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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현대비평 | 2024년 겨울호(제21호)

김환태 비평 연구

오형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비평전문 계간지 [현대비평] 주간.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 주간. 1994년 『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음. 평론집으로 『신체와 문체』(문학과지성사, 2001), 『주름과 기억』(작가, 2004), 『환상과 실재』(문학과지성사, 2012), 『알레고리와 숭고』(문학과지성사, 2021) 등이 있고, 연구서로 『한국 근대시와 시론의 구조적 연구』(태학사, 1999), 『현대시의 지형과 맥락』(작가, 2004),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작가, 2010), 『문학과 수사학』(소명출판, 2011), 『한국 모더니즘 시의 반복과 변주』(소명출판, 2015)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이성의 수사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제3회 젊은 평론가상(2002), 제6회 애지문학상 평론부문(2008), 제21회 편운문학상 평론부문(2011), 제24회 김달진문학상 평론부문(2013), 제32회 팔봉비평문학상(2021)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1. 머리말


     눌인(訥人) 김환태(1909-1944)는 1934년 4월 조선일보에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한 이후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비평가로서 한국 현대비평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김환태는 1920년대 이후 비평문단을 주도했던 프로문학 비평이 사회적·정치적 억압이라는 외적 요인과 자체의 이론적 한계라는 내적 요인으로 인해 지도력을 상실하던 시기인 1930년대 중반에, 인상주의 비평이라는 예술주의 비평의 지평을 열며 문단에 등장하게 된다. 김환태가 등장한 1930년대는 한국 현대문학의 전개에 있어서 전형기로서, 프로문학이 퇴조하고 시대의 중심 사상이 모색되는 주조 탐색의 시기였다. 시대의 중심 사상을 모색하는 전형기의 공간은 새로운 문학론과 비평이 활발하게 시도되고 상호각축을 벌이는 양상을 낳는다. 따라서 이 시기에 서구 사조에 근거를 둔 지성론, 모랄론, 휴머니즘론, 행동주의론, 고전론, 세대론 등 다양한 비평 활동이 이루어진다. 1) 또한 1930년대는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으로 문학에 있어서의 현대성의 인식이 본격화된다.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이 수용되어 모더니티 지향의 문학사적 흐름을 선명히 하고, 전통 지향과 모더니티 지향을 결합한 순수시의 경향과 함께, 카프 계열에 속했던 문인들도 창작방법론을 중심으로 한 비평적 관심을 지속함으로써, 다양한 비평적 유파를 형성하고 견제와 비판을 통해 비평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김환태의 비평은 카프 중심의 문단 운동에 대해 비판하면서 당대 한국문학이 요청하는 새로운 비평 논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아 왔다. 2) 김환태의 비평은 우선 그가 일본 구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점과, 1930년대라는 당시 한국의 문단적 상황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가 영문학 전공자로서 M. 아놀드 및 W. 페이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프로문학이 퇴조하는 시기에 비평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그의 문학론 및 비평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3) 그는 구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졸업논문으로 「문예비평가로서 매슈 아놀드와 월터 페이터」를 집필했다. 4) 아놀드와 페이터에 대한 졸업논문을 통해 얻어진 문학에 대한 이해가 기초가 되어 김환태의 순수 문학관이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아놀드의 “비평적 능력은 창조적 능력의 하위에 속한다”는 명제와 “대상을 실로 있는 그대로 본다”는 ‘몰이해적 관심(disinterestendness)’은 그대로 김환태 비평에 수용된다. 즉 비평은 공평무사한 몰이해적 태도를 가지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유로운 정신 활동이라는 것이다. 5) 이것은 김환태 비평의 근간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놀드가 속물화된 영국 국민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문학에서 ‘교양’, ‘도덕성’, ‘지성’, ‘이성’을 강조하는 공리적 효용론자였음을 상기해 보면, 심미안을 중시하며 인상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김환태의 문학론은 아놀드의 비평관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페이터의 인상주의 비평에 더욱 경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놀드와 페이터의 문학론을 통해 형성되었던 김환태의 지적 배경은 1930년대의 독특한 한국 문단 상황과 관련을 맺으며 문단사적 의미를 획득한다. 1930년대 ‘비평무용론’의 대두와 함께 빗발치는 프로 비평가에 대한 비난의 소리는 그가 비평사적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평단 SOS’로 표현되는 프로 문예비평에 대한 불신이 첨 예화되는 가운데, 그는 프로문학과 대척의 입장에 서 있는 ‘구인회’에 가담하여 순수문예 운동을 전개하며 비평의 방향 전환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가 내세웠던 인상주의 비평은 서구 낭만주의 문학이론을 토대로 문학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균형 있게 이론화했기 때문에 투쟁 이념의 문학적 실천을 목적으로 한 카프문학 및 과학적 비평을 표방한 주지주의 문학과 근본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김환태 비평에 대한 연구가 카프문학 계열 및 주지주의 문학 계열과 대비되는 김환태 비평의 특성과 상대성에 주목해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전제하에서 김환태 비평에 대한 기존의 선행 연구가 공통분모로 제시한 ‘인상주의 비평’과 ‘예술주의 비평’이라는 평가에 대해 좀더 세밀히 규명하여 김환태 비평의 숨겨진 면모에 대해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된다. 김환태의 비평을 ‘인상주의 비평’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김환태 자신의 명명에 기인하는 바가 큰데, 우리는 비평가의 비평세계를 그 자신이 스스로 명명한 용어에 국한하여 규정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작가 스스로의 명명을 괄호 치고 비평 텍스트 자체의 사실에 입각하여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김환태의 비평 텍스트를 정밀히 분석하고 해석한다면 그의 비평세계가 ‘인상주의 비평’ 및 ‘예술주의 비평’의 영역을 가지면서도 그것과 유리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다른 차원도 공유하고 있음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목적에 접근하기 위해 실제 비평보다는 문학론과 비평론을 대상으로 삼아, 김환태 비평의 특성을 크게 비평가의 수용 과정, 작가의 창작 과정, 비평가의 창작 과정, 유기체적 문제설정이라는 네 항목으로 설정하고 이를 각각 구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첫째, 비평가의 수용 과정의 관점은 독자나 비평가의 작품 수용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평관으로서, 비평의 유형상으로는 존재론과 효용론에 해당한다. 둘째, 작가의 창작 과정의 관점은 작가의 작품 생산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평관으로서, 비평의 유형 분류상으로는 표현론에 해당한다. 셋째, 비평가의 창작 과정의 관점은 비평가의 비평문 생산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평관으로서, 비평의 유형 분류상으로는 역시 표현론에 해당한다. 넷째, 유기체적 문제설정은 앞에서 존재론, 효용론, 표현론 등의 세 가지로 구분한 비평의 유형론이나 낭만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등의 문예사조적 개념을 종합하여 보다 포괄적이고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설정되는 비평의 존재 방식이자 비평의 모델이다. 6) 김환태의 비평이 비평의 존재 방식이자 모델로서 유기체적 문제설정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당대에 임화·김남천 등의 변증법적 문제설정을 가진 비평가들이나 김기림·최재서 등의 기하학적 문제설정을 가진 비평가들과 근본적으로 변별되는 비평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박용철·정지용 등의 유기체적 문제설정을 가진 비평가와 친연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비평가의 수용 과정-존재론과 효용론: 작품 자체, 인상과 반성


     1934년 4월 조선일보에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전문 비평가로 등장한 김환태는, 이데올르기 비평의 퇴조 이후에 오는 이론적 공백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프로문학 비평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비평 세계를 전개해 나간다. 이 등단 평론의 첫 문장은 김환태 비평의 기본 전제를 선명히 밝히고 있다.


문예비평이란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입니다. 따라서 문예비평가는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과의 혼돈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출하여야 합니다. 7)


     김환태는 문예비평을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 정의에는 문학비평의 유형으로서 존재론과 효용론이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이라면,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려는 노력은 비평의 효용론적 관점이다. 또한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과의 혼돈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 주목하는 것이 존재론적 관점이라면,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현”하는 것은 효용론적 관점이다. 이처럼 문학비평의 유형으로서 존재론과 효용론이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점은 김환태 비평의 논리적 특성을 밝히는 동시에, 그가 당대 한국 문단에 제시한 비평관의 숨은 정체를 밝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비평가는 언제나 실용적·정치적 관심을 버리고, 작품 그것에로 돌아가서 작가가 작품을 사상(思想)한 것과 꼭같은 견지에서 사상하고 음미하여야 하며, 한 작품의 이해와 평가란 그 작품의 본질적 내용에 관련하여야만 진정한 이해나 평가가 된다는 것을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8)


     인용문은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으로서, 비평가가 작품을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실용적·정치적 관심을 버리”는 것은 “작품 그것에로 돌아가”서 “작품의 본질적 내용에 관련하여” 이해하고 평가하는 작업으로 귀착된다. 문학 비평의 대상이 문학 작품 자체라는 전제 조건은, 당대 프로문학 비평이 지향하는 실용적·정치적 관심을 비판하는 목적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은 매슈 아놀드의 ‘몰이해적 관심’에 대한 강조로 연결된다.


문예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려면, 평가(評家)는 매슈 아놀드가 말한 ‘몰이해적 관심(沒利害的 關心)’으로 작품을 대하여야 하며, 그리하여 그 작품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가장 충실히 표현해야 합니다. 비평가는 문법가도 역사가도 아닙니다. 그는 감동하고 표현하는 예술가입니다.9)


     김환태가 매슈 아놀드가 말한 ‘몰이해적 관심’을 강조하는 것은, 비평을 공평무사한 태도를 가지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유로운 정신 활동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문학 비평을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 파악하려 한다. 이러한 관점은 문학의 본질 문제로서 그 순수성과 독자성을 옹호하는 김환태 비평론의 핵심이자 기본 전제라고 볼 수 있다. 김환태는 이 전제 조건을 토대로 “작품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에 주목하는데, 여기서 “인상과 감동”은 작품 자체를 감상하고 이해하며 평가하는 과정에서 김환태가 핵심적인 요소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김환태는 비평의 효용론적 관점으로서 ‘인상’을 강조하게 된다.


