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현대문학 2025년 6월호(제846호)
비좁게 버티며 잇기 - 읽기
아무래도 삶은 고통에 가까운 걸까? ‘잘 먹고 잘살자’는 슬로건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쪽으로 옮겨가다가 아주 보통의 하루를 소명으로 살라 한다. 결코 그것을 초과하지 말라는 듯 점차 쪼그라드는 소망의 크기는 퍽 현실적이라 그건 또 트랜드라 명명된다. 노동의 자리는 차츰 더 쪼개진다. 비정규, 비전임, 하청, 임시, 기간제와 같은 용어를 앞세운 계약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갱신은 언제나 불투명하다. 계약이 불발하면 사는 공간이 위협받는다. 전세금은 누군가의 먹잇감이기 십상이고 슬금슬금 오르는 월세의 부담은 가장 먼저 취향을 뒷전으로 민다. 일터에서 삶터로 이어지는 공간의 위협은 존재의 위상을 쪼그리고 접고 나누게 한다. 다주택을 보유하고 일주일에 며칠은 도시에서 일하고 한적한 곳에서 나머지 날을 보내는 삶은 확실히 ‘아주 보통의’ 사례는 아니다.
겨우내 누군가는 한 줄도 쓸 수 없었을지 모른다. 현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임에도 어떤 낌새도 개연성도 없는 소요를 두고 소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겨우 한고비나마 추스른 다음 어렵사리 꺼내놓았을 소설들이 어느 지점에서 묘하게 닮아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힌트가 있지 않을까? 계절을 통과하며 먼저 읽는 단편소설이 미학적, 정치적, 시장 경제의 문제와 같은 지점에서 장편 소설과 다른 무엇을 선취한다면 미덕 중 하나는 그 기민함에 있을 것이다. 특히 정치적 불안정의 와중에 발견되는 단편소설의 공통 감각이란 소설의 미학적 보편성이나 작가의 감각이라는 개별성, 특수성을 초과하는 시대 감각, 그 징후의 포착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연극의 무대와 마찬가지로 글쓰기 역시 기성의 공간분할을 혼란에 빠뜨리는 장르라는 플라톤의 진단에서 랑시에르는 미학이 수행하는 감성의 분할이라는 역할이 다분히 정치적임을 포착한다. 우리의 글쓰기에서 어떤 지형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징후이기도 하면서 사회구조의 재편 가능성을 향해 기존의 레짐이 해체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2025년 봄의 단편소설들이 먼저 읽고 감각하는 정치적 삶의 지형도는 마치 끝말잇기를 하듯 이어진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소설이 소묘하는 생은 좁아지고 접힐 것을 종용하는 공간과 그것을 체현하는 몸을 통해 다시금 감각과 경험의 재배치를 전경화하는 중인 듯 보인다.
어려서 이해가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누군가는 왜 망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무엇보다 정직하게 살아도 누군가는 불행 쪽에 서 있다. 이제 보니 그런 일은 드물지도 않을뿐더러 점점 흔하다. 조경란의 「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문학과 사회』, 2025, 봄)에서 양지의 삶이 결코 성공으로는 보이지 않듯이. 양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 강사로도 일했지만 쉰 살이 넘도록 교수임용은 기약이 없다. 일찌감치 교수가 된 현 선배의 빈집을 돌보며 그 집에서 자신의 전공 서적을 바라봄은 타인의 성공과 나의 패배를 여실히 대비하는 잔혹한 한 폭의 그림이다. ‘타인의 공간’에 대해서라면 그에게는 유사한 점유의 경험이 있다. 갑작스레 병석에 눕게 된 모 교수를 대신해 강의한 것 역시 현 선배의 소개 덕이었다. 당시 교수의 배려로 그의 연구실을 사용하면서 양지는 공간의 안락함에 취하곤 했던 것이다. 한 인간의 증명을 대리하기도 하는 공간의 위력 앞에 양지는 교수가 영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래봐야 양지는 엄연히 그 공간의 주인이 아니고 교수가 완전히 부재하게 되자 잠깐의 꿈을 허락했던 공간에서마저 완전히 내쫓기게 된 터였다.
