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 ― 함윤이론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
—함윤이론1)
함윤이의 소설은 죄책감이라는 입구로 들어가 우정이라는 출구로 나오는 신비한 미로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입구와 출구를 유려하게 연결하는, 모호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타자와의 연결’이 그 조건이라는 점에서 죄책감과 우정은 꽤 닮아 있다는 것을. 요컨대 함윤이의 소설에서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우정이라는 관계 없이 발생하지 않고, 우정이라는 관계는 죄책감이라는 감정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다지 도덕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끊임없이 되뇌는 것은, 그들이 누군가의 ‘친구’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상 아무런 약속으로도 엮이지 않은 ‘우정’의 관계는”2) 약속하지 않은, 약속할 수 없는 마음들로 ‘너’와 ‘나’를 결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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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말할 것 없이 「강가/Ganga」로 가면 된다. 이 소설은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인가. 우선은 그렇다. 마지막 문장이 증거다. “오래 기다린 죄책감이 쏟아지기 시작한다”(p. 139). 심지어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가 죄책감을 초래한 사건에 대해 “그만하자. 이런 얘기는 중요한 게 아니다”(p. 111)라고 말하며 시치미를 떼고 있으므로, 독자는 그것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건의 내막은 무엇인가.
너 우리를 여기 두고 달아나는 거야. 쿠쿠는 자신의 오른팔을 불쑥 들이밀었다. 매일 나와 비슷한 온도로 얼어붙던 팔이었다. 내 팔이 부서졌다고 생각해봐. 이게, 눈 깜빡할 사이에 박살 났다고. 그래도 지금처럼 굴 테야? 내가 고개를 돌리자, 쿠쿠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너 아주 비겁해. 주변의 누가 죽든 다치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아. (p. 126)
한때 ‘나’는 ‘쿠쿠’ ‘자자’와 함께 “매일 마주 보고 서서 얼어붙은 음식들을 포장했다”(p. 110). 그러던 어느 날 여공 중 한 명이 산업재해 사고를 당한다. 쿠쿠는 자신이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보라며, 피해자와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공장에 취직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차라리 생존이라고 해야 할 생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연대를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는 의미일까. 선뜻 동의하긴 어렵지만 이해할 순 있다. 우정과 연대 대신 ‘내 삶’을 택한 것을 ‘죄’라고 단정할 순 없다. 또한 “비슷한 온도로 얼어붙던 팔”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여공들의 공통 조건이라는 점에서 연대의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말하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여공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하나같이 ‘불확실한 존재’, 즉 ‘프레카리아트 Precariat’라는 점에서 그것은 연대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자의 선명한 말들은 정확히 날아와 ‘나’를 찌른다.
잊으면 안 돼. 너는 내몰린 게 아니야. 너는 선택한 거야. 우리 대신에, 너 홀로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을 택했어. 아냐. 부정하지 마. 화내지도 마. 비난하는 게 아니야. 네 선택을 이해해. 나중에 모른 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우리가 모두 각각의 선택을 내렸다는 것. 자신의 의지로 말이야. (p. 127)
쿠쿠와 달리 자자는 ‘나’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너는 “홀로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을 택했”다는 것, 불확실한 삶을 사는 존재라고 해서 모두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니까 너의 말이 무죄의 변명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는 것. 이제 ‘나’는 반박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책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억울함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던 ‘나’는 돌연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다. “바로 그 순간, 남자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면 된다. “내 모든 선택을 칭찬하며, 절대로 힐난하지 않는 남자”(p. 127)를 구하면 된다. 자본의 전장에서 살아남길 택했으니, 전장의 규칙대로 값을 지불하고 사면 된다. 그렇게 소설은 동료의 고통에 연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자를 사기 위해 ‘큰 강이 흐르는 도시’에 도착한 여자의 이야기가 된다.
이쯤에서 함윤이의 소설이 갖고 있는 형식상의 특징들이 드러난다. 먼저 함윤이의 인물들은 ‘법’을 어기는 게 아니라 ‘규칙’을 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공동체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도시국가로 성장했는데, 그 배경에는 ‘민회’와 ‘극장’이 있었다.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벌판에서는 정기적으로 민회가 열렸는데, 그곳에 모인 시민들은 공동체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시민들이 지켜야 할 법과 갖춰야 할 덕에 관해 토론했으며, 때때로 누구를 죽이거나 내쫓을지 판결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시민은 ‘그만큼’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남쪽 절벽에 위치한 극장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상연됐다.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적어서 벌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인물들, 주어진 운명과 선택의 연속 속에서 저마다의 흠과 죄를 지니게 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곳에서 다뤄졌다. 다시 말해 함윤이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서쪽 벌판에서는 기소되지 않더라도 남쪽 절벽에서는 심문해볼 만한, 바로 그런 인간들이다.
