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현대시 2025년 12월호(제432호)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들의 도래에 관하여
1. ‘자명한 것이 없는’ 목소리들은
지금 우리 시문학장에 새로이 등장한 신인들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물론 2025년 올해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세계는 이제 막 출발점에 위치한 셈이다. 그러니 각각의 시인들이 최소한 한 권의 시집으로 대변될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어느 정도 드러내기 이전까지 그것을 규정하는 일은 그닥 의미를 갖기 어렵다. 한 명의 시인이 지니는 시세계를 겨우 2편의 시로 설명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주어진 원고를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어떠한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지닌 기묘한 고유함에 대한 증명이자 그 욕망이다.
미래파 시기의 2000년대와 포스트-미래파의 201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이란 카테고리에 종종 부여되는 키워드인 난해성과 추상성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의 문장을 조금 바꿔 말해본다면 ‘시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미학이론』)는 맥락을 분명히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개인적이고 독자적인 사유행위에 속한다는 점 역시도. 그렇기에 이번 글에서 다루어야 하는 시인들의 시를 하나의 통일된 경향으로 정리하는 것은 더더욱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지금의 젊은 시인들이 어떠한 감각과 인식 혹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란 층위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일에 있다.
왜 이들은 낯설고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선으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가. 그 고유하고도 기묘한 감정과 마음은 그들의 언어가 지닌 깊은 심연이기도 하다. 이 심연은 (앞으로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현재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부를 향한 AI의 열풍 그리고 주가 5000선 달성과 강남 아파트값 폭등이란 먹고사니즘의 거센 파도와는 무관할 것이다. 즉 실제하지만 실제하지 않는 거대하고도 치밀한 압력들 속에서도 문학을 하는 우리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낯선 무언가들을 들리지 않더라도 발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에게 도착한 시인들의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는 이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어이 쓰고자 하는 언어이자 증명이며 욕망인 것. 언제나 알 수 없고도 이상한 우리의 세계 속에서 시를 쓰는 인간들은 여전히 있다. 과거와 지금에도 그리고 예측하기 불가능한 미래에서도. 하면 그들은 도대체 왜 쓰고 왜 말하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명확한 답이란 없겠지만 중요한 맥락은 언어의 표면이 아닌 이면이자 심연이며 각기의 시인들이 지닌 기묘한 나로서의 고유함이란 무엇인가를 섬세하게 살펴보는 것에 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명심해두자. 이 글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시라는 굳어진 규정이 아닌 시적인 것은 모든 시인들에게 깊숙이 그리고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명명 불가능한 무엇일 따름이니까.
2. 세계에 대한 깊은 절망의 알레고리란
언제나 중요한 지점은 시인들은 세계에 대해 절망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굳이 보들레르나 이상을 끌어들여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이 측면에서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은 분명 주목되는 흥미로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이 시속에서 줄기차고 집요할 정도로 반복하는 “아주 많은 복숭아”란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실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다음의 구절을 보자.
유일하고 거대하다.
복숭아와 숲 사이 숲속에서
복숭아로 가는 길을 삽으로 찌르는 사람들 복숭아로 가는
사람들 구덩이에 쪼그려 앉아 말한다. 그의 위로 복숭아나무
가 자랄 것이라고 만들 것이라고
아주 많은 복숭아를
(…)
불어나는 숲으로 가려지는 길 불어나는 숲으로 가로막힌
다 막힌 길의 끝에서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복숭아 하나 상
해가며
무너진다 무너지며 쏟아지는 복숭아
아주 많은 복숭아
길의 끝이 비어 있다
그리고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 방성인, 「복숭아로 가는 길」, 부분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에서 복숭아란 단어가 주는 느낌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복숭아란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처럼 ‘유일하고 거대한’ 복숭아들로 가득한 우리의 세계. 달고도 맛있는 복숭아는 일견 먹고사니즘과 더 많은 돈에 대한 당연하고도 평범한 욕구의 존재를 우리에게 기묘하게 비틀며 가리킨다. ‘숲을 빠져나오고 다음 숲으로 향하더라도’ 우리는 복숭아가 주는 달콤함과 쾌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렇다면 “복숭아 없는 복숭아나무들이 모여 복숭아 없는 숲”이란 것은 사실상 우리의 세계 전체가 이미 ‘유일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복숭아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 되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또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복숭아들인지 혹은 아닌지를.
