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월간 릿터 2025년 6월-7월호(제54호)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 ― 『고독한 용의자』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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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누어 가진 시간 이렇게 정리해 보자. 시간은 능력이다.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다. 끝없이 변화할 뿐인 물리적 우주 속에서 사람이 세계의 유의미함을 추궁할 때, 비로소 내면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흥미롭게도 사람은 죽음을 확신한다. 사람은 세상의 물질적 순환에 순응하는 대신 죽기를 두려워한다. 내면의 절망과 신체적 고통이 우선인지 죽음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우선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참혹한 감정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성숙의 과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누군가는 숨을 고른다. 이윽고 그가 전진할 때 그는 그가 응답해야 할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을 성숙시키는 ‘길’을 발명하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면의 시간이 한 존재의 내밀한 고통에 기초한다면, 시간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내적 시간 또한 그에게만 유의미한 것, 그래서 시간에 대한 재현은 타인에게는 덧없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며, 또한 각자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늘 모자란 것이고, 누군가에게 시간은 견딜 수 없이 권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 경험을 나눌 필요란 무엇인가. 나는 소망이 높은 곳에 닿기를 기도하는 날이면 왠지 낯이 붉어져 연못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구름과 하늘과 풍경 소리가 떠가는 작은 연못에는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시든 연잎이 걷히고 북풍의 으름장이 연못을 얼려버리는 날에는 간유리 너머로 금붕어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 있는 주홍빛이 네 마리 물고기와 나의 주소였다 무릎걸음으로 겨울을 건너보려 했으나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침마다 살라온 향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토해내는 날에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기도가 사라진 법당 천장에서는 만질 수 없는 이름들이 흰빛이 되어갔다 오늘 봄의 동구를 걷는데 목련 꽃봉오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나를 작은 연못으로 이끈다 겨울이 녹은 자리에는 금붕어 네 마리와 물낯바닥 같은 물고기 두 마리 연못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과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 순한 눈동자들 풍경 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둑하던 봄눈들이 온몸으로 새 빛을 밀어 올린다 휘민, 「봄눈」 전문, 『현대문학』 5월호 한 시인이 살아낸 시간을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곱씹어보며 휘민 시인의 「봄눈」을 읽는다. 그에게는 기도드려야만 하는 날이 있었고, 그 기도의 여실함이 왠지 부끄러워져 연못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며 연못과 그의 내면은 일치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얼음을 밀어내지 못했다”라는 문장에서 ‘얼음’은 얼어붙은 연못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내면에 굳어버린 괴로움 또한 뜻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목울대에 걸린 간절을 온 힘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절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연못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았다. 거울로서의 연못은 성찰의 도구이다. 그런데 그는 연못과 연못의 물고기가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어쩌면 그 순한 눈동자가 살아낸 시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투명하고 맑은 물속의 시간에 비추어진 자신의 절박함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색과 봄눈으로 빚어낸 “새 빛”이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비로소 겨울에서 봄으로 옮아가는 한 걸음을 찾는다. 비록 그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았으나 그는 연못으로부터 평온을 배웠다. 여기서 나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적 시간이라는 개념과 별개인 세 번째 시간의 개념을 떠올려본다. 이 가설적 개념은 ‘분유된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간이자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간이며 타자가 응답함으로써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짊어질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의 소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과 내면의 시간의 시차(時差)로 인해 생겨난다.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아내기 이전에 삶은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넨다. 