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현대비평 2024년 여름호(제19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생성언어비평의 필요성과 성립 요건
하루가 멀다 하고 인공지능 관련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2022년 말 OpenAI에서 챗GPT라는 대화형 인공지능을 공개한 이후부터는 가히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여기서도 인공지능, 저기서도 인공지능 얘기가 한창이다. 너무 많은 기사와 담론이 단시간에 쏟아지다 보니, 평소 인공지능에 관심을 두어온 입장에서도 제대로 정리된 의견을 내놓기가 힘들다. 여기저기서 새롭게 쏟아지는 소식을 일일이 주워 담기에도 벅찬 형편인데, 와중에도 계속 떠오르는 질문은 있다. 계속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문학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나날이 쏟아지는 인공지능 이슈와 관련해서 관심이 가는 대목은 한 가지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이자 거대언어모델로서의 인공지능이 기존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어떤 영향을 미치면서 문학의 미래를 바꿔놓을 것인가? 혹시라도 새로운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이 나올 가능성을 점쳐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인공지능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오랜 시간 인간이 이룩해온 문학의 본질적인 조건을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얘기하고 보니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가는 질문이 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한 가지로 집약되는 것은 인공지능과 문학의 만남이 모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모두를 껴안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차원을 달리하는 신기술로서의 인공지능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이 유의미하게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갈리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일 것이다. 어느 편에 서든 아직은 확실한 근거를 대기가 힘들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문학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사건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그것을 예견할 만한 경험치가 충분히 쌓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은 더듬는 시간이고 지켜봐야 하는 시간이겠지만, 기존의 시각과 언어로는 점점 더 쫓아가기 힘든 속도로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글쓰기 분야에서 유용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텍스트를 산출하는 속도는 이미 인간의 능력을 한참이나 넘어섰다. 게다가 주어진 사안에 대해 참신한 아이디어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뽑아내기도 한다.
범위를 문학 분야로 좁히더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된 텍스트가 기존의 문학을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 것이 일도 아닌 시절에 접어든 지금,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 기존의 문학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흉내를 낸다는 것은 기존의 수준을 뛰어넘지는 못할지라도 기존의 질서를 교란하거나 훼손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지닌다. 가령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그럴듯한 시 작품을 수천 편씩 작성한 다음, 인공지능을 이용했다는 사실만 쏙 감춘 채 문학장에서 활용하는 경우, 그래서 비록 시적으로 높은 수준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대중 취향을 자극하는 작품으로 문학 시장에 진입하는 경우(다수의 평균치를 만족하는 결과물을 뽑아내는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다 베스트셀러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중 취향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기존 시의 현장에는 아무런 여파가 없을까? 아닐 것이다. 적어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볼 수만은 없는 지경에서 다시 시를 생각하고 문학을 고민하는 시간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흉내 내는 것을 넘어 기존의 문학을 위협할 만큼 새로운 언어예술로서의 문학 양식이 등장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문학의 획일화를 초래하는 현상이든 새로운 문학 양식의 출현을 알리는 사건이든 상관없이 문학의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는 사태 앞에서 부득불 요청되어야 하는 언어가 있다. 비평의 언어가 그것이다. 비평은 개별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언어이면서 당대의 미적 조건을 탐색하고 진단하는 언어다. 당연히 개별 작품에 대해서도 작품을 둘러싼 예술적/문화적/사회적 환경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통찰하는 시선을 갖춰야 하는 언어다. 비평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덕목이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는 작품에 대해서도 똑같이 유효하다면, 기존의 문학을 흉내 낸 작품이든 새로운 문학 양식을 개척한 작품이든 모두 비평적 접근이 필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와 같은 텍스트의 생성 조건을 기술적인 차원에서도 예술적인 차원에서도 면밀하게 따지고 논의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 또한 비평의 언어가 담당해야 함은 물론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평은 창작을 먹고 자라고, 창작은 비평이 먹고 자랄 수 있는 곳에서 더 크게 자랄 수 있다. 창작이 없는 곳에 비평이 있을 수 없듯이 비평이 생산되지 못하는 곳에서는 창작도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가 어렵다. 풍성함이 단지 양적인 것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인공지능을 이용한 창작이 우후죽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현시점에서 정치한 판단력을 갖춘 비평의 언어는 필수적이다. 특히나 문학 현장에서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는 텍스트가 문학적으로 유의미해질 수 있는 조건을 면밀하게 짚어보는 비평 작업은 기존의 문학을 위해서도 새롭게 등장할지도 모를 또 다른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자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기계에 의해 생성된 온갖 텍스트가 문학으로서 혹은 예술로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따져 묻는 비평 작업을 강화하고 특화하는 차원에서 별도의 명칭을 붙이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기계에 의해 생성된 언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아 전개되는 비평, 가령 ‘생성언어비평’ 같은 용어가 제기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생성언어와 거기서 비롯되는 문학적 텍스트에 대한 전문적이고 생산적인 비평을 도모하는 개념으로서 생성언어비평이 성립하려면 다음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로 생성언어로 된 작품이 많이 나와 있어야 한다. 문학의 경우 국내외에 걸쳐 많은 창작 사례가 쌓여 있지는 않으나, (점차 더 많은 사례가 쌓이리라는 예상과 별개로) 지금까지 제출된 창작 텍스트만 하더라도 비평적인 언어로 접근할 수 있는 사례는 충분하다. 당장 비평적인 언어로 점검해야 하는 사례도 적지 않기에 첫 번째 요건은 어느 정도 충족된다고 하겠다. 생성언어비평이 성립하기 위한 두 번째 요건은 개별 텍스트에 대한 비평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서 더 근본적이다. 생성언어비평과 맞닿아 있는 개념인 생성문학 혹은 생성언어예술1)의 역사, 특성, 본질 등을 묻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생성언어로 된 문학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과 맞물리는 그 작업을 충실히 통과해야 개별 작품에 대한 분석과 평가도 온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생성문학의 실질적인 저자는 누구/무엇인가?
생성언어비평의 논의 대상인 생성문학의 특이점은 무엇보다 창작 주체인 저자의 개념이 바뀌는 데서 찾아진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문학의 성격이고 정의라고 하지만, 와중에도 결코 바뀌지 않았던 요소가 ‘저자=인간’이라는 등식이었다면,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는 텍스트로 넘어와서는 이 등식이 더 이상 유효할 수가 없다. 인공지능이 텍스트 생성의 도구를 넘어 주체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오면서 ‘저자≠인간’ 또는 ‘저자=인간+인공지능’을 상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저자의 자리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끼어들면 저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와 책임도 간단치 않은 문제가 된다. 가령 어떤 작품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을 경우, 지금까지는 창작의 유일한 주체인 인간 저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지워졌으며 그러한 책임은 저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저자의 권리와 책임은 그러나 인공지능이 창작 주체의 일부로 들어서는 순간 복잡해지고 골치 아파진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협업의 파트너로 삼아 작업한 작품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인간 저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공동 창작 주체로 참여한 인공지능은 적어도 이때만큼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권리는 물론이고 책임을 자각할 수 있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창작 과정에서 아무리 많은 역할을 담당했더라도 자의식이 없는 기계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작품 창작의 나머지 주체인 인간 저자에게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일까? 이 또한 문제가 되는 표현이나 문구를 인공지능의 탓으로 돌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껏해야 인공지능이라는 기계를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하지 못한 책임만 지겠다고 하면 또 어쩔 것인가? 사용자로서 일부 책임을 질지언정 작가적 윤리에 대한 책임은 얼마든지 비껴갈 수 있는 여지가 ‘인간+인공지능’의 저자에게는 애초부터 내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을 통한 창작 행위에서 필히 요청되는 사항이 창작 과정의 투명한 공개다. 인공지능과 함께 창작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개입은 얼마큼 이뤄졌는지, 어디서 어디까지 책임을 지고 인간이 작업했는지가 명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것들이 보여야 이 작품을 왜 썼는지, 어떤 사유와 정서를 담아서 썼는지에 대한 비평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비평의 언어로 접근하더라도 수사적인 장치만 건드리는 작업에 머물 것이다. 작품 저마다의 고유한 사상과 정서를 짚으면서 문학적/미학적/철학적 질문을 동반한 비평이 되려면, 다시 말하지만 누가 어떻게 썼는지, 인공지능과 함께 썼다면 어디서 어디까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았는지가 명확히 보여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창작의 동기와 작품의 주제를 음미하고 논의하는 비평이 가능해진다.
