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제208호)
분투하는 마음과 서사의 신비 ― 백수린 『봄밤의 모든것』(문학과지성사, 2025)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25)의 첫 문장(「아주 환한 날들」 9면)이다. 생각해보면 저 문장은 이 책에 묶인 백수린의 소설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요청 같기도 하다. 가령 혹시 당신은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처럼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은 물론 피붙이의 마음 또한 방치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지, 그로 인해 뒤늦게야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과 자식의 마음을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닌지를 묻는다. 소설 「흰 눈과 개」의 화자처럼 자신과 닮은 가족이 마음을 몰라주어 억울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힘들어하다가도 우연히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운 풍경을 함께 마주하며 과거의 상처를 품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들은 분명 부모세대를 향해 쓰이지만 교감에 참여하는 자식세대를 향하는 물음으로도 보인다.
물론 백수린의 소설이 가족을 둘러싼 갈등과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의 소설은 마음의 바깥에서 마음의 형성에 간섭하는 어떤 현실의 압력을 넌지시 심어놓는다. 왜 어떤 마음들은 차가운 현실 앞에 감상적이라는 말로 폄하되는지, 어째서 종(種)과 국적 같은 경계를 넘어선 관계에서 마음을 더 쉽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는지. 결국 백수린의 소설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가 거주하는 세계의 역사와 개인의 삶의 기록을 더불어 볼 수 있게 된다. 그밖에 또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작가의 얼굴을 마주보러 가며 나의 마음은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분주했다.
감정의 서사학
2011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니 백수린은 올해로 15년차 소설가다. 최근 출간한 『봄밤의 모든 것』은 네번째 소설집이고, 산문집과 역서를 빼더라도 중・장편을 포함해 일곱번째 책이니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권의 책을 발표한 셈이다. 이렇게 꾸준히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궁금했다. 먼저 『봄밤의 모든 것』을 낸 소감을 물어보았다.
2023년에 낸 첫 장편소설(『눈부신 안부』 문학동네)을 쓰고 나서 제가 십여년 동안 다룬 주제와 관심들을 한데 응축해 모아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작은 문 하나가 닫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봄밤의 모든 것』에 실린 단편소설들을 쓴 시기가 장편을 쓴 시기와 일정 부분 겹쳐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소설집을 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렇게 한단락을 잘 갈무리하고, 다른 문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말하는 소설의 주제와 관심사는 내밀한 갈등을 둘러싼 것들이었다. 언어와 소통의 문제, 상처와 회복의 문제, 식민과 피식민의 문제, 세대갈등과 젠더갈등 등. 그렇다면 단편을 쓰면서 가져왔던 생각이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현장에서 더 묻지 못했던 질문의 답을 다른 인터뷰1)를 통해서 살필 수 있었다.
단편을 통해 하려 했던 것들이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미세한 감정들. 일상의 언어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감정의 기척을 포착하려 하는 시도가 단편 작업의 주된 것들이었습니다.