나는 비평에 있어서의 인상주의자다. 즉 비평은 작품에 의하여 부여된 정서와 인상을 암시된 방향에 따라 가장 유효하게 통일하고 종합하는 재구성적 체험이요, 따라서 비평가는 그가 비평하는 작품에서 얻은 효과 즉 지적·정적 인상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창조적 예술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어 움직이지 않는 자이다.10)


     김환태는 스스로 인상주의자임을 선언하고, 비평을 “작품에 의하여 부여된 정서와 인상을 암시된 방향에 따라 가장 유효하게 통일하고 종합하는 재구성적 체험”이라고 정의한다. “정서와 인상”이 “작품 에서 얻은 효과 즉 지적·정적 인상”으로서 작품 감상에서 얻어진 첫 소산이라면, “통일하고 종합하는 재구성적 체험”은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창조적 예술가가 되”는 과정, 즉 재구 표현의 차원으로 연결된다. 이 지점에서 김환태의 문학론은 비평의 표현론적 차원으로 전개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상론하기로 한다.

     김환태는 비평가가 작품 속에 스며 있는 사상성의 탐구에 주력해서는 안 되며, 그 작품에 나타난 사상과 현실이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속에 융해되어 작가의 의도가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작가의 입장에서 ‘개성’과 ‘천재’를 중시하며, 비평의 효용론적 관점에서는 ‘심미적 효과’라는 예술적 의의를 획득하기 위해서 비평가가 자신의 ‘인상’을 충실히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비평이란 ‘감상’에 ‘반성’을 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감상과 비평은 전연 딴 종류의 것이 아니라, 비평이란 감상이 좀더 세련된 것, 다시 말하면 비평이란 감상에 반성이 더하여 그보다 좀더 객관성과 보편성을 차부(且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감상이 어떻게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여 비평이 될 수 있느냐? 그것은 주관에 철저함으로써이다. 감상하는 주관이 그 자신에 철저할진대, 그 감상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여 비평이 될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주관은 순수한 객관인 까닭이다.11)


     김환태는 비평의 요소로서 체험적 감상을 중시한다. 비평이란 작품을 어떤 선험적 기준에 맞추어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감상’을 하는 작업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비평을 “감상이 좀더 세련된 것” 즉 “감상에 반성이 더하여 그보다 좀더 객관성과 보편성을 차부(且付)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감상”이 비평가의 ‘인상’에 해당한다면, “반성”은 여기에 지적 작용이 가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김환태는 감상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방법을 “주관에 철저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보는데, “순수한 주관은 순수한 객관인 까닭”이라고 피력한다. 결국 김환태가 비평 방법으로 제시한 ‘순수한 주관은 순수한 객관’이라는 명제는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성’이라는 미학 사상에서 출발하여 “예술의 객관성을 세련된 주관성으로써 나타난다”는 코헨의 미학 사상에 맞닿아 있다.

     김환태에 의하면, 보편이 잘 다져진 표현력, 즉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서 구성되고 표현되어졌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우리의 정신을 정화하며,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한다. 따라서 ‘순수한 주관은 순수한 객관’이라는 이론이 성립하며, 한 개인의 인상이 곧 예술의 가치 척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환태의 비평관이 ‘반성’보다 ‘감상’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비평이 ‘감상’에 ‘반성’을 더한 것이라고 정 의하면서 ‘인상’이 가진 주관적 요소와 ‘지적 인식’이 가진 객관적 요소를 결합하지만, 이 결합은 양자의 균등한 종합이 아니라 전자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후자를 포괄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리를 ‘주관적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3. 작가의 창작 과정-표현론: 감정의 구상화, 내적 체험의 표현


     김환태의 비평론에는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논의와, 비평가가 비평문을 창작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논의가 공존한다. 김환태는 비평도 창작의 일환, 즉 예술적·창조적 행위로 간주했으므로, 연구자가 이 두 영역을 구분하여 그의 문학론과 비평론을 세밀하게 고찰하지 않으면 자칫 연구 관점이나 해석상의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글은 작가의 창작 과정과 비평가의 창작 과정을 구분하여 김환태의 비평을 규명하고자 한다. 먼저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김환태의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술의 대상은 영원히 인간이다. 생명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성은 오성과 지식 등에 대립한 것으로서의 감정이요, 감정은 그 성질상 부단히 표출을 기구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이리하여 예술은 자아의 내부의 필연적 요구에서 나오는 내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여기서 말하는 표현이란 전 주관의 대표자로서의 감정의 구상화를 의미한다).12)


     김환태는 「표현과 기술」에서 주지주의 문학론이 중시하는 ‘지성’에 맞서 ‘감정’을 옹호하는 사유를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주지주의 문학의 유력한 대변인인 T. S. 엘리어트가 주장하는 시와 시인의 분리, 지성의 존중, 감정에서의 해방 등에 대응하여 시인, 개성, 감정 등을 적극 옹호하는 문학론을 펼치는 것이다. 인용문에서 김환태가 “예술의 대상은 영원히 인간이다. 생명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예술의 영원한 대상으로서 인간과 생명의 연장선에 “오성과 지식”이 아닌 감정을 위치시키기 위해서다. 이러한 차원에서 김환태의 문학관은 주지주의 문학관에 대응하는 낭만주의 문학관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시와 시인을 분리시키지 않고 인간과 생명과 개성을 중시하며 지성보다 감정을, 기술보다 표현을 중시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김환태에 의하면, “감정은 그 성질상 부단히 표출을 기구”하며, 따라서 “예술은 자아의 내부의 필연적 요구에서 나오는 내적 표현”이다. ‘감정’과 그것의 필연적이고 내적인 ‘표현’으로 요약되는, 이러한 관점은 낭만주의의 표현론에 맞닿아 있는데, 김환태는 이것을 “감정의 구상화”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이것은 당대 주지주의 문학론이 주장하는 ‘지성’에 맞서는 ‘감정’을, ‘제작’ 혹은 ‘기술’에 맞서는 ‘표현’을 어떤 문학적 논리로써 제시해야 하는 비평적 과제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다. 그는 “감정의 구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제시하면서 소박한 낭만주의적 표현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질을 의미로부터 독립한 기교의 우수성에서나 음악과의 결합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힘을 전달하는 추력 속에서, 열정적으로 체험된 경험을 전달하는 언어의 완전성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괴테가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은 생명에 의하여서만 환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의식’이 없는 시에서 우리는 진정한 예술적 감흥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열정적 체험을 전달하는 언어의 완전성, 즉 의식과 형식과의 완전한 일치에 의하여서만 시인은 롱기누스가 말한 저 ‘황홀’을 우리의 마음 속에 불태울 수가 있는 것이다.13)


     주지주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제작’ 혹은 ‘기술’에 맞서서 ‘표현’을 강조하면서 ‘감정의 구상화’라고 언급한 김환태는, 그것을 좀더 상술하기 위해 “체험된 경험을 전달하는 언어의 완전성”이라고 표현한다. “의미로부터 독립한 기교의 우수성”이 주지주의 문학론을 대변하고, 의미의 “음악과의 결합”이 낭만주의 문학론을 대변한다면, 김환태는 “체험된 경험을 전달하는 언어의 완전성”을 주장함으로써 이 두 입장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 입장을 견지하려 한다. 이 입장은 “생명의 의식”과 “열정적 체험”을 기본적으로 중시하면서도 그것의 언어적 표현, 즉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의 완전성을 아울러 강조함으로써, 언어 표현 이전의 감정·개성·생명·체험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것의 언어 적 표현도 존중하는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김환태는 이러한 차원을 “의식과 형식과의 완전한 일치”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의 귀결로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시인 정지용의 말을 빌어 최후의 결론을 짓자.
‘시인은 시전문가이어서는 안된다. 그는 인생과 철학과 종교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시인은 시를 제작하는 기술자가 되지 말고 내적 체험의 표현자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낳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4)


     김환태는 시인이 “시를 제작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내적 체험의 표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관되게 시인과 시를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지성/감정, 기술/표현, 제작/잉태 등의 이분법에서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긍정하는 논리를 견지한다. 그러나 ‘체험’과 ‘표현’을 동시에 존중한다는 점에서, 그는 의식(내용)과 언어(형식)의 종합을 추구한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김환태의 비평적 균형 감각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내적 체험의 표현’이라는 김환태의 창작론에서 “낳는”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작품 생산의 차원은, ‘생명의 탄생’ 이라는 의미를 동반하면서 유기체적 문제설정의 단초를 보여준다. 김환태의 비평론이 보여주는 유기체적 문제설정에 대해서는 5장에서 상론하기로 한다.