또한 함윤이의 이야기는 ‘과거-사건’과 ‘현재-서사’의 거리 두기를 통해, 메시지와 스토리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요컨대 앞서 말한 인물들을 현실의 법이나 도덕에 기대어 성급히 심판해버리거나 용서해버리면 이야기 고유의 진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중심을 지킬 때, 소설은 ‘대문자 진리’에 대응하는 ‘소문자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함윤이는 현재의 서사를 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심리적·물리적 거리를 확보한 뒤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다시 겪는 구조를 채택한다. 소설 속 인물이 현재를 통해 과거를 다시 살 때, 함윤이의 이야기는 인식을 낳는다. 요컨대 함윤이의 소설은 이야기가 다룰 만한 인간들을 통해 이야기만 닿을 수 있는 진실을 만들어낸다.
다시 「강가/Ganga」로 돌아오자. 그래서 소설은 “강가. / 이 도시에서는 그렇게 불려야지, 다짐했다”(p. 107)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쿠쿠와 자자의 고향인 ‘바라나시’에 도착한 ‘나’가 낯선 도시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짓는 것인데, “Ganga”(p. 109)라는 동음 다의어에 담긴 의미는 총 세 가지다. (1) 강가, 강줄기와 육지가 맞닿는 부분 (2) 降嫁,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 자신보다 낮은 집안에 시집을 가는 행위 (3) गङ्गा, 강의 신이자 속죄와 정화를 담당하는 신의 이름.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세 가지 의미는 ‘나’가 처한 상황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과 정확하게 호응하는데, 물론 그것은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 애쓰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시나브로 드러난다.
그런데 남자를 사는 일이 애당초 가능한가. 법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가능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도 “남자를 사러 왔다고 해야 할지, 구하러 왔다고 해야 할지, 이런 경우에는 무슨 표현이 더 적절한가”(p. 111)라고 되뇌고 있듯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망’과 (남자를 사고 싶다는) ‘행위’ 사이의 번역이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당연히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나’는 물가가 싼 나라로 여행을 갔기에 비교적 적은 돈으로도 계급적 우위를 누릴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외국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꽤 자주 위협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나’가 타국에서 처음 듣는 한국어 역시 “이리 와. 언니. 예뻐요”(p. 122) 등이다. 강가에 사는 노숙인들은 “해피. 투나잇. 프리티 걸. 코리안. 러블리”(p. 122~23) 같은 말로 ‘나’의 몸 곳곳을 침범한다. 따라서 광장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남자를 사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나’에게 여신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내려 하는군요”라고 말하며, “그런 남자는 절대 살 수가 없어요. 여기가 아니라도, 어디에서도요”(p. 120)라고 덧붙일 때, ‘나’의 목표는 좌절된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화자가 ‘나’와 ‘강가’를 분리한다는 점이다.
나는 호텔로 돌아간다.
아니다, 다르게 말해보자.
강가는 호텔로 돌아간다.
이렇게 말하니 모든 게 한층 편안하게 느껴진다. 내가 아니라, 강가가 호텔로 간다. 공장에서 꾸역꾸역 모은 돈으로 항공권을 사서 낯선 도시에 도달한 사람은 강가, 어깨가 다 드러나는 티셔츠를 입은 채 도시를 거니는 이도 강가, 주머니의 두툼한 다발로 남자를 사고자 하는 여자가 강가. 그 여자가 나를 이끈다. 여기에 내 책임은 없다. (pp. 121~22)
우정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책임지는 대신 남자를 사겠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도망쳤던 ‘나’는, 타지에서 맞닥뜨린 현실적인 한계 역시 자신과 ‘강가’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해결하려 한다. 그러한 전략은 일견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강가는, 우리는”(p. 124) 호텔 직원의 소개로 남자를 구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걸 ‘나’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강가라는 이름을 빌려, 칼을 든 남자를 사고, 자신을 희롱한 남자들에게 복수하면, 그건 정말 ‘나’가 한 일이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도시에 온 목적은 그런 게 아니지 않았나. 그날의 선택과 책임을 어긋난 방식으로 회피하고 있는 ‘나’는 아무래도 그날의 기억을 ‘제대로’ 다시 겪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칼은 총이 등장함과 동시에 무용지물이 된다. 느닷없이 울려 퍼진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나’는 시커먼 강으로 뛰어들고, 시시한 복수극도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럽고 너저분한 강이라고 말했지만 쿠쿠는 “신처럼 이쁜 강”(p. 126)이라고 말했던 강에 몸을 던진 그 순간, 예기치 못한 깨달음이 찾아든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나’는 더 이상 “강가를 나로부터 구분할 수 없”게 되는데, 우스꽝스럽게 허우적거리는 남자를 향해 ‘한국어’로 소리치는 장면이 그렇다. 자신이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소리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비릿한 물이 온 얼굴을 습격하”(p. 134)는 순간은 ‘번역’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핵심은 그 순간에도 ‘나’가 쿠쿠와 자자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자자, 쿠쿠. 