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제60호)
“눈부신 슬픔” :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별들의 속삭임」 부분
- 1)많은 사람들이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을 “bright sadness”라고 부르는 것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 2)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 3)황유원, 『세상의 모든 최대화』, 민음사, 2015.
- 4)T.S. 엘리엇, 이창배 옮김, 「고전이란 무엇인가」, 『T.S. 엘리엇 문학비평』, 동국대학교 출판부, 1999, 31쪽.
- 5)김상혁, 「선언된 낭만성 혹은 현재적인 것에 대한 반동」, 황유원,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2022.
- 6)김형주, 「시집 ‘하얀 사슴 연못’을 펴낸 황유원, 고요는 찬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매일 경제』, 2023.12.04.
- 7)아르보 패르트에 관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고로 하였다. Hannah Niemeier, “Pärt mournful, Pärt majestic”, The New Criterion, 2018. November.20.
- 8)성기완, 「조선어 연금술사 통관보고서」, 황유원, 『세상의 모든 최대화』, 민음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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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 윤영광, 『칸트와 푸코―비판, 계몽, 주체의 재구성』, 북콤마, 2025.02. ― 윤은주,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 세창출판사, 2025.04. 윤영광의 『칸트와 푸코』는 저자의 박사논문을 근거로 하여 ‘비판·계몽·주체’라는 세 가지 개념이 칸트와 푸코의 철학 ‘사이’에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양상을 연구한 논문 모음집이다. 특히 윤영광은 현상 자체만 보는 것을 지양하는 칸트적 의미의 초월적 위치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는 ‘초월적 읽기’의 자세를 연구의 기본 토대로 삼고 있다. 이는 “지금 현실화되어 있는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의 잠재적 상태를 상상하고 구성할 수 있는 것, 그러하여 텍스트를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 액체화되어 있거나 언제나 이미 해체된 것으로 볼 줄 아는 것”으로 봄으로써 “텍스트의 잠재적 차원과 관계하여 새로움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실천’”1)을 행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칸트적 주체의 (재)구성」은 칸트가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할 때 그의 비판철학에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관계 혹은 배치에 따라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멀리까지 그중에서도 「칸트적 주체의 (재)구성」은 칸트가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할 때 그의 비판철학에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관계 혹은 배치에 따라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다. 칸트 철학이 ‘종합(Synthese)’을 중심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이미 주체가 반드시 종합을 거쳐야 할 정도로 이질적인 능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이루는 고유한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질적이고 (아직) 비인간적인 능력들의 맞붙고 흩어짐만이 인간을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처럼 본성상 다른, 고유하게 인간적이지 않은 요소들의 공존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비인간적인 요소를 고려함으로써만, 그러한 요소들 간에 관계라는 관점에서만 대답될 수 있다. 칸트에게 ‘인간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 같은 인간학에서 인간성은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러한 개방성은 주체 내부에서 능력들의 불일치라는 형태로 경험된다. (21쪽) 윤영광은 이 지점에서 ‘인간’이라는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칸트의 동일성의 주체 내부에 이미 비동일적 운동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짚어내는 방식으로 그는 “유한성과 무한성이 불일치의 방식으로 공존하는 지점”인 한계를 “인간의 자리”(46쪽)로 지정한다. 안도 바깥도 아니고, 안인 동시에 바깥인 이 ‘한계’는 정확히 지젝이 말하는 칸트의 예지계와 현상계 ‘사이’1)와 동일한 영역이다. 또한 이곳은 분명한 의미에 붙잡히지 않는 기이한 괴물성들이 도사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절대적 이질성을 사고하는 이성의 사용자인 인간은 언제나 틈이 있는 존재로 자신을 (재)구성해내는 운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에서 윤은주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치적 주체의 행위인 공론장에서의 ‘저항’이 힘을 잃은 현실을 돌아보며,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위인 ‘생각함’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생각함을 본질적 특성으로 갖는 인간은, 세계를 지켜보고 생각한 뒤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세계를 끊임없이 형성해 나간다. 다소 쉬운 내용을 담은 이 책에서 윤은주가 가장 강조하는 바는, 그러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치적 행위가 가능한 곳”이 형성되었을 때 도래할 “아렌트의 정치가 필요 없는 사회”(153쪽)를 우리는 꿈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염두에 둘 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재고하고 인간의 힘과 역량을 다시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최근의 문학적 상상력들이 더없이 반갑게 느껴진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는 작가들은 특히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다시 보는 경향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그런데 이때의 신들은 보편적 의미에서처럼 초월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없이는 현실화할 수 없기에 인간을 욕망하고,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이 닮아 있기도 하다.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잉여성을 내부에 지닌 신들의 허물어짐은, 인간이 자신을 부수고 능력과 요소를 다른 패턴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해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제 공백과 무를 내부로 끌어안은 신과 인간이 거듭 쇄신하는 과정을 살펴볼 차례다. 신과 인간의 배후, 운동하는 생명력 신종원, 『불새』, 소전서가, 2025. 신종원의 『불새』는 우주를 구성하는 4원소를 주제로 한 그의 장편소설 기획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물’과 ‘죽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갔던 『습지 장례법』(문학과지성사, 2022)과 달리 『불새』는 ‘불’과 ‘생명’을 소설의 골조로 삼는다. 『불새』는 쉽게 읽히지 않는 소설이다. 방대한 분량, 지역과 인종 그리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역사의 삽입, 다채로운 형식, 신과 인간을 아울러 터져 나오듯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무수한 목소리 등 읽는 이를 곤란하게 만들 법한 요건들이 이야기 속에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범박하게나마 정리해보자면, 소설은 ‘성배 도난’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한국인 신부 ‘바오로’는 모종의 이유로 신을 섬겨온 기존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사제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이 자신을 사제의 길로 이끌었던 ‘베드로’ 신부와 갈등을 겪는다. 늙은 신부는, 젊은 신부가 진품 성배를 들고서 예수의 성령을 현재에 체현하는 성체 성사를 행하는 모습을 꿈에서 목격했다고 말하며, ‘바오로’에게 스페인에 안치된 성배를 직접 보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런데 때맞춰 성배가 도난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소설은 사라진 성배의 행방을 추적하는 동시에 “진짜 성배”(27쪽)의 신성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끈질기게 탐문한다. 이러한 과정은 앞서 질문했던 ‘신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수천 년에 걸쳐 성배를 빼앗고 빼앗기며 적대를 형성하는 역사를 환원적으로 구성한다. 성배를 신의 영성과 동일시하여 그것을 거머쥐었을 때 신과 같은 권세와 영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종원은 바로 이러한 믿음 속에서 무엇이 배제되었는가를 질문한다. ‘바오로’의 회의는 삶이 신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신격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물음은 성당의 소년부 성가대원 ‘헬레나’의 죽음을 계기로 싹튼 것이다. ‘헬레나’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중절 수술을 고려하면서 자신에게 면담을 요청해 왔으나 생명을 중시하는 가톨릭의 교회법에 얽매여 적극적으로 조처하지 못했고, 이후 그가 자살한 데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와 가치의 최상단에는 언제나 인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기원을 은폐하고 신과 진리의 이름으로 살아야 할 이와 죽어 마땅한 자를 구분한다. 