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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현대시 | 2024년 8월호(제416호)

모티프, 인유, 몽타주, 알레고리 — 신동옥 시의 미학적 방법론 (하)

오형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비평전문 계간지 [현대비평] 주간.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 주간. 1994년 『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음. 평론집으로 『신체와 문체』(문학과지성사, 2001), 『주름과 기억』(작가, 2004), 『환상과 실재』(문학과지성사, 2012), 『알레고리와 숭고』(문학과지성사, 2021) 등이 있고, 연구서로 『한국 근대시와 시론의 구조적 연구』(태학사, 1999), 『현대시의 지형과 맥락』(작가, 2004),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작가, 2010), 『문학과 수사학』(소명출판, 2011), 『한국 모더니즘 시의 반복과 변주』(소명출판, 2015)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이성의 수사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제3회 젊은 평론가상(2002), 제6회 애지문학상 평론부문(2008), 제21회 편운문학상 평론부문(2011), 제24회 김달진문학상 평론부문(2013), 제32회 팔봉비평문학상(2021)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3. ‘저항군의 모티프, 대결과 패배의 충돌, 인유-몽타주-알레고리

 

신동옥 시의 중요 모티프들 중에서 둘째 유형별 사례로서 저항군(Résistance)모티프는 기본적으로 전투적 은유가 생활적 은유와 연계하지만, 더 나아가 정치적 은유, 연애적 은유, 종교적 은유, 존재적 은유, 가족적 은유 등 복수의 은유들과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신동옥 시에서 /회개의 모티프가 복수의 은유적 연계의 내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인유-몽타주-알레고리의 기법적 방법론이 출발하는 유형이라면, ‘저항군모티프는 이 기법적 방법론이 가장 중층적으로 형상화되는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신동옥의 시에서 이 모티프 유형에 속하는 시적 주체는 척후병, 파수병, 저격수, 낙오병 등의 모습으로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들을 묶어주는 공통분모 혹은 대표 격에 해당하는 것은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거역하거나 버티는 군인을 의미하는 저항군이라고 볼 수 있다.

신동옥의 시에서 저항군모티프를 집중적으로 형상화하는 부분은 세 번째 시집 고래가 되는 꿈2부를 구성하는 23편의 비트연작시이다. 우선 출발점인 비트 1」을 살펴보자.

 

여자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 털이 무성한 목덜미를 가진 사냥감을 쫓는  강아지/ 엄마가 손 갈퀴로 파낸 들판을 말없이 질주하던 물소떼/ 야전 침상 아래서 아빠의 작전 수첩을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 언덕 너머 바다에서 나온 말 없는 물고기/ 어딘가로 끝없이 뻗은 오솔길이 숨긴 깊고 아득한 참호들/ 숲에서 깃을 치며 나오는 발 없는 새떼……

 

한때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

출구가 없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주저앉고는

빠져나올 길을 영영 잃어버려서

거기다 집을 짓고 산다, 파국이라는 비밀 아지트 속에서

접선할 방법을 영영 잊어버려서

 

흉터는 신비한 담장이 되어 비트를 구획했다.

우리는 꼭꼭 숨어서 침묵으로 저항했다.

지속 가능한 혁명은 없다.

사랑과 암시의 역사가 쓰이는 방식,

모든 것들은 가능할 때까지만 지속된다.

지속하는 매 순간 불가능으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는 것을.

 

밤낮없이 비트 속에 갇혀서 비로소 하나가 되었지만

어딘가에서 불을 지피고 어딘가에선 얼음이 언다.

사주경계하던 눈길을 흩어 그을음을 닦아내고

유리창 너머를 볼 때의 아릿한 표정들

 

언젠가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생긴 피딱지에 십자가 표식을 남기고는

다른 상처에 같은 처방을 쓴다,

언젠가 네 상처가 내 것보다 깊어 아렸다는 걸 가르쳐주려고.

