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현대시 2025년 4월호(제424호)
시가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할 때 ― 진수미 시집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김지윤 시집 『피로의 필요』
세계의 상실에 반(反)하여
첫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문학사상사, 2012) 이후, 김지윤은 시쓰기와 비평 활동을 병행하며 시에 대한 탐색을 넓혀왔다. 비평은 작품 외부의 영역, 즉 시가 생산되는 환경으로서 시대적 담론과 매체 그리고 독자에 대한 관심을 넓히는 계기였을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지윤이 그간 확장해온 시와 세계에 대한 고민을 응축해서 보여준다. 첫 시집에서 세계와 타인을 향한 사랑의 언어로 자신을 각인시켰던 시인은 이제 이렇게 묻는다. 디지털 정보로 환원된 세계에서 우리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지를, 만약 의심의 여지없던 것들이 가짜임을 알게 된다면 무수한 당위에 대해 "아니, 그런 게 아니야라고 있는 힘을 다해서"(「당연한 말」) 말할 수 있는지를.
이 시집은 우리가 이미 수긍해버린 당연하고 익숙한 당위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키며 보이는 세계를 향한 확신과 믿음에 괄호를 친다. 투명하리만치 선명하고 확실한 것들, 다시 말해 디지털 공간으로 흡수된 지식과 앎에 대한 문장에 빗금을 긋고, "빗금 그어진 문장 /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빗금으로부터」)는 도전적 제안을 걸어온다. "빗금을 닮"은 "세상의 층계"를 뒤집어 "새로운 방향으로" 보자는 그의 제안은 삶의 위기를 복구하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몇 편의 시에서 언뜻 드러나는 것처럼 이 위기의 배경은 디지털화가 초래한 세계의 증상들 때문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랭던 위너의 말을 참조하면, 그는 컴퓨터 혁명을 가속화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공지능 같은 기술만이 아니라 우리의 '텅 빈 마음'이라고 언급하며 도구적 진보에 따른 새로운 제도, 새로운 행동방식, 새로운 감성만이 아니라 권력 행사의 새로운 맥락들에 대한 반성과 토론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바 있다.1) 시인의 위기의식 역시 이러한 비판과 멀리 있지 않다. "속은 텅 비어 있을지라도" "빨리 더 빨리, 속도를 내자"(「대나무」)는 시대적 이데올로기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데서 나아가 새로운 신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삶의 위기라 인식하는 시인은 곧 도래할 자아의 소멸과 세계의 상실을 우려한다.
자아의 소멸과 세계의 상실을 예측하게 하는 첫 번째 징후는 정보신화(mythinformation)라는 이데올로기와 디지털화의 가속화 속에서 자아와 세계가 표백되고 있다는 것이다. 「흰」에서 진술하듯이 사람들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삶보다는 디지털 공간에 전시된 선명하고 확실한 정보에 열광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자신의 일상을 매순간 업로드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디지털 공간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어떤 색도 스미지 못하는 흰 것의 코팅된 표면" 앞에서 "탄성을 지르는 배경"에는 "흰 것은 안전하고 흰 것은 친절하고 흰 것은 평화로우니 / 흰 것엔 그리움도 고통도 죄도 없"다는 헛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흐릿하고 모호한 불확실성의 세계와 달리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흰 것들이 광고판에서 / 브라운관에서 / 스크린에서 /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마주할 때마다 "나도 희어지고 싶"(「흰」)다는 욕망을 감추지 못한 채 0과 1로 설명되는 투명한 자아로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흰 것"에 비유된 디지털 공간은 환하고 매끄러운 화면 위에 당신이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선명하게 전시해 주는 가능성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곳에는 길을 헤매거나 잃지 않고 삶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법이 널려 있고, 영원히 젊음을 잃지 않을 건강 비결도 몇 번의 검색으로 알아낼 수 있다. 물론 그 대가는 얻는 것에 비하면 미약하다고 느껴지는 자신에 관한 몇 가지 정보이다. 그런데 랭던 위너는 이를 경고한다. 빅데이터와 컴퓨터의 결합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인 해악은 "영구적이고 전면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감시 시스템의 구축과 여기서 촉발되는 정치 질서의 구조 변동"이라고 지적한다. 2) 정보가 투명화되고 자아의 불확실성이 제거된다는 건 곧 감시 시스템 속에서 자율성의 박탈과 자아의 소멸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디지털 공간에 접속해서 진짜 '나'를 대면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채 열광하는 이들을 향해 시인은 경고한다. 0과 1의 조합으로 태어나는 디지털 자아를 진짜 '나'라고 믿게 될 때, 정보로 환원될 수 없는 '나'-감각의 주체요, 관계적 주체인 내가 빛 속으로 사라지리라는 것을.
