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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현대시 | 2025년 1월호 (제421호)

결국,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제자리

유계영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산문집 『꼭대기의 수줍음』, 『무궁무궁』이 있다. 제5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제24회 <현대시작품상>, 제1회 <시결작품상>을 수상했다.

결국,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제자리1)

  

유계영

오래되고 낡은 여관

 

서윤후는 끝을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음을 본다. 설명하자면,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일에 대하여 정말로 그렇게 한다. 내가 윤후에게 자주 놀라고 믿을 수 없어 하는 부분이다. 대체로 나는 안팎에 희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작심하는 일이 드물다. 설령 작심한다 해도 3일은커녕 3시간도 마음먹은 것을 지키지 못하는 작심삼일 유형의 표본이 나이고,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오십보백보라는 안일한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윤후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뒤 그렇게 한다. 그리하여 변모한다.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김소연 시인은 윤후의 이런 점을 가리켜 나보다 훨씬 정확한 언어로 앞서 표현한 바 있다.

 

서윤후는 내가 오래 상상하며 기다려온 시인의 초상에 아주 근접한 사람이다(…) 원칙을 만들고 원칙을 지키며. 인간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며. 유연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근본적이게….2)

 

그런데 고쳐 쥔 마음을 행동과 태도로 번지게 하여 부지런히 자기 갱신을 이루는 윤후를 떠올릴 때, 나는 숭고하기까지 한 존경심과 함께 슬픔에 빠진다. 내게 각인된 친구 서윤후의 몇 가지 장면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인 서윤후의 저작을 천천히 따라 읽어온 독자로서 다음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이 어떤 고요한 짓눌림을 동력으로 삼는지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고요한 짓눌림을 존재통이라고 부른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내면의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심지어 육체의 생명감으로부터, 고요히 짓눌린 감각. 다시 말해 존재통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걸 알기 때문에 윤후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세운 원칙들과 그것을 지켜나가며 이륙하는 생활이 활발해질수록 나는 좀 슬프기도 한 모양이다.

 

서윤후는 자신을 무너뜨리는 좌절이나 힘든 일에 대해 좀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없어 내게 문책당하곤 했다. 나름대로 친하다고 믿는 사이이므로 짜증스러운 일부터 깊은 고민에 이르기까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내가 밑진다고 느껴 심술을 부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으레 산다는 게 그렇다는 듯 노승처럼 허허실실로 웃곤 하는데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집요하도록 자극하긴 해도 늘 어른스럽게 보였다. 나한테 말해주기도 전에 용서하는 법이 어딨어? 따위의 말로 나의 경박함을 자인한 후, 요즘 윤후와의 대화는 생활의 귀여움과 사소한 재미를 나누는 방향으로 산뜻하게 옮겨갔다. 부정적인 판단에 근거한 가십거리를 늘어놓지 않겠다는 결심이 마땅한 상처를 계기로 수립되었겠거니. 윤후가 그러기로 한 것은 좀체 흔들리는 법이 없으므로 새로운 대화의 장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군.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부지런히 내어놓는 저작들을 따라 읽으며 몰랐던 그의 마음을 선명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느끼는 존재통은 친구와 키득거린 뒤 홀가분해지기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한담의 형식과 문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내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개방된 여관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내 마음을 여관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떤 방에는 수년째 장기 투숙을 하는 친구가 살고, 어떤 방은 금방 왔다가 떠날 사람들이 쓴다. 공실.

