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현대시 2025년 10월호 (제430호)
림보limbo 속으로 ― 최호빈
1.
림보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해가 뜨고 지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예외 없이 반복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 의미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 온전한 구원도 영원한 처벌도 아닌 기이한 경계 위에 놓인 끝모를 유예의 삶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텅 빈 약속에 기대어 자기 몫으로 주어진 무한한 침묵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견디며 서서히 소진되어 갈 뿐이다. 림보가 때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원형이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구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한없이 갈망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으면서도 간절히 희구하는 인간의 오래된 마음과 그 기이한 관성을 림보의 심연으로부터 불현듯 마주치게 되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흐르지 않는 시간의 더미 속을 오늘도 무심히 통과해 간다. 림보 안에 갇혀 있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망각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금까지의 생과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무한한 반복뿐인 오늘의 심부에 거칠게 쑤셔 넣는다. 어떤 부정도 외면도 더는 되풀이할 수 없을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생의 열기를 창백히 소진시켜 하루치의 안도와 평화를 가까스로 얻어낸다. 그렇게 림보의 일부가 되어 간다. 급류에 휩쓸리듯 림보의 심연에 깊이 좌초된 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허방 속을 무한히 배회하며 림보의 중력에 천천히 소화되어 간다.
이번 최호빈의 시편들은 이 림보의 심연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매혹과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화자들은 공허한 반복뿐인 림보의 시간을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살아냄으로써 정보와 명령의 과잉으로 점철된 현실의 앙상한 구조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오래도록 잊어온 살아 있다는 일의 경이와 그 선득한 실재를 회복해내고 있었다. 의미의 부재를 좇으면서도 섣불리 상상적 매개에 의지하지 않는 신중한 견고함으로 림보가 뿜어내는 육중한 중력을 존재의 내부로부터 캄캄히 씹어 삼키고 있었다. 림보의 심연 속을 항해하는 그 투명하고도 예리한 시적 섭생의 한 방식을 따라가 본다.
2.
림보의 출입구를 발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그토록 선명했던 목표도 출발점도 림보의 중력과 그 자장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것이 한없이 모호하고 흐릿해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림보는 단순히 삶만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온 일체의 가치나 의미까지도, 이에 기대어 뿌리내려온 존재의 모든 시간까지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린다. 림보에 갇힌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동력은 관성이며, 이는 삶의 고유성과 의미를 모두 말끔하게 지워버린 현재라는 강력한 동일성의 중심을 향해 어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아간다. 최호빈의 시는 그 맹목의 관성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투명하게 응시하되 어떤 확신도 포기도 신중히 경계하는 이중의 절제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성찰적 시가 도달하기 쉬운 환원론적 경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 낸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체온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혈압을 잰다
폐활량도, 골밀도도, 시력도, 심전도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맥박을 세고, 혈당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기록한다
오늘이 낮이 긴 날인지
밤이 긴 날인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있다
(중략)
체인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차르르, 차르르 하루가
하루를 굴리고 있다
―「루틴 버그」 부분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맹목적 “루틴”뿐인 삶의 허망함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사유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이 림보의 중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근대적 자각의 형식을 빌린 손쉬운 착각 속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오직 동일한 운동의 “반동”과 그 강도에 기대어 “하루가/하루를 굴리”는 지리멸렬한 삶의 풍경은 명백한 부정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는 우리 삶의 조건이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며 그 삶이 놓여 있는 지배적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계몽적 맥락에서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림보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그 맹목뿐인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호빈의 시는 림보에 갇힌 생의 구체적 세부를 하나하나 주시하고 “기록”해 둠으로써, 그 텅 빈 강박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존재의 깊은 불안과 고독을 읽어낸다. “맥박”, “혈당”, “혈압” 등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수치화한 표백된 추상의 개념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살아가는 뒤틀린 허기뿐인 삶의 중심엔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없는 곳에서/점멸하는 가로등같이 애써 살아가는 오늘이/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나 우리,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닌데, 다음의 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선생님,
저희는 팔을 흔들며 달릴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궁금한걸요
(중략)
마지막 곡선코스를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 친구는 쓰러져 있었고,
한 친구는 울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고,
한 친구는 마치 신호를 듣지 못한 듯
출발선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손에 있었던 것은
건네주고 건네받는 릴레이 바통이 아니라
녹초가 될 때까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0의 릴레이」 부분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경주마의 은유는 이미 우리 생의 보편적 형식이 되었고,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이를 내면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당위적 상식과 표준 내지 윤리적 규율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녹초가 될 때까지” 결코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대의 “릴레이”란 사실 “릴레이”의 형식을 빌린 단독 경주에 불과하다. 우리가 참고 견뎌온 공동체의 경주가 실은 어떤 것도 서로에게 “건네주”거나 “건네받”지 못하는 “0의 릴레이”였다는 깨달음은 날카롭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물론 최호빈의 문장은 그와 같은 체념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비록 영원한 “0의 릴레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릴레이 바통”을 단 한 번도 서로에게 건넨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트랙을 도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이 공통의 운명에 처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였음을 아프게 지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번도 온전히 발설된 적 없는 “우리”가 림보 바깥의 시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면, 다음 절의 시편들은 이를 존재에 대한 질문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전환해내는 시적 사유의 깊이와 그 견고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3.
