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제120호)
망각지 : 채굴 불가 — 가속류 시 현상에 반영된 인지 자본주의의 (비)상상력
“Planning your epic journey from platform A to B?”1)
1. 인지 자동화를 추동하는 알고리즘의 내면화로서의 가속류
이 글은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2)의 보론으로서 가속류 현상을 인지 자본주의의 무의식적 동기 속에서 살피고자 하는 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가속류의 가장 중요한 동기인 디지털 플랫폼 장치의 예속(적 주체)화3) 메커니즘을 추적할 것인데4), 동시에 이는 ‘디지털 중세’5)로의 역행이 가속화되고 생성형 인공지능6)이 보편화되는 시대에 시의 창작 주체란 무엇이며 시는 어떤 예술적 실천일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가속류」의 결말부에서 후속 논의로 남겨두었던 두 가지 과제, 즉 왜 상당수의 시인들에게 자동 창작 기계와도 같은 매크로 장치의 구축이 지지를 얻는가, 그리고 가속류에 의해 동시대 한국 시의 풍경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도 함께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비관론에 경도되었던 시기를 지나, 최근의 인공지능과 시 논의들은 인공지능을 협업의 도구나 인식론적 성찰의 매개로 인식하는 듯하다. 이들 논의는 인간이란 것이 어떻게 조건화되어왔는지를 되물으며 권력과 위계, 예외주의의 문제를 반성하고 비인간 객체들과의 연결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의 위치를 재고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근대적 주체 모델을 유지하거나 트랜스휴머니즘의 옹호에 가깝게 전개되고 있어7) 이미 가분체인 인간 주체가 창작 과정의 일부 구성 요소로 기능하거나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을 모방하여 사고의 자동화를 구축하는 현상, 인공지능의 독자적인 행위 가능성 등에 대해 적절한 전망을 제시하기 어려워 보인다. 인공지능에 의해 생산된 시가 결과물만 놓고 보면 기존의 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배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창작 주체의 통일성과 ‘시적’인 것에 대한 규범적인 이념을 오히려 굳힘으로써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자동화된 사유 체계를 얼마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과 테크놀로지는 이원론적이지 않으며, ‘순간’의 빈번한 채널 전환이 디폴트인 가분체 주체에게 그 자신의 지속적인 증강이라는 믿음은 적용되기 어렵다.8) 인지 개념에 대한 전제를 달리한 후에야 창작자와 수용자, 매체로 분할된 기존의 구분이 어떻게 갱신될 수 있는지, 인공지능의 산출물이 각 객체들에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더욱 유효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9)
오늘날 주체의 예속은 신자유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결합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디지털화된 자본주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장치를 매개로 개별 주체들의 신체와 인지에 대한 포섭력을 나날이 확장하면서 인지 자동화10)와 물질적 추상화를 유도한다. 주지하다시피 주체가 장치를 통제한다기보다 장치가 주체의 행동 양태를 주조하고 회로화된 정동을 생산토록 하는데,11) 이때 채굴주의라는 관점은 ①인지적 수고의 최소화‧자동화 ②생산성의 극대화 ③수익화라는 자본 기계의 원리를 잘 설명해준다. 인공지능 산업은 “모든 것을 최대한 빨리 뽑아내”는 광업과 마찬가지로 추출 산업으로 규정될 수 있으며,12) 디지털 플랫폼은 자동화된 알고리즘의 추출 공정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디지털 토지’13)로서 포획된 정보와 데이터를 무한히 수익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14) 이 유사 광산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데이터로 전환되는 한편, 여타 비인간 객체들과 함께 생산구조 속 부품이자 수탈원이자 정보 생산 자영업자로 복무한다.15) 또 인지 과정이 인지 장치에 외주화되는 영역이 기술 발전과 함께 나날이 확대됨에 따라16) 사고 회로는 이러한 감각을 자연히 체화하고 동기화한다.17) 이처럼 오늘날 인지 자본주의의 데이터 채굴은 알고리즘에 기반한 각 객체들의 데이터 창출 활동을 유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면서 “살아 있는 체계들에 관한 지식의 자본화”18)를 강화한다.
그리고 이는 「가속류」에서 제기한 문제의식과도 긴밀히 맞닿는다. 사이버네틱스와 그 독립된 분과로서 인공지능의 발전이 시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꾸준히 우려되어왔으나, 실상 작법의 차원에서는 인간 창작자가 기술 매체의 합리성을 모방하는 현상을 보이며, 그렇기에 거대한 단일 세계로의 일원 지향성 또한 빈번히 나타난다.19) 그렇다면 어떤 조건들이 이러한 시쓰기를 추동하는가, 라는 의문을―특정 시기에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서 상정된 미적 기준과 ‘현실’이 아니라―동시대 ‘현실’과 ‘주체’의 재정의하에서 탐구하고자 한 기획이 「가속류」다. 가속류는 우리의 인지와 정동, 감각이 알고리즘적 사고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기술 장치들에 의해 매 순간 재배치되는 현상을 반영한다. 즉 「가속류」의 핵심은 ①인공지능과 시 논의의 벡터를 전환하고 ②규범적인 주체 모델을 ‘기계-예속적-(탈)주체화’에 기반하여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가속류를 통해 역으로 발견되는 창작 주체의 형상은 기계적 사고에 예속되며 파편화되거나 확장되는 가분체, 이미 분절된 개인이다.
특별히 이번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누적된 정보를 데이터로 전환시키고, 다시 그 데이터들의 데이터(메타데이터)를 다양한 알고리즘으로 모델화”하는 “정보화의 급진적 연속”20)이 가속류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인 “재귀적 무한 역행 루프와 순환적 인과관계”(84~85쪽), 즉 망각-리셋 기제로 형상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알고리즘적 사고의 내면화 외에도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겠지만, ①자신의 시를 학습하고 ②망각이라는 특수한 장치를 통해 ③프롬프트를 리셋하고 ④이전과 유사한 생산물을 겹이나 누적 형태로 배치하고 ⑤한 편의 시 안에서 망각과 리셋을 빈번히 발생시키면서 ⑥특정한 플롯 단계나 패턴의 고착에 따라 발생하는 정동 연속체가 일종의 회로를 그리며 반복되는 양상이 2010년대 초중반 이후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우세하게 발견되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각 시인의 개별 시세계 차원에서 분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암시한다. 인지 개념의 재구성을 강조하는 가속류는 이러한 현상을 해명하는 하나의 유효한 관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21)
2. 가속류는 시의 자동 창작을 꿈꾸는가?