자꾸만 작아지는 세상 속에 사네
무언가 얻으려면 끝없이 무언가 써야 하지
돈을 쓰고 데이터를 쓰고 포인트를 쓰고
자꾸만 더 쓰라 하는 광고 속 주술의 노래
시간을 쓰고 꿈을 쓰고 진심을 다 써 버리면
비우고 비워서 비누처럼 작아져
반짝이는 가벼운 거품이 되네
여기는 모두 작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
적게 분노하고 적게 대화하고 적게 꿈꾸며
작은 휴대폰 화면, 사각 모니터 위에 머리를 파묻고
140자 글자 제한 속에 언어를 줄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하거나 아예 침묵하고
…(중략)…
작디작은 세상에 작디작은 사람들
너무 작아서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아니 그냥 세상에 잠시 묻어 있던 얼룩처럼
희미해지며 사라져 가는
- 「소인국」 부분
"작은 휴대폰"이야말로 자신을 타인과 연결시키며 세계와 접속하는 통로라고 믿는 마음은 더없이 견고해져 간다. 내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증거가 되어버린 디지털 기기가 사실은 소비 욕망이라는 무한회로를 작동시키는 버튼임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무언가 얻으려면 끝없이 무언가 써야 하"는 자본의 진리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게다가 얻기 위해 쓰는 것인지, 쓰기 위해 얻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는 소비의 주체는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잃을 무렵 '레벨업' 된다. 접속하는 주체는 "가벼운 거품"처럼 중력의 무게를 잃고 마침내 신체적 감각의 퇴화를 맞이한다. 이 시는 디지털 기기에 중독된 현대인에 대한 비유만은 아니다. 자본과 공모한 디지털 기술보다 더 우려되는 사실은 접속의 주체가 감각을 소거하는 대신 주어지는 확실성의 세계에 속하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불을 밝히는 액정 위로 떠오르는 선명한 이미지와 투명한 의미로 구성된 세계를 보라. 머뭇거리거나 지체할 필요 없이 클릭 한 번으로 신속하게 욕망을 호출하고 간편 결제만으로 즉각 욕망을 충족시키는 쾌락 시스템의 가속화는 각자가 지닌 고유한 색을 표백하듯 희게 만들고 결국에는 우리가 서로의 색을 기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표백과 감각의 마비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시인은 묻는다.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울 곳 없이 환하게 밝혀진 매끄러운 평면에서 “조용히, 무감히, 가만히”(「산성의 바다」) 감각을 잃어가며 "저도 모르는 새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감각이 마비된 신체처럼 "같은 맛과 같은 소리만 느낄 수 있"는 가상의 세계는 "하나의 기억과 하나의 말만 남는 지옥"과 같지 않은가? 시인에게는 더 이상 세계를 감각하지 못하는 것이 나와 다른 존재인 타인이라는 세계를 상실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더 이상 당신의 색을 기억하지 못해 // 너무 멀리서 따로 헤매며 / 서로의 색깔 사이에 벽이 생겨 / 점점 더 옅어져 흐려지고 빛바래고 / 그늘지고 얼룩지고 더렵혀졌지"(「색상표」)라는 진술처럼 디지털화되는 삶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감각을 잃은 채 세계를 상실하는 중이다.