비평 작업에서 작품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상당 부분 저자를 향한다. 저자의 답변을 직접 들을 수 있는가 없는가와 상관없이 저자를 향한 그 질문이 곧 비평의 핵심을 이룬다. 나아가 그러한 질문을 감당하는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서 묻는 것 또한 생성언어로 된 예술을 논하는 비평이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질문을 보낼 수 있는 저자를 상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저자를 특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와는 다른 층위에 놓이는 문제다. 저자 특정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 상정의 문제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선 아래의 사례들을 짚어보면서 논의하고자 한다. 먼저 인공지능을 저자(의 일부)로 내세운 사례다.
나는 오래된 집에 산다
생나무를 때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렇게 튼튼한 나무들 사이에서
이제는 주인을 잃어버린 집
나는 나무의 나이테를 세어보며
시간을 짐작한다
지붕은 비가 새지 않는지
도통 관심이 없다
아버지는 생전에
술을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는 평생
술을 담그셨고
아버지는 평생
술을 받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심어둔 나무의 가지를
하나씩 흔들어본다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가지를 아주 많이 펴야 한다
지붕의 이끼는 매년
풍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며 아버지는 자주
바람 속에 나무의 나이테가 없다고
노래하셨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엔 누구나
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나는 점점
집처럼 되어간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나는 점점
집이 되어간다
- 「오래된 집」2) 전문
2022년 출간된 시집 『시를 쓰는 이유』에 들어 있는 시이다. 이미 세간에 많이 알려진 대로 이 시집은 미디어아트 그룹 슬릿스코프와 AI전문회사 카카오브레인이 공동 개발한 인공지능 시인 ‘시아(SIA)’의 시를 담고 있다. 시아(SIA)는 카카오브레인의 거대언어모델 KoGPT를 기반으로 탄생했으며, 인터넷 백과사전과 뉴스 등을 읽으며 한국어를 공부한 다음 1만여 편의 한국 현대시를 학습하고서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3) 그러니까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 시인에 의해 시가 생성되고 시집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인데, 정작 시집의 표지와 판권에는 슬릿스코프와 카카오브레인을 공동 저자로 표기하고 있다. 아마도 비인간인 인공지능을 저자로 인정하지 않는 저작권 등의 문제로 인해, 자체 개발하여 이름까지 붙인 인공지능 시인 대신, 인간이 몸담고 있는 단체를 부득이 저자로 내세운 것일 게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다시 볼 때, 명목상의 저자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실질적인 저자는 그럼 인공지능인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지점이 인공지능 시인에 의해 시집 한 권 분량의 시편들이 작성되었다면, 인간은 어디서 어디까지 그 작업에 관여한 것인가일 것이다. 시 쓰는 인공지능을 자체 개발한 것 외에 실제 시 창작 과정에서 인간이 얼마큼 관여하고 어떻게 관여했는지가 실질적인 저자를 따질 때 매우 중요해지는 대목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집의 명목상 저자이자 법률상 저자 중 하나인 슬릿스코프는 시아에게 시를 생성할 수 있도록 주제어와 명령어를 입력하고 시아가 생성한 시편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시집에 수록하는 정도만 관여한 것으로 밝힌다.4) 그만큼 창작 과정에서 인간의 조력 없이도 완성도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시를 시아가 생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완성도 높은 시편들이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되고 시집까지 나온 것이 놀랍다면 놀라운 일인데, 한편으로 이런 의문들이 남는다. 가령, 개별 시편마다 주제어와 명령어를 어떻게 다르게 입력했는지, 입력에 따라 생성되는 시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성된 시편들에 대해 인간의 보정 작업이 전혀 없었는지, 있었다면 얼마나 있었고 어떻게 있었는지, 각각의 시 제목은 어떻게 뽑아냈는지,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과 그렇지 않은 시편들의 선별 기준은 어떠했는지 등등 작업 과정 전반에 걸쳐 궁금함이 계속 남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별도의 상세한 설명이 남아 있지 않아 일단은 논의를 보류해둔다. 그렇다면 뜯어볼 것은 작품이다.
위의 시 「오래된 집」은 제목 그대로 ‘오래된 집’을 모티프이자 키워드로 삼고서 생성된 시이다. 추측건대 저 문구가 주제어이자 명령어로 인공지능에 입력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시에 담긴 내용 역시 아버지를 여읜 화자가 아버지와의 추억이 녹아 있는 오래된 집을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가지를 아주 많이 펴야 한다// 지붕의 이끼는 매년/ 풍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와 같은 인상적인 표현도 더러 보인다. 무엇보다 핵심어인 ‘오래된 집’을 중심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시간에 대한 사유가 점층적으로 확장되다가 결말에 가서는 오래된 집에 대한 화자의 동일화된 감정이 도드라지면서 마무리되는 짜임새가 돋보인다. 시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은 아닐지라도 핵심어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시상을 전개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저 시에는 그러나 몇 번을 읽어도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저 오래된 집에서는 왜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일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그들의 손자이자 아들로 짐작되는 화자, 이렇게 삼 대에 걸친 기억에서 왜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여성 가족에 대한 기억은 빠져 있는 것일까? 인용 시의 특징적인 구도이기도 한 부계로만 이어지는 삼 대가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제시되기 위해서도, 조금 더 풍성하게 시상이 확장되기 위해서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존재가 지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배경으로 깔릴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당연한 듯이 생략된 점이 의아함을 남긴다.5)
그러나 이런 의아함은 인간이 쓴 작품일 경우에나 효과적인 질문이 될 수 있다. 저자가 인간일 경우엔 여성 가족이 애초에 없는 것처럼 제시된 구도에 대해 정당한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생산적인 논의를 끌어낼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저자가 시아 같은 인공지능인 경우엔 저와 같은 질문을 던질 곳이 막연해진다. 아니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어진다. 아무런 자의식이 없는 기계가 그저 시 비슷한 텍스트를 뽑아낼 수 있는 최적의 확률에 기대어 단어와 문장을 생성해간 결과물이 저 작품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인공지능이 사전 학습한 1만여 편의 한국 현대시에 편재되어 있을지도 모를 남성 중심의 가족 서사를 문제 삼는 질문이 겨우 가능하겠다. 실질적인 저자가 있더라도 개별 작품에 녹아 있는 저자의 고유한 사상이나 정서를 물을 수 없다면, 작품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시선을 들이댈 수가 없다. 그러한 시선을 담은 비평의 언어가 접근하는 데도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인공지능이 전적으로 실질적인 저자를 담당하지 않고 인간과 모종의 협업을 통해서 작품을 생성했다면, 이 역시도 ‘모종’에 해당하는 협업 과정이 명확하게 보일 때, 그러니까 인간과 인공지능 각각이 어디서 어디까지 작업을 나눠서 진행했는지가 확인될 때, 유의미한 질문을 동반한 비평이 가능해진다. 인간이 작업에 관여한 성격과 정도에 따라 해당 작품에 대한 질문의 수위와 범위가 달라지고 접근할 수 있는 비평의 가능성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의 시는 어떤 질문을 던지면서 어떤 비평을 수행할 것인지를 정하기가 곤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창작 과정의 세부적인 공개 없이 막연히 인공지능이 실질적인 저자인 것처럼만 안내되어서는 깊이 있는 감상과 생산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실질적인 저자의 상정이 비평의 시작이다
작품의 감상 조건이자 비평을 위한 조건으로 저자의 실체가 새삼 중요해지는 이 대목에서 재차 언급할 것이 있다. 저자의 실체가 잡힌다는 것은 저자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저자의 신상을 특정하는 일과 실질적인 저자를 상정하는 일이 별개라는 말도 되겠다. 인공지능에 의한 창작 사례는 아니지만 아래의 시를 보면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말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 「그 쇳물 쓰지 마라」6) 전문
일명 ‘댓글 시인’으로 불리는 제페토의 시이다. 이 시가 담긴 동명의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는 2016년 출간 직후부터 화제를 모으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최근에는 유명 가수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댓글 시인이라는 별칭답게 제페토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각종 사건/사고 기사에 댓글을 붙이는 형식으로 시를 쓰면서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그림책을 냈다. 제페토라는 이름 뒤에 숨은 저자의 신상은 “오래전 그림을 그렸고 그 뒤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도 공부했다”7)라는 이력 말고는 딱히 밝혀진 정보가 없다. 그동안 제페토라는 이름으로 선보여온 시의 화법과 어조 등을 고려할 때,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한국시보다는 1980년대나 90년대 한국시의 영향이 많이 보이고, 그래서 80년대나 90년대부터 시를 써왔거나 읽어온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만 추측될 뿐이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저 시를 비롯하여 시집에 실린 시를 모두 인간이 썼다는 가정하에 나올 수 있는 추측이고 짐작이다.