4. 비평가의 창작 과정-표현론: 자기표현, 창조적 비평론


     다음으로 비평가가 비평문을 창작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김환태의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2장에서 고찰한 대로, 김환태의 비평론에는 문학비평의 유형으로서 존재론과 효용론이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과 효용론적 관점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김환태 비평관의 숨은 정체를 밝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면, 이 관점이 비평의 표현론적 차원으로 전개되는 부분은 김환태 비평관을 규명하는 또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김환태는 「작가·평가·독자」에서도 비평의 대상을 작품 자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비평의 대상은 언제나 작품 그것이다. 그러므로 비평 그것은 작품의 뒤를 따르는 것이요, 결코 앞서지 못한다. (…중략…) 진정한 비평가는 한 작품에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보다도 변증인이 되어야 한다. 한 작품의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보려면, 매슈 아놀드가 말한 ‘몰 이해적 관심’과, 가장 유연성 있고 가감성 있는 심적 포즈로 그 작품에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15)


     비평의 대상은 작품 자체이며, 작품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몰이해적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몰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김환태가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이 비평의 존재론적 차원을 “얻은 인상에 다시 반성을 가하여 분석·비판하고 또 작품에 암시된 작가의 이상적 정신활동과 심적 체험의 방향에 따라 자기의 심적 체험을 재구성하는 것이 곧 진정한 비평”16)이라고 주장하면서 비평의 효용론적 차원과 연결시킨다. 김환태가 주장하는 비평의 효용론적 차원은 비평가를 포함하여 일반 독자에 대한 효용론에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감상의 측면으로 볼 때 진정한 비평가는 일반 독자보다 높은 문학적 교양과 심미적 훈련이 있는 사람이요 따라서 감상력이 발달한 부류의 사람이므로, 가장 아량 있고 편견과 고집 없는 진실한 독자가 비평을 읽음으로써 자기의 어떤 인상과 작품상을 평자의 그것에 비함으로써, 자기의 감상력의 배양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비평이란 일종의 창작이라는 그 일면에 있어서 독자는 비평 그것을 일종의 창작품으로서 감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17)


     인용문에서 김환태는 비평의 효용론으로서 일반 독자가 얻는 효용성에 대해 언급한다. 일반 독자는 “높은 문학적 교양과 심미적 훈련이 있”고 “감상력이 발달한” 비평가의 비평을 읽음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인상 및 작품상과 비교하여 감상력을 배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김환태가 ‘작가-작품-비평가-일반 독자’의 순으로 전개되는 작품 창작 과정 및 수용 과정을 폭넓게 고려하면서 비평가의 역할에 대해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환태의 비평론이 가진 존재론적 관점과 효용론적 관점은 비평가의 표현론적 관점으로 전개되면서 복합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문예비평은 (…중략…) 그 작품에 나타난 사상과 현실이 얼마만 한 정도에 있어서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속에 융해되었으며,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지도하려던 그 작가의 의도가 얼마만한 정도에 있어서 실현되었는가, 그리고 그 결과 그 작품이 얼마만한 정도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였는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18)


     인용문은 김환태의 비평론이 종합적으로 서술된 대목이다. “그 작품에 나타난 사상과 현실”이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의도의 차원이고,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속에 융해”되는 것은 그것이 작가의 내면과 일치하여 작품의 내용을 이루는 차원이라면, “작가의 의도가 얼마만 한 정도에 있어서 실현되었는가”는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가의 표현론적 차원이고, “작품이 얼마만한 정도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였는가”는 비평가나 독자가 작품을 읽고 얻는 효용론적 관점이다. 이러한 언급 이후에 김환태는 주로 비평가의 표현론적 차원을 피력한다.


문예비평가는 먼저 자기를 말하여야 한다. 한 작품에서 어떠한 감동과 기쁨을 받았는가를, 그리고 그로 인하여 자기가 얼마만큼 변모되었는가를 고백하여야 한다. 정연한 논리를 세우기는 쉽다. 그러나 자기를 표현하기는 어렵다. 문예비평가가 창작가와 함께 자기표현의 고통을, 다시 말하면 창작의 고통을 맛보는 것은 오직 이 길을 통하여서인 것이다.19)


     김환태는 비평가의 자기표현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 자기표현의 내용이 “한 작품에서 어떠한 감동과 기쁨을 받았는가를, 그리고 그로 인하여 자기가 얼마만큼 변모되었는가를 고백”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문예비평가가 창작가와 함께 자기표현의 고통을, 다시 말하면 창작의 고통을 맛보는 것”은 비평의 표현론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 대목에서도 자기표현의 내용이 작품으로부터 받은 감동과 기쁨, 그리고 그로 인한 자기 변모라는 점에서 비평의 효용론적 관점을 근본적으로 내포하는 것이다.

     여기서 김환태는 문예비평가가 “창작의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창조적 예술가로서의 문예비평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문예비평가는 “높은 문학적 교양과 심미적 훈련이 있”고 “감상력이 발달한” 사람, 즉 고도의 심적 훈련과 탐미적 교양을 통하여 ‘심미안’을 확보한 사람인 동시에, 창조적 예술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김환태의 비평론은 ‘창조적 비평론’의 입장을 보여준다. 창조적 비평론이란 작품과 비평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주종적인 시각을 부정하면서, 비평이 창작과 똑같은 수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입장은 문학작품을 절대적으로 우월한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비평가의 예술적 취향과 활발한 상상력을 통하여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생각과 상통한다.


비평의 지도성은 언제나 비평 스스로의 겸손에서 오는 것이며, 비평가의 권위는 그가 입법자나 재판관이 될 때가 아니라 작가의 좋은 협동자가 될 때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한 작품에서 얻은 인상을 그것이 암시된 방향에 따라서 재구성하여, 작품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에서 독립한 작품상을 만들어 보여 줄 수 있는 창작가가 될 때에 비로소 확립될 것이다.20)


     김환태는 ‘비평력은 창조력의 하위에 속한다’는 아놀드의 명제를 받아들였지만, 비평론의 전개 과정에서 문예비평가가 작품을 재구성하는 ‘창조자’ 혹은 ‘창조적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비평가가 입법자나 재판관으로 평가되는 것에 대응하여 올바른 비평가의 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작가의 좋은 협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작품에서 얻은 인상”을 그것이 암시된 방향에 따라서 “재구성”하는 과정을 비평의 진정한 태도라고 간주하는데, 이러한 관점은 비평가가 “작품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에서 독립한 작품상을 만들어 보여 줄 수 있는 창작가”가 되어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김환태에게 있어서 비평가는 “문법가도 역사가도 아”닌 “감동하고 표현하는 예술가”인 셈이다. 비평가는 창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자기표현’의 고통을 함께 나눌 때, 즉 자기표현을 통하여 비로소 창작의 고통을 맛보는 길에 동참할 때, 창조자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이며 비로소 비평도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환태의 이러한 ‘창조적 비평론’은 “비평의 대상은 언제나 작품 그것이다. 그러므로 비평 그것은 작품의 뒤를 따르는 것이요, 결코 앞서지 못한다”라고 주장한,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으로서 김환태 자신의 기존 견해와는 상반되는 논리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 해, 김환태의 문학론 및 비평론은 비평의 유형론으로서 존재론과 효용론 및 표현론이 복합적으로 얽혀 미묘한 논리적 모순과 균열을 노정하는 것이다. 결국 김환태의 문학관은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인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과,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려는 노력인 비평의 효용론적 관점과, “표현하고 전달하”는 비평의 표현론적 관점이 상호 결합되어 복합체를 이루는 동시에 미묘한 균열을 일으킨다. 비평세계 내부에서 빚어지는 이 복합적인 양상과 논리적 모순 및 균열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김환태 비평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 중요하다.



5. 유기체적 문제설정-영감, 생명, 상상, 내용과 형식의 융합


     김환태의 비평론은 존재론적 관점, 효용론적 관점, 표현론적 관점 등을 복합적으로 결부시키며 전개하는 과정에서 유기체적 문제설정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면서 종합해 나간다. 유기체적 문제설정은 예술을 생명이 있는 유기체로 파악하는 사유에서 비롯된다. 유기체적 문학관은 우선 유비적 사유와 유기체적 세계관에 기초한다.21) 유비적 사유방식과 유기체적 세계관을 기초로 한 문학 유기체론은 과정 이론·존재 이론·가치 이론·역사 이론 등의 이론 영역을 갖는데,22) 그 전체적 내용은 연속성·역동성·전체성 등의 중심개념으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다. 문학 유기체론의 일반적 개념들은 동·서의 전통적 문학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근대 이후의 문예사조나 미적 실천으로서는 직접적으로 낭만주의적 문학관과, 간접적으로 상징주의적 문학관과 관련성을 지닌다.

     김환태는 우선 작가의 영감과 생명에 의해 생성된 작품 자체를 유기체로 간주한다.


(1) 아무리 세밀히 한 작품을 산출한 환경과 원인을 분석하여도 우리는 그 작품의 구조와 문체와 생명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작품의 구조와 문체와 생명은, 작가의 영감에 의하여 생명이 취입된 유기체입니다. 분석과 해부의 메스가 다를 때 유기체는 와해되며 생명은 도망합니다.23)


(2) 문학작품은 각기 한 생명체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 작품을 감상하려면 먼저 그 작품에 담긴 생명―열렬한, 진지한, 강렬한, 연연한, 그리고 온화한 생명력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24)


     김환태의 기본 관점은 (1)의 “작품의 구조와 문체와 생명은, 작가의 영감에 의하여 생명이 취입된 유기체”라는 문장에 잘 나타난다. 작품은 작가의 ‘영감’에 의해 ‘생명’이 형성된 ‘유기체’이므로, “작품의 구조와 문체와 생명을 파악”하기 위해 “환경과 원인”을 분석하는 것은 “분석과 해부의 메스가 다”르므로 온당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김환태는 (2)에서 이러한 관점을 작품 감상의 차원에 적용하여, “작품을 감상하려면 먼저 그 작품에 담긴 생명” 혹은 “생명력”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영감’과 ‘생명’을 강조하는 관점은 낭만주의의 유기체적 문학관과 유사한데, 이것들을 ‘상상력’과 연관시키는 논리도 그러한 입장의 연장선에 있다.


생명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단편을 계속적으로 조직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킴으로써이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은 지성과 오성(吾性) 등에 대립한 것으로서의 감정이요, 그러므로 생명을 적출하고 명료한 논리적 총체의 신념을 주는 것은 인간행동의 원동력의 정밀한 기록과 잠재의식의 섬세한 복사를 가능케 하는 분석과 비판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표상(目的表象)에 따라 능동적 주의 상태 밑에 표상 선택과 종합을 행하는 상상작용이다.25)


     김환태는 분석과 비판 및 환원과 분리를 추구하는 예술상의 자연주의와, 주아주의(主我主義)의 필연적 귀결인 내면적 분열을 일으키는 심리주의 문학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생명의 본성을 감정으로 간주하는 유기체적 문제설정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생명”은 “전체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생명의 본성인 감정은 “분석과 비판”이 아니라 “상상작용”이다. 여기서 김환태가 유기체적 문제설정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개념은 생명, 전체성, 감정, 상상작용 등이다. 김환태는 ‘상상작용’을 “일정한 목적표상(目的表象)에 따라 능동적 주의 상태 밑에 표상 선택과 종합을 행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어서 “어느 이상을 향하여 관념이나 영상으로 조직하고 종합하는 일종의 선택적 건설작용”26)이라고 부연한다. 이러한 개념은 칸트의 상상력 이론이나 낭만주의 문학관이 제시하는 상상력 이론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김환태는 예술가의 위대성이 시대정신과 물질적 환경을 초월하고 지배하는 그의 생명력과 상상력의 강렬한 강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김환태는 이러한 유기체적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생명적 유기체로서의 예술을 내용과 형식이 구별되지 않고 한데 얽혀 있는 통일적 집합체로서 이해한다.


