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현대시 2025년 12월호(제432호)
메타시의 상상력을 구현하는 미학적 존재와 그 언어
《현대시》 12월호 신인특집에 함께하게 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의 시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삶과 언어의 도정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여섯 개의 서로 다른 감각이자 하나의 세대적 사유로 읽힌다. 각기 다른 이력과 문학적 여정에서 출발한 이들의 시적 몸짓에는 관계의 불안과 결핍, 동일시의 실패, 존재의 진동, 텍스트와 사물의 해체, 제도와 언어의 부조리를 가로지르는 탐색이 응축되어 있으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장면들이 미리 스며들어 있다. 2025년 시단에 첫발을 내디딘 이 신인들의 작품은 단순한 개성의 제시를 넘어, 동시대 청년 세대가 마주한 균열과 감각의 변화를 촘촘한 형식 실험과 사유의 밀도로 형상화함으로써, 오늘 한국시가 어떤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고자 하는지 또렷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의 시 앞에 함께 서 있는 동안, 독자는 친밀과 거리, 소유와 결여, 있음과 있었음, 정지와 흐름, 안내와 방황 사이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감정과 사고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완결과 합일의 환상 대신, 실패와 잠정성, 불확정성과 우연을 감수하는 태도가 이들의 언어를 떠받치는 공통의 윤리로 드러나며, 그 위에서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과 존재의 사유, 시적 상상력의 책임이 다시 질문된다. 이들은 관습적 서정보다 불안정한 접속과 해체의 감각을 밀어붙이며, 평범한 일상과 비극적 현실, 실존적 결핍과 축제적 상상력을 교차시키는 다양한 전략으로 시의 경계를 확장한다. 올해의 신인 시인들을 통해 우리는, 시가 더 이상 하나의 의미나 메시지로 귀결되는 통로가 아니라, 세계와 주체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부딪히고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건네는 열린 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특집은 여섯 신인의 개별 작품을 따라가며 그러한 움직임의 결을 세밀히 더듬어보는 작은 동행이자, 앞으로 이들이 한국시의 지형 위에 남겨갈 긴 문장들의 서두가 되기를 바란다.
이수빈의 「빈속」과 「귀갓길」은 현대적 인간관계의 불안·결핍과 일시적 연대,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윤리의 잠정을 감각적으로 표상하는 작품이다. 두 시에서 시인은 익숙함이나 표면적 친밀 속에서도 오히려 더 깊이 체감되는 거리·결핍의 정동, 그리고 자기소외의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먼저 「빈속」에서 화자는 “나를 미워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받는다. 이 집은 “창문이 많았고 식물이 많았고 나무 빛깔의 가구들이 많”지만 “진짜 나무는 하나도 없”고, 온통 “나무 무늬를 흉내 낸” 것뿐이다. 친구의 집은 외관상 충만해 보이나 본질적 결여가 깃든 장소로, 친구 또한 소외와 결핍의 구조 안에 있으며 화자는 호두의 텅 빈 속에 자신의 존재를 포갠다. 이는 우정과 인정,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결국 실패로 전환되는 심리적 역학을 드러낸다. “나는 친구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친구가 주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일 것만 같은데”, “중요한 건 전부 친구에게 있는 것 같다”는 화자의 고백은, 타인과의 관계가 항시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을 차라리 결핍의 자리로 위치시킴으로써 관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것이다.
「귀갓길」은 「빈속」과 달리, “집에 가지 않”는 화자가 익명의 타자인 아저씨와 마주치면서 관계의 또 다른 층위를 탐구한다. 아저씨가 “정말 하수구 덮개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어깨까지 접어 넣어 손을 휘젓더니 내 지갑을 꺼”내는 행위는, 화자가 처음부터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과 교차하며 극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자신의 곁에서 “땡볕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힘을 다하는 “교과서에서 배운 좋은 사람”을 실제로 마주한 화자는 오히려 그 초월적 선의와 헌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놀라움과 낯섦을 경험한다. 이 만남은 타인과의 관계가 단순한 연대나 지속적 돌봄의 형태로만 해명되지 않더라도 사회적 선의가 분명히 세계 속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비둘기가 됐네. 아저씨가 말한다./그 말이 재밌어서 나는 웃는다.”는 구절이 상징하듯, 이런 일시적 돌봄과 선의가 완결이나 해결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관계의 의미와 삶의 풍요로움을 증명한다. 시인은 이 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관계 맺기가 미완성과 불확정성의 상태에 머무르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과 순간성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윤리적 언덕이 된다는 통찰을 환기한다.