이것 봐, 이것 좀 보라고. 물에 빠진 사람을 섣불리 구하다가는, 전부 다 물에 빠져 버리는 거야. 우리 전부가 목숨을 버리는 꼴밖에 안 돼”(p. 135).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순간 ‘나’는 남자를 ‘구하고’ 있다. 요컨대 ‘나’는 ‘구하는 buy’ 것이 아니라 ‘구해야 save’ 했다. 이도 저도 아닌 경계(강가)에 서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강물 아래[降嫁]로 몸을 던져 손을 뻗어야 했다. 그러니까 “매일 나와 비슷한 온도로 얼어붙던 팔”(p. 126), 그때 그 팔을 잡았어야 했다.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나’가 남자의 말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한 거예요”(p. 139)라고 번역할 때, 오래 기다린 죄책감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속죄와 정화 (गङ्गा)가 찾아드는 것은, 그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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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불완전한 인물이 같은 삶(사건)을 두 번 사는(겪는) 이야기. 그래서 처음에는 닿을 수 없었던 진실에 가닿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소설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닐지 몰라도, 소설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아주 잘할 수 있는 일이다. “흔히 ‘낡았다’고도 말해지는 소설들, 시작과 끝이 있고 인물과 사건이 드러나는 전통적인 소설이”3)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다는 의미다. 그런 소설을 한 편 더 살펴보자. 「나쁜 물」은 제목 그대로 “그날 이후” 씻어낼 수 없는 “나쁜 물”(p. 135)이 들어버린 ‘너’의 이야기이다. 함윤이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 이 소설도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찾아온 집주인은 ‘너’의 집에서 들리는 커다란 노랫소리 때문에 “이웃들 원성이 자자하”다며, 그 시간이면 집이 비어 있다고 말하는 ‘너’에게 혹시 “앙심 품은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 걸 수도 있”으니 “점심때 집에 한번 들러”(p. 136)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집주인이 한 말 중에 특정한 단어가, 예컨대 ‘원성’ ‘앙심’ 같은 단어가 ‘너’의 ‘나쁜 물’을 파고든다. 이쯤에서 ‘트라우마’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빈집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는 해결되지 못한 (해결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만드는 노이즈이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억압된 것,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회귀할 것이 있다. ‘너’는 나쁜 물을 씻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요컨대 이번에도 ‘사건(원인)’과 ‘행위(결과)’ 사이의 오역이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쁜 물’의 역사는 ‘너’가 흉악범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린 시절 깊게 파인 구덩이에 묻혀 울고 있던 ‘그 남자’를 본 순간 ‘너’는 마음 속에서 “선하고 좋은 것”(p. 151)이 찰랑거린다고 느꼈고, 그래서 남자를 구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성폭행과 살인 등을 저지른 흉악범이었다. 아마도 피해자의 부모였을 누군가가 그를 납치해 구덩이에 묻어둔 것이었다. 그렇게 ‘너’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불시에 끼어들어 모든 사람의 원한을 산, 얼뜨기 조연이”(p. 165) 되어버린다. 더 큰 문제는 ‘너’가 어긋난 방식으로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엄마가 주지 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방식, 즉 한겨울 얼음장 같은 물로 목욕하고, 그 남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너’에게서 나쁜 물을 빼 가기를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그날의 기억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다. 앞서 말했던 노랫소리가 방증이다. “씨발, 엄마 아무것도 안 끝났잖아”(p. 143)라고 말하는 ‘너’의 내면에는 여전히 ‘나쁜 물’이 출렁인다. 따라서 ‘다시’ 겪어야 한다. 수십 년을 돌아온 ‘너’는 그날의 ‘너’를 다시 만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사건과 다시금 대면한다는 것은 현재의 관점으로 기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거울 없이 제 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너’에게는 거울이 되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쁜 물」에서는 ‘소년’이 그 역할을 한다. 용기를 내 다시 찾은 고향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은 ‘너’와 닮은 타자다. ‘너’는 집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와 똑같은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는 소년이 ‘그 남자’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소년을 쫓는다. 하지만 소년은 “네 아버지가 감옥에 갔니?”라는 질문에 “아버지의 사기는 본인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대답할 뿐이다. 아버지 때문에 집을 잃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오지만, 자신 역시 아버지의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소년의 답변에 ‘너’는 “그게 다니?”(p. 162)라고 되묻고, 소년은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요?”(p. 163)라고 답한다.
