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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자음과모음 | 2024년 가을호(제62호)

나를 구하라 : 이서아, 『어린 심장 훈련』

심진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1999년 <실천문학> 여름호로 등단. 평론집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떠도는 목소리들>, <여성과 문학의 탄생>, <더러운 페미니즘>이 있다. 연구서로는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공저로는 <명작은 시대다>, 번역서로는 <근대성의 젠더>가 있다. 제55회 현대문학상 비평부문 수상. 현재 서강대학교 대우교수.

  예민하고 자의식이 강한 아이. 그래서 “보통의 아이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15쪽)는 아이는 어떻게 자신의 고유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서아의 소설집 『어린 심장 훈련』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은 지독한 외로움과 정신적 혼란으로 세상과 불화하는 “어린 심장”이 어떤 “훈련”을 거쳐 비로소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를, 그 변화와 성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때 ‘훈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어떤 말도 안 되는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불시에 치밀어드는” 이상한 “연상작용”(15쪽) 때문에 “미친 아이” 취급을 받던 ‘나’가 자기 안에서 범람하는 낯선 이미지들과 텅 빈 기표들에 자기만의 질서와 규칙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자기만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뜻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바로 그런 훈련 과정에 대한 기록이자 훈련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를 위해서는 “훈련사와 조력자”(96쪽)가 필수다. 먼저 「검은 말」의 터프한 고모를 보자.

  「검은 말」에서 ‘검은 말’은 ‘나’가 미국에 있는 고모의 저택에서 우연히 발견한 총, 그리고 고모의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이 결합된 이미지다. 그것은 ‘나’에게는 지적이면서 강인한 고모를 연상시킨다. 고모는 ‘나’에게 두 가지 훈련을 시키는데, 하나는 현실적응 훈련이고 다른 하나는 글쓰기 훈련이다. 우선 고모는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만의 망상체계에 사로잡힌 ‘나’에게 현실체계 속의 규율과 규칙을 가르친다. 예컨대 “공항에서 달리면 안 돼. 그런 곳에서는 절대 루트를 이탈하거나 제멋대로 달리면 안 돼. 얌전히 비행기를 타야 해. 그런 곳에서는”(49)과 같은 가르침. 그러나 고모의 가르침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에피소드 중 하나인 고모의 소년원 이야기는, 허구와 실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답 없는 진실 게임이자 현실의 궤도에서 이탈한(혹은 이탈하려는) 아이들을 현실로 견인하는 퀘스트(quest)이자 퀘스쳔(question)이다. 예컨대 소년원 방 도면 속 “검은 줄”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이유를 적으라는 식의 고모의 질문은 ‘나’로 하여금 ‘검은 줄’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에 대해 기록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나’는 고모에게 ‘검은 줄의 비밀을 밝히라’는 임무를 받고 글쓰기라는 길고 험난한 여정에 오른다. 그리하여 “나는 잔뜩 흥분한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에 흠뻑 매료된 채 그녀에게 보낼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녀가 신호총처럼 나를 출발시켰고, 나는 썼다. 그것이 내 최초의 이야기였다.”(56쪽) 문제 많은 아이는 그렇게 고모의 기이한, 광기어린 조련을 시작으로 글쓰기 훈련에 돌입한다.

  고모가 ‘나’의 지적 호기심을 일깨우고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면, 「초록 땅의 수혜자들」의 ‘선영 선생님’이나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이하 「푸른 생」)의 J는 ‘나’의 정서적 허기를 충족시켜주고 ‘나’의 글쓰기를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여자 어른들이다. 특히 ‘떠돌이 여자들이 머무는 쉼터’에서 만난 J는, ‘나’가 쉼터를 떠난 뒤에도 ‘나’에게 “글 열심히 써. 따뜻하고 좋은 글을 써야 한다. 예쁜 인생 살아라.”(328)고 답장을 보내기도 한다. ‘나’에 대한 따뜻한 걱정과 당부, 전적인 믿음과 기대가 담긴 이 문장들은, 어찌 보면 평범하고 소박한 얘기들에 불과하지만 생존 그 자체가 시급했던 그 당시의 ‘나’에게는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처절한 생의 규칙’으로 다가온다.