균일하고도 단일한 욕구들이자 이데올로기이며 상징계적 질서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세계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복숭아 그려진 팻말이 흐려지’더라도 끊없이 “불어나는 숲”과 같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이질성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는 진실. 시인은 이를 이렇게 말한다. “막힌 길의 끝에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당연한 욕구로 교환될 수 없는 ‘상한 복숭아’. 내 자신이 사실은 복숭아였다는 점을 손쉽게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한’ 이질적이고도 기묘하며 다른 ‘상한’ 복숭아가 되려는 마음. 이 같은 미묘한 차이를 생산하려는 욕망이 내재된 ‘상한 하나의 복숭아’는 복숭아들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쏟아’버릴 것이다. 시인은 안다. 이 정상적인 복숭아들의 욕구가 끊임없이 도달하고자 하는 길은 결국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자 욕망하는 ‘하나의 상한 복숭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꽃의 대기」에서 이야기되는 “피어오르는/ 꽃의 대기에서/ 흐트러지는 꽃 충돌하는 꽃/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환희/ 꽃의 멜랑콜리 꽃의 비애 꽃의 회환/ 피고 지는 꽃 옆으로 피고지는 꽃”이란 것은 자연에 대한 단순한 표현일 리는 없다. 세계에 대한 절망이자 고통인 멜랑콜리를 품은 존재. 그리하여 ‘흐트러지고 충돌하여 만들어지며 사라지는 비애’란 것은 사실상 시인의 근본적인 무엇이자 ‘상한 것’으로 존재하려는 욕망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복숭아들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손쉽게 확언될 수 없는 기묘하고도 고유한 이질성을 기어이 형성하겠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향해 있다. 요컨대 시인은 절망이란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가 지닌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을 뿐이다.
어릴 적 배웠는데 분명
열심히 꼭꼭 씹어서 삼키면
소화된 것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거름이 되어 밭을 가꾸고 나무를 키우고
집을 짓는다는데 왜 우리 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걸까?
비가 내린다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다 비가 얼마나 올지 모르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
멀리 하늘을 내다보다가
다시 걷는데
목이나 축이려 들여다본 못에
비친 나, 자세히 보니
민달팽이다.
- 안수현, 「굳은 살」, 부분
시인이 근본적으로 절망하는 자라면. 그렇다면 문제는 이 절망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연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안수현 시인의 「굳은 살」은 이 측면에서 우리의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위치한 시인의 태도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손쉬운 절망도 손쉬운 희망도 아닌 무언가를 행하는 자로서 존속하기. 시 전체를 아우르는 “집을 이고 살아가는 족속”인 민달팽이의 이미지는 이와 직결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핵심은 이 집의 구체적인 형상 속에 담겨져 있는 시인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겠다.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내 등 뒤에 있는 것은 흙벽이다/ 집 안에는 심장도 있고/ 그 박동 가까이 붙여둔 꿈도 있고/ 내가 먹은 삶들 사랑한 사람들 아껴둔 말들이 있고/ 구멍 나 비워둔 자리도 있고 일부러 남겨둔 자리도 있”다고. 규정될 수 없으며 언어의 표면으로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희미한 마음이라고 칭해야 하는 영역들. 비록 “지붕은 올리지 못해서 비가 오면 그대로 다 맞는” 것처럼 초라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버릴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이 여기에 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나 역시도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속한 존재라는 점 역시도.
하여 시인이 가진 집이자 나의 영역은 돈과 풍요로움만을 강제하는 우리의 정상적인 세계와 무관하게 존속하려 한다. 시인은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끌려갈’ 테고 그 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려 한다. 비록 “우리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것처럼 보일 뿐일지라도. 세계가 강제하고 동시에 보장하는 행복의 의미와 무관한 층위에서 머무르기. 당연하게도 우리의 세계는 이 마음의 이끌림 따위에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화폐의 단위로 명확하게 환산될 수 없는 보이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무엇이니까. 이처럼 비가 내리는 세계 속에서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도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겠지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간절한 중얼거림. 이 처절한 마음을 지속해내겠다는 하나의 다짐으로서.