그렇다. 그게 다다. ‘그게 다’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소년의 아버지는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소년은 단지 그런 아버지를 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소년의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소년)이 죄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을 알지 못한 것(‘너’)도 죄가 아니다 (‘너’는 손과 발과 입이 묶인 채로 구덩이에 묻혀 울고 있던 그 남자가 흉악범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질문은 소년은 어떻게 ‘너’의 집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를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너’와 소년이 느끼는 죄책감은 ‘죄 없는 죄책감’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실체를 알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은 “여성과 남성, 고음과 저음, 속삭임과 고함”, 심지어 “웃음과 울음조차”(p. 142) 뒤섞인 기이한 노랫소리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너’와 소년은 그런 점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소년은 ‘너’에게 노랫소리를 제대로 마주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질문해보세요. 그럼 대답하더라고요”(p. 164). 그날 이후 계속해서 솟구쳤던 질문들을 억압해왔던 ‘너’는, “아무리 잠가도 물은 계속 솟구칠 것이”므로 “잠기기 전에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p. 165)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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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지한 ‘죄 없는 죄책감’에는 좀더 따져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름부터 모순인 이 이상한 감정의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너’가 그 남자를 구한 것, 그것이 죄인가. ‘너’가 그날의 진실을 털어놓았을 때, 엄마의 눈에 비친 ‘너’의 얼굴은 왜 “죄인의 얼굴”(p. 160)일 수밖에 없었나. ‘너’의 말대로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p. 161)을 뿐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네가 알든 모르든 저지르게 되는 잘못이 있”(p. 162)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알 수 없는 것을 알지 못한 것도 죄고, 그것이 ‘너’의 죄목인 셈이다. 논리적으로 억지에 불과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엄연한 사실임으로, ‘너’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날의 사건과 관련해 ‘너’의 이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피해자[“너와 거의 또래였던 여자애들” “낯선 남자를 도울 만큼의 호의와 상냥함을 품은 여자애들”(p. 165)]와 유가족[“여자애들을 낳은 얼굴들” “새빨개진 눈으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p. 159)라고 말했던 얼굴들]의 잔상들은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함으로, ‘너’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요컨대 ‘너’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한평생 씻을 수 없는 나쁜 물, 즉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시 말해 함윤이의 소설에서 죄책감은 인물이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의 차원에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 즉 ‘타자와의 연결’이라는 차원에서 다뤄진다. 감정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느끼는 죄책감이 죄보다 크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 4)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함윤이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죄책감의 이면에는 ‘지나친 감상주의’나 ‘도덕적 우월주의’가 있는 게 아니라 우정이라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가/Ganga」의 ‘나’가 느끼는 죄책감이 좁은 의미의 우정(‘나’는 ‘자자’ ‘쿠쿠’와 친구였다)에서 연유한다면, 「나쁜 물」의 ‘너’가 느끼는 죄책감은 넓은 의미의 우정(‘너’는 피해자, 유가족과 연결되어 있다)에서 연유한다. 이렇듯 함윤이의 소설에서 죄책감은 우정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통용되는 일종의 ‘로컬 룰 local rule’처럼 다뤄지기에, 그것의 작동 원리는 객관적 논리와 법이 아닌 주관적 감정과 규칙을 따른다.
「구유로舊遊路」가 대표적인 예다. 이 소설은 “오래된 친구의 길이”라고 의역할 수 있는 ‘구유로’에서 함께 살며 연습생 생활을 했던 ‘위리’ ‘공희’ ‘사라’ ‘보배’ 네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처음 만난 이후 몇 년 동안 전국 8도를 돌아다니며 각종 행사를 전전했는데, 기약 없이 미뤄지는 데뷔와 앨범 그리고 무엇보다 미안해할 것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미안해할 수밖에 없는 “미지근하고 애매하여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온도”에 보배가 먼저 지쳐버린다. 아니, 모두가 똑같이 지쳐 있었지만 보배만 포기할 수 있었다. “해약금에다가 이사비까지 내줄 가족”이 있다는 건 확실히 네 사람 중 보배만 가진 특권이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멤버들을 배신하고 보배 혼자 계약을 해지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가 더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 죄책감의 이유는 네 여자의 관계가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 이상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은, 예컨대 술에 취해 마트에서 훔쳤던 의자, 상아색 벽에 까맣게 그을린 담배 자국, 가장 좋아하는 무대의상이었던 짧은 치마와 반짝이는 스타킹 같은 것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에서 오직 네 여자만이 공유하는 기억들이, 이 세상에서 오직 네 여자에게만 적용되는 ‘우정의 규칙’이 되는 것이다. 특히 보배가 구유로를 떠나기 전날 밤, 사라가 입고 있던 옷을 차례차례 벗은 뒤에 보여줬던 몸, “단 몇 초간 세상에 드러났던 파랗고 기이한 몸이” 그렇다. 사라는 부당한 계약이나 그것의 해약과는 관계없이 그저 “지금 모습 그대로” 자신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담아 자신의 비밀을 보배에게 보여줬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라의 진심이 닿았기에 보배는 죄책감을 느낀다고. 사라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 마음 (우정)을 줬기에, 보배 역시 그러지 않아도 되는 마음 (죄책감)을 느낀다.