「빈속」과 「귀갓길」 전편을 관통하는 관계의 구조는, 친밀에 대한 열망이 궁극적으로 결핍, 소외,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완전한 결속이 아닌 잠정적 윤리가 성립된다는 데 있다. 친구, 그리고 익명 아저씨와의 관계 산물은 완전한 소유나 영속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두 시는 현대적 인간관계의 지속 불가능성과 일시성을 드러내며, 타자와의 만남의 현장이 언제든 실패와 결핍, 잠정성과 불안을 품을 수 있음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익숙하거나 친밀한 공간, 예상치 못한 우연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정동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오늘날 존재·윤리적 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선사한다. 이수빈의 시는 어떠한 교훈이나 모범답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담백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완전한 의미나 지속적 소유에 도달할 수 없는 현대적 관계성의 본질, 그리고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불완전한 시도와 실패,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연결,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미학을 포착한다. 감각적 이미지와 절제된 서사, 미묘한 정동의 떨림을 통해, 관계의 좌절·틈새 윤리·결핍의 정서를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실존적 현실에 대한 현대시의 성찰적 깊이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현아의 「거절」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부정의 표명이라기보다, 존재론적 함수처럼 읽혀야 한다. 이 시에서 ‘거절’은 행위의 단절이나 의사의 미수(未遂)를 넘어, 근본적인 내부적 불일치,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윤리적·존재적 통찰의 알레고리다. 또한 메타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동일시를 통한 묘사나 모방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면서도, 주체가 대상을 자기 안에 온전히 흡수하거나, 대상을 자신과 동등하게 체험하려는 시적 의지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함을 전제하며, 이는 서정시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동일시의 전략, 곧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묶으려는 욕망의 실패를 현대시적 자의식으로 재구성한다.
「거절」 시의 주체는 대통령, 영부인, 수행원, 그리고 귀신으로서의 화자라는 다층적 관찰자와 중개자의 시선에서 이 비일치의 조건을 반복적으로 마주한다. 영부인의 반지를 대통령에게 건네는 장면, 수행원이 죽어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초월적 설정, 그리고 내밀한 공간인 침실에서조차 타자의 감정과 내면은 이해 불가능함인 “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으로 남는다. 여기서 ‘거절’은 소유와 일치, 결정적 진실에 대한 모든 요구에 부드럽지만 냉철하게 선을 긋는다. 어떤 친밀함과 접근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남기며, 타자의 고유성, 내부적 비밀에는 끝내 도달할 수 없음이 시 전면에 놓인다. 익숙한 동일시의 미학이 동질적 교감·일치로 수렴했던 것과 달리, 현대시에서 ‘거절’은 반대로 불일치, 미끄러짐, 간극의 미학을 긍정한다.
「망상과 착각」은 이현아 시의 존재론적 간극과 동일시 불가능의 미학을 한층 더 섬세하게 확장한다. 반려견을 둘러싼 고독사의 이야기와 “그 개가 남긴 망설임의 흔적”은 타자의 실존, 감정, 본능마저도 끝내 전적으로 포개지지 않는 비일치의 조건을 상징한다. 화자는 빨래 건조대 양 끝에서 “점점 멀어지는” 두 존재의 행위를 반복하며, 동일시의 실패와 존재론적 거리, 미끄러짐을 일상적 장면으로 그려낸다. “그 사람이 거기서 진짜 빨래를 너는지, 혼자 집으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라는 고백은, 실재와 상상 사이, 나와 타자, 기억과 현재 사이의 확인 불가능과 불확정성이 상상력의 출발점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일시와 이해, 행위의 의미가 결여와 불확정성의 지점에서만 반복되는 윤리를 지시한다. 이 시에서 상상과 미끄러짐은 채울 수 없는 거리를 감각하며, 결국 이러한 틈과 거리의 자각에서만 현대적인 시와 존재의 미학적·윤리적 가능성이 살아난다. 바르트가 텍스트의 미학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가는 해석의 복수성과, 완전한 합일에 도달할 수 없음 그 자체에 있다고 했듯, 시의 읽기도 언제나 ‘마지막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무한한 해석, 다양한 감정·경험 간의 에너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이현아의 「거절」과 「망상과 착각」은 동일화의 불가능성, 완결과 단일성의 유예를 담담하면서도 치밀하게 수락하는 현대시의 윤리적·미학적 혁신으로 자리한다. 시의 목표는 더 이상 단일함이나 일치가 아니라, 열린 장 속에서 실패와 미끄러짐,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시적 전략은 독자의 읽기도 정적 재현이 아닌 무한히 개방된 해석과 자기성찰, 그리고 주체와 타자, 이미지와 기억이 과정적으로 겹쳐지는 창조적 소통의 현장임을 강하게 환기한다.