다시 타인의 공간에서 지내게 된 여름은 온통 물난리로 하천이 범람하고 실종자가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재난의 와중인데, 양지는 이곳으로 종소를 들인다. 말랑한 감정이 있기도 했지만 둘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도 임용이 되지 못했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양지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모성에 대한 결핍이라는 곤궁이 있는 반면 종소는 모성의 과잉 쪽이라는 것만이 둘을 가르는 차이다.
현 선배가 없는 현 선배의 집 식탁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의 구도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가운데 괴괴하다. 이 집의 한 구석에 놓여있는 제법 어린아이만 한, 저주 인형이라고 불리는 밀짚 인형과 함께. 결코 내 것일 수 없는 타인의 공간이 양지에게 준 것이 있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관계를 오브제 보듯 낯설게 조망하는 타자화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그 시선의 전유 안에서 종소가 임용과 관련한 추악한 소문의 주인공이며 어쩌면 유서일지도 모를 글을 썼다는 것, 그것을 본 어머니가 끝내 아들의 여정-그것도 제자의 기일-에 동행할 수밖에 없는 그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다소 가능해진다. 그들을 당겨놓고 바라보는 것임에도 거기에는 양지가 결코 접지할 수 없는 모자의 관계가 양지쪽으로 일정한 폭만큼 거리를 벌린 채 존재하는데, 뜻밖에 양지는 종소의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을 미약하게나마 경유함으로써 결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맥없이 풀어져 버림을 느끼는 것 같다. 소설은 어머니에 대한 양지의 미움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적당한 곳에서 놓아버리는 능숙함을 택한다.
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진 종소의 어머니가 발견된 곳이 뚜껑 열린 맨홀이나 넘실대는 개천이 아닌 동네 주민들과 함께하는 맨손체조의 대열인 것은, 어머니가 잃은 것도 실은 일상이었으며 어머니 역시 벌어질 대로 벌어진 균열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을 독자 앞에 힘겹게 밀어 올린다. 가장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일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그 일상이란 또 얼마나 각자의 허상에 기반한 것인지 궁구하게도 한다. 누군가는 깨어진 일상 위를 더 오래 걷지 않나? 어쩌면 바라는 일상은 기실 꿈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다.
학위나 성실함이 미래의 일상을 담보하지도 않고 그런 이에게 주어지는 공간이란 그저 남의 것을 기웃대거나 잠시 머무르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임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제자의 죽음과 임용에 실패한 양지와 종소 그리고 저주 인형을 품고 사는 현 선배의 삶은 어쩌면 하나의 선 위에 놓인 가능성에 대한 확률 게임처럼도 읽히며, 그것들은 정말 한 끗 차로 보인다. 현 선배가 양지나 종소와 달리 교수임용에 ‘성공한’ 일상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라 할 때 시(詩)를 역전시키는 소설의 묘미는 현 선배의 저주 인형과 혈압 보조제가 그 답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프랑시스 잠의 시에서 나뭇잎이 빗방울을 끊임없이 받아내고 끈질기게 ‘버티는’ 중이듯이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견디는 중이라는 게 생의 비밀은 아닐는지. 양지는 더 버텨야 할 테지만, 그 버팀을 위한 그의 지금 현실은 너무 비좁기만 하다.
공간의 영향력이란 퍽 실재적이면서 감각적이기도 해서 때때로 공간이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매일 온몸으로 공간을 체현하며 그 경험의 체현물인 몸조차 공간이다.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사안이지만 이것은 점점 더 요원하기만 하다. 이토록 비좁은 현실에서 금비가 가진 공간이란 ‘캐비닛 두 개’다. 이상하의 「캐비닛 비우기」(『현대문학』, 2025, 04월)의 금비는 근근이 독립해 살던 원룸 보증금을 빼 살림에 보태기 위해 엄마와 이모가 사는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캐비닛‘마저’ 비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여성 청년의 버티기를 쓴다. 스물여덟 살의 금비는 분양사무소 바이럴 마케터다. “선캡족”(76쪽)으로 불리는 아주머니들이 하청직원인 것과 달리 금비는 “회사 소속 현장 직원”(75쪽)이지만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 길거리에서 분양사무소로 호객을 하는 것, 그게 이들의 일이다.