실제로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인간이 썼다는 전제하에 인용 시를 살펴보자. 2010년 당진의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섭씨 1,600도가 넘는 용광로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망한 기사를 읽고 썼다는 사전 지식을 곁들이면 시를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려운 대목은 없다. 그러므로 이 시에선 정치한 분석보다 창작의 기폭제가 되었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격정에 찬 추모의 뜻을 내비치는 화자의 감정선에 동조하는 태도가 더 긴요해 보인다. 화자의 목청 좋은 발화를 따라서 함께 동요하고 분노하고 애도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간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공명하기를 염원하는 화자, 아니 저자의 뜻이 통해서일까. 출간되고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쇳물 쓰지 마라』는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시집으로 통한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받는 저 시집이, 저 시집에 담긴 화자의 절절한 목소리가 그러나 어떤 독자들에겐 적잖이 불편하게 읽힐 수도 있다. 불편함의 이유를 꼽자면 이런 것일 게다. 우선은 추모와 위로의 뜻을 담고 있는 「그 쇳물 쓰지 마라」와 같은 시가 가장 가슴 아픈 처지에 놓인 유족에게는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신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죽어간 청년 노동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 청년이 빠져 죽은 용광로의 쇳물로 자동차 같은 제품 대신 동상을 만들어 공장 앞에 세우자는 말은 언뜻 숭고한 발상의 전환처럼 읽히지만, 정작 청년의 어머니는 그 말을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일까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 말대로 자기 자식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 용광로가 있는 공장에 가서 자식의 뼈와 살이 녹아서 굳어버린 동상을 그리워하며 만질 수 있을까? 아마도 공장 근처도 못 가서 진저리를 치거나 혼절해버릴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 공장과 관련된 장소나 물건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처럼 목청 높여 외친 추모와 위로의 발언이 정작 불행의 당사자에게는 한 번 더 상처를 안기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저 시는 놓치고 있다. 세심한 배려의 부족으로 원인을 돌릴 수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대상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면 기사에 등장하는 온갖 불행한 사건/사고의 대상에 연민의 감정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취지와 별개로 그것을 발화하는 과정에서 인용 시처럼 훈계조나 명령조가 따라붙는 방식은 여러모로 재고를 요한다.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듯한 어조는 시적 자아가 대상에 대해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동반할 때 발생한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 것을 전제로 한 입장에서는 지극한 연민의 감정도, 추모나 위로의 발화도 제대로 작동하기가 힘들다. 대상에 대한 자아 우위의 시선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시단에서 집중적으로 비판되고 반성되었던 지점인데, 2010년대 들어 이와 같은 자아 우위의 시가 다시금 소환되어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상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제페토의 시에서 불편하게 느끼는 점은 하나가 더 있다. 바로 화자가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저자의 정체가 감춰져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저자가 가명이나 익명 뒤에 숨어 있어야 하니 자연히 화자 또한 목소리만 보이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것도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목소리만 보이다 보니, 아무리 선한 의도를 담은 메시지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 있다. 당연하지만 문학에서 설득력을 갖춘 목소리는 자기 자신을 걸고 나오는 목소리이다. 즉 메신저의 정체를 보이면서 나오는 메시지여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거부감이나 위화감이 생기지 않는다. 메신저 없이 메시지만 있는 목소리는 누구라도 쉽게 낼 수 있다. 누구라도 쉽게 대의를 말하고 감정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걸린 문제를 얘기할 때가 가장 조심스럽고 어렵다. 반대로 자신과 무관한 남 얘기를 하는 것이 가장 수월하고 부담 없는 입장에 놓인다. 메신저를 감춘 채 메시지만 남은 목소리, 그것도 천상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로는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하더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전적으로 공감하기가 힘들다. 그런 목소리는 실재하든 하지 않든 신의 목소리일 때나 전적으로 통할 수 있는 목소리이다.