임어지니의 「있음과 있었음」과 「모델 하우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이 시적으로 펼쳐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자인(Sein)은 ‘얼음’이나 ‘집’처럼 물질적이고 세계에 놓인 단순한 ‘있음’의 상태다. 이런 사물들은 자신의 변화나 소멸, 의미를 자각하지 않는다. 「있음과 있었음」에서 사물로 제시되는 얼음은 자연의 섭리와 순환성의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 시적 주체가 되지 않는다. 집 역시 「모델 하우스」의 서두에서 경제적 표상, 사회적 기호, 공간에 한정된다. 시의 화자는 이와 같은 ‘자인’적 사물과의 작용에서 시적인 의미를 확장한다. 얼음의 녹음과 소멸, 집의 존재와 이동이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닌 자기 인식의 계기가 된다. “얼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에서 시작해, 사라짐과 흔적, 남겨짐 앞에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주체는 집에 대해서도 “집을 사기로 했다 살 것이다”라는 주체의 인식에서 시작해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 건너려고 신호 기다릴 때” 등 모든 공간과 장소를 초월해 존재의 사유를 채움을 보여준다. 이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다자인(Dasein)’의 인식이 풍요로워짐을 말한다. 다자인의 관계성은 ‘자인’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는 것이다. 주체는 사물 자체의 운명과 자기 경험의 흔적, 결핍, 해석의 운동을 실존적으로 배치한다. “글러브 박스”의 비어 있던 자리, 얼음의 흔적을 집요하게 감각하고 환기하는 과정은 세계 내 던져진 존재인 다자인의 실존적 태도를 소환한다. 주체는 시간과 부재, 흔적과 상상의 교차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며, 항상 세계와 사물, 시간적 가능성의 긴장 안에 존재한다.
「모델 하우스」는 집이라는 사물이 단순한 경제적 혹은 사회적 표상을 넘어 의미와 기억, 내면적 진동이 축적되는 복합적 장소로 전환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시의 화자는 집을 단순한 정주의 공간이나 투자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일상 속 크고 작은 경험, 가족과의 삶, 소유와 결여, 귀속과 떠남의 감정이 집에 층위별로 배어든다. “집에 살았다, 집에 살 것이다”라는 시제의 중첩은 주체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축 위에서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정체성의 진동을 감각함을 의미한다. 집이 일상의 반복적 경험에 내면적으로 녹아들면서, 어느 순간 과거의 긴 시간에 편입된 현재가 존재의 가장 큰 불안의 근원이 된다. 이 시에서 집 자체는 원래 하나의 기의, 단순한 본질에 가둘 수 없는 존재다. 집은 한때의 경험이기도 하며, 불확정한 미래의 가능성, 소망 혹은 결여의 상징으로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띤다. 시적 주체는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라는 엄청난 입에 삼켜지듯, 항상 어딘가로 쓸려가는 자신의 존립 조건을 예민하게 인식한다. 단어와 장소, 기표와 의미의 관계는 하나의 본질에 고정되지 않고 풀려나가며, 그것이 곧 언어의 연약함과 해석의 불완전함, 나아가 존재의 덧없음과 상실의 미학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임어지니의 시는 실존적 경험에 귀속된 사물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이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며 내면적 지각의 장으로 소환하는 주체의 감각을 정교하게 교차시킨다. 집이나 얼음 같은 물질적 대상은 자인(Sein)의 차원에 머물지만, 주체가 자신의 기억, 상상, 소망, 상실, 불안, 내면의 흔적을 그 위에 겹쳐 올릴 때 다자인(Dasein)의 자기성찰과 해석의 운동이 비로소 시작된다. 