두 번째 위기의 징후는 삶이 축적된 시간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 4·3의 비극을 담은 「큰넓궤」, 「헛묘」와 같은 시들이 말하듯 역사는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매해 봄이 돌아오듯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봄」) 혹은 "정녕 끝나지 않는" 노래가 되어 산 자들에게 전해지고, 우리는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듯이 그들과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기억하며 시간의 깊이를 헤아리기 마련이다. 땅과 꽃들이 보여주는 생장과 소멸의 반복 혹은 유한한 삶을 지닌 생명들이 서로의 시작과 끝을 잇대면서 만들어가는 끝나지 않는 서사야말로 시인이 되찾고 싶은 세계이다. 세계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역력하게 드러내는 청유의 문장을 유심히 보라. “흐르고 뒤섞고 흔들자 / 스미고 들끓고 녹자 / 우리가 만나서 하나 되기 위해 // 천천히 서로를 향하여 한 마디, 한 마디씩 한 박자, 한 박자씩"(「화음」) 다가가자는 시인의 요청은 타인과 공존하는 삶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사랑을 담았던 첫 시집의 진심과 다르지 않다.
다만 두 번째 시집은 세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아의 소멸과 세계의 상실에 저항하는 실천을 수행한다. 감각의 퇴화가 곧 세계를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주장하면서 시인은 이를 거부하기 위한 소요를 일으킨다. 확실하고 견고한 말들에 빗금을 긋는 것이 소요의 시작이었다면, 더 과감해진 시인은 "지우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미니멀리즘」)이 되어 감각을 옥죄는 "영원 확신 이치 같은 말들을 지운 자리에 그림을 그리"며 세계의 흔적을 복원하기도 하고, "큰 소리로 소란스레 / 바람을 일으키면서"(「사과 한 알」) 전속력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속살 드러낸 난만한 붉음"을 현현하기도 한다. 언어를 빌어 감각의 소요를 일으킴으로써 의미에 붙들린 세계에 다시 감각을 불어넣는 것, 이것이 바로 소요를 실천하는 시쓰기이다.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피로의 필요」)던 시인은 디지털 시대의 상식과 신념을 불안하게 만드는 이방인-되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투명한 존재만이 허용되는 세계에서 자기 스스로를 "낯선 몸”, “난민", "철새", "외계인"(「낯선 몸」)이라고 명명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국적 없는 이방인이자, 번역되지 않는 말로 존재하겠다고 선언한다.
더없이 자유로운 거침없는 목소리로,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세계의 상실을 거부하는 소요로서의 시쓰기는 시인이 지녀온 다정한 목소리에 실려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김지윤 시인의 고유한 음색이자 태도라는 점은 익히 알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어둡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말을 건넬 수 있는 건 어떤 마음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자아의 소멸과 세계의 상실이 곧 닥치더라도, '너'를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해서가 아닐까? 사실 '너'는 '나'를 증명하는 '나'의 진짜 세계니까 말이다.
어딘가 도착할 거란 약속은 할 수 없어
그냥 함께 큰 공을 굴리고, 그 길을 따라가
얼마나 멀리 굴러갈지, 상상해봐
둥근 것에는 가장자리도 모서리도 없으니
어디까지 가고 싶어?
멀리.
오래 걷고 길게 헤매자
가다가 쉴 땐 초라한 모닥불 곁에 더불어 앉자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게 바람을 등지며
우린 훼손되지 않아 멸종되지 않아
그러니 부디 계속 살아가줘,
이 어둡고 깊은 숲 속에서
- 「헨젤과 그레텔」 부분
'우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멸종되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 걷고 헤매자는 간곡한 청유에는 목적지가 없다. "멀리", "계속"이라는 부사가 암시하는 건 애초부터 우리에겐 목적지가 없다는 것뿐.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세계는 "어둡고 깊은 숲 속"과 같아서 좀처럼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숲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세계의 상실에 직면하게 될 위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조건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디지털 공간으로 수렴되는 사회적 관계나 삶의 양식들은 '나'와 세계(타인)가 맺는 실존적 관계를 형해화하고 각자의 삶이 "마음껏 혼자가 될 수 있"(「리얼리티 마이너스」)는 자유를 누리게 한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에서 맛보는 자유가 실은 현실의 '나'를 불안과 고립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시인이 세계의 상실을 거부하며 소요를 일으키는 건 불안과 고립에 반하여 우리 모두가 세계와 연결된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한 일이다. 세계에 대한 감각의 회복은 '나'와 세계의 연결망을 확인하는 일과 다름없다. 헨젤과 그레텔, 두 아이처럼 우리도 어둠 속에서 서로가 옆에 있음을 느끼고 확인하며 걸어야 한다. 다른 존재와 더불어 걷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세계에 속해 있다는 증거이며,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믿으면서 "부디 계속 살아가" 줄 것을 요청/약속해야 한다.