이쯤에서 상기할 것이 있다. 제페토라는 익명이자 가명 뒤에 숨은 목소리가 불편하게 들리는 이유를 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제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제페토라는 이름 뒤에 숨은 그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도 아니고 기계의 목소리도 아니고 바로 인간의 목소리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목소리라는 것을 전제로 했기에 신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고, 마찬가지로 기계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약 인공지능이 내는 기계의 목소리였다면, 그러니까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된 시의 목소리였다면, 저러한 비판이 제기될 수도 없고 제기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런 자의식도 없이 쏟아져 나온 말에 덧붙일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비록 가명 뒤에 숨은 저자일지라도 그 존재가 인간인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비판도 할 수 있고 공감도 할 수 있고 상찬의 박수도 보낼 수 있다. 즉 비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저자의 신상이 특정되는 것과 별개로 실질적인 저자가 상정되는 순간부터 비평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해도 좋겠다. 반면에 앞서 거론한 인공지능 시인 시아의 경우엔 실질적인 저자를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투명했기에 비평의 언어 역시 막연하거나 지엽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비평의 가능성은 감상의 가능성과 맞물려 있고 감상의 가능성은 무엇보다 저자의 문제, 그러니까 실질적인 저자의 상정 가능성과 맞물려 있음을 인공지능 시인 시아와 익명의 시인 제페토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남는 문제: 문학의 총체성
이상으로 실질적인 저자의 상정 가능성이 생성문학에 대한 비평의 가능성과 맞물려 있음을 살폈다. 특히 인공지능과의 협업에서 실질적인 저자를 상정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각각 어떤 역할을 얼마큼 맡아서 했는지가 명확하게 보여야 한다고 했다. 즉 인간이 창작에 개입한 정도에 따라서 인간에게 할당된 실질적인 저자로서의 비중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편의상 비율만 놓고 봤을 때 인공지능과의 협업에서 인간이 담당한 역할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면, 절반의 비중으로 해당 작품에서 실질적인 저자를 감당하면 될 것이다. 그럼 나머지 절반의 실질적인 저자는 어디서 찾아져야 하는가? 자의식이 없는 인공지능에 떠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면, 나머지 절반은 당분간이든 영원히든 계속 비워둔 채로 놓아둘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당장은 현명한 답을 구하기 힘든 이 문제는 실질적인 저자의 문제를 넘어 생성언어로 된 문학이 숙명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딜레마에 해당한다. 어쩌면 생성언어비평의 주된 논의 대상인 생성문학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생성언어로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한다는 것은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되는 언어를 기반으로 문학과 예술을 한다는 말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이 아무리 많은 개입을 하더라도 언어를 생성하는 작업 자체는 인공지능이 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되는 언어를 인공지능이 담당해서 생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생성문학이 아니다. 생성언어는 개념상 기계에 의해 생성된 언어이고 기계에 의해 생성되어야 하는 언어다.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 같은 글쓰기의 도구 수준을 넘어, 글쓰기의 주체로서, 그리하여 인간 저자를 위협하거나 인간 저자와 협업하는 저자로서 내세워질 수 있는 이유도 엄청난 속도로 문장을 생성하는 능력 자체에 있다. 이전 같으면 인간 저자가 도맡아서 했던 문장의 생산을 인공지능이라는 기계가 떠맡으면서 골치 아파지는 지점은 저자의 개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기계를 통한 생성문학이 활발해질수록 인간의 문학적 체험 자체가 달라지는 사태를 직면해야 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생성언어를 통한 문학적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통해 문학이 생성되는 과정 자체가 인간에게 전혀 다른 경험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창작 과정에서 문학의 결과물만 놓고서 희열을 느끼지 않는다. 작품이라는 문학의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모든 과정을 포함하여 희열을 느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로서 감내해야 했던 지난한 시간이 있었기에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쓰디쓴 과정이 없으면 달콤한 결실도 느낄 수 없다는 논리는 인공지능에 의해 문장이 생성되는 순간에도 똑같이 적용해볼 수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주문이 입력되면 거의 실시간으로 주문에 상응하는 문장을 뽑아낸다. 문학이 되는 문장도, 논문이 되는 문장도, 광고가 되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장이든 실시간으로 생성하는 인공지능이 거의 삭제하다시피 줄여놓은 시간은 달리 보면 인간이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숙고하는 시간에 해당한다. 시적 문장, 문학적 문장, 예술적 문장을 얻기 위해 한정 없이 들여야 했던 시간도 인공지능의 작업으로 넘어오면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 된다. 지나간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스킵(skip)해버리는 그 시간이 이전의 인간 창작자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하고 거칠 수밖에 없는 문학적 체험의 시간이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 문장이 익어가는 시간이면서 문학이 숙성되는 그 시간을 건너뛴 채 온전히 문학을 체험하고 향유할 수 있을까? 창작하는 과정에서 건너뛴 그 시간은 감상하는 입장에서도 문학적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공백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창작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삭제한 것은 단순히 문장 생성에 소요되는 시간이 아니라 오래도록 인간이 누려왔던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것이다.
생성문학의 가능성 측면에서 다분히 비관적인 전망을 보이는 이러한 의견에 대해 누군가는 또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 문장 생성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건너뛴 숙고와 숙성의 시간이 인간에게 더없이 소중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이라면, 그러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생성문학의 미래를 고민하면 되지 않을까? 숙고와 숙성의 시간이 인공지능을 통한 언어예술에서도 똑같이 중요하다면 그러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성언어예술의 다음 스텝을 연구하고 실험하면 되지 않을까? 말처럼 쉽지 않은 연구와 실험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예술적 숙성의 시간이자 체험의 시간이 생성언어로 수행하는 예술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 자체가 또 다른 생성문학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예술적 숙성의 시간만큼이나 지난한 도전과 실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더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이 있으니 바로 문학을 이루는 최소단위의 문제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최소단위가 과연 무엇일까? 음악의 최소단위가 하나의 음(표)이고 회화의 최소단위가 화면을 채우는 픽셀(pixel)이라고 한다면 문학의 최소단위는 그럼 단어일까, 형태소일까, 아니면 음절이나 음소일까? 무엇이 되든 예술 분야에서 최소단위의 설정은 인공지능으로 넘어와서 계산의 최소단위를 산정하는 일과 맞물린다. 계산의 최소단위가 잡히면 그때부터는 속도의 싸움으로 넘어간다. 무한한 경우의 수를 거느린 것 같은 바둑이 ‘한 수’라는 최소단위로 계산 가능한 영역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면,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도 그것의 최소단위가 제대로만 잡힌다면 인간을 넘어서는 창작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의 탄생도 시간 문제가 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문학을 비롯한 예술 각각의 최소단위가 명확히 잡히지 않았고(기존의 예술을 흉내 내는 차원에서만 최소단위가 잡혔을 뿐이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쉽게 잡히지 않을 것 같다. 문학만 놓고 보더라도, 바둑의 한 수처럼 단일한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요소가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으며, 따라서 문학을 이루는 최소단위의 설정은 요원하기만 한 일로 보인다. 어쩌면 시든 소설이든 작품 한 편의 탄생에 동원되는 요소는 사실상 이 세계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 편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읽어왔던 수많은 텍스트, 경험했던 온갖 물리적/감각적/정서적 체험들, 거기에 끼어드는 온갖 우연적인 요소들까지 고려하면, 단순히 문장 단위나 단어 단위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요소가 얽히고설킨 채 작동한 결과물이 곧 한 편의 문학 작품일 것이다.
지금까지 문학 창작을 수행하는 인공지능 연구가 번번이 실패하거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문학을 이루는 단일한 요소를 상정하고자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연하지만 문학은 언어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언어는 문학을 이루는 주된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은 기억으로만 감정으로만 감각으로만 환원되는 무엇이 아니다. 기억도 감정도 감각도 문학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소가 녹아 있는 문학에서 그중 하나만 가져와서 문학을 재현하려는 모든 작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에서 새삼 직면하게 되는 것이 문학의 총체성이다. 문학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총체성을 어찌해야 할까? 아니 어찌 바라봐야 할까? 인공지능으로 문학을 구현하려는 입장에서도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이 총체성의 문제가 접경선이자 최전선을 이룬다면,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언어에도 태생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생성언어비평은 그럼 어느 쪽에 몸을 더 실어야 할까? 어느 쪽에 발을 걸치고서 더 많은 말을 해야 할까? 어느 쪽이 되든 당대의 문학적/예술적 조건을 첨예하게 따지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일단은 말을 마치자. 생성언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말이 남아 있고 또 필요할 거라는 기대와 함께.
- 1) 생성언어비평과 마찬가지로 ‘생성문학’이나 ‘생성언어예술’은 아직 문학장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라서 별도의 용어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인간의 개입 정도와 상관없이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된 문학 또는 언어예술을 뜻하는 용어로 쓰고자 한다. 생성문학/생성언어예술 작품을 비롯하여 생성언어로 된 텍스트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생성언어비평이 간단히 말해 ‘생성언어에 대한 비평’이라면, 생성문학/생성언어예술은 ‘생성언어로 구성된 문학/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 2) 슬릿스코프·카카오브레인, 『시를 쓰는 이유』, 리멘워커, 2022, 16-17쪽.
- 3) 위의 책, 표3 참조.
- 4) ≪매일경제≫ 2022년 8월 14일자 기사 (https://www.mk.co.kr/news/culture/10422597), ≪인공지능신문≫ 2022년 8월 1일자 기사(https://www.ai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25686).
- 5) 인용된 작품에 대한 감상과 분석은 김언, 「‘기술창작시대’의 문학과 인공지능」, ≪파란≫ 2022년 겨울호, 173-174쪽에서 논의한 내용을 되풀이해서 옮긴 것이다.
- 6) 제페토, 『그 쇳물 쓰지 마라』, 수오서재, 2016, 24-25쪽.
