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청색종이 2024년 겨울호(제14호)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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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1. 주석으로 남은 말 끝내 말하지 않아서,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완결되지 않는다. 미완성의 일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물론 심리학적 개념으로서의 정확한 정의는 다르지만 미완이라는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연민과 응시의 감각. 시는 언제나 그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에 머무르며 우리를 흔든다. 비평이 그 흔들림을 정리하고 서열화하고 요약하는 방식으로 시에 접근할 때 무언가는 반드시 누락된다. 나는 그 누락된 자리,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문장 곁에 남겨진 것들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자리에 주석처럼 붙는다. 최근 우리 비평은 점점 더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세이적 비평, 1인칭 비평, 자기 서사의 회복. 그것은 오랫동안 구조적 불투명성 속에 머물렀던 비평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시도이며,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들이미는 행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어떤 문장은 오히려 '나'의 감정을 철수시키고 대신 더 오래 응시하고 더 천천히 다가가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바로 그 요구에 응답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거의 모든 비평이 한 편의 시 앞에서, 시가 말한 것과 침묵한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려고 문장 옆에 오래 머무르고 부단히 응시한다. 비평은 이미 '시 앞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 비평의 부단한 출발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비평이 도달하기 위해 설정해둔 목적지를 '전달'이 아닌 '증명'으로 다시 지정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통과해 독자에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에 도달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결정이다. 그 결정은 말을 침묵으로, 해석을 응시로, 감정의 진술을 주의의 태도로 바꾸는 형식적 전환이며, 동시에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의 윤리적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석적 평론은 단지 명명적 발명도, 마케팅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평론이라는 장르 안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던 어떤 잠재적 가능성, 기존의 비평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었던 윤리적 감수성의 방향성을 명시화하고자 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요청하는 한 명의 윤리적 독자로서 실험해본 기록이다. 한 발 늦은 문장으로, 아니 애초에 너무 일러서 말을 멈춘 문장으로. 1인칭 비평이 감정의 진폭을 밀어 올리는 고백이라면 주석적 평론은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을 문장의 그림자처럼 걸어두는 일이다. 그래서 주석적인 평론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 글쓰기다. 나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문장의 여백에 오래 머물며 침묵의 밀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주석적인 문장은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 깊은 곳을 통과한 언어이며 끝내 도달하지 못한 말의 끝자락이다. 내가 머문 시간만큼 이 문장은 스스로의 침묵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처럼 쓰인다. 끝내 말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 시 앞에 주석처럼 붙을 것인가. 나는 류근의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를 선택했다. 한 시집은 등단 후 18년의 침묵 끝에 도달한 첫 문장이며, 다른 한 시집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언어의 경계를 탐색하는 시도다. 두 시집은 서로 다른 시차와 온도를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음'과 '도달하지 않음'을 전제한 채 끝내 문장을 선택한다.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도착하지 않을 말을 계속 써 내려간다. 단지 감정의 양태나 표현 방식이 다른 게 아니다. 류근은 고백한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상처적 체질』, 「어떤 흐린 가을비」)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가 언어화되는 순간—누군가에게 들리는 순간—속되게 소비될 운명을 자각한 시인의 언어적 체념이자 그 감각의 응축이다. 『상처적 체질』의 슬픔은 그래서 '진짜'이기를 포기한 슬픔이다. 표현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끝내 표현되는, 그래서 감각으로만 읽힐 수 있는, 어떤 내부로 굴절된 상처의 언어다. 그러나 이 언어는 김근의 시 앞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김근은 말한다.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 「에게서 에게로」) 상처는 폐쇄되지 않고 이동한다. 김근의 시 속 상처는 정적인 고통이 아니라 방향과 운동을 가진 감정이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하나의 문장 속에서 다른 구절로 옮겨가는 관계적 감염이다. 여기서 상처는 타인의 것으로 흘러들고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 흐름은 류근이 거부한 바로 그 순간, "함부로 눈이 마주친" 순간(「어떤 흐린 가을비」)에서 출발한다. 김근의 시는 류근의 시를 주석한다. "왜 당신은 상처를 자기 안에만 가두는가?" "그 상처는 타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가?" 