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계간 창작과비평 | 2025년 여름호(제208호)

분투하는 마음과 서사의 신비 ― 백수린 『봄밤의 모든것』(문학과지성사, 2025)

김나영 문학평론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등단. 2023년 평론집 『말과 말 아닌 것』(문학과지성사) 출간. 현재 반연간지 『쓺』(문학실험실) 편집위원,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조교수로 재직중.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25)의 첫 문장(「아주 환한 날들」 9면)이다. 생각해보면 저 문장은 이 책에 묶인 백수린의 소설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요청 같기도 하다. 가령 혹시 당신은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처럼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은 물론 피붙이의 마음 또한 방치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지, 그로 인해 뒤늦게야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과 자식의 마음을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닌지를 묻는다. 소설 「흰 눈과 개」의 화자처럼 자신과 닮은 가족이 마음을 몰라주어 억울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힘들어하다가도 우연히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운 풍경을 함께 마주하며 과거의 상처를 품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들은 분명 부모세대를 향해 쓰이지만 교감에 참여하는 자식세대를 향하는 물음으로도 보인다. 

 물론 백수린의 소설이 가족을 둘러싼 갈등과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의 소설은 마음의 바깥에서 마음의 형성에 간섭하는 어떤 현실의 압력을 넌지시 심어놓는다. 왜 어떤 마음들은 차가운 현실 앞에 감상적이라는 말로 폄하되는지, 어째서 종(種)과 국적 같은 경계를 넘어선 관계에서 마음을 더 쉽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는지. 결국 백수린의 소설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가 거주하는 세계의 역사와 개인의 삶의 기록을 더불어 볼 수 있게 된다. 그밖에 또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작가의 얼굴을 마주보러 가며 나의 마음은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분주했다. 


감정의 서사학


 2011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니 백수린은 올해로 15년차 소설가다. 최근 출간한 『봄밤의 모든 것』은 네번째 소설집이고, 산문집과 역서를 빼더라도 중・장편을 포함해 일곱번째 책이니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권의 책을 발표한 셈이다. 이렇게 꾸준히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궁금했다. 먼저 『봄밤의 모든 것』을 낸 소감을 물어보았다. 


2023년에 낸 첫 장편소설(『눈부신 안부』 문학동네)을 쓰고 나서 제가 십여년 동안 다룬 주제와 관심들을 한데 응축해 모아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작은 문 하나가 닫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봄밤의 모든 것』에 실린 단편소설들을 쓴 시기가 장편을 쓴 시기와 일정 부분 겹쳐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소설집을 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렇게 한단락을 잘 갈무리하고, 다른 문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말하는 소설의 주제와 관심사는 내밀한 갈등을 둘러싼 것들이었다. 언어와 소통의 문제, 상처와 회복의 문제, 식민과 피식민의 문제, 세대갈등과 젠더갈등 등. 그렇다면 단편을 쓰면서 가져왔던 생각이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현장에서 더 묻지 못했던 질문의 답을 다른 인터뷰1)를 통해서 살필 수 있었다. 


단편을 통해 하려 했던 것들이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미세한 감정들. 일상의 언어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감정의 기척을 포착하려 하는 시도가 단편 작업의 주된 것들이었습니다.


 감정의 기척들, 감정이 일어나고 주저앉는 순간들에 대한 관찰은 백수린의 확실한 장기이다. 이 장기는 이번 소설집에도 빛을 발한다. 가령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서먹한 딸과 통화를 하고 나서는 늘 몸 쓰는 일을 찾는 장면을 들 수 있다. 그녀가 오이를 잔뜩 사서 오이지를 담그거나 베란다 화분들을 한번에 분갈이하는 일은 이른바 ‘K모녀’라는 관계 속의 복잡한 심사를 잘 드러낸다. 「빛이 다가올 때」의 바닷가 풍경도 잊을 수 없다. 인물들 사이의 마음의 일렁임을 해질녘 육지와 바다 사이를 오가는 파도의 움직임으로 그려낸 장면은 감정과 풍경을 연결하는 모범답안 같았다. 이렇듯 인물에게 발생한 감정을 행위나 장면으로 전환하여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대목들이 이번 소설집 곳곳에 섬세하게 자리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섬세한 감정의 탁월한 묘사로만 평가할 사안이 아니다. 다양한 서사의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억울함이나 후회의 정서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에서는 내 삶이 어딘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감각이기도 하다.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에는 삶의 방식이나 과거를 정정하고 수선하며 미래를 현재의 자리로 끌어오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백수린 소설의 감정들은 삶에 대한 애정을 재확인하게 하는 촉매들이며 삶을 수선하며 지속하는 힘의 잔향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 낯선 길 위에서 서로를 돌보는 자리


