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현대비평 2025년 봄호(제22호)
고통의 법열(法悅)과 깊은 주문(呪文)
1. 고통의 상상력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
이것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문장이 아니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한강의 문장이다. 그 단호함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나 처절하여 차라리 숭고하다. 또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p. 166) 기록하거나 증언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느냐고 통절하게 절규한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으로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pp. 166~167). 이렇게 증언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기, 그렇지만 끝내 증언할 수 없으므로 증언할 수 없는 고통까지 겹쳐서 역설적으로 극화하기, 한강의 고통스러운 숭고미는 필경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물론 그것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경우에만 특화된 수사학은 아니다. 많은 이가 아프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쓴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상력으로 넘어서기 위해, 상상력으로 고안한 대안 세계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 쓴다고 토로한다.
가령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을 창조했고, 인간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을 표출시킨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과 열정의 극한까지 추구하며 우주의 심연을 향해 다가갔다. 두루 알다시피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던 인물이었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다. 은총과 정의가 사라진 고통스러운 연옥, 그 불행과 절망의 황무지에서 전율해야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분노에 찬 이반 카라마조프가 말하듯, 도스토옙스키의 대지는 그 심연의 핵심까지 고통의 눈물로 젖어 있는 형국이었다. 어디를 가도 어디를 보아도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죄 많은 인간의 처참한 몰골뿐이라고 했던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탄식에서도 세계의 고통에 대한 감각은 뚜렷하다. 이같이 타락하고 죄 많은 현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한다. 고통의 심연에서 고통을 초극할 수 있는 참 지혜는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통을 통해서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한 이는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어쩌면 우리는 도스토옙스키 문학 세계를 횡단하고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도스토옙스키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작가들은 대개 ‘고통의 향유’를 통한 미학적 실천을 통절하게 수행했다. 작가들만이 아니다. 고통이 바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던 철학자 레비나스, 예술을 ‘고통의 언어’라고 불렀던 아도르노, 예술적 쾌락원칙의 역승화를 낳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현실원칙의 강고함에 있다고 했던 마르쿠제, 이야기와 함께 경험되는 허구적 체험을 일러 절망 속에서 하는 희망의 체험이라고 논의한 폴 리쾨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 나타나는 상처/고통과 신궁의 기예 사이의 역설에서 예술가의 존재론을 착안하여 상처와 고통을 통한 예술적 영광을 강조했던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 등등의 사유와 고민이 함께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고통의 향유’란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고귀한 예술적 과정이 아닐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응시하면서, 문학의 이름으로, 고통을 향유하는 지독한 역설을 수행할 때, 문학은 자연스럽게 치유의 지평을 예비하며 비극의 숭고미의 어떤 극점을 알게 된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추문화하며, 독자와 더불어 정녕 인간적인 심연의 질문을 열어나간다. 한강 문학의 바탕 의식은 그러하다.
2. 영매(靈媒) 작가와 고통의 법열(法悅)
고통의 순간은 널려 있겠지만,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전쟁터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두드러진다. 트로이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때부터 그렇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반전사상이나 반폭력에의 연대를 열정적으로 펼쳤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런 경우 아닌가. 이른바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 그러니까 <게르니카>(1937), <시체구덩이>(1946), <한국에서의 학살>(1951) 등만을 떠올려도 그렇지 않은가. 큐비즘의 방식으로 고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던 피카소처럼, 한강 역시 고통의 서사가 선형적으로 재현되기보다 입체적으로 포개어지며 고통의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간다. 그러면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전경화한다. 피카소가 여러 방향에서 본 이미지를 한 화면에 구성했듯이, 한강도 상호 시점이거나 복합 시점으로 깊은 고통을 응시하면서, 곡진한 시적 문체로 장면화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서둘러 답하자면 한없이 그윽한 영매(靈媒)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산 자와 죽은 이,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사이에서 하염없이 고통받으며, 끊어진 영혼의 길을 이어주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2)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타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3)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죽은 이도 새롭게 시선과 목소리를 지니게 되며, 가장 고통스럽고 속절없는 서발턴(subaltern) 혹은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 속에서도 청량한 생명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 고통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한강의 시적 문체는 중층적 가역반응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자아와 세계가 충돌하면서도 그 충돌한 세계를 엄청난 에너지로 끌어안는 자아의 감수성으로 인해, 그토록 이상한 가역반응의 결과로 빚어질 수 있었던 게 한강의 시적 문체이다. 