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자음과모음 2025년 여름호(제65호)
인간을 다시 쓰는 이야기들
― 윤영광, 『칸트와 푸코―비판, 계몽, 주체의 재구성』, 북콤마, 2025.02.
― 윤은주,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 세창출판사, 2025.04.
윤영광의 『칸트와 푸코』는 저자의 박사논문을 근거로 하여 ‘비판·계몽·주체’라는 세 가지 개념이 칸트와 푸코의 철학 ‘사이’에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양상을 연구한 논문 모음집이다. 특히 윤영광은 현상 자체만 보는 것을 지양하는 칸트적 의미의 초월적 위치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는 ‘초월적 읽기’의 자세를 연구의 기본 토대로 삼고 있다. 이는 “지금 현실화되어 있는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의 잠재적 상태를 상상하고 구성할 수 있는 것, 그러하여 텍스트를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 액체화되어 있거나 언제나 이미 해체된 것으로 볼 줄 아는 것”으로 봄으로써 “텍스트의 잠재적 차원과 관계하여 새로움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실천’”1)을 행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칸트적 주체의 (재)구성」은 칸트가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할 때 그의 비판철학에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관계 혹은 배치에 따라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멀리까지
그중에서도 「칸트적 주체의 (재)구성」은 칸트가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할 때 그의 비판철학에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관계 혹은 배치에 따라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다. 칸트 철학이 ‘종합(Synthese)’을 중심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이미 주체가 반드시 종합을 거쳐야 할 정도로 이질적인 능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이루는 고유한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질적이고 (아직) 비인간적인 능력들의 맞붙고 흩어짐만이 인간을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처럼 본성상 다른, 고유하게 인간적이지 않은 요소들의 공존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비인간적인 요소를 고려함으로써만, 그러한 요소들 간에 관계라는 관점에서만 대답될 수 있다. 칸트에게 ‘인간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 같은 인간학에서 인간성은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러한 개방성은 주체 내부에서 능력들의 불일치라는 형태로 경험된다. (21쪽)
윤영광은 이 지점에서 ‘인간’이라는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칸트의 동일성의 주체 내부에 이미 비동일적 운동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짚어내는 방식으로 그는 “유한성과 무한성이 불일치의 방식으로 공존하는 지점”인 한계를 “인간의 자리”(46쪽)로 지정한다. 안도 바깥도 아니고, 안인 동시에 바깥인 이 ‘한계’는 정확히 지젝이 말하는 칸트의 예지계와 현상계 ‘사이’1)와 동일한 영역이다. 또한 이곳은 분명한 의미에 붙잡히지 않는 기이한 괴물성들이 도사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절대적 이질성을 사고하는 이성의 사용자인 인간은 언제나 틈이 있는 존재로 자신을 (재)구성해내는 운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에서 윤은주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치적 주체의 행위인 공론장에서의 ‘저항’이 힘을 잃은 현실을 돌아보며,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위인 ‘생각함’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생각함을 본질적 특성으로 갖는 인간은, 세계를 지켜보고 생각한 뒤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세계를 끊임없이 형성해 나간다. 다소 쉬운 내용을 담은 이 책에서 윤은주가 가장 강조하는 바는, 그러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치적 행위가 가능한 곳”이 형성되었을 때 도래할 “아렌트의 정치가 필요 없는 사회”(153쪽)를 우리는 꿈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염두에 둘 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재고하고 인간의 힘과 역량을 다시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최근의 문학적 상상력들이 더없이 반갑게 느껴진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는 작가들은 특히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다시 보는 경향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그런데 이때의 신들은 보편적 의미에서처럼 초월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없이는 현실화할 수 없기에 인간을 욕망하고,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이 닮아 있기도 하다.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잉여성을 내부에 지닌 신들의 허물어짐은, 인간이 자신을 부수고 능력과 요소를 다른 패턴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해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제 공백과 무를 내부로 끌어안은 신과 인간이 거듭 쇄신하는 과정을 살펴볼 차례다.