2016년 김언 시인은 ‘문장 생성기’라는 독특한 상상을 내놓는다. 그는 현대시란 시 전체의 주제나 통일성과는 무관하게 바로 앞 문장과 이어지는 다음 문장의 관계에 따라 쓰일 뿐이고, 그렇기에 시구들은 ‘문장들의 누적에서 발생하는 방향성’과 ‘문장들 간의 거리감’이라는 두 축에 의해 생성되며, 첫 문장에 내재된 에너지의 성질과 총량이 시의 향방을 규정한다고 보았다.22) 즉 김언에게 현대시는 ‘배신’하거나 ‘헌신’하는 랜덤한 문장을 생성하여 차례로 배치한 다음 사후적으로 논리를 입히는 것에 가까우며,23) 따라서 최대한 많은 표본 문장과 연상 경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김언에 따르면 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시적 ‘에너지’는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대체될 수 있고, 이 ‘에너지’ 혹은 ‘동력’이란 질적 수준이라기보다는 ‘패턴화’된 데이터 자원(자본)이므로, 문장 생성기는 전통적인 ‘사유’, ‘정서’, ‘체험’, ‘주체’를 축적된 데이터로 대리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추출기가 된다.24) 이렇듯 문장 생성기라는 상상에 담긴 욕망은 인지적 차원의 수고를 대리해줄 ‘자동 창작’에 대한 욕망이며, 미리 분류‧패턴화되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쓸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양적 총화가 인지 능력을 질적으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김언식의 ‘시적 원리’에 기반하여 시를 생성하는 기계가 보급된다면, 그리고 단지 ‘시’를 획득하는 것이 목표라면, 만인이 클릭 몇 번으로 랜덤하게 구성된 시를 획득하여 시인이 될 수 있는 그때 인간 시인의 존재 양상은 어떻게 변화할까. 시인의 역할이 시를 ‘창작’하는 게 아니라 ‘추출’하는 것이 된다면 창작 주체의 정의도 범위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목적이 더이상 인지적 고투를 즐기는 데 있지 않다는 암시는 시쓰기가 무엇으로 이행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처럼 ①결과물 획득을 위한 시간을 압축하며 ②이미 생성된 문장 배치를 점검하는 것으로 시인의 역할을 옮겨놓는 문장 생성기에 대한 상상은 오늘날 성행하는 방치형 게임의 문법과도 맞닿는다.
방치형 게임(idle game)이란 자동화된 알고리즘이 단순 반복적인 플레이를 대리해25) 플레이어가 부재하는 동안에도 전투 등이 자동으로 진척되고 재화가 축적되는 유형의 게임을 지칭한다. 플레이어는 가끔 게임에 접속하여 클릭 몇 번의 적은 수고만으로 게임 진행을 가속하는데, 그리하여 방치형 게임의 플레이어는 직접 플레이에 몰입하는 대신 알고리즘의 관리자이자 관망자로서의 위치를 체화하며, 자동 증식된 자산을 관리하고 획득물을 재분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26) 여기서 이러한 방치형 게임의 플레이 양식이 플레이어 정체성을 어떻게 규율하는지, 방치형 게임이라는 알고리즘 장치가 어떤 주체를 생산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정한 노동과 시간을 투입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보상이 주어지는 방치형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알고리즘 모성’27)의 환각 아래 역설적으로 상시적 유휴시간(idle time)28)에 머물도록 한다. 또한 대리된 반복 노동으로 획득된 경험치와 재화를 스탯이나 아이템에 재투자하는 것으로 플레이어의 역할이 한정되는 현상은 ‘관리자’를 넘어 투자자 정체성이 학습되는 한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29) 그러나 자동 증식에 요구되는 시간의 간격으로 인해 알고리즘 모성이라는 치유적 환각은 지속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강압적으로 연속성을 중단”하는 ‘모성의 폭력’이 작동한다.30) 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보상의 지연을 견디지 못하고 ‘현질’을 통해 시간을 압축하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방치형 게임은 적절한 강도로 플레이어를 훈육하면서 인지적 비용 감축31)과 반복 노동 절감을 효과적으로 실현하여 게임을 무한히 지속하도록 유인한다. 플레이어는 오로지 알고리즘이 불린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하며, 한정된 선택지는 나날이 좁혀지기 마련이므로 ‘이번에는’ ‘완벽한 결말’을 보기 위해 리셋으로 유도되기도 한다. 리셋은 무한한 자원 채굴과 자동 축적이라는 시나리오와 결합되면서 ‘채굴-분배-리셋(망각)-복구’라는 완결 불가의 가상적 감각을 내장하게 한다. 무한한 채굴지라 여겨지는 이 세계는 사실 불모의 땅이며 플레이어들이 고갈시키는 것은 그 자신이지만 이 실상은 손쉽게 가려진다.