  이서아 소설에는 이렇듯 여자 조력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나’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에서 구해주거나 허무함과 공허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조차 “악착같이 놀자”(151쪽)며 ‘나’의 놀이 충동을 일깨워주기도 하고(「초록 땅의 수혜자들」), 심지어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화법 수업”을 해주고 설거지 훈련(「푸른 생」)을 시키기도 한다. 대체로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언니이거나 아줌마, 때로는 할머니)인 그들은 ‘나’에게 세상의 이치를 가르치고 심지어 “생존시키면서” ‘나’를 죽음에서 구해주는 “구조대원”이다. ‘나’가 이 언니들을 만난 후 “밧줄에 목매는 일을 더 이상 상상하지 않게”(152쪽)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서아 소설에서 ‘나’와 여자 조력자들 간의 관계가 아직은 여성 연대로 이어지거나 새로운 정치적 유대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현실에서의 “생존 규칙”1)을 획득하는 일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 여성과의 만남을 통해 이 거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력자만이 아니라 호시탐탐 ‘나’를 파괴하고 착취하는 빌런도 있다. 그중에 제일은 ‘예술가’다. 「초록 땅의 수혜자들」은 ‘나’가 어린 여자들을 성추행하면서 이를 사랑으로 오인하는 ‘공장장’과 자위(自慰)를 예술로 착각하는 ‘예술가’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특히 이들에 대한 복수는 게임적 설정을 통해 더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공장장은 ‘나’의 연속된 ‘headshot’에 혼비백산해서 도망가는 데 반해, 예술가는 트럭에 깔려 죽으면서도 끝까지 이를 예술로 위장하는 위선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나’는 한때 “비참하게 희롱당하고 매 맞다가 죽어버리는 여자들과 잔혹하게 훼손당하는 가축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154쪽)하는 “기묘한 책”이나 “이상한 실험영화”를 보고 “그런 게 예술인가 보다” 하면서 수긍해왔지만, “온몸 여기저기에 칼집이 난 여자 둘”의 알몸을 그린 예술가의 그림을 본 뒤 지난날 “이런 인간을 선생님이라고 불렀”(156쪽)던 자신을 원망한다.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의 투쟁을, 공포를, 두려움과 슬픔을, 그 모든 절박한 성장을 믹서로 갈아 넣어 통째로 들이마시며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우리의 생을 자위 도구로 전락시키려고, 이제야 겨우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여자애들의 앞길에 고약한 정액을 뿌리려고.(174쪽)


  여기서 예술가의 창조력이란 어린 여자들의 감정과 육체를 착취해서 간신히 얻은 것에 불과하며 예술가는 이를 오직 자신의 예술적 자위를 위해 소모한다. 친절하고 순진한 여린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착취된다. ‘나’는 예술가가 어린 여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술가를 트럭으로 깔아뭉개 “갈기갈기 찢긴 넝마”(175쪽)로 만들어 버리지만, 오히려 예술가는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과 죽음조차 “공개 처형-예술”(177쪽)이라는 기이한 타이틀을 붙여 자위적으로 찬양한다. 타자에 대한 공감적 상상력이 부재한 자기 위안적, 자기 과시적 예술을 “위대한 예술”이라고 착각하고, 예술의 자유를 핑계로 착취와 학대를 일삼는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어린 심장 훈련』이 재현의 윤리에 그토록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울러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 누구도 (창작 주체건, 창작 대상이건 간에)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창작의 제1 원리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악단」과 「빨간 캐리어」, 「사하라의 DMZ」,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은 바로 이러한 창작 윤리에 대한 작가적 메시지가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들이다.

  「악단」에서 ‘나’는 규율과 예절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억압하고 체벌하는 학교에 불을 지르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살인과 산불에 일조하게 된다. “사람이 죽는 이야기도, 산이 다치는 이야기도 원하지 않았”(129쪽)던 ‘나’는 죽어가는 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타자에 대한 죄의식과 책임 의식 없이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창작자의 창작 윤리에 대한 이러한 고민은 「빨간 캐리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뤄진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골프장’은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허구성의 논리가 작동되는 공간으로, ‘나’는 707호 캐디와 함께 평소 캐디들을 무시했던 젊은 커플을 골프공으로 만들어 익명의 캐디로 하여금 골프채를 휘두르게 한다. 그리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자세에 “예술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나’가 카지노에서 마주하게 된 진실은 예술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휘두른 골프채에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이다. 「사하라의 DMZ」는 어떤가. 이 소설은 골프장과 카지노를 벗어난 ‘나’가 상상이나 비유가 아닌 실재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타진하는 소설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미스테리한 여성 아말의 이야기를 비스마의 통역으로 전해 듣고 이를 자기 작품 「사하라의 DMZ」에 기록하지만, 몇 번의 번역 과정을 거쳐 자신에게 도달한 아말의 이야기가 자신의 소설에 의해 또 다시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한다. 창작과 비평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메타픽션적 설정을 통해 작가는 번역되고 각색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말을 찾는 일이야말로 작가의 역할이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나’가 “진짜 사막”(291쪽)으로 가기 위해 낙타에서 내려오는 소설의 결말은 창작 윤리에 대한 작가의 실천적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해서 ‘나’가 찾은 진짜 사막은 바로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에 등장하는 바닷속이다. 이 소설에서 ‘깊은 바닷속’은 “쑥대밭 같은 구조 속”, “비뚤어진 명령 아래에서 살아남”(334쪽)기 위해 분노하고 방황하던 ‘나’가 비로소 발견하게 된 푸른 세계이자, 창작의 주체는 물론 창작의 대상 모두를 구원하는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다. 현재 필리핀 리브어보드에서 다이빙을 준비하는 ‘나’는 물에 뛰어들기 전에 숙지해야 할 주의사항이 창작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오랜 방황 끝에 깨닫는다. 그렇게 최후까지 없어지지 않을 생의 규칙이자 최소한의 창작 규칙은 바로 다음과 같다.


당신이 뛰어들 곳이 충분히 깊고 안전한가?
충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는가?
혹시 누군가가 밑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가?
