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현대시 2025년 2월호(제422호)
감응感應과 감수感受의 디졸브
이번 오은경의 신작시 속 덤덤한 시적 자아들은 온 세계를 과거 '너'라는 상관물을 회상하기 위한 공간으로 재구성 중이며, 그 공간을 조밀한 언어로 구축하는 작업에 천착해 있다. 그 공간은 밀폐된, 그러나 거의 텅 빈 하나의 집 또는 방의 형태를 띠는 데, 인물들이 그 공허 안에 충만한 기억들을 부단히 감각하며 순정하게 읊조리는 독백은 지울 수 없는 예민함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기실 그 안에는 '너'의 사라짐을 참지 못하는 '나'의 속수무책 마음들이 존재한다. '나'의 왕성하지 않은 제스처, 격렬하게 표출될 줄 모르는 회환을 통해 드러나는 '나'-'너'의 약한 관계성, 즉 '나'만 '너'의 부재를 받아들이면 되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화자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그런 오은경의 시 겉면에는 '능동성'이 묻어 있다. '나'는 '너'에게 노출되지 않은 채 '너'만 '나'에게 노출시키고자 하는 마음, 그리하여 '너'의 심연을 헤아리고 반추해보려는 마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작시를 살펴보기 전, 잠시 시인의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의 표제작을 경유해보자. 작중 화자는 의자처럼 앉아 있던 당신의 지난밤을 좇아 "의자가 놓인 곳이라면” “어디든 앉아 당신의 지난 일들을 보고 듣고 있다. 달랑 의자 하나 남은 방 안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당신'의 관점을 반추 중인 화자는 유리 벽이 창밖과 자신을 가로막고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모종의 안전감을 확인한다. 이 화자의 심연에 두드러지는 것은 자기 인식과 언어의 틀 안에서 상대를 개념화하고, 파악하며, 기억해보려는 능동의 모습이다.
신작시 「달라지는 것과 달라지지 않는 것」 역시 비슷한 시적 풍경이 연출된다. 그곳엔 "네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끼면서도 정작 더없이 쓸쓸해보이는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과거 '너'가 잠들어 '나'를 보지 못할 때, 즉 '너'를 일방적 관점으로 관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안전감을 느끼며 '너'를 보고 만질 수 있었다. 즉 시각 정보의 격차 안에서 우위를 점할 때라야 '나'는 '너'를 능동적으로 전유할 수 있었다. 과거 함께했던 시간 동안, '나'는 '너'가 잠들었을 때 "다녀가도 모를" 형태로 존재했으며, 아침이 완전히 오기 전에 "떠날 장소를 고민하고 있"었다고 진술된다.
그러나 반대로 '너'가 완전히 떠나 "너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된 현재, 그러나 "모든 것이 그대로이면서, 너만 보이지 않는 방"은 화자로 하여금 이 모든 능동성이 확보되기 어려운 환경이 됐음을 각인시킨다. 이제 화자는 과거 자신을 향한 '너'의 시선이 발생했던 각도와 위치를, 즉 "너의 두 눈이 보았던 장면을 상상하고 싶어"한다. 화자는 정작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않으려"는 자신의 태도와 그 바람이 모순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상상을 감행한다. 왜냐하면 이는 앞으로 "네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자각하는 작업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꺼지는 법이 없는 스탠드"를 의도적으로 켜두는 능동의 제스처는, 이제 밤마다 그것을 대신 꺼줄 '너' 없음을 내면화하는 제의적 의식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드러내지 않은 서로의 부분에 대해 완벽히 단절된 오은경의 화자들은 서로 대면하여 그 부분을 소통하려는 노력보다 "나의 반대편에 앉은 그"로부터 '너'에 대한 이해의 단서를 얻는 식의 우회적인, 혹은 유폐적인 소통에 자족한다는 점도 독특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스탠드 불빛의 보조가 필요한 저녁부터 동틀녘까지의 어두운 시간대였고, '너'가 떠나간 뒤 '나'가 꿈속에서 마주하는 '너'의 얼굴은 오로지 '한낮'의 형태였음을 기억해보자. 화자들이 꿈속에서 보는 고정불변의 '너'는 끊임없이 변하려 드는 현실의 속성, 즉 삶의 불확정성과 대칭된다. 생각해보면 삶에 절실한 것들은 높은 확률로 '환상'과 '꿈'처럼 변치 않는 형태로 드러난다. 동시에 영구적으로 변치 않는 '너'를 볼 수 있는 순간은 '한낮'처럼 제한적인 시간대('오후')에 불과하며, 그런 '너'는 아름다운 환상의 빛처럼 발생하고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결국 "네가 나타나지 않아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오후"의 현실은 내일도, 모레도, 끊임없이 돌아올 것이다. 그 안에서 "집안은 계속 어질러지고, 설거지는 반복되"기에 “유령이라는 환영을 따라 집안을 쓸고 닦아"야 할 것이다. 이때 '너'를 향한 화자의 정념 역시 무한대로 되풀이될 것이 예고된다. 결국 시 제목이 지시하듯, 화자는 '너' 없이 정체된 공간 안에서 수시로 변하는 정념들에 휩싸이기를 반복할 것이며, 고정불변하는 '너'를 파악하고 개념화하려는 어떤 능동적인 제스처도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강력하고 변화무쌍한 '정념'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다.
