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파란 2024년 봄호(제32호)
내가 없는 노래 ― 김명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문학과지성사, 2023)
시력 50년을 거쳐 열세 번째의 시집에 이른 김명인의 시는 경지에 이른 장인의 솜씨 같다. 그의 시는 긴 시간 동안 유년의 상흔, 폭압적 현실 등 몇 번의 굽이를 돌아 이제 너른 바다에 이르러 잔잔하게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닮아 있다. 이미 오래전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니”라고 예언했던 운명처럼(「바다의 아코디언」), 그의 말년의 양식은 ‘주름을 접었다 펼쳤다’ 하는 파도의 소리와 모양을 체화하고 있다. 리듬과 이미지가 곧 시의 내용이 되어 버린 그의 미학은 일찍이 “신체로 시 쓰기”(김인환), “생각의 리듬” “신체화된 리듬”(정과리)으로 논의된바, 넘실대는 강물의 풍만한 곡선들을 소리로 바꾼 것이 그의 시의 형식이자 내용이다. 김수영 시론을 빌자면 형식이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되는 ‘온몸의 이행’의 한 국면, 사랑의 유보로서의 노래의 성취가 김명인의 시이다. 다음 시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늘 덮개로 억만년을 짓눌러도
상하를 곧추세우고 좌우로 긋는
수평선이 저를 구부리는 것 봤어?
비끼며 교대하는 낮밤을
일도양단으로 잘라 내는 종소리가 어딨어?
슬퍼하는 꽃잎이 그곳까지 닿는지 모르지만
못 보았다고 안 피었다고 하겠어?
모래톱을 쓸고 사구(沙丘)를 휘저어도
파도는 일생일대를 제자리에 돌려놓잖아!
결박처럼 다단했던 포옹조차
때가 되면 삭은 동아줄로 바스러지는 것,
상처가 아문다 해도 흉터로 머뭇거리는
뉘우침은 잔상이라 해 둘 거야
죽은 이를 추모하는 세상에 서 있는 한
눈물은 산 자의 것이니
둥글게 맺히는 무덤이라도
그리움으로 더는 가파르지 않으리!
―「봤어?」 전문
위의 시에서 “하늘 덮개” “종소리” “슬픔” “모래톱” “포옹” “상처”와 같은 시어들은 생의 어떤 ‘가파른’ 국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단, 정지, 변곡이라는 극단과 치명으로 생을 바꿔 놓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압력과 횡포는 절대로 구부러지지 않는 ‘수평선’, 종소리라는 인간의 시계를 넘는 낮밤, 슬픔과 무관하게 피고야 마는 꽃, 모래톱과 사구의 흐트러짐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파도, 굳건한 포옹의 결박을 풀어놓고 동아줄을 바스러지게 하는 세월처럼, 무한한 자연과 시간의 영원성 속에 그저 ‘뉘우침의 잔상’처럼 옅게 남아 사그라지는 것들이다. 저렇듯 ‘가파름’과 거리가 있는 잔잔한 물결은 시집 전반에 유장한 리듬과 운율로 흐른다. 이 리듬은 위의 시에서와 같이 우선 3음보, 4음보의 등량화된 반복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 발자국(음보) 진행을 물음의 단어가 중간중간 매듭짓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 덮개로/억만년을/짓눌러도”(3음보) “상하를/곧추세우고/좌우로 긋는”(3음보) “수평선이/저를/구부리는 것/봤어?”(4음보)의 3-3-4음보의 기저 운율은 3-4, 4-3, 4-4, 3-4, 4-3, 4-3, 3-4음보로 변주되면서 일정한 리듬을 형성한다. 그리고 각각의 단장 끝에 “봤어?” “어딨어?” “하겠어?” “돌려놓잖 아!” “바스러지는 것,” “해 둘 거야” “것이니” “않으리!”와 같이 의문문, 감탄문, 의지의 종결과 ‘니’와 쉼표와 같은 가파른 호흡과 휴지, 폐쇄음을 배치함으로써 생각과 리듬을 닫는다. 이는 치솟고 내려오는 물결의 모양을, 외씨버선의 예쁜 콧날을, 지붕을 날렵하게 들추는 처마 모양을 닮아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와 리듬은 들끓는 열망과 절망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시의 전언,