신과 인간의 배후, 운동하는 생명력
신종원, 『불새』, 소전서가, 2025.
신종원의 『불새』는 우주를 구성하는 4원소를 주제로 한 그의 장편소설 기획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물’과 ‘죽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갔던 『습지 장례법』(문학과지성사, 2022)과 달리 『불새』는 ‘불’과 ‘생명’을 소설의 골조로 삼는다. 『불새』는 쉽게 읽히지 않는 소설이다. 방대한 분량, 지역과 인종 그리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역사의 삽입, 다채로운 형식, 신과 인간을 아울러 터져 나오듯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무수한 목소리 등 읽는 이를 곤란하게 만들 법한 요건들이 이야기 속에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범박하게나마 정리해보자면, 소설은 ‘성배 도난’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한국인 신부 ‘바오로’는 모종의 이유로 신을 섬겨온 기존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사제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이 자신을 사제의 길로 이끌었던 ‘베드로’ 신부와 갈등을 겪는다. 늙은 신부는, 젊은 신부가 진품 성배를 들고서 예수의 성령을 현재에 체현하는 성체 성사를 행하는 모습을 꿈에서 목격했다고 말하며, ‘바오로’에게 스페인에 안치된 성배를 직접 보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런데 때맞춰 성배가 도난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소설은 사라진 성배의 행방을 추적하는 동시에 “진짜 성배”(27쪽)의 신성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끈질기게 탐문한다.
이러한 과정은 앞서 질문했던 ‘신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수천 년에 걸쳐 성배를 빼앗고 빼앗기며 적대를 형성하는 역사를 환원적으로 구성한다. 성배를 신의 영성과 동일시하여 그것을 거머쥐었을 때 신과 같은 권세와 영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종원은 바로 이러한 믿음 속에서 무엇이 배제되었는가를 질문한다. ‘바오로’의 회의는 삶이 신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신격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물음은 성당의 소년부 성가대원 ‘헬레나’의 죽음을 계기로 싹튼 것이다. ‘헬레나’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중절 수술을 고려하면서 자신에게 면담을 요청해 왔으나 생명을 중시하는 가톨릭의 교회법에 얽매여 적극적으로 조처하지 못했고, 이후 그가 자살한 데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와 가치의 최상단에는 언제나 인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기원을 은폐하고 신과 진리의 이름으로 살아야 할 이와 죽어 마땅한 자를 구분한다.
즉, 『불새』는 일종의 ‘믿음의 계보학’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습이 축조한 특정한 삶을 형성한 뒤, 이를 강조하고 반복해 온 인간의 역사야말로 신앙이 지닌 민낯임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성배가 단순한 그릇 또는 컵 이상의 물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 역시 이러한 인식과 동궤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도 신종원은 형이상을 전적으로 몰아내고 형이하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신적이고 영성을 지닌 존재들을 거부하고 현실에 살아 숨 쉬는 인간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 소설은 신성의 의미를 재설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신종원의 새로운 믿음에 의하면 권능은 지상을 초월한 하늘나라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가라앉고, 죽은 뒤 다시 일어서고 날아오르기를 반복하는 생명 자체에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삶은 신의 의도에 따라 정해져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삶은 우연과 영원 속”, “반복과 무한”2)(395쪽)의 틈에서 끝을 모르고 피어오른다. 그러므로 그칠 줄 모르고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생명력만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무언가다.