휘민의 「봄눈」에서 시간을 분유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본질은 시간과 시간을 잇는 장소를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당신이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경청하고 뒤따르는 장소이다. 2. 시간을 분유하는 두 가지 양상 자본주의적 시간과 문학적 시간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삶의 보폭을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제도라고 묘사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하고, 연도와 생애주기를 일치시킨다. 하이데거와 랑시에르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주로 짜인 자본주의 체제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생애를 일치시키도록 만들며, 이로써 내면의 시간을 배반하는 삶을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이에 반해 두 철학자는 산다는 것이 창조 행위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문학적 형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과정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좀 더 고독해지기를 요구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후세의 논의는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머물고 있다”1)라고 상찬하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인간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것은 영혼을 발견하기 위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철저히 고독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권한다. 치열한 삶을 함께 견딜 수 있을지언정 죽음은 홀로 겪어야 한다. 이 사실을 곱씹을 때 불안이 존재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한편 랑시에르는 충분히 나눌 것을 요구했다. 랑시에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여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개연성 있는 시간을 인간이라면 소중히 마음속에 지녀야 할 시간의 원형으로 여겼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란 단순히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시간은 사람에게 더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성숙의 시간을 뜻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여유를 가진 소수만이 이러한 인간다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부정의, 시간성 분배의 부정의”3)의 환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자본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데 급급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결여, 지연, 파편화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이민하, 「제너레이션」 전문,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제목 그대로 세대의 정서를 하나의 정경으로 그려내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이민하 시인에게 현세대는 허공에 내던져진 인간, 겨울 해변에 홀로 놓인 인간, 모국어를 잃어버린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확고한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대지, 유대감, 언어적 실감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민하 시인은 우리를 아노미, 즉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있는 세대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표현 수단의 상실과 ‘나와 네가 모두 엄마를 잃어버린’ 현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징후적으로 암시된다. 그리고 이전의 월평에서도 확인했듯, 내면의 우울감과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은 젊은 시인들에게 반복하는 제재이기도 하다. 현세대와 공통의 정서를 나눈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다만 세계의 부조리에 체념해 버렸던 대부분의 시인과는 달리, 이민하 시인은 비교적 낭만적 시간을 몽상하듯 당신과 함께라면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밤의 유목민”처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나’보다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를 끊어낸 자의 불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이데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자기 불안을 직시하기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하는 낭만적 유대의 사건을 그려내는 방향을 택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인의 혀끝은 세상을 악몽이라고 발음한 뒤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다정함을 제일 원칙으로 삼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충분히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부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제재는 시간이다. 