당신이 떨어짐으로써 누군가가 다칠 위험이 있는가? (350~351)


  분명한 것은 이제 ‘나’가 기존 예술의 재현 방식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자기만의 창작 논리와 윤리에 극도로 예민한 자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서아의 『어린 심장 훈련』은 분명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메타픽션적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허구와 실재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색, 소설가로서의 자의식, 자기 소설에 대한 메타적 비판의식, 그리고 글쓰기(소설쓰기) 자체를 자기 구조의 한 방식으로 의미화하는 전략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의 중심에 있는 것은 소설이 결코 현실의 문제에 대한 면책권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선지 작가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작가의 창작 윤리다. 즉 작가는 어떤 경우에도 창작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누군가를 함부로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푸른 생」의 결말에서 ‘나’가 조력자 A 없이 오직 “나의 상상”만으로 “안전하게” 출수에 성공하는 에피소드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착취하거나 모방하지 않는 재현의 가능성에 대한 문학적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인용 없이 ‘나의 상상’만으로 문학은 성립할 수 있나? 이제 문학의 최종 목적지는 ‘안전’이 된 걸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학은 “피난 안내도 그림”(314쪽)이나 ‘초록색 비상구’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런데 모두에게 상처 주지 않는, 결코 상처받지 않는 안전한 문학이란 과연 가능할까?

  • 1) 김보경, 「런, 리셋, 리플레이」, 『어린 심장 훈련』 해설, 문학과지성사, 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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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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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솔 인간을 다시 쓰는 이야기들

― 윤영광, 『칸트와 푸코―비판, 계몽, 주체의 재구성』, 북콤마, 2025.02. ― 윤은주,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 세창출판사, 2025.04. 윤영광의 『칸트와 푸코』는 저자의 박사논문을 근거로 하여 ‘비판·계몽·주체’라는 세 가지 개념이 칸트와 푸코의 철학 ‘사이’에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양상을 연구한 논문 모음집이다. 특히 윤영광은 현상 자체만 보는 것을 지양하는 칸트적 의미의 초월적 위치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는 ‘초월적 읽기’의 자세를 연구의 기본 토대로 삼고 있다. 이는 “지금 현실화되어 있는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의 잠재적 상태를 상상하고 구성할 수 있는 것, 그러하여 텍스트를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 액체화되어 있거나 언제나 이미 해체된 것으로 볼 줄 아는 것”으로 봄으로써 “텍스트의 잠재적 차원과 관계하여 새로움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실천’”1)을 행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칸트적 주체의 (재)구성」은 칸트가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할 때 그의 비판철학에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관계 혹은 배치에 따라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멀리까지 그중에서도 「칸트적 주체의 (재)구성」은 칸트가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할 때 그의 비판철학에서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관계 혹은 배치에 따라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다. 칸트 철학이 ‘종합(Synthese)’을 중심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이미 주체가 반드시 종합을 거쳐야 할 정도로 이질적인 능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이루는 고유한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질적이고 (아직) 비인간적인 능력들의 맞붙고 흩어짐만이 인간을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처럼 본성상 다른, 고유하게 인간적이지 않은 요소들의 공존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비인간적인 요소를 고려함으로써만, 그러한 요소들 간에 관계라는 관점에서만 대답될 수 있다. 칸트에게 ‘인간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 같은 인간학에서 인간성은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러한 개방성은 주체 내부에서 능력들의 불일치라는 형태로 경험된다. (21쪽) 윤영광은 이 지점에서 ‘인간’이라는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칸트의 동일성의 주체 내부에 이미 비동일적 운동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짚어내는 방식으로 그는 “유한성과 무한성이 불일치의 방식으로 공존하는 지점”인 한계를 “인간의 자리”(46쪽)로 지정한다. 안도 바깥도 아니고, 안인 동시에 바깥인 이 ‘한계’는 정확히 지젝이 말하는 칸트의 예지계와 현상계 ‘사이’1)와 동일한 영역이다. 또한 이곳은 분명한 의미에 붙잡히지 않는 기이한 괴물성들이 도사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절대적 이질성을 사고하는 이성의 사용자인 인간은 언제나 틈이 있는 존재로 자신을 (재)구성해내는 운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가 필요 없는 사회』에서 윤은주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치적 주체의 행위인 공론장에서의 ‘저항’이 힘을 잃은 현실을 돌아보며,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위인 ‘생각함’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생각함을 본질적 특성으로 갖는 인간은, 세계를 지켜보고 생각한 뒤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세계를 끊임없이 형성해 나간다. 다소 쉬운 내용을 담은 이 책에서 윤은주가 가장 강조하는 바는, 그러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치적 행위가 가능한 곳”이 형성되었을 때 도래할 “아렌트의 정치가 필요 없는 사회”(153쪽)를 우리는 꿈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염두에 둘 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재고하고 인간의 힘과 역량을 다시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최근의 문학적 상상력들이 더없이 반갑게 느껴진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는 작가들은 특히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다시 보는 경향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그런데 이때의 신들은 보편적 의미에서처럼 초월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없이는 현실화할 수 없기에 인간을 욕망하고,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이 닮아 있기도 하다.