따라서 사라가 선물한 소설책의 주인공처럼 보배가 ‘걸어서’ 세 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설정은, 아무런 개연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필연적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소설책 속의 남자는 친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죽어선 안 된다”고, “나는 그걸 허락할 수 없”으니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근거를 알지 못하는 믿음에 굳은 확신을 품고서” 걸어서 그녀를 만나러 간다. 마치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녀를 살리는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듯 이상한 믿음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는 보배의 마음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지 않을 수 없어서,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보배도 걷는다. 거미줄과 구정물과 쓰레기를 지나면서, 그 모든 냄새와 질감을 온몸에 묻혀가면서 걷는다. “이토록 형편없는 길을 지나가고 있으니 이제는 좀 더 당당한 마음으로 여자들을 만나도 될 것” 같다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믿음에 굳은 확신을 품고서’ 걷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발이 푹푹 빠지는 습지에서 네 여자가 함께 개기일식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러므로 틀림없는 우정의 이미지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핫스폿”은 아니지만, 그들만이 공유하는 기억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진흙탕’이야말로 온전한 네 여자만의 영토, 네 여자만의 우정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함윤이의 소설 속 인물들은 왜 죄책감을 견디면서까지 우정을 지키려고 하느냐는 점이다.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냉소적인 동시에 가장 희망적인 대답을 해보자면, 우정은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타자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조건이라면, 그 조건을 계속해서 돌아보게 하는 마음, ‘나’의 안녕만큼이나 ‘너’의 안녕을 염원하게 되는 우정은 자연 발생적 관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우정은 그러한 구획을 홀쩍 뛰어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는 「자개장의 용도」도 할 말이 있어 보인다. 소설은 자개장의 숨겨진 비밀을 4대에 걸쳐서 계승한 엄마와 딸들의 이야기이면서,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는 네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내력을 좇다 보면 알게 된다. 어떤 우정은 ‘나’의 안녕보다 ‘너’의 안녕을 ‘더’ 염원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선 특별해 보이지만 네 여자의 마음에 비하면 차라리 시시한 수준인 자개장의 비밀부터 밝혀보자. 마음만 먹으면 그곳이 어디든 데려다주는 자개장의 사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자개장 앞에 서서 “가고 싶은 곳의 이름을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마치 “공놀이”를 하듯 자개장이 “받아쳐”(p. 245)준다. 설명서에는 주의 사항도 함께 적혀 있다. 자개장은 갈 때밖에 못 쓴다는 것. 돌아올 때는 자신의 힘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개장을 사용할 땐 “자기 힘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돌아올 거리부터 계산”(p. 247)해야 한다는 것. 여기까지가 자개장의 용도에 관해서 바꿀 수 없는, 미리 정해진 ‘법’이다.
하지만 증조할머니가 오일장에서 자개장을 발견한 이후 시작된 이야기는 차라리 네 여자가 저마다의 ‘규칙’을 발명하고 전송하는 역사에 가깝다. 자개장의 비밀을 알게 된 증조할머니가 자개장을 버리자고 말했다가 이내 태도를 바꾸어 집안의 가보로 선언한 이후, 자개장은 정해진 용도에 새로운 규칙을 더해가며 ‘나’에게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증조할머니는 자개장을 막내딸에게 물려줌으로써 모계 계승이라는 규칙을 만들었고, 할머니는 남편과의 권력 다툼에 사용함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자개장을 전유했다. 그런가 하면 엄마는 “나는 좀 다르게 그걸 쓰고 싶었”(p. 249)다며, 자개장의 비밀과 용도를 가족들과 공유한다. 이렇듯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개장을 사용해온 세 여자에게 ‘법’보다 중요한 것은 ‘규칙’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자개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된 ‘나’는 교통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자개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책임감 있게 사용하겠다는 약속이 무색할 만큼 자개장은 금방 다른 목적으로 사용된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중한 관계를 스스로 망친 이후 방황하고 있는 딸에게 엄마가 그동안 숨겨왔던 규칙을 말해준다는 점이다. 엄마는 가족마저 뒷전인 채 오직 ‘정우’를 찾기 위해 자개장을 사용하는 딸에게 “은혜도 모르는 년”이라고 말하며, “넌 그걸로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내 마음은 전혀 모르겠지”(pp. 269~70)라고 덧붙인다. 요컨대 딸이 언제든 자신의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불안, 영영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공포가 엄마가 딸에게 화를 내는 진짜 이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신이 스스로 터득한 진실을 딸에게 전수한다. 그건 바로 “돌아올 길을 생각하면 자개장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 “오히려 그걸 전혀 개의치 않아야만 자개장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는 길을 잃지 않으려면 너무 먼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했던 자신의 규칙을 스스로 기각한 셈인데, “그게 나를 떠날 방법으로 쓰일까봐 무서웠기 때문”(p. 271)에 진실을 숨겼던 엄마는 왜 자신의 결정을 번복한 것일까. 그건 아마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딸 역시 ‘갈림길’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타클라마칸 사막”,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그곳에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됐다. 소설마저 비밀에 부치고 있는 엄마의 “아주 긴 이야기”(pp. 270~71)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애초 돌아간다는 생각조차 없”이 떠나고 나니 “앞에 놓인 것은 갈림길 하나뿐이”(p. 272)었다는 것. 떠날 것인가 돌아올 것인가, 두 개밖에 없는 선택지 앞에서 엄마는 돌아오기를 선택했다는 것. 그렇게 ‘나’의 엄마가 되었다는 것.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자개장에 얽힌 또 다른 비밀을 알게 된다. 첫째, “엄마도, 엄마의 엄마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p. 271) 갈림길 앞에서 돌아오기를 선택했기에 지금의 ‘나’에게까지 자개장이 계승되어왔다는 것. 둘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개장은 정확히 앞서 말한 방식으로 “무언가 떠나지 않도록 보존하는”(p. 275) 물건이기도 하다는 것. 다시 말해 ‘나’의 안녕보다 ‘너’의 안녕을 ‘더’ 염원했던 여자들의 우정, 그 ‘자연스럽지 않은’ 마음이 자개장의 용도보다 신비한 그것의 ‘진짜 비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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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봤듯 함윤이의 소설에서 ‘우정’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너’와 ‘나’를 연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천사들(가제)」에서 ‘항아’의 시나리오 속에 등장하는 “천사”는 “관계에서 태어나”는 존재인데, 정작 천사를 만든 연인들은 “천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해서 그가 옆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애초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는 관계에 “미묘한 영향을” 끼치며 결코 적지 않은 힘을 행사한다. “연인을 졸졸 쫓아다니며 각종 이벤트를 벌”임으로써 “옅은 심경의 변화”(pp. 106~107)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시나리오의 등장인물은 ‘둘 (여자, 남자)’이 아니라 ‘셋(그리고 천사)’이다. 요컨대 함윤이의 소설에서는 ‘둘 (인물들)’만큼이나 ‘셋(죄책감과 우정 같은 마음들)’도 중요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함윤이의 소설에서는 늘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이 하나 더 있다. 쉽게 터지고 부서져버리는 사이다의 기포처럼 미약한 마음인 ‘그’는 내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너’와 ‘나’에게 속삭인다. “포기하면 안”(p. 117) 된다고. “다시 한번 생각”(p. 115)하라고. “너흰 나아질 거”(p. 116)라고.