다시 말해 문학적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마땅할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면서도 그 고통의 만화경을 모두 자기 안에서 끌어안고 ‘고통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문체로 빛난다. 그런 시적 문체를 독자들이 읽으면, 독자 또한 새로운 가역반응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문체에 이끌려 한강의 세계로 들어간 독자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고통의 항아리에서 슬픔의 숨결과 교감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진실한 인문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가역반응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서로의 외로운 영혼을 이어주는 현묘한 영매 작가의 창작과 소통 과정에서 매우 복합적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붉은 닻」(필명: 한강현)으로 당선되기 한 해 전인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전에 연세대 4학년 때인 1992년 시 「편지」로 연세대 신문인 <연세춘추>가 주관한 연세문화상-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심사위원은 정현종 시인과 김사인 시인/평론가였다. 애도의 정념과 밀도가 어지간한 이 시에 대한 심사평도 인상적이다. 한강 시의 능숙함을 칭찬하는 과정에서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하며,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에 들어있는 풍부한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청 시절부터 이미 한강의 샤먼 시인, 영매 작가로서 에너지가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면에서 1992년 심사위원들의 안목은 탁월했다.
샤먼 시인 한강의 곁에 있는 ‘나무’는 대개 “하늘과/ 나를 이어주”(「새벽에 들은 노래 2」)4)는 우주목(宇宙木, cosmic tree)이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여러 작품에서 꿈 장면에 그런 우주 나무들이 모여 있는 신비로운 숲의 정경이 자못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런 우주 숲에서 서사 속 캐릭터는 종종 엑스터시의 순간으로 입사한다. 가령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 숲에서 밀물에 떠밀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들의 풍경을 떠올리던 주인공은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공포, 불안, 전율, 혹은 “돌연한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휩싸인다. 그런 전율과도 같은 떨림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침례한 다음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5)에 이른다. 이런 떨림과 고통, 전율과 공포, 불안과 각성의 과정에 몰입하는 영매 작가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그 순간 끊어졌던 여러 관계가 이어지고, 안 보였던 상처의 얼룩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린다.
가령 「거울 저편의 겨울 6―중력의 선」이라는 시는 아르헨티아를 방문한 샤먼 시인이 중력의 선을 따라 지구 반대편 한국의 풍경을 보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남미 대륙 남부에 원래 살던 인디오들을 거의 절멸시키고 아르헨티나를 건설한 군인 “로카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6)하는 “나”의 초상을 전경화한다. 그렇게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거기에 몰입하여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어리고 여린 영혼 ‘동호’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준다. ‘80년 5월 광주’를 애도한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세계문학사를 수놓게 된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불과 몇 달 전인 1980년 1월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만약 이사하지 않았더라면 작중 동호의 처지가 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한강은 더욱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동호를 비롯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간 비통한 유령들을 애도하는 영매자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국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이전에 가족사의 비애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흰』에서 드러나는 너무나도 일찍 죽은 언니 이야기,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은 첫 딸의 이야기, 엄마가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7)이라며 간절히 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먼저 간 언니 이야기 말이다. 이 가족사는 들을 수 없었던 아이를 대신해 들어야 하고, 말할 수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서 말해야 하고, 눈도 뜰 수조차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 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영매 작가의 가족사적 배경을 성찰하게 하는 요인이다.
3.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공표되던 2024년 10월 10일 저녁 나는 남도 여수에 있었다. 해묵은 어깨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쪽 병원에 잠시 입원한 상태였다. 기대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받게 된 선물을 받게 될 때 엉거주춤함 같은 느낌을 잠시 거쳐, 한강의 첫 소설집이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5)이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공교롭다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퇴원하여 돌아오던 12일 낮에는 우연히 여수엑스포역 앞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 열린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여순 10·19와 제주 4·3 미술 교류전> 을 관람하게 되었다. ‘탐미협과 여수민미협의 세 번째 만남’으로, 여수와 순천, 제주에서 무자(戊子)년(19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증거하는 고통의 붓질이 참으로 어지간했다.