 백수린 소설이 자주 다루는 이국적인 공간은 “민족・국가・언어적 정체성에 급진적인 파괴성을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종래의 한국적・민족국가적 프레임에 갇혀 있지도 않으면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의 문제, 특히 외국어의 문제”2)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된 바 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빛이 다가올 때」와 「봄밤의 우리」에서, 우리는 또 한번 외국의 거리와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두 소설을 쓰면서 외국이나 외국인이라는 부분에 크게 방점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경험상 외국인과 내가 서로 낯선 존재처럼 느끼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거든요. 오히려 한국사람들과 서로를 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경험할 때도고요. 두 소설에 외국과 외국인이 등장해야 했던 이유는 각각 달랐는데, 어쨌든 제게는 두편 모두 결국엔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씀으로써 자기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독자가 지레짐작하는 이국적 공간에 대한 환상을 벗겨내는 답이었다.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 배경이 발휘하는 특수한 효과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백수린 소설의 타자들은 국경이나 종과 같은 경계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찾아온다. 「빛이 다가올 때」나 「봄밤의 우리」가 보여주듯 뉴욕과 빠리 같은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인물간의 관계 맺음이 국적과 무관하다는 설정은 일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무수한 타인 중 특히 경계 너머의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화자의 서사가 흥미롭다.

 「봄밤의 우리」에서의 ‘유타’와 ‘나’ 또한 그렇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인 ‘나’와 일본인 유타는 그들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문화적 관습을 벗어나 있어서인지 함께 경험하고 깊게 교감하는 순간을 드물지 않게 맞이한다. 유럽을 방문한 동아시아인이라는 범주도 이들의 친밀함에 기여했겠지만 아마도 그들 사이의 친밀함은 서로를 돌보는 과정이 빚었을 것이다. 낯선 타지의 삶을 꾸리기 위해 이방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돕게 된다. 한끼 식사를 나누는 힘조차 이들의 삶에서는 더없이 각별하다. 긴장과 갖가지 우연성이 증대하고 더불어 취약함과 상호의존성까지 높아진 상황은 일상적인 일들도 특별하게 가동시키며 두 사람 사이 경험의 밀도를 상당히 높이게 된다. 둘 사이에 공유된 언어가 적은 만큼 대화에 더 깊이 참여하며 말을 맞추어가는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흰 눈과 개」에서 언급되는, 반려견을 입양하기 위해 필요한 “애정과 훈련”(127면)이라는 말이 여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애정을 가지고 서로에게 다가서려는 훈련 말이다.


그렇게 도시를 걷다 보면 그녀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불멸이 된 죽은 이들이 떠올랐다. 막이 내리면 사라져버리는 일회적인 것이라 연극을 좋아한다던 유타와 달리 그녀는 미래에도 영원히 남는 것이기 때문에 연극이 좋았고, 같은 이유에서 길을 걷다 골목이나 다리의 이름으로 남아 영속하는 빛나는 이름들을 마주치면 마음이 일렁였다. 그런 밤들엔 이따금씩 눈이 내리기도 했다. 기온이 충분히 낮지 않아 닿는 순간 덧없이 녹아버리던 눈송이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구시가지에 눈송이가 흩날리는 풍경은 그녀의 눈에 그저 아름다웠고,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기꺼이 눈을 맞았다. “너무 아름답지?” 그녀가 돌아보면 평소보다 얼굴이 환해 보이는 유타가 말없이 웃었다.(「봄밤의 우리」 82면)


