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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학 | 2024년 1-2월호(제617호)

생활·노동·답사: 홑눈으로 읽기

허희 문학평론, 문화평론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계간 <세계의 문학> 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과 관련한 글쓰기, 학교에서의 강의, TV와 라디오 등에 출연해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살고 있다. 비평집 『시차의 영도』와 산문집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 『당신의 독자적인 슬픔을 존중해』, 공저로 『한강을 읽는다』를 냈다.

  시를 온몸으로 써야 한다는 널리 알려진 주장이 있다. 창작자가 아니라 해석자인 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자주 전유했다. ‘시는 겹눈으로 읽어야 한다.’ 이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아울러 살펴야 한다는 해석의 기본 태도이자, 시의 형식과 내용을 함께 검토하고, 나아가 시인의 의도와 정념 심지어 생애 등을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역사화된 시 연구가 아닌 동시대 시 비평을 할 때 시인의 의도정념생애를 염두에 두는 관점이 항상 바람직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기껏 저자의 죽음을 표명하고 텍스트 개념을 설파한 바르트 등의 노력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화된 시 연구가 아닌 한에서, 시인을 둘러싼 정보를 안다고 시를 잘 이해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때로는 시인과 출판사 등 부가적 요소가 시를 읽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된다. 그러기에 시 자체에만 착목하고 싶다는 열망 역시 생겨난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채 이 글에서는 시인과 출판사를 제외하고, 시집과 시의 제목만 언급한다. 이것은 홑눈의 서평이다.

 

*

 

(1) 숭고한 생활의 발견: 『노을은 어둠을 재촉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노을이라는 시의 해당 구절을 표제로 삼았다. “산 그림자 길게 눕고 / 고단하게 삶이 물든 / 고요함의 저녁 / 노을은 어둠을 재촉하지 않는다에서 화자는 생활의 숭고함을 표상한다. 더불어 황톳빛 붉게 물든 / 어머니의 풍경화를 찾아낸다. 고즈넉한 광경에서만 그러지 않는다. 「훔치다에서도 이 시의 화자는 엄마의 시간은 눈물의 시간이다.”라고 증언한다. “풀냄새 서러운 어머니의 손끝을 떠올리는 풀물」, “어머니의 뜨거운 피를 상기하면서 경계 근무를 서는 해안경비 초소등의 시에서도 어머니는 여러 양상으로 등장한다. 애절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의 마음이 독자에게 오롯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시집 전체에 투영된 어머니상이 의 어머니와 꼭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식을 향한 헌신과 인내로 치환될 수 있는 어머니가 있겠으나 그러한 어머니상만 시에서 되풀이되면, 어머니의 다채로운 면모를 경험한 독자로서는 이에 공감하기 쉽지 않다.

  그러는 한에서 이 시집의 장점은 어머니 시편에 있다기보다 직업 시편에서 찾을 수 있다. 직업 시편의 화자는 세심하고 따뜻한 눈으로 구두 수선공”·“용접공”·“시계 수리공등을 조명한다. 평소 세간의 주목을 받을 일 없는 노동자의 노동은 덕분에 독자에게 바싹 가까이 다가붙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시구들. “구두 수선공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 손가락 마디마디에 조여지는 삶의 무게 / 가죽을 뚫어 기필코 감당해야 하는 / 손가락 마디마다 바위처럼 눌어붙은 / 굳은 속살과 견고한 바느질 / 재봉틀보다도 현란한 / 물 한 방울 새지 않는 정교함의 손놀림”(「구두 수선공부분), “그의 몸에서는 불꽃 냄새가 났다 / 불꽃 위에 불꽃을 덧대어 / 조각난 시간을 때우는 남자 / 프랑켄슈타인의 꿰맨 얼굴처럼 / 철가면 눌러쓰고 / 태양보다 뜨거운 불꽃을 온몸으로 견디며 / 쇠를 녹이듯 영혼을 녹이는 그의 손끝”(「용접공 부분」), “시간의 볼트를 조이는 / 시계 수리공의 손은 겸손한 연장이다 / 그의 손을 거친 시간은 미래로 가는 기억의 지도”(「시계 수리공부분).