즉, 『불새』는 일종의 ‘믿음의 계보학’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습이 축조한 특정한 삶을 형성한 뒤, 이를 강조하고 반복해 온 인간의 역사야말로 신앙이 지닌 민낯임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성배가 단순한 그릇 또는 컵 이상의 물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 역시 이러한 인식과 동궤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도 신종원은 형이상을 전적으로 몰아내고 형이하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신적이고 영성을 지닌 존재들을 거부하고 현실에 살아 숨 쉬는 인간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 소설은 신성의 의미를 재설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신종원의 새로운 믿음에 의하면 권능은 지상을 초월한 하늘나라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가라앉고, 죽은 뒤 다시 일어서고 날아오르기를 반복하는 생명 자체에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삶은 신의 의도에 따라 정해져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삶은 우연과 영원 속”, “반복과 무한”2)(395쪽)의 틈에서 끝을 모르고 피어오른다. 그러므로 그칠 줄 모르고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생명력만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무언가다. 그리고 이 역동성은 반드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를 필요로 한다. 신성은 육신이라는 그릇에 소복이 부어져야만 현실에서 발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은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을 통해서만 현현할 수 있는 것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중간 지대에서 신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다. 소설적 상상력에 의해 신 ‘야훼’에게 영광을 안겨준 존재로 설정된 또 다른 신은 ‘헬레나’와의 독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무에 복무하라 다그친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삶이라는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다. 별들은 항행하고, 돌들은 굴러떨어지며, 새들은 노래하고, 인간은 살 것이다. 인간은 싸울 것이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자기 앞의 혼돈을 거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나와 빛 쪽으로 걸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은 움직임이고, 생명은 항력이며, 생명은 노래하고, 생명은 날아오른다. 그러니 아이야, 어서 자리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삶을 개시하라. (177쪽) 신의 말에 따르면 삶은 그 자체로 목적적이다. 생명에 대한 정언명령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라’가 아니라 그저 ‘살아라’라는 문장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는 ‘헬레나’에게 신은 곡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네가 죽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171-172쪽) 신이 음성으로 현현한다면, 그것을 세계 내에 역사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육체와 영이 결합한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뿐이다. 신의 음성이 “명령이 아니라 요청”(369쪽)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지점에서 신과 인간이 포개어진다. ‘바오로’가 사제직에서 물러나고자 한 이유가 신을 등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더라도, 당신을 섬길 방법을 찾고 말겠”(21쪽)다는 다짐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신과 인간은 타오르는 빛을 삼키고 자기 자신을 무너트림으로써 기존의 세계를 쇄신할 수 있는 생명력을 서로 공유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의 위치는 일방적으로 믿는 자에서 역동적으로 행하는 자로 옮겨간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바오로’는 늙은 신부의 꿈처럼 성배를 쥔 채 ‘헬레나’의 영을 기꺼이 믿음의 성당 안으로 포용하여 새로운 성찬례를 거행한다. “죽은 바오로의 몸 안에서 또 다른 바오로가 일어”설 때, “이 바오로는 한낱 일꾼이나 몸종, 대리자 따위가 아”(372-383쪽)닌 한 세계의 주인이자 일종의 신으로 좌정한다. 신종원의 소설은 신과 인간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 가는 방식으로 둘을 겹쳐둔다. 둘은 서로 믿음과 행위의 근원이자 배후가 되어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신성의 다른 이름은 곧 생명력이고, 이는 영과 육체가 분리되었다가 결합하기를 반복하는 운동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성은 현실에 존재하는 균열을 가시화하고 틈을 더욱 크게 벌려 놓는다. 신과 인간의 사이, 괴수가 되는 꿈 김보나, 『나의 모험 만화』, 문학과지성사, 2025. 김보나의 첫 시집 『나의 모험 만화』에는 신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신들은 어딘가 엉성한 구석이 있고, 사람들은 난데없이 기이하게 돌변한다. 물놀이를 즐기는 작고 어린 신(「휴무」), 견디고, 갇히고, 훼손되는 신(「물에 빠지는 이 모든」), 인간과 내기를 하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에 가호를 내리는 신(「여기 지팡이 있어요」)과 같은 형상은 진리의 보증자요, 근엄한 실체라는 보편적인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마찬가지로 끓는 유황천에서 다시 태어나고(「탕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 방사선에 노출된 후 괴수로 변한 인간(「춘일광상(春日狂想)」, 「「미친 봄날 생각」」)들 역시 범상치 않다. 그래서 김보나의 시에 등장하는 존재들을 신과 인간으로 명료히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신과 인간 사이, 그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다. 우리가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말이나 글로 전해 내려온 것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내가 가진 단 하나뿐인 것 중에 아무것도 바치지 않아서 신은 화가 난 것일”지도(「차이나타운」) 모른다고 추측하고, 불운 앞에서는 “불경을 저질러서 이렇게 된 걸까?”(「천도복숭아 나올 무렵」)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보는 신을 이루는 기존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금기를 세울 수 있는 초월적 권능에 의해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내릴 수 있는 자라는 해묵은 설정 말이다. 하지만 시인의 관심은 만지거나 닿을 수 없는 추상적인 신적 가치보다 함께 맞붙어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를 향해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에 집중한다. 불변하는 가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라고 행동하는 인간의 간절함으로부터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신이 보증하기에 마땅히 행할 만한 ‘어떤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모든 사랑’이 진정한 신성의 자리를 대체한다. 시인이 시집 속에서 신들이 직접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대신 그것을 목격한 인간이 대신 이야기하도록 설정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시력을 포기했으니까 박쥐는 어둠을 헤쳐나갈 초음파를 얻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어둠 속을 같이 걷고 싶은 사람에겐 이렇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이 진화하자 겨우 날개가 달린다고 해서 천사가 되지는 못할 테지만 양팔과 날개를 교환할 기회가 생긴다면 두 팔을 남겨 사람을 안아보자 검은 날개를 달고도 악마가 될 수 없다면 사람과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하자 산에서는 한 사람이 곁으로 다가서면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다 포개지는 그림자의 윤곽 무언가가 강림하는 저녁이다 ― 「윙스팬(Wingspan)」 중에서 인용한 시에서 보편적 의미를 지닌 신성은 두 차례 부정된다. 시인이 창조가 아닌 진화를 꿈꿀 때, 천사와 악마라는 선악의 대립 구도를 가뿐히 벗어날 때가 그에 상응한다. “사랑의 전문가가 아니면서/ 한 사람의 손을 잡기도 했”던 시인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위의 두 가지 방향을 선택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 한 사람이 타자와 함께 포개지는 순간 “무언가가 강림”한다. 다른 이와 더불어 계속해서 삶을 이어 나가는 생동하는 인간만이 세계의 진정한 근원이 될 수 있기에, 인간이 행하는 사랑이 신성의 진정한 배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집을 자세히 살펴본 이라면 시인에게 신과 인간은 대립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신과 인간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틈, 사이에 머무른다는 공통점으로 한데 묶인다. 시인은 이 확정 불가능한 미결정의 상태야말로 곧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을 단연한 태도로 전달한다. 이러한 전언은 「물에 빠지는 이 모든」에 잘 담겨 있다. 