예술작품이란 요소의 집단이 아니라 유기적 통일체이므로, 산 우리의 육체와 생명을 구별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술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따로따로이 구별하여 생각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작품은 그것이 형식과 내용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한 완전한 통일체요, 형식과 내용의 두 요소의 결합체는 아니다. 형식이란 내용 그것에 의하여 스스로 산출되는 것이요, 내용이란 스스로 산출한 형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7)


     김환태는 예술 작품을 유기적 통일체라고 전제하고, 육체와 생명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내용과 형식을 구별할 수 없다고 간주한다. “작품은 그것이 형식과 내용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한 완전한 통일체요, 형식과 내용의 두 요소의 결합체는 아니”라는 생각과, “형식이란 내용 그것에 의하여 스스로 산출되는 것이요, 내용이란 스스로 산출한 형식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생각은 ‘내용/형식’의 이분법적 사유 틀에서 일보 전진한 것인데, 김환태는 이러한 논리로 임화로 대표되는 당시 프로문학 비평가들의 비판, 즉 자신이 내용을 무시하는 형식주의자라는 비판에 대응한다. 더 나아가 김환태는 내용의 차원에 있어서도 작가의 사상 및 현실과 작품의 사상 및 현실을 구분하여 좀 더 세밀하게 규명하는 논리를 펼친다.


사상과 현실은 그것이 그대로 곧 문예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감정과 상상력 속에 융해되어 사상은 한 산 구상체가 되고, 현실은 한 감정과 성격을 가진 정태가 되는 것이며, 사상이 산 구상체가 되고 현실이 감정과 성격을 구현한 정태가 될 때에, 보통 우리가 내용이라고 부르는 사상과 현실이 스스로 그것에 적합한 형식을 낳아 그 형식에 다시 규정되어 이곳에 유기체로서의 작품이 산출되기 때문이다.28)


     김환태는 유기체적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결합설을 주장한다. 주목할 점은 그가 사상과 현실이 작가의 감정과 상상력 속에 융해되어 사상이 구상체가 되고 현실이 감정과 성격을 구현한 정태가 될 때, 우리가 흔히 내용이라고 부르는 작품의 사상과 현실이 되며, 이때 내용은 스스로 적합한 형식을 낳아 유기체로서의 작품을 산출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김환태는 「비평 태도에 대한 해석」의 마무리 부분과 「시와 사상」에서도 이 점을 다시 강조한다.


(1) 작품이란 소재로서의 사상과 현실이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속에서 융해되어, 그의 이상의 지시하는 방향에 따라 완전한 유기체로서 유출되는 것이라는 나의 주장은 형식과 내용을 구별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며, 비평에 있어서 얼마만한 정도로 그것들이 수행되었는가를 측정하려는 것이, 다시 말하면 형식과 내용으로 구별 이전의 작품 그것으로서의 완성 정도를 측정하려는 나의 비평 태도가 결코 비평을 형식적 측면에만 한정하여 비평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29)


(2) 시와 사상은 전연 딴 세계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지적 내용 여하로 시적 가치를 판단하려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많음은 무슨 까닭일까 (…중략…) 주제가 대립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의 불가분의 융합으로서 구성된 시 전체다. 따라서 주제는 시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외부에 그것의 예술품에 있어서 표현되기 전에 존재하고 있다.30)


     (1)에서 김환태는 “소재로서의 사상 및 현실”과 작품의 사상과 현실을 구분하고, 전자가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속에서 융해”될 때 비로소 후자가 성립하며, 내용에 해당하는 작품의 사상과 현실이 스스로 형식과 결합하여 이로써 “완전한 유기체로서 유출”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작품을 그 내용과 형식이 구별될 수 없는 유기적 전체로서 사유하게 한다.

     (2)에서 김환태는 ‘시’와 ‘사상’을 분리시키고, ‘사상’과 등치될 수 있는 ‘주제’가 시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존재한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논리는 소재로서의 사상 및 현실과 작품의 사상 및 현실을 구분하는 사유와 상통한다. 김환태에 의하면, 주제는 작품의 외부에 존재하고, 그것이 작가의 감정과 상상력 속에 융해되어 생겨난 내용과 형식이 불가분의 융합으로서 작품의 내부에 존재한다. 따라서 주제, 혹은 작가의 사상 및 현실은 작품의 내부적 구성 요소가 아니라 작품으로 표현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사유는 당시 프로문학 및 주지주의 문학과 대결하는 유기체적 문학관이 보여준 논리적 진척이며, 김환태 비평론의 득의의 영역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리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다양한 비평적 논리들중에서 이분법적 구분의 함정 및 절충주의를 넘어서면서 김환태의 비평이 도달한 중요한 이론적 거점에 해당한다.



6. 맺음말


     이 글은 김환태 비평에 대한 기존의 선행 연구가 공통분모로 제시한 ‘인상주의 비평’과 ‘예술주의 비평’이라는 평가에 대해 좀더 세밀히 규명하여 김환태 비평의 숨겨진 면모에 대해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실제 비평보다는 문학론과 비평론을 대상으로 삼아, 김환태 비평의 특성을 크게 비평가의 수용 과정, 작가의 창작 과정, 비평가의 창작 과정, 유기체적 문제설정이라는 네 항목으로 설정하고 이를 각각 구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첫째, 비평가의 수용 과정의 관점은 독자나 비평가의 작품 수용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평관으로서, 비평의 유형상으로는 존재론과 효용론에 해당한다. 김환태의 비평론에는 문학비평의 유형으로서 존재론과 효용론이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M. 아놀드가 말한 ‘몰이해적 관심’으로 작품 자체를 대하는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이 ‘인상’과 ‘감동’을 중시하는 비평의 효용론적 관점과 미묘하게 결부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환태는 비평을 ‘감상’에 ‘반성’을 더하는 것, 주관에 철저함으로써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김환태의 비평관이 ‘반성’보다 ‘감상’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비평이 ‘감상’에 ‘반성’을 더한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인상’이 가진 주관적 요소와 ‘지적 인식’이 가진 객관적 요소를 결합하지만, 이 결합은 양자의 균등한 종합이 아니라 전자에 무게중심을 둠으로써 후자를 포괄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리를 ‘주관적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 작가의 창작 과정의 관점은 작가의 작품 생산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평관으로서, 비평의 유형 분류상으로는 표현론에 해당한다. 김환태의 문학관은 주지주의 문학관에 대응하는 낭만주의 문학관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시와 시인을 분리시키지 않고 인간과 생명과 개성을 중시하며 지성보다 감정을, 기술보다 표현을 중시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김환태에 의하면, “감정은 그 성질상 부단히 표출을 기구”하며, 따라서 “예술은 자아의 내부의 필연적 요구에서 나오는 내적 표현”, 즉 “감정의 구상화”이다. 김환태는 이것을 좀더 상술하여 “체험된 경험을 전달하는 언어의 완전성”이라고 표현한다. 이 입장은 언어 표현 이전의 감정·개성·생명·체험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그 것의 언어적 표현도 중시하는 균형 감각을 보여주는데, 김환태는 이 차원을 “의식과 형식과의 완전한 일치”라고 언급한다. 그는 일관되게 시인과 시를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지성/감정, 기술/표현, 제작/잉태 등의 이분법에서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긍정하는 논리를 견지한다. 그러나 ‘체험’과 ‘표현’을 동시에 존중한다는 점에서, 그는 의식(내용)과 언어(형식)의 종합을 추구한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김환태의 비평적 균형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셋째, 비평가의 창작 과정의 관점은 비평가의 비평문 생산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평관으로서, 비평의 유형 분류상으로는 역시 표현론에 해당한다. 김환태는 비평의 존재론적 차원을 비평의 효용론적 차원과 연결시키는데, 이 효용론적 차원은 비평가를 포함하여 일반 독자에 대한 효용론에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그가 ‘작가-작품-비평가 일반 독자’의 순으로 전개되는 작품 창작 과정과 수용 과정을 폭넓게 고려하면서 비평가의 역할에 대해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환태의 비평론이 가진 존재론적 관점과 효용론적 관점은 비평가의 표현론적 관점으로 전개되면서 창조적 비평론의 형태를 띠게 된다. 김환태는 비평가의 자기표현 및 창작의 고통을 강조함으로써 창조적 예술가로서의 문예비평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으로서 김환태 자신의 기존 견해와는 상반되는 논리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김환태의 문학론 및 비평론은 비평의 유형론으로서 존재론과 효용론 및 표현론이 복합적으로 얽혀 미묘한 논리적 모순과 균열을 노정하는 것이다. 결국 김환태의 문학관은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인 비평의 존재론적 관점과,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려는 노력인 비평의 효용론적 관점과, “표현하고 전달하”는 비평의 표현론적 관점이 상호 결합되어 복합체를 이루는 동시에 미묘한 균열을 일으킨다. 비평세계 내부에서 빚어지는 이 복합적인 양상과 논리적 모순 및 균열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김환태 비평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 중요하다.

