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딩아돌하 2024년 봄호제70호
사랑과 하나인 자의식 ― 이규리 시인의 아포리즘을 통해서 읽는 근작시
길들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관계의 삶이라면 영원히 길들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예술의 삶이다. - 이규리1)
사람은 혼자 살지 않고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 속에서 고뇌하고 기대하고 각성하고 절망한다. 관계 속에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관계의 인식이 절망으로 내몰기도 한다.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런 비슷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규리 언니와의 인연은 벌써 20년이다. 첫 시집 원고 뭉치를 고맙게도 후배인 내게 먼저 보여주었다. 그것은 자매가 식구들 몰래 공유한 은밀한 비밀처럼 수북한 구석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곧 내가 서울로 옮겨와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언니의 선전은 내게 늘 긴장을 주었고, 단아한 모습이 시인으로서는 고독해 보였지만 내겐 늘 단정한 백합꽃 언니였다. 언니의 시집을 꾸준히 읽었고 언니의 산문들도 빠짐없이 읽었다. 언니의 책들이 쌓이면서 점점 나와 멀어 보이던 언니에게서 놀랍게도 너무도 많은 나를 보게 되었다.
“자의식은 평생 따라다니는 질병 같은 거다. 그 세포는 증식하거나 분열하지도 않은 채 곳곳에 눈뜨고 있다. 자의식은 자의식을 부정하며 받아 안는다. 측은한 점은 그 고단한 대가가 자신에게 누적된다는 것이다”2). 언니의 글에서 이런 것을 발견하면 안심이 된다. “러블리한 규리 씨가 속 깊고 담담한 사람이 사랑스럽고 상큼한 사람”3)에게도 “아픈 의식의 티눈”4)이 있었구나, 교환할 수 있는 마음이 있구나 생각하면 반갑기 그지없다.
언니는 작년에 남동생을 떠나보냈고, 나는 재작년에 둘째 언니를 보냈다. 동생을 보낸 언니는 마음공부가 단단하여 우리가 원래 쓸쓸한 사람인 것을 지그시 누르듯 바라 보고 있었지만, 나는 좀 더 격하게 슬픔의 난간에 휘둘리고 있었다. 나보다 좀 늦게 찾아온 언니의 슬픔을 위로하려다가 오히려 언니가 짚어주는 마음의 맥을 지그시 잘 누를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언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픔의 집에서 우리가 결국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아니, 우리가 태어난 곳이 이미 아픔의 집이었다는 것을.
내가 막 태어났을 때 엄마는 나를 강보에 싼 채 몇 시간 윗목에 밀쳐놓았다. 몇 시간 동안 내가 올려다본 세상, 두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두통인 세상, 꽁지 흰 새가 내 방 앞에 머물렀다. 딸만 내리 여섯 낳은 엄마는 나보다 몇천 번 더 꽁지 흰 새를 그렸겠지만 윗목에 밀쳐둔 몇 시간의 비애가 내 생을 지배하리라고....나는 그를 두통이라 부르겠다.
- 「윗목」(『앤디 워홀의 생각』)부분
첫 시집에 수록된 위 시를 읽으면 나는 기억도 할 수 없는 신생아의 내 모습을 그려낸다. 다섯째 딸로 태어난 나의 출생담과 너무도 닮아 있다. 규리 언니는 여섯째 딸로 태어나 윗목에 밀쳐져 세상에 나오자마자 소외의 시간을 보냈다. 나도 그랬다. 나는 가끔 그 짠한 이야기에 빠져서 스스로의 연민으로 울적해지곤 했다. 규리 언니나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실망감 때문에 어머니에게 외면당한 설움이 있었다는 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언니의 시에 내가 공백 없이 포갤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 이런 비슷한 이력 때문 아닐까 싶다. 특히 언니의 최근 산문집인 『사랑의 다른 이름』에 수록된 ‘기억’ 편들은 열쇠를 공유한 가족 같은 느낌으로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린 부분이었다.
「기억 4」의 ‘이별’ 편에서 언니들이 한 명 씩 시집 갈 때의 슬픔과 상처는 나를 거쳐 간 한때의 낡은 내 잠옷 같다. 결혼식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까지 어쩜 그리도 나는 규리 언니의 괴로운 구석들과 닮아 있는지, 그러면서도 시에의 복무는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언니는 “비애의 방식”으로 삶의 요소요소를 지나왔고 비애의 내용으로 그 앙금들을 정리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막내였던 규리 언니가 이제 큰언니가 되어 후배들을 다독이는 자리에 있다. 모두가 언니, 언니라 부르고 모두가 다가와 무언가를 호소한다. 마치 언니가 무슨 대단한 축제이기나 한 것처럼 언니 앞에 와서 천막을 치고 음식 판을 벌이고 술판을 벌인다.
언니, 언니 부르는데
언니는 어디서 나왔을까
참석하기도 전에 축제가 끝나고
바람이 불어, 천막이 흔들려 언니
어떻게 해?
가방을 풀기도 전에 다시 싸야 하는데
돌아갈 차가 없네
언니에게 축제가 있을까
언니는 정오야, 계속 요구하는 슬픔이야, 내일이야
언니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다
머리를 감으며 비누 거품을 내며
무성하게 힘을 내자
그놈의 천사는 내다 버리고
언니밖에 없다는 말 속으면 안 돼
역사는 어느 페이지도 언니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언니가 뭐가 어때서요?