― 「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것- 비트 1」 전문(3 : 86~87)

 

이 시는 비트연작시의 발생론적 연유 및 경과를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신동옥 시에서 복수의 은유적 연계의 내적 메커니즘이 중층적으로 형상화되는 경위를 암시하는 점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크게 초반부(1), 중반부(2~3), 후반부(4~5)로 구성되는데, 초반부는 단편적 이미지들이 나열되는 반면 중반부 이후에는 시적 화자의 내적 발화가 중심을 이루며 진행된다. 시상 전개를 살펴보면 초반부는 비트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양상을 제시하고, 중반부는 그것이 만들어져서 우리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하는 상황을 제시하며, 후반부는 그 속에서 우리하나가 되었지만 얼음이 공존하고 다른 상처에 같은 처방을쓰는 상황을 제시한다. 요약하면 비트의 전단계(초반부), ‘비트의 형성 단계(중반부), ‘비트의 전환 단계(후반부)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초반부(1)는 표면적으로 가정의 일상사와 자연의 풍경을 단편적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제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파편적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가운데 언캐니uncanny하거나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이미지가 돌출하면서 가정의 일상사와 자연의 풍경 사이에 발생하는 균열을 노출시킨다. “여자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는 일상적 모습이지만 털이 무성한 목덜미를 가진 사냥감을 쫓는 강아지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동물성이 은밀히 노출한다. “엄마가 손 갈퀴로 파낸 들판을 말없이 질주하던 물소떼는 일상 속에 파고든 동물성이 광범위한 들판으로 확대되면서 야수성을 드러내고, “야전 침상 아래서 아빠의 작전 수첩을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는 일상의 사건이 야전 침상작전 수첩으로 표상되는 전투적 상황으로 이어진다. “언덕 너머 바다에서 나온 말 없는 물고기는 근경에서 원경으로의 공간적 전위를 통해 바다말 없는 물고기를 등장시키고, “끝없이 뻗은 오솔길이 숨긴 깊고 아득한 참호들은 자연의 풍경을 따라가다가 은폐된 깊고 아득한 참호들을 발견하며, “숲에서 깃을 치며 나오는 발 없는 새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노출시켜 어떤 결핍이나 결락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초반부에 제시되는 파편적 이미지들의 병치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주제 및 기법의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제의 측면에서 가정의 일상사와 자연의 풍경 속에 은폐된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와 승패를 걸고 투쟁하는 전쟁 세계를 탈은폐시킨다. 기법의 측면에서 언캐니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노출시키고 파편적 이미지들간의 충돌과 연결을 통해 충격 효과를 발생시키는 몽타주를 구사한다.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특성을 가지는 초반부가 중반부(2~3) 이후에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중반부 이후에 등장하는 비밀 아지트의 약자인 비트는 군사 용어로서 간첩·게릴라 등의 은밀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 숨어지내는 곳을 의미한다. 중반부와 후반부는 크게 볼 때 상처”, “흉터”, “침묵등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비트내부의 상황 및 우리의 관계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연속선에 있다. 중반부 2연의 시작 부분인 한때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라는 문장은 초반부(1)를 토대로 도약하면서 중반부 이후 전개되는 비트내부의 상황을 견인한다. 이 문장이 가지는 표면 장력은 후반부까지 유지되면서 비트의 양상을 강하게 암시한다. ‘로 구성되는 우리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하는 것은 동일한 아픔과 고통을 가지지만 상호 교류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주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비밀 아지트출구가 없는 터널 속”, “빠져나올 길을 영영 잃어버, “파국”, “접선할 방법을 영영 잊어버림 등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이러한 폐쇄적 단절의 속성에서 기인한다.