시의 서두에서 “신년”이 어디서 오는지를 묻던 화자는 미래를 알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기도할 것이 없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 뒤이어 기도실에 자리한 성상(聖像)의 사진을 찍던 화자가 새롭게 덧붙이는 신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신의 일은 고개 숙인 시선을 견디는 것. 나는 파인더에 신의 얼굴을 가두었다. 빛에 잠기면 훼손되는 신성의 표정.” 시인에게 신은 기도와 믿음을 들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욕망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버텨야 하고, 쉽게 손상되기도 한다. 고정되지 않은 채 유동하는 신이라는 별다른 존재 양태는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는 시인의 인간관과 연결된다. 화자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상에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담기고 어리는 모든 형상을 일그러트리고, 묵은때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행위가 바로 설거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진 유황은 나를 태울 만큼 충분할까” 자문하던 화자는, 물이 들어찬 설거지통의 표면에 비추어진 자신의 “물에 갇히는 얼굴”을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한다. 이 지점에서 파인더에 갇혔던 신의 얼굴과 화자의 얼굴이 겹친다. 온전히 재현하거나 반사될 수 없기에 불안정한 존재들로 밝혀진 인간과 신은, 그렇게 흐릿해진 만큼 존재론적 층위에서 같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는 오직 이 땅에 발 딛고 살아 숨 쉬는 육체를 지닌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과 함께 시집 곳곳에는 믿고 바라기보다 행하고 나아가는 이들의 행보가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티칸에서 온 사람」의 화자는 어디에 뿌려도 효험이 분명하다는 “바티칸에서 온 진짜배기” 성수보다는, 성수를 사려는 “아무 데나 축복이 필요한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다. 많은 면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비행운 인간”이지만 화자는 성수를 “마실 수도 피할 수도 있”는 힘을 지닌 인간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말한다. “나는 나아간다. 소음을 끌고 달리는 열차를 나서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다”고. 「슈베르트 방은 말한다」 역시 비슷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도 시인의 관심은 인간을 향해 있다. 조금 더 명료히 말하자면 시인은 행위하고 변화하는 인간을 눈여겨본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인간의 생이 몇 장짜리 악보이고/ 하나의 곡을 반복하는 것이 연습이라면/ 하나라는 고통을 되풀이하는 인간은 어떤 악기인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화자가 질문하는 이유는 “손 안에 흰 달걀을 쥐고” 살아가면서 같은 고통을 반복하는 인간 중에는 “그것을 지키려는 자도, 깨뜨릴 각오로 두드리는 자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두 종류의 인간상 중 “마지막까지 노른자로 손을 적시는” 이를 더욱 궁금해한다. “흰 달걀”처럼 주어진 것을 본래 모습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믿음은 살아가면서 마땅히 수호해야 할 순결하고 깨끗한 실체를 상정하고 있다. 신이 표상하는 법과 질서 역시 그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시인에게 불변하는 가치란 없다. 우리는 이미 여러 시편을 통해 신은 완전하지 않고, 신성은 변형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심지어 신의 권세는 인간에게 의지해야만 발휘된다. 그래서 인간은 “기도문을 발명”(「바티칸에서 온 사람」)하고, 첫 제의를 앞둔 “수습 사제는 기억에 의지하지 않을 때까지 연습한다”(「수련 일지」). 이처럼 “어떤 이의 목표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잊는” 데 있다. 인간은 주어진 섭리를 체득하고 체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같은 고통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삶의 양식을 수련한 뒤, 그것을 기꺼이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또 다른 삶을 불러들인다. 김보나의 시가 유독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집의 이곳저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시인은 죽은 이들을 다시 세계로 불러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과 인간의 사이처럼,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에 서 있다. 모두가 “한 번쯤 죽었다 돌아온 사람”(「장수민해독센터」)처럼 보인다. 기억해? 전학 간 너의 긴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나를 너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한 나를 명동성당 뒤편에 딸린 여고에서 너는 만화부였고 나는 클래식 기타부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좋아한단 거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 십자가 형태의 길에서 성호를 긋지 어른이 된 네가 여기 있다면 너를 납치해 걸어갈 텐데 기자들과 카메라가 화동처럼 뒤따르는 행진이야 스물셋에 처음 간 퀴어 퍼레이드에서처럼 일생에 단 한 번 잊을 수 없는 고백을 듣고 싶었지만 나는 늘 먼저 고백하는 사람으로 자랐어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을 병상에 모아놓고 안녕 나 암이래 말하고 싶었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어 성당에 못 들어간다면 사각사각 창밖에서라도 미사를 구경하고 싶네 고딕 첨탑에 기대 낮잠 자고 싶네 하다못해 절 마당을 비로 쓸면서 발등부터 목덜미까지 누군가 필사한 경전의 글자로 뒤덮이고 싶네 마취총을 맞고 수술대에 올라도 감당하기 힘든 마음처럼 몸이 불어나도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어 작년에 꽃구경을 한 벚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기다릴게 만날 수 없는 사람 ― 「「미친 봄날 생각」」 부분 그냥 인간이 아니라, 죽었다 다시 돌아온 인간이 더욱 각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이 기존의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다른 존재가 되길 욕망하는 건 결국 사랑하기 위해서다.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학창 시절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친구의 퀴어한 마음을 모르는 척해야만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뒤늦은 답장을 쓰고 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에 답할 수 없었던 건 “십자가 형태의 길” 위에서 살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고백”이 당도하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마땅하다고 선별한 것들만을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암을 겪은 뒤 방사선에 노출된 화자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괴수”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규정된 의미에서의 사람이 그동안의 마음을 가로막아왔다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시인의 꿈이 “괴수 김보나가 되는 것”이고, “힘이 센 짐승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손을 흔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과거의 자신에게/ 화약이 터지는 광경을/ 불꽃놀이라고 부르는 여름”(「춘일광상」)처럼 기존의 자신과는 다른 인간, 다른 존재가 되겠다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은 시인에게 “키 작은 주인공이/ 딱 한번 용기를” 내는 만화를 끊임없이 그리게 만든다. 시인의 “주인공은 그저/ 다들 지나치는 사육장의 토끼를/ 혼자 돌보는 사람”이다. 영웅의 “성장소설”은 괴물과 타자를 물리치고 독단적인 인간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모험의 끝은 친구를 만드는 일”로 그 의미를 바꾼다.(「나의 모험 만화」) 신과 인간, 인간과 괴수, 인간과 또 다른 의미의 인간 사이를 부유하는 김보나의 시는 시인이 지금 여기의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해 나갈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모험 만화」의 마지막 연은 “(계속)”으로 닫히지 않은 끝을 맺는다. 인간만의 현실, 다가서는 힘 김동식·서수진·예소연·윤치규·이은규,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문학동네, 2025.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2025년 단편소설 앤솔러지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는 올해도 역시 현실 속 노동하고 분투하는 인간 군상을 적실히 보여준다. 