그리고 이 역동성은 반드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를 필요로 한다. 신성은 육신이라는 그릇에 소복이 부어져야만 현실에서 발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은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을 통해서만 현현할 수 있는 것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중간 지대에서 신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다. 소설적 상상력에 의해 신 ‘야훼’에게 영광을 안겨준 존재로 설정된 또 다른 신은 ‘헬레나’와의 독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무에 복무하라 다그친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삶이라는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다. 별들은 항행하고, 돌들은 굴러떨어지며, 새들은 노래하고, 인간은 살 것이다. 인간은 싸울 것이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자기 앞의 혼돈을 거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나와 빛 쪽으로 걸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은 움직임이고, 생명은 항력이며, 생명은 노래하고, 생명은 날아오른다. 그러니 아이야, 어서 자리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삶을 개시하라. (177쪽)
신의 말에 따르면 삶은 그 자체로 목적적이다. 생명에 대한 정언명령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라’가 아니라 그저 ‘살아라’라는 문장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는 ‘헬레나’에게 신은 곡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네가 죽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171-172쪽) 신이 음성으로 현현한다면, 그것을 세계 내에 역사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육체와 영이 결합한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뿐이다. 신의 음성이 “명령이 아니라 요청”(369쪽)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지점에서 신과 인간이 포개어진다. ‘바오로’가 사제직에서 물러나고자 한 이유가 신을 등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더라도, 당신을 섬길 방법을 찾고 말겠”(21쪽)다는 다짐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신과 인간은 타오르는 빛을 삼키고 자기 자신을 무너트림으로써 기존의 세계를 쇄신할 수 있는 생명력을 서로 공유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의 위치는 일방적으로 믿는 자에서 역동적으로 행하는 자로 옮겨간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바오로’는 늙은 신부의 꿈처럼 성배를 쥔 채 ‘헬레나’의 영을 기꺼이 믿음의 성당 안으로 포용하여 새로운 성찬례를 거행한다. “죽은 바오로의 몸 안에서 또 다른 바오로가 일어”설 때, “이 바오로는 한낱 일꾼이나 몸종, 대리자 따위가 아”(372-383쪽)닌 한 세계의 주인이자 일종의 신으로 좌정한다.
신종원의 소설은 신과 인간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 가는 방식으로 둘을 겹쳐둔다. 둘은 서로 믿음과 행위의 근원이자 배후가 되어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신성의 다른 이름은 곧 생명력이고, 이는 영과 육체가 분리되었다가 결합하기를 반복하는 운동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성은 현실에 존재하는 균열을 가시화하고 틈을 더욱 크게 벌려 놓는다.
신과 인간의 사이, 괴수가 되는 꿈
김보나, 『나의 모험 만화』, 문학과지성사, 2025.
김보나의 첫 시집 『나의 모험 만화』에는 신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신들은 어딘가 엉성한 구석이 있고, 사람들은 난데없이 기이하게 돌변한다. 물놀이를 즐기는 작고 어린 신(「휴무」), 견디고, 갇히고, 훼손되는 신(「물에 빠지는 이 모든」), 인간과 내기를 하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에 가호를 내리는 신(「여기 지팡이 있어요」)과 같은 형상은 진리의 보증자요, 근엄한 실체라는 보편적인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마찬가지로 끓는 유황천에서 다시 태어나고(「탕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 방사선에 노출된 후 괴수로 변한 인간(「춘일광상(春日狂想)」, 「「미친 봄날 생각」」)들 역시 범상치 않다. 그래서 김보나의 시에 등장하는 존재들을 신과 인간으로 명료히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신과 인간 사이, 그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다.
우리가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말이나 글로 전해 내려온 것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내가 가진 단 하나뿐인 것 중에 아무것도 바치지 않아서 신은 화가 난 것일”지도(「차이나타운」) 모른다고 추측하고, 불운 앞에서는 “불경을 저질러서 이렇게 된 걸까?”(「천도복숭아 나올 무렵」)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보는 신을 이루는 기존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금기를 세울 수 있는 초월적 권능에 의해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내릴 수 있는 자라는 해묵은 설정 말이다.