- 7) 『조선일보』 2023년 3월 26일자 기사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3/03/25/ZU54FYLE7NFBVL7GUCY5VVHH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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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1. 비평의 입지 문학 용어로서 비평은 작품의 뜻, 작가의 기능, 어느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를 논의하는 작업이라 정의된다. 범박하게는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두루 쓰인다. 그 밖에 방법론에 따라 기술비평, 실천비평, 이론비평, 인상비평 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고, 에이브럼즈의 입론대로 모방론, 존재론, 표현론, 효용론 등 관점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웰렉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으로 그 양상을 대별하였다. 요컨대 문학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내재적 요소와 외재적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한 후 서술 및 평가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이 어떤 종류의 비평에서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면 비평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은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비평이란 위 기준에 의거해 접근된 하나의 결과이기에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전제한다. 전제된 기준은 중층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성과 수행성을 담보하기에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 담론적 성격이 지닌 자체의 곤란도 분명해 보인다. 비평 행위에 내재된 ‘평가’란 한 작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 가치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이래의 이론적 지평에 따르면 어느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제도적 관행을 통한 지속적 작용이다. 평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 활동과 관행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에 가깝다. 어떤 문학작품의 해석과 그 가치에 대한 경험은 상호 의존적이며, 양자는 특정한 가정 혹은 기대를 따른다.(프랭크 랜트리키아·토마스 맥로린 공편, 『문학 연구를 위한 비평용어』) 결국 비평 행위의 관건은 텍스트 구조는 물론 이를 둘러싼 문학사회학적 관계를 수렴하는 평론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세계에 대한 판단은 그 평론가의 입지 기반에 대한 재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형권 비평세계는 1998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에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경기도 안성 출신인 그는 충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때 지역의 중등 강단에 몸담았다. 이어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과정 중 평론 쓰기를 병행하던 그였기에 제도적 등단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제출한 원고는 충분한 내공을 체현하고 있었다. 당시 심사평은 세기말 위기의식에 빠진 시가 영상문화에 대응하는 현장을 균형적 감각으로 다가선 비평적 시각에 주목하였다.(『현대시』 1998년 7월호)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일군의 시인들을 다룬다. 이형권은 장르 의식의 확산과 초월, 도시적 일상성, 우울한 내면세계의 고백, 대중문화의 수용 등이 전통적 시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이라고 보았다. 그중 영상예술의 수용 및 변주를 시적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우로 이승하의 사진시, 하재봉의 컴퓨터시, 유하의 영화시 등을 꼽고, 그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개척하려는 이들 노력은 향후 시적 긴장의 영역을 개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반면 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진정성 차원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들이 예증하는 영상매체의 시적 전유가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 전망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은 향후 지난하게 펼쳐질 장르의 길항을 전조하기에 충분한 비전이었다. 이처럼 이형권은 문학의 본령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그 외부, 어쩌면 문학 장르의 타자성에 대한 시대적 응전 감각을 출발 단계부터 벼리어 온 비평가에 해당된다. 대개 이러한―문학의 장르론에 관한―입장이 취하는 포즈는 이론적 언어로의 무장이다. 문학이라는 범주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한 모더니티의 공재성(共在性)이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주된 관성으로 작동되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 영역을 포함하여 문학은 ‘literature’의 역어이자 제도적 산물로 생성된 것이었고, 이론적 내면화는 한국문학의 정체성 설정을 위한 필연의 수순이기도 했다. 한편 이형권 비평의 경우 이론에의 경사로부터 의도적 거리를 취한다. 이는 여러 지면에서 반복되어 온 비평적 입장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은 시의 정서적 깊이와 높이를 확보하여 시적 감동을 전문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넓히는 일”(『공감의 시학』 서문)이라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문학의 타자라는 분명한 성찰 대상이, 그리고 그 존재 의미를 구명하는 언어는 현학적 외장이 아닌 문학 본연의 공감과 소통 기제라는 입지가 초기 비평 단계로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2. 문학의 타자, 타자의 문학 이형권 비평세계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2006), 『발명되는 감각들』(2011), 『공감의 시학』(2017) 등의 평론집으로 집약되어 왔다.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에 연구서 성격의 다양한 성과물이 평론집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예지 『너머』, 『시와 시학』,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 역할이 주요한 문단 경력으로 꼽힌다. 꾸준한 연구 작업과 더불어 실천적 문단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외현이다. 오늘날 비평 행위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역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구조는 비단 한국문단만의 실정이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대학 교원으로 정착한 이후 평단의 참여에는 소원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형권은 중부권 거점 대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서울과 지역을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이어 온 실천적 사례라 평가할 만하다. 제도적 성과도 다양하다. 그의 저술 중 『공감의 시학』은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상의 대상 평론집이 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이형권 평론이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며, 한국 시문학이 마주하는 핵심 문제에 대해 정공법의 언어로 다가서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그는 이때 자신의 문학 여정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자전을 적었다. 나의 대표적인 평론집은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평론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독자와의 공감을 지향해 온 글쓰기의 결과물들이다. 가능하면 관념이나 이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혹은 관념과 이론마저도 문학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다. 나는 지금도 가장 어려운 작품도 가장 쉽게 비평할 수 있는 평론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평 언어, 나만의 비평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물음표로 출발하여 느낌표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심미적 개성과 인간적 진실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안성천에서 자란, 내 영혼의 자서전」, 『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이 회고에서도 비평적 입지의 방법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제로 내건 공감의 가치가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강조되었다. 독자적 언어와 이론을 향한 포부는 일견 무모하게도 들린다. 어느 장르보다 기존 시학적 지평을 전제로 성립되는 비평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와 이론의 신생은 비평보다는 또 다른 창작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형권 비평의 시각이 이른바 비평과 창작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은, 양방향적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형권의 시학적 탐구는 『미주 한인 시문학사 : 1905∼1999』(2020)라는 중요한 성과이자 비평적 변곡점을 낳았다. 그는 이 연구서로 인해 2021년 김준오시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형권 비평은 출발 단계부터 시 장르의 타자성 문제를 다루었다. 타자라는 주제는 이형권 비평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어어져 왔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서울 이외의 주변부 지역 문학도 일종의 타자”이며 “국외의 한인 문학도 타자의 문학”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다양성의 문학과 확장성의 문학”을 의미하기에 앞으로도 추구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였다.(『신생』 2021년 겨울호) 『미주 한인 시문학사』는 한국문단 내부의 타자성 영역을 최대 이민국이자 패권국이라는 외부로 확장하여 모색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2012년 상반기 LA에서의 방문교수 경험은 이형권 시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경계에 관한 비평적 모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평론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이 주목된다.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맥락 속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시의 형상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문학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심상지리를 구성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주 한인에게 모국어는 도구가 아닌 생존을 환기하는 의사소통적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현전하는 물성이자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에 비견된다. 