그런 말은 좋지가 않아
언니가 있는 동안
너는 언니에 도착하지 않잖아
우린 모르는 언니들의 팔을 빼고 사지를 틀었는데
의자도 주지 않고
언니는 늘 언니로 있어,
미안할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언니와 언니들은 저 멀리서도
언니라는 말에
벌떡
헐레벌떡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가르치려 든다』, “그녀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다.”
- 창비 - 「돌림 노래」 전문
‘언니’라는 호칭은 한층 더 깊은 심연처럼 자기 극복은 물론이거니와 아우들에 대한 헌신의 내공이 필요하다. 바람이 불면 천막이 흔들리는 당연한 상황에도 언니를 찾는 아우들, 돌아갈 차가 없다고 징징대는 아우들 때문에 언니에게 축제의 날은 오히려 괴롭다. 언니는 정오처럼 짧은 그림자로 기립해서 대기해야 하는 슬픈 존재다. 언니는 무슨 마술에 걸린 천사처럼 그 호칭에 침착하게 희롱당한다. “언니가 뭐가 어때서요?” 이런 “팔을 빼고 사지를 트”는 말은 결코 언니를 쉴 수 있는 의자에 앉히는 게 아니다. 언니를 늘 언니로 있게 하려는 돌림노래에 불과하다. 이런 걸 다 알면서도 언니는 참 놀랍다.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언니라는 말만으로도 헐레벌떡 달려갈 자세를 취한다.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지각함으로써 자신과 관계했던 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있다. 막내인 규리 언니가 숱한 후배들의 언니가 되면서 비로소 다섯 언니의 처연한 방식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을 첫눈처럼 스쳐 보내는 마음, 그네들을 첫눈으로 인식하는 마음, 그리하여 마침내 그 부질없음을 종내 글썽이는 의미로 허락할 수 있게 한 것 아닐까.
언니들의 그때 그 이야기들이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학습이었음을 이제는 다 안다.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부분)
푸른 사과가 없는 사과보다 낫지만
나쁜 눈이 없는 눈보다 나을 수 있을까
-언니 현실에 좀 사세요
그녀가 말했을 때
뜨끔했다
내가 사랑이라 정의한 것들 사실은 죄다 망했으니까
설득하지 않을게
조용히 구석에 있을게
지하를 어떻게 좀 해 주겠니
물속이라면 우리 트라우마가 있잖아
그렇더라도 이 슬픔을 평가절하하지 말아줘
언니, 현실을 살라니까요
너의 현실은 익사가 재미있니?
- 「에피소드」 부분
2023년 7월 15일의 집중호우로 충북 오송 지하 차도가 침수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는 사망자 14명 부상자 9명이 발생하는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우리는 이미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이 사망하는 실로 대형 참사를 겪었기에 물에 관한 사고에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물속에 넣은 적이 있다”고 특히 어린 학생들이 희생된 사고에 대해 어른으로서 크게 반성하고 있다. 지하 차도에서 빠져나오려면 수영이라도 배워야 하고 구명조끼라도 입었어야 한다고 관계 기관의 어설픈 대처 능력을 우회적으로 꼬집고 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그럼에도 공무원들은 잘못을 인지하거나 제대로 사과하지도 않고 결론을 재빨리 내린다.
“언니, 현실을 살라니까요” 이 목소리가 너무 민망하다. 물속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한 언니의 고통을 이해하니까. 아마도 저 목소리는 이 사고에 대해 무감각한 세상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언니는 세월호 사고로 희생한 단원고 학생인 선우진의 생일 시를 쓴 적이 있다. 선우진 학생의 자료를 받아서 2주 동안 온전히 선우진의 삶을 살아본 언니니까, 언니가 봉합되지 않은 저 고통의 세계를 먼저 실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가 춥고 비가 많아서 “푸르기만 한 사과”를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 시 구절을 떠올리지만 그래도 언니는 “나쁜 눈”은 “없는 눈”보다 나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든다. “내가 사랑이라 정의한 것들 사실은 죄다 망했으니까” 이 구절에서 나는 언니의 자의식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었고, 언니가 아프게 견디면서도 믿고 싶었고 지향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사랑이었음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아우들에게는 첫눈이라고.
나이가 들면서 클래식이 좋아진다는 그녀는 식은 커피를
졸졸 부추 화분에 부어 주네
아침의 화답은 이파리 끝이 가늘게 흔들리는 일부터
약함을 신뢰하는 일까지
무얼 대적할 수 없는 이 초록이 왜 자랑스러워
사는 방법이 골똘해지고
세상에 어떻게 폭력이 가능할까를 생각하네
부추가 골목과 계단을 만나면서
이 사랑은 오래되었는데
나를 단정하게 잘라 줘
폭력은 자라지 않는 게 아니라 잘 잘라 주는 거야
그걸 부추가 일러주었다
- 「아침의 일」 부분
“폭력의 반대말은 무얼까. 비폭력? 사랑? 아니 ‘슬픔’이다. 슬픔 앞에서 허세는 스르르 무너지고 만다. 보이지 않는 힘 중 가장 아름다운 깊이이다.”는 언니의 아포리즘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폭력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슬픔이던가? 그래서 전쟁의 참혹한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고 그 슬픔의 장면들이 번져서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을 모으게 되기도 하는 건가. 부추가 골목과 계단을 만나면 그 부추밭의 오래된 사랑은 단정하게 잘리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왔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다시 발을 버려야 하는 것5)처럼 부추는 초록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무얼 대적하려 들지 않는다. 부추는 자신의 저돌적 의지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여기서 ‘부추’는 “차츰 역동적인 이 세계로부터 제외되6)고 싶은 언니와 심정적으로 깊이 연루된 식물이다. “힘을 빼려고 해도 힘이 들어갈 때는/부추에게로 와//나이가 들면서 부추도 클래식이 좋아”(「아침의 일」 부분)에서 그것은 더 확연해지는 데, 클래식을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는 부추는 분명 보편적이지 않는 부추이며, 슬리퍼 끄는 소리가 아슬하게 다가와 다시 정적이 들 때 언니는 부추처럼 하늘거리며 부신 눈을 감고 있었으리라.