이 층위에서 시는 단순한 사물의 존재를 넘어, 실존의 불안과 정체성, 상상과 결여, 시간과 흔적이 교차하는 해석의 장 역할을 하며,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존재의 불확정성과 생성, 상실의 미학을 현대적 감각과 깊이로 펼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임어지니의 시는 자인과 다자인이 교차하는 시적 현장에서 언어와 세계, 주체와 의미의 긴장과 개방성을 유기적으로 드러낸다. 임어지니의 시들은 일상적 사물과 내면적 세계, 정체성과 시간의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대적 존재의 진동과 경험의 의미를 담담하면서도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사물의 나열이나 감정의 표출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와 의미화, 언어와 세계의 복합적 긴장을 정교하게 펼치는 현대시의 한 실천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장희수의 「싱크대」와 「적설」은 일상적 경험과 자연의 이미지를 감각적이며 서정적으로 조직하여, 존재의 온도와 따스함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두 시 모두 홀로 선 주체라기보다는 타자와의 교감, 일상과 공동체적 체온이 작품 세계를 따뜻하게 감싼다는 믿음을 바탕에 둔다. 「싱크대」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생활 사물과 신체적 경험을 극대화하면서 감각과 정서, 시간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너의 옆구리가 젖은 건, 설거지를 마친 손을 허리춤에 슥슥 문질렀기 때문”과 같은 동작은 “덕분에 네 옆구리에서는 오후 내/세제향이 났다”로 이어지며, 손목, 바람, 식물과 같은 일상의 요소들이 신체적 교감과 감정적 유대를 촘촘하게 확장한다. 손목이 옆구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로 연상되고, 서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긁고 오랫동안 함께 웃는 모습은, 일상적인 순간조차 관계의 친밀성, 촉각적 유대, 공동의 정서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장희수의 시에서 실현되는 미학적 방법은 반복과 일상의 평범함이 결코 낡은 것, 시적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의 시편은 시간과 수많은 사물,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적 해방과 미학적 자유의 가능성을 실감나게 입증한다. 구체적 손길, 바람, 미묘한 향, 일상의 움직임과 그 감정의 변동, 타자와의 촉각적 교감은 모두 언어와 이미지의 층위에서 섬세하게 조율된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일상적 순간과 신체 감각의 자연스러운 연계를 통해 ‘평범함’ 자체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의 작품은 반복의 세계에서도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며, 사물과 시간, 타자와의 접촉이 곧 미학적 존재의 시작점이자 메타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출발점이 됨을 증명한다.
「적설」의 첫 부분은 ‘너’가 “떠날 사람처럼” 화자를 “꼭 안아준” 장면에서 시작한다. 화자는 그 체온을 간직하고 있다. 눈은 “끝나버린 세상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세상이 얼어붙을 것 같아도, “마지막에 껴안은 사람과는/영원히 붙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에, 화자는 그 믿음을 간직한다. 화자는 “어떤 말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자꾸만 믿고 싶어”하고, 언젠가는 “끝나버릴 것 같”아도, ‘너’의 포옹에 남겨진 가능성을 “희게 쌓는다.” 시는 처음부터 따스함과 이별,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남는 온기와 만남, 신뢰와 관계의 지속성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종말적 상상, 관계의 소멸과 재생, 윤리적 가능성을 끝까지 탐색한다.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면 하얀색일 것”, “끝이 날 것이라고//누구에게 말하는지 몰라도/누군가에게 말하는 목소리가//희게 쌓이고 있었다”와 같은 구절에서 시인은 세계의 거짓과 희망, 종말과 만남, 현실과 상상, 영화와 눈이 교차하는 미학을 그린다.