 애정과 훈련을 쌓아가는 과정은 예상치 못한 삶의 깊이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는 걸까. 백수린의 이번 소설집에는 몇몇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펼쳐지는데 그 장면들은 대개 혼자가 아닌 순간에 찾아온다. 인물들이 내적 독백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들은 무엇인가를 방어하려는 듯 촘촘한 일상의 시간표 위에 자리하거나 고통어린 사건들을 반추하고 있다. 반면에 잘 통하지 않는 대화라 할지라도 대화를 거듭하며 자신의 삶에 찾아온 낯선 존재와 일정한 시간을 보내고 그 존재에게 내 삶의 한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세상은 마치 감춰놓았던 것만 같은 풍경을 드러내 보인다. 때로는 떠맡겨진 앵무새와 함께(「아주 환한 날들」), 외국인 친구와 함께(「봄밤의 우리」), 말이 잘 통하지 않던 아버지와 함께(「흰 눈과 개」) 대화를 나누려 애쓴 시간들이 마침내 타인을 이해하는 차원으로 그들을 슬그머니 옮겨놓는 것이다.

 「빛이 다가올 때」에 그려진 뉴욕에서 만난 사촌언니의 생생한 삶의 경험들도 더불어 볼 만하다. 한 문화가 부여한 특권적 자리(교수)와 관습적 책임(장녀)에서 놓여나자 언니의 삶은 비로소 어떤 해방을 맞이한 듯 보이기도 하는데 소설은 이처럼 자신의 이력을 내려놓을 때 상실했던 삶의 감각이 회복될지 모르며 불안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의 찾아온다는 것을 일러주기도 한다. 외국이란 나를 이상한 평등의 자리에 옮겨놓는 무대와도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까. 「빛이 다가올 때」에서 언니가 스무살이나 어린데다 아직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상대에게 이끌림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물론 외국은 인종차별 등 예상 가능한 불평등이 작동하는 장소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전 소설집 『여름의 빌라』(문학동네 2020)에서 동양인 여성에게 캣콜링을 하는 남성들에 대해서나(「시간의 궤적」) “인종차별이 나쁜 것임을 아직 충분히 학습하지 못한 아이들의 무구한 장난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흑설탕 캔디」 180면)를 상기하는 장면을 분명히 새겨두기도 했다. 그런데 외국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작가는 다른 강조점을 언급한다. 


제가 더 그려 보이고 싶었던 건 인물들의 나이의 간극이에요. 「봄밤의 우리」에서 유타가 외국인이라는 것보다는 나이가 많고 특이한 남자라는 점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와 ‘나’의 나이차를 일부러 강조해서 썼어요. 「빛이 다가올 때」에서 개리는 ‘나’와 언니의 일상에 공평하게 등장하지만 ‘나’와 달리 언니에게 큰 영향을 주죠. 인물간의 나이차를 통해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타자나 약자로 보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차별적인 시선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며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던 시기였다. 갈 수 있는 데가 줄어들고 만날 수 있는 인원이 적어지면서 좁아진 생활 반경으로 인해 답답함을 느낄 때 한 지인이 그 곤란함은 노인이 평소에 느끼는 몸의 감각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말의 둔중한 충격이 오래 남았다. 한국사회 대부분 주류문화의 신체 감각은 젊은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언어화된다. 백수린의 소설은 최근으로 올수록 그러한 낙차와 공백을 언어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확실히 눈에 띈다. 