     넷째, 유기체적 문제설정은 앞에서 존재론, 효용론, 표현론 등의 세 가지로 구분한 비평의 유형론이나 낭만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등의 문예사조적 개념을 종합하여 보다 포괄적이고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설정되는 비평의 존재 방식이자 비평의 모델이다. 김환태의 비평론은 존재론적 관점, 효용론적 관점, 표현론적 관점 등을 복합적으로 결부시키며 개진하는 과정에서 유기체적 문제설정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면서 종합해 나간다. 유기체적 문제설정은 예술을 생명이 있는 유기체로 파악하는 사유에서 비롯된다. 김환태는 우선 작가의 영감과 생명에 의해 생성된 작품 자체를 유기체로 간주한다. 그는 예술상의 자연주의와 심리주의 문학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생명의 본성을 감정으로 간주하는 유기체적 문제설정을 제시한다. 여기서 김환태가 유기체적 문제설정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개념은 생명, 전체성, 감정, 상상작용 등이다. 김환태는 이러한 유기체적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생명적 유기체로서의 예술을 내용과 형식이 구별되지 않고 한 데 얽혀 있는 통일적 집합체로서 이해한다. 더 나아가 그는 “소재로서의 사상 및 현실”과 작품의 사상과 현실을 구분하고, 전자가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속에서 융해”될 때 비로소 후자가 성립하며, 내용에 해당하는 작품의 사상과 현실이 스스로 형식과 결합하여 이로써 “완전한 유기체로서 유출”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유는 당시 프로문학 및 주지주의 문학과 대결하는 유기체적 문학관이 보여준 논리적 진척이며, 김환태 비평론의 득의의 영역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리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다양한 비평적 논리들 중에서 이분법적 구분의 함정 및 절충주의를 넘어서면서 김환태의 비평이 도달한 중요한 이론적 거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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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환태, 『김환태 전집』, 문학사상사, 1988.
  • 서형범, 「비평가의 자리와 비평의 기능론을 통해 본 김환태 비평론 연구」, 『한국현대문학연구』 제32호, 한국현대문학회, 2010.
  • 엄성원, 「1930년대 인상주의 비평 연구-김환태 비평론의 정립 과정과 실제 시 비평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제46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2007, 133-159쪽.
  • 우찬제, 「비평예술의 심미성과 윤리성」, 『김환태가 남긴 문학유산』, 문학사상사, 2004, 176 184쪽,
  • 이동민, 「김환태의 비평이론」, 《현상과 인식》 제21호, 1982년 여름.
  • 이은애, 「김환태의 인상주의 비평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5.
  • 이은애, 「김환태 비평론에 나타난 언어인식 연구」,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3호, 한국근대 문학회, 2011.
  • 정금철, 『현대시의 기호학적 연구』, 새문사, 1990, 16쪽.
  • 최동호, 「김환태의 비평과 예술의 순수성」, 『김환태가 남긴 문학유산』, 문학사상사, 2004, 133-141쪽.
  • 1)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일지사, 1976, 202-203쪽 참고.
  • 2) 김환태 비평에 대한 선행 연구로서 주목할 만한 성과는 다음과 같다. 김윤식, 「눌인 김환태 연구」, 『서울 대 교양과정부 논문집』, 서울대학교, 1969, 69-100쪽; 김주연, 「비평의 감성과 체계」, 《문학과 지성》 제10 호, 1972년 겨울, 840-849쪽; 이동민, 「김환태의 비평이론」, 『현상과 인식』 제21호, 1982년 여름; 이은애, 「김환태의 인상주의 비평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5; 김윤식, 「김환태 비평의 비평사적 의의」, 『김 환태 전집』, 문학사상사, 1988, 384-419쪽; 권성우, 「한국근대문학비평에 나타난 ‘타자의 현상학’ 연구 1 김환태의 비평을 중심으로」, 《세계의 문학》 제68호, 민음사, 1993년 여름, 320-340쪽; 권영민, 「비평의 논 리와 시적 감각-김환태와 정지용의 경우」, 『김환태가 남긴 문학유산』, 문학사상사, 2004, 51-67쪽; 최동 호, 「김환태의 비평과 예술의 순수성」, 『김환태가 남긴 문학유산』, 문학사상사, 2004, 133-141쪽; 김인환, 「한 젊은 비평가의 초상」, 『김환태가 남긴 문학유산』, 문학사상사, 2004, 142-150쪽; 우찬제, 「비평예술의 심미성과 윤리성」, 『김환태가 남긴 문학 유산』, 문학사상사, 2004, 176-184쪽; 김종회, 「문학비평 도는 글 쓰기에 있어서의 균형 감각」, 『김환태가 남긴 문학유산』, 문학사상사, 2004, 185-192쪽; 엄성원, 「1930년 대 인상주의 비평 연구-김환태 비평론의 정립 과정과 실제 시 비평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제46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2007, 133-159쪽; 서형범, 「비평가의 자리와 비평의 기능론을 통해 본 김환태 비 평론 연구」, 《한국현대문학연구》 제32호, 한국현대문학회, 2010; 이은애, 「김환태 비평론에 나타난 언어인 식 연구」,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3호, 한국근대문학회, 2011.
  • 3) 이러한 관점의 선구적 연구로서 김윤식, 「눌인 김환태 연구」, 앞의 책, 69-100쪽과 김윤식, 「김환태 비 평의 비평사적 의의」, 앞의 책, 384-419쪽이 있다.
  • 4) 김환태, “Matthew Arnold and Walter Pater as Literary Critics”, 구주제국대학, 1934.
  • 5) 김환태, 「매슈 아놀드의 문예사상 일고」, 『김환태 전집』, 권영민 편, 문학사상사, 1988, 153-164쪽 참고.
  • 6) 졸고, 「1930년대 시론의 구조적 연구-김기림, 임화, 박용철을 중심으로」,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9는 193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비평을 유기체적 문제설정, 기하학적 문제설정, 변증법적 문제설정 등 세 가지 문제설정으로 유형화한 바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1930년대의 경우, 박용철, 김기림, 임화가 세 가지 문 제설정의 중심축을 형성했고, 이후 한국 현대비평사에서 그 각각의 계보가 전개된다고 간주했다.
  • 7) 김환태,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 앞의 책, 17쪽.
  • 8) 위의 책, 17쪽.
  • 9) 위의 책, 17쪽.
  • 10) 김환태, 「나의 비평의 태도-문예시평」, 앞의 책, 27쪽.
  • 11) 위의 책, 28쪽.
  • 12) 김환태, 「표현과 기술」, 앞의 책, 44쪽.
  • 13) 위의 책, 45쪽.
  • 14) 위의 책, 47-48쪽.
  • 15) 김환태, 「작가, 평가, 독자」, 앞의 책, 49-50쪽.
  • 16) 위의 책, 50쪽.
  • 17) 위의 책, 54-55쪽.
  • 18) 김환태, 「비평문학의 확립을 위하여」, 앞의 책, 80쪽.
  • 19) 위의 책, 80쪽.
  • 20) 위의 책, 82-83쪽.
  • 21) 사유 방법으로서의 ‘유비(analogy)’는 ‘논리’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내면과 외부 현상을 결합시 켜 동일화하거나 닮지 않은 것 사이에서 동일성을 찾는 것이다. 인간적 삶이나 행위를 자연 현상에 견주는 전통적 사유 형태도 이 유비에 해당한다. 유기체적 세계관은 이 유비적 사유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정립된 것으로서, 세계·우주·혹은 대상을 정적 기계주의로 보지 않고 식물과 같은 동적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 다. 유기체란 이미 만들어져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거나 자라나고 있는 과정의 생명체이다. 생 명체는 탄생·성장·소멸의 연속성을 그 본질로 삼는다. 따라서 이 유기체적 세계관은 유기체적 자연관, 유기체적 역사관 등을 포함하고 있다. 유기체적 자연관이란 자연을 스스로 활동하는 생명체로서 세계정신 이나 신(神)이 내재하는 공간으로 간주하는 관점을 말하고, 유기체적 역사관은 시간의 흐름, 즉 역사 자체를 고정된 대상으로 보지 않고 탄생·성장·소멸의 지속적 과정으로 보는 관점을 말한다. 구모룡, 「한국근대 유기론의 담론분석적 연구」, 부산대 박사논문, 1992, 10-22쪽 참고.
  • 22) 정금철, 『현대시의 기호학적 연구』, 새문사, 1990, 16쪽.
  • 23) 김환태,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 앞의 책, 18쪽.
  • 24) 김환태, 「작가, 평가, 독자」, 앞의 책, 54쪽.
  • 25) 김환태, 「생명·진실·상상」, 앞의 책, 60-61쪽.
  • 26) 위의 책, 62쪽,
  • 27) 김환태, 「비평 태도에 대한 해석」, 앞의 책, 95쪽.
  • 28) 위의 책, 96쪽.
  • 29) 위의 책, 98-99쪽.
  • 30) 김환태, 「시와 사상」, 앞의 책,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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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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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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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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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현대비평 송현지 이혜원고백의파동대화경청지형학적비평 2025
남기택 타자의 외연 ― 이형권론