감정의 기척들, 감정이 일어나고 주저앉는 순간들에 대한 관찰은 백수린의 확실한 장기이다. 이 장기는 이번 소설집에도 빛을 발한다. 가령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서먹한 딸과 통화를 하고 나서는 늘 몸 쓰는 일을 찾는 장면을 들 수 있다. 그녀가 오이를 잔뜩 사서 오이지를 담그거나 베란다 화분들을 한번에 분갈이하는 일은 이른바 ‘K모녀’라는 관계 속의 복잡한 심사를 잘 드러낸다. 「빛이 다가올 때」의 바닷가 풍경도 잊을 수 없다. 인물들 사이의 마음의 일렁임을 해질녘 육지와 바다 사이를 오가는 파도의 움직임으로 그려낸 장면은 감정과 풍경을 연결하는 모범답안 같았다. 이렇듯 인물에게 발생한 감정을 행위나 장면으로 전환하여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대목들이 이번 소설집 곳곳에 섬세하게 자리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섬세한 감정의 탁월한 묘사로만 평가할 사안이 아니다. 다양한 서사의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억울함이나 후회의 정서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에서는 내 삶이 어딘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감각이기도 하다.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에는 삶의 방식이나 과거를 정정하고 수선하며 미래를 현재의 자리로 끌어오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백수린 소설의 감정들은 삶에 대한 애정을 재확인하게 하는 촉매들이며 삶을 수선하며 지속하는 힘의 잔향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 낯선 길 위에서 서로를 돌보는 자리
백수린 소설이 자주 다루는 이국적인 공간은 “민족・국가・언어적 정체성에 급진적인 파괴성을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종래의 한국적・민족국가적 프레임에 갇혀 있지도 않으면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의 문제, 특히 외국어의 문제”2)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된 바 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빛이 다가올 때」와 「봄밤의 우리」에서, 우리는 또 한번 외국의 거리와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두 소설을 쓰면서 외국이나 외국인이라는 부분에 크게 방점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경험상 외국인과 내가 서로 낯선 존재처럼 느끼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거든요. 오히려 한국사람들과 서로를 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경험할 때도고요. 두 소설에 외국과 외국인이 등장해야 했던 이유는 각각 달랐는데, 어쨌든 제게는 두편 모두 결국엔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씀으로써 자기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독자가 지레짐작하는 이국적 공간에 대한 환상을 벗겨내는 답이었다.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 배경이 발휘하는 특수한 효과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백수린 소설의 타자들은 국경이나 종과 같은 경계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찾아온다. 「빛이 다가올 때」나 「봄밤의 우리」가 보여주듯 뉴욕과 빠리 같은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인물간의 관계 맺음이 국적과 무관하다는 설정은 일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무수한 타인 중 특히 경계 너머의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화자의 서사가 흥미롭다.
「봄밤의 우리」에서의 ‘유타’와 ‘나’ 또한 그렇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인 ‘나’와 일본인 유타는 그들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문화적 관습을 벗어나 있어서인지 함께 경험하고 깊게 교감하는 순간을 드물지 않게 맞이한다. 유럽을 방문한 동아시아인이라는 범주도 이들의 친밀함에 기여했겠지만 아마도 그들 사이의 친밀함은 서로를 돌보는 과정이 빚었을 것이다. 낯선 타지의 삶을 꾸리기 위해 이방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돕게 된다. 한끼 식사를 나누는 힘조차 이들의 삶에서는 더없이 각별하다. 긴장과 갖가지 우연성이 증대하고 더불어 취약함과 상호의존성까지 높아진 상황은 일상적인 일들도 특별하게 가동시키며 두 사람 사이 경험의 밀도를 상당히 높이게 된다. 둘 사이에 공유된 언어가 적은 만큼 대화에 더 깊이 참여하며 말을 맞추어가는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흰 눈과 개」에서 언급되는, 반려견을 입양하기 위해 필요한 “애정과 훈련”(127면)이라는 말이 여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애정을 가지고 서로에게 다가서려는 훈련 말이다.