어느새 갈등과 혐오마저 귀찮아져서 차라리 ‘손절’이 효율적인 방식으로 여겨지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관계를 붙들기 위해 애쓰는 ‘그’의 말들은 우스우리만치 순진무구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함윤이의 소설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약속하지 않은, 약속할 수 없는 마음들로 ‘너’와 ‘나’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그러한 연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하는 말, 즉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가 하는 말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포기하면 안 돼” “왜냐하면 너희가 날 만들었잖아”(p. 117)와 같은 말들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끈질긴 마음으로 우리 모두를 끌어당긴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천사들은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유리잔에 담긴 사이다의 기포처럼 솟아나고, 부글거리고, 끓어오르고, 부풀어 오르고, 반짝이고, 터지고, 엉겨 붙고, 나뉘어 떨어지고, 올라가고, 사라지고, 튀고, 스미며 ‘너’와 ‘나’의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p. 138)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와 ‘나’의 차례다. 함윤이의 소설이 그랬듯 보이지 않지만 ‘너’와 ‘나’를 연결하고 있는 천사들을 발견할 차례다.
- 1)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강가/Ganga」(『소설 보다: 여름 2022』, 문학과지성사, 2022), 「나쁜 물」(『문학과사회』 2024년 여름호), 「구유로(舊遊路)」(<문장웹진> 2022년 8월호), 「자개장의 용도」(『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천사들(가제)」(『소설 보다: 여름 2024』, 문학과지성사, 2024).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인터뷰: 함윤이×이소」, 『소설 보다: 여름 2022』, 문학과지성사, 2022, pp. 145~46.
- 3) 「인터뷰: 함윤이×이소」, 같은 책, p. 142.
- 4)도덕적으로 말해서, 어떤 사람이 특정한 어떤 일을 행하지 않았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실제로 어떤 죄가 있는 사람이 모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이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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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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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1. 비평의 입지 문학 용어로서 비평은 작품의 뜻, 작가의 기능, 어느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를 논의하는 작업이라 정의된다. 범박하게는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두루 쓰인다. 그 밖에 방법론에 따라 기술비평, 실천비평, 이론비평, 인상비평 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고, 에이브럼즈의 입론대로 모방론, 존재론, 표현론, 효용론 등 관점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웰렉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으로 그 양상을 대별하였다. 요컨대 문학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내재적 요소와 외재적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한 후 서술 및 평가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이 어떤 종류의 비평에서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면 비평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은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비평이란 위 기준에 의거해 접근된 하나의 결과이기에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전제한다. 전제된 기준은 중층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성과 수행성을 담보하기에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 담론적 성격이 지닌 자체의 곤란도 분명해 보인다. 비평 행위에 내재된 ‘평가’란 한 작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 가치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이래의 이론적 지평에 따르면 어느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제도적 관행을 통한 지속적 작용이다. 평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 활동과 관행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에 가깝다. 어떤 문학작품의 해석과 그 가치에 대한 경험은 상호 의존적이며, 양자는 특정한 가정 혹은 기대를 따른다.(프랭크 랜트리키아·토마스 맥로린 공편, 『문학 연구를 위한 비평용어』) 결국 비평 행위의 관건은 텍스트 구조는 물론 이를 둘러싼 문학사회학적 관계를 수렴하는 평론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세계에 대한 판단은 그 평론가의 입지 기반에 대한 재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형권 비평세계는 1998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에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경기도 안성 출신인 그는 충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때 지역의 중등 강단에 몸담았다. 이어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과정 중 평론 쓰기를 병행하던 그였기에 제도적 등단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제출한 원고는 충분한 내공을 체현하고 있었다. 당시 심사평은 세기말 위기의식에 빠진 시가 영상문화에 대응하는 현장을 균형적 감각으로 다가선 비평적 시각에 주목하였다.(『현대시』 1998년 7월호)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일군의 시인들을 다룬다. 이형권은 장르 의식의 확산과 초월, 도시적 일상성, 우울한 내면세계의 고백, 대중문화의 수용 등이 전통적 시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이라고 보았다. 그중 영상예술의 수용 및 변주를 시적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우로 이승하의 사진시, 하재봉의 컴퓨터시, 유하의 영화시 등을 꼽고, 그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개척하려는 이들 노력은 향후 시적 긴장의 영역을 개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반면 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진정성 차원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들이 예증하는 영상매체의 시적 전유가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 전망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은 향후 지난하게 펼쳐질 장르의 길항을 전조하기에 충분한 비전이었다. 이처럼 이형권은 문학의 본령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그 외부, 어쩌면 문학 장르의 타자성에 대한 시대적 응전 감각을 출발 단계부터 벼리어 온 비평가에 해당된다. 대개 이러한―문학의 장르론에 관한―입장이 취하는 포즈는 이론적 언어로의 무장이다. 문학이라는 범주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한 모더니티의 공재성(共在性)이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주된 관성으로 작동되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 영역을 포함하여 문학은 ‘literature’의 역어이자 제도적 산물로 생성된 것이었고, 이론적 내면화는 한국문학의 정체성 설정을 위한 필연의 수순이기도 했다. 