예컨대 시인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타인을 기다리는 다정한 자세를 그려낸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타인이 견뎌낸 ‘시간’이 무엇인지, 더불어 ‘나’가 견뎌온 시간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꿈꾸고 있다. 요컨대 이민하의 시는 시간의 분유 없이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고백의 내용이 꺼림칙한 것이든 불완전한 것이든 문학에서는 한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나누는 사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라는 목소리로 끝맺는 이 작품의 다정한 어조가 어느 위치에서 발음되는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말의 나눔과 시간의 나눔 중 무엇이 더 깊은 것인지도 반문하게 된다. 우린 추락할 거야 지구 안으로 가장 안의 안으로 그곳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울고 있을지도 살이 불처럼 흐르고 빛이 대기처럼 딱딱해지는 곳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만이 남아서 하나가 되어 만날지도 불가사의 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으면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길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조만간 백두산이 폭발할 예정이래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 거지 나는 손끝을 무척추동물의 촉수처럼 흐늘흐늘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인데 가장 밖으로부터 왜 우리는 절단하는 거지 그래야 덜 아프니까 국가를 나누고 국경을 나누고 벽을 만들어야 하지 모두가 하나라면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동시다발적인 네 모습을 봐 낮게 수그린 자세로 우리 바깥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울고 있잖아 바깥에서 안으로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 있었는데 너는 자주 우는 사람 그리고 옷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를 때마다 단단해지는 사람 무엇이?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견고해지는 사람이지 결국 눈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파하겠지 응, 우리는 보통 고통스러울 거야 무를 자르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며 지구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잘린 손의 단면에서 살이 돋아났다 모든 게 지구의 속살 가장 연한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노은, 「유기생명체」 전문, 『웹진문장』 6월호 노은의 생태시는 랑시에르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을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한다. 주제는 선명하다. 시인은 “지구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멸종된 동물들”의 울음을 듣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멸종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멸종한 동물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종과 가없이 감응하려는 의지와 죄의식을 상기하는 태도가 맞물려 그의 마음속에서 “모든 게 고대 유적지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탄생한다. 이 예감은 표면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향한 회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의 차원을 넘어선 생명윤리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나는 조만간 나의 시작부터 끝까지/ 빙 둘러싸인 형태로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는 셈이다.한편, 왜 사람은 종을 나누고, 국가를 나눌까. 이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너무 많이 아파할 테니까” 가없는 연대가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감응하고자 할수록 견뎌내야 할 고통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한계선을 긋는다. 그 결과가 “자꾸만 구분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서술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두운 사실들, 예컨대 전쟁과 폭력과 냉담과 죄의식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잘린 손에서 살이 돋아나듯 치유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속살을 맛보듯 타자와 동화되는 순간을 다정하게 상상한다. 이를 읽으며 한 사람의 몸으로 지구를 삼켜내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가능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에 대해 냉담할 뿐인 인류를 각성하기 위해서 시의적으로 필요할 것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어떤 시인의 몸은 시대의 그늘을 발음하기보다 반드시 희망을 삼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58쪽. 2)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역, 『시학』, 문학과지성사, 2005, 37쪽. 3)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역,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현실문화연구, 2018, 30쪽.