김근의 언어는 묻지 않으면서도 되묻는다. 류근이 선언한 '삼류화된 감정'은 김근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더는 감정이 중심이 아니라 감각의 궤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화한다. 고백은 더 이상 정서의 진실이 아니라, 감각이 거쳐간 자리의 구조가 된다. 이 전환은 해석이 아닌 잔여이며, 문장이 말한 것보다 문장이 말하지 못한 것에 머무는 응시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김근의 시 또한 류근의 시로부터 되묻는다. 타자에게 흘러간 감정은 끝내 다시 돌아오는가? 관계는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는가? 『상처적 체질』의 음울한 자족성은 『에게서 에게로』의 관계적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에게서 에게로』의 파열된 리듬은 『상처적 체질』의 감정 구조를 되틀어보게 만든다. 김근의 '관계적 감각'은 류근의 '내면적 구조'를 질문하고, 류근의 '리듬화된 감정'은 김근의 '언어 바깥의 감정'을 불러낸다. 서로는 서로를 주석한다. 그러나 그 주석은 해설이 아니다. 불완전한 해석, 조각난 반응, 때로는 비틀린 되비침이다. 그렇게 두 시집은 하나의 장(場)에서 서로를 반사하며, 상처의 정의를 확장하고, 감정의 구조를 해체한다. 『상처적 체질』은 침묵의 주석이 되고, 『에게서 에게로』는 운동의 주석이 된다. 이 두 주석은 평행선을 그리듯 가까스로 닿지 않는다. 독자는 그 사이의 긴장에서야말로 오늘의 시가 상처를 견디는 방법을 다시 배운다. 2. 응시의 독법—감각의 작동 방식 감정은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대부분 재현되지 않는다. 감정은 말해지기보다는 누락되고 언어는 그것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지연된 리듬으로 감각을 구성한다. 시는 종종 말해지지 않은 감정에 가닿기 위해 언어를 미루고, 여백을 건너며, 때로는 되묻는다. 말보다 오래 남을지도 모를 감각. 언어로는 끝내 증명되지 않을 감정의 궤적. 예컨대 김근의 「정류장」은 그러한 감각의 실패와 구성의 시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가 말했다. 나도 한때 들판이었던 적이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빈 들판이요. 고독하지도 않은데 이것참 남세스럽군, 정류장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다.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생각해보시오. 곡식들은 저마다 열매를 매달고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삽 같은 농기구를 어깨에 걸치고 농부 하나가 들판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을 거요. (……)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빈들판이 되자마자 나는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렸소. 들판이었던 때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소. 빈 하나만 내 몸에 달라붙었을 뿐인데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내게 끼얹어질 줄은 차마 몰랐지 뭐요. 그때 등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 두 개가 빛을 내고 있는 게 보였다. 길고양이일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그 눈빛의 주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만 자꾸 생각되었다. 한 쌍의 눈빛은 이따금 동시에 깜박거렸다. 눈을 감을 때 짐승은 거기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히는 것처럼. (……) 처음부터 내가 기다렸던 게 버스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딘가로 가야 한다. 여긴 정류장이니까. 정류장을 버리고 정류장 혼자서 기다리라고 내버려두고. 나는 짐승의 눈빛 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어쩌면 이 시답잖은 알레고리의 바깥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내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이내 눈빛은 사라졌다. 다시 눈뜨지 않았다. 다시 아무것도. 당신은 너무 일렀거나 너무 늦었소만, 그곳에 눈빛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다시 그곳은. 없어졌다. 다시 바깥은. 빈 들판이 되기에도 빈이 되기에도. 그의 목소리만이 어둠처럼 끈질기게 내 귀를 잡아당겼다. —김근, 「정류장」 부분 빈 들판이 “한때 들판이었던 적”을 회상할 때, 그것은 단지 지나간 풍경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다. 그 회상은 수동적으로 과거의 감각을 재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현재와 미래의 감각의 재생 버튼은 자동적으로 눌린다. 회상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비어 있음’과 과거의 ‘비어 있지 않음’, 들판과 들판이 아닌 무엇, 그리고 그것 아닌 어떤 무엇으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들뜸 없는 기대, 또 그외의 어떤 개연성 없는 감각들이 점철되어 있다. 이 모든 감각을 하나로 이르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 그리움은 실제로 있지 않았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한 미련과 연민의 정서를 일으킨다. 그는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끼얹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그 감각은 실상 여기에서, 있지 않았던 감각을 일으킨다. 있지 않았던 감각에 대한 감각은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내 몸에 각인된다. 경험하지 못한 꿈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에 존재론적 분열을 치유하는 어떤 시에서의 상징처럼 말이다. 그곳에 있었다고 믿는 감각은 어느새 “정말 있었던 것”으로 몸에 각인된다. 그러니까 감각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 구성은 언제나 ‘빈’에서 시작된다. 상실의 자리에서, 결여의 틈에서, 감각은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다. 