1. 비평의 입지 문학 용어로서 비평은 작품의 뜻, 작가의 기능, 어느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를 논의하는 작업이라 정의된다. 범박하게는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두루 쓰인다. 그 밖에 방법론에 따라 기술비평, 실천비평, 이론비평, 인상비평 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고, 에이브럼즈의 입론대로 모방론, 존재론, 표현론, 효용론 등 관점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웰렉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으로 그 양상을 대별하였다. 요컨대 문학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내재적 요소와 외재적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한 후 서술 및 평가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이 어떤 종류의 비평에서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면 비평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은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비평이란 위 기준에 의거해 접근된 하나의 결과이기에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전제한다. 전제된 기준은 중층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성과 수행성을 담보하기에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 담론적 성격이 지닌 자체의 곤란도 분명해 보인다. 비평 행위에 내재된 ‘평가’란 한 작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 가치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이래의 이론적 지평에 따르면 어느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제도적 관행을 통한 지속적 작용이다. 평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 활동과 관행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에 가깝다. 어떤 문학작품의 해석과 그 가치에 대한 경험은 상호 의존적이며, 양자는 특정한 가정 혹은 기대를 따른다.(프랭크 랜트리키아·토마스 맥로린 공편, 『문학 연구를 위한 비평용어』) 결국 비평 행위의 관건은 텍스트 구조는 물론 이를 둘러싼 문학사회학적 관계를 수렴하는 평론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세계에 대한 판단은 그 평론가의 입지 기반에 대한 재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형권 비평세계는 1998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에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경기도 안성 출신인 그는 충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때 지역의 중등 강단에 몸담았다. 이어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과정 중 평론 쓰기를 병행하던 그였기에 제도적 등단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제출한 원고는 충분한 내공을 체현하고 있었다. 당시 심사평은 세기말 위기의식에 빠진 시가 영상문화에 대응하는 현장을 균형적 감각으로 다가선 비평적 시각에 주목하였다.(『현대시』 1998년 7월호)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일군의 시인들을 다룬다. 이형권은 장르 의식의 확산과 초월, 도시적 일상성, 우울한 내면세계의 고백, 대중문화의 수용 등이 전통적 시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이라고 보았다. 그중 영상예술의 수용 및 변주를 시적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우로 이승하의 사진시, 하재봉의 컴퓨터시, 유하의 영화시 등을 꼽고, 그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개척하려는 이들 노력은 향후 시적 긴장의 영역을 개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반면 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진정성 차원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들이 예증하는 영상매체의 시적 전유가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 전망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은 향후 지난하게 펼쳐질 장르의 길항을 전조하기에 충분한 비전이었다. 이처럼 이형권은 문학의 본령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그 외부, 어쩌면 문학 장르의 타자성에 대한 시대적 응전 감각을 출발 단계부터 벼리어 온 비평가에 해당된다. 대개 이러한―문학의 장르론에 관한―입장이 취하는 포즈는 이론적 언어로의 무장이다. 문학이라는 범주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한 모더니티의 공재성(共在性)이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주된 관성으로 작동되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 영역을 포함하여 문학은 ‘literature’의 역어이자 제도적 산물로 생성된 것이었고, 이론적 내면화는 한국문학의 정체성 설정을 위한 필연의 수순이기도 했다. 한편 이형권 비평의 경우 이론에의 경사로부터 의도적 거리를 취한다. 이는 여러 지면에서 반복되어 온 비평적 입장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은 시의 정서적 깊이와 높이를 확보하여 시적 감동을 전문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넓히는 일”(『공감의 시학』 서문)이라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문학의 타자라는 분명한 성찰 대상이, 그리고 그 존재 의미를 구명하는 언어는 현학적 외장이 아닌 문학 본연의 공감과 소통 기제라는 입지가 초기 비평 단계로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2. 문학의 타자, 타자의 문학 이형권 비평세계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2006), 『발명되는 감각들』(2011), 『공감의 시학』(2017) 등의 평론집으로 집약되어 왔다.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에 연구서 성격의 다양한 성과물이 평론집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예지 『너머』, 『시와 시학』,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 역할이 주요한 문단 경력으로 꼽힌다. 꾸준한 연구 작업과 더불어 실천적 문단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외현이다. 오늘날 비평 행위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역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구조는 비단 한국문단만의 실정이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대학 교원으로 정착한 이후 평단의 참여에는 소원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형권은 중부권 거점 대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서울과 지역을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이어 온 실천적 사례라 평가할 만하다. 제도적 성과도 다양하다. 그의 저술 중 『공감의 시학』은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상의 대상 평론집이 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이형권 평론이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며, 한국 시문학이 마주하는 핵심 문제에 대해 정공법의 언어로 다가서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그는 이때 자신의 문학 여정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자전을 적었다. 나의 대표적인 평론집은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평론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독자와의 공감을 지향해 온 글쓰기의 결과물들이다. 가능하면 관념이나 이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혹은 관념과 이론마저도 문학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다. 나는 지금도 가장 어려운 작품도 가장 쉽게 비평할 수 있는 평론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평 언어, 나만의 비평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물음표로 출발하여 느낌표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심미적 개성과 인간적 진실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안성천에서 자란, 내 영혼의 자서전」, 『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이 회고에서도 비평적 입지의 방법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제로 내건 공감의 가치가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강조되었다. 독자적 언어와 이론을 향한 포부는 일견 무모하게도 들린다. 어느 장르보다 기존 시학적 지평을 전제로 성립되는 비평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와 이론의 신생은 비평보다는 또 다른 창작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형권 비평의 시각이 이른바 비평과 창작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은, 양방향적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형권의 시학적 탐구는 『미주 한인 시문학사 : 1905∼1999』(2020)라는 중요한 성과이자 비평적 변곡점을 낳았다. 그는 이 연구서로 인해 2021년 김준오시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형권 비평은 출발 단계부터 시 장르의 타자성 문제를 다루었다. 타자라는 주제는 이형권 비평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어어져 왔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서울 이외의 주변부 지역 문학도 일종의 타자”이며 “국외의 한인 문학도 타자의 문학”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다양성의 문학과 확장성의 문학”을 의미하기에 앞으로도 추구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였다.(『신생』 2021년 겨울호) 『미주 한인 시문학사』는 한국문단 내부의 타자성 영역을 최대 이민국이자 패권국이라는 외부로 확장하여 모색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2012년 상반기 LA에서의 방문교수 경험은 이형권 시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경계에 관한 비평적 모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평론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이 주목된다.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맥락 속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시의 형상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문학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심상지리를 구성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주 한인에게 모국어는 도구가 아닌 생존을 환기하는 의사소통적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현전하는 물성이자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에 비견된다. 이 글에서 주요 논거로 제시된 김병현, 배정웅, 오문강 등의 작품들은 디아스포라의 난관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의 동일시 욕망, 이주국 지리 환경과의 정서적 공감, 새로운 삶의 개척 의지 등을 재현한다. 이들 작품에 사용된 모국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실존의 영역을 증거하는 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같은 논의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쟁점 역시 분명하다. 대표적 문제가 이주국 한인문단의 분파적 속성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포함하여, 서정적 언어 구성물로서의 시작 경향이 주류 흐름으로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다. 치밀한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기 어렵다는 게 난관이다. 긴장 없는 자족적 시스템이 매너리즘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실정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중층적 문학 환경 역시 문제적이다. 이런 배경 위에 모국어의 소멸 위기이자 새로운 문학 언어의 개방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양립한다. 이형권은 이중언어의 문제 혹은 현지어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국문학의 매개로서 한국어라는 기능적 판단 외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제로서의 언어관에 입각한 견해로 보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언으로 마무리된다. 한인이 현지어로 창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인 문학은 한글 표기를 전제로 하여 그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한인 문학에서 한글 표현과 현지어 표현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곤혹스럽지만, 이에 대한 선택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국외에서 뿌린 한인 문학의 씨앗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인 혹은 한인의 문화가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나가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것이 비록 과거형이 될지라도, 발해의 역사가 분명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한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 『시작』 2022년 여름호) 물리적 경계 간의 거리가 해체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어’로 상징되는 글로벌 의사소통 기호는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위상은 선험적 가치가 되었다. 모국어라는 숙주의 해체는 디아스포라 같은 문학적 타자가 변주하는 또 다른 생성의 선을 개방할 것이다. 이형권 평론은 디아스포라 시인이 모국어를 통해 존재를 형상화하는 양상을 분류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의 제언은 문학의 타자성을 제도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방안, 다양한 언어와 한국문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3. 또 다른 감각 혹은 환상 이형권이 조명하는 비평적 타자의 영역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문단 경계의 확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을 재고하려는 이론적 모색 역시 초기 단계부터 지속되어 온 탐구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주제가 이른바 환상의 역학이다. 환상의 상상력을 집중해서 다룬 평론으로 「발명되는 감각들―현대시와 환상시학」(『발명되는 감각들』)이 있다. 이 글은 비평가 스스로에게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자리한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지면에서 자신의 대표 평론으로 이 글을 꼽았다. 「발명되는 감각들」은 현대시의 또 다른 주류 범주에 환상의 시를 올려놓은 동력으로 21세기 초의 젊은 시인군을 예시한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혹은 자의식적 시 쓰기에서 벗어나, 환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표출하는 동시에 시적 형식의 재구를 시도하였다. 환상은 단순한 도피나 유희가 아닌, 미적 전복과 시적 실험의 전략적 기제인 것이다. 이형권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요 결 다른 감각을 창조하는 에너지라고 보았다. 김행숙(귀신), 문혜진(메두사), 김민정(아이), 유형진(모니터), 장석원(낙타), 이민하(마네팅) 등의 도발적 이미지를 대표적인 환상의 장치로 거론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들이 현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전유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감동으로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된 시편들의 수용적 거리감은 실험적 외장의 포즈에 비례한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각의 발명보다는 소재주의적 실험 경향이 짙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형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문학적 진정성의 결여를 경계하였다. 이는 환상의 시학이 진정한 문학적 성취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파격에 수반되는 사유의 깊이를 구조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어서 이 글은 환상의 상상력이 폐쇄성과 섹트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역설한다. 환상은 기호로 재현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적 우회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서정성이나 진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기대지평에 어떻게 관계되고 소통하는지의 문제이다. 문학의 경계를 재구성하려는 이형권의 비평적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최근 사례로서 「리진: 로씨아 땅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하늘」(『시작』 2024년 겨울호)은 재러 시인 리진의 경우를 조명한다. 북한 정권에 저항하며 무국적자로 소련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 그의 시가 조국과 언어 정체성을 고수했던 흔적을 개관해 주었다. 이형권은 리진 시의 본질을 우리 언어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리진의 시적 형상이 재러 고려인들의 보편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관찰을 담고 있으며, 언어가 곧 민족을 잇는 정신적 뿌리라는 기존의 모국어 인식과도 연동된다.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존의 기반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모국어는 실체 없는 상징에 머물 수도 있다. 리진의 시가 제한된 독자층에만 읽혔다는 사실은 언어의 고립성과 함께 시적 단절을 지시한다. 이형권 비평이 집중적으로 수렴해 온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현황 속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형권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제도는 보다 정치한 장르론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또 다른 환상의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 이형권 비평이 전유하고 있는 시학적 개념으로서의 환상은 우리 시대의 자유를 사유하는 철학적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의 현학적 분석에 따르면 환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 논리를 보면, 무의식은 매끄러운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침입에서 비롯된 충격과 잔여이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증상(symptoms)’은 트라우마적 단절에 대처하는 방식이요, 그런 단절을 가리기 위한 형성물로 ‘환상(fantasy)’이 작동한다. 이처럼 지젝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자유 의지를 분석하는 기제로서 환상을 전유하고 있다. 현대의 이성은 실재와 같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자유가 존재 방식의 근원적 가능성일 때에도, 자아는 결정된 존재일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로서 미친 도박이자 자기 자신에 선행하는 위태로운 도약이 된다.(지젝, 『자유, 치유할 수 없는 질병』) 결국 주체는 그 자체가 객관화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 간극을 지양하고, 필연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상은 비롯된다. 동일성의 장르로서 시 역시 동종의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운 서정시의 미래를 보듬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이끈 양태가 곧 이형권 비평이 천착해 온 타자의 외연이기도 할 것이다.