즉, 방치형 게임은 허구적 이상향을 내세워 개인을 투자자 모델로 훈육하는 채굴 자본주의의 비전을 반영한다. 이러한 방치형 게임의 원리는 이미 일상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절연성에 대한 공포, 지속성에 대한 강박, 결말 유보를 위한 망각 루프 등이 지극히 동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 가장 분명한 형상화가 가속류의 한 유형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32) 그들 시의 공간은 게임 인터페이스를 차용하거나33) 의식적으로 인공지능을 모방하는34) 차원을 넘어 그 내부 메커니즘 자체가 방치형 게임처럼 알고리즘화되어 있다.35)
3. 재귀적 망각 루프와 무한히 지연되는 결말
2010년대부터 보편화된 시 창작 전략인 리셋-망각의 기제는 이야기의 무한한 지속을 위해 종결을 유보하는 것처럼 보인다.36) 반복하기 위해서 망각하고 시구를 생산하기 위해 반복을 통해 완결을 거부하는 것이다. 혹은 역으로, 망각하기 위해 반복을 누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망각-리셋의 유형으로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일종의 가상 세계관을 구축하고 시공간을 압축하는 장치를 도입한 후 이를 반복 활용하는 경우이다.37) 이때 리셋과 반복의 동기는 주로 ‘이번에는’ ‘실패 없는 완벽한 엔딩’을 맞겠다는 목표에 있다.38) 그렇기에 일부러 실패함으로써 다시 반복하는 양상 또한 자주 발견된다.39) 그런가 하면 이런 리셋-망각 가제는―시를 떠받치는 존재 조건을 넘어 리셋과 망각 그 자체를 위해 시가 쓰인 것처럼―종종 자기 자신의 재귀성을 극도로 밀어붙이는 수행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결과를 정보로 수용해서 다시 내보내는 피드백을 통해 자기 조직화를 이어나가는 메커니즘의 무한 반복은 마치 자신의 시세계 속에 시구를 증식하는 알고리즘을 삽입해 자동 반복하는 것과도 같은데, 이러한 되먹임 장치를 가장 활발하게 사용하는 시인으로 문보영을 들 수 있다.
『책기둥』(민음사, 2016)에서 나타나는 문보영 시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시에 서사를 구축하고 그 내부에 다층적 플롯을 삽입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무언가를 쓰고 있는 ‘시인’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그들이 쓰는 글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다시 파생된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시가 중층 메타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앙뚜안’ ‘지말’ ‘스트라인스’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 시인으로 구체화되기도 하는 이들은 여러 시에 출연하여 시를 쓰고 시에 대한 그들만의 서사를 축조해나간다(「공원의 싸움」 「그녀들」). 40)「파리의 가능한 여름」 또한 이 전체 멀티 플롯이 하나의 전능자의 눈에 의해 관찰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인”은 이전까지의 내용이 단지 “한 마리의 파리가 등장하는/어떤 시”일 뿐이며 그것이 결국 “시작 노트”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세 시인이 시작 노트를 두고 다퉈도 결국 그들은 어느 시인의 시작 노트 속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노트를 덮는다. “그리고/생각한다”. “시 쓰기는 참으로 쓸모 있는 인간의 놀이”라고. 나아가 문보영은 이 구조를 변용하여 리셋의 활용이 시를 전개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증거한다. 시를 이어가기 위해 빈번히 동원되는 ‘기억상실’은 여러 시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며 문보영 시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한편으로 무한 연장의 장치로 기능한다.
나는 그녀에게 뭔가를 물었고, 그 질문은 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알아들었으며, 그녀는 왼쪽 코너를 돌면 복도 끝에 청소 도구함이 나오니 거기서 쉬면 된다고 말했다. 내 질문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내가 공항에 온 이유는 아픈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묻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내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영 다른 것이었다. 학교 가는 길을 알려주세요. 그 질문을 던지자 나의 내면은 모든 임무를 마친 것처럼 평온해졌다. (…) 나는 다시 하얀 숲 앞에 섰다. 눈이 내렸다. 세상을 재우듯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커다란 이불이 내려와 세상을 덮는 것처럼. 엄마는 어디에선가 아파하고 있다. 나의 내면은 고요하다. 나의 불안은 조금씩 자라 나의 선생님이 된다.
―「모르는 게 있을 땐 공항에 가라」41) 중에서
공항에서만 질문을 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선생님은 “공항 가는 길을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아픈 어머니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공항까지 왔으나, 그곳에서 결국 내뱉게 되는 말은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알려달라는 질문이다. ‘나’는 마치 잊어버리기 위해 공항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안전하게 잊어버리기 위해 ‘저장’한다. 저장했다는 안심이 망각을 위한 자유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나’의 동선은 ‘학교’와 ‘공항’ ‘하얀 숲’이라는 최소한의 맵으로 한정된다. ‘나’의 뒤를 따라오는 ‘빈 공간’은 망각의 현시로서 하얀 숲과의 분리 불가능성을 암시하며, 눈 내리는 하얀 숲 앞에 다시 선 ‘나’의 모습은 망각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다시 자라난 불안은 지금까지 다른 선생들이 그랬듯 그 또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공항에 가라”는 동일한 명령어를 반복할 것임을 암시하며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다. 마찬가지로 「옆구리 극장」(『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에서 ‘나’는 ‘극장’을 나오자마자 급작스럽게 채널을 이동하듯 망각의 영역에 진입하고, 바로 그 때문에 다시 극장으로 들어가도록 유도된다. 그리고 “이 일을 복도를 살아내면서 반복한다”.
이는 『책기둥』에서 책을 다 읽어버리면 더는 읽을 책이 없을까봐 책을 읽지 않던 ‘사람 a’, 모든 1권을 숨겨서 “시작을 막”고 읽히는 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던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호신」). 시집에 빈번히 등장하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망각을 통해 기록물이 영원히 보존되리라는 환상을 지속한다는 점에서 데이터 센터의 논리와 유사하다. 기술 장치는 망각으로부터의 안전을 담보하는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우리가 빠르게 망각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망각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매체에 기억 보관을 일임하여―망각이 추동되는 양상은 문보영 시의 ‘독특한’ 무의식인 동시에 오늘날의 ‘보편적인’ 무의식이기도 하다.
이렇듯 산출 결과물을 다시 학습하여 순환적 인과관계를 조직하고 무한 겹메타의 되먹임을 만드는 문보영의 되먹임 장치는 일종의 사이버네틱스 루프를 형성하며 정동의 순환을 형성하고 그 회로화가 무한히 축적되도록 한다. 마치 자리를 비운 플레이어가 다시 귀환(회귀)할 때까지 반복 실행되도록 설정된 타임 루프처럼, 과부하로 인해 혼자서는 다 감당할 수 없(지만 내적 필연성으로 인해 반복되어야만 하)는 정동을 종이 뇌에 일부 이양한 듯이.42)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게임 속 포털 장치 혹은 매체 간 즉각적인 채널 전환과 같은 시간과 공간의 압축, 리셋이 빈번히 동원됨에 따라, 물질적 차원의 상상력은 쉽게 소거되고43) 사유의 역사적 축적 또한 어려워진다. 완결 지연이 내포한 지속성, 연속성에의 강박은 인식의 깊이가 축적되지 않으면서 늘 최신 업데이트에 열려 있는 동시대 의식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44)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차단된 채 오로지 ‘영원한 현재’에 머무는 것은 어느 정도 보편화된 동시대의 감각이기도 한데, 이는 약속된 채굴의 보상으로서의 현재가 무한하리라 착각하게 하는 장치들과 그로 인한 예속화 과정에서 연유한다.45) 때문에 시 내부 알고리즘이 보편화될수록 유의미한 사회적 상상력의 여지는 부지불식간에 축소되는 한편, 의도와 무관하게 ‘영원화’라는 자본주의의 이상이 얼마간 대리되고 재생산된다.46) 풍요의 환상을 걷어낸 망각지는 실상 채굴 불가의 땅이다.