과거를 새로 쓰는 방식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감각이 실재처럼 작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 과거에 근거한 증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시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기억의 소환이 아니라 발명의 발견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무언가를—사실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무언가를—끝내 구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이 없던 자리를 통해서만 진실에 닿을 수도 있다. 김근이 감각을 작동 시킬 때, 어떤 시들은 조용히 풀어진다. 감각이 말을 밀어내고, 말이 감정을 넘긴다. 그떄 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진실에 닿는다. 어떤 누명을 벗어낸다. 벗겨진 시는 우리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예민한 감각은 더 오래 응시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글은 감각이 언어보다 앞서 있고, 시는 그 감각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비평적 실천이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류근, 「독작(獨酌)」 전문 재회를 믿었고, 새끼 손가락 꼭 걸었다. 그러나 사랑은 또다시 나를 떠나간다. 그때의 같은 자리에 거듭 새겨진 상처는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헤어짐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고 고통의 반복은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만 상처는 항상 새롭게 많아지거나, 깊어지거나, 비대해 질 것이다. 그건 너도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지독하게 사랑한 만큼 지독하게 마음 먹고 단숨에 헤어지자. 라고, 예전의 나였으면 이 시를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완벽히 지워내겠다는 감정의 독단처럼 들리도록 해석해버리기. 혼자 술을 퍼마시며(독작) 이별을 조금 멋스러운 쓸쓸함으로 포장하고, 새벽녘 sns에 올렸다가 다음 날 조용히 삭제하는 글처럼, 대학교에 하나쯤 있을 법한 센치한 선배처럼 만들기. 이런 해석은 정말 우리가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모든 이별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진폭을 서술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제는 좀 더 감각적으로 읽어보자. 자신의 감각을 믿고 문장 옆에 더 오래 머무르면서 응시하는 몸의 언어로 말해보자. 재회를 믿었을 때, 재회를 기약했을 때, 당신의 감각은 어땠는가. 만남의 끝이 결국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나는 예외일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모종의 다짐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건, 감각을 잊어서도, 무뎌져서도, 그것이 멸해서도 아니다. 그 감각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감각 버튼을 누르고 그에 따라 자동 재생되는 진실된 감각을 말해보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었던 사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얼굴조차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공간 속 특정한 날씨와 냄새,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렸던 음악 같은 것.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이 몸 안에서 어딘가 동시에 켜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린다기보다, 그 사람과 얽힌 감각들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 궤적은 항상 비선형적이다. 마트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팝송의 한 소절, 커피잔을 내려놓을 때 손가락 끝에 전해지던 찻잔의 온기, 아니면 그 사람의 코트에서 나는 먼지 섞인 향수의 마지막 노트. 그때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감각’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는 선언은 자동 재생된 감각 앞에서 질문으로 변모한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이 되묻기의 순간에 감각은 문장을 바꾼다. 반문이 아니라, 반향이다. 믿었던 그 미래, 품었던 그 목소리, 붙들었던 그 감각—그것들은 단지 실패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감각의 총체였다. 그리고 그 총체는 말로는 남지 않았지만, 끝내 당신의 몸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다. 감정의 절단처럼 들렸던 류근의 언어는 김근의 감각의 구조를 통과하면서 절단이 아니라 잔류였음을 드러낸다. 시가 말한 것보다, 시가 말하지 않은 여백, 그 여백에서 다시 떠오른 감각, 그 감각으로 인해 드러난 문장.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3. 에게서, 체질로—감각의 회로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은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거듭된 상처의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 「상처적 체질」 전문 “상처적 체질”이라는 말에서 먼저 떠오른 건, 어쩐지 비관적인 단상들이었다. 체질이라,—그 말은 어딘가 책임을 유예하는 언어처럼 들린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변명, 몸에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정서적 면책을 꾀하는 일.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 언뜻 상처를 내면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몸의 감각에게 모종의 중압감을 짊어지게 하며 고통의 근원을 흐리고 상처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처의 열망”이니, “거듭된 상처의 폐허”니 하는 미학적 언어는 상처 입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미화된 언어, 즉 자기방어의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이 시가, 상처는 체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감각은 그 체질 속에 갇힌 반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상처에 대한 일종의 면책 기록일 것이다. 그때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말 거대한 병원이고, 시란 그 병증일 수밖에는.