*
요컨대 능동의 겹을 파고들어 오은경의 시 가장 안쪽까지 침투해 보면, 태초에 어떤 불가피한 수동성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에게 다가설수록 궁극적으론 '너'와 멀어질 수밖에 없던 경험이 '나'에게 정념 형태로 귀환해 번번이 결정적인 태클을 걸기 때문이다. 이는 '나'가 단지 두 갈래의 수동을 취하게끔 만든다. 하나는 '너'와 '나'를 동일시하는 불건강한 형태의 태도로 작동하거나, 다른 하나는 아예 '너'에게 나아가는 일 자체를 단념시키는 억압적 태도로 작동한다. 전자는 오로지 '너'의 완전함에 의해서만 '나'의 완전함을 취득할 수 있다는 식의 소극성으로, 후자는 일상적 행복과 절연되어 방에 흘립한 채 떠나간 '너'를 반추하며 온 세계를 빈 방으로 인식해버리는 폐쇄성으로 드러난다.
가령 「디저트」 속에는 디저트 생지를 굴리고 그 형태를 빚기 위해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도마가 필요"함을 자각하며 "사람들 눈에, 왜 꼭 다른 사람이 필요"한지에 대해 묻는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과거 '너'라는 롤러에 접착되어 "떼어낼 수 없을 때까지 / 작아져"갔던, 거의 사라지기 직전의 반죽 같던 '나'를 회상한다. 그때의 '나'는 "너의 보폭"을 "넓지도 좁지도" "빠르거나 느리지 않은" 어떤 절대적 기준치로 간주하고 있었고, '너'와의 밀접함 안에서 온전함을 획득하려 했다.
정반대로 어떤 화자들은 각종 회상을 동원해 떠나간 '너'를 재구성하며 '너'의 절대적 불가해성을 실감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정념에 속수무책 감수되어 헐벗은 존재처럼 소묘된다. 이 존재의 사후적 재구성은 「거미줄」에서 잘 드러나는데, 화자는 거미의 실재를 그 당시엔 알지 못하더라도, 실타래와 같은 거미줄의 흔적에 의해 그것이 존재했었음을 사후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다.
나는 춥고 물은 따듯하다
물이 따듯해서, 아니면 물을 맞아서
추운 걸까? 차라리 물이 된다면
추위도 느끼지 않게 될까?
느낀다와 느껴진다가 다른 것처럼
물이 쏟아진다 내가 나가거나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는 이상은
계속해 물을 맞을 수 있다
춥지 않을 수 있다
- 「거미줄」 부분
여기서 화자는 제아무리 따뜻한 속성을 가진 물이라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끼얹어진 이후엔 결국 차가운 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한다. 화자는 자신이 직접 물이 되지 않고서야 화자는 물의 속성(따뜻함)을 온전히 향유할 수 없음을 깨닫지만, 이 과정은 자신이 절대 물이 될 수 없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과정에 진배없다.