방울토마토가 쏟아졌다
아침이 계단으로 사정없이 굴러가는데
달아나는 토마토를
멈추어야 하는데
더욱 더 멀리 아득하게
내려가고만 있네
고 작고 말랑한 것이 손쓸 수 없도록
더 내려갈 수 없을 때에
올라갈 수 없는 위가 생겼는데
당신들이 대체로 뻔하고 진부해질 때
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굴러가는 일을 한번 생각할래?
계단은 끝없이 쏟아지고
저렇게 경쾌한 노래는 원래 남의 것 같지 않은가
토마토가 계단을 만들던 일
절망이 명랑하게 굴러가는 일
내 생의 문장이 이토록 힘을 받아 굴러간 적 있을까
왜 나는 여기 있지?
주워도 끝나지 않는 일이 왜 나의 일이지?
고민하는 동안
방울토마토는 두려움을 모르고 구르고 있네
털썩 계단에 주저앉을 때
빨간 방울과 방울들이 목금 소리를 들려주네
방울토마토 따라
굴러 가는 월요일 말랑말랑해지는 월요일
토마토는 힘이 없는데 힘이 있지
속도가 근심을 다 지워버려서
도시락이 사라지면 어때 월요일을 모르면 또 어때
깨어난다면 그것이 꿈인 날들 속에서
여전히 계단은 굴러가고 있는데
- 「월요일의 도시락」 전문
이 방울토마토는 첫 행이 막 출발하여 그 다음 행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불가능한 시 쓰기의 특성을 가진다. 우리가 어떤 영혼의 불길과 처음 맞닥뜨릴 때 그 설렘에 붙들린 상태에서 뭔가를 써 내려갈 때 우리는 이런 멈출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힌다. 방울토마토가 계단에서 사정없이 굴러떨어지듯이 시인의 잠재된 의식을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다. “당신들이 대체로 뻔하고 진부해질 때/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굴러가는 일을 한번 생각할래” 에서처럼 방울토마토가 아래로 계속 굴러떨어지는 것 같은 시 쓰기는, 규범적 질서에서 벗어나, 뻔한 진부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시는 속도가 밀어붙인 강력한 힘이 생기기 마련이다.
“무의식은 그 범위나 깊이가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경쾌한 노래는 원래 남의 것 같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열심히 굴러가는 글들은 말랑말랑해져서 자유로우면서도 단단한 힘을 가지게 된다. 시를 쓸 동안 그 속도 때문에 주춤하거나 멈추려는 우려는 사라지고 그다음 줄에 대한 부담도 없어진다. 여기에 온전한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시인은 대상을 위해 반복하는 노동자에요. 무수한 반복이 노동을 넘게 해요. 어느덧 저를 넘게 해요.” 7)
물론 이 시를 의미 자체로 분석해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한 시다. ‘월요일’이란 대체로 얼마나 막막한 시작인가. 엎질러진 방울토마토처럼 월요일의 도시락을 없애 버린다면 우리의 고단한 시작은 유보될 수도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미루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 좀더 위로 올라설 수 있을까. 이미 도시락을 사야하는 서민들은 다 알고 있다. 추락하는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보이지 않는 계단을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를.
하지만 나는 이 시를 이런 의미로만 읽기 보다는 “쏟아지는 이 작은 방울토마토”에서 시의 모습을 만나려 한다. “시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실패이다. 머묾이 아니라 떠남이며 설렘이 아니라 무너짐이다. 정확히 그 지점이 시가 나오는 곳이다. 시는 그것들을 일으키려 애쓸 것이며 동시에 어떻게 아름답게 쓰러지는가를 보여줄 것이다.”8) 단언하건대 언니는 계단에서 도시락을 엎지를 만큼 ‘월요일의 도시락’을 허술하게 장만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생의 문장이 이토록 힘을 받아 굴러간 적 있을까”라며 언니는 지금 절망을 명랑하게 굴리고 있다. 이제는 토마토가 아니라 아예 계단을 굴리면서 열심히 구르는 “언어의 선물”이 바로 “문학의 힘”9)이라는 것도 함께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펄펄 끓고 있는 국솥에
나는 무얼 더 넣고 싶은가
정신 차리고 싶은가
토란대와 숙주 고사리가 한사코 현실을 붙들고
제 사연들을 들어달라 들어달라
부글거리다가
숨을 놓으면,
인부들은 땅속 깊은 곳에 어린 소들을
차례로 던졌다
그중에는
다리가 뽀얀 순한 눈도 있었다
가느다란 뽀얀 다리가 허공으로 솟았다 내릴 때도 우린 멈출 수 없었다
끓는 국솥으로 걸어들어가는
시퍼렇게 언 해
미안하지도 않고
여기까지
왔다
- 이규리, 「지독」(『당신은 첫눈입니까』) 전문
‘방울토마토’라는 시어에 시의 진행을 맡긴 시를 읽다 보니,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에 수록된 위의 시가 떠오른다. 이 시도 요리 과정을 창작 진행 과정에 빗댄 재미있는 시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펄펄 끓고 있는 국솥” 같은 작가의 심리적 고양 상태에서 출발한다. “정신을 차리고 싶은가”라는 부분은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금기시하며 고양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토란대와 숙주 고사리”는 시의 소재들이다. 그들이 현실을 붙들고 부글거리다가 숨을 놓는 부분에서, 시 쓰기는 ‘경직’ 보다는 ‘유연’한 상태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로테스크한 장면인 “인부들이 땅속 깊은 곳에 어린 소들”을 차례로 던지는 것인데 이것은 시의 재료에 화려한 수사를 가미하기보다 살아있는 언어로 생명성을 지키는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다리가 뽀얗거나 순한 눈을 가졌다는 것은 소재들의 순수함을 잘 보존하는 상태가 아닐까. 더구나 “가느다란 뽀얀 다리가 허공으로 솟았다 내릴 때도 우린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역시 산채로 넣는 이미지의 생동감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그 고양된 상태에서의 시적인 진행이 “끓는 국솥”으로 계속 이미지화되고 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반전으로 “시퍼렇게 언 해”가 등장한다. 해가 “시퍼렇게 언”다는 모순어법으로 시의 흐름을 역전시키며 시적인 감흥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시의 결미에서는 또 언니의 자의식이 감지된다. “미안하지도 않고”라니? 시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시의 진행에 희생된 뽀얀 다리와 순한 눈을 가진 어린 소에게 죄책감이 비치는 부분이다. 언니는 그런 자의식으로 자신에게 늘 미안하면서도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신의 고단한 일면임을 안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하늘은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터널을 몇 개 지나면서