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체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감각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다. 이 시에서 말하는 상처는 어떤 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반복되는 감각의 축적이고, 그 축적의 양상이다.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는 말은 그래서 사건의 인과를 제거한다. 상처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닿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시인은 감각의 구조를 발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감각이 끝나지 않고 반복될 때, 다시 말해 상처가 현재진행형의 감정이 될 수 없을 때 그 감각은 고체화된다. 말하자면 감정은 굳어지고, 감각은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체질”이다. 하지만 체질은 감각이 멈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되어, 말해지지 않으면서도 끝내 몸에 남아있는 상태다.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는 상처는 모두 감각으로서 켜켜이 쌓여 체질이 된다. 체질 때문에 고통은 받아도, 체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끝내 생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그 유명한 말, 너무 유명해서 통속적인 명언이 되어버린 그 말이 체질의 비유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상처적 체질이라는 그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도, 상처를 잘 준다는 것도 아니라, 단지 감각이 만든 문장으로서 상처를 잘 살아내고 있다는 감각 구조의 이름이다. 정리하자면 류근의 언어는 감각을 하나의 구조로 고정한다. 반복되는 상처의 리듬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상처가 감각으로 응고된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류근의 체질은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을 내부에서 되씹고 되풀이하는 구조이지, 타자와의 접촉에서 열린 흐름은 아니다. 그는 감각의 ‘패턴’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패턴은 고립된 채 순환하고 있다. 반면 2부에서 김근이 보여준 감각 구조는 그와 다른 흐름을 구성한다. 김근은 감정을 선형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의 감각을 구성한다. 그는 실재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감각은 말해지지 않은 말, 망각된 장면, 잊힌 풍경 속에서 돌연 작동한다. 그리하여 류근의 감각은 되풀이되는 내부의 리듬이고, 김근의 감각은 되살아나는 외부의 흔적이다. 체질이 되기까지 감각은 응축되고, 되살아나기 위해 감각은 분산된다. 두 감각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의 회로를 완성한다. 말해지지 않은 말, 기억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응시된 감각이 하나의 회로로 엮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은 더 이상 한 사람의 내부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시로, 다른 몸으로, 다른 말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회로 속에서 감정은 해석되지 않고 다만 응시된다. 이제 우리는 그 응시의 방식, 감각의 회로 속에서 김근의 시 「서러우니, 아프니,」(『에게서 에게로』)를 다시 읽어본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는 시, 그 바깥에서만 감정이 반응하는 시. 감정의 진술이 실패한 자리에 감각이 어떻게 잔류하는지, 그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가 교접하는 꼴을 지켜볼 참이었는데 서러우니, 는 어느 문장의 교접에서 빠져나와 여기 있나 아프니, 는 (……)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 바깥은 아리고 아리더라는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이게만 서러우니, 아프니, 바깥도 나도 당신도 완성되지는 결코 않고, —김근, 「서러우니, 아프니,」 부분 이 시는 문장이 완성되기 직전, 혹은 완성되지 못한 채 파열되는 리듬 속에서 감정의 부재를 감각의 형태로 전환한다. “서러우니,” “아프니,”라는 말들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이 언어에 들어서지 못한 채 멈춰 선 쉼표의 흔적이다.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하고, 문장은 감정을 담지 못한다. 그때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감각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비문법적인 어형, 중얼거림, 반복과 흔들림 속에 잔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감각들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문장 바깥에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감정의 발화 실패가 곧 감각의 작동 개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고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감각은 문장 밖에서 흐르고, 그 흐름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패턴이 된다. 이 패턴은 류근의 시가 말한 ‘체질’처럼 하나의 리듬 구조로 굳어지기 직전의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감각의 회로를 만들고 있는가. 류근이 고정된 감각의 구조(체질)를 말한다면, 김근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흘러다니다가 다시 몸 안에서, 말 바깥에서 감각으로 발화되는 장면을 기록한다. 하나는 응고된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지점—말하자면, 감정이 말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깊이 감각되고, 감각이 언어 바깥에서 반복되며 하나의 회로를 만든다는 이 감각의 순환 구조—가 이 글이 추적하려는 “감각의 회로”다. 김근의 시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는 감각이 단일 주체 안에 고립되지 않고 ‘너에게서 또 다른 너에게로’ 흐르는 관계적 회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어떤 ‘나’의 내면에서 발화된 것이 아니라, 이미 ‘너’를 통과해 온 감각이며, 또다시 ‘다른 너’를 향해 옮아가는 언어적 궤적이다. 