계간 현대비평 남기택 이형권감각공감타자환상 2025
김미정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비평 작품론1) 2) 1. 전환 서사들과 포스트 비평 최근 ‘포스트 비평’의 담론 지형3)에 동물·몸·정동·존재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환(turn) 서사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사유 및 원리와 부대끼는 과정에서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이어가는 와중에, 잠정적으로는 사물 세계의 ‘얽힘·연루됨’을 언어화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질문을 전환해 가던 차였다.4) 문제는, 이 전환의 사유들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볼 실마리를 명백하게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글쓰기로 육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체감에 있었다. 우선 어떤 이론이 근본적으로 사유의 관점을 조정케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시키는 글쓰기는 여전히 근대의 제도적 지식 체계나 원리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그러한 조건과 교섭하며 쓰는 몸 스스로의 행위 도식이 바뀌어야 가능할 터이지만, 몸이야말로 결코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관성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개인적 딜레마로 여겨진 것이 실은 어딘가에서 차근차근 내파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은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작업을 다시 살피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내내 ‘독자’ ‘읽기’ ‘쓰기’ 등의 문제를 통해 오랫동안 한국문학 비평 현장을 풍요롭게 증거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그 비평 행보를 찬찬히 살피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독자-읽기-쓰기를 주제화해 온 그녀의 작업이 실은 스스로의 몸을 바꾸고 그 몸과 연결된 배치를 바꾸는 과정 자체이기도 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개인적 문제의식 하에서 조금 구부러뜨리는 일이 허용된다면, 예컨대 어떤 연루됨(이때의 연루됨은 주체/객체를 넘어서는) 속 자기 위치를 감각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드는 과정을 글쓰기 자체가 수행해 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잠시, 과거 그녀의 말도 떠올려본다. 그녀는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5)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때는 평범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거느릴지는, 이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었다. 백지은 글쓰기의 이러한 수행적 의미를 ‘비평’이라는 장르의 특징과 관련해서 좀더 생각해본다. 비평이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주체/대상(객관)이라는 근대적 도식이 선명하게 구현되는 장르인 것 같다. 비평의 ABC에 대한 글들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듯, 비평은 대상(객관)으로 놓여 있는 텍스트를 경유하면서 말해지는 주체의(주관적) 형식이라고 여겨져 왔다. 즉, 자기를 말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출발하더라도 거기에는 늘 ‘주체/대상’ 구도의 긴장과 역학이 놓여 있는 것이 비평이다. 대상이 선행되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의미가 감상하는 이의 주관과 연동된 장르라는 특징 탓에, 종종 비평에 덧씌워진 고압적 이미지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백지은 비평에서 언젠가부터 이러한 ‘주체/대상’의 도식성이 여러모로 미미해지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다. 예컨대 (본문에서 다루겠지만) 역사를 ‘감각’하는 방식으로서의 ‘산책’을 주제화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의 도입부는, 대상 텍스트와 필자가 어떻게 얽히고 서로 스며들어 가는지 생생하게 감각시키는 퍽 드문 대목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다 읽고 나서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 산책이 뭐가 좋은 것일까”와 같은, 평범한 말들인데다가 어딘지 비평의 단호하고 명료한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이 진술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상의 호흡에 밀착한 이 조곤조곤한 말들은 읽는 이마저 부지불식중 그 활자에 스며들게 한다. ‘주체(필자)/대상(소설)’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듯한 서술 장면, 그리고 그러한 문장에 읽는 이까지 연루시키는 장면에서 누군가는 ‘비평은 텍스트와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나 최근 에세이적 비평 경향 같은 것을 얼핏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녀의 문장은, 어떤 망설임이나 흔들림이 감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언표화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명료하게 의미화하기 이전의 웅성거림을 감지시킨다. 기존의 장르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백지은의 글에는 여느 비평에서와 같은 단호하고 결연한 어조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확신에 찬 말로 스스로를 주장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향도 백지은의 비평과 거리가 멀다. 이런 특징들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백지은의 글에서 ‘마음’ ‘감정’ ‘기분’ ‘정동’ ‘객체’ 같은 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유물론의 사유가 백지은의 비평을 관통하고 있음도 확인해 두자. 그것은 ‘글 속 내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글 자체로 체화’되고 있는 중이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종국에는 ‘비평이라는 장르’의 성격마저 갱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앞서 적었듯, 비평 장르가 강하게 전제해 온 주체/대상의 근대적 도식은, 그녀가 천착한 ‘마음론’이 오히려 질문하는 것에 다름아니고, 그녀의 글쓰기는 곧 그러한 마음론의 사유를 체현한(emboded)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쓴다’는 일을, 자기로부터 무언가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다시 자기를 세우는 과정으로 설명했던 백지은의 말은 지금 스스로의 비평 궤적에서 활물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글쓰기의 특징이 그녀 자신이 골몰해 온 비평 주제와 관련해 필연적이리라는 점은 다음 장에서 좀더 살펴보겠다. 2. ‘마음’의 조건에 대해 :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2024) 읽기 백지은 비평의 주제와 방법을 최전선에서 확인시키는 글의 하나가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이다. 이 글은 김화진의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된 소설들을 중심으로 ‘마음’의 존재론을 그려간다.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통해 작동하는지 고찰하는 글이다. 이 글의 화두인 ‘마음’은 장르를 불문하고 최근 한국문학의 여러 작품을 통해 언표화되어 왔다. 그것을 ‘감정’ ‘정동’ ‘감응’ 같은 개념을 통해 접근하고자 한 비평적 논의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백지은의 글은, 그러한 개념, 이론들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마음’의 정체를 섬세히 풀어나간다. “적다보니 ‘마음은 대체 뭘까’ 싶은 의문이 소박하게 일어난다”는 식으로, 다루는 주제에 스스로 연결되는 과정을 솔기없이 노출하기도 한다. 물론 그녀의 글에는 마음을 둘러싼 최근의 인지과학, 정동이론, 문화연구 등의 사유가 행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경하게 전경화하지 않으며 정합적 논리로 이어가는 이런 장면에서, 비평도 하나의 작품(이라 말해지는 것)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는 마음이나 감정 등과 같은 것이 어떤 개체적 신체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겨온 우리의 통념을 먼저 뒤집는다. 이 글에 따르자면 마음은 단지 개인의 내부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다. 마음은 “누군가의 가슴속이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한다. 마음이나 감정이 누군가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실은 어떤 무수한 타자들과의 마주침과 연결 속에서 빚어지는 산물이라는 통찰이 저 말에 담겨 있다. 이때 “마음”이란 “이러한 연결 작용 및 상호 조절의 무수한 경우의 수로 된 결과물”에 가깝다. 즉 “마음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그녀는 이렇게 적는다. “내 마음은 물론 나라는 한 사람의 성격과 내가 처한 상황과 나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생겨난 사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생겨나기까지 벌어진 일들은 개인에 귀속되지 않는 집단의 또는 공동의 조건 안에서 복잡하게 출몰하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움직인 결과이므로 또한 사회적인 산물”이다. 단,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다. 첫째, 백지은이 말하는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은 어떤 균질적 덩어리(mole)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마음론은 마음의 보편성이나 균질성이 아니라, 고유한 마음들이 단지 개인적, 사적인 것으로 귀속되기 이전 구체적인 마주침과 연결을 통해 각각 다르게 발현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녀는 “우리가 몸짓이나 표정으로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마음에 보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주요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녀의 말처럼 구체적 조건과 무관한 보편적 마음이나 감정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마음, 감정, 정동 등은 살아있는 존재 모두가 지니고 있다해도, 그럼에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나 특정 조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발현되게끔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확인하지 않는 마음 이야기는 어딘지 불순하고 불철저한데, 백지은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을 말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그녀의 마음론이 존재의 자기구성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음은 분명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정동이나 역량과 무관하게 그저 수동적으로 결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마음론’은 기계적 구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관련하여 ‘나’라는 감각 행위자의 고유성 역시 각별히 강조되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잠시 이런 대목을 보자. “우리의 마음이 사회적 구성물이라 해도, 어떤 공동의 지평에서 바로 그러한 마음이 ‘내’게 지어져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내’가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고유한, 중요한 사실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으로 인해 ‘나’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과거 백지은의 말, 즉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이라고 했던 것이 오버랩된다. 자기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이 단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세계관은 여기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이러한 마음론이 어떤 사유와 고민으로부터 전개된 것인지 그 시간의 궤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의 마음론은 단지 비평에 소용되는 이론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자 그것이 만들어낸 세계관의 한 발현인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내 몸 어딘가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신체 활동에서 구성된 산물이고,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나 경험을 통해 해석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를 움직이고 또한 내가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여 간다는 이 논의의 정합성은 ‘이론’이라는 말에 대한 항간의 오해를 교정하는 데에도 큰 참고가 될 것 같다. 