4. 탈역사적 압축과 미래의 시적 실천
그렇다면 가속류는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 앞서 김언식의 문장 생성기에 제기되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려보자. 문장 생성기가 보편화된다면 창작 주체라 일컬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또 창작자와 물질 매체, 수용자의 경계와 상호작용은 어떻게 달라질까. 축적된 데이터가 커먼스47)로서 공유된다는 가정하에, 특권적 창작 주체가 소거되고 익명의 시쓰기가 보편화되는 미래를 상정해볼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이라는 호명은 데이터 구축 노동, 알고리즘의 추출 활동과 산출물의 검열 및 재배치, 물질적‧비물질적 장치들을 포함한 다양한 행위자들의 ‘연합적 창작 모델’을 일컫게 된다. 산출물의 다양성은 최대한 많은 객체들의 개입과 참여에 의해 확보된다.48)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장 생성기와 같은 원리로 산출된 텍스트에 대한 권리가 저자에게 귀속되지 않으므로 시인의 신성화 혹은 물신화가 불가능해진다는 전제이다. 이는 “익명을 표방하”며 “의인화된 사유 관습의 추방”(85쪽)하는 가속류의 방법론이 그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가령 배시은과 변혜지의 시에서 ‘몸’이나 ‘얼굴’로 상정된 주체성‧고유성은 곧 비워져 있는 매체의 자리나 다름없는데,49) 때문에 ‘주체’라는 경험(이자 자리)은 “어떠한 인격체도 커스터마이즈하여 활성화를 거듭 반복할 수 있는 다회용 공용 장”(같은 쪽)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누구나 ‘익명’의 자리에 자신을 기입하여 발화를 이어붙일 수 있다. 즉 가상 인터페이스처럼 기능하는 가속류는 광장‘의’ 시를 넘어 광장‘으로서의’ 시를 향한 공동 프로젝트에 가장 최적화된 모델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속적 몽타주”(88쪽)를 통해 가속류의 독특한 유형을 제시했던 성다영의 시를 떠올려보자. 성다영이 주로 활용하는 단문의 절합 원리―짧은 행 단위로 특정한 주제들이 빈번히 전환되는 모습은 마치 알고리즘적 피드를 연상케 한다. 알고리즘적 피드가 유저를 무한 스크롤에 놓이게 하여 인지의 탈숙련화를 유도하는 것이라면, 한편으로는 더 잘게 분열된 개개인이 아주 다른 목소리들과 무작위적‧즉각적으로 접속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즉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형식상) 동일한 층위에서 무한히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데 성다영의 가속류가 유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락된 목소리를 찾아서 연결하고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내포 시인의 역할이 중요하게 요구되지만, 이는 실제 시인이 특권화되지는 않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작업이 될 수 있다.50) 시쓰기의 허들을 낮추고 비선형적 연쇄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입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이 ‘공동 창작’의 기획은 발화의 특권성이 광장에 있는 모두의 몫으로 돌려질 때 의의가 있다.
문학은 당대 현실과 시대감각의 가장 첨예한 재현일 뿐만 아니라 수용자로 하여금 시대적 명령을 체화하고 그 형식을 학습‧모방하도록 하는 재생산 장치이기도 하므로, 가속류가 내면화한 플랫폼 알고리즘의 문법은 가속류의 독자들에게도 각자의 인지 회로를 자동화하여 시 창작에 알고리즘 장치를 도입하도록 권유한다. ‘당위적’ 현실이 아닌 한에서, 이들은 인지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현실의 정언명령에 부합하는 한편, 세계가 같은 증상을 공유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속류는 이미 인지화된 기술 장치와 공동 창작을 수행하는 시인 것이다. 이때 창작 주체들이 특별히 기계를 선망하거나 탈인간-되기를 간절히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금의 물적 조건과 장치들이 매체의 속성을 내면화한 주체와 시적 양식을 생산한다는 것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더 채굴할 것이 없어 보수화되고 고착화된 창작 규범을 갱신할 다른 상상력과 실천들이 요구되며, 이는 더욱 다양한 형식들의 경합을 활성화하면서 동시대 시가 갈 수 있는 “아주 많은 길을 내”(93쪽)게 될 것이다. 가속류는 그 진원지의 이름이다.
- 1) 김아영의 영상 작품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 속 문지기의 말이다, ‘다공성 계곡’ 연작에서 거주지가 파괴되어 포터블 홀을 따라 끊임없이 표류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의 형상은 광물과 석유 자원의 무분별한 적출로 인해 텅 비어버린 지하의 구멍, 비트 로트(bit rot), 강제 이주되는 난민, 행정 서류에 기입되지 못해 비가시화되는 예외자들, 물질적 기반을 따라 전 세계로 운송되는 데이터의 흐름과 겹쳐진다. 이처럼 “다면적 이주의 양상들이 포개지고 중층화”되는 모습은 오늘날 정착 식민주의의 물리적 운송에 관한 가장 적확한 비유처럼 보인다. 김아영, 「서문―다공성과 당혹감에 관하여」, 김아영 외,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일민미술관, 2018, 43쪽.
- 2) 투고자,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이하 「가속류」,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은 우세화되고 있는 가속류 창작 기법을 중심으로 동시대 시의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 시도이다. 물론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시인마다 상이하며, 그들도 모든 시를 가속류라는 장치에 의거하여 쓰지는 않는다. 가속류라는 틀은 동시대의 특정한 현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도입한 무수한 관점 중 하나일 뿐이므로, 다른 기준에 의한다면 각 시는 다르게 분류되고 분석될 것이다. 이하에서 이 글을 인용할 경우에는 본문에 쪽수만 표시하며, 관점으로서의 가속류와 방법으로서의 가속류는 표기상 구분하지 않기로 한다.