이 감각은 멈춰 있지 않고 전이되며, 감정의 기원이 아니라 감각의 운동성으로 시를 구성한다. 너는 언제 눈이 멀까 네 입술의 거스러미들이 일어난다 네 말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나는 끝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로 이곳은 범람한다 감정은 여기서도 ‘말해지지 않음’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서러우니, 아프니,」에서의 말해지지 않음이 문장 바깥의 정지라면, 「에게서 에게로」의 말해지지 않음은 감각의 흐름이다. 그것은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이 범람하는 풍경이고, 이 범람은 감정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감각의 홍수다. 고백이 실패했기 때문에 감정은 여전히 감각으로 유예되고, 그 감각은 관계 속에서 옮아간다.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감각의 패턴이자 언어적 관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류근의 감각이 몸에 각인되어 고체화된 것이었다면, 김근의 감각은 타인의 말에 의해 범람하고 이동하며, ‘자리를 잡지 못한 말’로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의 회로는 감정의 전유가 아니라 감정의 유실을 전제로 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감각은 계속 이어진다. 감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를 통과한 감각은 언제나 ‘너’를 향해 열려 있고, 그 감각이 언어를 통해 완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 감각을 감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관계 속에서 돌아오고, 흘러가고, 감염된다. 그것이 감각의 회로이고, 시가 끝내 감정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 글은 감정을 진술하지 않기 위해 감각을 오래 붙잡았고, 감각을 붙잡기 위해 시에 더 오래 머물렀다. 우리가 읽어온 시들은 감정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이 감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조용히 보여주었다.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남긴 리듬을 반복했고, 말하지 않은 감정이 어떻게 감각으로 번역되는지를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그 반복과 전이의 흐름 속에서 감각은 체질이 되었고, 체질은 끝내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감각의 회로는 단일한 자아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늘 ‘너’의 존재를 전제하고, ‘또 다른 너’에게로 건너가는 경로다. 시는 그 경로를 하나의 언어로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말들,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도달하지 못한 언어의 잔해들 속에서 더 정확하게 살아 있다. 비평이 그 잔해 앞에 머문다면, 그것은 해설이 아니라 응시이고,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각의 지속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을 추적하려 했다.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설명이 아니라 구성된 흔적을, 하나의 완결이 아니라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반복을. 그리고 그 반복의 한 가운데에서 시는 말해지지 않았던 사랑을 다시 감각하게 한다. 감각은 다시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 4. 감각 이후의, 시대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마저 예의주시한다. 상처는 쉽게 고백되지만, 그 고백은 종종 감각되기 전에 소비된다. 이미지로, 이모지로, 몇 초 만에 반응하는 감정의 압축된 형식 속에서 슬픔은 감정 이전에 태그가 되고, 상처는 경험 이전에 서사화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말함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슬픔은 말한 뒤에도 남고, 상처는 고백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자주 말하는 일만이 아니라, 더 오래 감각하는 일이다. 말함은 윤리의 출발이지만, 감각은 그 윤리가 지켜지는 방식이다. 말함이 고통의 첫 번째 증명이라면, 감각함은 그 증명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두 번째 언어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묻는다. 하여, 묻게 된다. 감각한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해지지 않은 것의 윤리를 오래 응시했다면 이제 그 감각의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이 감당해야 하는가. 이 글은 끝내 말해지지 않은 어떤 문장 옆에 머물렀고, 그 여백의 떨림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말하라고 한다. SNS에서, 인터뷰에서, 기록에서, 고백의 형식에서—슬픔은 표현되기를 요구받고, 상처는 빠르게 이해되기를 강요받는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자주 망각된다. 우리는 안다. 상처는 말해져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상처는 더 깊은 침묵으로만 남았고, 그 침묵은 누군가가 말하기 전까지 결코 메워지지 않았다. 또한 안다. 말은 때로 너무 빨리 잊힌다.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감각은 증발하고, 감정은 마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무거운 감각이다. 그 감각이 말을 떠받치고, 그 말이 끝내 다시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윤리의 회로. 이 글은 그 회로를 만들기 위한 다만 아주 작고 느린 실험이었다. *부록 시가 감정의 언어라면, 그 감정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동일한 슬픔도 같은 말로는 다시 불릴 수 없고, 같은 고통도 똑같은 문법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시는 종종 세계보다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하지만 때때로 세계보다 먼저 아프다. 세계가 아직 체감하지 못한 감정을 시는 미리 감각하고 그 감각의 구조를 가장 먼저 언어화한다. 