이것은 시인이 발견해낸 자신의 고유한 마음이자 욕망이기도 하다. 절망적이고 무가치한 세계 속에서 나에게로 이어지는 마음의 계보들을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의지일 것. 바로 그러한 마음과 나이며 “너와 내가 함께하는 미래가/ 오래도록 높이 길게 멀리 뻗어가기를.// 비로소/ 나는 홀씨가 되어 날아갈 궁리를” 꿈꾸는 자. 그러니 도처에 퍼져있는 “도저히 씹어삼켜지지 않을 만큼 큰 고민”(「룸메이트」)을 행하는 자는 결국 나의 친구이자 또 다른 내가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이자 존재로서의 사유를 향한 시인의 마음이 이렇게 명확하다면 이 민달팽이의 걸음은 느리지만 진중하며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 기묘한 걸음이 절망적인 세계를 언젠가는 횡단하리라는 점 역시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여기 또 하나의 절망을 대하는 고집스러운 태도가 있다. 이솔 시인의 「검은 돌, 악보, 가계」이다. 이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들의 납득 가능한 연속성이나 인과관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에 있다. “저는 매혹되었습니다”라는 돌출된 것처럼 보이는 문장은 그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무의미하며 동질적으로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기어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시인의 언어는 그것을 잡아내려 한다. 그 순간의 ‘장면’들은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습니다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하니 나쁘지 않습니다 담을 오른편에 둔채 계속 가다보면 큰 건물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바다에서 표류하던 그물을 걷어 올려 벽에다 걸어놓았다고 하네요 무슨 맛이 나는 해조류들이 매달려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주 큰 거미가 허공에 떠서 여러 개의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아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하거든요 일련번호도 없이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저는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를까 봐 무섭거든요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
이제 저는 정말로 배가 고파진 상태입니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우중충한 목소리가 들리고 똑같이 생긴 문들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축 처진 저것의 아랫부분을 밀고 나가볼가요 그녀가 주름진 입가를 힙겹게 끌어올리듯이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이 이마부터 뒷덜미 그리고 등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녀가 쓰다듬어줄까요 그녀의 치마 안으로 들어가듯이 따듯한 바람 속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위의 시에서 어떤 명확한 서사를 확인해보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부분은 시인이 느끼고 있는 일종의 세계감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란 갑자기 튀어나온 문장이 의미하는 것. 이는 시인이 우리의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어긋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핵심적이다. 시의 제목이 의미하듯 검은 돌과 악보와 나의 가계도는 모두 ‘거미’로 표상되는 그 따뜻해 보이는 세계와 무관할 따름이니까. 그러니 시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가까이 있는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것을 볼 수 없는 곳이자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할 뿐이라고.
요컨대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듯 그리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한 세계인 것.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은 나만의 영역과는 다른 “우중충한 목소리”이자 “똑같이 생긴 문들”의 구별하기 어려운 무한하고도 반복적인 세계. 이 무가치한 세계와 직결되어 있는 존재는 아마도 ‘여러 개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주 큰 거미’라 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거미에게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대립하려는 자. 때로는 그 세계에 뒤섞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질성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자. 그것이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여 거미의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은 나의 온 육체를 꼼꼼히 묶어두듯이’ 나를 통제하며 제어할 것이다. 그 따뜻해 보이는 속삭임의 말들은 말하자며 시인을 유혹하고 이 평면적 세계에 손쉽게 잠겨 들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시에서 말해지지 않는 무엇들. 요컨대 “일련번호도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내가 진정으로 원해야 하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르는 어떤 고유한 순간이 아닐까. 짐짓 시인의 엄살처럼 ‘무섭다’라는 말은 그렇기에 큰 의미가 없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얼굴을 지닌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나의 영역은 “매혹”적이자 낯설고 두려운 무언가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존재들은 여러 개의 눈을 가진 거미의 ‘쓰다듬’이자 ‘따듯한 바람’과는 무관해야만 한다. 그러한 마음만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나만의 악보’이자 어떤 기묘함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 한다. “빛을 찢으며/ 마지막으로 온 사람을/ 조급할 이유 없이/ 천천히 안아”보는 마음을 가지고 “이 순간 이라고 발음”하게 될 어떤 순간을 기다리면서. 여전히 “식물은 숨을 들이마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차창으로 지나가는 배경이 되고/ 주먹이 책상을 내리”(「훔치고 싶은 것들이 있다」)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가난한 집의 문”의 이면 속에 있는 무언가들. 일종의 깊은 어둠이라고 해야 할 언어의 심연 속에 위치한 시인의 언어가 지닌 본질적 욕망. 그 끈질긴 태도이자 형상들은 ‘거미들’이 제공하는 따뜻하고 편안한 ‘치마폭’의 안락함으로부터 이탈할 한 가지 방법이기에.