- 3) 기계적 예속이란 권력의 개별 주체화와 함께 사회적 복종 기제를 형성하는 것으로, 플랫폼 자본주의의 권력이 주체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마우리치오 라차라토, 『기호와 기계―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신병현‧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7.
- 4) 형식적 자기 복제를 통해 단기간에 시구를 대량생산하는 인지 자동 장치로서 가속류는 압축적‧추상적인 가상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체화한 것처럼 보인다. 질적 다양성보다 양적 패턴 확보를 목표로 하는 가속류 장치는 생산 알고리즘의 원리를 적극 옹호하는 좌파 최대주의의 비전과 닮아 있으면서도,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를 강화하고 탈물질적 환상 주조에 공모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남긴다.
- 5)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외주의 외주화가 상시화됨에 따라 이윤과 지대가 결합한 형태로 부가 축적되며, 자영업자로 정체화된 개인들의 인지적 분업으로 헤테로메이션이 형성된다. 이는 중세 경제모델로의 회귀와 유사하다는 면에서 ‘디지털화된 중세’로 일컬어진다. 신현우,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에서의 헤테로메이션 연구―‘인지자동화’는 잉여노동을 어떻게 포획하는가?」, 『한국언론정보학보』 118호, 2023, 143쪽.
- 6) 인공지능 논의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비판적 시각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공지능은 소수 특권층의 자본 증식을 위해 다수 사용자의 데이터를 착취하는 식민적 장치다. 디지털 플랫폼은 데이터 추출주의(extractivism)에 최적화되어 있다. 둘째, 물리적 조건의 비가시화 문제이다. 흔히 서버-클라우드는 무한하고 친환경적인 데이터 저장고로 상상되지만, 여기에는 데이터 센터의 화석연료 의존으로 인한 자원 고갈과 환경 문제, 블랙박스화 혹은 고스트 워크로 대표되는 노동력 착취의 문제가 긴밀히 얽혀 있다. 셋째, 인공지능은 ‘지능’이 아니라 알고리즘 패턴의 통계학적 집적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더불어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인간의 인지능력과 창조 능력은 저해되는데, 이는 인지를 외주받은 인공지능이 단축된 미디어 경로를 굳힘에 따라 더욱 심화된다. 넷째, 슬롭(slop)과 스크래핑(scraping)의 문제가 있다. 슬롭이란 투입되는 데이터 원료의 품질 하락에 따라 합성물의 질적 저하가 발생하고 인공지능이 그 합성물을 다시 학습하면서 연쇄적인 데이터 부실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광범위한 표본 데이터의 확보 없이는 질적 저하를 피할 수 없으므로 데이터를 무작위로 포획하고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스크래핑 등 윤리적 차원의 문제 또한 발생한다.
- 7)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적 이성과 테크놀로지의 개입을 통한 살아 있는 물질의 자본화를 인간을 강화하는 한 방법으로서 긍정한다. 그리하여 “규범적으로는 신휴머니즘의 윤리적 가치의 담지자로서 개인을 복권시키고, 정치적으로는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연동되어 있다”. 또한 캐서린 헤일스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분리를 답습하고 정보의 패턴으로서 정신을 물질의 구현보다 특권적 지위에 놓는다고 비판한다.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페미니즘―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혁의 힘』, 윤조원‧이현재‧박미선 옮김, 아카넷, 2024, 30쪽, 110~115쪽.
- 8) 초선형적 채널 전환의 감각에 대해서는 실비오 로루소, 「사용자 조건―컴퓨터 주체성과 행위」, 새로운 질서 그 후 엮음, 박재용 옮김, 『투명한 장벽, 플랫폼을 배반하기』, 새로운질서그후, 2022, 74쪽.
- 9) 이와 관련해 강지희의 언급은 자율적인 개인상의 회복이라는 전제 자체를 비판하면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상상력이 바뀔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어 주목된다. 강지희는 이를 바탕으로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을 완전히 다른 범주에서 상상해볼 수도 있음을 강조하는데, 그 제안대로 감상자나 결과물에 기반해 범주를 재구성한다면 개인의 창작물로 귀속되지 않는 예술형식과 그 역할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418쪽.
- 10) 이광석은 오늘날 우리가 ‘의식 자동화’라는 자동화의 3차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강조하면서, 생성형 인공지능이 지식 생산과 창작활동을 급격히 자동화하는 현상을 두고 정신노동 측면에서의 인간의 기능 저하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다. 이광석, 「아마추어 리믹스 문화의 레퀴엠―AI 합성 미디어 자판기를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차라!」, 『퍼블릭 아트』 2024년 7월호, 98쪽.
- 11) 이데올로기는 사변적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장치의 수행이 생산하는 믿음이자 더 나아가 주체를 대리하는 장치들의 믿음이라는 알튀세르의 언급을 상기해볼 때, (‘국가 장치’에 대한 개념 수정이 필요한 것과 별개로) 오늘날 인공지능 플랫폼은 동시대 가장 유용한 이데올로기 생산 장치일 것이다. 물론 그 이데올로기란 삶의 수익화로의 전환이라는 단 하나의 명령이다.
- 12)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37쪽. 그에 따르면 AI 시스템의 생성과 유지를 위한 광물자원과 에너지, 노동 자원, 데이터의 무작위적인 대량 수집은 모두 추출로 규정할 수 있다. 크로퍼드는 이를 바탕으로 무형의 청정 기술로 상상되(도록 정치화되)는 인공지능이 지극히 물질 기반적이며 착취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음을 논증한다.