곧 “그리움으로 더는 가파르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형상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의 시들이 대체로 주제보다는 운율이 우세하다는 점에서, 아니 차라리 의미를 리듬으로 육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래처럼 들린다. 풍경이 곧 리듬이 되고, 시청각적 형상이 의미가 되는 시 창작 방법론은 오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듬어진 김명인의 연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난파란 물의 습성이 소리로 바뀌는 것,/(중략)/일몰에 섞이는 난바다를 보아라/노을이 비낄수록 바다는/잉걸불 사르는 함성인 것을!”에서 난파의 모양과 파도 소리가 “잉걸불 사르는 함성”이라 탁월한 시청각적 이미지와 리듬을 구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시인 자신도 자각하고 있는 독보적인 기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난파란 물의 습성이 소리로 바뀌는 것」). 이렇게 빚어진 노래는 위와 같이 경쾌한 잔물결, 혹은 강물의 완만한 곡선, 파도의 출렁거림처럼 뜻 없는 리듬과 소리에 바쳐진 듯하다. 또한 불변의 자연의 생리와 보편의 리듬을 전달할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점1)에서 민요와 같은 전통적인 가락을 전수하는 전승자를 자처하고 있는 듯하다. 이 ‘주체’ 없음, ‘나’ 없는 보편의 경향성에 대해서 시인 또한 다음과 같이 표명한 바 있다.
둘레가 온통 수평선이라면
초점은 둥근 원의 중심,
입체는 아득하게 구축되어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늘과 둥글게 맞댄 망망대해
그 구체를 수평선이 절반으로 잘라 놓았다
막막한 시선의 한 점으로
나는 지금 사방을 건너고 있다
마침내 무한 고독과 만나는
이 씨앗을 누가 심었을까?
어디서 온 나로부터
나를 확장하면서
초점이 되라고 파란 위에 던져 놓았을까?
가없는 둘레에 싸여도 중심은
언제나 한 점,
일찍이 접합되지 못한 우주에 사로잡혔으니
나 하나의 값은 없다
―「초점의 값」 전문
위의 시에서도 3음보의 기본 운율은 일정한 리듬으로 변주되면서 이미지와 의미를 함께 성취하고 있다. “초점은 둥근 원의 중심,” “이 씨앗을 누가 심었을까?” “초점이 되라고 파란 위에 던져 놓았을까?”와 같은 쉼표, 의문문 등은 세 마디의 발걸음을 살짝 들추면서 결을 매듭하고, “언제나 한 점,”과 같은 2음보의 출현은 ‘초점’의 이미지의 각인과 함께 리듬을 닫는다. 또한 중간중간의 “그 구체를/수평선이/절반으로/잘라 놓았다”와 같은 4음보의 배치는 “잘라 놓았다”의 의미를 구현하면서 연갈이와 유사한 효과를 수행한다. 파도의 한 토막을 잘라 낸 것 같은 이 운율은 곧 시의 주제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곧 “둘레” “둥근 원” “입체” “구체” “무한 고독” “파란”이라는 무한 가운데 초점으로서의 ‘나’의 행방이다. 시인은 망망대해와도 같은 지구의 구체 속에 현실의 지평으로서의 수평선과 같은 사막에 “한 점”으로 던져졌으나, “나 하나의 값은 없다”라고 명백히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절망이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깝다. 지구가 아닌 ‘우주’에 사로잡힌 ‘나’는 이 기하학적 구체와 좌표 속에 놓이지 않겠다는 것, 이는 보편 주체를 향한 지향이지만 낭만적 초월론자의 수직적 상승과 반세속의 의지를 감추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전반에서 시적 화자의 개인 주체는 이렇듯, 전면화된 물결에 의해 끊임없이 지워지고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화자의 ‘의지’를 살짝 엿볼 수 있었던 것처럼, 박수근의 점묘화를 닮은 그의 시를 잘 헤집어 보면 몇 겹 속에 숨겨진 시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몸이든 병이 들고 허기지면
안개 속으로 저를 운반하는
무적 소리의 환청에 자주 시달린다