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잉여성을 내부에 지닌 신들의 허물어짐은, 인간이 자신을 부수고 능력과 요소를 다른 패턴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해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제 공백과 무를 내부로 끌어안은 신과 인간이 거듭 쇄신하는 과정을 살펴볼 차례다. 신과 인간의 배후, 운동하는 생명력 신종원, 『불새』, 소전서가, 2025. 신종원의 『불새』는 우주를 구성하는 4원소를 주제로 한 그의 장편소설 기획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물’과 ‘죽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갔던 『습지 장례법』(문학과지성사, 2022)과 달리 『불새』는 ‘불’과 ‘생명’을 소설의 골조로 삼는다. 『불새』는 쉽게 읽히지 않는 소설이다. 방대한 분량, 지역과 인종 그리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역사의 삽입, 다채로운 형식, 신과 인간을 아울러 터져 나오듯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무수한 목소리 등 읽는 이를 곤란하게 만들 법한 요건들이 이야기 속에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범박하게나마 정리해보자면, 소설은 ‘성배 도난’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한국인 신부 ‘바오로’는 모종의 이유로 신을 섬겨온 기존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사제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이 자신을 사제의 길로 이끌었던 ‘베드로’ 신부와 갈등을 겪는다. 늙은 신부는, 젊은 신부가 진품 성배를 들고서 예수의 성령을 현재에 체현하는 성체 성사를 행하는 모습을 꿈에서 목격했다고 말하며, ‘바오로’에게 스페인에 안치된 성배를 직접 보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런데 때맞춰 성배가 도난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소설은 사라진 성배의 행방을 추적하는 동시에 “진짜 성배”(27쪽)의 신성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끈질기게 탐문한다. 이러한 과정은 앞서 질문했던 ‘신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수천 년에 걸쳐 성배를 빼앗고 빼앗기며 적대를 형성하는 역사를 환원적으로 구성한다. 성배를 신의 영성과 동일시하여 그것을 거머쥐었을 때 신과 같은 권세와 영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종원은 바로 이러한 믿음 속에서 무엇이 배제되었는가를 질문한다. ‘바오로’의 회의는 삶이 신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신격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물음은 성당의 소년부 성가대원 ‘헬레나’의 죽음을 계기로 싹튼 것이다. ‘헬레나’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중절 수술을 고려하면서 자신에게 면담을 요청해 왔으나 생명을 중시하는 가톨릭의 교회법에 얽매여 적극적으로 조처하지 못했고, 이후 그가 자살한 데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와 가치의 최상단에는 언제나 인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기원을 은폐하고 신과 진리의 이름으로 살아야 할 이와 죽어 마땅한 자를 구분한다. 즉, 『불새』는 일종의 ‘믿음의 계보학’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습이 축조한 특정한 삶을 형성한 뒤, 이를 강조하고 반복해 온 인간의 역사야말로 신앙이 지닌 민낯임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성배가 단순한 그릇 또는 컵 이상의 물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 역시 이러한 인식과 동궤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도 신종원은 형이상을 전적으로 몰아내고 형이하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신적이고 영성을 지닌 존재들을 거부하고 현실에 살아 숨 쉬는 인간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 소설은 신성의 의미를 재설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신종원의 새로운 믿음에 의하면 권능은 지상을 초월한 하늘나라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가라앉고, 죽은 뒤 다시 일어서고 날아오르기를 반복하는 생명 자체에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삶은 신의 의도에 따라 정해져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삶은 우연과 영원 속”, “반복과 무한”2)(395쪽)의 틈에서 끝을 모르고 피어오른다. 그러므로 그칠 줄 모르고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생명력만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무언가다. 그리고 이 역동성은 반드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를 필요로 한다. 신성은 육신이라는 그릇에 소복이 부어져야만 현실에서 발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은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을 통해서만 현현할 수 있는 것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중간 지대에서 신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다. 소설적 상상력에 의해 신 ‘야훼’에게 영광을 안겨준 존재로 설정된 또 다른 신은 ‘헬레나’와의 독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무에 복무하라 다그친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삶이라는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다. 별들은 항행하고, 돌들은 굴러떨어지며, 새들은 노래하고, 인간은 살 것이다. 인간은 싸울 것이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자기 앞의 혼돈을 거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나와 빛 쪽으로 걸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은 움직임이고, 생명은 항력이며, 생명은 노래하고, 생명은 날아오른다. 그러니 아이야, 어서 자리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삶을 개시하라. (177쪽) 신의 말에 따르면 삶은 그 자체로 목적적이다. 생명에 대한 정언명령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라’가 아니라 그저 ‘살아라’라는 문장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는 ‘헬레나’에게 신은 곡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네가 죽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171-172쪽) 신이 음성으로 현현한다면, 그것을 세계 내에 역사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육체와 영이 결합한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뿐이다. 신의 음성이 “명령이 아니라 요청”(369쪽)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지점에서 신과 인간이 포개어진다. ‘바오로’가 사제직에서 물러나고자 한 이유가 신을 등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더라도, 당신을 섬길 방법을 찾고 말겠”(21쪽)다는 다짐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신과 인간은 타오르는 빛을 삼키고 자기 자신을 무너트림으로써 기존의 세계를 쇄신할 수 있는 생명력을 서로 공유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의 위치는 일방적으로 믿는 자에서 역동적으로 행하는 자로 옮겨간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바오로’는 늙은 신부의 꿈처럼 성배를 쥔 채 ‘헬레나’의 영을 기꺼이 믿음의 성당 안으로 포용하여 새로운 성찬례를 거행한다. “죽은 바오로의 몸 안에서 또 다른 바오로가 일어”설 때, “이 바오로는 한낱 일꾼이나 몸종, 대리자 따위가 아”(372-383쪽)닌 한 세계의 주인이자 일종의 신으로 좌정한다. 