창 쪽의 내가
가리개를 살며시 올렸다가
빛이 돌아오면
내리곤 했다
옆자리의 책 읽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나의 일
몇 차례 가리개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사람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둠과 밝음을 발명해내는 시간 안에는
반지하의 터널이 있고
옥탑의 가파름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들고 나는 마음은 왜 이토록 세심한가 쓸쓸할 때
하찮음은 몸에 밴 나의 일,
그게 누구라도
부디 가리개를 올리고 내릴 때의 힘이
고요하기를, 적당하였기를
햇빛을 조절하던 집중은 꽤 쓸 만했지만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하지 않은가
책의 제목이 궁금했던 한 사람을 모르고
옆자리가 움푹 팬 것도 모르고
그 독서는 다음 역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 「그늘을 만드는 시간」 전문
언니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도 과히 좋아하지 않지만, 특히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먼지”10)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 기침이 나면 그 “기침이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11) 하는 사람이 언니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언니의 자의식은 사랑을 향해 있어서, “어떻게든 맑게 눈뜨고 싶다는 믿음”12)이 크므로, 모르는 사람에게도 재빨리 손차양을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이다. 이 시는 열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책 읽는 것이 방해되지 않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먼저 손을 내어놓는 사람이어서 언니에게는 이미 몸에 밴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앞의 여러 시편에서 본 것처럼 언니는 시 쓰기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두고 있는 만큼, 독서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특별한 배려가 저절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책 읽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보며 손차양을 해주는 마음이 언니의 문학에 대한 애정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이 시에서도 언니는 중요한 시론 카드를 던져 놓는다.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한다는 것인데, 시의 의미를 확정 짓고 써나가는 게 아니라 무방비 상태의 상상력으로 예상하지 않은 세계를 펼쳐나간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야기의 심장이 저절로 파닥거려서 글쓴이도 그 끝을 알 수 없게 이어지는 것이 진정 피가 도는 시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 구절에 책을 읽는 사람이 눈치챌 수 없게 끝까지 그늘을 지켜주려는 겸손한 배려가 담겨있음도 당연하다.
언니의 이런 시 창작 작업은 모두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언니는 종종 그 심연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심연은 무엇일까? 심연은 심연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감지되는 보이지 않는 지점일 것이다.”13)라고도 하고, “누구나 자신의 심연을 보는 일은 두려울 것이다. 보려 한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연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 천신만고 끝에 왔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다시 발을 버려야 하는 것.”14)이라고도 한다.
박상수 평론가는 언니의 세 번째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해설에서 언니의 시를 읽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며, 심연을 수긍하고 심연을 잠재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언니의 시에 “수긍과 지혜와 안부와 토닥임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에 덧붙여 언니의 시에 “사랑과 하나인 자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니의 신작 시와 근작 시를 읽으면서 언니의 사랑이 이제 언니의 섬세한 내면에서 밖으로 걸어 나와, 이 사회 제도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더 큰 사랑의 미래를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반갑다. 이렇듯 사랑을 향한 자의식은 언니가 말한 ‘질병’이 아니라 사회변화의 마법을 꿈꾸게 하는 축복이다.