한편 이형권 비평의 경우 이론에의 경사로부터 의도적 거리를 취한다. 이는 여러 지면에서 반복되어 온 비평적 입장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은 시의 정서적 깊이와 높이를 확보하여 시적 감동을 전문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넓히는 일”(『공감의 시학』 서문)이라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문학의 타자라는 분명한 성찰 대상이, 그리고 그 존재 의미를 구명하는 언어는 현학적 외장이 아닌 문학 본연의 공감과 소통 기제라는 입지가 초기 비평 단계로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2. 문학의 타자, 타자의 문학 이형권 비평세계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2006), 『발명되는 감각들』(2011), 『공감의 시학』(2017) 등의 평론집으로 집약되어 왔다.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에 연구서 성격의 다양한 성과물이 평론집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예지 『너머』, 『시와 시학』,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 역할이 주요한 문단 경력으로 꼽힌다. 꾸준한 연구 작업과 더불어 실천적 문단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외현이다. 오늘날 비평 행위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역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구조는 비단 한국문단만의 실정이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대학 교원으로 정착한 이후 평단의 참여에는 소원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형권은 중부권 거점 대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서울과 지역을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이어 온 실천적 사례라 평가할 만하다. 제도적 성과도 다양하다. 그의 저술 중 『공감의 시학』은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상의 대상 평론집이 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이형권 평론이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며, 한국 시문학이 마주하는 핵심 문제에 대해 정공법의 언어로 다가서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그는 이때 자신의 문학 여정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자전을 적었다. 나의 대표적인 평론집은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평론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독자와의 공감을 지향해 온 글쓰기의 결과물들이다. 가능하면 관념이나 이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혹은 관념과 이론마저도 문학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다. 나는 지금도 가장 어려운 작품도 가장 쉽게 비평할 수 있는 평론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평 언어, 나만의 비평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물음표로 출발하여 느낌표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심미적 개성과 인간적 진실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안성천에서 자란, 내 영혼의 자서전」, 『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이 회고에서도 비평적 입지의 방법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제로 내건 공감의 가치가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강조되었다. 독자적 언어와 이론을 향한 포부는 일견 무모하게도 들린다. 어느 장르보다 기존 시학적 지평을 전제로 성립되는 비평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와 이론의 신생은 비평보다는 또 다른 창작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형권 비평의 시각이 이른바 비평과 창작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은, 양방향적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형권의 시학적 탐구는 『미주 한인 시문학사 : 1905∼1999』(2020)라는 중요한 성과이자 비평적 변곡점을 낳았다. 그는 이 연구서로 인해 2021년 김준오시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형권 비평은 출발 단계부터 시 장르의 타자성 문제를 다루었다. 타자라는 주제는 이형권 비평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어어져 왔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서울 이외의 주변부 지역 문학도 일종의 타자”이며 “국외의 한인 문학도 타자의 문학”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다양성의 문학과 확장성의 문학”을 의미하기에 앞으로도 추구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였다.(『신생』 2021년 겨울호) 『미주 한인 시문학사』는 한국문단 내부의 타자성 영역을 최대 이민국이자 패권국이라는 외부로 확장하여 모색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2012년 상반기 LA에서의 방문교수 경험은 이형권 시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경계에 관한 비평적 모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평론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이 주목된다.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맥락 속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시의 형상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문학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심상지리를 구성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주 한인에게 모국어는 도구가 아닌 생존을 환기하는 의사소통적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현전하는 물성이자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에 비견된다. 이 글에서 주요 논거로 제시된 김병현, 배정웅, 오문강 등의 작품들은 디아스포라의 난관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의 동일시 욕망, 이주국 지리 환경과의 정서적 공감, 새로운 삶의 개척 의지 등을 재현한다. 이들 작품에 사용된 모국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실존의 영역을 증거하는 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같은 논의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쟁점 역시 분명하다. 대표적 문제가 이주국 한인문단의 분파적 속성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포함하여, 서정적 언어 구성물로서의 시작 경향이 주류 흐름으로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다. 치밀한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기 어렵다는 게 난관이다. 긴장 없는 자족적 시스템이 매너리즘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실정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중층적 문학 환경 역시 문제적이다. 이런 배경 위에 모국어의 소멸 위기이자 새로운 문학 언어의 개방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양립한다. 이형권은 이중언어의 문제 혹은 현지어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국문학의 매개로서 한국어라는 기능적 판단 외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제로서의 언어관에 입각한 견해로 보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언으로 마무리된다. 