김영하의 <바다 위 희망의 빛>(2024, Arcylic on Canvas, 162.2×97cm)이나 박정근의 <바다, 엇갈림02>(2023, Pigment print, 100×70cm)은 강렬한 핏빛 바다의 파동과 심연을 응시한 그림이어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경화의 <존재의 시간, 어디에도 있는 어디에도 없는―종남마을>(2022, Arcylic on Canvas, 162.2×130.3cm)은 무너진 돌담과 뒤편의 대나무숲을 그린 작품인데, 그냥 보면 오래된 전원 풍경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1948년 11월 계엄령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 된 종남마을 풍경이라는 것이었다. 무너진 돌담만이 과거의 어떤 흔적처럼 남아있는데 그곳에 살던 이들은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그림들을 보며 나는 전시회 관계자들에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제주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본문보다 제목이 더 긴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이천오년 오월 삽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라는 긴 제목의 시였는데, 직접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한강 작가 역시 화가 김영하의 핏빛 바다의 고통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8)라고 한 게 아니까, 여수와 순천, 광주와 제주의 트라우마를 함께 앓기 위해 늘 “텅빈 항아리가 되”는 자기 몸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울리는 “검은 물소리” “깊은 물소리”(「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p. 36)에 귀 기울인 게 아닐까, 그러면서 샤먼 시인이자 영매 작가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수행한 게 아닐까…… 그런 상념들을 이어갔다.
매우 개성적인 숨결로 이채로운 말결을 파동처럼 빚어, 그윽하고 깊은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는 영매 작가 한강이 초기부터 다룬 인물들은 대체로 세상의 온갖 허물을 모아 앓는 자, 상처 깊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처의 심연으로 내려가서, 왜 현존재는 이토록 탈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왜 세상은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질문한다. 그 탐문은 대체로 여로에서 이루어지고, 여로의 현존은 깊은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형상을 한 경우가 많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 시절부터 그러했다.
일찍이 대학 4학년 때 쓴 「편지」에서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라고 토로했던 한강은 『여수의 사랑』에서 희망이 소진된 상황을 견디는 고통의 흔적을 시리도록 아프게 점묘한다. 대부분 20대의 주인공들인데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적 프리즘 안에서 그들은 이미 청춘이 아니다. 발랄하고 경쾌한 젊음의 풍속이나 세태와는 아랑곳없다. 그들은 고아처럼 버려졌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이 삶을 살며,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또 때때로 살기도 전에 죽어간다. 또한 고독하고 우울하며 피로에 지쳐 있다. 그들에게 세계는 매우 혹독하기만 하다. 가령 「여수의 사랑」에서 바람은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9)라는 부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같은 “잿빛 하늘” 아래 드리워진 길고 짙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얼음 조각”에 피격당한 듯한 현존을 부정하고 신생을 낭만적으로 동경하고 열망한다. 영혼의 숨결을 잃어버린 세대의 고통스러운 초상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현실을 성찰하는 한강이 탐색한 신화소의 하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의미에서 기아(棄兒)의식이다. 모태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의 고통, 부모로부터 버려졌을 때의 아픔, 사회와 현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했다고 느낄 때의 우수 등이 피투성이 같이 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서의 인간 초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신화적인 맥락에서는 역시 기아의식이라는 다발 안에 포괄되는 것들이다. 원초적 고향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할 때 모든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고통스러운 방황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이때 단원신화는 입사식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쳐 귀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상실했던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해체되었고, 신화는 좀처럼 완성될 줄 모른다. 