이 글에서 주요 논거로 제시된 김병현, 배정웅, 오문강 등의 작품들은 디아스포라의 난관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의 동일시 욕망, 이주국 지리 환경과의 정서적 공감, 새로운 삶의 개척 의지 등을 재현한다. 이들 작품에 사용된 모국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실존의 영역을 증거하는 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같은 논의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쟁점 역시 분명하다. 대표적 문제가 이주국 한인문단의 분파적 속성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포함하여, 서정적 언어 구성물로서의 시작 경향이 주류 흐름으로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다. 치밀한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기 어렵다는 게 난관이다. 긴장 없는 자족적 시스템이 매너리즘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실정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중층적 문학 환경 역시 문제적이다. 이런 배경 위에 모국어의 소멸 위기이자 새로운 문학 언어의 개방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양립한다. 이형권은 이중언어의 문제 혹은 현지어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국문학의 매개로서 한국어라는 기능적 판단 외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제로서의 언어관에 입각한 견해로 보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언으로 마무리된다. 한인이 현지어로 창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인 문학은 한글 표기를 전제로 하여 그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한인 문학에서 한글 표현과 현지어 표현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곤혹스럽지만, 이에 대한 선택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국외에서 뿌린 한인 문학의 씨앗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인 혹은 한인의 문화가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나가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것이 비록 과거형이 될지라도, 발해의 역사가 분명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한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 『시작』 2022년 여름호) 물리적 경계 간의 거리가 해체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어’로 상징되는 글로벌 의사소통 기호는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위상은 선험적 가치가 되었다. 모국어라는 숙주의 해체는 디아스포라 같은 문학적 타자가 변주하는 또 다른 생성의 선을 개방할 것이다. 이형권 평론은 디아스포라 시인이 모국어를 통해 존재를 형상화하는 양상을 분류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의 제언은 문학의 타자성을 제도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방안, 다양한 언어와 한국문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3. 또 다른 감각 혹은 환상 이형권이 조명하는 비평적 타자의 영역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문단 경계의 확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을 재고하려는 이론적 모색 역시 초기 단계부터 지속되어 온 탐구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주제가 이른바 환상의 역학이다. 환상의 상상력을 집중해서 다룬 평론으로 「발명되는 감각들―현대시와 환상시학」(『발명되는 감각들』)이 있다. 이 글은 비평가 스스로에게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자리한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지면에서 자신의 대표 평론으로 이 글을 꼽았다. 「발명되는 감각들」은 현대시의 또 다른 주류 범주에 환상의 시를 올려놓은 동력으로 21세기 초의 젊은 시인군을 예시한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혹은 자의식적 시 쓰기에서 벗어나, 환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표출하는 동시에 시적 형식의 재구를 시도하였다. 환상은 단순한 도피나 유희가 아닌, 미적 전복과 시적 실험의 전략적 기제인 것이다. 이형권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요 결 다른 감각을 창조하는 에너지라고 보았다. 김행숙(귀신), 문혜진(메두사), 김민정(아이), 유형진(모니터), 장석원(낙타), 이민하(마네팅) 등의 도발적 이미지를 대표적인 환상의 장치로 거론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들이 현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전유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감동으로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된 시편들의 수용적 거리감은 실험적 외장의 포즈에 비례한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각의 발명보다는 소재주의적 실험 경향이 짙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형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문학적 진정성의 결여를 경계하였다. 이는 환상의 시학이 진정한 문학적 성취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파격에 수반되는 사유의 깊이를 구조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어서 이 글은 환상의 상상력이 폐쇄성과 섹트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역설한다. 환상은 기호로 재현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적 우회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서정성이나 진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기대지평에 어떻게 관계되고 소통하는지의 문제이다. 문학의 경계를 재구성하려는 이형권의 비평적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최근 사례로서 「리진: 로씨아 땅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하늘」(『시작』 2024년 겨울호)은 재러 시인 리진의 경우를 조명한다. 북한 정권에 저항하며 무국적자로 소련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 그의 시가 조국과 언어 정체성을 고수했던 흔적을 개관해 주었다. 이형권은 리진 시의 본질을 우리 언어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리진의 시적 형상이 재러 고려인들의 보편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관찰을 담고 있으며, 언어가 곧 민족을 잇는 정신적 뿌리라는 기존의 모국어 인식과도 연동된다.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존의 기반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모국어는 실체 없는 상징에 머물 수도 있다. 리진의 시가 제한된 독자층에만 읽혔다는 사실은 언어의 고립성과 함께 시적 단절을 지시한다. 이형권 비평이 집중적으로 수렴해 온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현황 속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형권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제도는 보다 정치한 장르론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또 다른 환상의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 이형권 비평이 전유하고 있는 시학적 개념으로서의 환상은 우리 시대의 자유를 사유하는 철학적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의 현학적 분석에 따르면 환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 논리를 보면, 무의식은 매끄러운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침입에서 비롯된 충격과 잔여이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증상(symptoms)’은 트라우마적 단절에 대처하는 방식이요, 그런 단절을 가리기 위한 형성물로 ‘환상(fantasy)’이 작동한다. 이처럼 지젝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자유 의지를 분석하는 기제로서 환상을 전유하고 있다. 현대의 이성은 실재와 같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자유가 존재 방식의 근원적 가능성일 때에도, 자아는 결정된 존재일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로서 미친 도박이자 자기 자신에 선행하는 위태로운 도약이 된다.(지젝, 『자유, 치유할 수 없는 질병』) 결국 주체는 그 자체가 객관화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 간극을 지양하고, 필연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상은 비롯된다. 동일성의 장르로서 시 역시 동종의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운 서정시의 미래를 보듬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이끈 양태가 곧 이형권 비평이 천착해 온 타자의 외연이기도 할 것이다.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비평 작품론1) 2) 1. 전환 서사들과 포스트 비평 최근 ‘포스트 비평’의 담론 지형3)에 동물·몸·정동·존재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환(turn) 서사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사유 및 원리와 부대끼는 과정에서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이어가는 와중에, 잠정적으로는 사물 세계의 ‘얽힘·연루됨’을 언어화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질문을 전환해 가던 차였다.4) 문제는, 이 전환의 사유들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볼 실마리를 명백하게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글쓰기로 육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체감에 있었다. 우선 어떤 이론이 근본적으로 사유의 관점을 조정케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시키는 글쓰기는 여전히 근대의 제도적 지식 체계나 원리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그러한 조건과 교섭하며 쓰는 몸 스스로의 행위 도식이 바뀌어야 가능할 터이지만, 몸이야말로 결코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관성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개인적 딜레마로 여겨진 것이 실은 어딘가에서 차근차근 내파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은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작업을 다시 살피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내내 ‘독자’ ‘읽기’ ‘쓰기’ 등의 문제를 통해 오랫동안 한국문학 비평 현장을 풍요롭게 증거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그 비평 행보를 찬찬히 살피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독자-읽기-쓰기를 주제화해 온 그녀의 작업이 실은 스스로의 몸을 바꾸고 그 몸과 연결된 배치를 바꾸는 과정 자체이기도 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개인적 문제의식 하에서 조금 구부러뜨리는 일이 허용된다면, 예컨대 어떤 연루됨(이때의 연루됨은 주체/객체를 넘어서는) 속 자기 위치를 감각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드는 과정을 글쓰기 자체가 수행해 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잠시, 과거 그녀의 말도 떠올려본다. 