고양이로부터 배운 것
진수미는, 시란 "이름 붙일 수 없는 망가짐"(시인의 말)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12년 만에 출간된 그의 세 번째 시집은 시를 쓴다는 것이 고양이라는 존재, 영화라는 장르와 인접한 행위이며, 고로 시는 고양이나 영화로 환유될 수 있음을 선포한다. 시인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신적인 너무나 신적인」) 시집 한 권 분량의 문자가 사라진 걸 알게 된 후였으리라 추정된다. "너의 오두막을 불태"우라고 말한 니체의 책에 달린 끈을 씹어먹은 고양이가 무심하게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까닭은 고양이 집사인 시인이 스스로 불태우지 못한 시를 대신 불살라 형언할 수 없는 깨달음을 주고자 한 것. 시인은 (어느 정도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겠지만) 결국 고양이가 "나의 별, 나의 종교 / 나의 고향"임을 인정하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시와 고양이는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환유적 관계가 되었다. 시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고양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고양이만으로도 시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떻게 시의 환유가 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영화 이미지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시 이미지는 사실상 그 내적 원리의 측면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좀 억지를 쓰자면) 진수미에게 시와 영화는 은유적이기보다는 환유적이다. 시인은 폭력의 현장이나 재난 상황에 발생하는 타인의 고통이 재현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데, 영화 이미지를 통해 재현 가능성을 발견한다. 진수미의 시쓰기는, 파편적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언뜻 드러내는 영화 이미지들을 참조점으로 삼으며 시적 이미지를 증식시키는 방식으로 시를 전개한다. 진수미의 시는 의미를 명명하지 않고 의미화를 지연시키며, 말로 붙잡으려고 하면 달아나는 고통을 단지 지시한다. 진수미의 시에서는 시 이미지와 영화 이미지가 서로를 지시하며 연합체를 만들어가는 환유적 관계에 놓여 있다.
유사성과 총체성을 거부하되 파편적인 이미지의 증식을 도모하며 환유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이 시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혐오가 야기한 고통의 순간들을 가리킨다. 사회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을 불러내 희생자의 고통을 환기하게 하는 시는 읽는 이의 마음까지 분노와 슬픔에 빠져들게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 페이지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이 '수미계(界)' 특유의 비합리성, 즉 "망설임과 단호함을 동시에 품"을 수 있고, "일상과 초월을 구별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을 꿈꾸는"3) 이른바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관습적 경계를 사뿐히 밟고 넘어가는 명랑함 뒤에는 시가 무엇이어야 한다는 자기규정에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고, 세계의 폭력과 고통을 끝까지 응시하겠다는 결단도 있다.
그러한 응시의 산물인 이 시집은 시인이 밝힌 대로 "세상이라는 끔찍한 로또를 맞게 해주신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정시집이기도 하다. 시인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룬 것은 아니나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폭력과 고통의 만연을 낱낱이 기록하며 대체 '아버지'가 만든 세계가 왜 이 모양인지를 묻는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언어와 문화와 규범을 가르치고 상징적 질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이끌어 주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분으로부터 선물받은 "생은 한없는 모욕"이자 "순종과 굴종 사이에서 눈알을 굴리는"(「처형의 이듬」) 눈치 게임 같기만 한데, 안간힘을 다해 이긴다 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매인지 사랑인지 모르는 고통뿐인 삶인데, 삶을 자꾸 축복이라고 말하는 건 무슨 이유인가.