신화의 해체 이후 인간의 삶은 고통의 흔적으로 점철된다. 그럴 때 인간의 여로는 곧 여수(旅愁)의 길이 된다. 귀환을 보장해주는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상실한 자기동일성의 회복은 그야말로 난망이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 「여수의 사랑」은 이렇듯 희망이 봉인된 상황에서 펼쳐지는 현대의 소외된 신화 속에서의 기아의식을 웅숭깊게 형상화한 소설이다. 버림받은 아이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늘 허기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기아(棄兒)와 기아(飢餓)는 가깝다. 여수가 고향인 주인공 정선은 다섯 살에 어머니를, 일곱 살에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머니의 죽음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더 문제적이다. 아버지는 술에 젖은 역한 숨결로 여수 앞바다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그 사건에서 정선만 살아남았다. 아니 홀로 버려졌다. 이 고통은 트라우마의 극치에 값한다. 그로부터 참담한 여수(旅愁)의 나날은 계속된다. 위경련과 결벽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녀가 특히 후각 공포증 혹은 냄새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정선에게 자흔의 출현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비슷한 운명의 그림자를 안고 떠돌며 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살 무렵 강보에 싸인 채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 버려졌던 자흔은 이 버려짐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아니 자기 길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제대로 지녀 갖지 못한다.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어요.”(『여수의 사랑』, p. 41). 이와 같은 여수(旅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속절없이 살아가는 자흔이고 보니, 주인공의 존재의 거울일 수밖에.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상실한 모습을 확인하는 심정은 처연하다. 주인공 정선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자흔이 또다시 여수(麗水)인지 여수(旅愁)인지 모를 길을 떠난다. 그래서 정선도 여수(旅愁)의 여수(麗水) 여로를 택한다. 하지만 그 여로는 고통의 흔적 찾기 이상의 어떤 은총도 허락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고통의 흔적들은 탈난 후각이나 위장 등 여러 육체적, 심리적 증상으로 소설 속에 아프게 새겨진다. 그것들은 해체되거나 유폐된 현대 신화의 파편들이다. 한강이 점묘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현대의 신화들은 차라리 예전의 신화들을 추문화하면서 동시대적 고통의 심연을 비추고 생경하게 드러내는 탈신화적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10) 그런 탈신화의 전략은 디아스포라 주제와 관련한 존재론적 성찰과 함께, 문학의 기본 역할 중의 하나가 버림받은 디아스포라의 운명과 고통에 대한 깊은 응시와 관련된다는 생각을 저작하게 한다. 이 또한 한강 문학 주제의 세계적 보편성과 관련된다.
4.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에서, 혹은 동물성에의 구토
고통의 심연을 향해 한없이 자맥질하는 한강의 ‘여수의 미학’은 되풀이 변형 생성된다. 두 번째 소설집인 『내 여자의 열매』(2000)는 물론 장편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을 거쳐, 연작소설 『채식주의자』(2007),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등 한강의 소설들은 대체로 비루한 현대의 탈/신화와 관련된다. 많은 인물이 여전히 누추하게 태어나고, 출생보다 더 비참하게 버려지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여수(旅愁)의 심연으로 젖어든다. 그와 같은 인간 실존의 고통은 국가 폭력의 문제와 연계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바로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세계가 그러하다.
존재의 근거를 박탈당한 채,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할 곳이나 속할 집이 없고, “찾아갈 곳도 없었고 행복할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장어린 시선을 접고 안도할 곳도 없”11)는 한강의 인물들은 사느라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주 ‘구토’ 증세를 보인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이나 자흔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그랬거니와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 『그대의 차가운 손』의 L,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이정희나 서인주 등 많은 인물이 고통스러운 구토의 박물지를 형성한다.