3. 언어의 심연을 고통스럽게 사랑함으로
그러니 절망 앞에서 선 인간들의 무기는 어떤 점에서 언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우리의 세계이자 의미들로 가득 찬 언어의 표면이 아닌 오직 내가 구축하고 형성하며 존재시켜야 할 고유하고도 기묘한 언어의 심연. 시인의 무기이자 고통이며 동시에 깊숙하고도 알 수 없으며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존재여야만 하는 것. 그것만이 시인들에게 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를 한 번 살펴보자.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었다. 안으로 자라나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의 눈빛이 누군가의 손짓이 팔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 금속으로서. 움트기 시작했다.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한 사람을 이룬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어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 무딘 날에 베인다면 낫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게 되자 안으로 희디흰 날들이 쏟아진다. 길을 걸을때면 앞서가는 사람의 발소리에 맞추어 칼날이 흔들린다. 발돋움하며 머리카락 휘날리며.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춤을 멈출 수가 없다. 죽지 않도록 파고들었다가 흐를 듯 녹아 고인 흰 날이. 뜨겁게 끓고 있을 때. 변해볼 마음이 있어? 그러자 흰 날은 냄비 안의 죽이 되어 끓어오르다 우묵한 그릇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와 있다. 먹어야 나아, 말하는 목소리가 되어 다시 하얗게 끓어오르는 것을 본다. 목소리가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나를 베지 않는 쪽으로 날을 만들어볼 수 있을까요. 칼등 위로 걸어볼 수 있을까요. 칼이 나를 뚫고 나가, 무뎌진 채 멈춰 있다면.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아주 커다란 압정인가 봐요. 말하며 튀어나온 날에 시래기 같은 것을 걸어 말리고 있다.
- 박연, 「최선의 칼집」, 전문
박연 시인의 이 시는 또 어떠한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여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라는 중얼거림에서 느껴지는 중요한 맥락은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는 점에 있다. 물론 이는 상처가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시인은 절망 속으로 더욱 뛰어들고 그 고통을 섬세하게 느끼며 인식해야 한다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고통스러움과 두려움을 통해 형성되는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란 언어에 어떻게든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칼은 곧 나일 따름이니까.
흔히 생각해보듯 시인을 언어를 편하고 자유롭게만 사용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여길 수는 없다.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시적인 것들의 희미한 형상. 그러니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는 것처럼 통제불가능한 언어들은 내 속에 위치한 내면의 칼로서 나를 상처 입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통과 상처 그리고 환희와 열광을 결코 구분하지 않는 나의 근본적 욕망일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다. 언어가 나에게 부여한 칼은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이자 ‘멈출 수 없는 춤’과 같다는 것을. 하면 이 시인은 그러한 언어의 존재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자가 아닐까. “안으로 자라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는 철저한 고백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아프며 아파야만 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 측면에서 ‘최선의 칼집’이란 시의 제목은 언어라는 칼을 담고 있는 자기 자신이자 되어야만 하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냄비 안의 죽’이자 ‘하얗게 끓어 오르는 목소리의 강’으로 무한히 분열되고 파편화되는 그러나 오직 나라는 존재의 고통이자 숙명을 담아낼 언어를 어떻게든 붙잡아내고 형성하기. 손쉽고도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언어가 아닌 언어의 심연이자 고통을 그리고 칼날 위에 선 샤먼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투쟁한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커다란 압정”으로 오독하면서 시래기를 말리겠지만 그와 무관하게 나는 나의 언어를 존재케 하겠다는 것.