몸과 마음의 시차


이모할머니는 또 무슨 소리를 냈던가? 모과나무집에 살기 시작한 이후 다혜를 놀라게 한 것은 이모할머니에게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온갖 소리였다.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앉았다 일어날 때 내는 신음 소리. 이모할머니는 잡초를 뽑거나 다림질을 하면서 혼잣말을 했고, 걸어 다니면서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었으며 자다 깨서 화장실에 갈 때는 문을 꼭 닫지 않은 채 볼일을 봤다.(「눈이 내리네」 180~81면)


 「눈이 내리네」에서 대학에 막 입학한 ‘나’는 이모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전에는 몰랐던 어떤 소리들을 듣는다. 할머니의 늙고 둔감해진 육체가 무심결에 내는 그 사소한 소리들을 통해 ‘나’는 늙음의 속성을 유심히 생각해보게도 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그러니까 둘의 동거가 막 시작됐을 무렵에 화자는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품위를 잃고, 수치를 망각하는 것. 타인의 눈에 스스로 어떻게 비칠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삶에 주어진 실로 놀라운 특권 같다”(181면)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점차 정정된다. 

 흔히 신체가 노화하면 내적으로도 약화되거나 상실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암에 걸린 몸에 전신마취를 하는 게 극도로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당장 하루라도 안 아프고 살고 싶어서 어깨 수술을 결심하거나 이제 막 한글을 배우며 기뻐하는 이모할머니와 “더 이상 예전처럼 인생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믿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최후의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초조해하고 있”(204면)던 이십대 화자는 젊음과 늙음의 전형을 기준으로 삼아 보면 명백히 뒤바뀐 듯하다. 몸이 낡아가더라도 정신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게 인간이며, 어린 시절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노년이 되어서라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머리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몸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그려 보이는 그의 소설 덕분에 새삼 앎 또한 ‘몸의 일’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내 몸이 최근 몇년 사이에 정말 달라졌구나, 이제는 정말 젊음을 비껴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특히 육체적으로요. 앞으로도 마음은 계속 이 상태일 텐데 몸은 노쇠해지겠구나 싶으면서 저절로 노인의 삶이 궁금해졌어요. 노인의 마음에도 지금 나와 같은 게 들어 있을 텐데, 하지만 몸은 나보다 더 마음 같지 않을 텐데, 그런 노년이라는 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저절로 일었어요. 한동안 소설을 쓰면서 노년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몸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그의 이야기는 동시에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백수린의 소설에서 중년이란 몸의 생기와 다소 뒤늦은 마음의 성숙이 어느정도 일치하는 데서 오는 시야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장이 아닐까. 「빛이 다가올 때」에서 “마흔이 넘은 언니가 스무 살이 갓 넘은 남자를 사랑”하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그것에 “사회 통념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일”(66면)이라는 해석을 붙였던 화자가 그 시절의 언니 나이가 되어 “이제 나는 안다”(70면)고 하게 되듯이 말이다. 이 소설의 사십대 화자가 젊은 시절 자신의 성급한 판단들을 철회하면서 중요하게 덧붙이는 말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같은 면) 타인의 방식대로 세상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 나와 타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식의 사고로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백수린의 인물들은 각자의 느낌과 감정에 가로막힌 채 오해의 상황을 겪지만, 늦더라도 이를 알아채고 스스로 조정하려 애쓰며 저 단절을 넘어서는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백수린은 우리가 이만큼 다르다는 사실을 서사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는 작가이다.  

 더불어 백수린의 소설에서 그려진 사십대는 경제적 주체로서나 돌봄의 주체로서 삶의 문제에 어느정도 적응한 상황이라는 점 또한 중요하다. 이번 소설집에서 특히 다수의 여성 인물들은 지난 이십대 시절을 회상하거나 그때로부터 달라진 삶의 조건들을 중요하게 언급하는데, 그들이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몸의 생기만이 아니다. 사회의 일원이 될 꿈을 품고 자신의 가능성의 크기에 매달렸던 그들은 결혼과 출산과 양육이라는 여성의 생애주기를 통과하며 더이상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호우」).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며 마음이 늙는 상태에 도달한 듯도 하다. 하지만 앞서 나이든 몸의 서사가 소멸되지 않는 생기를 보여주었듯 마음 또한 그럴 것이라고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가족서사의 확장과 문학의 힘


 이번 소설집에서는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흰 눈과 개」 「아주 환한 날들」은 평생 일한 직장에서 은퇴하고 자식들은 독립한 시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딸과의 깊은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소원한 관계를 오래 지속하고 있다.