이 두 시는 일상성과 감각, 시간성, 정체성, 관계, 흔적, 소멸, 애도라는 현대시의 주요 의제를 집요하게 탐색한 셈이다. 평범한 사물과 신체적 행위, 작은 몸짓과 자연의 미묘한 변화가 모두 언어와 이미지로 실존의 결, 감정의 파장, 시간의 불확정성을 유기적으로 직조한다. 장희수의 시세계는 언어, 세부적 감각, 상상력, 공동체적 연대가 만나는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과 자기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는 ‘돌’처럼 “정지한 사고”와 언어,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상상력과 “움직이는 시간”이 “삐걱대”(「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면서 직조해내는 우리의 상상력의 현실적 질감, 텍스트의 탈장소적 특질, 해체적 실험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현대시의 모범적 성취를 보여준다. 시의 첫 구절 “나: 보이는 순간 끝을 예견한다”는 시적 객체가 등장하자마자 곧 상상력이 소진되는 불확정성과 파편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꺾였다/다채로워서... 유복해서”, “나: 차라리 망쳐 보라 했다”와 같은 파편화된 장면과 파괴적 명령을 통해 시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를 흔들며, 독자가 하나의 알레고리나 고정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항상 새로운 체험적 해석의 장을 만들도록 한다. 이러한 해체적 실험정신은 바르트가 강조한 “텍스트는 기호에 비해 접근하거나 체험되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기의로 닫혀진다.”(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2002, 41쪽)라는 원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정태인은 단일한 해석이나 알레고리에 저항하며, 각 행과 단어·이미지를 독자 몸에 밀착시키며, 독자가 읽는 순간마다 “내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도록 이끈다. 이로써 ‘목이 긴 나무’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독자가 진입하는 열림의 장이자, 매번 흔들리는 사건의 연속체로 기능하게 된다. 특히 “시계 침이 뾰족해지고/서정은 유리 공예에 갇히면/나는 너와 너를 사랑한 적 없다”와 같은 구절은 ‘목이 긴 나무’와 ‘시계’라는 시간성과 경직성을 병치함으로써, 단일한 기호에 의미를 환원하지 않고 시간의 연장, 멎음, 서정의 경직 등 다양한 감각적 층위를 활성화한다. 이어지는 “모방은 창조를 학대/구체는 모방의 미끈함을 덮고”, “유복함이 가짜일 때/목덜미에서 살냄새가 난다”, “딸기씨가 때론 딸기를 벗어나 종이에 우글거린다” 등에서 실체와 모방, 감각과 추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유희하며, 독자에게 언어의 돌발적 감각과 의미의 미끄러짐을 선사한다. “유복함”이라는 표현은 시 창작에서 모방이 과잉되면 ‘가짜’가 되기에 십상이고, 그것이 “유복함이 가짜일 때” 느끼는 “살냄새”를 통해 진짜 시적 실재의 감각을 드러낸다. 우글거리는 기의들 속에서 하나의 기의를 찾으려는 독서 행위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바르트적 “텍스트의 체험성” 원리를 재확인하게 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정태인은 각 행, 어휘, 이미지를 독자 경험에 침잠시키며, 닫힌 작품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체험되는 텍스트의 본질을 구현한다. 독자는 시를 읽는 순간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의미를 발명하고, 새로운 감각적 사건과 해석의 여정을 실현하는 텍스트의 자유와 해체적 실험정신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와의 교차적 맥락을 통해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의 밀도는 더욱 강화된다. “멎음;/부둣가에 달려가 해를 잡으면 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다/내려간다?”와 같은 구절은, 사유의 지점이 미끄러지고, 실체처럼 굳어진 사고와 움직이는 시간 사이에서 자주 삐걱대는 현존을 고스란히 포착한다. 결국, 정태인의 시는 닫힌 작품, 해석의 최종성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접근하고 체험되는 ‘텍스트’로서의 공간을 창출한다. 돌처럼 굳어진 사고, 용암이 굳은 자리, 흐르는 시간과 붉은 해, 썩어가는 나무, 비옥하지 않은 땅 등 다양한 사물과 현상을 통해 시인은 실체 없는 실체, 멈추고 흔들리는 삶의 흔적을 복합적으로 상상한다. 이렇게 시와 독자는 서로 병치 되고, 결과적으로 바르트적 해석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텍스트의 본질, 의미의 창출과 사유의 미끄러짐이 정태인의 시 안에서 가장 섬세하게 실현된다.