이십 년 동안 학습지 교사로 일했지만 태블릿 피시와 줌 체제로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재계약에 실패한 엄마, 금비가 중학생일 때 실직한 뒤로 줄곧 아르바이트만 하며 함께 살고 있는 이모는 각각 재편한 시장의 그림자처럼 금비의 생에 다소 누추하게 걸쳐 있다. 얼핏 계산을 해보면 엄마의 직장 생활과 이모의 실직,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는 변화는 국가부도 이후 체제의 개편과 함께 시작되었을 테다. 이제 와 이 집에 금비가 차지할 공간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고 70개가 넘는 이력서를 뿌리고 겨우 잡은 직장에서 금비가 필사적인 건 지당하다. 버티어야 재계약이 가능하고 그래야만 독립을 해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
‘회사 소속 직원’이라는 타이틀은 남들은 하나 쓰는 캐비닛을 금비만 두 개 쓸 수 있게 허락했다. 금비는 거기에다 원룸에 있던 원목 수납장을 옮겨놓고 개인 소품을 넣어두는데, 그 목록이 자잘하고 소박하기만 하다. 금비는 자신의 무기를 분명히 알고 선캡족을 이기기 위해 나름 유니폼을 갖추고 구두를 신는다. ‘아줌마’들은 입지 못할 작은 사이즈의 옷에 몸을 구겨 넣는 그런 노력은 육체적 차이를 토대로 사회적 가치를 구분하는 몸의 수치화에 다름 아니지만 그건 반드시 실적의 수치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정작 “제발, 한 번만, 도와줘”(78쪽)로 호객을 하는 선캡족의 실적에 밀린 지 오래다. 길바닥을 일터로 삼으며 머리에는 선캡을 쓰고 발에는 수면양말을 껴 신고 막무가내 호객을 하는 “5,60대 여성 아르바이트 생”(74쪽)들을 혐오하면서도 무력한 엄마나 이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감정. 그러면서도 가족과 그곳에서 같이 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심정. 그런 심경을 간단히 치부할 수 없는 건 저들의 버티기에도 나름의 선, 궁색할지언정 최소한 자존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1) 현실에 더는 적응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은 엄마, IMF 이후로 내내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이모 그리고 계약직 바이럴 마케터 금비로 이어지는 한 가계의 구조는 실은 이 사회의 정체, 그 지연을 여실히 되비춘다. 머무르다시피 내내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퇴행하는 이 사회의 잔여물처럼 자꾸만 자리를 좁혀가며 독립할 수 없는 저들의 사정에 기댈 때, 기대수명 120세 시대의 지당한 지침일 ‘저속노화’란 말조차 삐딱하게 들리는 건 노동의 측면에서라면 몸은 언제나 수단일 따름이기에 생산력을 보유한 일하는 몸을 오래 유지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종국에 두 개의 캐비닛 중 하나마저 새로 온 선캡족에게 내어주는 금비에게 저 수납장을 옮겨놓을 오롯한 자기만의 방은 어째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엄마와 이모, 금비 중 그 누구에게도 독립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고 그것은 이들의 자유라는 범위를 좀 더 한정할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감한다.
