해 뼈를 내줄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고선경의 화자가 선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머, 즉 현실을 웃어넘겨버리는 가벼운 태도다.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럭키슈퍼」)이라는 말처럼, 유머를 유머로 만들어주는 것은 껍질처럼 쓰디쓴 현실이다. 이 세계가 분명히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세계를 비꼬는 유머로 웃을 수 있다. 때로는 세계를 깎아내리고, “1호선 빌런”(「남영」) 혹은 자기를 비하하며 함께 웃고, 그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 그리하여 누군가와 함께 웃는 일은 양자 간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느 정도 합치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세계를 비꼬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함에 더불어 적어도 그 기분만은 조금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남현지의 시집이 세계를 버텨나가는 힘으로 ‘기분’ ‘마음’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건넸던 것처럼, 고선경의 화자에게 있어 유머는 “공이 날아오기 전에 / 나를 먼저 깨뜨려 놓는”(「산성비가 내리는 대관람차 안에서」)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가려는 나름의 생존 전략처럼 느껴진다. 더하여 고선경의 화자가 단지 세계를 증오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불행과 불운 사이를 거닐다 문득 거기에 온기가 있다는 것”(「체리의 서약」)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얀 머그잔 속 부풀어 오른 우유 거품을 바라본다 왜 이런 것이 나를 끓게 하는지 넘치게 하는지 알 수 없다 기다리라는 문자 메시지 하나에 시간은 무수히 알을 까게 되는데 씁쓸한 시나몬 향을 맡다 보면 담배를 배우고 싶어져 그런 것이 나의 최선은 아니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태어나는 기분 우유 거품 아래에는 커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도 같다 침착하게 식어 가기 최선을 다해 가라앉기 나는 이제 그런 것을 배우고 싶어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은색 스푼이 거품을 걷어 내면 날벌레 한 마리 떠올라 있을지라도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남은 거품의 자세 넘치지 못하지만 부푼 채로 멈춰 있다 빈 잔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어 내 어깨를 붙잡는 차가운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부드럽게 감싼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 — 「카푸치노 감정」 전문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침착하게 식어”가는 삶을 배우고 싶다는 화자. 하나의 시기가 끝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임을 스스로 선고하고 있는 화자는 이제 “거품”으로 표현되는 지난날을 청산하고자 한다. 정말이지 그의 말대로,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다. 그 잔여물이 새롭게 따라 넣을 음료의 맛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듯 새로 시작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지난날이 전혀 돌아볼 것이 못 될 만큼 끔찍하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삶을 견디려 안간힘을 쓰는 청년이 1년간 남긴 기록에는 끝없는 자기 비하나 체념의 유머뿐만 아니라, 그가 그 1년을 버티게 만든 아름다운 지점 또한 무수히 존재한다. “무수한 별, 아름다움 /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 아닌 아름다움 /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처럼 읽는 이의 머릿속을 선명하게 채우는 시청각적 감각들은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독자의 가슴속에 심장처럼 남아 온기를 더해준다.  그리하여 시집의 마지막 시, 「팬레터—12월 31일」에 다다라 화자는 “이걸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기대하자 더 많은 걸”이라고 속삭인다.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은 친구를 추억하며 적어 내려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해당 시에는 친구와의 아름다웠던 추억과 더불어 혼자 남겨진 화자의 외로움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 외로움에 천착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해도 충분해지지 않으니 기대해보자며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새해는 기다려지고, ‘나’는 “너의 팬”이라고. 이토록 단단한 심장을 가진 화자에게 응원의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것은 제 삶을 견뎌내는 것조차 힘에 부쳤던 시기가 우리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4. 내일의 태양  영화 「해피엔드」(네오 소라 감독, 2025)에서 주인공 ‘유타’는 말한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즐겁게 죽자.” 근미래의 일본,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지진과 오보 사이를 방황하며, 사람들은 강력한 통제와 결속을 원하는 쪽과 시민을 옭아매려는 공권력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촉구하는 쪽으로 분열한다. 유타는 그중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만 몰두하는데, 이러한 동태는 앞서 언급한 그의 발언과 얽혀 그를 세간에 대한 ‘유의미한’ 관심은 하나도 갖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회의주의자로 보이게 만든다. 유타의 음악 파트너이자 소꿉친구 ‘코우’ 또한 이러한 판단에 공감하여 ‘조금은 생각을 하라’는 일갈을 하는데, 소위 말하는 ‘MZ 세대’의 일원으로서, 유타의 위와 같은 발언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결과’라는 평가에는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의 결말부에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기와 불안, 양극화…… 이 영화의 배경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와도 상당히 닮았다는 것을 상기하면 작중 선생님의 대사를 끊임없이 곱씹게 된다. ‘너희 세대에 조금 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젊은 두 혁명가를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 그 대사를 말이다.  ‘희망에 대한 믿음’. 희망이라는 관념에 또 하나의 관념을 덧댄 이 마음은 훼손되기 쉽고, 그래서 세계의 척박함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득세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현지와 고선경의 시집에서 명확하게 빛나는 인간의 마음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렇듯 눈부신 희망의 증표에 대고, “우리의 불행도 우리를 이해시키지 못하”(고선경, 「눈도 내리지 않는데 고백」)는 세상에서 위로랍시고 ‘어쨌거나 다 괜찮아질 거야’ 따위의 근거 없는 전망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세상은 앞으로도 줄곧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시험할 테고 괜찮지 않아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러므로 두 권의 시집을 통과한 독자가 붙일 수 있는 것은 아주 미약한 마음뿐이리라. 그리하여 지금, 인간을 숨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밝고 수다스러운 세계의 한복판에서,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그대들, 잘 지내시나요? 1) '누가 그거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하기라도 함?'의 줄임말. 주로 부당함이나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 모든 일이 전부 피해자의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므로 그에 딸려 오는 고통도 모두 본인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조롱하는 데에 쓰인다. 2) 2012년 TV 예능 프로그램 에서 하하의 콩트 캐릭터인 '하이브리드 샘이 솟아 리오레이비'가 지은 정형돈의 딸 이름. 해당 장면을 캡처한 사진은 2025년 현재까지도 삶의 팍팍함을 유머로 승화할 때 곧잘 인용되고 있다.

계간 문학과사회 신은조 남현지고선경MZ희망마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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