뿐만 아니라 화자는 「친구」가 등장한 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꿈속에서 "친구의 얼굴은 변하지 않고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고 묘사한다. 앞선 시의 세계관처럼, 이 시 안에서도 고정불변하는 누군가의 모습은 오로지 꿈 안에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과 몽상 공간을 가로지르는 친구와 '나'의 만남은 기실 "잠들어 있었을 뿐"인 '나'와 "내가 깨어날 때까지 / 기다렸"던 친구의 '엇갈림'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현실에서 번번이 어긋나야 꿈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들의 관계엔 절대 좁혀지지도 극복되지도 않는 간극이 설정된다. 그러나 그 간극은 "그 애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적힌 공책을 뒤늦게 따라 읽을 때 비로소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는 형태, 그리하여 비로소 "친구에게 사랑에 빠져버리"는 형태로도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화자가 직접 강조하고 있는 "느낀다와 느껴진다"의 차이 역시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곧 '감응'과 '감수'의 차이, '능동'과 '수동'의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겨울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 것은 어느 아침, / 화장실에서였다"는 화자의 말은 '실감하다'와 같은 능동적 감응 능력과 별개로, 겨울의 계절성을 "실감하게 된" - 즉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불현듯 실감하게 '되어버린' - 화자를 드러낸다. 여기서 이렇게 감응과 감수의 차이를 식별하는 것이 오은경 시를 독해함에 있어 중요해지는 이유는, 언제나 미지의 '너'에게마저 속절없이 감수되는 화자들이 겪고 있는 현상을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배제한 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오은경이 소묘하는 사랑은 언제나 미스터리와 불안에 깊이 침윤돼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빈방」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집'이 결국 누구의 집인지, 또 여기서 혼용되는 '집'과 '방'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는지 초점해 보자.
이 시는 당장 '나'가 "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있는 건지, 혹은 듣기 싫어하고 있는 건지 그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시작한다. 즉 시는 "너에 관한 이야기"를 교란시키며 모호하게 전개되는 데, 확실한 것은 화자가 어제 '너'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가 "전부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고 술회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야기도 마냥 전부는 아닌 "특정한 무언가"에 불과했지만, 화자는 그 이야기의 온당한 수신 대상이 애초에 '너' 하나였기에 발신을 강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배달을 마친 기분"이었음을 회고하는 화자는, 그러나, 어떤 상념과 함께 불특정 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가 아니고, 네가 아니어도 수많은 사람이 떠난다.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반복된다는 믿음은 착각이다. 지연되어도 너는
온다고 말했다. 나는 철석같이 믿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너는 집을 치워두지 않았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투룸이었지만, 방이 하나여서, 너의 마음이 언제 풀릴지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릴 수도, 열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방문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소파에 기대어 누웠으나,
문을 열지 못해서, 여러 번 집 밖을 오가며, 층수를 세었다. 겨울나무에 가려진 창문
안쪽이 환하게 불 켜져 있었다.
주황색 전구 불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불빛 때문에 네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방의 상태, 심지어는 너의 부재와도 상관없이 네 방은 네 방이었다.
- 「빈방」 부분
그리고 화자는 갑자기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뜬금없는 말을 한다. 뒤이어 나열되는 문장은 그 말이 과거 "수많은 사람이 떠난" 경험으로부터 산출된 결론임을 암시하고, 오랫동안 화자의 세계에 고유한 '나'는 없었고 단지 고유한 '너'들만 있었다는 사실이 추론된다. 그런 너와 나'들'의 관계는 마치 “투룸이었지만, 방이 하나"인 관계였고, 네가 "방문을 걸어 잠그"면 나는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문을 열지 못하"는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감안해야 했다.
또 '나'는 멀리 떨어져 네 방의 불빛 유무를 관찰하는 형태로만 '너'에게 가닿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네 "방의 상태"를 알지 못하며, "너의 부재와도 상관없이 네 방은 네 방"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문 앞을 가리고 서서,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너'를 보아도, 나는 단지 이것이 "나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일밖엔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네 애인'의 등장은 "우리가 다 같이 소파에 앉"거나 "방에 들어가 쉬"는 일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질적 존재가 기실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남기며, 화자의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짐작해 보게 한다.
