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2025년 여름호(제150호)
없지만 있는 : 박선우, 『어둠 뚫기』(문학동네, 2025) / 김채원, 『서울 오아시스』(문학과지성사, 2025)
1. 엄마 이야기는 반칙인가
동료들과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이따금 어머니에 대해, 진부하고 문제적이지만 또 있을 법하고 유려하게 그려낸 작품들을 보면 난감하다. 이른바 ‘엄마 이야기’가 갖는 정동적인 파급력은 작품의 정당한 미학적 평가를 돕는가, 방해하는가. 그 정동이 비단 작가 혼자 만든 게 아니라면 이는 전략적 수단인가, 반칙인가. 어머니와의 경험 앞에서는 당사자 아닌 사람이 없지만, 한 사람의 여성을 어머니로 그려내는 일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합의된 여러 규범이 작동한다. 그 행위는 어머니라서, 어머니임에도 그러하다는 식의 인식이 따라붙는다. 한편으로 규범은 서사를 향유하는 독자들의 이해와 몰입을 돕고 공통 감각을 비교적 빠르게 형성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배우 염혜란과 문소리가 연기한 ‘엄마’들은 산업화 시기를 다룬 작품이 으레 그렇듯 억척스럽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를 포함해) 그토록 많은 시청자를 단시간에 울릴 수 있었다.
어머니를 서사화하는 일은 그만큼 쉽고도 어렵다. 사실 어머니를 둘러싼 공통 감각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재생산해온 문학의 역사에서 어머니는 그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은 강한 점착력을 지니며 다각도로 전형화되어왔다. 어머니는 이제 자애롭거나 폭력적이고, 가난하거나 사치스러우며, 안쓰럽거나 징글징글하고, 아프거나 팔팔하며, 무성적이거나 문란하다. 이러한 온갖 어머니의 각본이 그 나름의 색채를 띠는 것은 역시 그 구체성과 역사성 덕분이겠지만 그 특이성이 보편으로 전유될 가능성이 유독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새롭게 말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에 가까운가?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전형과 규범에 머물 수밖에 없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어머니는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말해진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가부장 서사가 급속도로 인기를 잃은 것과 달리 어머니는 거듭해서 발견되고 발굴되어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어머니 서사의 지속 혹은 확장에 대한 메타적인 분석 그리고 여성 인물들의 성장과 각성 중심의 여성 서사 플롯을 벗어난 어머니 서사가 가능한지 묻는 일이다. 두 편의 소설을 통해 그 가능성을 짧게나마 살펴보려 한다.
2. 엄마를 참조하는 남성의 자기 말하기
박선우의 『어둠 뚫기』는 37년간 동거를 해온 게이 아들과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책에 함께 수록된 문학동네소설상 심사평에서 몇 명의 심사위원이 언급했듯 한국 문학에서 청년 퀴어와 엄마의 구도는 이제 낯설지 않다. 멀게는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민음사, 2017)나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에서부터, 최근 발표된 김봉곤의 「기록적」(『문학과사회』 2023년 겨울호), 임솔아의 「금빛 베드 러너」(『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까지 몇몇 소설이 엄마의 질병과 노화를 지켜보며 돌봄의 문제를 고민하는 퀴어 자녀의 이야기를 다뤄왔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청년들이 더는 엄마를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못하고/않고 스스로 돌보는 일반적 현상으로도 읽히지만 퀴어 청년의 경우 엄마와의 관계가 갖는 상징성은 그보다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재생산 노동을 담당했던 엄마와 재생산 담론에서 배제된 퀴어 자녀 사이의 대립 구도나, 자식의 동성애를 마땅히 알아보거나 ‘고치지’ 못한 데에 죄책감을 느끼는 양육자로서의 엄마의 위치, 두 사람이 노동자 혹은 주거 취약 계층으로서 보이는 상호 이해 등의 주제를 앞서 말한 소설들은 정교하게 다뤄왔다.