천수호
프로필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딩아돌하 소시집>
-신작시
아침의 일
나이가 들면서 클래식이 좋아진다는 그녀는 식은 커피를
졸졸 부추 화분에 부어 주네
아침의 화답은 이파리 끝이 가늘게 흔들리는 일부터
약함을 신뢰하는 일까지
무얼 대적할 수 없는 이 초록이 왜 자랑스러워
사는 방법이 골똘해지고
세상에 어떻게 폭력이 가능할까를 생각하네
부추가 골목과 계단을 만나면서
이 사랑은 오래되었는데
나를 단정하게 잘라 줘
폭력은 자라지 않는 게 아니라 잘 잘라 주는 거야
그걸 부추가 일러주었다
약한 사람은 건드리지 마,
그게 골목의 룰이잖아
그런데 왜 날이 새면
저 건너 여린 초록의 피 흘리는 소식부터 오는지
포탄 더미를 들춰야 하는지,
이거 초현대적이야
부추를 보고 생각이 많아지면
일월이 미안해지면 그때
부추의 방식이 되는 것
견디는 쪽을 강요할 순 없지만
그럴수록 부추를 믿을래
울면서 따라간 시간이 역사가 된
슬픈 이야기는
한국적이었는데 전 지구적이더군
지친 몸을 데워줄게, 암울하지만
우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기를
힘을 빼려고 해도 힘이 들어갈 때는
부추에게로 와
나이가 들면서 부추도 클래식이 좋아
그녀가 슬리퍼를 끌며 다가올 때쯤
귀를 세우는 이 정적이
아슬하게, 참 좋아
돌림 노래
언니, 언니 부르는데,
언니는 어디서 나왔을까
참석하기도 전에 축제가 끝나고
바람이 불어, 천막이 흔들려 언니,
어떻게 해?
가방을 풀기도 전에 다시 싸야 하는데
돌아갈 차가 없네
언니에게 축제가 있을까
언니는 정오야, 계속 요구하는 슬픔이야, 내일이야
언니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다
머리를 감으며 비누 거품을 내며
무성하게 힘을 내자
그놈의 천사는 내다 버리고
언니밖에 없다는 말 속으면 안 돼
역사는 어느 페이지도 언니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언니가 뭐가 어때서요?
그런 말은 좋지가 않아
언니가 있는 동안
너는 언니에 도착하지 않잖아
우린 모르는 언니들의 팔을 빼고 사지를 틀었는데
의자도 주지 않고
언니는 늘 언니로 있어,
미안할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언니와 언니들은 저 멀리서도
언니라는 말에
벌떡
헐레벌떡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가르치려 든다』, “그녀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다.”-창비-
에피소드
왜 들어갔는데 나오지 않습니까
비가 왔을 뿐
지하차도는 잘못이 없는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물속에 넣은 적이 있다
수영을 다시 배울까
구명조끼를 넣어야 하니 큰 가방을 살까
반성문을 쓴 적 없는 담당 1과
반성의 이유를 배우지 못한 담당 2가
서로 악수를 하고 결론을 내버리도록
옥루에선 아직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은하는 벌써 한 바퀴를 돌았다15)
그들도 노을을 바라본 적 있겠지
노을을 보던 나쁜 눈은 없었는데
눈은 바뀐다
푸른 사과가 없는 사과보다 낫16)지만
나쁜 눈이 없는 눈보다 나을 수 있을까
-언니 현실에 좀 사세요17)
그녀가 말했을 때
뜨끔했다
내가 사랑이라 정의한 것들 사실은 죄다 망했으니까
설득하지 않을게
조용히 구석에 있을게
지하를 어떻게 좀 해 주겠니
물속이라면 우리 트라우마가 있잖아
그렇더라도 이 슬픔을 평가절하하지 말아줘
언니, 현실을 살라니까요
너의 현실은 익사가 재미있니?
-근작시
월요일의 도시락
방울토마토가 쏟아졌다
아침이 계단으로 사정없이 굴러가는데
달아나는 토마토를
멈추어야 하는데
더욱 더 멀리 아득하게
내려가고만 있네
고 작고 말랑한 것이 손쓸 수 없도록
더 내려갈 수 없을 때에
올라갈 수 없는 위가 생겼는데
당신들이 대체로 뻔하고 진부해질 때
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굴러가는 일을 한번 생각할래?
계단은 끝없이 쏟아지고
저렇게 경쾌한 노래는 원래 남의 것 같지 않은가
토마토가 계단을 만들던 일
절망이 명랑하게 굴러가는 일
내 생의 문장이 이토록 힘을 받아 굴러간 적 있을까
왜 나는 여기 있지?
주워도 끝나지 않는 일이 왜 나의 일이지?
고민하는 동안
방울토마토는 두려움을 모르고 구르고 있네
털썩 계단에 주저앉을 때
빨간 방울과 방울들이 목금 소리를 들려주네
방울토마토 따라
굴러 가는 월요일 말랑말랑해지는 월요일
토마토는 힘이 없는데 힘이 있지
속도가 근심을 다 지워버려서
도시락이 사라지면 어때 월요일을 모르면 또 어때
깨어난다면 그것이 꿈인 날들 속에서
여전히 계단은 굴러가고 있는데
- 2022. 시산맥 봄
그늘을 만드는 시간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하늘은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터널을 몇 개 지나면서
창 쪽의 내가
가리개를 살며시 올렸다가
빛이 돌아오면
내리곤 했다
옆자리의 책 읽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나의 일
몇 차례 가리개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사람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둠과 밝음을 발명해내는 시간 안에는
반지하의 터널이 있고
옥탑의 가파름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들고 나는 마음은 왜 이토록 세심한가 쓸쓸할 때
하찮음은 몸에 밴 나의 일,
그게 누구라도
부디 가리개를 올리고 내릴 때의 힘이
고요하기를, 적당하였기를
햇빛을 조절하던 집중은 꽤 쓸 만했지만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하지 않은가
책의 제목이 궁금했던 한 사람을 모르고
옆자리가 움푹 팬 것도 모르고
그 독서는 다음 역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2023. 문학인 가을
- 1) 이규리, 『시의 인기척』, 난다, 2019, 50쪽.
- 2) 같은 책, 16쪽.
- 3) 박상수, ‘러블리 규리씨’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해설 113쪽.