두 시에서 드러나는 제목의 배열과 라틴어와 한자, 영어(외국어)의 사용은 미학적으로 ‘열림’, ‘다성’, 그리고 경계의 유연함을 구현하는 전략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우리 고유 언어와 문화의 소중함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다양한 언어와 표현 방식을 단절하고 배척하는 폐쇄적 태도는 결국 ‘돌’처럼 굳어버린 사고, 무관심적·기계적 반복, 혹은 철학적 질문 없는 ‘비사유’에 머무를 위험성을 내포한다. 정태인의 시적 구도에서 ‘돌’은 의미를 경직시키는 사고를 상징하며, “이매진(Imagine)”과 같은 흐르는 영어 동사는 의식과 감각의 흐름을 동적인 사유의 힘으로 전환한다. 시인은 고정적 해석에 안주하지 않고, 낯설고 열린 체험을 지속적으로 유도함으로써 정동적 힘, 곧 주체와 언어·이미지의 역동적 재배치를 구현한다. 많은 시인들이 상상력의 융합, 이질적 감각, 독특한 형식 실험을 펼쳐왔던 흐름과 달리, 정태인은 언뜻 파편적으로 보이는 시상의 흐름을 각 이미지를 통해 유기적으로 직조해내며 결과적으로 명확한 사유와 체험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의 시는 바르트의 텍스트는 접근하고 체험되는 것이라는 미학을 적극적으로 설계해, 단일한 알레고리와 저자 중심 해석을 철저히 거부하고 시적 언어와 감각을 독자 신체와 경험으로 촘촘히 전달한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에서 “목이 긴 나무”라는 이미지는 특정 의미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이미지는 독자가 텍스트 안을 걷고 감각하며, 흔들리고, 다시 일어나는 해체적 사건의 연속으로 기능한다. 독자는 그 열린 공간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자유롭게 발명하며, 언어·상상력·사유의 무한한 변주를 직접 체험한다. 바르트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닫힌 ‘작품’의 형식이 아니라 독자와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능동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로 작동한다.
여기에 정태인의 시적 축제의 장(場)에는 연극적 요소가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연극은 현실의 경계를 해체하며, 공연마다 새롭게 변형되는 극적 힘을 품고 있다. 알프레드 시몽이 『기호와 몽상』(박형섭 역, 동문선, 1999)에서 말하는 축제와 연극의 파편적·전복적 구조, 그리고 몽상가의 세계가 고독 속에서 우주적 상상과 평형(아니마)의 정동적 열림으로 나아간다는 점은, 정태인 시의 파편적 이미지·공간의 단절·대화와 소리의 겹침·물질의 초월·멎음·윤리적 감정 등과 긴밀히 맞닿는다. 한편 시몽은 인간의 삶을 연극과 축제에 비유하며, 축제와 연극 모두 민중 삶의 조건과 비극성에서 태어난 문화적 산물로 해석한다. 정태인의 시작품은 시적 조건과 비극적 현실에서 발현되는 환희와, ‘사리자’의 목소리로 상징되는 지혜와 질문, 감정 구조를 동시에 담아낸다. 정태인의 시는 주체와 기호, 현실과 환상, 언어와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해체·재배치되는 역동적 현장이다. 축제적 해방, 연극적 전환, 몽상적 상상력, 그리고 유연한 경계의 감각은 실험적 언어와 구체적인 체험 구조로 귀결되며, 현대시 해체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최경민의 「안내원」과 「라스굴라」는 현대시가 부조리의 미학과 해체적 언어 전략을 어떻게 갱신하는지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두 시는 현대사회에 널리 퍼진 “사람의 말이 차가운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언어와 제도, 관리 절차가 인간 고유의 감정·고통·기억·죽음을 어떻게 표면적이고 소외된 대상으로 환원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안내원」은 반복적·무표정한 안내 언어로 구성된 시스템 안에서, “너무 누르지 마세요. 쉽게 터질 수도 있습니다. 터지면 저희가 치워야 해요.”, “실족사는 누구의 기억도 아니어서 복원할 수 없습니다. 대신 깔끔한 가족을 써드릴게요.”, “번호가 불리면 나아가세요. 끝나면 힘껏 돌아오세요.” 등 절차적 언표가 일상적 사건, 개인의 상실, 심지어 죽음조차 데이터로, 복원 불가한 에러로 치환한다. 이는 의미 없는 반복과 객체화, 존재적 공허의 심화로, 소통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라스굴라」는 인도 디저트 캔이라는 사물에 ‘예언’과 ‘유산’을 덧씌운다. “콜카타에서 가져온 예언이었다.”, “당신은 세 개의 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입구가 찌그러진 제품은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같은 구절을 통해, 신화적 내러티브와 산업사회의 경고와 공지, 소비와 관리의 언어가 구체 사물(캔)의 표면에 동시에 아로새겨진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 정보 혹은 경고를 넘어, 인간 경험의 현실과 신화적 상상, 관리사회의 절차가 겹겹이 작동하는 복합적 층위를 형성한다. 