여덟 명의 작가들은 뛰어난 소설가적 기량과 더불어 회사원, 다큐멘터리 PD,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전직 주물공장 근로자라는 다양한 노동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 변화를 거듭하며 새로운 신성을 일구는 주체로서 인간을 다시 보려는 이 글의 마지막을 노동하는 인간의 현실을 묘파하는 소설집을 추천하며 닫는 이유는,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소설 쓰기를 통해 무엇보다도 인간의 힘을 헤아리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나 투기자본주의와 같은 용어의 설정만으로는 현재의 삶에서 감지되는 위태로움과 불안을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정제된 개념과 달리, 일상에서 곤궁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경험은 다만 세찬 감각만이 쏟아지듯 엉겨 붙는 혼란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원인과 대책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뚫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문학에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힘 있는 문학이 줄어든 것 아닌가 의심”3)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현실에 눈 돌리지 않겠다는 굳세고 치열한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권하겠다는 소설들에 우리가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획에 걸맞게 소설집에는 현재 노동시장의 상황의 실정을 반영한 다양한 직업들이 등장한다. “게임 머니 팔아서 쌀 사 먹는다”는 밈으로부터 생겨나 “게임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 된 “쌀먹” 혹은 “쌀먹충”(김동식, 「쌀먹: 키보드 농사꾼」, 13쪽)인 ‘김남우’, 호주의 대기업 슈퍼마켓에서 한국인이라는 아시아인의 정체성으로도 균등한 승진의 기회를 받을 수 있으리라 꿈꿨으나 그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얼굴”(서수진, 「올바른 크리스마스」, 72쪽)로만 남은 ‘주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가름이 친구 관계라는 사적영역까지 침투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선미’와 ‘지선’(윤치규, 「일괄 비일괄」), 방송을 위해 타인의 내밀한 면에까지 무감하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는 현실이 “진정성”으로 포장되는 것을 목격하는 시사교양 PD(이은규, 「기획은 좋으나」, 136쪽),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백화점 지하 삼층에서 직원들을 위해 마사지를 제공해야 하는 시각장애인 헬스 키퍼(조승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작가의 꿈을 접고 일본 기업에서 데이터를 관리하고 적용하여 AI의 정보력을 체계화하는 일을 했을 뿐이지만 기술력을 이용하여 저지르는 폭력과 부조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부진’(황모과, 「둘이라면 유니온」)등. 이들은 주로 플랫폼 자본주의 내에서 일관적인 노동 기회를 보장받을 수 없고, 경쟁력이 증가한 탓에 합당한 보수나 대우를 당연하게 감내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가들은 이들의 힘겨운 처지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위태로운 세계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운이나 질서가 아니라 재난의 시대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생활력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사이트를 경유하여 할머니들의 돌봄 노동자라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젊은 여성 청년 ‘희지’를 그린 예소연의 「아무 사이」는 상시화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일상을 다르게 반복할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 작가는 노동의 지속 가능 여부에만 매달리게 된 나머지 인간적인 삶이 억눌리게 된 실상에서도 나지막한 희망을 본다. 혼자 지내는 할머니들의 집으로 찾아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희지’는 삼 년 만에 ‘시터닷컴’에서 일산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시급을 받는 ‘베스트 시터’가 된 플랫폼 노동자다. 할머니를 돌보는 시니어 시터 일은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게 항상 무서웠”(88쪽)기에 퇴사를 결정했던 ‘희지’가 버티는 삶이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고 계획하고 운용하는 식”의 삶을 살기 위해 찾은 “그나마 정을 붙이고 해나갈 수 있는 일”(89쪽)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꽤 많은 할머니가 있고 나는 그 모든 할머니를 빠짐없이 사랑한다”(79쪽)는 자부와는 별개로 ‘희지’는 자신이 맡은 노동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지에 대해 자신하지 못한다. 플랫폼 회사의 교육장에서 ‘베스트 시터’로서 “돌봄 노동이 필요한 시대에 누구보다도 시터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업무적 책임을 인지해야” 하며 “책임의 범위는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거라고”(89쪽) 연설하면서도 자기의 말을 거짓말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희지’에게 이 일은 임금 노동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직장에서 모멸감을 반복적으로 느끼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겨 사직서를 냈음에도 남들처럼 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아주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한 걸까?”(88-89쪽)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기를 거쳐 안착하게 된 소중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희지’에게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사회에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95쪽)에서 존재 의미를 느끼는 일이다. 그러나 회사 차원에서 플랫폼 노동자를 보호하고 지원하기보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도록 종용하는 사회에서 ‘희지’가 선 자리는 더없이 위태롭다. 수많은 경쟁자와 언제 끊길지 모르는 고용인의 유연하고도 아슬한 연계는 여타의 노동보다 더욱 관계적인 속성을 지닌 돌봄 노동을 수행하면서도 부당한 처지를 감내하도록 만든다. 아무리 “돈을 주고받는 관계”(94쪽)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계’가 아닌가. 한겨울에도 찬물만 쓰게 하고, 매일 얼굴을 보고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지만 휴대폰에는 ‘아줌마’라고 저장해도 되는 사람. “그저 고용된 사람일 뿐”(97쪽)인 위치. ‘희지’의 자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돌보는 할머니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참고 견뎌온 감정은 매일 두부를 사는 ‘두부 할머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느 날 터져버린다. 할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질 수도 있다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희지’는 보호자인 며느리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할머니가 갔을 법한 모든 곳을 찾아다닌다. 온 동네를 헤맨 뒤에도 홀로 돌아온 할머니의 집에서 두부를 먹던 중 며느리의 전화를 받자 ‘희지’는 그만 할머니가 집에 있다고 유려하게 거짓말을 하고 만다. 그러나 사실 할머니는 그날 며느리와 함께 있었고, 침묵하는 ‘희지’에게 그녀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101쪽)기에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할머니, 전화번호 아직 못 외웠죠?” “그렇지.” “내일 또 외우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가 별다른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나름대로 할머니와 나 사이에 어떤 의의를 두고 싶었다. 함께 한 일을 만들면 결국은 같이 뭔가를 하게 된다는 그 단순한 흐름이 우리 사이에 지속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문득 할머니의 휴대폰에 내 이름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전화번호부 앱에 들어가보니 ‘희지’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마치 백지처럼.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담백한 나의 이름, 희지. 나는 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이 아주 많이 떠올랐다. (103쪽) 이때 ‘희지’가 내리는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렇지 않게 다음날 두부 할머니를 만나고, 교육장에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미래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전부”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102쪽)을 깨달은 ‘희지’는 할머니의 휴대폰으로 며느리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전화번호를 외우기로 했던 이전의 약속을 재차 확인한다. 할머니의 휴대폰에 저장된 자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을 떠올리는 ‘희지’의 모습을 통해 견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할머니들을 향한 애정을 고백할 미래의 어떤 날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자본이 관계를 압도하는 공식에 굴복하라고 사회가 강요할 때 인간은 기꺼이, 대체로, 자주 굴복하는 존재지만 힘겹더라도 새로운 의의를 만들어 나갈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힘을 믿고 상상하며 쓰는 작품들이 있는 한 인간은 유구히 변화해나갈 것이다. 1)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7, 214-219쪽 참조. 2) 원문에 따른 강조. 3) 장강명,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252쪽.