한인이 현지어로 창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인 문학은 한글 표기를 전제로 하여 그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한인 문학에서 한글 표현과 현지어 표현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곤혹스럽지만, 이에 대한 선택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국외에서 뿌린 한인 문학의 씨앗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인 혹은 한인의 문화가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나가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것이 비록 과거형이 될지라도, 발해의 역사가 분명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한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 『시작』 2022년 여름호) 물리적 경계 간의 거리가 해체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어’로 상징되는 글로벌 의사소통 기호는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위상은 선험적 가치가 되었다. 모국어라는 숙주의 해체는 디아스포라 같은 문학적 타자가 변주하는 또 다른 생성의 선을 개방할 것이다. 이형권 평론은 디아스포라 시인이 모국어를 통해 존재를 형상화하는 양상을 분류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의 제언은 문학의 타자성을 제도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방안, 다양한 언어와 한국문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3. 또 다른 감각 혹은 환상 이형권이 조명하는 비평적 타자의 영역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문단 경계의 확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을 재고하려는 이론적 모색 역시 초기 단계부터 지속되어 온 탐구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주제가 이른바 환상의 역학이다. 환상의 상상력을 집중해서 다룬 평론으로 「발명되는 감각들―현대시와 환상시학」(『발명되는 감각들』)이 있다. 이 글은 비평가 스스로에게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자리한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지면에서 자신의 대표 평론으로 이 글을 꼽았다. 「발명되는 감각들」은 현대시의 또 다른 주류 범주에 환상의 시를 올려놓은 동력으로 21세기 초의 젊은 시인군을 예시한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혹은 자의식적 시 쓰기에서 벗어나, 환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표출하는 동시에 시적 형식의 재구를 시도하였다. 환상은 단순한 도피나 유희가 아닌, 미적 전복과 시적 실험의 전략적 기제인 것이다. 이형권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요 결 다른 감각을 창조하는 에너지라고 보았다. 김행숙(귀신), 문혜진(메두사), 김민정(아이), 유형진(모니터), 장석원(낙타), 이민하(마네팅) 등의 도발적 이미지를 대표적인 환상의 장치로 거론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들이 현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전유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감동으로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된 시편들의 수용적 거리감은 실험적 외장의 포즈에 비례한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각의 발명보다는 소재주의적 실험 경향이 짙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형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문학적 진정성의 결여를 경계하였다. 이는 환상의 시학이 진정한 문학적 성취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파격에 수반되는 사유의 깊이를 구조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어서 이 글은 환상의 상상력이 폐쇄성과 섹트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역설한다. 환상은 기호로 재현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적 우회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서정성이나 진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기대지평에 어떻게 관계되고 소통하는지의 문제이다. 문학의 경계를 재구성하려는 이형권의 비평적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최근 사례로서 「리진: 로씨아 땅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하늘」(『시작』 2024년 겨울호)은 재러 시인 리진의 경우를 조명한다. 북한 정권에 저항하며 무국적자로 소련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 그의 시가 조국과 언어 정체성을 고수했던 흔적을 개관해 주었다. 이형권은 리진 시의 본질을 우리 언어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리진의 시적 형상이 재러 고려인들의 보편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관찰을 담고 있으며, 언어가 곧 민족을 잇는 정신적 뿌리라는 기존의 모국어 인식과도 연동된다.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존의 기반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모국어는 실체 없는 상징에 머물 수도 있다. 리진의 시가 제한된 독자층에만 읽혔다는 사실은 언어의 고립성과 함께 시적 단절을 지시한다. 이형권 비평이 집중적으로 수렴해 온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현황 속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형권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제도는 보다 정치한 장르론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또 다른 환상의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 이형권 비평이 전유하고 있는 시학적 개념으로서의 환상은 우리 시대의 자유를 사유하는 철학적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의 현학적 분석에 따르면 환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 논리를 보면, 무의식은 매끄러운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침입에서 비롯된 충격과 잔여이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증상(symptoms)’은 트라우마적 단절에 대처하는 방식이요, 그런 단절을 가리기 위한 형성물로 ‘환상(fantasy)’이 작동한다. 이처럼 지젝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자유 의지를 분석하는 기제로서 환상을 전유하고 있다. 현대의 이성은 실재와 같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자유가 존재 방식의 근원적 가능성일 때에도, 자아는 결정된 존재일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로서 미친 도박이자 자기 자신에 선행하는 위태로운 도약이 된다.(지젝, 『자유, 치유할 수 없는 질병』) 결국 주체는 그 자체가 객관화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 간극을 지양하고, 필연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상은 비롯된다. 동일성의 장르로서 시 역시 동종의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운 서정시의 미래를 보듬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이끈 양태가 곧 이형권 비평이 천착해 온 타자의 외연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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