화자는 3연에서 폐쇄적 단절성을 기초로 비트를 만드는 과정과 그 속성을 진술한다. “흉터신비한 담장이 되어 비트를 구획하는 것은 아픔과 고통을 원천 재료로 삼아 비트를 만든다는 의미이고, “꼭꼭 숨어서 침묵으로 저항하는 것은 폐쇄적 단절성을 무기로 삼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버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비트가 전투적 은유뿐만 아니라 다른 복수의 은유와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비트는 기본적으로 전투적 은유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혁명은 없다.”에서 정치적 은유와 연계하고, “사랑과 암시의 역사가 쓰이는 방식에서 연애적 은유와도 연계하면서 중층적인 의미 맥락을 형성한다. 이 세 가지 층위의 은유가 중첩하면서 의미 맥락을 수렴하고 결집하는 내밀한 과정을 밟아서 모든 것들은 가능할 때까지만 지속된다./ 지속하는 매 순간 불가능으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라는 문장에 도달한다. 따라서 필자는 3연의 시상 전개에 숨어 있는 미학적 방법론을 복수의 은유적 층위를 상호 충돌시키고 연결시켜 충격 효과를 얻어내는 몽타주라고 간주하고자 한다. 결국 이 시는 초반부(1)에서 언캐니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파편적 이미지들간의 충돌과 연결을 통해 몽타주를 구사하고, 중반부(2~3)에서는 복수의 은유적 층위를 상호 충돌시키고 연결시키는 다른 결의 몽타주를 구사하는 방식으로 이중의 몽타주 기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후반부 4연에서는 밤낮없이 비트 속에 갇혀서 비로소 하나가 되우리를 통해 폐쇄적 단절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딘가에 불을 지피고 어딘가에선 얼음이 언다에서 얼음의 대립적 이미지가 전투적 상황 및 연애적 관계라는 양 측면에서 모순의 공존이라는 의미 맥락을 형성한다. 이어지는 문장도 유리창을 중심으로 사주경계상처나 살갗 등이 찌르는 듯이 아프다라는 뜻을 가지는 아릿한” “표정들을 연결시켜 전투적 은유와 연애적 은유를 중첩하면서 상처와 고통이 유지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5연의 언젠가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라는 문장은 2연의 문장을 반복하면서 상황의 지속을 드러내지만, “이제 더 이상이후의 표현은 변화된 현재적 존재 방식을 제시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생긴 피딱지에 십자가 표식을 남기고는/ 다른 상처에 같은 처방을 쓴다에서는 폐쇄적 고립을 유지하면서 상흔에 십자가 표식으로 암시되는 종교적 은유를 개입시키고 상이한 아픔과 고통을 가지지만 동일한 치료법을 시도한다.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한 이 시의 비트3연에서 정치적 은유연애적 은유와 연계되고 5연에 이르러 종교적 은유와도 연계되면서 보다 중층적인 의미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는 작전에서 소외되어 버림받고 우중충한 북벽에 숨었다. 나는 폭격으로 무너진 담장 위에 놓인 꽃병을 보며 벽을 긁는다. 벽에 앉은 그을음을 손톱으로 긁어가며 마지막 편지를 쓴다. 코털에 휘감기는 매케한 화약 냄새 속에서 묘비명이 적힌다. 나는 지금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내가 될 것입니다. 성모여, 고상함과 수치와 극기와 짐승은 모조리 악마에게 돌리시고 제게는 아내를 주소서. 지평선까지 무한한 폐허가 펼치는 지도가 사방을 에워싼다. 검은 옷을 입은 노파는 딱딱한 빵 바구니를 안고 잠들었다. 잠든 귓구멍에서 빵 조각을 빼물고 까마귀떼가 날아오른다. 소개된 거리 끝에서 고양이 떼가 잘린 손가락을 물고 흩어진다. 두 동강이 난 아치형 목조 다리 아래에서 뗏목은 매듭을 풀고 토막토막 분해된다. 강물 위로 누렇게 바랜 백기가 죽은 태아를 안고 떠내려간다.