이 소설은 얼핏 보면 그런 주제들과 멀지는 않다. 화자인 ‘나’는 도통 맞지 않는 엄마와의 동거를 그만둘까 하면서도 서울의 집값이나 혼자 살게 될 엄마를 생각하며 망설인다. 평생 미싱사로 일해왔던 엄마는 코로나 이후 직장이 폐업하면서 일을 관뒀는데, 엄마가 몇 해 전부터 보청기를 끼기 시작하며 경증 장애 판정을 받자 ‘나’는 새삼 엄마의 보호자가 된 것에 부담과 불편함을 느낀다. 엄마는 ‘나’가 돌이 막 지났을 무렵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로 오랜 시간 ‘나’의 보호자였지만 어느 모로 보나 ‘나’를 잘 보호했다고 할 수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나’의 커밍아웃을 엄마는 제대로 듣지 않고 방에 던져놓았으며 성인이 된 ‘나’의 우울증과 과수면 상태를 애써 못 본 척해왔다. ‘나’는 그런 엄마의 방치와 방어가 어떤 맥락에서 일어난 것인지, 어떤 삶에서 비롯된 대응 방식인지를 모르지 않는다. 엄마는 스무 살에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한 뒤로 낮에는 재봉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안일을 하는 삶을 줄곧 살아왔다. 자식의 커밍아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나,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되어가는지와 같은 문제는 엄마의 삶에서 중심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관심은 단순히 엄마를 아는 데에 있지 않다. “물론 이제는 안다. 엄마가 왜 그런 식으로 대응했는지를…… 이해한다기보다 그냥 안다”(p. 72). 이 소설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앎이란 하나의 행동이나 사건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그 행동과 사건을 겪어내는 한 존재를 설명하는 일이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와 엄마 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었다”(pp. 13~14). 엄마에 대한 이해는 사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다. ‘나’를 부정하는 엄마를 사랑하는 ‘나’,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나’,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이로 살아가는 ‘나’ 말이다.
『어둠 뚫기』가 기존의 퀴어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지점이다. 이 소설은 나를 아직 모르는 ‘나’의 무지와 불확신을 놀랄 만큼 솔직하게 꺼내놓는다. 이 일인칭 화자는 게이인 ‘나’가 너무도 잘 알고, 알 수밖에 없는 것들을 쓰는 게 아니라 ‘나’가 모르는 것을 말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무지는 꼭 과거 ‘나’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기에 이 방식은 성장소설과도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소설은 ‘나’가 지금 왜 소설을 쓰는지, 왜 이런 사랑을 하는지, 그 나이 먹고 왜 아직도 엄마와 같이 사는지와 같은 물음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답이 되지 않는다. 원인관계를 서술하는 박선우의 문장들은 “추측건대” “이건 내 생각인데” “~것 같다”와 같은 단서를 달며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정체성에 대한 불확신과 혼란이 퀴어에게 얼마나 자주 개입과 치료의 근거가 되어왔는지를 생각하면 이러한 조심성은 차라리 용감하다. 정신분석의 언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소설의 ‘나’가 털어놓는 증상과 기억을 곧장 인과관계로 엮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눈여겨본 것은 소설에서 ‘나’ 자신을 말하는 일과 엄마를 말하는 일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꼴렸”던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달라는 ‘나’에게 엄마는 너는 원래 이상하다며 ‘나’를 방에 가둔다. 엄마의 이 답변과 행동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나’를 ‘휘게’ 했고, ‘나’는 어쩌면 “그런 나로 인해 엄마 역시 조금은 휠 수밖에”(p. 59)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나’는 다시 엄마에게 자신은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엄마는 여전히 ‘나’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설명할 수 없지만 다른 이야기를 한다. 엄마가 연탄불을 피워놓고 죽으려 했을 때 너는 나를 마지막으로 살린 사람이었다고(p. 207). 가장 가까운 타자로서 당신의 삶은 내가 모르는 나의 삶을 이미 포함하고 또 구성한다. 때로 엄마는 어머니라서 그 구성에의 책임을 과도하게 심문받기도 한다.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형이 엄마를 탓하듯(혹은 탓한다고 엄마 스스로 생각하듯) ‘나’ 역시 불행 앞에 서면 엄마를 탓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이는 내 삶의 존재 방식을 내가 다 책임질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불행과 사랑을 맞닥뜨리고 비껴가는 데는 우리의 의식 바깥의 것, 정확히 말하면 타자의 몫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나’로서는 자기 이해의 실마리가 된다.