  다만 각 시의 말미에 이들의 노동을 긍정하는 단언들—“망치 소리에 흐려진 그의 난청은 / 다시 명확하게 세상을 읽는다.”(「구두 수선공부분), “녹슨 쇠를 녹여 바람의 옹이 하나 / 가슴속 뜨겁게 새기고 있다.”(「용접공부분), “시계 수리공은 마지막 이정표를 지나는 / 시간의 태엽을 힘주어 감는다.”(「시계 수리공부분)—이 지나치게 확고하고 단조로운 점은 아쉽다. 섬세한 서정은 딱 잘라 말하기보다는 주저하고 흔들리는 화법을 통하여 드러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까닭이다. 이 시집은 이외에도 코로나19의 세태를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일상의 면면을 시로 담아낸다. 그런 만큼 시선의 폭은 보편성을 확보하나, 시선의 깊이에서 입체성을 매번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구성하는 함축적인 묘사와 통찰이 이 시집을 빛나게 한다. 「가을 산 2」가 대표적이다. “봄꽃의 그리움으로 / 노을이 지면 / 가을 산은 멀리 / 초록의 생이 타는 / 한 송이 불꽃.” 이와 같은 선연한 이미지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2) 오늘날 노동시의 조건: 『이파리처럼 하루하루 끝도 없이

 

  이 시집의 발화 방식은 다채롭다. 대화체를 사용하거나, 글자 크기를 키우거나, 띄어 쓰기를 하지 않고 강조 표시를 하는 시구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라도 방언을 사용한 고백투의 시도 인상적이다. 이는 형식 실험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아니다. 이는 차라리 고달픈 삶의 구성체를 하나하나 분절하여 자세히 들여다보겠다는 화자의 의지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자연에서 지혜를 배우거나, 자연에 인생을 의탁하는 등의 행복한 서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먹고사는 일을 하는 고단한 현장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사건을 직시하는 시들이 중심에 놓인다. “걱정과 공포 사이에 무수한 하도급과 재하청이 있었지. (……) 어떤 죽음에는 명분과 명예를 부여하기도 하지. 나팔꽃잎처럼 뚝 떨어져 버린, 누군가의 부모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 세상 전부가 무너져 버린.”(「무너지는부분) 그런데 이 시는 오늘날 상황을 르포적으로 비판하는 데만 주력하지 않는다. “새집 줄게 헌 집이라도 다오.”라는 비탄은 동요 두껍아 두껍아가 반복 변주되는 가운데 제시되어 비극성을 아이로니컬하게 심화한다.

  『노을은 어둠을 재촉하지 않는다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노동을 부각하지만, 이 시집은 노동의 위대함이 아니라 노동이 어떤 조건 아래 폐색하는지를 기술한다. 가령 땀이 줄줄 흘러도 모자가 벗겨지면 계약이 해지될까 봐 / 아파트 구석구석 입주민이 원하는 허드렛일까지 않으면 // 법이 만들어지자 해고만 늘었다 / 법을 바꿔도 명칭만 바꿔 피한다”(「여름 우울부분)에서는 아파트 경비원이 어떠한 류의 생존 위협에 시달리는지 포착한다. 갑으로서 입주민이 강요하는 부당한 지시를 아파트 경비원은 거부하지 못한다. 법도 그의 편이 아니다. 무더위에 땀이 흘러도 함부로 모자를 벗어서는 안 되는 여름은 아파트 경비원에게, 그리고 이를 인지하는 화자에게 우울을 불러일으킨다. 겨울 역시 다르지 않다. 눈 내리는 새벽 재활용 봉투를 헤집어 유독 알루미늄 캔만 골라 담는 / 저 할매의 손끝을 바라보는 화자는 화이트 아웃’(white out)을 체감한다. 그가 원근감을 잃은 것은 날씨 탓만이 아니다.

  한편으로 이 시집에서 시에 대한 시, 메타시 성격을 내포한 어떤 어둠도 눈에 띈다. 강조 표시된 시구와 그렇지 않은 시구가 조합되어, 이 시는 따로 또 같이 시 쓰기에 대한 화자의 비판적 자의식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긴 밤을 지새우며 달빛 들이치도록 열어 두는 것 / 어떤 문장도 드나들 수 있도록 여백을 마련하는 게 / 목적도 맥락도 없이 아무 문장이나 끌어오는 건 아닐 텐데 (……) 그럴듯한 시작 메모로 시작해 / 행 갈이와 연 갈이, 부호와 각주를 등에 업은 / 참 시적인 문장을 정성껏 짜깁기한 시집 (……) 반복이 방법이 되기도 한다 / 방법이 시가 되기도 하지만 / 어떤 섭리 같은 걸 깨우친 양 / 행과 연을 좌표처럼 잘 다독여 가며 / 경계가 불분명한 문장의 주인이 될 거라면 / 그래라”. 겉으로만 보기에 대충 그럴싸한 시집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을 실천하려고 애쓴 흔적이 실제로 시들 전반에 녹아 있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단순하지 않게 이파리처럼 하루하루 끝도 없이는 비운의 나날을 메시지화 한다.