독립하지 못하는 어른은 그 집만의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전화를 걸어 죽고 싶다고 얘기한다. 차은영, 「고립어 배우기」(『현대문학』, 2025, 04월)에서 화자는 지금 여행 중이다. 먼 미래를 위해 1종 대형 면허를 땄지만 근미래는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는 화자의 여정 내내 따라 붙는 것은 아버지의 전화 그리고 가입하지 않은 ‘자갈 보험’ 옵션이다. 일찌감치 어머니와 이혼하고 전화나 걸어오는 아버지는 생명보험을 들먹이면서 내가 죽으면 그건 네 거라는 말을 반복하며, 살아있다. 아버지의 ‘자살 보험’과 여행길의 ‘자갈 보험’은 그렇게 나란히 먼 미래와 아주 가까운 미래(혹은 지금)의 화자를 둘러싼 안전장치로 나란히 대비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갈 보험은 옵션에서 빠져 있고 자살 보험은 아버지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 어느 쪽도 크게 득이 될 것은 없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지점은 동료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반응이다. 그는 동료에게 주말 근무 교대를 부탁했는데 동료는 주말 근무를 마치고 집에서 자살했다. 어쩌면 지난 소설 속 인물들이 과잉 윤리의식으로 인해 내면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를 이 대단한 사건이 2025년의 인물에게는 “왜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는지”“해명을 요구하”며 “죽음으로써 모든 형태의 해명을 궁극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파악된다는 것(97쪽). 소설은 죄책감을 종용하거나 그의 책임 여부를 따져 묻지 않는다. 그저 내내 아이슬란드의 자갈길 위에서 자갈 보험에 들지 않은 차를 상하지 않게 그러면서 이국의 어떤 풍경에도 넋을 빠뜨리지 않게, 가족사를 회고하는 일에 깊이 골몰하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길을 더듬어가는 여정을 담백하게 그릴 뿐이다. 균형잡기란, 내 탓이라기보다 그게 나일 수도 있었고 그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 마음 그러니 조금은 더 약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다짐 비슷한 것으로, 이 소설의 저류에 묵음처리 되어 있는 음성을 가시화하는 소설적 장치로 읽을 수 있겠다. 그리하여 화자가 끝내 완성한 문장이 “아버지, 죽지 마세요”(109쪽)라는 것은 그런 면에서 성장과 화해의 감각조차 달라진 ‘요즘’의 생존 감각은 아닐까. 자갈 보험과 자살 보험은 보험의 용어를 빌렸달 뿐, 결국 이 세계에서 존재란 죽음이나 삶 어느 쪽에서든 위험 앞에 균형을 잡고 버티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기미도 해명도 없이 죽음 쪽으로 발길을 돌린 저 동료처럼 「흰옷 빨래의 날」(안담, 『문장웹진』, 2025, 04)속의 마지도 그러하다. 증명할 수 있는 가난을 소유한 청년인 화자는 전세임대주택제도 덕에 역에서 멀지만 산에서는 가까운 집에서 큰 개를 키우며 지낼 수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다양하고, 펫시터, 원룸청소, 주말 보습학원의 데스크, 호프집 마감 직원, 자기 소개서 대필 등이 그 목록이다.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중증 우울을 앓는 친구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고 그전에는 고시원에서 살았다. 옆방 남자와 사귀는 동안 그 남자의 옷에 밴 치킨집 기름 냄새를 견딜 수 없어 그곳을 떠났던 터였다.
‘냄새’는 화자에게 매우 중요해 보인다. 자신의 외모를 전혀 가꾸지도 심지어 잘 씻지도 않는 마지의 체취는 만만치 않다. 참다못한 그는 마지에게 세탁법을 알려주는데, 마지는 아주 간단한 생활의 기술 이를테면 세탁기 사용법조차 모르고 있다. 차츰 청소며 정리를 시작하는 마지가 정보를 취득하는 경로는 다름 아닌 ‘유튜브’다. 그러니 얻는 정보는 산만하고 산발적이다. 유튜브가 마지를 데려가는 방식은 알고리즘이니, 그건 현실의 개연성과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마지는 알고리즘에 따라 이것저것 살림 ‘꿀팁’을 얻어오고 청소 세제와 수납함을 구입한다. 잡다하고 목록화되지 않은 알고리즘의 경로는 그를 음모론의 세계로 데려가고, 집회로 이끌기도 한다. 태극기 집회, 장애인권, 기후 정의,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 집회까지 목록은 다양하다. “트랜스젠더는 당신 곁에 있다”.어쩌면 이 문장은 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사는 게 서툴렀”고 “사는 정도가 아주 미약”한 사람, “사람이 덜 되었다는 피드백을 듣곤” 했던 마지에게 일상, 보통의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일상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당위성으로 갈음되곤 한다. 그건 정상성의 규정에 대한 모종의 합의를 전제하기에 일상이 누군가에게 버거운 것이라면 그에게 일상의 영위는 보편성이라는 텅 빈 것의 추구이자 폭력이기도 할 것이다. 화자가 남자친구의 옷에 밴 기름 냄새가 자신에게 옮겨 오는 것이 실재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 될까 봐 그것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라면, 마지의 냄새에 자신의 삶이 한데 뭉뚱그려질까 봐서 비싸고 향이 나는 세제를 고집해온 것이라면, 마지에게 그런 향기로 감싸인 공간은 끝내 곁을 물리는 행위,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시켜주는 묵언의 죔쇠였던 것은 아닌지. 그럼으로써 삶은 한 번 더 층위를 구분해나가는 방향으로 마지를 몰아댔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기일에 마지의 흰옷 빨래를 하는 일은 그를 기리는 것이면서도 그 공간에 더는 없는 마지의 육체성을 마치 수의를 연상시키는 흰옷으로 대체하는 이 행위는 진정한 애도의 행위인가 부재의 확인라는 남은 자의 자기 보존인가. 그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마지의 빨래를 자꾸 빨아 그의 냄새를 휘발하는 행위에 마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산행에 긍정적인 답을 주었던 데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곁을 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희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이는 광장의 숱한 깃발 중 어느 항목에도 퓨섭될 수 없었던 마지만의 깃발을 세우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이 행위의 저변은 차은영의 인물과 나란히 두고 읽게 한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죽음의 원인을 자신에 두지 않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안간힘임과 동시에 그 원인이 실은 세계라는 외부에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의 윤리라는 저울의 추를 버티어내는 개인의 승리 쪽으로 점점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면에서 사후적인 윤리의 냉담을 엿보게 한다.