마당귀 늙은 모과나무도 저를 깨워 내는
바람 소리에 이따금씩 잎새를 펄럭일까,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하게 솟아
열대우림의 표상이던 마호가니는
통나무로 바다를 건넜으니
가끔씩 무적 소리를 되새길 것이다
이 거실에 안 어울리는 지체로 견디는 것
도화심목(桃花心木)의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자라 병들고 무너지는 게
생명나무라면 이 일대기는
우리 모두가 그럭저럭 누리는 것이니
나는 마당에 나가 흘러가는
뜬구름이나 바라보는 중이다
모과나무에 이상한 새가 앉아서 운다
낯선 손님에게 가지를 내주고도 무심한 것은
몰년을 잇대는 유령거미의 시간,
가라앉을 듯 가라앉은 듯 어둑한 둘레가
거미의 군락지로 넓혀지고 있다
―「유령거미의 시간」 전문
위의 시에는 세 개의 정경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는 “마당귀 늙은 모과나무”의 형상이고, 다른 하나는 ‘거실에 놓인 마호가니 가구’이다. 마호가니 가구는 열대우림에서의 생장, 선박에서 들었던 경고의 고동 소리를 반추하며 한낱 거실에서 낡아 가고 있다. 마당귀의 모과나무는 바람 소리에 잎새를 펄럭이며 살아 있음을 증거하지만, “이상한 새”와 “유령거미”의 거미줄에 점령당하고 있다. 이 쇠락과 죽음의 이미지는 곧 “생명나무”인 “우리 모두가 그럭저럭” 누리는 일대기로 일반화되면서, 세 번째 ‘나’의 형상으로 합일된다. 이 시에서 ‘나’는 “마당에 나가 흘러가는/뜬구름이나 바라보는” 시적 화자인데, 그는 거미의 군락지로 변하는 모과나무를, 무적 소리의 환청에 시달리는 마호가니를 바라보는 시선이자 곧 대리표상된 이들 안에 감춰진 진짜 정체이다. 한때 울창한 열대우림에서 찬란한 생을 보내고 바다를 건너며 풍운을 겪었으나 지금은 무적 소리를 듣고 있는 존재, 그리고 몰년을 잇대는 “유령거미”의 시간에 잠식되는 존재는 바로 시적 화자이다. 시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이 시에서 화자의 모습은 마호가니, 모과나무, 유령거미, 그리고 안개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져 있다. 안개와 유령거미에 의해 포박되고 지워지고 있는 존재, 그것은 바로 죽음의 시간에 근접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인의 자아이다.
자박자박 물소리와 같은 시인의 신체화된 리듬은 이 시집에서 삶의 통찰이나 서늘한 추상 대신 “구체적 생활 감각”(이찬)을 그리거나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누님의 부고’를 듣는 마음과 문경새재의 굽잇길, 진도 아리랑의 가락(「문경」), 막걸리 심부름의 추억(「정류장 못 미쳐 술도가 있다」), 이웃의 치매 노인과 골목의 재개발 이미지(「정든 땅 언덕 위」), 현관에 놓인 동백 화분이 검역관으로 치환되는 장면(「동백 현관」), 분노로 폭발했던 한때를 수류탄으로 묘사하는 장면(「경청」) 묘사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김명인이 오래전부터 친연성을 보여 주던 죽음과 허무, 무상과 항상성은 이 시집에서 더 짙게 강화되고 있는데, 그 어조는 소란스럽지 않고 오랜 파도의 반복처럼 나지막하고 단조롭다. “책 만 권을 한꺼번에 펼친 바다가/(중략)/비장의 어둠일까, 이 도서관의 장서려니/(중략)/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등대를 켜고 앉아/첩첩 어둠을 읽고 있겠다!”에서 어두운 바다, 어부를 장서와 사서, 독자로 비유하고 있는 장면(「죽변도서관」), 혹은 “능선을 나는 빌렸다/(중략)/물려줄 생각보다 빌려 쓸 궁리가 앞선 사람/어느새 탕진하고 여기 서 있다”에서처럼 생의 끝자락에서 선 존재를 ‘남의 서화를 빌려서’ 탕진한 이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그 예가 되겠다(「차견」). 빌리고, 탕진한 자의 몸가짐은 그러나 절망이나 비관으로 흐르지 않는다. 종이의 행간을 고비로 비유하면서 “저 말들 주저앉을 때까지/모든 고비는 초심으로 넘어가야지!”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끝생의 신칙에 겸허하고 조심스럽다(「고비」).