1. 상처받을 가능성 있음 Vulnerability 한 자리에 묶인 채로 일생을 살아가는 개는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걸까,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갈지 않은 전구의 필라멘트는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냉해를 입은 고목 나무는 좀 더 견뎌줄까, 추운 날의 전동휠체어 배터리는 그가 집에 다다를 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길고양이는 어디서 이 겨울을 견디는 중일까. 그리고 사람은 불행을 얼마나 견딜 수 있나. 겨울을 통과하며 우리는 모두 상처 입었다. 일상이 이토록 간단히 바스라질 수 있다는 사실, 그 취약성을 확인하며 새삼 ‘우리’라는 동그마한 단어를 떠올린 것은 한밤의 포고령과 아침의 참사 사이로 불쑥 머리를 내민 것이 이상스럽게도 타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좀 더 쪼그라들고 부서진 세계의 항변인 듯 ‘나’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다시금 불거지는 타인의 얼굴이 어째서 또 이렇게 불의로 와야만 했을까. 애도란 지속된다는 면에서 성공적인 애도나 애도의 완성 같은 것은 없고 그래서 애도는 이루어지는 것, 그러는 중인 것, 그러기 위해 진입하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종결의 어감을 조금이라도 지우는 편이 애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조심성이라 여겨지지만, 그런 것을 논하기도 이전에 애도를 방해하는 께름칙한 인재들이 누적되는 가운데 밭게 맞닥뜨린 또 한 번의 사태와 사고는 생명과 존엄이라는 실존의 요구에 대해 얼마든지 상처받을(vulner=wound) 수 있음(ability)이라는 상처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건 곧 취약성이라 번역된다. 취약한 존재의 불안은 보편적 감각이지만 지나치면 우울이나 강박 같은 증상으로 확장된다. 불안이나 공포는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본능 발현의 기제이기도 하지만 초과한 불안감은 그 해소를 위해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안정을 되찾으려는 확인 이른바 강박행동에 몰두하도록 생명체를 몰아세운다. 강박행동이 강화되면 그 루틴을 지키느라 일상은 부서진다. 강박행동이라는 증상은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희석하고자 하는 나름의 호르몬과 심리의 싸움이지만 그 행위를 들여다보면 ‘복기’라는 내용적 측면이 있다. 불과 찰나 전에 했던 행동에 대한 불신, 그 미덥지 못함은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 불확신을 믿음 쪽으로 인지시키고 불안을 소거하려는 내용인 것이다. 불안의 강도를 조절하는 일은 꽤 중요하다. 그럼 뭘 해, 아무리 스스로 주의를 기울인다 한들 막을 수 없는 참혹함 앞에서 불안은 불길처럼 일어난다. 거기에 타인에 대한 죄책감과 사태에 대한 무력감은 불안을 한몫 더 부추긴다. 어떤 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돌아간다더라도 전과는 다르다. 그런 면에서 돌아갈 곳이 없다. 우리에게 믿을만한 것은 무엇인가? 느닷없이 중단되어 버린 삶들에 대한 애도가 나의 삶을 전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희열을 뜻하는 Ectasy는 ec-static, 즉 바깥에 놓인 상태로 어떤 정념으로 인해 자아가 제 바깥으로 이동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추동하는 정념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성적인 정열의 순간 외에도 슬픔이나 분노 또한 자아를 벗어나 ‘자신의 옆에’ 있게 하는 beside oneself의 기제가 된다. 자아가 자아를 벗어나 곁에 놓인다는 말은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풀이되지만 더불어 이탈한 자아가 놓이는 곳이 혹시 상실한 타인 혹은 상실을 겪은 타인의 곁은 아닐까 싶어 손바닥으로 더듬거려보게 된다. 그가 없고 나는 남아 보내지 못할 때 자아는 나를 벗어나 그의 곁으로나마 가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 이후, 상실 이후는 내가 그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침통한 방식으로 부조한다. 그의 이름이야말로 나의 타자, 타인이다.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아닐 때 타인은 더욱 요구된다. 내가 내 안에 있을 수 없을 때 타인은 부쩍 확인된다. 내가 거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타자 앞에서, 타자로 인해서 허물어진다. 2. 어차피 망했어, 그렇지만 (민병훈, 『금속성』, 문학실험실, 2024, 12) 생의 기반이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불확실성의 조우 와중에 『금속성』은 그나마 쥐고 있는 것들을 좀 더 무너진 쪽으로 밀어붙인다. 이 소설은 어쩌면 ‘후(後)’에 시작되는 듯하다. 폐품을 해체, 조립, 교환한다는 작업장과 폐선을 개조한 집은 철조망을 배경으로 놓여있다. ‘조수야’하고 불리는 조수, 그가 데려온 개 팔콘과 함께 생활하는 ‘나’는 한때 박물관에서 일했다. 박물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옛날 컴퓨터나 기상시스템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고물상을 연상케 하는 작업장에서는 녹슨 쇠냄새가 진동하고 바퀴마저 탈락한 의족을 달고 두 발로만 기는 개에게서는 학대와 유기의 흔적이 짙다. ‘조수야’로만 부를 따름이니 ‘너’는 성립하지 않을 거고, 20세기의 핵심 부품들이 전시된 박물관이란 무언가 한바탕 휩쓸고 간 뒤의 풍경, 그러니까 때는 이미 망한 뒤이지 싶다. 이 살풍경은 작위감은커녕 온통 기시감으로 넘실댄다. ‘나’는 어쩐지 자꾸 어딘가 아픈데, 곁에는 죽음이 허다하다. 어린 시절 기르던 개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친구들도, 기차광 마르코도 죽었다. 닭이나 개는 더 쉽게 더 많이 죽는다. 마을의 축사는 텅 비기 일쑤고,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무리는 피, 기름, 뼈의 이미지로 정체 모를 무언가의 흔적을 쫓는다. 개를 귀엽게 만들기 위해, 크고 맛 좋은 돼지나 닭의 고기를 얻기 위해 혹은 더 큰 수익을 위해 적당히 병들게 동물을 개량하는 일1), 그 후로 어떤 품종의 개들은 선천적 질병을 안고 태어나고 닭과 돼지는 바이러스에 취약한 채로 살다 먹히거나 생매장 되는 게 현실이다. 점프슈트를 입은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어 왔다.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마을의 허름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을 번들번들 묻혀가며 뜯고 있던 뼈에 붙은 고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고기는 어떻게 죽은 동물의 살이었을까? ‘나’는 그마저도 동이 나 먹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 고기가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의뢰인들이 뭔가를 의뢰하면 출장을 가 처리하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독자는 알 수 없다. 모르기는 의뢰인도, 의뢰받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짐작할 뿐. 모호함은 이 소설의 주요 상태이면서 ‘나’라는 존재의 불확실성을 부추기는 정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잇몸 동상이라는 진단은 그런 ‘나’의 모호성과 포개져 전날 방문했던 치과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하고, 곤란한 상황은 의사가 ‘나’를 기억해내면서 근근이 모면 되는 식이다. 병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의사, 누런 가래를 소맷부리며 손님용 의자에 묻히고 약을 조제하는 약사를 비롯해 이 소설은 미심쩍은 낌새들로 가득 차 있다. 의뢰인은 ‘나’와 번번이 엇갈리고, 팔콘의 의족을 만들어준 기술자는 자신이 의뢰인이라고 하며, 꿈은 자주 꿈의 바깥으로 나와 텍스트를 흩트려 놓는다. 수치(數値)를 기록하는 조수가 읽어내는 게 왠지 수치(羞恥)로 읽히는 것이 그런 모호함의 체화가 수치(數値)로만 표면화되는 공무 앞에 존재를 옹색하게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반복, 맹목적으로 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일 터이나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가 주는어쩔 수 없음이라는 수치심 말이다. 이 불투명한 서사에 제법 선명한 실체 하나는 송전탑이다. 송전탑의 위용은 마치 소설의 중앙부에 높다랗게 드리워진 거대한 금속성의 신처럼 읽힌다. 그 저류의 공통 기억 때문일성싶은데, 어떤 의뢰는 분명 송전탑 꼭대기에 아직 사람이 올라서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번개가 스친 뒤 “물에 잠긴 채로, 영원히 녹슬지 않는 송전탑”(24쪽) 아래 뒤집힌 채 허연 배를 내밀고 둥둥 떠 오르는 개구리의 사체만이 의뢰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길은 자주 텅 비어 있지만 병원과 약국은 붐비는 곳,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쳐 가고 난 뒤에는 피와 약품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 그런 즈음 사람들은 기름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는 곳, 그곳은 우리의 삶과 얼마나 먼가? 어떤 의미에서는 망한 게 틀림없는, 이미 멀리 와버린 인류세가 제 흔적으로 닭뼈와 플라스틱 말고도 남길 것이 있다면 금속성일 수도 있겠다. 화석연료가 일종의 희생 구역을 필연적으로 요한다는 것을 대척점에 놓을 때 금속성은 조금 달리 이야기될 수 있으려나? ‘어떻게’의 문제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렸음을 박물관의 의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 신통치 않은 안마의자라고 생각하지만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그 의자가 내게는 왠지 고문용 전기의자로 읽힌다. ‘금속성’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이 남은 시간에 대하여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면 그것은 의사도 목수도 아닌 ‘기술자’가 팔콘에게 연결하는 의족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송전탑과 함께 명징한 또 하나의 피사체가 바로 팔콘인데, 모든 이가 이름도 없이 그 고유성을 탈각한 채 살아가지만 팔콘에게는 이름이 있다(마르코는 이방인의 대명사쯤일 따름이고). 종국에 팔콘은 주기적으로 윤활유만 칠해주면 너끈한 새로운 의족과 금빛의 꼬리를 달게 된다. 팔콘은 매처럼 날 수 없지만 그는 애초 매가 아니었으니 척추의 연장일 유연하고 기다란 금빛 꼬리는 그에게 새로운 코어를 갖게 할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 상실된 팔콘의 육제성 앞에서 조수와 ‘나’에게 돌올하게 떠오르던 그에 대한 사랑과 책임 그리고 금속성-팔콘 사이의 ‘횡단’이었다. ‘나’도 이전에 감전 사고로 잠시 몸을 잃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몸에 대해 고심했던 적은 그때가 유일하다”(97쪽)는 고백처럼 우리가 몸을 의식하는 순간은 몸이 손상되어 제 모습이나 기능을 상실한 때 아니면 타인을 마주할 때이다. 