     

 

(3) 근대()사 현장 답사: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이 시집의 표제작부터 읽는다. “노랑부리백로가 여름을 나고 / 도요새, 노랑지빠귀 겨울을 난 뒤 / 저어새 새로이 둥지를 튼 / 노을과 썰물이 뒤섞이는 봄 갯벌 / 붉게 검붉게 혹은 금빛으로 물드는 / 가장 깊은 곳에 감춰둔 적막을 본다 // 매화 향기 남은 자리에 / 벚꽃 분분히 날린 다음 / 모가지를 떨군 동백꽃 / 흥건히 잠겨 흘러가는 실개울 / 수척한 빈산 노거수 그늘에 들어 /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더듬는다 // 재 너머 차밭에 연두색 눈엽 오르고 / 까마득히 사라졌던 기억 / 몸속 가장 깊은 곳에서 아련히 깨어난다 / 비어 있으나 차 있는 혹은 / 차고 비고 또 차고 비는”(「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전문). 화자는 새라고 통칭하지 않고 갯벌에 오는 날짐승의 이름을 각각 호명한다. 대상을 뭉뚱그려 환원하지 않은 채 존재의 개별성을 존중하겠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한데 봄 갯벌에서 새보다 가장 깊은 곳에 감춰둔 적막을 본다는 점에서 화자의 시각은 특별하다.

  나아가 그는 여기에는 없는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더듬는다”. 지금은 부재하지만 분명 있었던 사람의 자취를 잊지 않고 환기하는 소급 작용은 이 시집 전반을 관통한다. 소리 내어 웃다 간 사람, 혹은 소리 높여 울다 간 사람이 아닌,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화자가 끝내 기억하겠다는 다짐은 다양한 장소에서 실현된다. 이 시집의 화자는 대부분 여행 중이기 때문이다. “가난하지만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자 했던 / 사내가 얹혀살았다는 / 한 평 남짓 토굴 같은 집의 흔적을 찾아 서성인다 (……) 재개발 공사가 한창인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의 / 이 낯익은 외로움과 쓸쓸함은 / 그러나 조금은 우습고 무섭기도 한 / 이 맑은 슬픔은 / 이 먹먹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장춘에서 백석을 찾다부분). “북간동 명동촌 윤동주의 집에 왔다 (……) 죽는 날까지 한글로만 시를 쓴 청년이 / 이제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 되어 있다”(「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부분).

  이러한 시들에서 화자는 근대 유명 시인이 살았던 곳으로 가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더듬는다”. 당시 그대로 보존된 경우는 드물다. 세월의 흐름에 개발 논리와 역사 왜곡이 더해진 형태로 변질돼 있다. 그렇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강에서 버드 비숍을 만나다의 화자는 언명한다. “소박하지만 아득히 먼 기원, / 탁하고 유장하지만 거침없이 굽이치는 물줄기, / 장강에서 당신과 함께 혹은 당신을 찾아 / 나는 다시 격류할 것이다”. 이처럼 화자는 좁은 범주로는 한국 시사(詩史), 넓은 범주로는 한국근대사의 현장―「국경에서 용악을 만나다」‧「지신허 마을에서 최운보를 만나다」‧「아무르강의 붉은 꽃」·「김알렉산드라 소전을 답사하여 연관된 조각을 끌어모아 시로 재배치한다. 원대한 프로젝트다. 그러나 화자의 담대함과 무관하게, 우리 역사의 비통함 또는 거룩함과 공명하는 목적 있는 여행이 적잖이 부담스러운 독자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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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월간 현대시 김효숙 문화 보충물문화 텍스트문화 감수성그림기후 위기남성-언어성 착취몸의 식민지다중 감각시의 비판적 기능 2025
허희 끈의 감각, 금의 시선 ― 오은경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