방안을 쓸고 닦으며 빈방에 홀로 있는 내가, 이곳에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아프고 기억하고 싶지 않고 화도 난다. (…)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오면, 언제나 영업 정지 위기에 놓여 있는 마음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마음에 관여하는 일. 그것이 나의 오래되고 낡은 여관, 여인숙 같은 것을 운영하고 지켜 가는 일이다.3)

 

그의 시집들을 톺으며 시인 서윤후의 시 세계에 따뜻한 표지를 세워주는 일은 이다음 이어지는 지면의 몫이겠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산문 세계를 말해보고 싶다. 시인에게 시 세계의 방위는 현실 너머다. 거칠거칠한 현실의 표면에 상처투성이 발을 심고서 탐스럽고 뽀얀 발꿈치 같은 달을 향하여 고개를 치켜드는 일이 시 쓰기다. 그렇다면 산문 세계는 현실의 표면에 넓게 드리워져 있다. 짐작건대 거칠거칠한 현실의 표면을 걷다가 문득 마주하는 삶의 싱싱함과 애틋함에 환한 눈길을 건네는 일이 산문 쓰기일 것이다. 투박한 가늠이겠지만 다섯 권의 산문집을 출간한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가 자신을 에워싼 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정성스러운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 어림할 수 있다.

서윤후에게 현실의 중요한 영역으로써의 마음. 그는 그곳의 문을 언제나 개방해 두며 성업하기 위하여, 사람들과 밀접하기보다 스스로 내밀해지기를 택해왔다. 직접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훌쩍 떨어져 사람들을 추억하는 것 또한 새로운 만남이라 믿는 것이다.

윤후에게 산문 쓰기란 자신을 몰아세우는 괴로운 일들과 힘에 부치는 날들을 백지 위에 고백하는 것으로 마음이 허름해지지 않게 깨끗이 닦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실책을 정비하고 조약을 세우고 사랑의 순간들을 목록화하여 그것을 지켜내는 날들. 윤후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들을 정말로 그렇게 하며 마음의 내벽을 튼튼히 다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쓰기를 통해 변모한다.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서윤후의 오래된 일상의 제의인 일기 쓰기, 나아가 산문 쓰기는 도약을 위해 움직임을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내밀한 쓰기를 들여다볼 때 나까지도 희망에 들뜨는 것이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세우고 나 자신을 부축해 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속마음을 터놓지 않는다고 삐죽거리던 나는 윤후의 산문을 읽으며 자주 부끄러웠다. 여행지에서 크게 다투고 격조한 두 청년이 서로의 시를 맞바꿔 읽으며 말없이 화해하는 별난 모습은, 내가 서윤후의 첫 산문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 중 하나다. 문학을 읽을 때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물밑 소통, 바깥의 언어 질서와는 다른 방식의 깊은 소통,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장면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훤히 드러나 부유하는 얇은 사실 속에서, 진실의 형체를 새로이 빚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실존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의 뒤안길에서 일렁임으로 머물러 있다.4)

 

그리고 첫 산문집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8년 후 나온 최근작에 이르러 다른 밀도의 단단함으로 변모해 돌아올 때 시인 서윤후의 독자로서 나는 깊은 신뢰를 느낀다. 그의 언어가 어떻게 삶이 되어가는지 지켜보며 기꺼이 동참하게 만든다.

 

 

너의 알록달록

 

내게 적록 색약이 있다는 것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할 때 알았다. (…) 그 이후로 나는 색깔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색깔의 뚜렷한 구분에서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었고, 알록달록한 색 조합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첫 시집에 실었던 시 <퀘벡>은 그때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온 사람의 이야기다.5)

 