몸을 단장하는 것은 몸이 타인에게 노출됨을 전제하는 익숙한 매만짐이다. 그러니까 몸은 실추됨으로써 타자성을 일깨우는 자리이면서 타인과 연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공적 차원에서의 몸은 우리의 취약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면서 연결의 감각을 일깨우는 셈이다. 더이상의 증식과 확장을 멈춘 도시, 병든 사람과 동물 들, 목적이 불분명한 검문과 감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잃어가는 것, 잃을 것이 분명한 것의 후경이다. 어떤 면에서는 어차피 망한 게 분명한 이 마당에, 그럼에도 우리의 취약성은 ‘연결’에 대한 명분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팔콘과 같은 존재가 오래 감수했던 타자성은 공생이라는 그런 가로지름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다정한 타인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3. 불행을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서 (김채원,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1)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에 대해, 특히 ‘너’에 대한 애착이 ‘나’의 일부를 구성하는 관계에서라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너 없이 나는 누구로 존재하는가?” 상실 이후 비로소 융기하는 그 대상과의 연결성을 통해 애도에 더해 나는 자신에 대해서마저 이해 불능의 존재가 됨을 말하는 이 질문에 김채원의 『서울 오아시스』를 놓아본다.2) 그건 질문의 답으로 이 소설집이 놓인다기보다 차라리 소설에 대한 답이 저 질문인 듯 보인다는 뜻이다. 이 소설집은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 어머니, 친구, 딸이 죽거나 자신의 (실패한) 죽음 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소묘한다. 등단작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는 그 자체 애도와 애도 불가능 사이를 맴맴 도는 서사이지만 작품들은 대체로 그 불가능성 쪽에 무게중심을 놓는다. 이들의 애도는 어째서 불가능한가? 애도가 일정부분 공적 차원의 형식을 전제한다고 할 때, 가능한 애도는 공적 삶의 내부에 ‘존재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무연고자의 애도는 절차에서부터 가로막힌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꾸어 물을 수 있다. 애도가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끌고 갈 것은 그러한 삶의 경계와 그 경계의 밖에 놓이는 결락의 삶들이다. 이 소설집에 그 결락들이 있다. 자살하려 한 적도 있지만 학점을 따고 졸업도 하려고 마음먹던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공원의 햇살 속을 걸어가던 「쓸 수 있는 대답」의 인물 유림의 부고에 교정시설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의 짐을 정리하러 가는 여정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에는 이 소설집이 ‘김채원스러운’ 것이게끔 하는 요소들이 촘촘히 엎드려 있다. 소설은 내내 길 위에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 예약해 놓은 우버 택시를 가로채 타고 길에 놓인 공유 자전거도 타고 땀을 흘리며 걷기도 하면서 그렇게 빙빙 돈다. 한편 저 현관 앞의 수국은 현관을 막아서고 있는데, 현관으로의 진입은 이들에게 요원하기만 해 보인다. 흰국화가 아닌 수국은 약속된 제의와는 조금은 동떨어져 놓여있는 듯하다. 수국이 불두화를 닮았음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돎’이 어떤 생으로 거듭날 것인가 기대해봄직도 하지만 언제까지고 바깥에 놓인 이들의 궤도 진입은 가능한 걸까? 소설의 결말부에 다다라 피 터지게 맞는 사람의 모습을 멀거니 구경하는 것이나 시의 다음 구절을 태워버리는 아이의 모습은 각각 약화된 형태의 죽음과 제의라는 표상처럼 보인다. 유림의 동생에게서 걸려 온 언제 올 거냐는 전화는 애도의 시간마저도 지극히 빠듯하기만 하다는 듯한 재촉이니, 채 받아들이지도 못한 죽음이란 실재 앞에서 이들의 애도는 가능하기나 한 걸까? 김채원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유기의 감각이다. 이들은 모두 ‘남겨진’ 존재로, 어쩐지 죔쇠가 필요해 보인다. 세계로부터 영 헐거워진 듯 상실 뒤에 남은 이들은, 퇴행하거나(「영원 없이」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갑자기 늙어버리고(「외출」), 소멸해 버림으로써(「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되레 유기감을 강화한다. 그런 면에서 이걸 ‘적극적인 유기’라고 말해도 된다면, 이들은 유기되기를 원치는 않았으나 이른바 ‘정상적’ 애도에 애초 실패함으로써 자신을 적극적으로 유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인물들의 이런 유기감은 작가의 서술 기법에 의해 더욱 핍진해진다. 약속된 문법의 파기라기보다는 마땅히 예견된 인식의 수순을 폐기하는 것에 가까운 서술은 울퉁불퉁한 의식과 순서를 뭉개고 빗겨나가는 대화(의 단절)를 수고스러우리만치 옮겨적는다. 그것은 의식의 내부와 외부 사이를 무람없이 넘나들고 때로는 의지적으로 중단하는 식인데, 상징계의 약속과 예단을 스스로 비켜가는 이런 방식은 모성의 부재, 혈육의 상실 즉 타인의 소멸이 자신의 육체 어디쯤을 소실한 것과 동일한 효과로써 증명되는 유기의 증상이랄 수 있겠다. 해서 대체로 말은 늦되고 정신은 종종 엉킨다. 번번이 코드화되지 않는 이들의 말, 얼키설키한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최소한의 일상조차 움켜쥐지 못하고 멀겋게 앓는 심로를 짐작게 된다.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도덕적 구속력으로 연결된다고 할 때 이러한 정상적 언어(이자 인식)의 순서 폐기란 어쩌면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가장 근본적인 ‘나’, 지금은 상실한 타인이 알던 그때의 ‘나’로 남겠다는 올올한 선택은 아닐는지. 언어가 욕망의 잔여물이라면 이들은 스스로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욕망조차 방기해 버린 것은 아닐는지. 해야 할 말조차 묵음 처리함으로써 통상의 질서가 포섭할 수 없는 쪽에서 애도의 다른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건, 인물들이 애초에 ‘바깥’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함께 어떤 ‘정상성’으로는 이 인물들의 곁에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울 오아시스」의 가족들, 그러니까 정신병을 오래 앓은 엄마와 내게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않고도 오래 살 수 있다”(71쪽)고 알려준 실종된 외삼촌, 그런 가계의 불행을 견뎌내며 나쁜 일이 생기면 이사를 가버리는 이웃들과 달리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 일도 안 생겼으니까”(78쪽) 이사를 갈 필요는 없다며 독주를 들이켜는 할아버지의 사정 같은 것은 소위 정상성의 문법으로는 읽어내기 요원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물들에게 그렇게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어도 된다고, 정해진 애도의 기간이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그렇게 생각을 흘려보내고 여기서 저기로 건너뛰고 괄호치고 흩어놓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적인 삶에 대한 요구도(한 번도 그래본 적 없으므로), 애도의 기간을 설정해두는 것도(애도를 끝내고 정상적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므로)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로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감히 예단하거나 넘겨짚기 불가한 그 ‘흐름’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어쩌면 불행을 견디는 것이 삶의 전부인 이들을 그대로 놓아두기, 이들의 곁에 있어주기를 택한 것은 아닐지, 그들의 (기한을 가늠할 수 없는) 복기를 함께 반복하는 것, 그것이 김채원이 타인에게 말을 거는 법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4. 최악과 차악 (안보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2024, 10) 정상성이 통치의 수단이고 규범의 준거라고 할 때 삶의 많은 부분들이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적 차원에 회부된다는 사실은 문득 새삼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모종의 감각으로 자신을 통제한다. 불안에 대한 서두의 언급도 그런 차원이지만 감각은 생의 균형을 위해 끊임없이 작동한다. 그런데 이 감각의 균형이란 애초에 어떤 조건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건 반드시 선한 쪽으로 움직이는가? 수미는 수영과 한 살 터울의 자매다. 언니라는 말 대신 ‘수미년’이 입에 붙을 만큼 수영에게 수미란 존재는 절대 악이다. 말간 얼굴로 어른을 제 손바닥 위에 놓고 조물락댈 수 있는 맹랑한 아이였던 수미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여느 아이들처럼 떼를 쓰는 대신 폭력으로 표한다. 물건을 부수고 극단적으로 험한 말을 하는 어린 수미의 문제 행동 앞에 부모는 절절매며 더욱 그를 사랑으로만 품으려 한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수영의 자리는 물려 진다. 순한 양처럼 굴지 않으면 안 된다. 집에 아픈 아이가 있거나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미연에 그런 말을 듣는다. 너까지 이러면 엄마 못산다고. 수영의 삶은 늘 견디는 것이었다. 수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터에서도 그랬다. “존중받고 싶어 하는 나를,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나를 기를 쓰고 찍어 눌러야 했”(115쪽)던 것이다. 수미에게 제 삶을 도난당했다고 여기기에 죽음은 선수 치리라, 죽는 일만큼은 수미년을 앞지르리라는 수영의 결심으로 소설은 열리지만, 이번에도 수미가 한 발 날래다. 그 시각 전화 통화를 했고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는 알리바이를 위해 수영을 호출한 수미는 요양병원에 일하면서 노인들의 죽음에 협조하거나 죽음을 방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수영이 일하게 된 노견 돌봄센터는 동물병원과 더불어 운영되며 24시간 의사가 상주하는 고급 호스피스 시설이다. ‘절박한 사람’만 고용하는 우 원장은 인간 기저의 이중적인 심리를 기민하게 자본화하여 자신의 부로 환원할 줄 아는 인물이다. 