한 권의 시집을 열어 하나의 세계로 진입한다. 시인이 세심하게 배열해 놓은 시의 지도를 따라 걷다 보면, 세계와 교호하는 내면 풍경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오은경의 세 번째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는 어떨까. 그 길의 초입에 그녀는 끈을 손에 쥐여 준다. 오은경은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에서 타자―외부와의 접점에서 개인이 느끼는 모호한 윤곽을 가늠해 왔고, 두 번째 시집 『산책 소설』에서는 산책자의 시선으로 다층적인 삶의 이야기를 포착하는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시집에서는 끈으로 상징되는 관계의 시작과 변용, 그 이후의 상태를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처럼 조망하고 밀착하여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나와 너 혹은 나와 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거리, 변해버린 감정의 결이 포착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서시 「공중제비」와 바로 그 뒤를 잇는 「끈」, 시집의 마지막에 위치한 「두 눈으로」를 경유하여 살펴보려 한다. 이건 미래이고, 손에 잡힌 건 정체불명의 노끈이다. 미래가 노끈의 형태라면 미래란 얼마나 작고 가벼운가? 아니, 미래란 왜 이렇게 헐거워져버렸을까? 작은…… 미래, 꿈꾸던 내 모습이 아니었어. 나는 나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미래에는 당연히 나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는데, 어디에도 나는 없었네. 그렇다면 지금이 미래가 아니라는 소린가? 잠깐 의심했지만, 노끈이 되어버린 미래는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노끈을 사용한 적 없었고 무언가를 묶거나 무언가에 묶인 적 없었다. 노끈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노끈은 바람에 흔들렸지만, 떠내려가지 않았다. 땅에 단단히 박힌 상태였다. * 아무도 끈을 사용하지 않았다 ― 「공중제비」 전문 「공중제비」의 미래는 시간의 저편에 아득하게 존재하는 가능성의 영토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고 없이 도착한 현실이자, 감각할 수 있는 사물로 손안에 놓여 있다. 이 시의 미래가 당혹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정체불명의 노끈”이기 때문이다. 원대한 포부나 반짝이는 약속 같은 기대를 배반한 미래는 값싸고 흔한, 아무렇게나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질감을 가질 따름이다. 미래를 손에 쥐고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정녕 그것이 미래가 맞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섦과 마주하는 것은 ‘나’에게나 독자에게나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갑자기 공중제비를 넘는 것처럼. 공중제비는 화려한 도약이자 제자리를 맴도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순간적으로 세계를 거꾸로 볼 수 있지만, 이내 이전과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착지하는 운동. 괄호 안에 담긴 ‘나’의 독백은 어지러운 회전을 중계한다. 과거의 예상(“나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는데”)과 현재의 발견(“어디에도 나는 없었네”) 사이에서 “그렇다면 지금이 미래가 아니라는 소린가?”라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짧은 의심을 품는 일. 이는 공중제비의 정점―세계가 거꾸로 휙 지나쳐 보이는 면면과 유사하다. 그러나 역전은 길지 않다. 손으로 만져지는 노끈을 체감하면서 이내 현실로 착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지각이 뒤흔들린 ‘나’는 도무지 노끈으로 구현된 눈앞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노끈은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릴 만큼 가볍지만 질기게 현존한다. “땅에 단단히 박힌 상태”라는 시구를 보라. 동시에 “아무도 노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를 겸하여, 노끈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겨진다. 그렇게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노)끈은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끈을 잡아당겼다. 흙먼지가 일었다. 황사였다. 풀 몇 포기 마른땅에 나 있었다. 풀이 아니라 허물 같았다. 동물 사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냄새도 없었고 날개 달린 것들, 파리나 독수리, 참새 떼도 나타나지 않았다. 예견된 일이었거나 전에 한 번은 겪어본 일 같았다. 지금, 내 손은 핏기 없이 창백한데 이렇게까지 당길 이유가 없었다.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여기가 아닌지도 몰랐다.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통행금지 구역에 내가 와 있으며……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다. 수풀 우거진 배경은 기억에 없었다. 여름, 풀독이 오를까 봐 걱정되었는데 백구들이 논밭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지가 먼저 강아지들 쪽으로 향했다. 철책도 없는 논밭, 지난 계절의 벼와 새 떼, 메추리를 날려 보낸 다음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백구와 토끼를 구분하지 못했다. 수풀 사이사이 토끼가 숨어 있다는 것도. 전부 수지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 있었다. 내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바깥은 위험하며 나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고 했다. 기다리라고 말했던가? 하지만 시간을 일러주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는지, 아니면 내가 찾으러 가면 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수지는 어디를 간다고 했지? 어디에 있지? 내게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 손바닥에는 실금 같은 주름이 얽혀 있었다. 