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 어떻게 표현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그 행위를 직접 체험한 이라면 해당 명제 자체를 부정하긴 어려울 테다.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는 순간, 쓰는 주체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토록 선명하다. 하나 이 현상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서도 선명한 답안을 내리는 건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혹은 소설이든 간에, 여러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 이 행위를 하나의 의미로만 압축하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지나칠(혹은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아빠 소설』 역시 그 의미 혹은 의의를 압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언하듯,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작가 개인의 자전적 경험과 이를 허구화 혹은 ‘소설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이 글을 우리는 소설이라 부를 수도, 소설이 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글이 소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명명백백한 분류를 내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무시무시하고 우악스러운 질문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어찌하여 일기나 산문, 아카이브의 형태가 아닌 소설을 ‘지향’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는 있겠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뒤섞고 충돌시키는 문학 텍스트들은 드물지 않다. 본문의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가 좋은 예다(『아빠 소설』은 『노블리스트』에서 “글쓰기가 막힌 작가 자신에 관한 자전소설이자,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메타소설”의 구조를 참조했다). 자전소설, 메타소설, 오토픽션과 사소설 등 작가 자신의 삶과 소설의 세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는 시도의 계보는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 또는 ‘해독’하는 일이 얼마나 다층적인 과정인지 증명한다. 동시에 이 시도들이 어떻게 매번 실패하는지,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에 창작자 본인에게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가져오는지 반증한다. 『아빠 소설』의 화자는 ‘엘릭’(가족을 두고 떠난 부친과 적대하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같은 이름이다)은 원고 마감일이 한참 지나 고통받고 있는 비평가다. 그가 보내야 하는 원고는 (『아빠 소설』이 수록된) ‘위픽’과 흡사한 형식 및 분량을 지닌 시리즈에 실릴 것이다. 본래 엘릭은 “아빠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과 자신의 경험담이 반반씩 섞인, 이를테면‘자기 이론’에 가까운 뭔가”(14쪽)를 쓸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빠는 죽음 이후에도 내내 자신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존재다. 이런 그림자 아버지의 유사 사례로 밥 먹듯이 등장하는 『햄릿』의 부왕과 달리, 엘릭의 아버지는 직접 소리 내어 말하거나 구체적 요청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의 여러 파편으로, 계속하여 돋아나는 의구심과 상처의 조각으로, 실재하지 않기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엘릭에게는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다의적 그림자로 주변을 맴돈다. 이 그림자에 대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까 고민하던 엘릭이 ‘현실의 그림자’로 호명되는 허구, 즉 소설을 택한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료한 형태로 드러나는 빛 속 형상이 아닌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이다. ‘아빠’의 그림자와 대치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는 엘릭의 선택은 결국 더욱 모호한 형상의 덩어리들과 마주하는 곧은길인 셈이다. 이 직로에서 엘릭이 쓸 수 있는 것은 걸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막막한 시야와 그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로 한 엘릭은 끙끙대고 헐떡대며 주위의 동료/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니 나 근데 소설로 다시 쓰려고(……) 지금처럼 쓰면 좆망할 듯”(15쪽) “저 소설 쓰려고요”(26쪽) (……) 물론 엘릭의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문자의 형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아빠의 그림자는 그 주변을 배회한다. 이렇듯 깊고 진득한 어둠 속에서, 엘릭의 말을 빌리자면 “(암전)”(17쪽) 속에서, 그는 진짜 소설을 쓰고자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그림자가 교차한 어둠 혹은 “(암전)” 속에서 랜턴을 비추듯 글자를 쓰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다. 대신 엘릭은 소설을 쓰고자 끙끙대는 자신 앞에 ‘아빠 귀신’이 나타나고, ‘햄릿’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아빠와 무규칙 격투기를 벌이는 시놉시스를 작성한다. 여기서 독자가 읽는 것은 아빠 귀신과의 무규칙 결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시놉시스가 어떤지 주위에 물어보거나 제 머리를 감싸쥐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이 계획에 홀로 피식거리다가“그냥 아빠 죽이지 말까?”