이는 한 시인으로서 세계에 대한 절망과 동시에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고유한 욕망인 셈이다. 그것은 「도움받기」에서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동물에겐 끝없는 온기가 필요한” 이 세계 속에서 “배의 어둠에 관해 상상”하면서 그 어떤 언어도 손쉽고 자유롭게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인은 나의 절망 속에서 생성된 언어라는 날카로운 칼이 사실은 나 이상의 무언가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배의 안쪽에 작은 배들이 살고 있다면. 단 하나의 배를 환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언어의 무한한 분열과 나누어짐을 오롯이 지켜보려는 자. 하여 ‘온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열기를 식히며’ 우리의 세계 속에서 ‘초파리가 몰려드는 무른 배’이자 썩어가는 자로서 기어이 존재하겠다는 욕망. 이 역시도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기묘한 고유성만을 긍정하고 탐구하려는 시인의 존재방식일 것이다.
유키는 미움받아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래도 두렵지 않았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긴 하지만
유키는
파랗다
선생님, 이게 병이 하는 생각이라면서요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건강에 있어선 모든 방면으로 분주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게으르고
증상이란 건 너무 무섭고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고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겁다가도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는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이 멀리 와버린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
의지도 없이 여기 머무르고 있다
가깝게 사랑하며
- 백아온, 「사랑을 담아, 유키가」, 부분
백아온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바를 말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말이지 파랗다’라는 것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적인 이성애적 ‘사랑’으로 이해할 필요는 당연히 없겠다. 왜냐하면 시인이 “우리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들이라서 자기 파괴적인 유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기파괴’적인 기묘하고도 이해되기 어려운 유키의 사랑은 어떤 측면에서 시인 자신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해야 한다. 즉 “유키는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나 딱 하나 재능이 있다면/ 그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모두들 사랑해요”라는 문장은 가리키는 바는 유의미하다. ‘사람으로서 지니는 딱 하나의 재능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는 유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시인됨이란 존재가 아닐까. 나 이외의 다른 모든 타자들이자 언어의 심연에 가닿고자 하는 사랑의 욕망을 지닌 고유한 형상으로서.
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욕망은 정상적인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저 무의미하고 ‘병든’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말하자면 이해될 수 없는 유키를 규정하려고만 한다. ‘평생 가볍고 간단해지길 바라는’ 유키의 존재는 그저 “발직한 여자애”로서만 판단될 뿐. 그 세계의 존재방식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자가 유키에 대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심리치료사일 것이다. 달팽이에 대해 ‘눈이 붉어지고 마음이 아프며 지금 몹시 슬프군요 그랬다고 달팽이를 밟으면 됩니까?’라고 질문하는 자. 그리하여 이 ‘병든’ 유키를 “유키씨 정말 끔찍한 사람이군요”라면서 규정하고 치료하여 정상화시키려는 자. 따라서 유키의 시선이 이러한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세계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이 정상성으로부터 단 하나의 예외조차 없는 ‘여기’가 “지옥”이라면. 우리의 ‘여기’가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할 필요조차 없고 인식하려는 생각조차 없는 플랫한 세계라면.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이자 욕망을 통해 우리들의 무의미한 세계를 거부할 것이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으며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 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이 플랫한 지옥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두자. 그 지배하에서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으로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존재일 따름이다.
오직 ‘파란 가슴’만을 믿으며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수 있는 자. 우리의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자. 그리하여 ‘걷잡을 수 없이 멀리 가버리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자. 이것이 시인이 유키라는 자신의 분신적 존재에게 근본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진정한 욕망일 것이다. 먹고사니즘으로 통칭되는 정상적이고 당연한 ‘의지 없이’ 타자들과 언어들의 심연이란 욕망 속에서만 ‘머무르기’. 그렇다면 유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인 것이 아닐까. 모든 보이지 않고 명명되지 않는 영역들을 “가깝게 사랑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러니 이 욕망하는 자는 ‘엉뚱한 슬픔이 차오르는’ 마음을 끝까지 지니려 할 것이다. ‘길고 게으른 문제’이자 어떻게든 ‘오래 살자’는 대화를 간직한 채. “언젠가 온 세상의 슬픔을 다 껴안으며 죽”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욕망한다는 것. 들리지 않는 “거대한 지구의 울음”을 듣고 “엉뚱한 슬픔”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그 “울음의 밑바닥에서는 하나의 지층”을 기어이 만들어내려는 존재. 그런 시적인 인간의 형상이란 “상자를 열면 단숨에 사라질 것 같”은 존재들을 소중히 품으면서 이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에게 “한 움쿰 포도 씨 뿌리고/죽지마 /목소리를 보태어 주”(「자처하는 사람」)는 간절한 욕망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는 시인이 지닌 기묘하고도 고유한 사랑의 본질적 형상이기도 하다.