그렇게 도시를 걷다 보면 그녀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불멸이 된 죽은 이들이 떠올랐다. 막이 내리면 사라져버리는 일회적인 것이라 연극을 좋아한다던 유타와 달리 그녀는 미래에도 영원히 남는 것이기 때문에 연극이 좋았고, 같은 이유에서 길을 걷다 골목이나 다리의 이름으로 남아 영속하는 빛나는 이름들을 마주치면 마음이 일렁였다. 그런 밤들엔 이따금씩 눈이 내리기도 했다. 기온이 충분히 낮지 않아 닿는 순간 덧없이 녹아버리던 눈송이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구시가지에 눈송이가 흩날리는 풍경은 그녀의 눈에 그저 아름다웠고,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기꺼이 눈을 맞았다. “너무 아름답지?” 그녀가 돌아보면 평소보다 얼굴이 환해 보이는 유타가 말없이 웃었다.(「봄밤의 우리」 82면)
애정과 훈련을 쌓아가는 과정은 예상치 못한 삶의 깊이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는 걸까. 백수린의 이번 소설집에는 몇몇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펼쳐지는데 그 장면들은 대개 혼자가 아닌 순간에 찾아온다. 인물들이 내적 독백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들은 무엇인가를 방어하려는 듯 촘촘한 일상의 시간표 위에 자리하거나 고통어린 사건들을 반추하고 있다. 반면에 잘 통하지 않는 대화라 할지라도 대화를 거듭하며 자신의 삶에 찾아온 낯선 존재와 일정한 시간을 보내고 그 존재에게 내 삶의 한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세상은 마치 감춰놓았던 것만 같은 풍경을 드러내 보인다. 때로는 떠맡겨진 앵무새와 함께(「아주 환한 날들」), 외국인 친구와 함께(「봄밤의 우리」), 말이 잘 통하지 않던 아버지와 함께(「흰 눈과 개」) 대화를 나누려 애쓴 시간들이 마침내 타인을 이해하는 차원으로 그들을 슬그머니 옮겨놓는 것이다.
「빛이 다가올 때」에 그려진 뉴욕에서 만난 사촌언니의 생생한 삶의 경험들도 더불어 볼 만하다. 한 문화가 부여한 특권적 자리(교수)와 관습적 책임(장녀)에서 놓여나자 언니의 삶은 비로소 어떤 해방을 맞이한 듯 보이기도 하는데 소설은 이처럼 자신의 이력을 내려놓을 때 상실했던 삶의 감각이 회복될지 모르며 불안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의 찾아온다는 것을 일러주기도 한다. 외국이란 나를 이상한 평등의 자리에 옮겨놓는 무대와도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까. 「빛이 다가올 때」에서 언니가 스무살이나 어린데다 아직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상대에게 이끌림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물론 외국은 인종차별 등 예상 가능한 불평등이 작동하는 장소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전 소설집 『여름의 빌라』(문학동네 2020)에서 동양인 여성에게 캣콜링을 하는 남성들에 대해서나(「시간의 궤적」) “인종차별이 나쁜 것임을 아직 충분히 학습하지 못한 아이들의 무구한 장난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흑설탕 캔디」 180면)를 상기하는 장면을 분명히 새겨두기도 했다. 그런데 외국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작가는 다른 강조점을 언급한다.
제가 더 그려 보이고 싶었던 건 인물들의 나이의 간극이에요. 「봄밤의 우리」에서 유타가 외국인이라는 것보다는 나이가 많고 특이한 남자라는 점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와 ‘나’의 나이차를 일부러 강조해서 썼어요. 「빛이 다가올 때」에서 개리는 ‘나’와 언니의 일상에 공평하게 등장하지만 ‘나’와 달리 언니에게 큰 영향을 주죠. 인물간의 나이차를 통해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타자나 약자로 보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차별적인 시선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며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던 시기였다. 갈 수 있는 데가 줄어들고 만날 수 있는 인원이 적어지면서 좁아진 생활 반경으로 인해 답답함을 느낄 때 한 지인이 그 곤란함은 노인이 평소에 느끼는 몸의 감각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말의 둔중한 충격이 오래 남았다. 한국사회 대부분 주류문화의 신체 감각은 젊은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언어화된다. 백수린의 소설은 최근으로 올수록 그러한 낙차와 공백을 언어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확실히 눈에 띈다.