제행무상과 고집멸도라는 오랜 진리를 반복하는 유장한 리듬은 불경을 외는 염불처럼 시집 전반에서 일체의 욕망을 잘라 내려는 ‘힘’으로 작용한다. 반세기 전 교실의 ‘네 모습’을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생각뿐이라면 넘치지 않기를 바라는 푼수로/산통을 흔든다, 깨 버린다”라며 절단하는 운명적 결단(「산통을 깨다」), 또는 “살아지는 대로 살려고 드는 내게/간추릴 복안이 없는 것이다”라는 미래의 삭제는(「복안」), 잘 벼려진 물결의 날이 내치는 세목들이다. 시인은 “딴 세상 사람” 같은, “구름 척후”로 비유된 시적 화자를 따라 혈흔이 낭자한 제국을 떠나 ‘호기심’과 ‘기념’을 버리고 다만 구름처럼 흐를 뿐이다(「구름 척후」). 그런 의미에서 생멸과 쇠락을 신체화한 노래는 세속과 무관한 바람 소리처럼 경건하고 무심하다. 그러나 생의 무상함과 비움의 되새김이 전부일까. 시의 정형화된 리듬이 각각의 형상을 유사한 풍경으로 돌려놓는다고 해도, 거기에는 어김없이 새겨지는 것이 있다. 고독한 시인의 내면에 다름 아닌 풍경에, 언제나 소멸의 의지와 함께 욕망이 들끓는다는 것이다.
밤새껏 씨름했던 상대가 몽당빗자루라 해도
아침은 누구에게든 편견이 없다
꿈자리가 불편해 뒤척이다 깨고 보니
나는 바닥이고 코끼리 한 마리가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있다
깜짝 놀라 비몽사몽을 헤쳐 나왔지만
새벽까지 밀어닥치던 폐허의 상상은
아직도 호리병 속일까
뻗치면 마음 굴곡진 협곡에도 가닿겠지만
거기 어딘가에 무리 지은 코끼리가
초원을 갈아엎을 것 같아
출근길로 가로막히는
창밖 순환도로를 멍하니 내다본다
―「코끼리와 호리병」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밤사이의 고뇌를 코끼리로, 그 씨름의 현장을 호리병 속으로 비유하고 있다. 시인은 ‘아침’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자연 섭리가 가차 없이 꿈과 같은 환등상을 지워 버릴 것을 깨닫지만, ‘초원을 갈아엎을 것 같은 코끼리’와 같은 생의 의지와 욕망 또한 사물처럼 견고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 “곡두는 머리맡에도 앉아 있다/(중략)/도록에서 걸어 나와 꿈결엔 듯 손짓하는/저 환영은 누구의 비밀일까?”에서 출몰하는 곡두(‘실제로 없는 사람이나 물건 등이 마치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다가 사라지는 현상’)는 유령의 환영이 아니라 차라리 만화경 같은 찬란한 생을 사는 욕망의 환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곡두」). ‘더러운 그리움’이라는 경멸과 “그리움으로 더는 가파르지 않으리!”라는 열반 의지는 사실, 강렬한 그리움에 젖은 자의 주체 소환의 단속에 다름 아닌 것이다. 김명인 시의 ‘개인 주체’는 그렇게 이중부정과 구속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드러나는, 숨은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서도민요와 서해 물결을 닮아 열세 번의 구비를 넘는 시의 물결에 다만 하강과 부동의 힘만 담겼다 하지 말자, 리듬은 언제나 상승과 생동을 의미하므로.