결국 시는 '너'가 "애인과 헤어졌다"는 문장과 함께 그 결말을 회수하지 않고 끝나는데, 이는 결국 '너'의 다음 결정을 기다리며 여전히 네 앞에 대기 중일 '나'의 초라한 자리를 가늠케 한다. 앞선 오은경의 시편에서 거듭 발견된 '반복' 패턴은, 돌아올 거라는 '너'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었"던 '나'의 모습 역시 되풀이될 것이라는 추측을 유도한다. 이렇게 화자들이 감수 중인 사랑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너'의 방이 내게 허용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 그 방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일방적 형태로 소유되거나 분유되고 있는지, 또 그곳에서 화자가 배치된 곳이 화자 내면에 어떤 불안 요소로 작동 중인지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책더미」 속 떡갈고무나무와 자기 방을 번갈아 묵상 중인 화자를 살펴보자. 더 이상 잎을 틔워내지 못하는 떡갈고무나무는 "앙상한 가지 그대로 겨울과 봄 지나 / 계속 같은 자리에 남아 있"는 고정불변의 상태인 반면, 화자의 방에 쌓인 책탑은 필연적으로 시간 변화에 구애받는다.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높이 쌓는" 책탑이 어느새 무너졌다는 것은 결국 "어떤 시간이 지나 있음을 실감"케 하는 지표가 된다. 작중 '너'는 그런 내 방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심한 존재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나 역시 너의 변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기실 '너'가 매번 달라진다는 사실을 적잖이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가 '너'의 "바뀐 머리, 옷차림 같은 것"에는 또 금방 적응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 '나'가 '너'의 최소한의 변화를 은밀하고도 꾸준하게 추적 중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특히 화자는 "너무 큰 불안에 시달린 나머지" '너'가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오피스텔 입구에서 서성이"기까지 했다고 진술하는데, 그 대상도 원인도 알 수 없는 불안은 어쩌면 '나'가 단 한 번도 "네 방에 가본 적 없다는 사실", 즉 '너'에게 흐른 시간의 근원적 지표가 되는 공간에 가닿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우리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화자들의 불안은 상대의 유동성, 즉 미스터리에서 비롯한 것인가? 아니면 '나' 역시 지니고 있을 미스터리에 일말의 불안이나 조급증도 느끼지 못하는 '너'의 불변성에서 비롯한 것인가? 우리는 그 정답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지 '너'에 대해 주어진 희박한 단서와 그 틈 안에서 사랑을 감당 중인 화자의 모습을 볼 뿐이다. 시인의 근간 『산책 소설』 속 산문에 등장하는 시인의 다음 질문 역시 화자들의 사랑을 식별하기 위한 중요한 힌트로 작용한다.
"나는 얼마나 화자와 가까우면서도 또 화자가 아닐까?"1) 모름지기 창작자라면 한 번쯤은 대면해 봤음직한 이 질문이 오은경 시 안에서 유달리 중요한 까닭은 그녀의 시작(詩作)이 결국 위 물음 위에서 다양한 형태에 의해 발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는지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 없기에 상당 부분 수수께끼로 존재하는 그녀의 인물들도 기실 위 질문에 대한 집요한 탐구 위에 제출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답변이다. 이 과정에서 '너'와의 거리감을 꾸준히 제어 중인 능동적인 '나'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너'의 유동성에 활짝 열려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나'의 수동성과 교차하며 끈질기게 이어진다.
그러나 정말 중요하게 읽어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들의 능동과 수동이 서로의 정반대로 존재하며 대립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의 정체성을 구분하고 보존해 주는 관계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화자들의 감수 능력은 오로지 감응으로부터 벗어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감수와 감응의 능력은 언제나 '나'가 자기 자신을 떠나 번번이 다른 형태의 '나'를 경험하기 위해 서로 안에서 변주되는 움직임에 가깝다. 요컨대 오은경의 시 안에서 감수는 자기 안에 감응을 끌고 들어오고 있고, 반대로 능동성 역시 자기 안에 수동성을 끊임없이 끌고 들어오고 있음을 기억하라.
마치 책 탑이 무너질 만큼의 어떤 시간 변화가 발생해도 알아차리지 못하던 '너'로 인해 '나'의 마음이 "지루하거나 지칠 때면" 의도적으로 책 탑을 밀어버리는 '나'의 행위처럼 말이다. 또 동시에 완만히 책 탑을 쌓아나가는 행위가 '너'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정념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적당한 능동과 수동을 구사하며 서로를 깎고 마모시킬 때 빚어지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관계가, 다만 영영 서로를 소멸시키지 않고 존속시키는 사랑이 될 것임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 1) 오은경, 『산책 소설』, 현대문학, 2021,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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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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