시인은 삶이 끝나지 않는 모욕과 같은 이유를 알고자 하지만 삶이란 언제나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문제이다. 사유란 언제나 사후적이고, 삶은 이미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니까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쇄적 덩어리 혹은 "삶이란 / 누군가 한 번은 밟아야 하는 개똥의 다른 이름"(「젖어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삶이 개똥인 이유는, 더럽거나 하찮아서가 아니라 "스크린도 무대도 없이 연출되지 않은 채로" 갑작스레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관없는 일들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사건의 연합체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삶이 개똥이란 말은, 그것이 감각의 대상일지언정 논리적인 사유의 대상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진수미가 삶을 그럴듯한 아름다운 대상에 빗대거나 총체적이고 최종적인 의미로 상징화하는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잘 뭉개진 똥처럼 파편적 이미지를 통해 감각할 수 있을 뿐 그 자체로 완성된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환유를 통해서만 지시될 수 있는 사건이다. 인접성의 논리에 기인한 환유란 대상에 대한 개념적 규정이나 이해가 아니라 단지 지시일 뿐이듯이 삶도, 끝나지 않는 여행처럼 지금 여기가 아닌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이행 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나는 삶은 여행이라는 비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당신의 혐오 당신의 근심」)라고 말했던 건, 삶은 다시 돌아올 집이 없는 끝없는 나아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주체인 '나'는 한 곳에 고정된 집과 같이 변함없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이질적인 '나'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삶은 타자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자 그들의 질문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삶은 "고통으로 달구어진 신을 신"(「듣는다」)는 것처럼 왜 이리 견디기 힘든 것일까? 3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너처럼 나 역시 한 발짝 딛을 때마다 "이다음 발은 / 싱크홀"(「죽은 자의 휴일」)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왜 가시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리 슬픈 일이 많은 건가요?"(「심해어」)라는 질문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여기 실린 46편의 시가 말하듯이 진수미가 시를 쓰는 이유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난데없는 발길질처럼 날아드는 폭력 앞에서 쓰러진 희생자들의 고통과 그것을 목격했던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들추며 시인은 타자들이 던진 질문의 답을 구하고 있다.
아침이 왔다 물 한 컵 마시고 고양이 밥을 주고 스트레칭하고 더없이 좋은 시작이었는데 뼈가 부러졌다 모든 게 망가졌다...(중략)... 통증에 계단이 나 있다면 고통의 나선계단을 다 같이 오를 수 있다면 더 높이 서있는 당신을 향해 고개 젖힐 것이다 당신 얼굴에 무언가 흐른다면 그것이 여름비처럼 살갗을 두드린다면 용암처럼 얼굴을 녹인다면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프다 외칠 것이다 고통으로 몸 비틀 것이다// 그래서일까요, / 통증의 시간은 식물을 닮았어요 / 다른 시간의 가지를 타고 오르는 넝쿨처럼 / 줄기 끝 / 붉은 꽃을 매달고 화분 밖으로 팔을 내뻗는 게발선인장처럼
- 「푸른 잎 우주_20140416」 부분
도심이 좋아요. 보도블록과 낯선 이들을 사랑합니다. 어깨를 치고 툭 지나가도 만난 적 없는 궤도들처럼
강을 건너 여기, 남쪽, 춤추기 좋은 조명과 음악에서 여자가 빠져나온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돌아서는 순간, 금속, 날카로운 끝이 아랫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통증, 떨리는 나이프, 파르르 존재여, 관통하려면 부디 고속 열차의 스피드로
...(중략)...