(31쪽) 하고 자문하는 엘릭의 모습이다. 평소 그는 비평가인 자신을 진짜 작가 옆에 붙어사는 진짜 기생생물로 명명하며, 따라서 아빠에 관한 진짜 소설을 쓰는 일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지 고뇌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엘릭의 옆에는 귀신도 기생생물도 아닌 아빠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허구임이 분명한 존재지만, 활자로 적힌 엘릭의 고뇌가 이어질수록 그 사실 역시 불분명해진다. 어차피 모든 것이 가짜인 소설 속에서는 가짜의 정수라 할 만한 그림자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소설을 쓰다 말고 옥상으로 담배를 물고 올라간 엘릭은 가짜 아빠와 마주쳐 그를 공격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활자로는 발생해버린 ‘아빠 죽음’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후, 그는 진짜 소설에서 가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죽음’ 이후의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 공유한 경험과 이전에 듣지 못한 사실을 향한 대화,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한 질문이다. 엘릭이 버린 ‘자기 이론’ 원고 일부(그리고 그가 참고한 프로이트의 이론)를 참조하면, 애초 ‘있지도 않은’ 남근을 선망하는 여자아이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선망하던 남근을 소유”하려 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며 남성 ‘행세’를 해대는 여성 환자로남”는다. 엘릭은 실은 그 누구도 “부모의 일부 신체 부위가 망쳐놓은 밀가루 반죽”(57쪽)이 아님을 알지만, 위의 편견이 자기 “삶의 진실”(60쪽)과 닿아 있음 또한 알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을 위해 그는 ‘있지도 않은’ 아빠와의 무규칙 격투를 만들어 그를 연거푸 때려눕히고 질문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분명 내게 벌어진 일, 내가 겪은 일, 내가 통과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그림자 반죽 속에서 우리는 힘차게 소리를 지른다.
사회가 충분한 대화를 연습할 겨를 없이 월드 와이드 웹 체제로 진입한 것은 어쩌면 재앙이 아닐까. 표현의 자유와 의사 개진의 평등이 얼굴을 가린 채로 재빠르게 닮은 꼴을 찾아 커뮤니티란 이름으로 뭉칠 수 있는 곳은 기어이 ‘다크’한 것을 필연적 찌꺼기처럼 만들어낸다. 특정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만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통신망을 의미하는 다크 웹은 마약 거래, 성 착취 콘텐츠의 온상으로, 그 자체 범죄이면서 파생적으로 하위문화를 양산하곤 한다. 근자에 이런 다크 웹 문화는 음지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는 지상으로 올라와 사이버불링(cyberbullying), 악플, 온라인 성 착취 등을 하나의 놀이 문화로 만들고 있다. 범죄-놀이 문화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데, 더해서 기저에 깔린 것이 혐오의 정동이라는 점은 더 많은 악재를 내포한다. 커뮤니티 내에서 사용자들을 한데 묶는 공통 감각인 동시에 사용자들끼리는 도덕성을 내세워 특정인을 처벌한다는 일종의 사회정의 실천이라는 명분의 기제가 다름 아닌 혐오인 것이다. 2021년 한 커뮤니티 사용자들이 게임 업체의 광고에 쓰인 집게 손 모양이 남성의 신체를 조롱하는 것이라며 문제 삼은 사건은 성별 기준에 따른 혐오의 생성과 편 가르기, 유명인에 대한 마녀사냥, 악플 공격이 순차적으로 실행된 대표적인 예인데, 이를 기점으로 혐오 심벌 캐기는 걸핏하면 사건화된다. 사용자들은 ‘사냥꾼’을 자처하며 먹잇감을 찾아 나서고 그들의 타깃으로 ‘찍히면’ 사이버불링, 즉 온라인 집단 괴롭힘이 시작된다(때로 위협은 사이버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물론 그 사냥과 고발의 진정성은 전혀 담보되지 않은 채로 사냥꾼들은 사람을(동물을) 잡는다. 그러니까 WWW 체제는 ‘댓글 부대’와 같은 명칭에서 보듯 매체 사용자가 언어 주체에 포개지면서 쉽사리 권력화되는 시스템이다. 조진주의 「초모랑마는 바다였다」(『현대문학』, 2025, 6월호)에서 싱어송라이터 신지수는 인터뷰 도중 ‘중심이 서지 않는다’는 표현을 해 남성성 비하 혐의를 쓴다. 타깃이 되자 사냥꾼들은 지수의 과거 발언들까지 탈탈 턴다. 반추하다는 고추가 반 토막 났다는 뜻으로, 평등과 계급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공산주의로 호도되는 식. 말도 안 되는 유추래도 상관없다. 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데 맥락은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말에는 발화자의 욕망이 묻어있고 그건 발화자를 떠남과 동시에 수용자(수신자)의 욕망이 붙을 자리를 새로이 마련한다. 발화자와 수신자, 각자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말은 자주 불일치와 오역 가능성이 짙은 텅 빈 기표일 가능성이 크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부쩍 늘어나는 여성 혐오 담론과 그와 함께 등장하는 남성 인권에 대한 목소리는 불안정한 남성성의 위기를 보여주는 예라는 바넷 와이저(Banet-Weiser)의 말을 가져오면 이런 사회적 현상은 상실했다고 믿는 무엇, 자신의 몫인데 가지지 못했다는 패배 의식을 증오나 배척으로 돌려세움으로써 허약함을 방어하려는 거부의 방식으로 설명 가능해진다. 우리는 혐오의 기원이 위험에 대한 인식과 결부됨을 아는바, 어렵고 불확실한 영역에 대해서라면 혐오의 차원으로 밀어버림으로써 그 단단한 덩어리에 의존해버릴 수 있게 되므로 바넷 와이저의 저 문장에 동의는 어렵지 않다. 신지수는 연예인이기 이전에 스스로 곡을 만들어내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정체성으로 온라인 공격을 마주하면서 그들이 왜곡해 던지는 질문이 제 속에 정말로 있진 않은지 자문하고 검열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금하는 어휘가 늘어나고 허용되는 어휘는 그만큼 줄어든다면 말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질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그럴 때마다 지수는 티베트인 어머니와 한국과 미국 혼혈 아버지를 둔 루시 윌리엄스의 인터뷰 영상에 접속한다. 