- 4) 이규리, 같은 책, 16쪽.
- 5) 이규리,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난다, 12쪽.
- 6) 같은 책, 158쪽
- 7) 이규리, 『시의 인기척』, 난다, 2019, 148쪽
- 8) 같은 책, 86쪽
- 9) 같은 책, 9쪽
- 10) 같은 책, 26쪽.
- 11) 같은 책, 26쪽.
- 12) 같은 책, 작가의 말
- 13) 이규리, 『사랑의 다른 이름』, 아침달, 228쪽
- 14) 이규리,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난다, 23쪽
- 15) 고운 최치원
*玉漏猶摘 銀河巳回
-물시계에선 아직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은하수가 벌써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 16) 올라브 하우게 「푸른 사과」 부분
- 17) 문학동네 2023. 가을, <작가초상, 조시현>,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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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1. 파수의 다시 쓰기 (서윤후,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2025, 04) 경계하여 지킨다는 뜻의 파수(把守)의 한자어를 달리하여 派收로 써볼까? 여러 번 중의 어느 한 번을 뜻하는 파수(派收)를 다시 破水로 쓰면 파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물 혹은 분만 전에 쏟아지듯 터지는 양수를 일컫는 힘찬 말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유리가미」)라고 운을 뗀 시집을 펼치며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지 않으려고”“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는 문장을 만난다. <시인의 말>에 기대어 이 시집이 악몽의 받아쓰기, 오래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켜온 자의 고단함을 옮겨놓은 파수(把守)의 고백임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그러나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 수 있을까? 이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어떤 금기를 어기는 심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돌아보았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야 조금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떻게 변해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 시집의 관건 중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꾸만 ‘나’를 유기하고 가버린다.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앞에서 종종 나만이 오도카니 남겨졌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린 때도, 선생의 질문에 더 좋은 답을 궁구하느라 우물거리며 대체로 수용될만한 밋밋한 답을 제출한 때도, 누군가의 결정에 맞서 당차게 의견을 설파하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만 있던 때도 시간은 나만 놓고 표표히 흘러가곤 하지 않았나. 그럴 때면 어떻게 했던가? 돌아와 누운 밤에 후회와 함께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꼼꼼하게도 새겨넣지 않았나. 여기서 서윤후는 “나를 눌러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시인에게는 곧 ‘다시 쓴다’는 말이다. 제때 행하지 못한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라서 그는 시간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다만 그 시간은 망쳐버린 이야기의 시간이기에 주요 인물일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다린다. 이미 내가 종료해버린 이야기의 장면에는 그러나 나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도리 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리하여 장면 안의 이들이 행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세계는 온통 구겨지고 주름진 것들이다. 전단지 속 예수를 접었을 때 가방 속에서 툭 펼쳐지는 전단지의 주름은 전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전능도 나를 데리고 갈 순 없어서 그저 이 망가진 이야기가 끝이 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더 나빠지길 기다린다. 시간과의 결별이라는 결심은 한편 시인의 권능이기도 해서 여러 번 중 한 번을 겪을 기회, 다시는 가능해진다. 다시 쓰기라는 파수(派收)의 쓰기이다. 그러나 부적응의 시간은 상처로 오롯해서 왠지 씁쓸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망가진 것들은 저들끼리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세계의 주름일까. 주름만이 시가 될 것을 아는 자는 그렇게 “나빠지길 기다린다”. 창밖엔 멀쩡한 걸음으로 들고 온 목발을 다시 어디선가 절뚝이며 나타난 이에게 건네고 지폐를 주고받은 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또박또박 걸어가는 장면 균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구나 세상의 부목은 여기저기 출렁이면서 부러진 일순간을 잡아주면서 -「나빠지길 기다린다」 부분 다시 말해 세계의 균형이란 좋은 것만 있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한 시간마다 스프링클러가 열”린 후 나오는 햇빛은 외려 식물을 죽게 만들 수 있듯이(「독화살개구리」), “호주머니 속에”“젖은 돌멩이”를 가진 사람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임을, 그 고독한 세계로의 재입장(入場)의 입장(立場)이 매우 난처함을 헤아림이 필요하듯이(「고독지옥」), “살려주는”일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듯이(「견본 생활」)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절반씩 유효하다. 또 하나의 관건은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랑이다. 그건 타고난 체질인 양하다. 이를테면 「물길 빈티지」와 「유리가미」는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인과관계를 이룬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 관리를 맡기고 흘러갔다”. “이미” 물도 다 “말라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아……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음을. “서로 헤어진 적 없는 물의 우정”은 나를 배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은 이를테면 쓸모에 대한 발견이면서도 소망하던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하다(「물길 빈티지」).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다.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기억의 뒤뜰”이다. 이 뜰에서 숱하게 끊어진 연을 떠나보냈을 것이나 기어이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고 싶어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사람들을 모으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연줄을 죄 끊어버릴 참인 게다. 그리고 알게 되는 건 이 억지스러운 연(緣) 놀이가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인연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유리가미」).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사랑의 천재」)다는 고백은 그 말의 주인 역시 사랑의 천재라는 말로 들린다. 정말이지 사랑이 체질. 그런 그가 사랑을 부조하는 방식은 마지막 시편, 「비로소 함께할 것」의 목록으로 더욱 선명히 융기한다.