하지만 시인의 관심은 만지거나 닿을 수 없는 추상적인 신적 가치보다 함께 맞붙어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를 향해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에 집중한다. 불변하는 가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라고 행동하는 인간의 간절함으로부터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신이 보증하기에 마땅히 행할 만한 ‘어떤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모든 사랑’이 진정한 신성의 자리를 대체한다. 시인이 시집 속에서 신들이 직접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대신 그것을 목격한 인간이 대신 이야기하도록 설정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시력을 포기했으니까 박쥐는 어둠을 헤쳐나갈 초음파를 얻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어둠 속을 같이 걷고 싶은 사람에겐
이렇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이 진화하자
겨우 날개가 달린다고 해서
천사가 되지는 못할 테지만
양팔과 날개를 교환할 기회가 생긴다면
두 팔을 남겨 사람을 안아보자
검은 날개를 달고도 악마가 될 수 없다면
사람과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하자
산에서는 한 사람이 곁으로 다가서면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다
포개지는 그림자의 윤곽
무언가가 강림하는 저녁이다
― 「윙스팬(Wingspan)」 중에서
인용한 시에서 보편적 의미를 지닌 신성은 두 차례 부정된다. 시인이 창조가 아닌 진화를 꿈꿀 때, 천사와 악마라는 선악의 대립 구도를 가뿐히 벗어날 때가 그에 상응한다. “사랑의 전문가가 아니면서/ 한 사람의 손을 잡기도 했”던 시인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위의 두 가지 방향을 선택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 한 사람이 타자와 함께 포개지는 순간 “무언가가 강림”한다. 다른 이와 더불어 계속해서 삶을 이어 나가는 생동하는 인간만이 세계의 진정한 근원이 될 수 있기에, 인간이 행하는 사랑이 신성의 진정한 배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집을 자세히 살펴본 이라면 시인에게 신과 인간은 대립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신과 인간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틈, 사이에 머무른다는 공통점으로 한데 묶인다. 시인은 이 확정 불가능한 미결정의 상태야말로 곧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을 단연한 태도로 전달한다. 이러한 전언은 「물에 빠지는 이 모든」에 잘 담겨 있다. 시의 서두에서 “신년”이 어디서 오는지를 묻던 화자는 미래를 알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기도할 것이 없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 뒤이어 기도실에 자리한 성상(聖像)의 사진을 찍던 화자가 새롭게 덧붙이는 신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신의 일은 고개 숙인 시선을 견디는 것. 나는 파인더에 신의 얼굴을 가두었다. 빛에 잠기면 훼손되는 신성의 표정.” 시인에게 신은 기도와 믿음을 들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욕망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버텨야 하고, 쉽게 손상되기도 한다.
고정되지 않은 채 유동하는 신이라는 별다른 존재 양태는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는 시인의 인간관과 연결된다. 화자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상에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담기고 어리는 모든 형상을 일그러트리고, 묵은때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행위가 바로 설거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진 유황은 나를 태울 만큼 충분할까” 자문하던 화자는, 물이 들어찬 설거지통의 표면에 비추어진 자신의 “물에 갇히는 얼굴”을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한다. 이 지점에서 파인더에 갇혔던 신의 얼굴과 화자의 얼굴이 겹친다. 온전히 재현하거나 반사될 수 없기에 불안정한 존재들로 밝혀진 인간과 신은, 그렇게 흐릿해진 만큼 존재론적 층위에서 같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는 오직 이 땅에 발 딛고 살아 숨 쉬는 육체를 지닌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과 함께 시집 곳곳에는 믿고 바라기보다 행하고 나아가는 이들의 행보가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티칸에서 온 사람」의 화자는 어디에 뿌려도 효험이 분명하다는 “바티칸에서 온 진짜배기” 성수보다는, 성수를 사려는 “아무 데나 축복이 필요한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다. 많은 면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비행운 인간”이지만 화자는 성수를 “마실 수도 피할 수도 있”는 힘을 지닌 인간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말한다. “나는 나아간다. 소음을 끌고 달리는 열차를 나서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다”고.
「슈베르트 방은 말한다」 역시 비슷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도 시인의 관심은 인간을 향해 있다. 조금 더 명료히 말하자면 시인은 행위하고 변화하는 인간을 눈여겨본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인간의 생이 몇 장짜리 악보이고/ 하나의 곡을 반복하는 것이 연습이라면/ 하나라는 고통을 되풀이하는 인간은 어떤 악기인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화자가 질문하는 이유는 “손 안에 흰 달걀을 쥐고” 살아가면서 같은 고통을 반복하는 인간 중에는 “그것을 지키려는 자도, 깨뜨릴 각오로 두드리는 자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두 종류의 인간상 중 “마지막까지 노른자로 손을 적시는” 이를 더욱 궁금해한다.