티베트어를 해석할 수는 없지만 지수는 그 영상에서 어떤 질문을 들은 것만 같다. 어쩌면 수신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를 그 문장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말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67쪽) 루시가 지수에게 보낸 이메일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루시에게 티베트 말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당장에 쓸모도 없는 그 말을 얼마나 배우기 싫었던지. 그런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자 어머니에게 남은 단 한 줄기의 언어는 티베트어이고 그것을 번역할 수 있는 이는 루시뿐이다. 아버지에게는 건너가지 못하고 루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뇌 손상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을 한 사람의 정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가며 어떤 이유에서든 삭제되거나 삼켜지는 맥락이 있을 것인데, 더군다나 그것이 다른 언어로의 번역을 경유할 때 말은 무엇을 전달하는 중일까? 아버지에게 건너가며 삭제되는 듯 보이는 말은 실은 번역을 위해 듣고 있는 루시의 온몸으로 흡수되는 중이고, 그건 말이 더 나중을 향해 건너간다는 뜻이 아닐까. 당장에는 번역되지 않을지 모를 그 말은 루시의 몸과 시간을 느리게 통과한 뒤 어느 날 불현듯 기억되는 식으로 번역될 것 같다. 지수가 자신의 내부로 질문을 던진 것은 퍽 윤리적이고 성숙한 태도랄 수 있다. 타인에게 말의 고삐를 간단히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진정한 자기를 노래하기 시작한 터이지만, 소설이 끝난 뒤에도 혐오 심벌을 조장하고 마녀사장을 일삼는 온라인 집단은 여전하다. 온라인이라는 매체 자체의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운용되는 말은 발전의 방향과 전혀 상관없이 비이성적 활용은 물론 그것을 정식화하여 도덕률로 삼고 심판의 권위를 거머쥐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곤 한다. 맥락에서 말을 오려내어 읽는 중일 때, 말은 상징계의 질서 안에 있지 않다. 그럴 때 말은 차라리 상징계에서 누락 되는 식으로 실재계로 이동하여 제멋대로 움직이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잘려 나간 말은 이제 주인 없이 떠돌며 마구잡이로 오염된다. 그렇다면 보다 엄정한 말 앞에 선 연구자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일까? 최은미의 「김춘영」(『창비』 2025, 여름호)에서 ‘운탄고도’로 불리는 폐광촌을 꼬박 1년째 찾고 있는 아카이브 연구팀 박정윤은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여성을 주체로 놓는 생애사 기술 작업에서 김춘영의 구술 채집을 맡았다. 기존의 탄광과 광부를 중심에 놓는 구술자료를 위한 면담이 김춘영이란 여성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거라 장담하는 정윤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윤은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방식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243쪽). 면담 내내 신중함을 견지하며 김춘영의 심기를 살피는 것을 포함한 그러한 태도는 정윤의 연구 윤리와 닿은 것일 테다. 소설이 소환하는 것은 일명 ‘사북 사건’으로, 당시 전국 최대규모의 민영 광산에 일어난 어용노조와 광부들 간의 충돌에 공권력이 개입하면서 사상자를 내고 광부들은 고문을, 그 아내들은 성고문을 당한 사건을 말한다. 1980년 4월의 일이니 시절의 흉악함을 조심스레 짐작해봄직하다. 면담의 마지막 날, 4월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폭설로 정윤은 발이 묶이게 되고, 거기에 트래킹을 하던 부부와 대민 지원을 나온 군인 둘이 합세하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김춘영이 응당 광부의 아내 아니면 여성 광부(선탄부)일 거라 여기며 존중하려는 듯 말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김춘영은 시종일관 주춤거린다. 그는 동네에서 술을 팔던 사람이었던 것. ‘막장 인생’, ‘한센인 다음 광부’라는 자조로 운을 떼는 한 광부의 회고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 속으로 제 목숨을 매일같이 밀어 넣어야 했던 광부들에게 김춘영의 술집은 숨구멍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광부의 아내 입장에서라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으리라.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데 일종의 사원증인 인감부를 맡기고 내일도 없이 외상술부터 마셔버리니 월급날이면 자동으로 먼저 김춘영에게 술값이 공제되고 그 나머지를 받는 형국이라 광부의 아내들에게 김춘영은 눈엣가시였을 테다. 그러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면 김춘영을 좀 덜 싫어하더라는 이야기 속에서 김춘영은 탄광촌의 가장 바깥, 탄광촌의 타자다. 사실 아카이브 팀은 조심스러운 한편 김춘영에게 사북 사건에 대한 증언을 얻고 싶어 늘 질문을 준비해 다니는데, 이 질문의 목록을 들여다보자니 김춘영을 관찰자 내지는 목격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약 김춘영이 목격자가 아니라면? 김춘영이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누락 된 설정값을 다시금 세팅한다면 저 물음들은 가해의 언어로 뒤바뀔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더해서 김춘영을 증언자로만 대할 때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은 김춘영이라는 사람이 아닌 김춘영의 ‘말’이 될 수밖에 없기에 정윤의 조심성에도 불구하고 연구자-증언자의 구도에서 모종의 위계를 배제하기란 어려워진다. 