그래서 시는 지나간 감정을 말하면서도, 다가올 슬픔을 증언하는 언어다. 이 평론이 주석한 류근과 김근은 그 감정의 시간성에서 서로 다른 리듬으로 같은 고통을 구성해낸 시인들이다. 류근은 감정을 반복과 리듬의 구조로 정제했고, 김근은 실패와 결여의 구조 속에서 감각을 잔류하게 만들었다. 이 부록은, 그 두 언어의 병렬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어떻게 말해왔고, 어떻게 끝내 말하지 못했는지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2010년대 전반의 한국 시는 고백의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발화하기보다는 정제된 이미지와 절제된 문장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일상의 슬픔을 산문시와 서정의 경계에서 절제된 말투로 조직했고,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2012)은 침묵의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감정의 과잉 대신 감각의 압축을 선택했다.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는 원래 1995년 출간되었지만, 2014년 복간되며 재조명된 이후, 감정의 리듬을 신화적 상상력과 병치해 해체한 언어로 다시 독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감정을 고백하거나 날것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응축하고 조율하려는 윤리를 견지했다. 감정은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 속에 미루어지고, 독자는 감정의 진폭이 아니라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감정의 미학이자, 서정의 윤리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시의 문법은 균열을 맞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적 감정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감정의 발화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고, 시는 감정의 고백보다 감정의 불능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안미옥의 『온』(2017)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가장 조용한 언어를 실험하며, 감정을 직접 호명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 자체를 오래 응시한다. 이소호의 『캣콜링』(2018)은 페미니즘적 시선을 통해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각하게 하는 시학을 구축하며, 사회 구조 속 침묵의 감정을 가장 급진적인 형식으로 표출한다. 언어는 더 이상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며, 감정은 더 이상 말로 재현되지 않는다. 시는 감정의 실패를 감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가 모두 파열로만 향한 것은 아니다. 김행숙, 이문재, 김복희 같은 시인들은 여전히 정제된 말 속에서 감정을 환기하며, 느린 서정의 리듬으로 시대를 반사했다. 심보선, 장이지, 함기석 등은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감정을 비틀거나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서정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결국 이 시기의 시는 파열과 구조화, 고백과 침묵, 직접화와 간접화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다층적 국면이었다. 202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시는 감정의 언어를 더욱 신중히 의심하게 된다. 감정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기보다, 애초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감정은 문장 바깥에서 흔들리고, 잔류하며, 실패한다.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는 그 전환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감정은 이제 고백되지 않고, 시는 감정의 실패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쉼표, 중단된 구절, 어긋난 문법은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을 감각하게 한다.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고립되지 않고,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한다. 감정은 감염되고, 옮겨지고, 끝내 다시 말해지지 않는 자리에서만 증명된다. 이 시집은 감정이 말해지지 않음으로써만 말해질 수 있다는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감각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이 2010년의 류근과 2024년의 김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어떤 대표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둘은 각자의 시기를 압도한 시인은 아니지만 각자의 시기가 요청한 감정의 구조에 가장 날카롭게 반응한 언어들이었다. 류근은 감정을 리듬과 반복의 구조 속에서 조율하며 상처를 체질화했고, 김근은 감정의 결여와 실패를 끝내 감각으로 환원하며 언어의 파편 속에서 응시했다. 하나는 감정의 정제이고, 하나는 감정의 잔류다. 이 둘이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병렬 속에서 지금-여기의 감정 구조가 어떤 언어를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이 글은 바로 그 물음의 옆에 붙는 문장이다. 시를 해설하지 않고, 감정을 분석하지 않으며,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각의 흔들림에 오래 머문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응시다. 주석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대의 문장을 바꿔왔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하나의 문장.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도,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에도, 여전히 문장 바깥에 남아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결국 언어를 다시 부른다는 것. 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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