그녀는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5)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때는 평범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거느릴지는, 이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었다. 백지은 글쓰기의 이러한 수행적 의미를 ‘비평’이라는 장르의 특징과 관련해서 좀더 생각해본다. 비평이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주체/대상(객관)이라는 근대적 도식이 선명하게 구현되는 장르인 것 같다. 비평의 ABC에 대한 글들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듯, 비평은 대상(객관)으로 놓여 있는 텍스트를 경유하면서 말해지는 주체의(주관적) 형식이라고 여겨져 왔다. 즉, 자기를 말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출발하더라도 거기에는 늘 ‘주체/대상’ 구도의 긴장과 역학이 놓여 있는 것이 비평이다. 대상이 선행되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의미가 감상하는 이의 주관과 연동된 장르라는 특징 탓에, 종종 비평에 덧씌워진 고압적 이미지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백지은 비평에서 언젠가부터 이러한 ‘주체/대상’의 도식성이 여러모로 미미해지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다. 예컨대 (본문에서 다루겠지만) 역사를 ‘감각’하는 방식으로서의 ‘산책’을 주제화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의 도입부는, 대상 텍스트와 필자가 어떻게 얽히고 서로 스며들어 가는지 생생하게 감각시키는 퍽 드문 대목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다 읽고 나서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 산책이 뭐가 좋은 것일까”와 같은, 평범한 말들인데다가 어딘지 비평의 단호하고 명료한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이 진술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상의 호흡에 밀착한 이 조곤조곤한 말들은 읽는 이마저 부지불식중 그 활자에 스며들게 한다. ‘주체(필자)/대상(소설)’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듯한 서술 장면, 그리고 그러한 문장에 읽는 이까지 연루시키는 장면에서 누군가는 ‘비평은 텍스트와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나 최근 에세이적 비평 경향 같은 것을 얼핏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녀의 문장은, 어떤 망설임이나 흔들림이 감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언표화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명료하게 의미화하기 이전의 웅성거림을 감지시킨다. 기존의 장르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백지은의 글에는 여느 비평에서와 같은 단호하고 결연한 어조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확신에 찬 말로 스스로를 주장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향도 백지은의 비평과 거리가 멀다. 이런 특징들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백지은의 글에서 ‘마음’ ‘감정’ ‘기분’ ‘정동’ ‘객체’ 같은 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유물론의 사유가 백지은의 비평을 관통하고 있음도 확인해 두자. 그것은 ‘글 속 내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글 자체로 체화’되고 있는 중이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종국에는 ‘비평이라는 장르’의 성격마저 갱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앞서 적었듯, 비평 장르가 강하게 전제해 온 주체/대상의 근대적 도식은, 그녀가 천착한 ‘마음론’이 오히려 질문하는 것에 다름아니고, 그녀의 글쓰기는 곧 그러한 마음론의 사유를 체현한(emboded)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쓴다’는 일을, 자기로부터 무언가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다시 자기를 세우는 과정으로 설명했던 백지은의 말은 지금 스스로의 비평 궤적에서 활물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글쓰기의 특징이 그녀 자신이 골몰해 온 비평 주제와 관련해 필연적이리라는 점은 다음 장에서 좀더 살펴보겠다. 2. ‘마음’의 조건에 대해 :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2024) 읽기 백지은 비평의 주제와 방법을 최전선에서 확인시키는 글의 하나가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이다. 이 글은 김화진의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된 소설들을 중심으로 ‘마음’의 존재론을 그려간다.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통해 작동하는지 고찰하는 글이다. 이 글의 화두인 ‘마음’은 장르를 불문하고 최근 한국문학의 여러 작품을 통해 언표화되어 왔다. 그것을 ‘감정’ ‘정동’ ‘감응’ 같은 개념을 통해 접근하고자 한 비평적 논의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백지은의 글은, 그러한 개념, 이론들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마음’의 정체를 섬세히 풀어나간다. “적다보니 ‘마음은 대체 뭘까’ 싶은 의문이 소박하게 일어난다”는 식으로, 다루는 주제에 스스로 연결되는 과정을 솔기없이 노출하기도 한다. 물론 그녀의 글에는 마음을 둘러싼 최근의 인지과학, 정동이론, 문화연구 등의 사유가 행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경하게 전경화하지 않으며 정합적 논리로 이어가는 이런 장면에서, 비평도 하나의 작품(이라 말해지는 것)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는 마음이나 감정 등과 같은 것이 어떤 개체적 신체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겨온 우리의 통념을 먼저 뒤집는다. 이 글에 따르자면 마음은 단지 개인의 내부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다. 마음은 “누군가의 가슴속이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한다. 마음이나 감정이 누군가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실은 어떤 무수한 타자들과의 마주침과 연결 속에서 빚어지는 산물이라는 통찰이 저 말에 담겨 있다. 이때 “마음”이란 “이러한 연결 작용 및 상호 조절의 무수한 경우의 수로 된 결과물”에 가깝다. 즉 “마음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그녀는 이렇게 적는다. “내 마음은 물론 나라는 한 사람의 성격과 내가 처한 상황과 나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생겨난 사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생겨나기까지 벌어진 일들은 개인에 귀속되지 않는 집단의 또는 공동의 조건 안에서 복잡하게 출몰하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움직인 결과이므로 또한 사회적인 산물”이다. 단,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다. 첫째, 백지은이 말하는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은 어떤 균질적 덩어리(mole)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마음론은 마음의 보편성이나 균질성이 아니라, 고유한 마음들이 단지 개인적, 사적인 것으로 귀속되기 이전 구체적인 마주침과 연결을 통해 각각 다르게 발현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녀는 “우리가 몸짓이나 표정으로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마음에 보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주요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녀의 말처럼 구체적 조건과 무관한 보편적 마음이나 감정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마음, 감정, 정동 등은 살아있는 존재 모두가 지니고 있다해도, 그럼에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나 특정 조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발현되게끔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확인하지 않는 마음 이야기는 어딘지 불순하고 불철저한데, 백지은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을 말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그녀의 마음론이 존재의 자기구성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음은 분명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정동이나 역량과 무관하게 그저 수동적으로 결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마음론’은 기계적 구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관련하여 ‘나’라는 감각 행위자의 고유성 역시 각별히 강조되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잠시 이런 대목을 보자. “우리의 마음이 사회적 구성물이라 해도, 어떤 공동의 지평에서 바로 그러한 마음이 ‘내’게 지어져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내’가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고유한, 중요한 사실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으로 인해 ‘나’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과거 백지은의 말, 즉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이라고 했던 것이 오버랩된다. 자기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이 단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세계관은 여기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이러한 마음론이 어떤 사유와 고민으로부터 전개된 것인지 그 시간의 궤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의 마음론은 단지 비평에 소용되는 이론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자 그것이 만들어낸 세계관의 한 발현인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내 몸 어딘가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신체 활동에서 구성된 산물이고,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나 경험을 통해 해석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를 움직이고 또한 내가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여 간다는 이 논의의 정합성은 ‘이론’이라는 말에 대한 항간의 오해를 교정하는 데에도 큰 참고가 될 것 같다. 더욱이 대상으로 다뤄진 김화진 소설이 마음론의 매개, 도구로만 소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히 소중하다. 백지은의 글은 쓰는 이(주체) 스스로 소설(대상)에 스미고 얽히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대상(소설)의 고유성은 내내 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따뜻한 공감을 상찬하거나 낭만화하는 식으로만 읽히기 쉬운 김화진 소설을 구출하고, 작품이 지닌 “‘마음’에 관한 탐구 서사”로서의 의미를 풍부히 드러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각 텍스트가 지니고 있을 고유한 의미를 발하도록 하면서, 그럼에도 저변의 관통하는 논리를 발견-전달하는 이 장면은 오늘날 비평적 글쓰기 자체가 전환(turn)하는 한 사례로 읽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 감각하는 역사에 대해 : 「안으로 나가는 역사」(2019) 읽기 한편 백지은 식의 마음론은, 역사를 보는 관점과도 흥미롭게 연결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보다 앞서 발표되기는 했으나, 텍스트를 따라 걷는 이의 심상과 호흡을 그대로 노출하며 시작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이 글은 박솔뫼 장편소설 『미래 산책 연습』을 통해 역사와 나/우리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지 찬찬히 짚어간다. 