몸과 마음의 시차
이모할머니는 또 무슨 소리를 냈던가? 모과나무집에 살기 시작한 이후 다혜를 놀라게 한 것은 이모할머니에게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온갖 소리였다.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앉았다 일어날 때 내는 신음 소리. 이모할머니는 잡초를 뽑거나 다림질을 하면서 혼잣말을 했고, 걸어 다니면서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었으며 자다 깨서 화장실에 갈 때는 문을 꼭 닫지 않은 채 볼일을 봤다.(「눈이 내리네」 180~81면)
「눈이 내리네」에서 대학에 막 입학한 ‘나’는 이모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전에는 몰랐던 어떤 소리들을 듣는다. 할머니의 늙고 둔감해진 육체가 무심결에 내는 그 사소한 소리들을 통해 ‘나’는 늙음의 속성을 유심히 생각해보게도 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그러니까 둘의 동거가 막 시작됐을 무렵에 화자는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품위를 잃고, 수치를 망각하는 것. 타인의 눈에 스스로 어떻게 비칠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삶에 주어진 실로 놀라운 특권 같다”(181면)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점차 정정된다.
흔히 신체가 노화하면 내적으로도 약화되거나 상실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암에 걸린 몸에 전신마취를 하는 게 극도로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당장 하루라도 안 아프고 살고 싶어서 어깨 수술을 결심하거나 이제 막 한글을 배우며 기뻐하는 이모할머니와 “더 이상 예전처럼 인생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믿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최후의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초조해하고 있”(204면)던 이십대 화자는 젊음과 늙음의 전형을 기준으로 삼아 보면 명백히 뒤바뀐 듯하다. 몸이 낡아가더라도 정신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게 인간이며, 어린 시절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노년이 되어서라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머리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몸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그려 보이는 그의 소설 덕분에 새삼 앎 또한 ‘몸의 일’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내 몸이 최근 몇년 사이에 정말 달라졌구나, 이제는 정말 젊음을 비껴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특히 육체적으로요. 앞으로도 마음은 계속 이 상태일 텐데 몸은 노쇠해지겠구나 싶으면서 저절로 노인의 삶이 궁금해졌어요. 노인의 마음에도 지금 나와 같은 게 들어 있을 텐데, 하지만 몸은 나보다 더 마음 같지 않을 텐데, 그런 노년이라는 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저절로 일었어요. 한동안 소설을 쓰면서 노년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몸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그의 이야기는 동시에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백수린의 소설에서 중년이란 몸의 생기와 다소 뒤늦은 마음의 성숙이 어느정도 일치하는 데서 오는 시야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장이 아닐까. 「빛이 다가올 때」에서 “마흔이 넘은 언니가 스무 살이 갓 넘은 남자를 사랑”하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그것에 “사회 통념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일”(66면)이라는 해석을 붙였던 화자가 그 시절의 언니 나이가 되어 “이제 나는 안다”(70면)고 하게 되듯이 말이다. 이 소설의 사십대 화자가 젊은 시절 자신의 성급한 판단들을 철회하면서 중요하게 덧붙이는 말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같은 면) 타인의 방식대로 세상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 나와 타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식의 사고로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백수린의 인물들은 각자의 느낌과 감정에 가로막힌 채 오해의 상황을 겪지만, 늦더라도 이를 알아채고 스스로 조정하려 애쓰며 저 단절을 넘어서는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백수린은 우리가 이만큼 다르다는 사실을 서사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는 작가이다.
더불어 백수린의 소설에서 그려진 사십대는 경제적 주체로서나 돌봄의 주체로서 삶의 문제에 어느정도 적응한 상황이라는 점 또한 중요하다. 이번 소설집에서 특히 다수의 여성 인물들은 지난 이십대 시절을 회상하거나 그때로부터 달라진 삶의 조건들을 중요하게 언급하는데, 그들이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몸의 생기만이 아니다. 사회의 일원이 될 꿈을 품고 자신의 가능성의 크기에 매달렸던 그들은 결혼과 출산과 양육이라는 여성의 생애주기를 통과하며 더이상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호우」).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며 마음이 늙는 상태에 도달한 듯도 하다. 하지만 앞서 나이든 몸의 서사가 소멸되지 않는 생기를 보여주었듯 마음 또한 그럴 것이라고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가족서사의 확장과 문학의 힘
이번 소설집에서는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흰 눈과 개」 「아주 환한 날들」은 평생 일한 직장에서 은퇴하고 자식들은 독립한 시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딸과의 깊은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소원한 관계를 오래 지속하고 있다.