신종원의 소설은 신과 인간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 가는 방식으로 둘을 겹쳐둔다. 둘은 서로 믿음과 행위의 근원이자 배후가 되어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신성의 다른 이름은 곧 생명력이고, 이는 영과 육체가 분리되었다가 결합하기를 반복하는 운동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성은 현실에 존재하는 균열을 가시화하고 틈을 더욱 크게 벌려 놓는다. 신과 인간의 사이, 괴수가 되는 꿈 김보나, 『나의 모험 만화』, 문학과지성사, 2025. 김보나의 첫 시집 『나의 모험 만화』에는 신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신들은 어딘가 엉성한 구석이 있고, 사람들은 난데없이 기이하게 돌변한다. 물놀이를 즐기는 작고 어린 신(「휴무」), 견디고, 갇히고, 훼손되는 신(「물에 빠지는 이 모든」), 인간과 내기를 하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에 가호를 내리는 신(「여기 지팡이 있어요」)과 같은 형상은 진리의 보증자요, 근엄한 실체라는 보편적인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마찬가지로 끓는 유황천에서 다시 태어나고(「탕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 방사선에 노출된 후 괴수로 변한 인간(「춘일광상(春日狂想)」, 「「미친 봄날 생각」」)들 역시 범상치 않다. 그래서 김보나의 시에 등장하는 존재들을 신과 인간으로 명료히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신과 인간 사이, 그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다. 우리가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말이나 글로 전해 내려온 것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내가 가진 단 하나뿐인 것 중에 아무것도 바치지 않아서 신은 화가 난 것일”지도(「차이나타운」) 모른다고 추측하고, 불운 앞에서는 “불경을 저질러서 이렇게 된 걸까?”(「천도복숭아 나올 무렵」)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보는 신을 이루는 기존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금기를 세울 수 있는 초월적 권능에 의해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내릴 수 있는 자라는 해묵은 설정 말이다. 하지만 시인의 관심은 만지거나 닿을 수 없는 추상적인 신적 가치보다 함께 맞붙어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를 향해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에 집중한다. 불변하는 가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라고 행동하는 인간의 간절함으로부터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신이 보증하기에 마땅히 행할 만한 ‘어떤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모든 사랑’이 진정한 신성의 자리를 대체한다. 시인이 시집 속에서 신들이 직접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대신 그것을 목격한 인간이 대신 이야기하도록 설정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시력을 포기했으니까 박쥐는 어둠을 헤쳐나갈 초음파를 얻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어둠 속을 같이 걷고 싶은 사람에겐 이렇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이 진화하자 겨우 날개가 달린다고 해서 천사가 되지는 못할 테지만 양팔과 날개를 교환할 기회가 생긴다면 두 팔을 남겨 사람을 안아보자 검은 날개를 달고도 악마가 될 수 없다면 사람과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하자 산에서는 한 사람이 곁으로 다가서면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다 포개지는 그림자의 윤곽 무언가가 강림하는 저녁이다 ― 「윙스팬(Wingspan)」 중에서 인용한 시에서 보편적 의미를 지닌 신성은 두 차례 부정된다. 시인이 창조가 아닌 진화를 꿈꿀 때, 천사와 악마라는 선악의 대립 구도를 가뿐히 벗어날 때가 그에 상응한다. “사랑의 전문가가 아니면서/ 한 사람의 손을 잡기도 했”던 시인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위의 두 가지 방향을 선택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 한 사람이 타자와 함께 포개지는 순간 “무언가가 강림”한다. 다른 이와 더불어 계속해서 삶을 이어 나가는 생동하는 인간만이 세계의 진정한 근원이 될 수 있기에, 인간이 행하는 사랑이 신성의 진정한 배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집을 자세히 살펴본 이라면 시인에게 신과 인간은 대립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신과 인간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틈, 사이에 머무른다는 공통점으로 한데 묶인다. 시인은 이 확정 불가능한 미결정의 상태야말로 곧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을 단연한 태도로 전달한다. 이러한 전언은 「물에 빠지는 이 모든」에 잘 담겨 있다. 시의 서두에서 “신년”이 어디서 오는지를 묻던 화자는 미래를 알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기도할 것이 없었다”고 딱 잘라 말한다. 뒤이어 기도실에 자리한 성상(聖像)의 사진을 찍던 화자가 새롭게 덧붙이는 신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신의 일은 고개 숙인 시선을 견디는 것. 나는 파인더에 신의 얼굴을 가두었다. 빛에 잠기면 훼손되는 신성의 표정.” 시인에게 신은 기도와 믿음을 들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욕망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버텨야 하고, 쉽게 손상되기도 한다. 고정되지 않은 채 유동하는 신이라는 별다른 존재 양태는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는 시인의 인간관과 연결된다. 화자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상에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담기고 어리는 모든 형상을 일그러트리고, 묵은때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행위가 바로 설거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진 유황은 나를 태울 만큼 충분할까” 자문하던 화자는, 물이 들어찬 설거지통의 표면에 비추어진 자신의 “물에 갇히는 얼굴”을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한다. 이 지점에서 파인더에 갇혔던 신의 얼굴과 화자의 얼굴이 겹친다. 온전히 재현하거나 반사될 수 없기에 불안정한 존재들로 밝혀진 인간과 신은, 그렇게 흐릿해진 만큼 존재론적 층위에서 같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는 오직 이 땅에 발 딛고 살아 숨 쉬는 육체를 지닌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과 함께 시집 곳곳에는 믿고 바라기보다 행하고 나아가는 이들의 행보가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티칸에서 온 사람」의 화자는 어디에 뿌려도 효험이 분명하다는 “바티칸에서 온 진짜배기” 성수보다는, 성수를 사려는 “아무 데나 축복이 필요한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다. 많은 면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비행운 인간”이지만 화자는 성수를 “마실 수도 피할 수도 있”는 힘을 지닌 인간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말한다. “나는 나아간다. 소음을 끌고 달리는 열차를 나서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다”고. 「슈베르트 방은 말한다」 역시 비슷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도 시인의 관심은 인간을 향해 있다. 