더욱이 대상으로 다뤄진 김화진 소설이 마음론의 매개, 도구로만 소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히 소중하다. 백지은의 글은 쓰는 이(주체) 스스로 소설(대상)에 스미고 얽히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대상(소설)의 고유성은 내내 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따뜻한 공감을 상찬하거나 낭만화하는 식으로만 읽히기 쉬운 김화진 소설을 구출하고, 작품이 지닌 “‘마음’에 관한 탐구 서사”로서의 의미를 풍부히 드러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각 텍스트가 지니고 있을 고유한 의미를 발하도록 하면서, 그럼에도 저변의 관통하는 논리를 발견-전달하는 이 장면은 오늘날 비평적 글쓰기 자체가 전환(turn)하는 한 사례로 읽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 감각하는 역사에 대해 : 「안으로 나가는 역사」(2019) 읽기 한편 백지은 식의 마음론은, 역사를 보는 관점과도 흥미롭게 연결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보다 앞서 발표되기는 했으나, 텍스트를 따라 걷는 이의 심상과 호흡을 그대로 노출하며 시작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이 글은 박솔뫼 장편소설 『미래 산책 연습』을 통해 역사와 나/우리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지 찬찬히 짚어간다. 이 글 역시, 무언가를 장악하고 자기화하여 독자에게 보여주겠다는 비평적 자의식 등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백지은 글의 특징, 즉 텍스트와 나란히 혹은 그것에 스며들어 발화를 이어가려는 비인칭적 발화자의 흔적도 이 글에서 어김없이 엿보인다. ‘비재현’ 사유와 역사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특정 개념이나 이론이 박솔뫼 소설을 압도하거나 유리시키는 법은 없다. 『미래 산책 연습』에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제재로 등장하지만 박솔뫼 소설이 그러하듯 그것은 직접 재현되거나 의미화되지 않는다. 단지 ‘산책’이라는 행위와 그 동선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백지은의 결론부터 적어두자면, 소설 속 산책은 단지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리로 하는 명상”이고 사유의 기반이자 감각-접촉의 형식이다. 그녀의 분석을 통해 주인공의 산책은 부산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과거 사건과 접속하고 미래를 기억하며 현재를 질문하는 역사적 행위성으로 의미화된다. 여기에서 부산 역시 단순한 소설적 배경이 아니다. ‘부산’은 사건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고 교차하며 구성되는 유동적 장이다. 부산은 과거의 역사-현재의 만남-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서로 얽히는 시/공간적 밀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세계가 복수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증거하는 장소다. 박솔뫼 소설 속 자기, 나, 역사 등에 대한 백지은의 설명은 예컨대 일종의 연결신체(assemblage)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론’과 연동되는 것임도 물론이다. 이 글의 출발지점은 ‘이야기가 곧 역사/세계가 아니’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소박한 지점이다. 도입부는 “소설에 드러난 역사/세계는 역사/세계에 대한 ‘인식’”일뿐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본격적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때, 박솔뫼 소설과 역사 제재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등장함직한 ‘재현’ ‘표상’ 같은 개념은 일절 구사되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백지은의 글에서 개념이나 이론은 구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감각과 경험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이 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의 글을 포함하여, 그간 많은 비평은 강단(논문)의 언어와 친연성을 떨치지 못하며 본의 아니게 개념과 이론의 생경함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점은 비평의 독자와 장(field)을 제약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도 여겨진다. 또한, 오늘날 많은 비평 논의가 근대적 재현·표상 너머를 역설할 때조차, 어쩔 수 없이 재현·표상의 언어를 경유하고, 의도치 않게도 다시 기존 재현·표상의 원리가 강화되거나 재생산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서 적었듯 여전히 비평이 근대의 제도적 글쓰기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탓이 우선은 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백지은의 글은 이러한 곤경을 가뿐히(물론 치열한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한) 넘어서는 듯 보인다. 아예 비재현, 비표상의 언어를 고안하고 발명하는 과정 자체가 그녀의 글쓰기에 함축된 듯 보인다. 예를 들어 그녀의 글은, 박솔뫼 소설 속 ‘역사’는 “생각-가정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가정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백지은 식 조어(造語)인 ‘생각-가정’은 단지 “상상으로 꾸며진 가상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음과 불확정의 상태를 가정한 채로 존재하여 알 수 있음과 확정의 상태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위치의 역사/세계”다. 기록, 증언과 같이 익숙한 재현 개념의 한계를 사유하면서 그 너머를 말로 움켜쥐려는 그녀의 고투는 분명 박솔뫼 소설을 포스트 재현, 포스트 메모리의 개념을 통해 읽는 방법과 닿아 있지만 그 목적이나 효과는 분명 다르다. 이 “생각-가정하는 역사”는 어떤 유일무이한 진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이탈시킨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감각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이때 ‘역사적 사실’은 “다만 느슨하게 연계되어 세계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부로서 전체를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통상, 부분의 합이 전체라거나 전체가 곧 부분의 우주를 품고 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통념은 이 글에서 낡은 것이 된다. 백지은이 부상시키는 이러한 연결적 관계들은 어떤 중심/주변의 위계도 없고 총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병렬적인 흐름으로 이미지화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이른바 주체/대상 도식 속에 배치되어 사유되던 이 세계를 다르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인다. 백지은은 박솔뫼 소설 속 “‘나’의 생각-가정”은 “대상에 대한 통제나 지배의 가능성을 거의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의 관점을 주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것도 중심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이 곧 ‘자기’에 대한 근대 이래의 서사를 다시 쓰는 장면의 하나임도 기억해 두고 싶다. 그녀가 말하는 ‘생각-가정’은 흔한 ‘자기’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너머로 개방되며 연결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거나 중심적이거나 주변적이거나 하는 상이한 위상”이 두어지지 않는다. ‘안으로 나가는 역사’라는 제목의 수수께끼도 이제 풀리는 듯하다. 공식 기록 혹은 객관화된 기록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 역사는 그녀의 글에서 오히려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을 향해 접속하려는 움직임, 방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은 어떤 진공 상태의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산책자 역시 단지 걸으며 보는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안의 감각, 사유, 몸의 미세한 반응 속에서 사건을 감지하는 자다. 이때 역사는, 바깥에 그저 놓여 있는 진실이 아니다. 역사는, 삶과 함께 유동하며 점점 안으로 향해오는 감각의 기원에 가깝다. 거칠게 말해, ‘역사/내면’이라는 말처럼 정반대의 벡터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범주들이 이 글에서는 서로를 향해 작동하고 있고, 그 얽힘의 관계가 섬세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이제까지 살핀 백지은의 글과 말에도 상응한다. 그녀가 밀어붙인 비재현·비표상의 말들은 곧 이 세계의 원리를 찬찬히 응시해 온 그녀의 마음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만든 것이 또한 재현·표상을 흘러넘치는 어떤 세계였을 터였다. 비록 재현 체계 안에서 쓰여지는 글이지만, 그럼에도 재현 체계·제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감각시키려는 고투가 백지은 비평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4. 균열을 내고 거기에서 장소를 만드는 비평 백지은의 글들을 읽으며, 이 세계 속 존재나 사건의 연루됨을 발견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들어가는 글쓰기에 대한 개인적 고민을 더 밀어붙여도 될 용기를 얻는다. 읽기-쓰기의 순환적 수행성에 대해서도 큰 자극을 받는다. 읽기(듣기) 없이 쓰기(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당연하지만 오늘날 새삼 중요한 사실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사실 전환(turn)을 둘러싼 이론, 담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말과 담론은 자주 인플레였고, 정작 그것이 제대로 체현, 수행되어 본 일은 썩 많지 않았다고도 생각된다. (과거라면 ‘실천’ 같은 말로 표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체현과 수행이 어쩌면 늘 이 세계의 궁극적 과제이자 관건일 터였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좀처럼 관성과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글은 종종 제자리를 맴돈다.지금, 백지은 작업의 극히 일부분만 읽은 셈이지만, 제도적 비평의 현장에서 그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엿보았다고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유례없는 고민이 이어진 지난 십여 년을 백지은의 행보가 이렇게 증거해 주는 것 같다. 포스트 비평의 형질 변환이 선언이나 논쟁이 아니라 이렇게 글자의 안쪽에서부터 차분하게 진행되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제도의 관성, 시스템의 회로에 균열을 내고 빈틈을 만들며 그곳을 장소화해 온 그녀의 작업에 많은 언어들이 닿고 연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을 기존 방식의 ‘비평’ 같은 말로 반드시 명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하는 편이어서 적는 말이기는 한데, 분명한 것은 늘 각 시대마다 요청되거나 그 시대와 정합적인 글쓰기 양식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백지은의 작업에서 엿본 것도 바로 그에 대한 도약의 한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1)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현대비평』, 2025년 여름호)을 수정 보완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2)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백지은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 /「안으로 나가는 역사」(『문학동네』, 2022년 봄호)이다. 3) ‘포스트 비평’이라는 말의 문제의식 및 그 정황에 대해서는 2010년대 이래 영미 비평-이론계 맥락에서의 논의가 선행한다. 예컨대 브뤼노 라투르의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Critical Inquiry Vol. 30, No. 2, Winter 2004)이 제기한 쟁점이 서구 비평-이론계에서 본격 맥락화되는 것은 Elizabeth S. Anker, Rita Felski, Critique and Postcritique(Duke University Press, 2017)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론을 한국적으로 맥락화하고자 하는 최근의 논의들(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 하권 / 인아영, 「비평과 사랑 : 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을 포함하여, 현재 한국어 문학 비평에서 기존과 다른 패러다임의 글쓰기가 전개되고 있는 양상 전반을 지칭한다. 4) 이에 대해서는 졸고, 「비평, 플러스 알파 : ‘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 「마음의 유물론」(강우근 시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해설) 등. 5) 백지은, 「독자 시대의 문학과 쓰는 개인의 형식」,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

계간 현대비평 김미정 포스트 비평체현독자신유물론정동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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