궁극적으로 질문인 세계여 여자, 한복판, 찔렸다...... 무표정한 당신, 사실의 톤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묻는다면, 양파의 궤도로써 도는 세계여 지금 당신의 이름으로 벗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10번 출구에서 돌아보라 -강남역에서」 부분
이 시들은 세월호 참사와 강남역 살인 사건을 환기한다. 사회적 재난이나 폭력 사건에서 희생자가 된 타인의 고통은 저절로 사그라들지 않고 식물의 푸른 잎처럼 화분을 넘치며 자라나 다른 이들의 마음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깨를 치고 툭 지나가도 만난 적 없는 궤도들처럼" 살아가는 타인의 고통이란 이해의 영역 밖이겠지만, 시인은 화자를 통해 타인인 "당신 얼굴에 무언가 흐른다면 그것이 여름비처럼 살갗을 두드린다면 용암처럼 얼굴을 녹인다면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프다 외칠 것이고, "고통으로 몸 비틀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우리가 타자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죽음의 공동체'(알폰소 링기스)임을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다. 진수미 시의 화자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타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타자'와 고통을 나누기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세계의 시간에서 절연되는 시간을 경험하고 견"4)디는 중이다. 달리 말하면 희생자들의 고통을 향해 손을 내미는 화자는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공간인 "푸른 잎 우주"에 속해 있는 것이다. 물을 주지 않아도 자라나는 선인장처럼 통증이 "가지를 타고 오르는 넝쿨처럼" 점점 더 자라나는 '20140416'이라는 행성에.
타자의 고통을 응시하는 화자가 마주한 진실은 사회라는 삶의 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가장 취약한 생명들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여성'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도 운이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문장은 강남역 사건 이후 추모를 위해 모인 이들이 여성 혐오라는 폭력에 반대하며 외친 구호이다. 그러나 사법계는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지자체들은 서둘러 '여성안전 특별치안대책'을 마련했다. 공식적으로는 여성혐오가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라고 했지만 실은 간접적이고 광범위한 원인이며 여성을 향한 폭력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언론은 앞다투어 지자체들이 시행한 '여성안전 특별치안대책'으로 인해 성범죄가 감소되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인가? 가부장적 세계에서 타자인 여성은 아직 남성 주체가 정복하지 못한 "궁극적으로 질문인 세계"이며, 동일화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질문은 여성을 해부하고 있는데도? 성차별과 여성혐오는 이 세계의 폭력이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젠더 갈등이나 극단적 페미니즘 등 문제의 원인을 발명해낸다고 해서 타자를 향한 주체의 폭력이 멈출 리 없다. 희생자와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따져 물으며 폭력의 원인을 분배하고 폭력을 이해해주는 방식으로는 차별과 혐오를 종식시키지 못한다.
시가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시와 그것의 시적 이미지는 폭력에 반대하고 타자의 고통에 동참하게 한다. 이 시집의 4분의 1에 가까운 시들이 영화 이미지를 끌어들인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시에서 언급된 영화 이미지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타자를 향한 폭력을 보여준다. 여성만이 아니라 소수자, 이방인, 경제적 취약층이나 하위계층에게 가해지는 혐오와 폭력은 그들을 삶의 밑바닥으로 밀어내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마저 박탈하지만 그것은 대개 불가피한 운명이나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되곤 한다. 예컨대 연인에게 강간당하는 여자(「세 겹의 죽음」, 「카사밀라의 재회」), 기계에 몸이 빨려 들어간 비정규직 노동자(「개미는 애인이라도 있지」), 국경과 국경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바깥으로 추방된 난민들(「누군가는 달이 없어졌으면...... 하고 빌었다」), 혐오와 차별의 시선에 의해 검열받는 연인(「모두가 쿠로브스키 부인」) 등 성적, 계급적, 인종적 타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영화 이미지를 통해 더 선명하게 노출된다. 영화의 삽입은 파편적 이미지를 호명하는 일에 불과해 보이지만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말처럼 이미지와 이미지가 연결될 때 일으키는 섬광은 우리에게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게 하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장 뤽 고다르)5)
그러니 시를 써야 한다. 눈 위에 기침을 하자던 김수영의 말처럼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김수영, 「눈」)를 뱉어내듯이 시를 써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더 많은 이미지가 탄생할 수 있게 시를 써야 한다.