 두 소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리는 여러모로 겹쳐 보인다.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몫까지 대신하려는 듯 자영업자로서 억척스럽게 가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왔고, 「흰 눈과 개」의 화자 역시 가족의 주된 생계 부양자로서 직장에서의 고통을 감내해왔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피붙이와의 정서적 유대를 지속하는 데 실패한 인물들이다.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근대적 핵가족 내에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한 아버지의 자리까지 감당하는 데서 두 작품 모두 부녀관계 서사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기도 하다. 

 모녀관계의 갈등을 다룬 여성작가의 소설들이 하나의 영역을 이루며 ‘K모녀서사’라는 명칭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에 비하자면 부녀관계의 갈등과 친밀성을 특별히 다루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문학 내에서 이런 현상은 가부장적 질서의 퇴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생계 부양의 역할을 포함해 더이상 가족 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아버지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서 이러한 면모는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제 이전 작품들 중에 세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은 대부분이 딸이나 손녀의 입장에서 윗세대를 보는 이야기였어요. 그런 이야기를 여러편 쓰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른 입장, 윗세대의 관점에서도 이야기를 해보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또 이제껏 모녀의 갈등을 주로 다뤘다보니 다른 젠더의 가족구성원이 겪는 갈등도 들여다보고 싶어져 「흰 눈과 개」를 쓰게 됐어요. 부모세대는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대이고 심지어 저는 아이를 기른 경험도 없기 때문에 많은 부분 짐작으로 써야 했고, 그래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어요. 몰라도 일단은 써보자 하는 마음이 나와는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하는 것 같아요.


 담백한 답변이었지만 문학의 본질과 관련한 깊은 의미를 품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말하기가 극히 조심스러워진 근간의 상황은 문학이 오랫동안 해온 적극적 상상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면모가 없지 않다. 당사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든 상황에 대해서든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말은 반 정도만 정확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착각과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존재들이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때론 망상과 한끗 차이일지 모른다. 「흰 눈과 개」와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합리화를 공고히 하면 할수록 딸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듯이 보이는 이유도 그렇다.

 사적 영역과 공적 세계 역시 본래 뚜렷한 구분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경계를 넘어서서 상상하고 사유하고 형상화하는 일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면, 문학은 다른 이의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함으로써 공적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우리를 더 연결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문학은 사실에 기반을 두되 사실 이상의 것을 허구적으로 형상화할 힘을 갖기에, 문학에서는 더 많은 갈등과 더 많은 타자들에 대한 상상이 값진 일이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 인물의 목소리와 시선을 성급히 재단하지 않는 일도 필요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흰 눈과 개」와 「아주 환한 날들」에서 딸의 자리의 목소리가 거의 들려오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소설들에서 딸의 자리는 듣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열심히 들어줄 때 우리는 무언가를 더 꺼내어 이야기해 보이는 존재라는 점을 작가는 중요하게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경유하는 진실


 백수린 소설에서 문학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장치 중 하나는 거짓말이기도 하다. 좀더 과감하게 말해보면 그의 소설은 사실만으로 소통이 가능한가, 사실만으로 쓰인 서사가 가치있는가를 질문한다. 첫 장편 『눈부신 안부』에는 타국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2030 여성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자리한다. 하지만 한 인터뷰3)에서 자신과 또래인 주인공이 앞선 세대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였으면 하는 바람과 참사의 유가족이 그 딱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던 마음이 합쳐져서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보고 나는 후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1995년 대구에서 일어난 가스폭발사고를 상기하게 하는 사건으로 ‘해미’는 언니를 잃는다. 이 사고 이후 해미의 가족은 더이상 이전의 삶의 방식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의 중심서사는 유학을 결심한 엄마를 따라 큰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로 이주한 이후 해미가 만난 파독 간호사 ‘이모들’의 이야기를 따라서 전개되지만, 한편으로 주목할 점은 참사 이후 가족의 해체와 구성원들의 심리적 어려움이다. 유가족이나 피해자 가족이라는 호명은 이들의 삶에 무겁게 덧씌워지는데 소설은 그렇게 위축된 마음이 위선과 위악을 낳는 방식을 또한 신중히 그려 보인다. 