서윤후가 처음 엮은 산문집은 여행에서의 사진과 산문을 엮은 책 방과 후 지구. 돌이켜보면 나는 활자에 진입하기도 전에 압도되어 조금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그가 찍은 사진들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형형색색 생기 있게 조화를 이루는 색감이 마치 회화 같았다. 이 여행 산문집에서 얻은 시각적 강렬함 때문인지 나는 한동안 윤후를 세련된 감각과 아기자기한 안목을 지닌 소년 정도로 라벨 붙여두는 경솔함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출간된 산문집에서 그가 나와는 다른 색채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사진과 그의 취향으로 선택된 사물들이 왜 그렇게 화사한 채도를 가졌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이 그를 꼼짝 못 하도록 제약하는 일이 되기보다는 더 쨍한 감각을 향해 열리게 한다는 사실은 물론, 그가 느끼는 색채의 시야가 외려 그를 알록달록하게 비추고 있다는 것 역시, 새로 알게 된 것들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통학 버스 타러 가던 길에, 봉고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내 시를 읽어주던 선생님이었다. 창문을 내리고는 내 시가 적힌 종이를 펄럭이며 내게 무슨 말을 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시에 쓴 어떤 단어 대신에 이런 단어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었고, 나는 차 엔진 소리와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알아듣진 못했으나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버스에 올라타 생각했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지만, 이게 차를 멈춰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6)

     

휴가철을 맞이하지 않아도 짬짬이 여행을 떠나는 윤후에게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물었을 것이다. 여행이 왜 좋으냐고. 일상을 벗어난 일탈 뭐 그런 것이냐고. 윤후는 내게 곰곰이 헤아려보려는 기색도 건너뛰고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여행지에서도 일상을 사는 건 똑같아. 주방이 있는 숙소에서는 밥을 짓고, 그러기 위해선 시장에 가고, 세탁비누를 사 온 뒤에 빨래도 한다고. 물론 원고도 쓴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지 성실하다 말해버리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손쉬우므로 제일 중요한 걸 놓치는 기분이다. 생활력이 강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반복을 지키려는 이 순정한 태도를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윤후에게 일상의 반복은, 정주하다 때때로 떠나 후련해지는 방식이 아닐 것이다. 떠나며 옮겨가며 부유하며 때로는 돌아오며, 일상의 둘레를 키워가는 것. 서윤후가 지키는 일상의 반복은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까지를 마땅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윤후에게 시가 있다는 것. 봉고차를 세우고 적절한 낱말을 선물처럼 쥐여주고 간 그의 선생님처럼, 일상의 반복을 잠깐 멈춰 세우고 껌뻑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시가 있다는 것. 이게 일상을 멈춰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 되물을 겨를도 없이 그를 일상으로부터 들어 올리는 시가 있다는 것. 사방으로 둘레를 넓히는 수평의 전진과 생활로부터 튀어 오르는 수직의 비상 사이에 책상을 하나 놓고서. 서윤후는 생각하는 듯하다. 결국,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제자리라고.

 

 나는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혔다가 깊이 안심한 뒤 영문 모를 환희를 느끼곤 한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슬픔이나 고통 같은 것이라면 나름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믿어서이다. 고창과 전주를 배경으로 한 윤후의 어린 시절도 이따금 상상해 본다.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돌봐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슬퍼서 우는 것이 걱정 끼치는 것이 될까 봐 아랫입술을 꽉”7) 물고 있는 서현동 어린이를. 아는 것이 많아서 혀가 묶여버린 이 어린이가 진짜 모르겠는 시의 언어를 만나 다시 천진해지는 과정을. 시의 언어를 통해 어린이를 되찾은 것은 십대가 끝날 무렵의 일이었으니,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을 서윤후는 일찌감치 알아버렸을 것이다.

 

 

쓰게 되었으니, 쓰기로 한다8)

 