이 연결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엄마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엄마로 대표되는 주변 여성들의 여성성은 게이인 ‘나’의 타자성을 해석하고 설명할 언어가 된다. 군대, 첫 직장인 증권사, 예비군 훈련소와 같은 남초 집단에서 이성애자 남성들의 문화에 어울리지 못한 그는 늘 집단의 멸시와 위협을 받아오곤 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며 강화되는 남성성을 거부하는 ‘나’는 종종 여성과 동일시되는데, 게이 남성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또래의 기혼 남자들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충족되지 않는 남성성을 ‘나’를 통해 확인받고, 콘돔 없이 강제 삽입을 시도한 남자는 강간으로 신고하겠다고 하자 “별 미친년이”(p. 144)라며 탄식한다. ‘잘 주는 착한 년’에서 ‘미친년’까지,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나’와 동일시되는 것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거부해온, 성적으로 지배당할 기회를 잘 주거나 못 주는 것으로 정해지는 정체성의 꼬리표들이다.1) 요컨대 ‘나’에게 여성성은 ‘나’를 상처 내고 취약하게 하는 것이지만, ‘나’의 경험을 발화하고 주변의 여성들과 동일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에서 엄마를 말하는 방식이 꼭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대상화’”2)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확실히 엄마는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성을 보장하기 위해 타자화되는 대상도, 미처 극복되지 못한 유년기 욕망의 대상도 아니고 ‘나’가 아버지-남성들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참조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자신의 여성성이 엄마의 여성성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엄마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에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엄마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그것은 여성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말해져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참조가 불가능한 영역을 남겨두는 것은 ‘나’에게 어떤 굳은 믿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엄마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식이어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고이 간직하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p. 161). 바로 앞에서 ‘나’가 엄마와 “적잖이 다르면서도 닮았다는 것. 서로 유사하면서도 유별난 데가 있다는 것”(p. 160)을 깨닫는 장면이 체념이 아니라 안도로 읽히는 이유다.
3. 규칙을 벗어나는 규칙의 글쓰기
김채원의 첫 소설집 『서울 오아시스』는 『어둠 뚫기』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서술된다. 박선우의 소설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노선들을 조심스럽게 더듬어나가는 글쓰기라면 김채원은 그 어떤 ‘자연스러운 길’도 단호하게 거부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첫 번째 작품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에 등장하는 동우, 석용, 성아 세 사람의 행로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규칙의 이탈이다. “사진 찍을래?” 물어보는 석용의 질문에 동우가 “아니”(p. 9)라고 대답했음에도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자판기 사진을 찍고, 늦어서 미안하다는 둘의 사과를 성아는 받지 않는다. 이러한 이탈은 이들이 종일 거니는 공간 도처에 존재한다. 비가 온다고 했던 일기예보는 맞지 않고, 예약자가 있는 우버 택시는 다른 손님을 태운다. 서로 하는 농담은 먹혀들지 않고, 잘 안 죽는다 해서 산 식물들은 노랗게 색이 변해 있다.
왜 이들의 세계는 정해진 규칙을 이토록 거부하는가? 이 소설에서 사실 가장 변칙적인 것은 이들의 행로 그 자체다.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이 아닌 보통날”(p. 14)은 이들이 새벽 일찍 친구 유림이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으면서 보통이 아니게 된다. 보통의 각본이라면 유림이 안치된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야 하겠지만, 세 사람은 유림이 살던 원룸의 물건들을 정리하기로 하고 그마저도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쓴다. 걷다가도 유림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공간—농구대나 수영장의 난간—까지는 가지 않는다. 유림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들은 서로 하지 않는다. 마치 그렇게 하면 유림이 난간에서 뛰어내리지 않은 다른 세상이, 유림의 죽음을 모르는 다른 기억이 존재하게 된다는 듯이.
소설집을 이루는 여덟 편의 소설은 주변인을 자살로 떠나보낸 뒤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시점에서 느슨하게 엮고 있다. 자살 유족 또는 자살 생존자라고도 불릴 이들의 이야기에서 망자는 같은 사람일 수도,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빛 가운데 걷기」에는 딸이 자살로 죽은 이후를 살아가는 노인과 손녀가 나온다. 자살이라는 돌연한 죽음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로잡을 기회의 상실이기도 하고, 예측과 실행/방지로 이뤄진 일상의 질서가 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엄마가 죽은 뒤로 아이는 긴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거리에서 자전거를 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질서의 중단은 증상일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죽음을 대하는 이들의 일관된 대응으로도 보인다. 자살은 죽음의 방식이지 원인이 되지 못하고, 사인(死因)을 설명할 이의 부재는 남은 이들이 무한한 설명을 떠안고 살아가게 만든다. 소설이 인물에 대한 부연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일종의 심리부검3)처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아이의 엄마를 보호 병동에 있던 「서울 오아시스」의 엄마나 자전거를 탄 채 차도에 달려들어 사망한 「외출」의 엄마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엄마는 왜 하필 차도에 뛰어들었나? 엄마는 왜 병원의 ‘병자’가 되었나? “그런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의 발생처럼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을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곤 하듯이 여기저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서울 오아시스」, p. 83).