- 13) 플랫폼 수수류가 “이윤이라기보다는 지대”이므로 “자본이 지대(rent) 의존적인 체제로 전화”하는 현상은 주목을 요하는데, 이는 지대 중심의 봉건 체제가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로 발전해온 근대화 역사를 역행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토지로서 디지털 플랫폼은 메타데이터라는 지대를 수탈함으로써 착취 구조를 공고히 한다. 지대로 수취되는 잉여가치는 인간-비인간의 데이터 노동의 산물이지만, 비고용 형태이므로 임금은 지불되지 않는다.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인공지능과 인지노동」, 『문화과학』 2021년 봄호, 67~69쪽. 이와 같은 이윤에서 지대로의 이(역)행은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결합, 수탈자의 생산과정 밖으로의 전위를 시사한다. 같은 글, 70쪽.
- 14) 이러한 디지털 플랫폼을 가리켜 윤원화는 “생산‧유통‧판매‧소비”가 동시에 일어나고 그 잔재들이 퇴적되는 아카이브 겸 폐기물 처리장, 또한 그렇기에 잠재적 수익화를 내장한 ‘광산’이라 일컫는다. 윤원화, 「땅을 파는 손」, 『쓺』 2024년 상권, 377~378쪽.
- 15) 온/오프라인의 영역이 무화되는 오늘날 현실은 가상으로의 포섭이 가속화되는 데이터 사회라 할 수 있다. 데이터 사회란 “인간 신체의 모든 발화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자원들이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중심 추동력이 되고 데이터 알고리즘(프로그램된 명령어)을 통해 자본 가치와 신체 통치를 구성하는 신흥 테크노자본주의 사회”를 의미한다. 이광석, 『데이터 사회 미학―테크노자본주의 시대 아티비즘』, 미디어버스, 2017, 8쪽.
- 16) 반데카르트적 인지과학은 인지 과정이 뇌에 한정되지 않으며 신체 및 환경 구조가 그 일부를 구성함을 전제한다. 외부 구조에 담긴 정보를 이용 가능하게 변환‧지각하는 것이 인지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외부 형식을 구축하여 정보를 저장하는 일은 기억 과제를 환경에 떠맡겨 생물학적 기억의 부담을 분산한다. 그리고 이는 내부에 알고리즘을 설치하여 인지적 수고를 이양하는 가속류의 기본 원리가 인지적 비용을 절감하려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암시한다. 마크 롤랜즈, 『새로운 마음 과학―확장된 마음으로부터 체화된 현상학까지』, 정혜윤 옮김, 그린비, 2024. 더 나아가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각자를 몸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인공지능이 물질적 기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는 다른 시각이다. 인공지능은 우리 신체와 인지를 나눠 가짐으로써 숙주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실행―실현한다.
- 17) 이는 단순히 신체 기관의 연장으로서 기능하는 테크놀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처럼 사고한다는 것, 곧 장치적 사유에의 예속과 그 재생산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기계적 연동을 확장하는 트랜스휴먼의 역량―인간의 역량―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 글에서 전제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은 기존의 현실 질서와 휴머니즘이 공고히 유지되는 중에 새로운 인식을 도입하는 도구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무엇보다 “세계가 지각되고 이해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물적 토대”이다. 케이트 크로퍼드, 같은 책, 29쪽. 강조는 인용자.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넘어, 근대적 인간상을 전제로 규범화된 지각‧인지‧사고 체계, 물적 하부구조 자체를 급진적으로 해체하고 재배치하는 양상을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18) 로지 브라이도티, 같은 책, 102쪽.
- 19) 이러한 일체화된 시스템으로의 통합은 곧 “과학기술의 정신을 하나의 중앙집권적 기술 권력으로 조직화”하고자 하는 테크노토피아의 비전이기도 하다. 신현우, 「프로메테우스의 유토피아―자본주의 ‘소셜 픽션(Social Fiction)’을 지양하는 미래 기술정치의 재구성」, 『문화과학』 2022년 가을호, 44쪽. 그리고 이는 ‘단 하나의’ 생태계를 통해 지배적 관점을 확립하고자 하는 인공지능 산업의 식민주의적 충동에 포섭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케이트 크로퍼드, 같은 책, 21쪽.
- 20) 조정환, 같은 글, 62쪽.
- 21) 마크 롤랜즈는 “인지의 내용이 아니라 인지의 매개체”에 주목하여 인지 과정을 신경적‧신체적‧환경적 구조와 과정의 연합체로 간주하는 ‘연합된 마음 이론(amalgamated mind)’을 주창한다. 이는 마음이라는 근원이 있어 거기에 어떤 속성이 달라붙는다는 식의 흄적 사고나, 동일한 행위가 같은 마음을 구성한다는 구성주의와는 변별된다. 이 글은 심적 과정을 ‘연합’으로 상정한 그의 관점을 따른다. 마크 롤랜즈, 같은 책, 147쪽, 329쪽.
- 22) 김언, 「언제 올지 모르지만, 이미 오고 있는, 문장 생성기에 대한 고달픈 명상」, 『현대시학』 2016년 4월호, 55쪽.
- 23) 그가 유하의 「눈을 위한 시」와 비교하여 이수명의 시 「하양 위로」를 배반의 논리로 읽는 방식을 보라. 같은 글, 54쪽.
- 24) 같은 글, 56쪽. 즉 그는 인지적 수고를 들인 시 쓰기와 우연의 산물에 사후적으로 논리를 부여하는 작업의 생산물이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본다. 인공지능의 우연적 배치 역시 ‘방향성’과 ‘거리감’의 축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기에 시 창작은 충분히 자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 25) 이상우는 방치형 게임이 인기를 얻는 이유가 단순노동으로 변질된 게임의 반복 구조를 자동 기능이 대리해주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상우, 「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게임제너레이션』 3호, 2021, 9쪽.
- 26) 박이선, 「스스로 움직이는 게임―방치형 게임에서의 플레이들」, 『게임제너레이션』 3호, 2021, 18쪽
- 27) 덩 젠은 방치형 RPG의 플레이어가 알고리즘이 계획한 게임 경로에 따라 움직일 뿐 게임 경험의 창조에는 개입할 수 없어 감수성이 수동화되는 양상에 주목하여, 이를 무조건적 보살핌을 자동으로 제공하는 ‘알고리즘 모성’에 자아를 양보한 것이라 비판한다. 덩 젠, 「방치형RPG 비판―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홍명교 옮김, 『게임제너레이션』 17호, 2024, 99쪽.