가령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어릴 적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소망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사슬과 묵직한 철구(鐵球)가 발과 다리를 움쭉달싹하지 못하”12)게 하는 일상의 억압에 가위눌려 살다가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인다. 매일 몇 번씩 토할 때마다 “머리가…… 오른쪽 눈이 후벼 파는 것같이” 아프고 “어깨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입에 단물이”(p. 222) 고인다고 그녀가 토로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의 심연으로 함께 내려가게 된다. 단지 바람이나 햇빛, 물 같은 자연적인 것만으로 살 수 있기를 꿈꾸었던 그녀는, 마침내 고통스러운 실존을 넘어 식물화의 경계로 나아간다. 출장을 갔다가 오랜만에 귀가한 남편은 식물로 변신하는 그녀를 목도한다. 베란다 쇠창살 쪽으로 무릎 꿇은 채 만세 부르듯 두 팔을 치켜올린 아내의 진초록빛 몸과 푸른 얼굴이 마치 상록활엽수의 잎처럼 반들반들했고, 머리카락 또한 싱그러운 들풀 줄기처럼 윤기가 흘렀다는 것이다. 동물적 육체를 넘어 식물화하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남편은 물을 뿌려주는데, 그 순간, 아내의 몸은 “거대한 식물의 잎사귀처럼 파들거리며” 살아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식물 변신담은 연작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면밀한 실감을 얻게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맹수의 눈에 시달리는 악몽을 꾼 다음에 전격적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한다. 짐승의 눈은 피의 형상으로 범벅이 된 채 파헤쳐진 두개골을 비추기도 하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물적인 공격성과 폭력성, 죽음을 몰고 오는 세계 파국의 공포와 불안 같은 것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동물적 공격성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식물적 평화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옹호하는 젖가슴의 상징이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해치거나 죽일 수 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한강의 언어 중에 ‘괜찮아’라는 말은 은근한 마력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괜찮아」라는 시를 참조해 보자. 난지 두 달 된 아이가 저녁마다 울자 시적 자아는 “왜 그래”라는 말을 안타깝게 반복하면서 애태웠다. 그러다 문득 “괜찮아”라는 말로 바꾸어 위무했더니 며칠 뒤부터 아이의 저녁 울음이 그쳤다는 이야기다. “왜 그래”는 따지듯 걱정하는 목소리다. 반면 “괜찮아”는 공감하며 끌어안는 마음의 소리다. 진심으로 위로하며 치유를 기도하는 말이다.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13)을 들여다보며 “괜찮아”라며 달래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둥근 젖가슴의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기에 “괜찮아”라는 말이 괜찮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그랬듯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 역시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 눈과 목소리가 없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헤아려 줄 마음의 눈을 구하기 어렵다. 연작의 첫 작품인 「채식주의자」의 시작 부분부터 그렇다. 서술자 남편은 아내는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끌리는 매력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적는다. 평범하고 무난한 성격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결혼했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권을 행사하려는 인물이다. 육식하지 않겠다는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탕수육을 집어넣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딸은 결국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고 만다. 그런 아버지이니 딸의 꿈속에 개를 오토바이 뒤에 매달아 동네를 끌고 다니다가 잡는 악몽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언니도, 다른 가족들도 대개 “괜찮아” 대신 “왜 그래” 쪽에 가까운 인물로 제시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영혜의 악몽은 계속되고 섭생은 어려워지고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야위어 간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다친 상태가 되자 둥근 젖가슴도 야위어 날카로워지는 형국이 된다. 무엇보다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고 만다.
물과 바람과 공기와 더불어 숨 쉬며 초록빛 나무가 되려 했던 그녀의 소망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둥근 가슴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충분히 일리 있는 몸의 항의로 받아들여진다.
한강의 여성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지만, 타인이나 세상을 향한 동물적 공격성이나 이렇다 할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식물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아니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평화로운 숨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최소한 편하게 숨쉬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동물적 공격성으로 점철된 현실이나 사람살이의 상황은 그런 소망을 지닌 여성들로 하여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게 혹은 질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세상이 생태학적 진실에 따라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식물성의 기미를 보여주었더라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그토록 가혹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녀가 간절하게 안간힘을 다해 숨을 쉬면서 세상을 쏘아보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 연작에서 영혜는 세상의 변두리로 밀리다 못해 그 존재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혹은 뿌리내릴 한 뼘의 자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다. 그녀는 식물적 젖가슴으로 세상의 동물적 공격성에 대응했지만, 턱없이 유약할 따름이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광기의 영역으로 금줄 쳐 놓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운명 역시 그녀의 존재를 제한적이게 한다. 물론 그녀는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재하듯 존재하면서 성찰적 메시지를 제공하는 그늘의 존재이다. 그늘에서 제발 편하게 숨 쉬고 악몽 없이 잘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여러모로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 가능성을 풍부하게 열고 있는 연작이다.
책방을 운영하기도 하는 한강은 아버지 한승원 작가에게 종종 책을 보내며 편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중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나 로빈 윌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 같은 책들이 눈길을 끈다. 한강 소설에서 왜 여성들이 동물성에 저항하며 식물이 되고자 하는지, 식물과 더불어 숨 쉬며 불안한 실존을 넘어 편안한 평화의 바람을 맞이하려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다. 아버지나 남편과는 달리, 이끼는 “괜찮아”라고 말해준다. 그런 이끼의 토닥거림이나 속삭임과 더불어 숨 쉴 수 있다면 시나브로 편안해지고 괜찮아지겠다.