무언가를 물을 때 어떤 말을 듣고자 할 때, 우리는 그 말의 자리를 벌려놓는다. 그런데 그 자리란 게 미약하여 판단이 미리 점치는 쪽으로 마련되기 십상. 김춘영의 포지션이 광부의 아내나 여성 광부 중 하나일 거라 의심치 않는 저 악의 없는 부부의 태도에서 김춘영은 자신의 자리 없음만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식이다. 분명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공동체로부터 언제나 한 발짝 뒤에 있었을 김춘영에게 그들의 목격자로서 진술을 얻고 싶어 기회를 살피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 정당할까, 얼마나 윤리적일까? 그건 소설 밖 우리의 현실, 증언이 유일한 통로인 역사들이 산재하기 때문이기에 간절한 한편, 누군가의 기억을 돌이킨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당부한다. 김춘영이 광부들에게 숱하게 팔았을 돼지두루치기를 만들어내면서도 ‘손님상’에 어울려 앉지 않는 것은 과도한 엄정성일 수 있겠지만 그건 자신의 윤리를 증명하려는 모종의 태도, 실낱같은 자존을 막장의 바깥에서 붙들 유일한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사건의 목격자이길, 그리하여 쓸모 있고 충실한 증언을 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을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바람은 지워질 뻔한 역사의 복원이라는 선(善)의 차원에서 발원한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저 예비 된 질문에서마저 바깥에 놓인 미처 짚지 못한 김춘영의 고통이 더 깊은 곳에 있다면 어쩌나. 쉽게 꺼낼 수 없이 몸에 각인돼 버린 그 기억 앞에서 면담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 눈치 밝은 사람이 모를 리도 없겠건만. 기다리는 답과 말할 수 없는 상황, 그 앞에 나타난 군인의 얼굴이 겹쳐 만든 이 4월이 김춘영을 바닥에 주저앉히고 오줌을 줄줄 흘리게 만들었을 때 그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모양새가 김춘영이 그날 겪거나 보았을지도 모를 일을 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타게 기다리는 증언의 한 줄보다 그것을 먼저 살펴야 할 사람들은 소설 밖에 있다. 김춘영의 회고에는 언변이 좋았던 그가 마을 여자들이 탄광에 바람을 공급하는 압축기실 온수로 목욕할 수 있도록 탄광 관계자와 다리를 놓아주는 장면이 있다, 냉각수가 데워지면 그 물로 여자들이 탄가루가 묻은 몸을 씻곤 했던 것인데, 춘영은 “쓸데없는 건 다 빼줘요”(257쪽)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빼라 마라 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말미에는 김춘영의 이 이야기만 유독 구술 채집록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어쩌면 김춘영이 자신의 생애사에 남기고 싶은 순간은 단 한 순간, 진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 한 토막의 이야기, 마을 여자들이 옷을 훌훌 벗고 빈 몸으로 오롯이 자신을 환대했던 순간, 그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수 있는 자신의 효용을 증명한 그 순간, 그때가 아닐까, 더도 덜도 아닌 그 순간 광부의 아내도 여성광부도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김춘영이라는 사람도이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소설은 증언과 채집의 순간, 그 분위기를 소설로 엮어내며 누군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사실을 밀어 올림과 동시에 침묵의 이유를 사려 깊게 짚는다. 어떤 말은 그렇게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는 듯이. 증언자-연구자라는 일대일 구도는 폭설의 밤, 증언자-연구자-(소설 안)청자로 확장되며 거기에 (소설 밖) 청자를 자연스레 불러들이고 말의 이동 범위를 한껏 넓혀 놓는다. 그런 장면에서 어떤 말들은 끝내 말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말할 수 없는 말ㄹ을 그렇게 우리 앞에 내민다. 그런가 하면 어떤 말은 날조된 채로 우리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물질로 환원될 가능성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도덕은 역사적 감정의 산물이라 했던가. 성해나의 「신포도밭」(『문학동네』, 2025, 여름호)은 (거짓)말이 인간을 어떻게 직조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삼대에 이어지는 가계도로 전승되며 계보학적 형성과 변이를 추적한다. 동란의 틈에서 세 살 매석의 뇌리에 남은 희미한 기억 한 줌은 기와집 솟을대문과 그것이 사대문 안이었다는 것이다. 매석은 그것을 악착같이 자신의 기원에 대한 씨앗으로 붙들고 일가를 일군다. 전국을 돌며 약을 팔던 매석은 직업에 걸맞게 ‘약 파는’ 재주, 즉 말재간이 뛰어났고 엄정성 없이 그것을 합당하게 여기는 식으로 자기를 재정립할 줄 알았다. 장녀 매돈규와 그녀의 아들 호림이 이혼 후 성씨를 바꾸며 매씨의 대를 잇는 과정을 통해 이들의 ‘종자’는 반복 재생산된다. 호림에 이르러 그것은 다소 헐거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나면 철석 들러붙어 증식할 것이기에 헐겁거나 줄어든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소설의 중심, 매씨 일가의 중심에는 저 ‘포도밭’이 있다. 돈을 쥐고도 크게 투자할 줄 몰랐던 매석이 망설임 끝에 강남에서 밀리고 밀려나 겨우 마련한 땅으로, 개발의 희망만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신기루처럼 딱 눈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희망을 주는 그런 땅. 그건 언제까지고 강남인 듯 아닌 강남 같은 땅이다. 개발은 언제까지고 요원한 것이라 그 땅에 매석은 농약을 들이부어가며 포도를 키우고 매돈규는 짝퉁 명품 거래소 강남살롱을 연다. 매씨 일가가 날조나 다름없이 명명, 정의하는 포도밭이라는 장치는 여우의 우화를 연상케 한다. 포도를 먹고 싶지만 애써도 되질 않자 그것이 신포도일 것이라고 왜곡해버리는 여우의 이야기. 이것이 장기적, 반복적으로 누적 강화될 때 그리하여 그것이 분개가 될 때 이를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한다. 