- 28) 이는 알고리즘적 피드 생성 모델의 방식과도 흡사하다. X(트위터)와 같은 SNS의 알고리즘적 피드는 ‘마찰’의 요소를 최소화하여 유저를 무한 스크롤 상태에 놓이게 하며, 여기에는 유저를 인지의 무한 휴지 상태로 포섭하고자 하는 플랫폼 알고리즘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실비오 로루소, 같은 글, 67~68쪽.
- 29) 중요한 것은 이 투자가 신중한 선택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플레이어는 유도된 대로 움직일 뿐 사실상 선택지는 없으므로 그저 ‘진정한 결말’을 유보한 채 상시 활성화 상태에 있게 된다는 점이다. “게임 노동자”에서 “자산 소유자”로 정체성이 변모함에 따라 플레이어는 “자동 증식하는 캐릭터, 장비, 소품, 화폐 등 개인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의 포트폴리오와 리스크를 신중하게 최적화하여 게임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동 전투에 참여한다.” 이제 플레이어는 ‘관리자의 상상력’을 게임 경험으로 획득하면서 “기업주처럼 ‘제스처’를 취하고 ‘지시’하며 ‘알고리즘 작업자’가 자동으로 명령을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하며, 이는 “현대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덩 젠, 같은 글, 108~109쪽.
- 30) 같은 글, 110쪽.
- 31) 박이선에 따르면 방치형 게임의 중요한 유인 동기는 “집중, 몰입, 관심이라는 인지적 자원”을 절약하는 데 있다. 박이선, 같은 글, 18쪽.
- 32) 가속류 시의 가장 일반적이고 급진적인 예시들은 「가속류」에서 확인할 수 있다.
- 33) 최근 오 년 이내의 주목되는 예로 문보영의 『배틀그라운드』(현대문학, 2019)를 비롯해 던전에 대한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서호준의 『소규모 팬클럽』(파란, 2020)과 『엔터 더 드래곤』(파란, 2023)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시집에서도 내부 메커니즘의 알고리즘화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 34) 정끝별에 따르면 김승일은 『여기까지 인용하세요』(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적극적으로 “‘기계-되기’, ‘인공지능-되기’를 기획”하여 “기계(인공지능)를 작동시켜 학습된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입력된 ‘키워드(지시체)’대로 써내는 엠에프(머신픽션)라는 새로운 ‘장르’의 글쓰기를 선언”한다. 정끝별, 「인공지능 시대 한국 현대시의 생성시학」, 『이화어문논집』 60집, 2023, 105쪽.
- 35) 김유림의 『별세계』(창비, 2022)는 메타 화자 ‘김유림’으로 하여금 “‘꽃나무’와 ‘장미주택’이 있는 ‘종암동’ ‘골목’이라는 한정된 동선을 중심으로 걷고-보고-생각하는 연속적인 행위 다발”을 반복적으로 구축하도록 한다. 이는 마치 행위 연속체가 ‘만남 달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추동되는 한편 ‘그리움 극복’이라는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해 가상의 맵 구간에 고착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일종의 순환 회로를 그리며 반복되는 정념과 상념들은 “같은 장소에서 중층적으로 포개지며 레이어를 축조”하는데, 이후 이 레이어를 관찰하는 시선들의 분할 양상과 내부 행위 주체의 코스 이탈 등은 김유림을 여느 가속류와 차별화하는 점이다. 한편 “축적된 기억이 (…) 반복을 발생시키는” 양상은 이후 살펴볼 방치형 인지-기계의 설치와 그 효과를 암시한다. 투고자, 「S#_회귀하는 꿈과 발산하는 꿈―이지아, 『이렇게나 뽀송해』(문학과지성사, 2022) 김유림, 『별세계』(창비, 2022)」, 『문학과사회』 2022년 가을호, 324~326쪽.
- 36) “리셋-망각의 기제가 전개를 추동하는 양상”이 “2010년대에 보편화된 시 창작의 전략이기도 하며 이후 온라인 게임의 법칙과 적극적으로 연동한 형태로 심화되고 있다. 2000년대의 만능 환상 세계와 달리 최근에는 가상에서조차 패배하고 심지어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는 양상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데” 그 목적은 “이야기의 무한 지속”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투고자, 「망각을 위한 아르케이온」,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35쪽.
- 37) 가령 김종연의 「A-long take film」(『월드』, 민음사, 2022)은 이유야의 『일인조』(파란, 2022)의 세계관과 유사하게, 가상 환경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장면을 그린다.
- 38) 조시현의 「크리피파스타」(『아이들 타임』, 문학과지성사, 2023)에서 “캐릭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 다시/시작하시겠습니까?//▶ Yes/No”라는 메시지를 띄우는 인터페이스는 망각이 전개를 추동하는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다. 같은 시집의 「아이들 타임」에서는 게임의 완결을 지연하며 일부러 고착되는 양상, 누군가 관찰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인식 또한 드러난다. 이와 유사하게 변혜지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에서도 완벽한 엔딩을 위한 리셋이 종종 그려지며(“이번에도 완벽한 엔딩에 실패했다고/신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린다 (……) 시스템을 초기화하시겠습니까?”, 「누군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내가 태어나는 꿈」, 「예쁜꼬마선충」 등은 관찰의 무한 소급 장치를 대표한다. 이때 길게 뻗어 가상 세계에 개입하고 통제하는 ‘손가락’은 외부 세계의 플레이어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한다(「꿈이 긴 팔을 뻗어」). 이는 앞서 본 『월드』에서도 빈번히 발견된다.
- 39) 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투고자, 「마음이라는 텅 빈 필드―김지민 「저글링」, 배시은 『소공포』, 이유야 『일인조』」, 『서정시학』 2023년 봄호, 255~259쪽.
- 40) 「공동창작의 시」는 이러한 특징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시와 독자에 대한 견고한 분리적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시를 기웃거리는 ‘독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독자로부터 시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이 ‘공동 창작’은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혹은 “연단의 시인”들이 수행하는 공동 창작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달라 보인다. 그러나 결국 이 세 시인이 각자 “독자와 재밌게 놀았”다는 사실이 강조되면서 당초 이들의 ‘공동 창작’ 의도가 독자와 노는 것에 있었음이 밝혀지고 이전까지의 시적 흐름을 배반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내부 침잠 속에서 가능해지는 이 ‘자기 자신과의 놀이’는 시인 자신들을 한 쌍씩 더 만들어내면서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 41) 문보영,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문학동네, 2023.