두 소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리는 여러모로 겹쳐 보인다.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몫까지 대신하려는 듯 자영업자로서 억척스럽게 가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왔고, 「흰 눈과 개」의 화자 역시 가족의 주된 생계 부양자로서 직장에서의 고통을 감내해왔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피붙이와의 정서적 유대를 지속하는 데 실패한 인물들이다.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근대적 핵가족 내에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한 아버지의 자리까지 감당하는 데서 두 작품 모두 부녀관계 서사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기도 하다.
모녀관계의 갈등을 다룬 여성작가의 소설들이 하나의 영역을 이루며 ‘K모녀서사’라는 명칭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에 비하자면 부녀관계의 갈등과 친밀성을 특별히 다루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문학 내에서 이런 현상은 가부장적 질서의 퇴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생계 부양의 역할을 포함해 더이상 가족 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아버지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서 이러한 면모는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제 이전 작품들 중에 세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은 대부분이 딸이나 손녀의 입장에서 윗세대를 보는 이야기였어요. 그런 이야기를 여러편 쓰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른 입장, 윗세대의 관점에서도 이야기를 해보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또 이제껏 모녀의 갈등을 주로 다뤘다보니 다른 젠더의 가족구성원이 겪는 갈등도 들여다보고 싶어져 「흰 눈과 개」를 쓰게 됐어요. 부모세대는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대이고 심지어 저는 아이를 기른 경험도 없기 때문에 많은 부분 짐작으로 써야 했고, 그래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어요. 몰라도 일단은 써보자 하는 마음이 나와는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하는 것 같아요.
담백한 답변이었지만 문학의 본질과 관련한 깊은 의미를 품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말하기가 극히 조심스러워진 근간의 상황은 문학이 오랫동안 해온 적극적 상상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면모가 없지 않다. 당사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든 상황에 대해서든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말은 반 정도만 정확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착각과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존재들이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때론 망상과 한끗 차이일지 모른다. 「흰 눈과 개」와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합리화를 공고히 하면 할수록 딸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듯이 보이는 이유도 그렇다.
사적 영역과 공적 세계 역시 본래 뚜렷한 구분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경계를 넘어서서 상상하고 사유하고 형상화하는 일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면, 문학은 다른 이의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함으로써 공적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우리를 더 연결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문학은 사실에 기반을 두되 사실 이상의 것을 허구적으로 형상화할 힘을 갖기에, 문학에서는 더 많은 갈등과 더 많은 타자들에 대한 상상이 값진 일이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 인물의 목소리와 시선을 성급히 재단하지 않는 일도 필요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흰 눈과 개」와 「아주 환한 날들」에서 딸의 자리의 목소리가 거의 들려오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소설들에서 딸의 자리는 듣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열심히 들어줄 때 우리는 무언가를 더 꺼내어 이야기해 보이는 존재라는 점을 작가는 중요하게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경유하는 진실
백수린 소설에서 문학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장치 중 하나는 거짓말이기도 하다. 좀더 과감하게 말해보면 그의 소설은 사실만으로 소통이 가능한가, 사실만으로 쓰인 서사가 가치있는가를 질문한다. 첫 장편 『눈부신 안부』에는 타국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2030 여성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자리한다. 하지만 한 인터뷰3)에서 자신과 또래인 주인공이 앞선 세대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였으면 하는 바람과 참사의 유가족이 그 딱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던 마음이 합쳐져서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보고 나는 후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1995년 대구에서 일어난 가스폭발사고를 상기하게 하는 사건으로 ‘해미’는 언니를 잃는다. 이 사고 이후 해미의 가족은 더이상 이전의 삶의 방식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의 중심서사는 유학을 결심한 엄마를 따라 큰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로 이주한 이후 해미가 만난 파독 간호사 ‘이모들’의 이야기를 따라서 전개되지만, 한편으로 주목할 점은 참사 이후 가족의 해체와 구성원들의 심리적 어려움이다. 유가족이나 피해자 가족이라는 호명은 이들의 삶에 무겁게 덧씌워지는데 소설은 그렇게 위축된 마음이 위선과 위악을 낳는 방식을 또한 신중히 그려 보인다.