 

이것은 데자뷔다. 오늘은 이렇게 끝날지도 모른다. 거대한 웅덩이가 푹푹 파인 전선의 북쪽 목축지에서 낙오와 항복은 나의 작은 비밀이 될 테지. 나는 버림받고 너절한 작전지도 속에 숨는다. 다리 너머로 얕은 습지가 펼쳐진다. 억새가 비로드처럼 반짝인다. 그 끝에 얕은 산악 지대가 가로막는다. 조각난 무릎뼈를 맞추는 소리가 아득하게 울린다. 나는 낙오했고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폐허가 된 목축지 뿌연 잿빛 속에, 건초 더미가 날아올라 목책에 널린다. 고막이 터져서 침묵 속에 날뛰는 말과 염소들이 무사히 가을의 정적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고요한 채벌장 위로 별이 차오른다. 나는 낙오했고 나는 내 슬픔을 구속한다. 성모여 대지를 눈으로 덮어주시고 제게는 아내를 주소서.

 

나는 아버지의 이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배를 가득 채운 하얀 쌀벌레들, 쏟아져 나오는 벌레들의 틈바구니에서 그해 첫눈은 다른 해에 비해 일렀다. 그해 첫눈 속에 붉은 새가 날아오르더니 아버지의 북벽에 앉았다. 새는 날아올라 아버지의 정원을 붉게 물들이겠지. 나는 북벽에 남아 그을음을 긁어내 눈물로 강을 만들고, 강물에 백기를 눈처럼 흘려보내며 증오를 보태겠지. 정원수 아래로 아이들의 다리뼈를 조각조각 흘려보내며 끝까지 이곳에 남아서 나는 볼 테다. 초롱불과 화덕이 거적에 싸인 무릎을 덥힐 때, 비문(飛蚊)처럼 춤추는 열기의 선들,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의 이불 위에 누이고 그 곁에 씨를 뿌릴 것이다. 눈뜨는 새싹에 대고 성호를 그을 것이다.

 

목초지의 끝으로 서리와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행군한다. 목책을 따라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간다. 강가에 버짐처럼 불꽃이 번진다. 무한의 정적 속에서 캐터필러가 전진하는 것 같다. 작전지도에 낙오와 항복은 그릇된 일이라고 적혔다. 그릇된 일이 아니라 너무나 강렬하기에 금지한 것이다. 내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낙오한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수천 번은 왔다. 이것은 데자뷔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

― 「종생기- 비트 3」전문(3 : 90~92)

 

이 시는 비트연작시 중에서 저항군모티프가 전투적 은유를 기반으로 존재적 은유, 연애적 은유, 종교적 은유, 가족적 은유 등 복수의 은유들과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하는 작품이다. 먼저 1연을 세밀하게 분석해 보자.

시적 주체는 작전에서 소외되어 버림받고 우중충한 북벽에 숨낙오병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폭격으로 무너진 담장벽에 앉은 그을음을 손톱으로 긁어가며 마지막 편지를쓰는 화자의 모습은 매캐한 화약 냄새 속에서 묘비명이 적히는 상황으로 급진전된다. “마지막 편지묘비명으로 이동하는 순간적 과정은 주체의 폐쇄적 고립이 극한 상황에서 죽음에 도달하는 비약적 전개를 보여준다. 이 도약의 내부에는 저항군모티프가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존재적 은유, 연애적 은유, 종교적 은유, 가족적 은유 등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화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는 지금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내가 될 것입니다.”라는 존재적 각성 및 연애적 감응에 이르고, 곧바로 성모여, 고상함과 수치와 극기와 짐승은 모조리 악마에게 돌리시고 제게는 아내를 주소서.”라는 종교적 소망 및 가족적 애착을 기도로써 표출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에는 복수의 은유적 층위를 상호 충돌시키고 연결시켜 충격 효과를 얻어내는 몽타주의 기법이 개입한다. 따라서 이 시의 1연은 저항군모티프가 복수의 은유 계열들과 연계하여 중층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하면서 그 내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기법적 방법론인 인유-몽타주-알레고리를 농축하고 있다.