김사라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난폭한 언어의 양상과 그 이면에 느껴지는 멜랑콜리의 감각은 강렬하다. 이 위력적인 언어의 형상은 언어의 표면이자 지시이며 의미와 별다른 상관이 없다는 점 역시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언어의 형상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시의 언어에 접근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파괴적이고 분열적으로 보이는 양태 그 자체가 아니다. 즉 “나는 제대로 말하고 싶고,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ainsi soit – ELLE」)라는 찢어진 육체이자 모순적 형상들이 구축하는 미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핵심적이다. 왜 시인은 시적인 것을 위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라는 기묘한 알레고리적 언어를 구축하려 하는 것일까.
(…)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 믿을 수 없다. 그는 연필로 칼 깎는 법을 알려주었다. 보랏빛 나사와 재단된 나무들이 가득했던 곳. 손으로 쥐는 것부터 배웠다.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봤던 것 중 가장 더러운 집을 보았고 거기 살던 여자는 반갑게 문을 열어주었네. 그녀는 방 가운데에 달콤한 간식이 든 멋진 상자를 가지고 있었고 내 손이 그쪽을 향할 때마다 자기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 줄 때까지 기다려. 여자의 뱃속에서 미끼가 쿵쾅대며 숨을 쉬었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 이유 없이 슬픈 밤을 보낸 난쟁이를 위한 철제문. 신고하지 않은 여름이 있었다. 일을 마치면 매일 같은 곳으로 국수를 먹으러 갔지.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았다. 맛이 변해도 몇 번이나 더 믿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알던 맛의 국물이 간절해진 겨울이 왔어도. 징계가 결정되고 술을 몇 병 사고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지. 난 눈을 꼭 감고. 정말이지. 그거면 됐어. 포근했던 교차로의 눈밭.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약속! 미나. 눈앞에서 사라져 줄게.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배웅하러 나가는 내 다리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려 놓았다. 믿을 수 없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하겠지. 난 살살 녹여 먹어도 악다구니를 써. 못쓰게 됐어.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저 애를 위해 얼굴을 뜯어버리고 있어. 이러다가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
- 김사라, 「기분파 미나 제이코」, 부분
이 시에서 우리가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 속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확연하다는 것. 즉 이 시속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이 또한 시인이며 시인의 욕망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폭력적으로 보이는 시인의 언어가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모순성 그 자체이며 동시에 시인의 ‘나쁜 행실’을 비난하는 남성들이 구축한 우리의 세계이기도 하다. 요컨대 시인의 존재는 ‘나쁜 행실’을 행하며 “나도 모르게 새 생각에 잠”길 수 있어야 하는 기묘하게 슬프며 그렇기에 고독한 자이다. 이 세계가 보려 하지 않고 알고자 하는 생각조차 없는 “버러지 같은 고통”의 존재를 묻고 기억하며 떠올리며 자신의 육체로 받아들이려는 자. 그 고통 속에서 모순되고도 찢겨져 있으며 웅얼거리는 발화들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선 확인해보자. “미나. 어째서 입 맞출 때 날 보지 않지?”라고 말하는 세계의 시선이 얼마나 당연하고도 폭력적인가를. ‘살아 있는게 너무 징그러운’ 것과 같은 폭력의 정상성과 당연함. 그러한 세계의 영역 속에 놓여있는 나의 존재는 말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널부러져 있다. “따가워. 따가워. 숨이 차서 괴로워하며.” “깨물지 마!”라는 표현처럼 이 시속에서 등장하는 남성이자 세계의 언어는 단지 명령하려고만 한다. 그러한 억압적인 규정과 판단의 결과란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이라는 비웃음과 더불어 자신이 듣지 못하는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라는 이해할 수 없음이란 반응일 뿐. 그러니 ‘기분파’인 미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울함과 가난함과 싸우지 않음의 이면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알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더욱 문제인 부분은 이 남성이자 세계의 폭력성이 모순적이게도 내 안에 이미 새겨져 있으며 아주 철저하고 당연하게 작동하려는 하나의 질서이자 체계로 자리잡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가장 더러운 집”의 여자를 고려해보자. 모순되고 찢겨져 있는 “나를 쳐다보려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이 여자는 또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남성과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명령한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리고 “줄 때까지 기다려”라고 말하는 또 다른 나. 이 분열된 나들의 모습은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이 또 다른 나의 존재의 형상은 남성이자 세계의 규칙이자 법칙이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우리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이지만 남성에 의해 지배받으며 동시에 여성일 수밖에 없는 모순성의 기묘하고도 복합적인 중첩. 그러니 시인이 드러내려고 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의 입은 ‘찢어져’ 있을 수밖에.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처럼. 이러한 미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지점. 그것은 남성이자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또 다른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다고 말이다. 당연하고도 정상적이며 억압됨을 모르는 그러한 현실 속의 내가 아니라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되려는 ‘나쁜 행실’이자 기이한 변신술적 욕망.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내가 ‘교차’하는 길 위에서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진실만이 오직 나를 고유하게 형성해내는 방법일 따름이다.