그 시절 나는 엄마에게 무척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당시 내가 한 거짓말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것들이었으니까.(『눈부신 안부』 33면)
해미는 사고 이후 엄마에게 상시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상처 입은 부모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 매일의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백수린 소설에서의 거짓말은 기대와 욕망을 품은 말이고 현재의 문제를 가상적으로나마 해결하는 말이다. 해나가 거짓말로 쓴 편지가 죽음을 앞둔 ‘선자 이모’를 더 살게 하는 것, 그 편지가 마침내 이모의 첫사랑에게 전해지는 것, 이후 세간의 시선과 오래 떨어져 지낸 시간으로도 훼손되지 않았던 그들의 사랑이 또한 대체되지 않는 사랑(가족)을 잃은 제삼자에게 전달되는 것. 이들 장면은 눈부시지 않을 수가 없다.
저에게 ‘거짓말’의 반대말은 ‘사실인 말’이고, 진실은 그 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거짓말에 늘 관심이 많았어요. 거짓말을 경유해서 가닿게 되는 진실이라든지, 거짓말에 의해서 유지되는 관계들 같은 것에요. 저는 거짓말이 소통에 있어 중요한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제 소설에서는 사실적, 객관적 그런 말들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을 옹호하는 언어가 거짓말인 셈인 듯해요.
연결하는 눈과 연대하는 삶
마지막으로 연작 작업에 대해서 물었다. 「호우」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에는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학교 유적 답사 동아리에서 만난 이들은 사랑과 질투, 우월감과 패배감을 나눠가지며 한 시절을 치열하게 함께 보냈지만, 이후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으로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지낸다. 누군가는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 다른 누군가는 미혼인 채 늙고 병든 부모를 부양하며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삶의 자리에 놓인 이들은 우연한 기회로 같이 여행을 가게 된다. 오래 다른 삶을 살아가던 여성들을 한데 불러모아본 이유가 궁금했다.
세 소설이 애초에 연작으로 기획된 작품은 아니었고 소설집을 묶으면서 연작으로 만들 생각에 인물들에게 이름을 새로 붙이고 조금씩 수정을 했어요. 「눈이 내리네」를 쓰는 내내 「호우」에서 다 못한 이야기가 있어서 이어서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느낌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쓸 때까지 계속됐어요. 작품집을 묶으려고 세 소설을 다시 읽다보니, 이들을 연작으로 만들면 내가 원래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보통 저는 단편을 쓸 때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최대한 깊이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보고, 그것을 하나의 장면을 통해 집약적으로 이야기하려는 편이에요. 한 장면을 세밀하게 세공하는 게 저에게는 단편을 쓸 때 중요한 작업이었거든요. 「호우」와 「눈이 내리네」를 쓸 때는 그보다 인물의 삶을 긴 호흡으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긴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답변을 듣고 보니 세번째 소설집(『여름의 빌라』)을 출간한 즈음의 인터뷰4)에서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질문자는 백수린 소설에서 회고적 구성을 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는 지적과 함께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유지되지 않는, 서로 처지가 달라지며 사그라든 관계가 잔상처럼 남는다고 말했다. 이에 백수린 작가는 과거를 복기하고 재해석하는 게 타인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고, 우리는 타인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밖에 없지만 또한 우리에게는 “실패한 서사를 복기하는 능력”이 있다고 답했다. 실패하고 복기하면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는 일이 우리의 현실을 좀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믿음이 오랫동안 소설쓰기의 동력이었다는 말일 테다.