- 1)정과리는 이에 대해 “김명인의 시집에서는 이 서정적 자아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과리, 「통으로 움직이는 풍경―김명인 시의 독보적인 우화론」(해설), 김명인,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문학과지성사, 2019,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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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1 2024년 여름 『계간 파란』 통권 33호 ‘문질빈빈(文質彬彬)’ 항목에서 제시된 「“지평선”의 아름다움」에서 이미 암시했듯,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은 『주역』과 『중용』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고전의 영향 관계라는 문제틀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어야만 한다. 이 시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이라는 방법론과 의제의 초점화를 통해서만 적확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와 산문 텍스트의 상관성을 심층적으로 탐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고전의 충실한 이해 및 참조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김수영의 초기작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유발한 도피 행각과 귀가 이후의 실존적 격투가 고스란히 배어든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그리고 말년에 창작된 「미역국」이나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수한 시편들에선 동아시아 고전의 수용 및 변용의 맥락이 일관된 지속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시에서 동아시아 고전의 이름이 거죽 위로 솟아오른 텍스트로는 「술과 어린 고양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다” 같은 구절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시의 本髓」 같은 산문 텍스트에서 활용된 “양극의 긴장” “대극” 같은 용어들 역시. 동아시아 문명사의 주축을 이루는 ‘주역 철학사’에서 부단히 제시되었던 ‘대대(對待)’ ‘순환(循環)’ 같은 어휘들을 수용・변형한 것이다. 김수영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움”과 “긍지”, “생활”과 “자유” 같은 대립적 심상들이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지력선을 이루는 것처럼, “대극”과 “양극의 긴장”으로 표상되는 산문 텍스트의 핵심 원리 역시,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중용』의 ‘신독(愼獨)’으로 대변되는 근본적 ‘자기성찰’을 수미일관한 실존적 태도로 “이행(履行)”하려 했을뿐더러, “생활”과 “뮤즈”가 “일자(一字)”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실천의 기반으로서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끊임없이 견지하려 했으며 이를 당대의 “서정시인”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은 『중용』 제2장에서 등장하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君子가 中庸을 함은 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에 반대함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그 어휘적 관련 맥락과 구체적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나타난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시중’이 인격 수양의 정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맥락을 좀 더 생생하게 감득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시중(時中)’이란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말에 담긴 실질적 의미,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宜), 적합하면 된다’(우응순, 『친절한 중용 강의』)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구체적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宜)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숨겨진 맥락을 명료하게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에서 부단히 등장하는 부끄러움의 형상들이나 보잘것없음을 반성하는 자기성찰적 시구들은 한결같이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김수영의 여러 시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들 역시 좀 더 심층적인 차원의 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愼獨)’ ‘권도(權度)’ 등과 같은 성찰성과 관련된 어휘들과 더불어 ‘중용’ 및 ‘시중’의 사유 맥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및 본격적 탐구가 필수 불가결하다. 2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콜맨의 신작품(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賣春婦)의 생활(生活)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神經質)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卑怯)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케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勞力) 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英國人)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지평선」 전문 3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 텍스트를 넘어서 그의 실존적 태도와 세계관의 중핵을 구성하는 ‘중(中)’의 사유와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시는 상당히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충실하게 확보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이 온전하게 작품 내부에 응축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역시, 김수영 특유의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그의 첨예한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연에 나타난 “뮤즈”와 “생활”이란 이미지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극”의 의미 계열을 구축한다. 양자의 사이 공간에 들어박힌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시구와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라는 시간적 심상은 “대극”이 반복・변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이란 “생활”에서 파생된 것이며, “너”는 “뮤즈”를 대명사로 바꾸어놓은 대체 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듭이 나날의 범속한 생활이 만드는 온갖 우여곡절들을 암시한다면, “뮤즈”와 “너”가 함께 이루는 연속적인 이미지 지력선은 시인의 포에지(poesie), 곧 시인의 예술적 이상으로 이루어진 예술혼을 표상한다. 