이어지는 1연의 후반부에서 지평선지도가 표상하는 전투적 은유의 맥락이 무한한 폐허가 암시하는 존재적 은유의 맥락과 결부되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검은 옷을 입은 노파”, “날아오르는 까마귀떼”, “잘린 손가락을 물고 흩어지는 고양이 떼”, “토막토막 분해되는 뗏목등은 전투적 은유가 존재적 은유와 결부되면서 파생시키는 상처와 고통 및 죽음의 흔적들이다. 이 흔적들을 수렴하고 결집하면서 제시되는 것이 강물 위로 누렇게 바랜 백기가 죽은 태아를 안고 떠내려가는 장면이다.

2연의 첫머리에 제시되는 이것은 데자뷔다.”4연의 마지막 문장인 이것은 데자뷔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에서 되풀이되는데, 필자는 이 표현이 작품을 지배하는 구조화 원리이자 신동옥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구조화 원리를 은연중에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 표현은 주제적 측면에서 낙오했고” “슬픔을 구속하는 화자가 성모에게 아내를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모습과, 기법적 측면에서 저항군모티프가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복수의 은유 계열들과 연계하는 과정이 꿈속의 환상처럼 반복적 강박으로 되풀이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회개’, ‘악공樂公’, ‘누이’, ‘저항군’, ‘길음/송천동/남양/정릉’, ‘상두꾼’, ‘고래/팽이/불꽃’, ‘앙코르등 최소 여덟 가지로 세분할 수 있는 신동옥 시의 중요 모티프들, 각각의 모티프와 연계하는 복수의 상징체계들, 연계의 기법적 방법론인 인유-몽타주-알레고리등은 공통적으로 꿈속의 환상을 반복적으로 재연하는 데자뷰의 속성 및 원리를 구현하면서 형상화된다. 따라서 신동옥 시의 복잡다기한 모티프 및 상징체계들은 모두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양자가 혼재하거나 혼융되어 데자뷔적인 아우라를 가지고 형상화된다.

데자뷔의 속성 및 원리를 고려하면서 작품 해석을 시도하면 표면적 의미뿐만 아니라 심층적 의미에 근접할 수 있다. 2연에 등장하는 낙오부상’, “항복”, “슬픔기도등 화자의 표면적 상황을 근저에서 지배하는 심층적 심리는 오늘은 이렇게 끝날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에 농축되어 있다. 필자는 이것을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의 패배 의식반복 강박적 트라우마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2연의 상황은 3연을 건너뛰고 4연에서 연속되므로 4연과 함께 비교하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4연에서 현실의 상황은 목책을 따라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는 모습, “강가에 버짐처럼 불꽃이 번지는 모습, “무한의 정적 속에서 캐터필러가 전진하는 것 같은 양상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데자뷔의 속성 및 원리를 고려하면 폭격불꽃캐터필러등 표면적 상황의 근저에서 화자의 내면적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내게는 다른 방법이 없내가 낙오한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심리이다. 이 발화는 생환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낙오병의 절망감과 책임 회피의 수동적 태도를 드러내지만, 두 문장에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라는 1인칭 주체가 역으로 비-주체성을 반증하는 데서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상황은 화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고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속성을 가진다. 이러한 속성이 바로 2연과 4연을 묶어주고 연결하는 고리인 데자뷔의 숨은 의미가 된다.