그 강력한 의지이자 나를 존재케 하는 결정적 욕망인 것. 이것만이 남성이자 세계의 존재를 파괴시킬 수 있다.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라는 남성들이자 세계를 가볍게 무시해버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또 다른 나를 위해 무언가를 발화하기.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타자이자 억업된 모든 것을 위해 나의 언어가 존재해야 한다는 마음. 그 굳건한 언어의 욕망으로 인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남성들이자 세계인 그 당연한 모든 것들을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바라보는 우리들이자 남성들의 세계는 그저 ‘돼지 같은 바보들’이자 “술맛 떨어지는 계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세계 속에서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기에 모든 것을 “제대로 말하고 싶”다는 일종의 모순적인 분노. “잘린 성기가 든 포르말린 유리병”처럼 박제되어버린 또 다른 나의 목소리를 진정으로 듣고 발화하려는 시적인 것에 대한 고유한 욕망. 그 의지를 알아챌 수 없는 남성이자 세계는 언제나 ‘소문이라는 소문’을 흩뿌리겠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다가가니 수 천개로 갈라지고 있”는 무수한 나들의 발화들을 품어 안으며 ‘이토록 분명한 예감’을 감각하려는 자. 이것이 자신의 육체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리는 시인이 품고 있는 분열증적 언어의 파괴적 원천일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내가 보고 싶은 공동묘지 쓰레기통에 처박혀 딸기처럼 부푸는 죽은 꽃다발’(「ainsi soit – ELLE」)이란 언어의 심연이자 시적인 것은 알아듣지 못할 기묘한 목소리로 발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의 세계와 고유하게 무관하도록.
4. 단지 자유를 향한 욕망과 의지로서
앞서 지적해두었듯 지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시인들에 대한 말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글은 그저 한 개인의 아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해일 뿐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은 왜 쓰고자 하는가에 대한 젊은 시인들의 마음이었다. 고유하고도 기묘하여 그러하여 수수께끼와 같은 언어의 미궁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의 원천. 언어의 표면이자 규정하고 판단하려는 모든 것들에 대한 투쟁. 우리의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세계로부터 이탈하고 도래할 언어의 심연을 어떻게든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의지. 그러니 우리는 시라는 규칙과 시인이란 이름과 정의와는 무관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시적인 것이자 시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시적인 것이란 오직 언어의 표면을 정지시키고 파괴할 때 그 심연 속의 거대한 꿈틀거림과 함께 도래하게 된다는 점만은 ‘자명’해 보인다.
필요한 것은 규정과 판단이란 명령이 아닌 모든 방식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자유로움이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엇일 따름이다. 단순한 허명이 아닌 시인됨이란 실존적 영역 속에서 이는 나이의 문제도 등단 여부와 시기의 문제도 어떤 위치에 내가 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하여 쓸데없는 첨언을 굳이 덧붙여 보고 싶다. 언젠가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던 푸코의 문장을 말이다. “나는 당신들이 노리고 있는 그곳에 있지 않다. (…)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그렇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쓴다는 욕망이자 의지이며 그로부터 가능할 자유일 뿐이다. 시라고 부르는 이 기묘하고도 고유한 실존의 형식은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추천 콘텐츠
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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