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 부르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쓴 이 참여의 목록은,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대상들이 아름답게 박제된 완결의 이야기 쪽이 아닌 미완과 실패의 조금은 남루한 조각들 쪽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둡기만 하던 흑백의 시퀀스는 이제는 보내야하는 어떤 끈질긴 마음의 한 장면을 아스라하게 닫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자 그 시간을 닫는 이별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끝내 홀로 꾸던 악몽의 시간 속에서 다음의 이야기는 마냥 나쁘게만 쓰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그런 시간,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이 결코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님을 이 악몽의 파수꾼은 지키고 쓰고 지우고 쓴다. 그럴 때 그 시간과의 결별 후 찾아올 새로운 시간은 무언가 한꺼번에 물꼬를 틀 파수(破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밝은 쪽에 있다고 믿는 나의 눈부심은 실은 항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스레 어둠 쪽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과 함께 다음의 시간은 올 것만 같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경적을 울리며 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부분 2. 유동하는 물질들의 시론 (서동욱, 『유물론』, 민음사, 2025, 03) 서윤후의 시가 그런 시간과 기억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숱하게 썼다 지우는 이야기라면 그 미덕은 극복에만 있지 않다. 미덕이라면 저 반복적인 쓰고 지우기 쪽에 더 있달 수 있는데, 서동욱의 「시론」에 기댈 때 그건 “낯선 것과의 조우”를 요청하는 “무의미”, 쓰는 자가 유의미로 포착한 그 무의미 속에서 생소한 무엇을 만나기 위한 “응답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는 시를 잉태하는 인간의 말, 실용성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쉽사리 “소통을 져버”리는 “고립”의 언어다. 이런 서동욱의 시론은 어쩌면 이 시집이 횡단하고 건너뛰며 출렁이는 물질성의 다양함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서동욱의 자서는 이러하다. “아스팔트 창밖으로 쓰레기장이 파랗게 빛난다 벼락을 맞아 충전된 건전지들이 폐건전지 통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친다 벼락이 밤새 한 인간을 찾는다”. 자서 속 인간은 벼락을 받을지도 모르는 물질의 한 유(類)로 존재한다. 벼락의 내려침에 인간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함은 저 쓰레기장의 폐건전지와 인간을 나란히 놓게 한다. 한편 인간이 폐기한 건전지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인 듯 쓰레기장에 놓여 벼락의 힘으로 충전됨으로써 재생의 물질로 전환되어 인간을 역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확장되는 행위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은 의도나 욕망과 같은 지향을 지닌 존재를 ‘두꺼운 행위자’로, 지향이 없는 것을 ‘얇은 행위자’로 나누기도 하지만(대니얼 C. 데닛, 『마음의 진화:대니엘 데닛이 들려주는 마음의 비밀』,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6, 49쪽), 시가 되기도 전 저 날것의 언어에서 이미 벼락은 어쩐지 의도를 품은 듯 “한 인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좀 더 인간의 권위를 내려놓고 싶은 내 과도한 마음일까, 저 구획과 분류의 틀에서 인간의 자리를 좀 더 지울 수 있다면 하는 심정. 시인과 함께 걷는 “동네에는 내가 하나” 있으면 “길이 하나” 있고, “공실이 된 상점”도 “하나가” 있다. “공실이 편의점이었을 때” 그는 “매일 술을” 샀는데, “점주 여인은 교회 나가자고” 권한다. 길과 상점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 길과 상점은 나의 산책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그리고 상점 안의 술이라는 물질은 나와 여인 사이에 신앙을 삽입하여 일종의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끔 추동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주 여인을 떠올리는 건””생뚱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이를 포함한 것이 저 산책길의 풍경이기 때문에 유독 그이만 빼는 게 더 어색하다. 이제 “전단지 나눠 주는 알바가” “나의 도착을 기다리”는 길에서 며칠 뒤엔 전단지와 알바를 떠올릴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동네의 본질”. 산책의 본질이 아닐까.(「산책」) 그런가 하면 여덟 편에 이르는 ‘생일과 명절에 관한 연애시’ 연작은 ‘날’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자정이 오자 생일 같은 명절이 되었고 생일들은 답안에 도달한 수학자의 숫자들처럼 서로 꼭 들어맞으며 연애의 첫 기쁨을 잔잔한 나날로 만들었고 생일이 된 명절은 아기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늙은 인간을 새 이야기로 놀라게 하리 -「한 해의 마지막 저녁」 부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해는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니 생일인 셈이기도 하다. 1월 1일은 데칼코마니 배열이고 ‘오늘부터 1일’은 설렘이 폭주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날’들은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걸까, 우리가 수없이 매달았던 날들의 의미를 되뇌어보자. 그때 인간의 행위는 그 감정까지도 꽤 수동의 모양이기도 하다. “철학도 정치도 자비심도” 호르몬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호르몬」). 우리는 파손된 기계 속았다고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넌 내게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중략) 우리는 파손된 기계 치킨과 소주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아주 살짝 그러나 엄연히 눈물이었지 -「사랑」 부분 그러고 보면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추억을 간직할 지성도 없”는 “순수 존재”인 그것은 기실 “그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영혼이 아니다”(「유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사랑했으므로(아직 사랑하므로) 거짓말조차 네가 내게 준 전부라고 믿는 이 무지성적 현상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인간은 “파손된 기계”일 따름이다. 사랑도 그러할진대 “시 쓰기는 욕망이 창끝에 매단 토템 같은 것”(「시론」)이라면, 이 시집은 온통 출렁대는 물질의 유동성, 그러한 유물론(流物論)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식용’ 식물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차현준, 『온몸일으키기』, 2025, 04) 물질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 표제작인 「온몸일으키기」는 보도블록의 이야기지만, 이 블록은 사고하고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결코 ‘얇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록은 다만 하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없”을 뿐이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기에 스스로 “망각”을 택하기도 하는 블록은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실패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와 손은 잡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블록은 “태풍이나 지진”을 틈타 “흔들리”거나 “전력 질주”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안간힘을 통해 블록은 벌떡 일어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꿈꾼다. 