“흰 달걀”처럼 주어진 것을 본래 모습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믿음은 살아가면서 마땅히 수호해야 할 순결하고 깨끗한 실체를 상정하고 있다. 신이 표상하는 법과 질서 역시 그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시인에게 불변하는 가치란 없다. 우리는 이미 여러 시편을 통해 신은 완전하지 않고, 신성은 변형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심지어 신의 권세는 인간에게 의지해야만 발휘된다. 그래서 인간은 “기도문을 발명”(「바티칸에서 온 사람」)하고, 첫 제의를 앞둔 “수습 사제는 기억에 의지하지 않을 때까지 연습한다”(「수련 일지」). 이처럼 “어떤 이의 목표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잊는” 데 있다. 인간은 주어진 섭리를 체득하고 체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같은 고통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삶의 양식을 수련한 뒤, 그것을 기꺼이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또 다른 삶을 불러들인다. 김보나의 시가 유독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집의 이곳저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시인은 죽은 이들을 다시 세계로 불러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과 인간의 사이처럼,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에 서 있다. 모두가 “한 번쯤 죽었다 돌아온 사람”(「장수민해독센터」)처럼 보인다.
기억해?
전학 간 너의 긴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나를
너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한 나를
명동성당 뒤편에 딸린 여고에서
너는 만화부였고
나는 클래식 기타부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좋아한단 거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
십자가 형태의 길에서 성호를 긋지
어른이 된 네가 여기 있다면
너를 납치해 걸어갈 텐데
기자들과 카메라가 화동처럼 뒤따르는 행진이야
스물셋에 처음 간 퀴어 퍼레이드에서처럼
일생에 단 한 번
잊을 수 없는 고백을 듣고 싶었지만
나는 늘
먼저 고백하는 사람으로 자랐어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을 병상에 모아놓고
안녕 나 암이래
말하고 싶었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어
성당에 못 들어간다면
사각사각
창밖에서라도 미사를 구경하고 싶네
고딕 첨탑에 기대 낮잠 자고 싶네
하다못해 절 마당을 비로 쓸면서
발등부터 목덜미까지
누군가 필사한 경전의 글자로 뒤덮이고 싶네
마취총을 맞고
수술대에 올라도
감당하기 힘든 마음처럼 몸이 불어나도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어
작년에 꽃구경을 한 벚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기다릴게
만날 수 없는 사람
― 「「미친 봄날 생각」」 부분
그냥 인간이 아니라, 죽었다 다시 돌아온 인간이 더욱 각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이 기존의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다른 존재가 되길 욕망하는 건 결국 사랑하기 위해서다.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학창 시절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친구의 퀴어한 마음을 모르는 척해야만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뒤늦은 답장을 쓰고 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에 답할 수 없었던 건 “십자가 형태의 길” 위에서 살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고백”이 당도하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마땅하다고 선별한 것들만을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암을 겪은 뒤 방사선에 노출된 화자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괴수”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규정된 의미에서의 사람이 그동안의 마음을 가로막아왔다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시인의 꿈이 “괴수 김보나가 되는 것”이고, “힘이 센 짐승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손을 흔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과거의 자신에게/ 화약이 터지는 광경을/ 불꽃놀이라고 부르는 여름”(「춘일광상」)처럼 기존의 자신과는 다른 인간, 다른 존재가 되겠다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은 시인에게 “키 작은 주인공이/ 딱 한번 용기를” 내는 만화를 끊임없이 그리게 만든다. 시인의 “주인공은 그저/ 다들 지나치는 사육장의 토끼를/ 혼자 돌보는 사람”이다. 영웅의 “성장소설”은 괴물과 타자를 물리치고 독단적인 인간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모험의 끝은 친구를 만드는 일”로 그 의미를 바꾼다.(「나의 모험 만화」) 신과 인간, 인간과 괴수, 인간과 또 다른 의미의 인간 사이를 부유하는 김보나의 시는 시인이 지금 여기의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해 나갈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모험 만화」의 마지막 연은 “(계속)”으로 닫히지 않은 끝을 맺는다.