이 글 역시, 무언가를 장악하고 자기화하여 독자에게 보여주겠다는 비평적 자의식 등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백지은 글의 특징, 즉 텍스트와 나란히 혹은 그것에 스며들어 발화를 이어가려는 비인칭적 발화자의 흔적도 이 글에서 어김없이 엿보인다. ‘비재현’ 사유와 역사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특정 개념이나 이론이 박솔뫼 소설을 압도하거나 유리시키는 법은 없다. 『미래 산책 연습』에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제재로 등장하지만 박솔뫼 소설이 그러하듯 그것은 직접 재현되거나 의미화되지 않는다. 단지 ‘산책’이라는 행위와 그 동선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백지은의 결론부터 적어두자면, 소설 속 산책은 단지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리로 하는 명상”이고 사유의 기반이자 감각-접촉의 형식이다. 그녀의 분석을 통해 주인공의 산책은 부산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과거 사건과 접속하고 미래를 기억하며 현재를 질문하는 역사적 행위성으로 의미화된다. 여기에서 부산 역시 단순한 소설적 배경이 아니다. ‘부산’은 사건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고 교차하며 구성되는 유동적 장이다. 부산은 과거의 역사-현재의 만남-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서로 얽히는 시/공간적 밀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세계가 복수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증거하는 장소다. 박솔뫼 소설 속 자기, 나, 역사 등에 대한 백지은의 설명은 예컨대 일종의 연결신체(assemblage)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론’과 연동되는 것임도 물론이다. 이 글의 출발지점은 ‘이야기가 곧 역사/세계가 아니’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소박한 지점이다. 도입부는 “소설에 드러난 역사/세계는 역사/세계에 대한 ‘인식’”일뿐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본격적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때, 박솔뫼 소설과 역사 제재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등장함직한 ‘재현’ ‘표상’ 같은 개념은 일절 구사되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백지은의 글에서 개념이나 이론은 구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감각과 경험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이 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의 글을 포함하여, 그간 많은 비평은 강단(논문)의 언어와 친연성을 떨치지 못하며 본의 아니게 개념과 이론의 생경함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점은 비평의 독자와 장(field)을 제약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도 여겨진다. 또한, 오늘날 많은 비평 논의가 근대적 재현·표상 너머를 역설할 때조차, 어쩔 수 없이 재현·표상의 언어를 경유하고, 의도치 않게도 다시 기존 재현·표상의 원리가 강화되거나 재생산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서 적었듯 여전히 비평이 근대의 제도적 글쓰기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탓이 우선은 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백지은의 글은 이러한 곤경을 가뿐히(물론 치열한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한) 넘어서는 듯 보인다. 아예 비재현, 비표상의 언어를 고안하고 발명하는 과정 자체가 그녀의 글쓰기에 함축된 듯 보인다. 예를 들어 그녀의 글은, 박솔뫼 소설 속 ‘역사’는 “생각-가정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가정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백지은 식 조어(造語)인 ‘생각-가정’은 단지 “상상으로 꾸며진 가상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음과 불확정의 상태를 가정한 채로 존재하여 알 수 있음과 확정의 상태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위치의 역사/세계”다. 기록, 증언과 같이 익숙한 재현 개념의 한계를 사유하면서 그 너머를 말로 움켜쥐려는 그녀의 고투는 분명 박솔뫼 소설을 포스트 재현, 포스트 메모리의 개념을 통해 읽는 방법과 닿아 있지만 그 목적이나 효과는 분명 다르다. 이 “생각-가정하는 역사”는 어떤 유일무이한 진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이탈시킨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감각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이때 ‘역사적 사실’은 “다만 느슨하게 연계되어 세계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부로서 전체를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통상, 부분의 합이 전체라거나 전체가 곧 부분의 우주를 품고 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통념은 이 글에서 낡은 것이 된다. 백지은이 부상시키는 이러한 연결적 관계들은 어떤 중심/주변의 위계도 없고 총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병렬적인 흐름으로 이미지화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이른바 주체/대상 도식 속에 배치되어 사유되던 이 세계를 다르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인다. 백지은은 박솔뫼 소설 속 “‘나’의 생각-가정”은 “대상에 대한 통제나 지배의 가능성을 거의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의 관점을 주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것도 중심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이 곧 ‘자기’에 대한 근대 이래의 서사를 다시 쓰는 장면의 하나임도 기억해 두고 싶다. 그녀가 말하는 ‘생각-가정’은 흔한 ‘자기’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너머로 개방되며 연결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거나 중심적이거나 주변적이거나 하는 상이한 위상”이 두어지지 않는다. ‘안으로 나가는 역사’라는 제목의 수수께끼도 이제 풀리는 듯하다. 공식 기록 혹은 객관화된 기록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 역사는 그녀의 글에서 오히려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을 향해 접속하려는 움직임, 방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은 어떤 진공 상태의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산책자 역시 단지 걸으며 보는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안의 감각, 사유, 몸의 미세한 반응 속에서 사건을 감지하는 자다. 이때 역사는, 바깥에 그저 놓여 있는 진실이 아니다. 역사는, 삶과 함께 유동하며 점점 안으로 향해오는 감각의 기원에 가깝다. 거칠게 말해, ‘역사/내면’이라는 말처럼 정반대의 벡터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범주들이 이 글에서는 서로를 향해 작동하고 있고, 그 얽힘의 관계가 섬세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이제까지 살핀 백지은의 글과 말에도 상응한다. 그녀가 밀어붙인 비재현·비표상의 말들은 곧 이 세계의 원리를 찬찬히 응시해 온 그녀의 마음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만든 것이 또한 재현·표상을 흘러넘치는 어떤 세계였을 터였다. 비록 재현 체계 안에서 쓰여지는 글이지만, 그럼에도 재현 체계·제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감각시키려는 고투가 백지은 비평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4. 균열을 내고 거기에서 장소를 만드는 비평 백지은의 글들을 읽으며, 이 세계 속 존재나 사건의 연루됨을 발견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들어가는 글쓰기에 대한 개인적 고민을 더 밀어붙여도 될 용기를 얻는다. 읽기-쓰기의 순환적 수행성에 대해서도 큰 자극을 받는다. 읽기(듣기) 없이 쓰기(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당연하지만 오늘날 새삼 중요한 사실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사실 전환(turn)을 둘러싼 이론, 담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말과 담론은 자주 인플레였고, 정작 그것이 제대로 체현, 수행되어 본 일은 썩 많지 않았다고도 생각된다. (과거라면 ‘실천’ 같은 말로 표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체현과 수행이 어쩌면 늘 이 세계의 궁극적 과제이자 관건일 터였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좀처럼 관성과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글은 종종 제자리를 맴돈다.지금, 백지은 작업의 극히 일부분만 읽은 셈이지만, 제도적 비평의 현장에서 그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엿보았다고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유례없는 고민이 이어진 지난 십여 년을 백지은의 행보가 이렇게 증거해 주는 것 같다. 포스트 비평의 형질 변환이 선언이나 논쟁이 아니라 이렇게 글자의 안쪽에서부터 차분하게 진행되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제도의 관성, 시스템의 회로에 균열을 내고 빈틈을 만들며 그곳을 장소화해 온 그녀의 작업에 많은 언어들이 닿고 연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을 기존 방식의 ‘비평’ 같은 말로 반드시 명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하는 편이어서 적는 말이기는 한데, 분명한 것은 늘 각 시대마다 요청되거나 그 시대와 정합적인 글쓰기 양식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백지은의 작업에서 엿본 것도 바로 그에 대한 도약의 한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1)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현대비평』, 2025년 여름호)을 수정 보완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2)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백지은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 /「안으로 나가는 역사」(『문학동네』, 2022년 봄호)이다. 3) ‘포스트 비평’이라는 말의 문제의식 및 그 정황에 대해서는 2010년대 이래 영미 비평-이론계 맥락에서의 논의가 선행한다. 예컨대 브뤼노 라투르의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Critical Inquiry Vol. 30, No. 2, Winter 2004)이 제기한 쟁점이 서구 비평-이론계에서 본격 맥락화되는 것은 Elizabeth S. Anker, Rita Felski, Critique and Postcritique(Duke University Press, 2017)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론을 한국적으로 맥락화하고자 하는 최근의 논의들(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 하권 / 인아영, 「비평과 사랑 : 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을 포함하여, 현재 한국어 문학 비평에서 기존과 다른 패러다임의 글쓰기가 전개되고 있는 양상 전반을 지칭한다. 4) 이에 대해서는 졸고, 「비평, 플러스 알파 : ‘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 「마음의 유물론」(강우근 시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해설) 등. 5) 백지은, 「독자 시대의 문학과 쓰는 개인의 형식」,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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