병든 동물을 끝까지 돌보고 싶지만 사정이 부치면 빠른 이별을 바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심리 같은 것 말이다. 우 원장의 병원에서는 보호자의 발길이 뜸해지거나 보호자가 비용을 염려하는 때에 딱딱 맞춰 개들이 죽는다. 개의 가족, 보호자들은 내 품에서 아이를 보냈다는 사실에 위로 내지는 감동을 받지만 실은 적당한 때에 안락사를 감행함으로써 보호자의 부담을 덜고 자신의 수익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지는 우 원장의 치밀한 계산이 만들어내는 마법의 순간이다. 빠른 유속의 이 소설은 그러나 곳곳에 감속 구간을 배치한다. 수미의 숱한 악행 가운데는 수영을 구제한 일도 있는데, 캠핑장 숲길에서 낯선 남자에게 니쁜 일을 당할 뻔한 수영을 구하고 수영이 남자에게 위해를 가한 것을 비밀에 부치고 덮어준 일, 수영이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영의 뺨을 연달아 갈겨서 어쭙잖게 수영을 해코지하던 아이들을 질려버리게 만들어버린 일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악’으로 보이는 수미의 기행들은 모두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소통이자 장치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는 셈이고, 그 정당성은 전능감을 내면화한다. 그런 수미가 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의 죽음에 동조한 것이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답을 내릴 때쯤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만 위치시켰던 수영에게 질문은 날아든다. 종양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곧 태풍의 죽음을 당기는 일임을 모르지 않기에 손끝에 느껴지는 악성 종양을 외면한 수영의 마음은 피를 쏟으며 죽은 태풍의 병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업무상 과실 혐의에 대치된다. 살 권리와 죽을 권리는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오로지 자신만이 제 삶과 죽음의 주체라면 비루하고 고통받는 삶에 대한 결정이나 행위가 불가한 이에게 삶은, 죽음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이럴 때 어느 어떤 것이 더 폭력에 가까이 있는가? 수영은 끝내 제 삶을 구제하는 쪽으로 선회하지만 갇히고 묶여 연명하는 노인, 병들고 지친 채 온몸에 분변을 바르고 피를 쏟으며 간신히 생을 유지하는 동물에게 ‘보호자’는 생명의 결정권자와 동의어인가? 그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조력해야 옳은가. 이를테면 이런 경우. 수영의 할머니에게 비녀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자 사회적 자아의 표상이기도 했고 정정한 날의 추억이 깃든 정서적이고 감각적 차원의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의 쪽머리는 본인의 의사와 아무 관계도 없이 요양원 입소와 함께 싹둑 잘려 나간다. 관리의 편리와 비녀의 위험성 때문인데, 이럴 때 할머니의 권리가 공공의 안전 앞에 삭제되는 것이 마냥 옳기만 한 것이라면 인간은 병든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세상 모든 곳에는 전수미가 있다. 전수미는 전수미로만 있는 게 아니라 전수영의 일부, 전수영과의 모의, 전수영이 품고는 있던 것들의 투사이기도 하다. 사람은 어떤 악의를 없애거나 다스리며 산다. 악은 특별하지도 않고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다가 때로 불툭거리며 크기를 키워나가거나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일기장에 쓰기도 하는 것이다, 수영이 그런 것처럼. 악은 선이 아니므로 악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게 정리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뒤집어 물을 때 선에 대해서라면 그 답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선인가? 어떤 돌봄과 보호는 악의 얼굴 쪽으로 좀 더 기운 것도 같다. 어떤 선은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5. 들킬지도 몰라 불온함 (전지영, 『타운하우스』, 창비, 2024, 12) 안보윤의 폭력에 대한 감각이 물리적인 폭력에 겹쳐 배제와 그 권리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전지영의 소설은 관계와 구조 속에서 은폐되는 폭력 위에 설립한 삶 혹은 폭력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공간을 중요시 여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들은 독자가 위계의 구조라는 밑그림을 먼저 그려두도록 공간을 직조한다. 구조에 대한 이런 감각은 타자성을 더욱 벼리게 제시할만한 장소로 제공된다. 은폐한 진실이 언제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잇자국으로 드러나는 쥐(「쥐」), 태풍을 몰고 오는 섬의 돌풍과 낙뢰(「말의 눈」), 저수지의 음험함과 사격장의 총소리(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어시장의 비린내와 척척한 물기(「맹점」), 물질적 풍요 뒤에 숨겨진 히스테리(「소리 소문 없이」)와 같은 오감을 건드리는 장치와 함께 안온한 생활이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 긴박감을 몰아온다. 작가가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공간에 더해 불안을 부추기는 효과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은 불온한 진실의 맨얼굴이다. 자녀가 학교폭력의 피해자일 때 학교 측의 미온적 태도와 가해 학생들의 뻔뻔함에 상처 입고 딸과 함께 제주의 타운하우스로 이사한 수연 앞에 학교폭력은 또 한 번 전혀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구도로 삽시간에 전환되며 수연은 자신의 딸을 위해 증언을 요청하는 지희를 외면한다. 섬의 생리와 무관하게 지은 타운하우스의 지붕으로는 빗물이 흘러들어 집안에 차오르고 돌풍과 낙뢰에 전문기사도 손을 쓸 수가 없는 마당에 지희는 치마를 동여매고 지붕을 오르고, 이내 추락하고 만다. 지붕에서 내려오면 지희는 수연에게 증언을 강요할 거였다. 순간 수연이 바란 것은 이대로 지희가 깨어나지 않는 것. 전지영은 바로 이 순간을 잡아챈다. 인간이라는 수면 아래 잔잔하게 깔린 숱한 얼굴들 중 우리가 차마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표정과 감정, 그 부박함을 작가는 낚아올린다. 그런가 하면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는 사격장과 저수지라는 공간이 세워진다. 혜경과 윤석 부부는 데면데면하게 지낸 지 오랜데, 서로를 눈치껏 빗겨가려 애쓰는 중이다. 혜경은 남편의 무심함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해왔던 것이다. 사격장은 윤석이 공무원 재직 당시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치한 것이었는데 실종된 아들이 저수지가 범람하고 주검으로 발견될 때도 그는 사격장 건립 문제로 회의 중이었다. 윤석은 그 나름대로 사격장 건립을 추진한 시장을 원망해 그의 불행을 기도해가며 간신히 견뎌내는 중이다. 사격장의 총소리와 탄약 냄새는 집의 안팎을 둘러싸며 여전히 거기 있는 컴컴한 정주못과 함께 이 부부의 잠잠한 일상을 언제든 깨트릴 수 있을 것처럼 에워싼다. 그러다 시장이 실종되고 그가 저수지에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수사의 가닥이 잡히자 윤석은 갑작스레 무엇이 툭 끊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용서할 수 없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일 테니까. 대타자의 소멸로 부부는 비로소 졸은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고 커피를 채워주고 마시는 일상으로 조금씩 되돌아올 기미를 보인다. 사람은 때로 불행을 그런 식으로 견디기도 하는 모양이다. 부자 동네 청한동을 배경으로 높은 성벽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청한동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는 「언캐니 밸리」에서 왜소증을 가진 크로키작가이자 택시 기사는 ‘당신’이 염산 테러를 당하자 의심을 사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그녀는 왜소증의 사내가 ‘기괴하다’고 표현했지만, 사내가 생각할 적에 여자를 의자에 앉혀놓고 몇 시간 동안 관찰한다는 노부부가 더 수상쩍고 기괴하다. 넘치도록 가진 노인들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끝내 어떤 얼굴로 드러났을까? 140cm의 키로 높은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왜소증 사내를 줌아웃하는 결말은 그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와 대비되는 담벼락만큼 쌓였을 집 내부에 들어찬 비밀의 크기 때문에 잔뜩 기괴해진다. 누가 누구에게 ‘언캐니’한가? 전지영의 소설들은 인간의 치졸을, 비열을, 낯 뜨거운 찌질함을 솥에서 푹 삶은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부려놓듯 불쑥 꺼내놓는다. 썰어주면 잘만 먹을 거면서 징그럽다며 찌푸리지 말란 듯이 태연하게. 예술을 한다면서 돈과 재능 그 둘을 다 가지고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가진 이는 어떻게든 성공한다. 그런데 어느 쪽도 가지지 않았다면? 음해라도 해서 누군가를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은 「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에서 한 존재를 삭제해버리거나 없는 ‘진실’을 만들어내 ‘사실’로 만들고 만다 기어이. 그런 날조의 ‘사실’들은 인간의 작은 열등감에서 기인하고, 그건 자기 보호라는 엉성하고 얄팍한 난막에 감싸여 있다. 전지영은 그 막을 대차게 찢어서 눈앞에 들이대며 마주 보게 한다. 말의 검은 눈에 비친 것이 누구의 얼굴인지,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 진실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불을 활활 질러서라도 거기에 쥐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쥐의 잇자국과 소리와 낌새는 우리를 쫓아올 테니까. 6. 바늘은 구멍을 가로지른다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11) 관계나 사랑이 ‘나’를 읽는 터이듯, 타자의 감정 역시 나 없이는 성립 불가하다는 점에서 타인은 나의 필요충분이다. 