그 시절 나는 엄마에게 무척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당시 내가 한 거짓말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것들이었으니까.(『눈부신 안부』 33면)


 해미는 사고 이후 엄마에게 상시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상처 입은 부모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 매일의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백수린 소설에서의 거짓말은 기대와 욕망을 품은 말이고 현재의 문제를 가상적으로나마 해결하는 말이다. 해나가 거짓말로 쓴 편지가 죽음을 앞둔 ‘선자 이모’를 더 살게 하는 것, 그 편지가 마침내 이모의 첫사랑에게 전해지는 것, 이후 세간의 시선과 오래 떨어져 지낸 시간으로도 훼손되지 않았던 그들의 사랑이 또한 대체되지 않는 사랑(가족)을 잃은 제삼자에게 전달되는 것. 이들 장면은 눈부시지 않을 수가 없다. 


저에게 ‘거짓말’의 반대말은 ‘사실인 말’이고, 진실은 그 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거짓말에 늘 관심이 많았어요. 거짓말을 경유해서 가닿게 되는 진실이라든지, 거짓말에 의해서 유지되는 관계들 같은 것에요. 저는 거짓말이 소통에 있어 중요한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제 소설에서는 사실적, 객관적 그런 말들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을 옹호하는 언어가 거짓말인 셈인 듯해요.


연결하는 눈과 연대하는 삶


 마지막으로 연작 작업에 대해서 물었다. 「호우」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에는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학교 유적 답사 동아리에서 만난 이들은 사랑과 질투, 우월감과 패배감을 나눠가지며 한 시절을 치열하게 함께 보냈지만, 이후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으로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지낸다. 누군가는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 다른 누군가는 미혼인 채 늙고 병든 부모를 부양하며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삶의 자리에 놓인 이들은 우연한 기회로 같이 여행을 가게 된다. 오래 다른 삶을 살아가던 여성들을 한데 불러모아본 이유가 궁금했다.


    세 소설이 애초에 연작으로 기획된 작품은 아니었고 소설집을 묶으면서 연작으로 만들 생각에 인물들에게 이름을 새로 붙이고 조금씩 수정을 했어요. 「눈이 내리네」를 쓰는 내내 「호우」에서 다 못한 이야기가 있어서 이어서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느낌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쓸 때까지 계속됐어요. 작품집을 묶으려고 세 소설을 다시 읽다보니, 이들을 연작으로 만들면 내가 원래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보통 저는 단편을 쓸 때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최대한 깊이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보고, 그것을 하나의 장면을 통해 집약적으로 이야기하려는 편이에요. 한 장면을 세밀하게 세공하는 게 저에게는 단편을 쓸 때 중요한 작업이었거든요. 「호우」와 「눈이 내리네」를 쓸 때는 그보다 인물의 삶을 긴 호흡으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긴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답변을 듣고 보니 세번째 소설집(『여름의 빌라』)을 출간한 즈음의 인터뷰4)에서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질문자는 백수린 소설에서 회고적 구성을 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는 지적과 함께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유지되지 않는, 서로 처지가 달라지며 사그라든 관계가 잔상처럼 남는다고 말했다. 이에 백수린 작가는 과거를 복기하고 재해석하는 게 타인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고, 우리는 타인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밖에 없지만 또한 우리에게는 “실패한 서사를 복기하는 능력”이 있다고 답했다. 실패하고 복기하면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는 일이 우리의 현실을 좀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믿음이 오랫동안 소설쓰기의 동력이었다는 말일 테다. 