조금 더 명료히 말하자면 시인은 행위하고 변화하는 인간을 눈여겨본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인간의 생이 몇 장짜리 악보이고/ 하나의 곡을 반복하는 것이 연습이라면/ 하나라는 고통을 되풀이하는 인간은 어떤 악기인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화자가 질문하는 이유는 “손 안에 흰 달걀을 쥐고” 살아가면서 같은 고통을 반복하는 인간 중에는 “그것을 지키려는 자도, 깨뜨릴 각오로 두드리는 자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두 종류의 인간상 중 “마지막까지 노른자로 손을 적시는” 이를 더욱 궁금해한다. “흰 달걀”처럼 주어진 것을 본래 모습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믿음은 살아가면서 마땅히 수호해야 할 순결하고 깨끗한 실체를 상정하고 있다. 신이 표상하는 법과 질서 역시 그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시인에게 불변하는 가치란 없다. 우리는 이미 여러 시편을 통해 신은 완전하지 않고, 신성은 변형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심지어 신의 권세는 인간에게 의지해야만 발휘된다. 그래서 인간은 “기도문을 발명”(「바티칸에서 온 사람」)하고, 첫 제의를 앞둔 “수습 사제는 기억에 의지하지 않을 때까지 연습한다”(「수련 일지」). 이처럼 “어떤 이의 목표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잊는” 데 있다. 인간은 주어진 섭리를 체득하고 체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같은 고통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삶의 양식을 수련한 뒤, 그것을 기꺼이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또 다른 삶을 불러들인다. 김보나의 시가 유독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집의 이곳저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시인은 죽은 이들을 다시 세계로 불러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과 인간의 사이처럼,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에 서 있다. 모두가 “한 번쯤 죽었다 돌아온 사람”(「장수민해독센터」)처럼 보인다. 기억해? 전학 간 너의 긴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나를 너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한 나를 명동성당 뒤편에 딸린 여고에서 너는 만화부였고 나는 클래식 기타부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좋아한단 거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 십자가 형태의 길에서 성호를 긋지 어른이 된 네가 여기 있다면 너를 납치해 걸어갈 텐데 기자들과 카메라가 화동처럼 뒤따르는 행진이야 스물셋에 처음 간 퀴어 퍼레이드에서처럼 일생에 단 한 번 잊을 수 없는 고백을 듣고 싶었지만 나는 늘 먼저 고백하는 사람으로 자랐어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을 병상에 모아놓고 안녕 나 암이래 말하고 싶었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어 성당에 못 들어간다면 사각사각 창밖에서라도 미사를 구경하고 싶네 고딕 첨탑에 기대 낮잠 자고 싶네 하다못해 절 마당을 비로 쓸면서 발등부터 목덜미까지 누군가 필사한 경전의 글자로 뒤덮이고 싶네 마취총을 맞고 수술대에 올라도 감당하기 힘든 마음처럼 몸이 불어나도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어 작년에 꽃구경을 한 벚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기다릴게 만날 수 없는 사람 ― 「「미친 봄날 생각」」 부분 그냥 인간이 아니라, 죽었다 다시 돌아온 인간이 더욱 각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이 기존의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다른 존재가 되길 욕망하는 건 결국 사랑하기 위해서다.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학창 시절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친구의 퀴어한 마음을 모르는 척해야만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뒤늦은 답장을 쓰고 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에 답할 수 없었던 건 “십자가 형태의 길” 위에서 살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고백”이 당도하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마땅하다고 선별한 것들만을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암을 겪은 뒤 방사선에 노출된 화자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괴수”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규정된 의미에서의 사람이 그동안의 마음을 가로막아왔다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시인의 꿈이 “괴수 김보나가 되는 것”이고, “힘이 센 짐승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손을 흔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과거의 자신에게/ 화약이 터지는 광경을/ 불꽃놀이라고 부르는 여름”(「춘일광상」)처럼 기존의 자신과는 다른 인간, 다른 존재가 되겠다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은 시인에게 “키 작은 주인공이/ 딱 한번 용기를” 내는 만화를 끊임없이 그리게 만든다. 시인의 “주인공은 그저/ 다들 지나치는 사육장의 토끼를/ 혼자 돌보는 사람”이다. 영웅의 “성장소설”은 괴물과 타자를 물리치고 독단적인 인간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모험의 끝은 친구를 만드는 일”로 그 의미를 바꾼다.(「나의 모험 만화」) 신과 인간, 인간과 괴수, 인간과 또 다른 의미의 인간 사이를 부유하는 김보나의 시는 시인이 지금 여기의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해 나갈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모험 만화」의 마지막 연은 “(계속)”으로 닫히지 않은 끝을 맺는다. 인간만의 현실, 다가서는 힘 김동식·서수진·예소연·윤치규·이은규,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문학동네, 2025.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2025년 단편소설 앤솔러지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는 올해도 역시 현실 속 노동하고 분투하는 인간 군상을 적실히 보여준다. 여덟 명의 작가들은 뛰어난 소설가적 기량과 더불어 회사원, 다큐멘터리 PD,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전직 주물공장 근로자라는 다양한 노동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 변화를 거듭하며 새로운 신성을 일구는 주체로서 인간을 다시 보려는 이 글의 마지막을 노동하는 인간의 현실을 묘파하는 소설집을 추천하며 닫는 이유는,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소설 쓰기를 통해 무엇보다도 인간의 힘을 헤아리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나 투기자본주의와 같은 용어의 설정만으로는 현재의 삶에서 감지되는 위태로움과 불안을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정제된 개념과 달리, 일상에서 곤궁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경험은 다만 세찬 감각만이 쏟아지듯 엉겨 붙는 혼란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원인과 대책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뚫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문학에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힘 