나아가 시작(詩作)의 ‘내재적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신독(愼獨)’의 실천적 태도와 ‘시중’의 윤리학의 절실한 자각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위에서 풀이한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측면 또는 상반된 계기를 품고 있다는 의심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을 중용의 관점과 문제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긍지의 날」에서 상반된 위상을 차지하는 “설움”과 “긍지”라는 심상을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대극”의 사유 원리를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사랑」에서 등장하는 “변치 않는”과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이라는 시구의 상반성, 그리고 「사랑의 변주곡」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사랑의 도시”와 “개미”라는 대극적 이미지 구성원리에서도 또렷한 되풀이의 모양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만한 경박성”이란 작은 무늬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이상적 질서’, 곧 ‘중용’의 사유 및 실천 원리이자 ‘대대(對待)’라는 말로 집약되는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에서 감수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이 품은 사유의 보석이란 어쩌면 정반대 상황에 놓인 사태들을 “대극”의 원리로 포괄하면서, 이들을 그저 대립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이라고 사유했던 지점에서 최고 순도의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만한 경박성”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덧씌워진 속물성이나 천박성을 껴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나의 가족」)를 예감하면서 “긍지”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상반된 “대극”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잠재적 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예감하는 사유의 밀알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내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시인의 웅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2연을 구성하는 “대극”의 짜임새는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정(靜)의 심상과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동(動)의 표현이 상반된 지력선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양자의 이미지 계열을 한층 더 풍성하면서도 복합적인 일상의 다면성을 담을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간다. 양자는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상반된 이미지 지력선을 각각 계승한다. 따라서 그저 단순한 ‘정(靜)/동(動)’의 “대극”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도리어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요약되는 역동적 상호 침투의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나아가 중층적 “대극”의 무늬들을 2연 마디마디의 모서리로 틔워 올리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주요 동인으로 기능한다. 2연의 “다소곳한 분위기”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심상들 역시,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구절들을 각각 잇따르는 것이기에, ‘정(靜)/동(動)’의 단순한 “대극” 현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표현되는 상호 침투의 역동적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그야말로 다면적인 “대극”의 무늬들을 아로새긴다. 달리 말해,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라는 심상이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고요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느낌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심상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고양된 충만감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 개방성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면서 고립된 폐쇄성의 감각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무거운 일기”와 “우울”이라는 형상이 둔중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이와 상반되는 “걸어가기 위하여”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라는 구절들은 예민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의 원환 운동을 표현한다. 4연에 나타난 “생활”->“비겁”->“나의 원죄와 회한”의 계열이 함축하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의미 매듭과 더불어, “뮤즈”->“경멸”->“너의 생리”로 이어지는 형상의 연속선이 이루는 신성한 “지혜”라는 의미 계열 역시, 앞서 살핀 연과 같은 “대극”의 구도에서 발원한다. “생활”의 이미지 계열이 발산하는 ‘세속-현실-일상’이라는 하나의 “극”과 더불어, “뮤즈”라는 형상의 계열체로 수렴되는 ‘신성-이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극”이 함께 이루는 “힘”과 “긴장”의 미학이 생생한 느낌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뮤즈”의 “대극”을 형상화하면서, 김수영은 나날을 살아가는 “온몸”에 “타락”과 “지혜”를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나날의 “생활” 속에서는 “뮤즈”로 표상되는 시의 예술혼이 끝끝내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와 “대극”을 이루는 “뮤즈” 속에서는 “생활”과의 공분모를 형상화하려 했던, 시인의 실존적 “싸움”을 주도 모티프로 삼는다. 달리 말해, 시인의 몸과 마음에서 수시로 엇갈리는 무수한 “대극” 운동이 「바뀌어진 지평선」을 구성하는 전체 이미지의 주도소(主導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5연과 6연에서도 이와 같은 “대극”의 이미지들은 수미일관한 연속선으로 구축되지만,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곧 상호 모순에 가까운 ‘극단적 아이러니’의 어법과 구조를 새롭게 펼쳐놓는다. 특히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5연), “뮤즈여/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6연) 같은 대목들은 표면적인 통사 구조만을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적확한 해석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에 내포된 그 복잡다단한 의미론적 계기와 극단적 아이러니 구조에 관한 섬세한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연의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를 비롯하여, 8연에서 등장하는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같은 구절들 역시 상호 “대극”의 이미지 계열을 구성한다. 