손은 소금빵 같았다. 먼지와 피가 달라붙어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끈을 당겨야 했다. 끈을 당길 나머지 손이 필요했다. 팔은 바게트 같았다. 끈을 힘주어 당길 필요는 없었다. 잡고 있기만 하면, 놓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 나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 끈은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 「끈」 전문 이 시의 끈은 ‘수지’와 연결된 기억의 매개체다. 「공중제비」에서의 시제가 사적 서사로 전환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헐거웠던 노끈은 더 질긴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러한 끈을 잡아당겨 마주하는 것은 숨 막히는 “흙먼지”와 “황사”뿐이다. “허물” 같은 풀이 돋아난 건조한 땅. 사체를 처리할 “파리나 독수리, 참새 떼도” 보이지 않는 황량함은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을 암시한다. 생명의 역동성뿐만 아니라 죽음의 자연스러운 과정마저 정지된 상태는 한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기억의 복잡한 층위를 드러낸다. 그 중심에 수지가 있다. 수지는 “내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통제라기보다 불안에서 비롯된 과잉보호에 가깝다. “바깥은 위험하며 나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던 수지는 위험이 제거된 안전한 장소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제 수지는 찾을 수 없다. 이 시의 후반부는 세계에 내던져진 ‘나’의 신체가 어떻게 감각되는지 기록한다. “먼지와 피가 달라붙어 있었”던 손과 팔은 “소금빵”과 “바게트”로 비유된다. 무력함 속에서 ‘나’는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나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라는 고백에 있다. 이전까지 ‘나’는 수지가 만든 규칙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되었으나, 규칙의 제정자가 수지에서 ‘나’로 바뀐 까닭이다. “잡고 있기만 하면, 놓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최소한의 머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이 미래를 방기하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라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 손으로는 미래를 단단히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과거와 이어진 현재를 어루만지면서 ‘나’의 시선은 천천히 바깥을 향한다. 무엇을 “두 눈으로” 응시하는 것일까. 유리의 조각난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빛이 전부였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느라 세상을 분간할 수 없었어. 세상에는 너도 있다, 통유리로 된 복도 바깥에 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너를 발견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바로 이곳이 처음이기 때문 아닐까? 다른 말로는 길 잃음. 헤맴, 너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었을 때 진짜 즐거웠는데. 안심되었으니까. 그때는 세상이 미로 같았고, 너와 나는 퍼즐 조각 같았지. 한 번도 바깥에 나가본 적 없는 것처럼. 자꾸만 날씨를 상상하고 싶어져. 그리고 깨닫고 만다. 떠난 것은 네 쪽이라는 것을. 적어도, 너와 둘일 때는 멈춰 있었던 적이 없고 내가 복도에 누워 잠들었던 적도 없지. 빛이 이렇게나 밝고 아름다운데 굴절되는 만큼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 ― 「두 눈으로」 전문 ‘나’는 “통유리로 된 복도” 안에 있고, 그 너머에 “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내가 나갈 수 없”기에 “너를 발견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다. 볼 수는 있으나 가닿을 수 없는 유리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 시는 ‘나’와 “너”를 포함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양자의 변모 양상을 되짚는다. 세상이 방향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았”을 때,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퍼즐 조각 같았”기에 길을 잃지 않았다. 길을 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헤맴, 너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었을 때 진짜 즐거웠는데. 안심되었으니까.” 그런데 “너”를 떠나보낸 뒤 ‘나’는 진짜로 길을 잃는다. 미로를 즐겁게 탐험하던 동반자가 사라졌으니, 세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돈으로 뒤바뀐다. 이에 ‘나’는 “굴절되는 만큼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라고 서술한다. “금”은 “너”와의 지난날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영원한 필터가 되었다. 필터는 이미지를 왜곡한다. 아름다운 “빛”도 그러한 균열을 통과하면서 휘어서 꺾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금”은 선명히 드러난다. 추억을 떠올리는 행위가 행복이 깨진 현재의 상처를 아프게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눈으로」가 응시하는 삶의 이면이다.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한쪽 눈으로는 환했던 기억(“빛”)을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금”)을 같이 바라보는 일이다. 두 개의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은 관계의 실패에 대한 뼈아픈 기록만은 아니다. 한 관계가 남긴 흔적을 자기 일부로 수용하고 이후의 나날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태도다. 외면하지 않기는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규범과 통한다.