있는 문학이 줄어든 것 아닌가 의심”3)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현실에 눈 돌리지 않겠다는 굳세고 치열한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권하겠다는 소설들에 우리가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획에 걸맞게 소설집에는 현재 노동시장의 상황의 실정을 반영한 다양한 직업들이 등장한다. “게임 머니 팔아서 쌀 사 먹는다”는 밈으로부터 생겨나 “게임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 된 “쌀먹” 혹은 “쌀먹충”(김동식, 「쌀먹: 키보드 농사꾼」, 13쪽)인 ‘김남우’, 호주의 대기업 슈퍼마켓에서 한국인이라는 아시아인의 정체성으로도 균등한 승진의 기회를 받을 수 있으리라 꿈꿨으나 그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얼굴”(서수진, 「올바른 크리스마스」, 72쪽)로만 남은 ‘주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가름이 친구 관계라는 사적영역까지 침투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선미’와 ‘지선’(윤치규, 「일괄 비일괄」), 방송을 위해 타인의 내밀한 면에까지 무감하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는 현실이 “진정성”으로 포장되는 것을 목격하는 시사교양 PD(이은규, 「기획은 좋으나」, 136쪽),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백화점 지하 삼층에서 직원들을 위해 마사지를 제공해야 하는 시각장애인 헬스 키퍼(조승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작가의 꿈을 접고 일본 기업에서 데이터를 관리하고 적용하여 AI의 정보력을 체계화하는 일을 했을 뿐이지만 기술력을 이용하여 저지르는 폭력과 부조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부진’(황모과, 「둘이라면 유니온」)등. 이들은 주로 플랫폼 자본주의 내에서 일관적인 노동 기회를 보장받을 수 없고, 경쟁력이 증가한 탓에 합당한 보수나 대우를 당연하게 감내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가들은 이들의 힘겨운 처지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위태로운 세계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운이나 질서가 아니라 재난의 시대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생활력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사이트를 경유하여 할머니들의 돌봄 노동자라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젊은 여성 청년 ‘희지’를 그린 예소연의 「아무 사이」는 상시화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일상을 다르게 반복할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 작가는 노동의 지속 가능 여부에만 매달리게 된 나머지 인간적인 삶이 억눌리게 된 실상에서도 나지막한 희망을 본다. 혼자 지내는 할머니들의 집으로 찾아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희지’는 삼 년 만에 ‘시터닷컴’에서 일산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시급을 받는 ‘베스트 시터’가 된 플랫폼 노동자다. 할머니를 돌보는 시니어 시터 일은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게 항상 무서웠”(88쪽)기에 퇴사를 결정했던 ‘희지’가 버티는 삶이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고 계획하고 운용하는 식”의 삶을 살기 위해 찾은 “그나마 정을 붙이고 해나갈 수 있는 일”(89쪽)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꽤 많은 할머니가 있고 나는 그 모든 할머니를 빠짐없이 사랑한다”(79쪽)는 자부와는 별개로 ‘희지’는 자신이 맡은 노동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지에 대해 자신하지 못한다. 플랫폼 회사의 교육장에서 ‘베스트 시터’로서 “돌봄 노동이 필요한 시대에 누구보다도 시터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업무적 책임을 인지해야” 하며 “책임의 범위는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거라고”(89쪽) 연설하면서도 자기의 말을 거짓말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희지’에게 이 일은 임금 노동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직장에서 모멸감을 반복적으로 느끼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겨 사직서를 냈음에도 남들처럼 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아주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한 걸까?”(88-89쪽)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기를 거쳐 안착하게 된 소중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희지’에게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사회에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95쪽)에서 존재 의미를 느끼는 일이다. 그러나 회사 차원에서 플랫폼 노동자를 보호하고 지원하기보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도록 종용하는 사회에서 ‘희지’가 선 자리는 더없이 위태롭다. 수많은 경쟁자와 언제 끊길지 모르는 고용인의 유연하고도 아슬한 연계는 여타의 노동보다 더욱 관계적인 속성을 지닌 돌봄 노동을 수행하면서도 부당한 처지를 감내하도록 만든다. 아무리 “돈을 주고받는 관계”(94쪽)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계’가 아닌가. 한겨울에도 찬물만 쓰게 하고, 매일 얼굴을 보고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지만 휴대폰에는 ‘아줌마’라고 저장해도 되는 사람. “그저 고용된 사람일 뿐”(97쪽)인 위치. ‘희지’의 자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돌보는 할머니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참고 견뎌온 감정은 매일 두부를 사는 ‘두부 할머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느 날 터져버린다. 할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질 수도 있다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희지’는 보호자인 며느리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할머니가 갔을 법한 모든 곳을 찾아다닌다. 온 동네를 헤맨 뒤에도 홀로 돌아온 할머니의 집에서 두부를 먹던 중 며느리의 전화를 받자 ‘희지’는 그만 할머니가 집에 있다고 유려하게 거짓말을 하고 만다. 그러나 사실 할머니는 그날 며느리와 함께 있었고, 침묵하는 ‘희지’에게 그녀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101쪽)기에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할머니, 전화번호 아직 못 외웠죠?” “그렇지.” “내일 또 외우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가 별다른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나름대로 할머니와 나 사이에 어떤 의의를 두고 싶었다. 함께 한 일을 만들면 결국은 같이 뭔가를 하게 된다는 그 단순한 흐름이 우리 사이에 지속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문득 할머니의 휴대폰에 내 이름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전화번호부 앱에 들어가보니 ‘희지’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마치 백지처럼.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담백한 나의 이름, 희지. 