그런데 데자뷔의 속성으로 도출한 패배 의식반복 강박적 트라우마만으로 신동옥 시의 구조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패배 의식반복 강박적 트라우마는 신동옥 시의 무의식적 메커니즘에서 한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고, 그 전체상을 파악하려면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의 대결 의지반역적 정신을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양 측면을 종합하여 신동옥 시의 저항군모티프가 대결과 패배의 충돌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동반한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2장에서 /회개모티프가 신성과 욕망의 충돌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동반하면서 종교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세속적 은유음악적 은유까지 아우르며 희망을 노래하는 전체적 알레고리로 승격시킨다고 해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저항군모티프가 대결과 패배의 충돌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동반하면서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생활적 은유’, 정치적 은유‘, ’연애적 은유, ‘종교적 은유’, ‘존재적 은유’, 가족적 은유등을 아우르며 전체적 알레고리로 승격시킨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석은 인용한 시의 3연에서 논지를 뒷받침할 수 있다. 3연은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는 저항군모티프가 주로 가족적 은유와 연계하여 데자뷔적으로 형상화된다. “아버지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는 것은 현실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그로테스크한 표현이다. “어머니의 배를 가득 채운 하얀 쌀벌레들에서 아버지쌀벌레들과 등가를 이루며 동일시되는 듯하다. “쌀벌레는 가족들의 주식主食을 이루는 이 오래되어 부패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므로 아버지는 일차적으로 퇴락과 부패의 의미 맥락을 가진다. 그런데 벌레들”-“첫눈”-“붉은 새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쇄가 북벽에 앉아버지로 귀결하면서 아버지는 퇴락과 부패에서 순결과 재생의 의미 맥락으로 전환된다. 이어지는 나는 북벽에 남아 그을음을 긁어내 눈물로 강을 만들고, 강물에 백기를 눈처럼 흘려보내며 증오를 보태겠지.”라는 문장은 의 위상을 아버지의 연장선에 두면서 눈물의 인고, “백기의 패배, “증오등의 의미 맥락으로 연결시킨다. “아이들의 다리뼈를 조각조각 흘려보내는 언캐니한 이미지는 전투적 은유를 가족적 은유와 연계하면서 죽음의 아우라를 드리우지만, “끝까지 이곳에 남아서 나는 볼 테다.”라는 결의를 통해 저항과 대결 의지를 불태운다.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의 이불 위에 누이고 그 곁에 씨를 뿌릴 것이다.”에서 근친상간적 비유를 구사하는 동시에 눈뜨는 새싹에 대고 성호를 그을 것이다.”에서 신성에 대한 위악적인 비유를 구사함으로써 세상에 저항 및 대결 의지를 역설적으로 표출한다. 결국 3연도 전투적 은유를 아버지”, “어머니”, “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가족적 은유와 연계하여 데자뷔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저항군모티프가 동반하는 대결과 패배의 충돌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접안으로 가닿은 낱낱에 집중해왔다. 작전은 다음 그리고 다음에 완결될 것이었다. 나는 잠시 지도에 도래하고 작전은 닥친다. 다음 그리고 다음으로 달아나 당신을 본다. 나는 조금 비켜서고 당신은 스스로 펼친다.

 

우리는 결이 성긴 작전을 좇는가 먹는가 비비는가. 당신은 조금 비켜서고 나는 스스로 펼친다. 대물렌즈 아래서 푸른 꼬리지느러미를 뻗어나가다가는 검게 죽어 굳은 정맥류를 점점이 이어 하얗게 붉게 디디고 서는

 

당신이라는 근친이 있어 필연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내 사랑은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한 잠시 누가 있어 1초의 삶을 위해 24시간 죽는가. 온통 흘레하며 뒹구는 잠시 누가 있어 죄와 무위를 걸머진 비렁뱅이로 남는가.

 

지도는 자체, 삶이라는 바탕소리다. 주저앉지 않고 놓여나지 않으며 헛되이 신념을 누설하지 않기 위한 쟁투의 꽃차례다. 사이, 언제고 곰살궃은 당신이 사무치는 내가 되었다. 언제고 사무치는 당신이 곰살궃은 내가 되었다.

 

당신이 꽃판이다 당신이 꽃술이고 대궁이다. 당신이라는 근친이 있어 오로지 저를 쓰는 지도는 온몸을 공글리어 우뚝 서기도 하는 것 세우기도 하는 것. 필연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다. 허기여 마침내 나를 이끌고 가라.

 

막다른 탄도에 가로놓인 채, 모든 행간은 지도가 쓰는 시인의 작전. 나는 작전이 없다. 작전은 당신이 없다. 당신의 작전은 당신이 없다. 당신은 끝내 작전이 없다. 나는 당신의 작전이 없다. 나는 내 작전이 없다. 작전은 내가 없다.  