남자의 신체 “둔부가 사실 거대한 종기…흘러내”리고, 들개의 상상적 파트너십과 반복적 언어는 결국 모든 것이 관리·절차·소비의 공허 속에 미끄러지는 인간 실존의 우울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이 보여준 미학과 맞닿는다. 『엔드게임』에서 넬과 네그가 깡통(쓰레기통)에 갇혀 기억, 신체, 생의 잔여물로만 존재하는 것과 같이, 「라스굴라」의 남자와 들개는 캔 속에서 ‘예언’의 의미도, 유산의 실체도 다 소진된 채로 반복과 공허, 아이러니와 우울 속 부조리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예언이 텅 비고 말았군”, “유산은 달콤한 맛이 나는군”과 같은 반복적 대사는, 삶의 의미 생성 실패와 현대적 소외·결핍의 심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두 작품은 이 세계가 소통 불능, 맹목적 반복, 파편화·객체화·공허, 그리고 시스템 언어와 관리·경고·소비 코드가 인간 조건을 조직함을 밀도 있게 드러낸다. 그 핵심은, 현대 존재가 결핍과 부조리·불확정성과 아이러니로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그 경계에서 해체적 언어와 블랙코미디 미학만이 진실로 인간 실존을 감각하게 한다는 통찰에 있다. 이를 통해 두 시는 해체미학의 실천적 성취를 드러낸다.
올해 등단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 등 여섯 신인의 시편들은 단순한 개성 표현이나 언어실험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대 청년 세대가 겪는 세계의 깊은 변화와 복합적 결핍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들은 관계의 불안과 결핍을 연대의 가능성, 타자와의 접촉, 아이러니와 부조리, 파격적 상상력과 시적 실험을 통해 깊이 탐색한다. ‘관계’의 불안정성은 피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언어, 일상적 감각, 상상력, 존재 인식 층위로 확장·해체되어 작동하며, 이는 단순한 시의성을 넘어 세계와 존재의 분리 불가능한 틈 사이에서만 생성되는 독특한 감각과 사유, 윤리·상상력의 책임까지 묻는다. 이러한 결핍은 고립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이 충돌·포개지는 현장으로 성립되고, 시적 언어는 해체와 실험, 평범한 일상을 뒤흔드는 감각의 진동, 정체성과 타자성, 세계와 자신 사이의 긴밀한 긴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이 신인들은 구체적 경험과 내면의 리듬,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을 미감으로 끌어들여, 한국시의 서사적 확장과 일상에서 새로운 언어적 감수성을 착취하며, 시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넓히고 있다. 현실과 내면, 언어와 침묵, 소외와 감각이 교직된 이들의 시는 결코 완성과 합일로 안착하지 않으며, 손이 닿지 않는 영역, 불안정의 운동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특히 이들의 시적 작업은 메타시의 상상력과 존재 미학의 구현, 언어의 자기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존재의 다양한 양태를 시적으로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로 이해된다. 시는 언어적 표현을 넘어 존재와 현실의 틈새, 그곳에서만 드러나는 감각과 상상력, 윤리를 길어 올리고, 이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주체적 활동이 된다. 올해 신인 시인들의 작품은 그렇게 오늘날 한국시의 중대한 미학·문학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시단의 방향성과 역할에 대해 깊은 통찰을 낳게 하는 의미 있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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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분유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4 박동억 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소설 또는 그림자 반죽 이연숙 『아빠 소설』(위즈덤하우스, 2025)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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