그러나 ‘아무 상관도 없을 일들’의 상관을 설명해야 하는 누군가는 망자와의 관계망에 특별히 더 붙들려 살아간다. 이를테면 엄마의 병과 죽음은 우연히 생긴 ‘나’를 지우지 못한 데서 출발했고, ‘나’가 학교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다 엄마의 죽음 때문이라는 이야기. 죽음의 앞뒤에서 조건과 결과가 되는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사 바깥의 사람들을 안도시킨다. ‘나’의 외삼촌이 실종된 날 우연히 외삼촌의 휴대폰에서 병원 번호가 나오자 이웃 사람들은 삼촌의 행적을 엄마의 병과 엮어서 설명하고(「서울 오아시스」, p. 74),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엄마가 죽은 것을 안 뒤로 더는 오전에 따로 전화를 걸어 아이가 왜 이런 문제적인 행동을 하는지 노인에게 묻지 않는다(「외출」, p. 188). 변칙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된 세상은 재빨리 원상태로 돌아가 다음의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목표 지점을 향해 이동하고, 정원을 가꾸고, 제대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길게 쓰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남은 이들 역시 세상과 같이 그 규칙들을 따라가고자 한다. 살기 위해서, 아니 살리기 위해서. 노인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시간에 맞춰 데려온다(「빛 가운데 걷기」). 딸은 엄마로부터 화분을 키우게 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서울 오아시스」). 그러나 화분은 병원에서 남을 해칠 수 있고 또 엄마는 양손을 마음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므로 편지에 씌어진 엄마의 욕망은 이뤄질 수 없다. 질서를 잃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규칙적인 생활과 인과적인 설명은 이들의 질서를 돌려놓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세상이 강조하는 자연스러운 순리 속에서 이들은 언제 실종되거나 결석하거나 감금되거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 순리를 벗어나 살려고 할 때, 세상은 이들에게 다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한다.
[……] 더는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더는 돈을 지불해가며 비굴하게 꿈도 없는 긴 잠을 사려고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누군가 묻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도록 인과를 생각하고. 그런데 어째서 증명해야 하나 내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어째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증명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 (「외출」, p. 198)
살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은 살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병원을 나와 거리를 걷고 허깨비를 보고 술을 마시고 꿈을 꾸는 김채원의 인물들은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살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또는 다른 것처럼 보이는 그러니까…… 남의 눈을 속이는”(p. 205) 허깨비와 살아가는 방법을 말이다. 「럭키 클로버」의 자영은 술에 취한 동료들과 함께 자두 농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구도 자영의 농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자영은 엄마가 남긴 농장을 가꾸고 엄마 대신 자두나무를 키운다. 농장에는 농장을 지키는 여덟 명의 클로버 병정이 있고 이들은 불시에 나타나 자영을 돕거나 돕지 않는다. 이들은 이들만의 일과가 있으므로 자영은 그들에게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장난에 불과한 걸까? “자영에게는 그것이 중요했고, 그 중요함은 선했다. 그리고 그 선함이 때때로 자영을 구해낼 수 있었다”(p. 173). 가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종교와 같은 어떤 보편적인 윤리보다도 주체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다. 자신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는 인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채원의 인물들은 규칙을 벗어나는 규칙, 언어를 속이는 언어를 만들면서 터벅터벅 걸어 나간다. 이런 이탈적 행로에서라면 엄마는 이들의 보행을 중단시킨, 언어를 앗아간 사람이 아니라 “걷는 법을 알려준 사람”(「빛 가운데 걷기」, p. 43)이고 암호를 알아듣는 사람(「서울 오아시스」, p. 82)이다. 부재나 결핍으로 설명되는 사람이 아니라 설명을 무한히 증식시키는 사람이다.
박선우의 소설처럼 김채원 역시 ‘나’(대체로 여성)를 서사적 존재로 설명하고 정립하는 데 있어 엄마와의 연속과 분리가 문제가 됨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실의 사건 이후, 엄마와 엉켜 있는 '나'의 상태를 바라보고 언어화하는 그의 방식은 박선우와 매우 다르다. 후자가 서사를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 탐색하는 산문의 방식이라면 전자는 서사를 부수적인 것으로 무력화하는 시적 혹은 유희적인 공간을 구축하며 우리에게 그곳에 ‘없지만 있는 것처럼’ 남아 있는 엄마 이야기의 가능성을 전한다. 이토록 다른 ‘나’들을 ‘이해 불가한’ 삶에서 ‘있어 마땅한’ 삶으로 옮기는 한 가지 언어로서, 일종의 규칙(혹은 반칙)으로서 어머니가 있는 거라면, 어머니라는 타자는 더 이야기되어도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 1) 이를테면 남성에게 섹스는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 섹스는 좋거나 싫은 것이라는 권김현영의 말을 들며, 정희진은 섹스를 잘하거나 못하는 여성은 언제나 ‘걸레’와 같은 낙인의 대상이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p. 95).
- 2) 오혜진, ‘수상 작가 인터뷰’, 『어둠 뚫기』, p. 250.
- 3) 자살자의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인의 진술과 기록을 검토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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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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