―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비트 9」전문(3 : 104~105)

 

이 시는 비트연작시 중에서 저항군모티프가 전투적 은유를 기반으로 연애적 은유, 존재적 은유, 가족적 은유, 시작詩作적 은유 등 복수의 은유들과 연계하면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맥락을 형상화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시적 화자의 내적 발화를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크게 초반부(1~2), 중반부(3~4), 후반부(5~6)로 구성된다. 초반부는 화자가 지도작전으로 대변되는 전투적 은유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당신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애적 은유와 접속하고, 중반부는 당신이라는 근친과 맺는 필연의 나라죄와 무위를 낳는 연애적 은유가 신념을 가진 쟁투의 차원으로 전이하며, 후반부는 으로 비유되는 당신과의 관계를 다시 전투적 은유와 중첩시키면서 작전이 없는” “당신의 궁극적 사랑의 차원으로 귀결시킨다.

초반부의 1연은 시적 화자가 접안으로 가닿은 낱낱에 집중하고 작전다음에 완결될 것을 예상하며 지도에 도래하고 작전은 닥치는 모습을 통해 전투적 은유를 구사하면서 출발한다. 전투적 은유에서 연애적 은유로 전이되는 문장인 다음으로 달아나 당신을 본다에서 달아나라는 단어는 두 은유 계열 간에 단절이나 간격이 존재한다는 점을 은연중에 노출시킨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은 신동옥 시의 중요 모티프들과 그 각각의 모티프와 연계되는 복수의 은유 계열들은 상호 단절이나 간격을 안은 채 접속이나 연결이 시도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동옥의 시는 한 편의 작품, 한 권의 시집, 시 세계 전체라는 각각의 차원에서 다양한 모티프들이 상호 공백과 균열을 내포한 채 연결되어 있고 이와 연계되는 복수의 은유 계열들도 상호 공백과 균열을 내포한 채 연결되어 있다.

나는 조금 비켜서고 당신은 스스로 펼친다.”라는 문장은 연애적 은유인 당신의 길항 관계가 작품 전체에서 시종일관 유지되는 양상을 견인한다. 2연에서 우리는 결이 성긴 작전을 좇는가라는 표현을 거쳐 당신은 조금 비켜서고 나는 스스로 펼친다.”라는 문장은 앞의 문장과 대칭을 이루면서 당신의 길항 관계가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대물렌즈1연의 접안과 조응하면서 지도작전으로 대변되는 전투적 은유와 재접속하는데, 그것을 통해 관찰하는 당신푸른 꼬리지느러미를 뻗어나가다가는 검게 죽어 굳은 정맥류를 점점이 이어 하얗게 붉게 디디고 서는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대비적인 색채 및 대립적인 형상들을 연쇄적으로 충돌시키면서 모순이 중첩되는 연애적 은유의 이율배반성을 표현한다.