전자(前者)가 바로 앞에 놓인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면, “타락한”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기자”의 직무상의 윤리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해가는 세속의 풍습과 인심을 “정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이라는 시어와는 결합할 수 없는 상반된 의미 지향성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7연에서 도드라진 모양새로 등장하는 “타락한”은 기자”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발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상태이자, “이 어지러운 세상”이 강제하는 온갖 “탈”, 곧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처럼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앞뒤로 연속된 시구들은 서로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긋나는 모양새를 띤다. 이들은 “뮤즈”와 “생활”, 곧 ‘신성과 세속’, ‘이상과 현실’ ‘예술과 일상’ 등등의 상반 항들이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시인의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의 사유를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이 품은 그 형상의 진의(眞義)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가치 전도의 의미를 거느린 이 형상은, “뮤즈”와 “생활”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오히려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상호 전환의 융합 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중(中)’의 시간적 궤적을 표상하는 형상인 동시에 ‘역동적 균형’의 운동 및 이행 과정을 지속하는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8연의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 역시, “바뀌어진 지평선”으로 빗대어진 ‘신성’과 ‘세속’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상호 전환 과정 및 ‘역동적 균형’의 상호 이행 운동을 역설 어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와 더불어, 그 뒤를 잇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는 이미지 매듭을 오랜 시간 동안 숙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을 곰곰이 되살피면,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은 비단 “타락한”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를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 구절은 언뜻 “가벼워서”, “배반”, “간악” 같은 시어들로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꼴 짓는 이미지의 핵심 매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앞뒤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정반대 의미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생활”에 있을뿐더러 “경박성”이란 그것의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표면”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정신”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은폐된 측면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이라는 적확한 은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저 이미지들은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 “물”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 “위를 날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단히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의 벡터를 암시적 문법으로 개진한다. 이 실천의 원리를 ‘시중’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철학자가 제시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라는 언급은, 이 맥락 전체를 좀 더 명확한 철학적 범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와 같은 ‘시중(時中)’의 사유 맥락은 8연 마지막 대목을 이루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형상들이나, 9연의 “너의 육체는/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1연의 “뮤즈여/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같은 심상들로 변형되면서 점층적 확산의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이 “뮤즈”에게 “표면에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시중’의 윤리학에서 기원한다. “표면”은 “생활”의 의미 계열로 수렴되며,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뮤즈”의 이상적 예술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자기 신념을 은은한 뉘앙스로 드러내는 역설 어법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9연과 11연의 이미지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의 범주에서 감수되는 것이 합당하다. “뮤즈”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육체”의 차원에서 호명하는 이미지 매듭(9연)이나, “시인”과 “시”를 “대극”의 차원으로 설정하면서 “뮤즈”와 “시”를 의미론적 연속체의 범주로 설정하는 구절(11연)은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생활”과 “뮤즈”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구절들은 “생활”과 “뮤즈”를 끊임없는 상호 전환 및 상호 이행이라는 융합・횡단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김수영 특유의 ‘중(中)’의 사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또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라는 실천 원리와 가치 지향성을 내포한다. 9연과 11연이 연속적인 의미 계열을 이루면서 개진하려는 바는, 각각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생활”과 “뮤즈”가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관계이자 최적의 방향성, 곧 매 순간 ‘시중(時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 전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과 “뮤즈”가 12연에서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달라지는 ‘시중(時中)’의 위상과 내용을 신중하게 사유하고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해, 시인은 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적의 방향을 모색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는 실천의 ‘내재적 과정’,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나날의 실존적 태도로 견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라는 구절로 표상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이 “일자(一字)”를 이루는 “지평선의 대열”을 구축할 수 있는 궁극적 화합의 미래 비전을 상상하고 선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이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무리 대목에서 “뮤즈”에게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12연), “앞장을 서지 마라”(13연),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13연)라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이룬다. 