전체가 하얗게 비어 있는 화폭 한가운데 요나는 아주 작은 글씨로 단어 하나를 써놓았는데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과연 그것을 ‘솔리테르solitaire, 고독’라고 읽어야 할지 ‘솔리데르solidaire, 연대’라고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는 오래전 한 단편에 까뮈의 위와 같은 문장을 인용해두었다(「꽃 피는 밤이 오면」, 『폴링 인 폴』 235면). 이번 소설집에 실린 「봄밤의 우리」에서도 까뮈의 작품이 언급된다. 그러고 보면 까뮈의 소설에서 종종 이상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던 빛과 백수린 소설의 빛이 닮아 있는 듯도 하다. 까뮈 문학의 키워드라고 할 만한 인간 삶의 부조리를 백수린 식으로 해석하면 고독과 연대에의 감각을 동시에 간직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이방인의 감각을 갖고 있기 일쑤이고, 개별적 몸의 고유한 감각과 느낌 속에 깊이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그 감각을 작가는 밝음과 어둠의 속성이 절반씩 깃들어 있는 시간인 ‘봄밤’이라고 쓴다. 소설은 바로 그 희미한 빛에 기대어 ‘모든 것’을 말해보는 고투로 시작되고, 고투 속에서 기나긴 대화의 시간과 서로의 삶의 자리를 공유하는 마음이 발동한다. 그 마음이 가닿은 장소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설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삶의 진실 같은 게 있는지, 다소 거창하기도 하고 농담 같기도 한 질문을 건넸다. 


    제가 소설에 빛이라고 쓴 것, 그 빛을 진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금 영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신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모르잖아요. 이번 소설집에 질문하는 형식의 문장이 많이 나와요. 가령 “그것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65면) 같은. 왜 살고 왜 죽는지, 심지어 왜 사랑에 빠지는지 모르는 채로 우리는 살아가잖아요. 삶에서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도 대개는 웃으며 살고 있고. 세상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인데, 그 알 수 없는 무엇이 삶의 진실이고 달리 말해 신비인 것 같아요. 사실은 이 소설집에 묶인 소설을 쓰는 내내 도대체 그게 뭘까 정말 궁금했어요. 왜 우리는 이렇게 슬프고 이렇게 허무하고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데도 계속 살아갈까요. 그걸 알고 싶어서 썼는데 끝내 알지 못한 채로 소설을 마무리하게 됐지만, 그럼에도 삶을 지속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름다움과 신비이고 곧 진실인 것 같아요. 또 진실은 알 수 없는 와중에 알 것만 같은 어떤 찰나에 존재하겠지요. 진실은 순간적이고 미끄러지는 거고요. 그러니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해서는 감각으로만 말할 수 있을지도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거짓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요.


 대화 중에 ‘사람, 사람들 참 모르겠다’는 엉뚱한 화제로 이야기가 길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때 작가는 신에 대해 말했다. 신이 인간에게 뭔가를 줬다면 아마도 분투하는 마음일 것 같다고. 뭔가를 이해하려고, 사랑하려고,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분투가 언제나 미스터리였다고 말이다. 짐짓 무거운 이야기 끝에 우리는 서로 어색한 기운을 누르려는 듯 크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 그 순간, 내 마음에도 동조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분투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한 인간을 그 자신이게 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힘이 아닐까 싶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나의 마음을 숨김으로써 그 자리를 비추던 이야기의 빛에 더 몰입하고 싶었다. 그 순간에 빛이 아주 환했기 때문이다.

  • 1) 박세희 「흥미진진한 추리와 감각적인 문장의 눈부신 만남…백수린 ‘눈부신 안부’」, 문화일보 2023.6.24.
  • 2) 이경진 「외국어로 말 걸기」, 『창작과비평』 2014년 여름호 263면.
  • 3) 박세희, 앞의 글.
  • 4) 김효실 「21이 사랑한 작가 백수린① “내가 재현하는 인물들을 책임져야죠”」, 한겨레21 2020.8.24.

추천 콘텐츠

박동억 시간의 분유(分有)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4

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휘민이민하노은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소설 또는 그림자 반죽 ― 이연숙『아빠소설』(위즈덤하우스, 2025)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이연숙위픽한국소설아빠소설문학 2025
조예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격월간 릿터 조예은 추리미스터리장르문학사회파추리소설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