인간만의 현실, 다가서는 힘
김동식·서수진·예소연·윤치규·이은규,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문학동네, 2025.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2025년 단편소설 앤솔러지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는 올해도 역시 현실 속 노동하고 분투하는 인간 군상을 적실히 보여준다. 여덟 명의 작가들은 뛰어난 소설가적 기량과 더불어 회사원, 다큐멘터리 PD,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전직 주물공장 근로자라는 다양한 노동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 변화를 거듭하며 새로운 신성을 일구는 주체로서 인간을 다시 보려는 이 글의 마지막을 노동하는 인간의 현실을 묘파하는 소설집을 추천하며 닫는 이유는,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소설 쓰기를 통해 무엇보다도 인간의 힘을 헤아리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나 투기자본주의와 같은 용어의 설정만으로는 현재의 삶에서 감지되는 위태로움과 불안을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정제된 개념과 달리, 일상에서 곤궁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경험은 다만 세찬 감각만이 쏟아지듯 엉겨 붙는 혼란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원인과 대책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뚫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문학에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힘 있는 문학이 줄어든 것 아닌가 의심”3)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현실에 눈 돌리지 않겠다는 굳세고 치열한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권하겠다는 소설들에 우리가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획에 걸맞게 소설집에는 현재 노동시장의 상황의 실정을 반영한 다양한 직업들이 등장한다. “게임 머니 팔아서 쌀 사 먹는다”는 밈으로부터 생겨나 “게임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 된 “쌀먹” 혹은 “쌀먹충”(김동식, 「쌀먹: 키보드 농사꾼」, 13쪽)인 ‘김남우’, 호주의 대기업 슈퍼마켓에서 한국인이라는 아시아인의 정체성으로도 균등한 승진의 기회를 받을 수 있으리라 꿈꿨으나 그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얼굴”(서수진, 「올바른 크리스마스」, 72쪽)로만 남은 ‘주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가름이 친구 관계라는 사적영역까지 침투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선미’와 ‘지선’(윤치규, 「일괄 비일괄」), 방송을 위해 타인의 내밀한 면에까지 무감하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는 현실이 “진정성”으로 포장되는 것을 목격하는 시사교양 PD(이은규, 「기획은 좋으나」, 136쪽),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백화점 지하 삼층에서 직원들을 위해 마사지를 제공해야 하는 시각장애인 헬스 키퍼(조승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작가의 꿈을 접고 일본 기업에서 데이터를 관리하고 적용하여 AI의 정보력을 체계화하는 일을 했을 뿐이지만 기술력을 이용하여 저지르는 폭력과 부조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부진’(황모과, 「둘이라면 유니온」)등. 이들은 주로 플랫폼 자본주의 내에서 일관적인 노동 기회를 보장받을 수 없고, 경쟁력이 증가한 탓에 합당한 보수나 대우를 당연하게 감내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가들은 이들의 힘겨운 처지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위태로운 세계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운이나 질서가 아니라 재난의 시대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생활력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사이트를 경유하여 할머니들의 돌봄 노동자라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젊은 여성 청년 ‘희지’를 그린 예소연의 「아무 사이」는 상시화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일상을 다르게 반복할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 작가는 노동의 지속 가능 여부에만 매달리게 된 나머지 인간적인 삶이 억눌리게 된 실상에서도 나지막한 희망을 본다.