전체가 하얗게 비어 있는 화폭 한가운데 요나는 아주 작은 글씨로 단어 하나를 써놓았는데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과연 그것을 ‘솔리테르solitaire, 고독’라고 읽어야 할지 ‘솔리데르solidaire, 연대’라고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는 오래전 한 단편에 까뮈의 위와 같은 문장을 인용해두었다(「꽃 피는 밤이 오면」, 『폴링 인 폴』 235면). 이번 소설집에 실린 「봄밤의 우리」에서도 까뮈의 작품이 언급된다. 그러고 보면 까뮈의 소설에서 종종 이상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던 빛과 백수린 소설의 빛이 닮아 있는 듯도 하다. 까뮈 문학의 키워드라고 할 만한 인간 삶의 부조리를 백수린 식으로 해석하면 고독과 연대에의 감각을 동시에 간직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이방인의 감각을 갖고 있기 일쑤이고, 개별적 몸의 고유한 감각과 느낌 속에 깊이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그 감각을 작가는 밝음과 어둠의 속성이 절반씩 깃들어 있는 시간인 ‘봄밤’이라고 쓴다. 소설은 바로 그 희미한 빛에 기대어 ‘모든 것’을 말해보는 고투로 시작되고, 고투 속에서 기나긴 대화의 시간과 서로의 삶의 자리를 공유하는 마음이 발동한다. 그 마음이 가닿은 장소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설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삶의 진실 같은 게 있는지, 다소 거창하기도 하고 농담 같기도 한 질문을 건넸다.
제가 소설에 빛이라고 쓴 것, 그 빛을 진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금 영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신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모르잖아요. 이번 소설집에 질문하는 형식의 문장이 많이 나와요. 가령 “그것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65면) 같은. 왜 살고 왜 죽는지, 심지어 왜 사랑에 빠지는지 모르는 채로 우리는 살아가잖아요. 삶에서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도 대개는 웃으며 살고 있고. 세상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인데, 그 알 수 없는 무엇이 삶의 진실이고 달리 말해 신비인 것 같아요. 사실은 이 소설집에 묶인 소설을 쓰는 내내 도대체 그게 뭘까 정말 궁금했어요. 왜 우리는 이렇게 슬프고 이렇게 허무하고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데도 계속 살아갈까요. 그걸 알고 싶어서 썼는데 끝내 알지 못한 채로 소설을 마무리하게 됐지만, 그럼에도 삶을 지속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름다움과 신비이고 곧 진실인 것 같아요. 또 진실은 알 수 없는 와중에 알 것만 같은 어떤 찰나에 존재하겠지요. 진실은 순간적이고 미끄러지는 거고요. 그러니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해서는 감각으로만 말할 수 있을지도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거짓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요.
대화 중에 ‘사람, 사람들 참 모르겠다’는 엉뚱한 화제로 이야기가 길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때 작가는 신에 대해 말했다. 신이 인간에게 뭔가를 줬다면 아마도 분투하는 마음일 것 같다고. 뭔가를 이해하려고, 사랑하려고,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분투가 언제나 미스터리였다고 말이다. 짐짓 무거운 이야기 끝에 우리는 서로 어색한 기운을 누르려는 듯 크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 그 순간, 내 마음에도 동조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분투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한 인간을 그 자신이게 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힘이 아닐까 싶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나의 마음을 숨김으로써 그 자리를 비추던 이야기의 빛에 더 몰입하고 싶었다. 그 순간에 빛이 아주 환했기 때문이다.
- 1) 박세희 「흥미진진한 추리와 감각적인 문장의 눈부신 만남…백수린 ‘눈부신 안부’」, 문화일보 2023.6.24.
- 2) 이경진 「외국어로 말 걸기」, 『창작과비평』 2014년 여름호 263면.
- 3) 박세희, 앞의 글.
- 4) 김효실 「21이 사랑한 작가 백수린① “내가 재현하는 인물들을 책임져야죠”」, 한겨레21 20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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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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