앞서 다룬 시편들이 림보에 갇힌 삶의 구체적 세부와 그 표면에 비교적 밀착해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다음의 시편들은 성찰적 거리의 매개를 통해 림보의 바깥을 좀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사유한다. 이에 따라 시의 무대 역시 성격이 조금 달라지는데 이들 시편들에서 림보는 맹목의 관성과 공전(空轉)의 열기로 위태롭게 굴러가는 타성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매혹적인 탈경계적 공간으로 변모된다. 그럼에도 이를 림보의 차원에서 일컫는 까닭은, 이 마력의 공간이 언제나 경계와 경계 사이에 놓인 항구적 임시의 공간이며 오직 경계를 넘기 위한 갈망의 깊이만이 그 내부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최호빈의 다음과 같은 시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림보의 중심에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 림보 너머를 사유하고 매개하려는 존재 탐구의 의지를 드러낸다.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겠지. 별생각 없는 이마를 쓰다듬고 사라진 건 누굴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겹쳐 쥔 채, 조금씩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하는 너의 시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가 거기서 깨어난 적이 있다. 오늘도, 내일도.
네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오랜 꿈을 다시 꾸듯 네게 짖고 싶어. 그게 내 운명이라면, 컹컹.
―「데자뷰」 부분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또 건너왔다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돌 하나
정말 내 꿈에 누가 또 있는 걸까
세 번째 돌을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건너오다가 가라앉은 걸까
아니면 그냥 가져간 걸까
그냥 돌아간 걸까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물수제비」 부분
세계는 “미심쩍은 그림자들”로 대표되는 무의미한 일들의 무한한 반복과 단 하나 강렬한 사건적 의미의 출현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적대적 요소들의 대립으로 삶과 세계를 거칠게 이분화하여 환원시키려는 폭력적 의지와는 별 관련이 없는데, 의미의 부재와 결여는 상실된 존재의 시원을 회복하기 위한 인식의 토대이자 판단의 근거일 뿐, 무구한 세계에 죄를 물으려는 핏빛 단죄나 원한의 투사가 아닌 까닭이다. 그의 화자들은 “너”가 “날 선택했”다는 명료한 판단과 전제 위에서,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타자의 방문과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위에서 ‘너머’의 감각과 그 물성을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만, 이 간절한 열망은 언제나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라는 질문의 형식으로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라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기다림의 언어로만 발화되고 매개된다.
최호빈의 시에서 의미는 그렇게 찾아온다. 림보 바깥으로부터 건너온 환대와 초대의 몸짓들은 오로지 그 너머와의 맹약에 사로잡힌 화자의 절대적 갈망과 의지로 인해, 기다림에의 헌신과 그 오랜 견딤의 밀도로 인해 비로소 고유한 얼굴과 목소리를, 체온과 무게를 갖게 된다.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라는 시적 전언은 그러므로 또 하나의 절대적 기다림에 대한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 ‘나’를 투신하여 나를 지우려는 것도, ‘나’의 두터운 중력으로 꿈의 물성을 구부려 억지로 집어삼키려는 것도 아닌 이 투명한 기다림의 자세가 최호빈 시의 고유한 호흡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기다림이 있는 한, ‘너머’는 어디에서나 출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곳도 ‘림보’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다음의 시에서 림보는 세계를 집어삼키는 적대적 미로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 바깥을 상상하고 잉태하는 무수한 ‘너머’들의 자궁이자 그 기미들로 흘러넘치는 경계들의 성소로 현현된다.
조문하러 가는 장례식장은 얼마 전에도 갔던 곳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갔던 곳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아, 맥도날드
모든 불행은 멀리 있다는 듯 웃고 있는
맥 도 날 드
불 고 기 버 거
한참 뒤에 나타난 경찰이 정리를 해봐도
한번 막힌 도로는 쉽게 뚫리지 않고
눈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호루라기 소리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아, 글자 하나하나가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것처럼 묵묵히 솟아오르는
M c d o n a l d ’ s
―「이방인-맥도날드 불고기버거」 부분
“맥도날드”는 평소엔 아무런 문제도 의문도 일으키지 않는, 편리하고 무감한 숱한 일상의 장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퇴근길 막힌 도로처럼 꼼짝없이 림보에 갇히고 만 삶의 실재를 차분히 응시하려는 화자의 시선에 인해 일순간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처럼 분리되어 “묵묵히 솟아오”른다. 일상의 허기(“시장기에서 오는 쓸쓸함”)와 존재의 허기(“쓸쓸함에서 오는 시장기”)가 엇갈리며 뒤엉키는 이 기이한 경계적 시간 속에서 화자는 “맥도날드”라는 일상의 공간이 불현듯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무수한 “통로”들로 변신하는 시적 도약의 비일상적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맥도날드” 자체는 물론 어떤 숭고한 의미도 약속도 제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이하게 뒤틀린 경계적 공간들은 림보 너머의 삶과 그 선연한 물성들을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받아들이고 예감하게 한다.
이 너머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과 존재론적 갈망이 최호빈 시의 화자들이 ‘림보’의 심연을 헤매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것이 “너”라는 인칭으로 호명되든 “돌”이라는 존재론적 사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든, 불길하고 불가해한 실재에의 매개나 교차로로 묘사되든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최호빈의 화자들은 이 ‘너머’에 대한 사유와 갈망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실재들을 림보 속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림보’는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조건이자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 혹은 이미지이기에 앞서, ‘너머’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그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림보와 맺고 있는 곤경의 특수성을 얼마쯤 정확히 짚어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림보 안에서 태어나 ‘너머’를 꿈꾸고 갈망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림보는 우리를 가두지만, 동시에 그 가둠을 통해 깨어나게 한다. 깨어남을 갈망하게 한다. 림보는 우리의 적이면서 자궁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림보의 바깥은 림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림보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만 림보의 바깥으로 향할 수 있다. 최호빈의 시는 이 ‘림보’의 생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림보 안에서가 아닌 림보 속으로 쓰여진 기나긴 울음의 내력들을 그의 문장들로부터 뜨겁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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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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