가능성, 차현준의 시는 공간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연다. 그 방법의 한쪽 손아귀는 육체이고 다른 한쪽은 미끄러짐이다. 그는 아무 데서고 미끄러져 여기와 저기를 불쑥 열어젖힌다. 그러한 공간은 “니트릴 장갑에 물을 채운 다음 비워내”기 위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접속 가능해지는 식이다. 장갑 하나 뒤집었을 뿐인데 “난생처음 보는 들판에 엎어”질 수 있다(「적재접속」). 만약 당신이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그런 다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당귀 방」). 아무런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앨리스가 그리하던 것처럼 쑥 미끄러지고 착 당도한다. 그럴 때 육체란 하등 방해의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되레 육체는 그 통로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럼 거기 가서 무얼하느냐? “들판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여기서 몇십 년 지낸 뒤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니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한마디로 시적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적재접속」). 그는 온통 푸릇한 것을 기르고자 한다. 당귀를 비롯해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방울토마토 등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기르는 푸른 것들은 온통 먹을 수 있는 것들,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채소류이다.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고창의 청보리밭을 꿈꾸게 하는 것처럼(「청보리밭」), 그가 보는 것들의 목록은 몇몇 나무 이름을 제외하고는 먹거리로 무성하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그건 새삼스레 식물을 키우며 그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필수적이다(서동욱의 「병원 밥」에서 병원이 죽음이 아닌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밥’으로 이야기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이 지속되는 물질의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식물성에 접속하기 위해 육체를 경유하는 것을 차현준이 공간을 창조하는 독자성이라 말한다면, 차현준의 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접맥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을 먹는 행위는 식물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다(이 구분이 인간 중심적일 수는 있겠다, 다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물컹해진 치커리”는 “퀴퀴한 냄새”로 변환되고 “뭉쳐지고 물컹해진 당귀들”은 “진물”을 내놓는다「당귀 방」). 식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먹는 행위는 인간을 배설하게 하는데 이 식물성의 배설은 “유기물이 풍부하다”(「밟아보기」). 유기물은 미래의 식물성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태 순환 고리 안에 인간의 자리, 역할을 마련해준다. 이런 배치는 인간의 행위와 임무를 결코 인간중심으로 놓지 않으면서 그 연결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게끔 만든다. 이런 식용의 식물성은 인도어팜이나 주말농장 등 어디 먼 농촌의 들녘이 아닌 “7호선 상도역”(「인도어팜 방문기」)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식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도시의 식물성은 어쩌면 ‘농촌상’ 보다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창조주이기라도 한 양 빛과 산소,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것은 자주 망하고 물크러지는가 하면 엄청난 자생력으로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신드롬」 같은 현상 말이다. 방마다 방울토마토가 들끓었다. 방울이라는 말이 없어 말이 되는 토마토가 무르익어 있었다. 굳이 자신을 방울토마토라고 우기 길래 그래, 그래. 상자에 들어가 있어. 나는 방마다 방울진 방울토마토들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중략) 이렇게 다 담아도 방마다 한 번씩 더 돌아다녀줘야 한다. 과즙이 묻은 초록 계열의 잎들을 떼어내기로 했다. 쌈 싸 먹을 수도 없게 구린내가 나니까. (중략) 이 방울토마토들은 대체 왜? 어떻게? 방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내가 왜 방울토마토를 채집하고 다녀야 하는지 난감했다. 방에 있는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밭. 거기서 또 생겨나지. 기어이 생겨나니. 아주 기꺼이 생겨나지. 화가 났다. 방울토마토는 농락하듯이 더 커져만 갔다. (중략)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는다. -「방울토마토 신드롬」 부분 먹는 행위로 식물과 도시의 인간은 연결된다. 인간은 식물을 먹기 위해 키우고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계의 일원이 된다. 키우는 것과 자라나는 것, 만드는 인간과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결국 한 몸이다. 그건 방울토마토의 초과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는 확실히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은 식물이 가진 생동성, 그 생장과 번식 심지어 짓무르는 죽음으로 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은 식물의 포식자이지만 홀로 행위자이지만은 않아서 키우고, 먹고, 배설하지만, 자라거나 짓무르고 확장하고 팽창하는 힘은 식물 쪽이 더 세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싱그럽지만 매서운 사실을 껴안고 있는 셈이다. 이 식물성이 없을 때 인간의 배설은 오염이다. 인간은 잘 먹고 좋은 배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돌보아야 하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든지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시집은 변화하는 생태와 인간의 연결을 전혀 새로운 감각, 그 독자성으로 써나간다, 확장해간다. 사물과 인간사가 타자, 난입자에 의해 계속 바뀌어 간다는 서동욱의 「시론」은 함께 읽은 시들을 관통하는 시간과 물질, 인간의 사유에 대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바꿔 쓰기가 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시에는 애초 중심과 경계를 나누고 의미와 그 속에 머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계라는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세계의 바깥 역시 없다는 통찰은 지금 우리의 시가 읽어내는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음을, 바뀐 그것 역시 누군가의, 무엇의 영구적인 자리가 아님을 적시하며 그간의 위계와 같은 폭력을 지워나가는 ‘시’라는 언어를 보다 부드럽게 연마하는 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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