혼자 지내는 할머니들의 집으로 찾아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희지’는 삼 년 만에 ‘시터닷컴’에서 일산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시급을 받는 ‘베스트 시터’가 된 플랫폼 노동자다. 할머니를 돌보는 시니어 시터 일은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게 항상 무서웠”(88쪽)기에 퇴사를 결정했던 ‘희지’가 버티는 삶이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고 계획하고 운용하는 식”의 삶을 살기 위해 찾은 “그나마 정을 붙이고 해나갈 수 있는 일”(89쪽)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꽤 많은 할머니가 있고 나는 그 모든 할머니를 빠짐없이 사랑한다”(79쪽)는 자부와는 별개로 ‘희지’는 자신이 맡은 노동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지에 대해 자신하지 못한다. 플랫폼 회사의 교육장에서 ‘베스트 시터’로서 “돌봄 노동이 필요한 시대에 누구보다도 시터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업무적 책임을 인지해야” 하며 “책임의 범위는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거라고”(89쪽) 연설하면서도 자기의 말을 거짓말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희지’에게 이 일은 임금 노동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직장에서 모멸감을 반복적으로 느끼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겨 사직서를 냈음에도 남들처럼 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아주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한 걸까?”(88-89쪽)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기를 거쳐 안착하게 된 소중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희지’에게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사회에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95쪽)에서 존재 의미를 느끼는 일이다.
그러나 회사 차원에서 플랫폼 노동자를 보호하고 지원하기보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도록 종용하는 사회에서 ‘희지’가 선 자리는 더없이 위태롭다. 수많은 경쟁자와 언제 끊길지 모르는 고용인의 유연하고도 아슬한 연계는 여타의 노동보다 더욱 관계적인 속성을 지닌 돌봄 노동을 수행하면서도 부당한 처지를 감내하도록 만든다. 아무리 “돈을 주고받는 관계”(94쪽)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계’가 아닌가. 한겨울에도 찬물만 쓰게 하고, 매일 얼굴을 보고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지만 휴대폰에는 ‘아줌마’라고 저장해도 되는 사람. “그저 고용된 사람일 뿐”(97쪽)인 위치. ‘희지’의 자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돌보는 할머니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참고 견뎌온 감정은 매일 두부를 사는 ‘두부 할머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느 날 터져버린다. 할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질 수도 있다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희지’는 보호자인 며느리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할머니가 갔을 법한 모든 곳을 찾아다닌다. 온 동네를 헤맨 뒤에도 홀로 돌아온 할머니의 집에서 두부를 먹던 중 며느리의 전화를 받자 ‘희지’는 그만 할머니가 집에 있다고 유려하게 거짓말을 하고 만다. 그러나 사실 할머니는 그날 며느리와 함께 있었고, 침묵하는 ‘희지’에게 그녀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101쪽)기에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할머니, 전화번호 아직 못 외웠죠?”
“그렇지.”
“내일 또 외우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가 별다른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나름대로 할머니와 나 사이에 어떤 의의를 두고 싶었다. 함께 한 일을 만들면 결국은 같이 뭔가를 하게 된다는 그 단순한 흐름이 우리 사이에 지속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문득 할머니의 휴대폰에 내 이름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전화번호부 앱에 들어가보니 ‘희지’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마치 백지처럼.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담백한 나의 이름, 희지. 나는 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이 아주 많이 떠올랐다. (103쪽)
이때 ‘희지’가 내리는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렇지 않게 다음날 두부 할머니를 만나고, 교육장에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미래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전부”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102쪽)을 깨달은 ‘희지’는 할머니의 휴대폰으로 며느리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전화번호를 외우기로 했던 이전의 약속을 재차 확인한다. 할머니의 휴대폰에 저장된 자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을 떠올리는 ‘희지’의 모습을 통해 견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할머니들을 향한 애정을 고백할 미래의 어떤 날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자본이 관계를 압도하는 공식에 굴복하라고 사회가 강요할 때 인간은 기꺼이, 대체로, 자주 굴복하는 존재지만 힘겹더라도 새로운 의의를 만들어 나갈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힘을 믿고 상상하며 쓰는 작품들이 있는 한 인간은 유구히 변화해나갈 것이다.- 1)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7, 214-219쪽 참조.
- 2) 원문에 따른 강조.
- 3) 장강명,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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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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