5.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呪文)
깊은 고통 속에서 한강의 인물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주 구토를 일으킨다. 편안하게 숨을 쉬지 못한 채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과 반짝이는 숲의 고통 속에서 깊은 밤의 고통은 한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어떻게 개인적이고 가족적이며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넘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지극한 사랑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떻게 나날의 장례식을 넘어 즐거운 축제 마당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의 인상적인 대목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남은 자들의 한없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위한 진정한 장례식은 매우 요긴하다. 당신과 나의 공동 애도를 위한 장례식을 위한 제문(祭文)은 때로 주문(呪文)처럼 통절하다. 한강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악몽은 대개 그런 주문의 상형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주문을 통해 먼저 간 당신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 준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부분을 보자.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p. 213)
주문은 떠지지 않는 눈을 뜨게 하고, 깊은 고통의 순간을 대면하게 한다. 응어리진 것들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 응어리의 상처들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소환하는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의 대조가 비애극의 심연을 깊게 한다. 주문은 이렇듯 깊은 슬픔의 호곡을 불러낸다. 그런 다음 당신을 위로하며 청원한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p. 213).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은 이런 애도 작업으로 깊어지며 승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한강은 여리고 취약한 존재들, 정처 없이 방황하며 상처받은 사람들, 고통 속에서 속절없이 절명한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비가(悲歌)를 시적인 문체로 가만가만 불러온 작가이다. 제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입이 되어주고 제 몫을 보장받지 못한 채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을 씻어주려는 영혼의 매개자가 되려 했던 영매 작가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을 넘어 고통의 심연에서 지극한 인간적 진실을 고통스럽게 탐구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숨 쉴 수 없는 존재들, 그 숨 막힌 존재들이 나름대로 숨 쉴 수 있도록 위로와 생명의 음표를 감각적 리듬에 실어 소통하고자 한 작가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와도 같았던 참혹한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이 저주받을 망령들아, 비통할지어다!”라고 했던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14) 『신곡』의 세계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기록 서사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며 깊게 탄식했다.
한강의 여러 작품 또한 그런 탄식에서 비롯된다. 그 서사적 대상이 된 가부장적 질서로 인해 일그러진 여성 문제나 4.3이나 5.18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이야기는 한강보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선배 작가들의 문학적 축적으로 인해 심연으로 깊어져 새로운 감각적 실존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터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그 결과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문학이란 보편성의 측면에서 호소력 짙은 작품으로 승화된다.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작품보다 앞으로 쓰일 작품이 더 많거나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제까지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몰입하는 감각의 밀도를 통해 문학적 치유의 새로운 스타일을 감각적으로 발견한 작가, 서사의 전개를 초월하여 서정의 몰입으로 심리적 사건을 웅숭깊게 다룬 작가, 그리고 기존의 서정적 소설과도 또 다르게, 『흰』과 같은 작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정과 서사가 잘 어우러지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은 2024년 10월 이후의 한강 문학이다. 섣불리 예측하지는 말자.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의 주문처럼, 한강 문학의 새로운 장도를 응원하면 될 일이다. 거듭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1)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 174.
- 2)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인 「빛과 실」에서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무렵 골몰했던 두 질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질문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영매 작가로서 한강의 핵심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 3) 예컨대 『소년이 온다』에서 이런 대목을 보자.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p. 174). 이렇게 한 몸이 된 여럿의 영혼들을 맞아들이는 장면에서 영매 작가의 인상적인 특징의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 4)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p. 24.
- 5)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pp. 11~12.
- 6)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106.
- 7) 한강, 『흰』, 문학동네, 2016/2018, p. 36.
- 8)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38.
- 9)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 58.
- 10) 「여수의 사랑」 관련 논의는 졸고, 「진실의 숨결과 서사의 파동」(『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의 일부를 수정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글의 2~4장은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웹진 《더라이브러리》에 부분적으로 발표한 원고를 전면 개정한 것임.
- 11)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2, p. 51.
- 12)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p. 225.
- 13)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76.
- 14)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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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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