대학 시절부터 친구 사이인 서윤후와 구현우, 그리고 이설빈과 나. 우리들은 스물아홉 이서구활동으로 만나 서로를 얄미워하고 용서하기를 거듭한 끝에 얼추 죽이 맞게 되었다. 우정과 무관심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드물게 만나는 동안, 시간은 뒤죽박죽 흘렀다. 우리들은 윤후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주에 여행 간 적이 두어 번 있는데, 모두 겨울의 일이다. 비교적 오래된 일이고 심각하게 형편없는 나의 기억력에도 첫 방문에서 윤후가 고른 숙소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니 그는 확실히 노련한 여행자다. 노란 장판과 붉은 나무 문틀이 정감 있지만 무척 낡은 구옥. 우리 머릿수에 비해 공간은 지나치게 넓었고, 가구랄 것 없이 썰렁했으나 지글지글한 방바닥은 참 좋았다. 그때 나는 내심 더 쾌적하고 그럴듯한 숙소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한데, 세련되고 편리하며 보기 좋은 숙소의 기억이 유독 앙상한 것을 생각한다면 윤후의 선택은 늘 나보다 옳고 재미있는 쪽으로 흐른다. 기억을 오래 다루어본 솜씨는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여행에서 늦은 밤까지 취하도록 마시거나 게임을 하기는커녕, 큰 방 중앙에 옹기종기 모여 지렁이 젤리 따위를 한두 봉지 펼쳐놓고 이야기나 좀 나누다 제각각 흩어져 잠들었다.

그리고 작년 겨울. 두 번째로 방문한 네 사람의 전주는 어쩐지 윤후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멋진 경치의 공원을 보여주겠다며 데리고 간 공원이 하필 공사 중이었다. 덕진 공원은 광활한 호수 수면이 연꽃으로 가득 뒤덮이는 곳이라 했다. 호반을 뻗어나가는 다리 끝에는 마치 수면 위에 지어진 듯 한옥 도서관이 둥실둥실 떠 있고, 일대가 모두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겨울에도 울창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물을 다 뺀 호수의 까만 흙바닥. 말라죽은 연꽃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부러져 제멋대로 꺾인 줄기들.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촉루처럼 나뒹구는 연근들. 윤후를 제외한 우리는 신나게 웃었다. 일부러 시커먼 호수의 바닥이 보이는 자리로 가 사진도 마구 찍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윤후는 정말이지 서운한 눈치였다. 자신이 느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는 듯이. 아냐, 이게 더 좋아. 계획대로 안 되는 게 훨씬 재미있지. 이럴 때 아니면 호수의 밑바닥을 언제 보겠어? 같은 위로에도 못내 아쉬워했다. 나는 그때의 표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흥을 망치지 않으려 애써 마음을 누르는 표정을. 계획성이 철저한 사람이 계획과 어긋난 상황에 드러내는 초조한 그것과 달리, 마음으로 깊게 침잠하는 다른 채널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윤후는 노련한 일상 여행자가 틀림없다. 그의 킨츠기 문법으로 다시 바라보게 될 이 순간을 고대하게 하므로. 실패와 실망의 무수한 훼손에도 그는 괜찮을 것이다. 쓰는 것이 모든 것의 제자리임을 아는 책상 앞의 시간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헤아리는 데 필요한 자기만의 도구가 있으리라고. 깨진 자리로부터 다시 깨지기 마련이겠지만, 깨진 것은 별 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고 다시 깨진 자리로 도약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문법이다.9)

  • 1) 서윤후 산문집방과 후 지구』(2016, 서랍의 날씨) 작가 소개에서 빌려옴.
  • 2) 서윤후 산문집 햇빛 세입자』(2019, 알마) 4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에서 빌려옴
  • 3) 방과 후 지구』, 「홈커밍데이」, 225-226p.
  • 4) 서윤후 산문집 쓰기 일기』(2024, 샘터), 「당신과 당신의 가장 문학적인 것」, 187p.
  • 5) 햇빛 세입자』, 「흑백 일기」, 194p.
  • 6) 같은 책, 「겨울잠 주무시는 선생님」, 90p.
  • 7) 햇빛 세입자』, 「수직과 수평」, 33-34p.
  • 8) 쓰기 일기』, 「시가 쓰고 싶게」, 153p.
  • 9) 쓰기 일기』, 「킨츠기와 문학」, 1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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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휘민이민하노은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소설 또는 그림자 반죽 ― 이연숙『아빠소설』(위즈덤하우스, 2025)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이연숙위픽한국소설아빠소설문학 2025
조예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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