매씨 일가가 일구어낸 신포도밭의 계보학, 만성적이고 무능력한 르상티망에 정확하게 호응하는 이 소설에서 개발이 되지 않는 포도밭에다 줄을 죽 그어놓고 우리가 강남이라면 강남이라거나, 오렌지처럼 보이는 여성의 명품 가방이 가짜인 것을 보고는 어차피 다 똑같다며 가짜 상품이 오히려 합리적이라 믿는 행태는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위법적이기까지 하다. 르상티망이 자신의 무능을 ‘반복’하는 데서 오는 ‘감정’, re-feeling이라는 것에 집중해서 볼 때 대를 거쳐도 나아지기는커녕 반복되며 악화하는 이들의 계보는 근대의 합리성을 맘껏 조롱하는 성해나의 인식에 더해 소설의 축을 단단히 쌓아올린다. 호림에 이르러 이들의 지독한 자기 세뇌로 빚는 긍지는 다소 주춤하는 듯싶다가, 매돈규가 상표법 및 개발제한구역법 위반 등으로 입건되자 호림에게서 ‘매씨’의 강점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내내 일가의 성정을 부정하는 듯 보였던 호림은 뜻밖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은행 청원경찰인 그가 은행 용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별 소득 없이 번호표만 반복해 뽑고 있는 이유미를 돕고 그 대가로 5천 원을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한사코 거절해도 쥐여주는 돈이 큰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고, “모친이 말할 땐 허무맹랑하게만 들렸던 행원이란 호칭이 생판 남의 입에서 나오니 묘하게 진실처럼 와닿았”(253쪽)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통해 호림은 조금씩 ‘재개발’된다. 그러다 이유미의 욕망을 보자 그것은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 철석 들러붙는다. 미처 정돈하지도 못한 방치된 포도밭을 성급히 정리한답시고 휘두른 낫에 허벅지를 베이고 저 멀리 아른거리는 강남의 빌딩 숲을 바라보며 그가 포효하는 장면은 매호림의 재탄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설은 호림의 그런 변화를 이지러진 근대 괴물의 탄생처럼 그려내며 시종일관 우스꽝스럽던 소설에 서늘한 리얼리티를 툭하고 던지는 것이다. 근대성이 결코 합리성과 등가가 아님을 내내 설파하는 소설적 장치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더불어 호림의 변화를 우리는 결코 성장이라 말하지 않을지라도 증식이라고는 표현할 수 있겠다. 외부와 결탁한 음험한 자기최면의 말은 이제 겁도 없이 자라날 것 같다. 이정자로 살던 노년의 여성이 이유미로 개명한 것 역시 그녀가 여전히 욕망의 주체로서 살아감을 증명하듯 말이다. 나이 들어 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은 개명 후 통장 명의 변경과 같은 사소한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비견해 홀로 불쑥 커 보인다. 그런 균형의 어긋남이 이유미를 기괴하게 보이게끔 한다. 묵혀 둔 고액 예금과 개발될지도 모르는 아파트가 바꿔다 줄 전원생활을 꿈꾸며 5천 원씩 5만 원씩 비밀을 나누는 그녀는 어쩌면 매씨 일가와 퍽 닮은 구석이 있다. 덮개 기억(Deckerinnerung). 사소하고 무의미한 듯한 기억이 유독 생생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 일을 감추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정작 큰 것을 가린 작은 덮개일 수 있음을 뜻한다. 매석에게 기왓집의 대문이란 덮개 기억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합리를 도모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작은 덮개로 일생을 가리고 “되뇌다보면 어느 순간 거짓은 진실이 되”(227쪽)는 삶을 착실히 쌓아놓은 일가가 낳은 것은 작정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술술 풀어낼 줄 아는, 거짓말을 돈으로 교환하려는 매호림이다. 서로를 귀신같이 알아본 도귀분-매돈규와 매호림-이유미 사이에서 누가 누구의 먹이가 되는가? (거짓)말의 점유, 그것만이 이들을 구분할 따름이다. 선수 치지 않으면 나와 닮은 그가 나를 속여먹는 게임, 그것이 이들이 이해한 세계의 작동 방식이다. 편집된 말이 신포도밭을 가진 한 가계를 통째로 정립할 때, 싱어송라이터 신지수는 편집된 말의 세계에서 끝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는다. 라싸를 걸으며 그는 혐오 심벌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이들에게 적당히 삭제된 말을 하는 대신 자기 내면을 여실히 타진한다. ‘초모랑마’는 에베레스트를 가리키는 티베트어로 대지의 여신, 세상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 이름은 영국인 측량국장의 이름인 에베레스트로 대체 되었다. 어머니의 이름이 조지 에베레스트로 대체될 때 저들이 잃은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를 가만히 헤아려본다. 그러면서 어떤 말은 영영 그 통약불가능성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결코 뱉어질 수 없는 침묵으로 남기도 할 것이다. 어떤 기억의 자락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김춘영에게 그것은 발화되는 대신 차라리 신체에 깊숙이 찔리듯 새겨진 채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평생 돌아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이제 와 대의를 위해 정치적이고 공적이 존재가 되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발 없는 말’이란 표현은 말이 얼마든지 뛰쳐나갈 본성을 갖고 있음을, 그 대단한 움직임의 위력을 함의하는 듯하다. 인간은 의미의 자장 안에서 내내 진동하는 존재일진대, 지금 우리의 말은 어디로 가는가서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 중일까. 말은 이성의 산물이라는 문장을 전복하는 현실들은 이제 말을 조련할 힘을 빼앗긴 듯 보인다. 발 없는 말은 고삐 풀린 말이되고,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말의 먹잇감이 되고 자주 말의 발길에 차인다. 다시금 말의 고삐를 점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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