중반부의 3연에서 화자는 당신이라는 근친으로 인해 필연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1초의 삶을 위해 24시간 죽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연애적 은유를 필연과 우연이 충돌하고 삶과 죽음이 충돌하는 극한의 갈등과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양극이 대결하고 충돌하는 벼랑 끝에서 화자는 죄와 무위를 걸머진 비렁뱅이로 남는다는 표현을 통해 사랑의 모순적 이율배반성을 강렬한 파토스적 형상으로 드러낸다. 4연은 화자가 지도는 자체, 삶이라는 바탕소리다.”, “헛되이 신념을 누설하지 않기 위한 쟁투의 꽃차례다.”라고 말하면서 지도로 대변되는 전투적 은유를 존재적 은유와 생활적 은유 및 자연적 은유와 연계하고, “곰살궃은 당신이 사무치는 내가 되었다. 언제고 사무치는 당신이 곰살궃은 내가 되었다.”라는 문장을 통해 당신의 길항 관계가 상호 교류의 관계로 전이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화자는 후반부의 5연에서 당신의 상호 교류를 통해 당신이 꽃판이다 당신이 꽃술이고 대궁이다.”라고 선언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화자는 당신이라는 근친이 있어 오로지 저를 쓰는 지도는 온몸을 공글리어 우뚝 서기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연애적 은유를 다시 전투적 은유로 복귀시키고, “필연의 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다. 허기여 마침내 나를 이끌고 가라.”고 요청함으로써 필연의 편에 서는 자기 확인 및 전진을 위한 결의를 보여준다. 6연에서는 저항군모티프가 시작詩作적 은유와 접속하면서 전개된다. “모든 행간은 지도가 쓰는 시인의 작전.”이라는 표현에는 전투적 은유와 시작적 은유가 중첩하는데, 이어지는 나는 작전이 없다. 작전은 당신이 없다. 당신의 작전은 당신이 없다. 당신은 끝내 작전이 없다. 나는 당신의 작전이 없다. 나는 내 작전이 없다. 작전은 내가 없다.”에서는 작전이 없당신이 없작전을 교차적 대구의 언술로 표현함으로써 전투적 은유뿐만 아니라 시작적 은유에서도 탈피하여 순수한 사랑의 차원에 도달한다.

이러한 사랑의 차원은 제목인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4연의 신념을 누설하지 않기 위한 쟁투의 꽃차례다를 중심으로 의미를 수렴하고 결집하면서 을 중핵으로 형상화되는 꽃의 모티프를 새로운 모티프로 파생시킨다. ‘저항군모티프로부터 분기된 꽃의 모티프는 이후의 신동옥 시에서 나무는 꽃 피는 비트다”, “나무는 작전을 쓰지 않고 지도를 읽지 않는다(「나무-비트 21」, 3 : 132), “숲에서 아름다운 꽃이 태어났다/ 사람들이 숲으로 몰려갔다(「벚꽃 축제」, 4 : 47), “나의 노래는 줄기였고 꽃이었고 검불이었다(「숲과 재」, 4 : 108), “누가 나를 숲에 버려두고 떠났다(「숲 이야기」, 5 : 26) 등에서 보이둣, “나무”, “등의 이미지와 연동하면서 식물적 은유계열을 파생시킨다. 이처럼 신동옥 시의 다양한 모티프들과 그 각각의 모티프와 복수적으로 연계되는 종교적 은유, 세속적 은유, 외전적 은유, 음악적 은유, 전투적 은유, 생활적 은유, 존재적 은유, 연애적 은유, 가족적 은유, 식물적 은유 등의 상징체계들은 상호 단절이나 간격을 안은 채 인유-몽타주-알레고리의 미학적 방법론을 통해 접속 및 혼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모티프 및 은유 계열을 파생시켜 원주圓周를 확대하면서 시적 행로를 지속적으로 개척해 나간다. 향후 신동옥의 시가 또 어떤 새로운 모티프 및 상징체계들을 개척해 나가는지 예의 주시하기로 하자.
  • 오형엽 | 문학평론가. 본지 주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4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으로 등단. 비평집으로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알레고리와 숭고』 등이 있음. 젊은평론가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
  • 8) 이러한 차원에도 필자가 신동옥 시의 미학적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인유-몽타주-알레고리’가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알레고리’는 전통적 수사학의 알레고리가 아니라 발터 벤야민적 알레고리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 수사학의 알레고리는 우화에서 잘 나타나듯 하나의 독립된 작품 구조가 전체적 의미 연관을 통해 현실 공간에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단순하고 도식적인 구성 원리를 가지는 반면 발터 벤야민적 알레고리는 형상과 의미,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일치나 간극으로 인해 파편성․이질성․부조화를 노출하면서 역사의 현실적 차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독일 비애극의 원천』, 조만영 역, 새물결, 2008, 207-318쪽; 졸고,「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문학과 수사학』, 소명출판, 217-230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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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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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올 때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월간 현대시 이은지 김기형사육제동물능동성폭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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