안윤의 소설집은 나란히 양립하는 관계,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느리고 꼼꼼한 이야기들로 바느질되어 있다. 표제작 「모린」은 영은과 미란의 사랑을 그려낸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미란은 감정적으로 늘 부대끼면서 낭독 봉사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 영은과 찬찬한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 낭독용 텍스트인 요제프 코발스키의 산문 『보이지 않는 것들』가 나란히 놓인다.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고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피아노 줄과 밧줄을 엮은 끈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모린은 요제프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활은 하숙집 아들 조지가 도왔는데 산문집을 출간한 것도 조지였다. 이 텍스트는 세상 어딘가에 있는 실화를 초과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더욱 귀한 텍스트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린」과 조밀히 넘나든다. 돌봄을 사랑으로 여겼다는 선주의 고백은 장애에 대한 배려가 어쩌면 영은의 정체성을 장애에 두는 선민이었음에 대한 후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랑이 꼭 옳지 않기만 할까? 요제프와 조지의 우정 역시 지극히 순수한 사랑의 형태일 수 있을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조지를 위해 콘플레이크 상자를 찢어 “사랑하는 조지, 절대 들어오지 말고 경찰을 부르거라”(27쪽)고 힘겹게 쓴 요제프의 마음은 배려와 우정의 모양새를 한 따듯한 사랑일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이전의 세계와 뚝 끊어짐을, 그리하여 넘어감을 통해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의 세계로 진입함을. 자신의 팔꿈치를 내어주고 미란을 믿겠다는, 영은의 팔꿈치를 가만히 쥐는 두 사람의 사랑은 비로소 시작되지만 어쩐지 오래 뜨듯할 것 같은 뭉근한 이 마음은 두 개의 선을 연결하여 제 삶을 끊어냄으로써 세 번째의 세계로 건너간 요제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유일했던 태도와 겹치며 묵직하게 내려 앉는다. 「담담」은 내밀한 타인과의 단절을 겪은 이들이 한 번의 보챔도 없이 서서히 연결되며 다시 서로의 타인으로 구성되는 미덕을 보여준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고백하는 혜재에게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100쪽)라고 묻는 은석은 한동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유가족이었노라 고백한다. 그러고 보면 정체성을 지나치게 성적 취향을 기준으로 두기도 하는 듯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 그렇지만도 않아서 은석의 경우와 같은 유가족, 장애를 가진 이들은 그 자체가 정체성이 되는데, 이런 정체화의 실체는 공통적으로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남 그 특이성을 지목한다는 점에서 퍽 사려 깊지 못하다. 정체성은 내가 나를 규정하기보다 외부가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이름표를 붙여주는 몹시 성급하고 거친 방식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은석과 혜재의 담담한 사랑의 맛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어려운 형태일지도. 스스로 자신의 한때와 이별하는 「하지」나 고모의 딸과 친구의 남편이 불륜이 되어버리자 가족과 친구 양쪽애서 떨어져나와 버린 「틈」은 깨어짐과 봉합이 따로 있지 않음을, 어리고 가난한 사랑의 미장센 「작은 눈덩이 하나」와 전세 사기로 죽음을 택한 남자친구의 기억에 겹치는 후배의 전세 사기에 마음을 쓰는 「또,」는 타인의 불행에 냉담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다. 안윤의 소설은 하나같이 맞은편을 바라본다. 편편이 까물까물 아득하게 마음을 쓰다듬지만 「핀홀」은 단연 타인의 이름을 내 곁으로 당겨 부르고 함께 앓게 한다. 보라는 안정감을 주는 승원의 성격과 그 부모의 다정함이 부럽다.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여기는데 자신이 재혼가정에서 자랐음을 차마 고백하지 못해 괴롭다. 이들의 일상은 승원이 피하기만 하던 경진의 전화를 보라가 받으면서 조금씩 구멍을 보인다.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은 중증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던 정원의 사망을 알려오는데, 정원은 승원의 형이고 삼십일 년간 시설을 전전하며 생활했다고 했다. 그는 시설에서 나가 독립하고 싶어 했지만 절차상 필수인 부모의 동의가 여의치 않자 장애인인권운동가와의 접촉을 통해 탈시설을 계획하던 중 낙상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승원과 부모의 안정감이 숨긴 비밀, 정원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거길 나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네가 살 곳은 거기라고”(81쪽) 탈시설을 반대한 부모님. 그들의 안정감의 비밀은 그것이었다. 구멍을 막고 처음부터 없었던 듯 태연하게 살아내는 것. 정원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에도 부모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며 끝내 부검을 반대하고 승원은 거기에 순하게 동조한다. 결국 정원의 인터뷰 영상과 그가 쓴 시는 보라가 인수하게 된다. 정원의 ‘말’을 인수한다는 것은, 가족에 의해 삭제되고 사회에서도 영영 지워질 뻔한 한 존재를 인수한 것이나 다름 없다. 보라의 할머니는 그런 말을 했다. “이쪽에 하나, 다른 쪽에 하나. 각각 구멍이 있어야 무엇이든 이을 수 있다고”(88쪽) 찢어진 것들을 이어 붙이려면 바느질을 해야 하고 바늘이 통과하려면 구멍이 필요하다. 안윤은 그런 사랑을 천천히 기워낸다. 안윤의 소설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 가로지름의 다양한 단서와 모양들이 느리고 단단한 물결의 질감을 하고 이쪽으로 건너온다. 7. 봉합할 가능성 있음 마거릿 애트우드의 「흰 말」3)에는 흰 말이 등장한다. 술에 절어 사는 농장주로부터 방치되었던 흰 말은 다정한 부부의 지극한 돌봄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다. 부부와 함께 삶을 지속하던 흰 말 글레이디스는 하룻 저녁 소동에 자극을 받고 농장을 뛰쳐나간다. 글레이디스는 제 힘껏 달리다 차에 치이고 만다. 글레이디스는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사람의 손길에 살을 찌우고 빗질을 받으며 때로 손님을 태우고 살던 때일까 아니면 힘껏 달리던 질주의 마지막 순간일까?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견디기 위해서 하는 것인가,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인가? 또 보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치하여 발아래 묶어두는 것인가, 위험으로부터 차단하여 생명을 유지하게끔 하는 것인가? 우리의 감각은 타자의 존재를 재빨리 알아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개에게는 되도록 줄을 길게 묶어주고 자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한겨울에는 수돗물을 미리 받아두었다 찬 기를 식혀 햇살이 대지를 데울만한 때에 고목 나무에 뿌려주는 게 좋다. 전동휠체어가 길 위에서 느닷없이 멈춰서지 않으려면 배터리를 미리 충전해두어야 한다. 산책로 곳곳에 집을 만들어 비닐을 씌우고 헌옷가지를 깐 잠자리와 보온 주머니를 둘러싸 얼지 않을 물그릇을 마련해 주는 손길이 길고양이를 살리듯, 슬픔을 통과하는 중에는 등을 쓸어주는 염려가 필요하다. 아침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며칠 전 메시지를 나눈 친구가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할 때, 또다시 과거의 끔찍한 장면이 반복돼 트라우마를 건드릴 때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 겪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기대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타자에 대한 감각 수용 반응의 일종이기도 하다. 들떠서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과 사고의 순간을 내용으로 하는 초등학교 2학년 조카가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사람들은 아주 가만히 눈을 감았지”였다. 그는 시를 쓰는 동안 사람들의 감정을 헤아리고 죽음의 순간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이 그가 타인에게 몰입한 때, 타인이란 존재를 체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상실했지만 끝내 끊어내지 못한 것들로 나를 채워가기도 한다. 그것이 이른바 ‘우울증적 정체성’이겠지만, 나의 일부가 거기에 건너가 있다는 면에서 우울은 필요하기도 하다. 내가 나를 위해, 타인을 위해 애쓰는 순간 나의 타인들도 서로의 곁으로 건너와 주리라는 범박하고 느슨한 믿음이 어쩌면 우리의 취약성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하고 변치 않는 명제가 아닐까. 이 글을 함께 읽는 봄이 크게 달라지기야 하겠냐만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 구멍 사이를 가로질러 서서히 당겨지는 중이라면 어떨까. 내가 더딘 바느질의 한 땀을 뜨려 애쓸 때 나의 타인이 되어주길, 그렇게 봉합할 가능성을 우리는 서로 알아보길. 그렇게 우리 서로에게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무심한 타인이 되길. 1) 산업이 발견한 진짜 혁명은 병든 동물이 더 돈이 된다는 것이다. 천연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개량한 동물은 항생제니 유기농이나 방목이니 해봤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산업 동물’이다. 사람들은 그런 동물을 먹고 사는 셈이다. 조너선 사프란 모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11, 146-150. 2)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애도의 힘과 폭력』, 필로소피, 2018. 3) 마거릿 애트우드, 『도덕적 혼란』, 차은정 옮김, 민음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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