집사 시인들이여
이제 A4 용지 대신 고양이 몸에 시를 찍어냅시다
그리하면 온 집안에 시어들이
솜털처럼 날아다니는 기적이 생길 것입니다
시와 함께 자고
시와 함께 기침하며 깰 것입니다
김수영의 시를 떠올립시다
로션 바를 때도
얼굴에 처덕처덕 시어가 달라붙어
시의 육체와 하나된,
진정한 시인으로 육화될 수 있습니다
...(중략)...
이뿐이겠습니까?
양피지처럼 덧쓰기 가능합니다
고양이 털피지는
무궁무진 상상초월 연속발생 재질입니다
- 「여기, 털피지의 기적」 부분
진수미는 "너무 열심히 시를 쓰는 한국 시인들"에게 제안한다. 당신이 종이로 찍어낸 시집을 출간하여 명성을 얻고 문학사에 길이 남겠다는 작심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면, 다만 가슴속 가래를 뱉어야 시원한 게 인간의 생리이듯 시를 써야만 살 것 같은 시인의 생리에 따라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정말 그런 시인이라면 유한한 종이 대신 "무궁무진 상상초월 연속발생"하는 고양이 털로 만든 '털피지'에 시를 찍어내자고 강력히 말한다. 좀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고양이 털에 찍힌 시가 온 집안을 날아다닐 테고, 아무리 털어내도 겉옷과 속옷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는 몸의 일부로 육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고양이 털처럼 온 사방에 난무하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 비로소 도달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온과 불경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 데나 달라붙는 고양이 털처럼 자유로워진 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마구 쏟아내며 타자의 고통에 침묵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모욕으로 만드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진수미는 시를 쓰는 일이 자신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자기라는 작은 세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 시인이다. 자기라는 진공의 상태 바깥에 서면 다른 "존재의 기척"이 자신을 깨우고(「센세라는 이름의 고양이」)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야기의 대부분은 고통의 발신이고 그것을 응시하는 일은 시인 자신이 끝낼 수 없는 고통에 붙들리는 일이므로, 시를 쓴다는 것은 영원히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고통을 맞이하듯 가혹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이 고통스러워졌을 무렵 집사인 시인에게 주인인 고양이가 가르쳐주었다. 사랑에도 마침표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못할 일도 아니라고.(「번갯불에 똥덩어리」) 참으로 타당한 그 말에 '수미계(界)'에는 다시 계속 쓸 수 있다는 용기가 차오른다. 시인은 가래를 뱉듯 시를 쓴다. 삶을 모욕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김지윤과 진수미의 시집은 다른 목소리로,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한다.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요구는 예술과 혁명의 생리이므로 그들은 작은 혁명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탐욕과 이기가 낳은 무책임이 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빠뜨릴 때, 무지와 맹목이 불러일으키는 차별과 혐오가 소수자와 약자를 향할 폭력이 될 때, 타인의 슬픔이 조롱당하고 희생자에 대한 애도마저 금지될 때 시는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하는 문장이 되고자 도약을 준비한다. "모르는 죽음들, 애도하지 않은 상실 / 꺼져 버린 등불들"(김지윤, 「B-side」)을 밝히기 위해 문장의 온도를 달구고, "파괴의 신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낫을 휘두"(진수미,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앨리스」)르며 약자를 위협할 때 그 앞에서 스크럼을 풀지 않을 견고한 문장들을 결속시킨다. 이들이 안온한 서정시를 쓰지 못하는(않는) 것은 세계의 상실과 폭력에 맞서 자신이 쓸 수 있는 최선의 시를 쓰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최선의 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혁명을 실천하면서 세계의 변화를 요구하는 문장들이다.
- 1) 랭던 위너, 『길을 묻는 테크놀로지』, 손화철 옮김, 씨아이알, 2010, 172쪽.
- 2) 위의 책, 165-170쪽.
- 3) 진수미의 두 번째 시집 『밤의 분명한 사실들』(민음사, 2012) 뒷표지에 실린 추천사.
- 4) 알폰소 링기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의 공동체』, 김성균 옮김, 바다출판사, 2013, 250쪽.
- 5)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오윤성 옮김, 레베카, 2017, 214-21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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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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