월간 현대시 허희 오은경둘이 거리로 나와현대시얽힘서평 2025
성현아 읽는 자들의 에파누이스망 ― 이주란, 『겨울 정원』(문학동네, 2025년 봄호)

 매체론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월터 옹Walter J. Ong은 자신의 글 「The Writer's Audience Is Always a Fiction」에서, 낭독자에 의해 구술되는 소설을 듣고 향유하던 이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서술된 소설을 묵독하게 된 독자는 지속적으로 허구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독자가 인물의 시선을 따라, 작품을 읽을 때 머무는 실제 공간과 무관한 소설의 시공간에 자기를 위치시키며, 작가가 맡긴 역할을 스스로 연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다지 어려운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소설 읽기란 실상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복합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렇다면 쓰기-읽기의 과정이 보편화된 현시대에서의 소설은 독자가 인물에게 온전히 이입하여 그의 몸으로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지금의 문학장에서 소설에 기대하는 바는 변화하는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의미화하고 다양한 인문학적 질문을 창출하는 것일 테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소설이 갖춰야 할 근본적인 미덕은 내가 아닌 타자의 삶에 몰입하게 하여 이해의 폭을 넓힐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좋은 소설은 독자 한 명 한 명에게로 다가가서 그들을 각자가 감응의 기쁨으로 충만히 개화(開花)한 상태인 '에파누이스망(épanouissement)'으로 이끈다. 이주란의 「겨울 정원」은 그 역할을 너끈히 해낸다. 촘촘한 의미화의 그물로부터 매끈히 달아나는 이 소설은 따라 읽는 이들이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중심인물인 '혜숙'으로 머물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진정으로 허구적인 독자가 되게 한다. 화자인 혜숙은 육십 세 여성이자 칠 년 차 청소 노동자이며 소설가인 '미래'의 엄마다. 중졸인 그는 교양 있고 자기 취향이 확고한 이들을 선망하지만, 자기 일을 성실히 해내는 데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때때로 주눅 들기도 하나 결코 비참해지지는 않는 혜숙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풍부한 지식과 균열을 포착하는 섬세함을 지닌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꿋꿋이 살아간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혜숙의 태도는 단순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욕을 주고받는 사회에서도 따스한 시선을 유지하고 주어진 일상을 정성스레 살아낼 수 있게 하는 든든한 토대이기도 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혜숙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간결한 문체이다. 이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조화를 이룬다. 혜숙이 내뱉을 만한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조합된 문장은 그와 완전히 일치된 채로 사건을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게 돕는다.  청소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가 소설에 등장할 때면 계급성과 고용의 불안정성, 젠더 위계의 문제가 두드러지곤 하는 데 반해, 이주란의 소설은 그러한 문제들이 도식적으로 나뉘지 않는 현실의 다면성을 담담히 그려낸다. 그렇다고 부당한 고용 방식을 낭만화하지는 않는다. 고용 당사자가 재계약 여부를 알 수 없는 "뉴스에 나올 법한" 불합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계획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와 진짜. 와 세상에"와 같은 외마디 감탄사로 반응할 수밖에 없음을 핍진하게 그린다. 이주란은 다양한 직군과 직함을 지닌 이들이 갈등하는 자극적인 모습을 전시하는 대신, "전부 똑같은 계약직"이기에 서로 도우려고 하는 이들 틈에서 혜숙이 자기 일을 잘해내기 위해 성실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쓰레기장에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버려놓을 때도, 혜숙은 참는다. 어디다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단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매일을 살아내려면 매번 분노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녹록지 않은 삶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독자들은 그녀가 단순하다기보다는 "단순함이라는 개념에 성실"하려고 노력해온 사람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엇이든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라며 복잡성을 강조하는 딸 미래 역시 "자주 충분히 단순하다"는, 그 입체적인 모습까지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는 혜숙을 따라, 우리는 꽃이 지고 애인이었던 '인환'마저 떠난 텅 빈 정원을 쓸쓸히 바라보게 된다. 혜숙만의 만개(滿開)를 바라는 심정으로.

계간 문학동네 성현아 현실의 다면성청소 노동자사랑모녀 서사이입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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