시인은 “생활”과 “뮤즈”의 “대극”이 함께 이루어가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이행 과정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로 소묘함으로써, ‘세속/신성’, 현실/이상’, ‘예술/일상’이라는 대립 구도의 고정성을 부단히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동시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권유하려 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라는 대목은 “서정시인”으로 비유된 당대의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모더니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혁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전언을 간곡한 명령 어법으로 권고하는 내용을 품는다. 이렇듯 “지평선의 대열”이 그야말로 “일자(一字)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매리지/하우스펠 에어리어” 같은 어휘들로 표상되는 서구 기계산업문명의 선진성과 그 문화적 세련성을 무작정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리라. 나아가 이와 같은 서구의 문화적 특질을 “뮤즈” 곧 “시”의 이상적 본질이자 예술혼의 정수로 추구하거나 숭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대 서구의 문화는 우리의 “생활”과 엄청난 격차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진 지평선」에서 시인이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사회・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신중한 고민 및 극복의 비전을 여타의 “서정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권고하려 했던 맥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이 권고에 깃든 속도의 담론과 비전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모더니티” 수준과 밀도에 대한 시인의 근본적인 염려와 신중한 고민의 깊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것은 『중용』 제2장의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그대로 맞닿는다, 『중용』의 이 구절에 따르면, 군자의 ‘시중(時中)’은 소인의 ‘무기탄(無忌憚)’과 상반된 방향과 내용을 지니는 ‘기탄(忌憚)’, 곧 ‘거리낌’을 심사숙고하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낌이란 신중함’이며,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실수의 가능성을 줄인다’(김용옥, 『인간의 맛』)라는 깊은 안목의 풀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거리낌은 겸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강함’일뿐더러, ‘시중(時中)’의 근거이자 그 실천적 이행의 원천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지막 연에서 극단적 역설을 표현하는 반어법을 동반하면서, 우리 “모더니티”에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울”과 “경박”을 반추하도록 강제한다. 마지막 13연에서 “앞장을 서지 마라” “낮추어라” 같은 말들로 표현된 제한과 금지의 명령어들을 “뮤즈”에게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은 김수영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1950-60년대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티”의 첨단을 맹종(盲從)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각별한 어조와 리듬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여타의 시인들이나 예술가에게 권고하고 공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연은 두 매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라는 부분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마지막 대목으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는 “뮤즈”에게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풍조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님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가 나가야 할 최적의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바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펼쳐지는 구체적 실천의 무대일 것이다. 이는 또한 후자(後者)의 지극한 역설로 이루어진 반어법을 낳는 토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의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맨 마지막 무늬들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를 비유적 차원에서 집약하는 구절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 없이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 구절과의 통사론적 맥락에서 보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터이지만,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은 “우울”과 “경박”이라는 시어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우리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 과정을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그 복잡다단한 속사정을 비교적 명징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이란 현대 한국인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과 “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우울”과 “경박”을 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뿐더러. 이른바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수영에게 “긍지”란 ‘시중’의 윤리학에 깃든 ‘실천적 원근법’과 ‘역동적 균형’의 부단한 “이행”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발원하는 “우울”과 “경박”을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 터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수미일관한 실천의 자리, ‘시중(時中)’의 충실한 이행 과정을 통해서만 체화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아랫자리에서 인용되는 작은 무늬들이 넌지시 말해주듯. 오오 환희(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다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福德房) 사기꾼도 도적놈지주(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自稱) 예술파시인(藝術派詩人)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환희(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人生)도 인생(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 - 「미역국」 부분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학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 - - 「모더니티의 문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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