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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현대시 | 2025년 12월호(제432호)

말미잘 하는 몸

박다솜 문학평론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네가 틀리는 곳에서 나는 옳다」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연대가 분열할 때―이미상론」으로 2023년 제1회고석규신인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

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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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휘민이민하노은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함윤이 소설 또는 그림자 반죽 ― 이연숙『아빠소설』(위즈덤하우스, 2025)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이연숙위픽한국소설아빠소설문학 2025
조예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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