- 42) 자아의 가상화가 특정 세대의 ‘생존 전략’이며 ‘현실의 자아’가 살아 있다는 실감을 ‘회복’하고자 아바타 자아의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박상수의 주장에 대해 제기한 의문(투고자, 「망각을 위한 아르케이온」, 35쪽」)에 견해를 덧붙이자면, 동시대 시에서의 망각-리셋 루프는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정동을 축조하거나 무의지적으로 거대 의지에 포섭되어버린 것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시 내부에 ‘환경의 정보 보유 구조’를 설치하는 양상 자체가 지닌 의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치형 인지-기계는 그들의 인지의 일부로서 이미 구축된 구조를 다시 실행하는 것만으로 시구를 양산할 수 있는 동시에, 해소되어야만 하는 정동을 각 기계에 분배하고서 반복 운동을 시키기에도 유리하다. 지면 위에 공간화된―영원히 현재에 갇힌―특정한 시간이 창작 주체와 유리된 채 가속되고, 그 부산물이 다시 시구로서 되먹임되는 것이다.
- 43) 가분체 주체의 순간 이동이라 할 수 있는 플랫폼 A에서 플랫폼 B로의 즉각적이고 매끄러운 채널 전환과 그러한 시간성 압축의 감각은 플랫폼을 떠받치고 있는 실제적인 물적 조건들에 대해 상상할 여지를 축소시킨다.
- 44) “결말이란 불편한 충격이자, 항상 최신 업데이트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주문하는 기술 제일주의에 방해가 되는 존재이다.” 우리 각자는 “완벽한 연속성을 향한 끝없는 노력”에 복무하도록 동원된다. 그래프턴 태너, 『포에버리즘』, 김괜저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4, 37쪽.
- 45) 역사성의 부재는 리믹스와 변별되는 생성형 인공지능 결과물의 주요한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광석, 같은 글, 99쪽. 윤원화는 인공지능에 의해 무한히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 특정한 관점과 인류의 집단적 기억이 모두 용해되고 해체되어 역사성을 상실한 이미지를 ‘데이터-석유’라 비유한다. 어쩌면 이 “데이터-석유의 스펙터클”은 문장 생성기의 아카이브 추출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윤원화, 같은 글, 378쪽.
- 46) 일부러 노스탤지어를 생산-제거-재생산-제거하는 것은 자본의 중요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노스텔지어라는 ‘비생산적’인 감정적 동요를 억제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영원화(foreverizing)’ 과정이 “소비와 선택이라는 환상을 통해 작동”한다. 클라우드 아카이빙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그래프턴 태너, 같은 책, 21쪽. 노스탤지어 콘텐츠의 폭증으로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착각되지만, 실제로는 노스탤지어의 정복 심리를 포지셔닝한 ‘수익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이 완결 지연 등으로 노스탤지어를 더욱 생산해내거나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익힐 기회를 앗아감으로써 노스탤지어의 제거 필요성을 증폭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수익을 얻는 것은 소수 기업에 불과하다. 같은 책, 36쪽.
- 47) 커먼스(commons)는 “국가나 자본에 속하지 않는 공통재”로서 “배타적 소유권이 아닌 공동 관리와 공유, 탈중앙화와 집합 행위를 통해 쌓아올려지는 네트워크의 부를 구조화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비정형 데이터 또한 재산권에 귀속되지 않는 커먼스에 포함될 수 있다. 신현우, 『알고리즘 자본주의―신경망, 인공지능, 비인간 시대의 자본과 노동』, 스리체어스, 2024, 111쪽.
- 48) 이러한 산출물이 예술작품인지에 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술의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는 흔히 ‘예술가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나 ‘제출된 예술작품의 예술작품임에 대한 승인의 문제’가 쟁점으로 다뤄지곤 하는데, 전자는 스스로 작품의 완성을 승인할 수 있는 평가 능력과 의도의 문제를, 후자는 설득과 사적 개념화의 문제를 내포한다. 김재인은 인공지능의 산출물이 수용자에게는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자기 평가가 불가능하기에 그 자신이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53~57쪽. 이는 이동휘가 언급한 ‘예술 개념임’의 설득 차원이 부재한 채 그 판단이 인간에게 맡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동휘, 「예술은 사적이다」, 이여로‧이동휘,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언어‧이론』, 미디어버스, 2022, 34쪽. 시 생산 과정에서 인지 활동 자체가 소거되다시피 한 인공지능의 시는 독자가 직접 ‘예술작품성’을 수립하고 설득하는 일을 더욱 적극적으로 요구함에 따라 수용자 관점에서의 예술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의 가능성을 연다. 여기서 자신이 획득하거나 배합한 시를 스스로 해석하고 비평하는 과정, 즉 김언처럼 사후적으로 내적 논리를 구축하는 다중의 개입 활동이 예술활동으로 승인될 수 있다. 그 유용한 방법 중 하나로 제안되는 것이 행위적 서사의 창작이다. 투고자, 「비평 게임 설계하기―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문학동네, 2023)」,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260~261쪽. 한편으로 이는 상시 활성화된 비평 주체의 유입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 49) 주체는 “철저한 익명의 개체로서 자신을 숨겨 일체화된 시스템 아래 귀속되고 몸은 그저 공유된 사고가 저장되거나 옮겨가는 매개로 활용”(86쪽)될 뿐이다. “얼굴을 잃어도 마음이 계속됩니다. 이것은 지속 가능한 사랑이에요……”(변혜지, 「탑독」,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 50) 이러한 시 창작 과정에서 특권적 인간으로 상정되는 ‘시인’의 창조적 능력을 발견하려 하거나 ‘시인’이 창조적 원천으로 여겨질 때 기만적인 이율배반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가속류를 활용한 ‘광장으로서의 시’에 대한 상상은 시인 개인의 차원에 맡겨진 몫이 아니라 지금의 장치와 제도, 관습의 개편 속에서 가능한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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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분유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4 박동억 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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