마지가 일상을 향해 웅얼거리던 말은 끝내 ‘버겁다’가 아니었나. 한 인간의 삶이 사회적 관계와 더불어 공간 내에서의 관계성을 주고받으며 일정한 레짐을 형성해간다고 한다면, 마지의 죽음이 실족사였든 자의적 선택이었든 자명한 것은 어디에서도 자신을 허용받지 못했던 마지의 죽음은 저 바틀비의 죽음이 가치와 그 가치를 수용할 공간의 말소이듯 일종의 사회적 죽음으로 수렴되는 면이 있다.
어떤 순간에는 정말 가진 것이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속되나. 남의 집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달걀을 꺼내 먹어 치우는 몸, 그 몸은 빈집을 임시로 채운다(「빗방울 하나 마른 잎을 두드리네」). 임시라는 말은 각종 유사어로 위장해 부지불식간에 잠입했고 우리 세계를 점유했다. 재계약에 실패하면 남의 집 달걀이라도 먹으며 버텨야 하는 것은 대학원을 나온 시간 강사나 학습지 교사나 주방 아르바이트생이나 바이럴 마케터나 마찬가지다. 계약이 끝나면 제 몸을 둘 공간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교수의 방을 대신 쓸 수 없고, 캐비닛을 비워야 하며, 증명하지 못하면 다시 누군가의 집에 월세를 내고 하우스 메이트로 들어가거나 고시원으로 가야 한다. 또 누군가의 몸은 냄새나고 어디에서도 구실하지 못하는 것, 곁에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삶은 고단하다. 잔뜩 고통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곁에 있던 너마저 죽는다. 정당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니체의 말마따나 오로지 미적으로만 세계가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현실보다 좀 더 정당성을 가질 소설에 기대 이어 나가 보니 그건 이 사회의 레짐이 점점 협소한 방향으로 삶을 몰아세우는, 악화 쪽으로 기우는 소묘들이다. 어지러운 정치의 모형들이 우리를 더 좁은 곳으로 내몬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죽어가거나 살아가는가. 쩨쩨하게도, 삶은 그럼에도 지속된다. 삶은 아무래도 고통 쪽에 가까운 듯하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삶일지라도 덤벙덤벙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어쩌면 그것만이 내가 나를 존중하는 가장 비좁지만 오롯한 존엄의 태도가 아닐까. 이 계절의 소설을 읽으며 달라진 세계의 지형도를 쓸쓸하게 음미해본다. 조금 더 잘 버티기 위하여.
- 1) 나는 여성의 일과 자리 그리고 이름에 대해서 쓴 적이 있는데, 일터에서 여성 청년이 자리를 지키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지만, ‘아줌마’들의 ‘버티기’는 금비의 표현에서도 보이듯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받는다. 그들은 남성중심의 사회로부터도 소외받지만 젊은 여성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거기에 하청, 하청의 하청과 같은 구조가 덧붙어 이들은 쉽게 ‘민폐 아줌마’로 전락한다. 졸고는 「비주류 생존기-여성의 호명과 자리」, 『문장웹진-콤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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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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