나는 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이 아주 많이 떠올랐다. (103쪽) 이때 ‘희지’가 내리는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렇지 않게 다음날 두부 할머니를 만나고, 교육장에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미래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전부”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102쪽)을 깨달은 ‘희지’는 할머니의 휴대폰으로 며느리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전화번호를 외우기로 했던 이전의 약속을 재차 확인한다. 할머니의 휴대폰에 저장된 자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을 떠올리는 ‘희지’의 모습을 통해 견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할머니들을 향한 애정을 고백할 미래의 어떤 날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자본이 관계를 압도하는 공식에 굴복하라고 사회가 강요할 때 인간은 기꺼이, 대체로, 자주 굴복하는 존재지만 힘겹더라도 새로운 의의를 만들어 나갈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힘을 믿고 상상하며 쓰는 작품들이 있는 한 인간은 유구히 변화해나갈 것이다. 1)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7, 214-219쪽 참조. 2) 원문에 따른 강조. 3) 장강명,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252쪽.

계간 자음과모음 김다솔 신종원김보나윤영광장강명월급사실주의동인 2025
성현아 필화(筆禍)와 필화(筆花)의 역사 ― 『한국 현대 필화사』(소명출판, 2024)

1.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국가폭력으로서의 필화 2024년의 겨울밤, 반국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태는 잡은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해 우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비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미는 국가폭력의 메커니즘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국가세력’이라는 범주는 실체 없고 추상적이기에 누구든 반국가활동에 연루되게 만들 수 있다. 이 만능 단어 앞에서 우리는 국가라기보다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권 세력에 반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북 좌파’,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던 익숙한 책임 전가 방식을 환기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전에 발간된 책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일찍이 임헌영 작가가 “반공독재 체제로서의 국가형성의 골조”가 “미군정 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쳐”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177쪽)로 이어졌 왔음을 짚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한 국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할 때, 군인이 자국민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광장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처단”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첫 피난지인 대전에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어 적에게 협력한 사람을 3심이 아닌 “1심 단독 종심終審”(384쪽)으로 처벌하도록 하여 “모든 과오를 부역자들에게 전가해서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를 심화시킬 수 있는”(408쪽) 기회를 잡았던 맥락과도 유사하다. 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체포조를 가동하여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등을 구금하려 했던 정황을 살피면, 계엄령 선포 이전의 행위에도 해당 포고령을 소급하여 적용하려던 악의를 확인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과 제주 4·3을 다룬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에 한국의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 출판 검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한강 작가가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그의 책 『채식주의자』가 유해 도서로 지정되어 폐기 처리되었던 것과 아주 다르지 않다.1) 출판 검열은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아래에서만 행해지는 특수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우리 곁에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 『한국 현대 필화사 1』의 권두에서 임헌영 작가는 ‘필화(筆禍)’의 개념을 먼저 소개한다. 필화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자유롭게 나타내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이나 집단에 국가가 가하는 제재와 압력, 형벌 등에 대한 총칭”(4쪽)이다. 그는, 필화는 권력을 지닌 세력이 행사하는 명백한 폭력이므로 허위나 날조를 제재하는 벌칙과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말한다. 문학뿐 아니라 영화, 공연, 정치, 언론 등에서도 이와 같은 탄압은 일어나기 때문에 필화는 통념과는 다르게 문학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임헌영은 문학을 비롯하여 영화나 공연, 정치나 언론 전반에서 일어났던 필화사건을 두루 다루고 있다. 더불어 더욱 다양한 소통 매체들이 생겨난 현대에서의 필화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수단으로 인간이 행사하는 모든 의사소통에 대한 직간접적인 제재 일체”(5쪽)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필화의 핵심은 무력을 사용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탄압했느냐의 문제다. 서문에서 그는, 반나치적이라고 판정받은 인사들의 저작물을 태웠던 1933년의 분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유태인 미술가 미하 울만이 설치한 작품 ‘도서관’의 안내판 문구를 인용한다. “그것은 다만 서곡이었다. 책을 태운 자들은 결국에는 사람도 태울 것이다.”라는 하이네의 비극 『알만조르』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로 역사는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입증해 주었다. 임헌영은 저작물을 처형시키는 것이 작가를 간접 살인하는 일과 같다고 일갈한다. 필화란 글만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와 그 책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 모두를 감시하고 처형함으로써 결국엔 그 안에 깃든 사상까지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베카 크누스가 창안한 “도서 대학살Libricide이란 술어”(9쪽)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반하여 필화 또한 국가폭력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로 인한 인명 사상 사건을 지칭하는 국가폭력에 필화를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그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논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헬렌 페인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범주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절대적 악의 화신으로 분류되거나 국가의 신화에 의해 적으로 분류된 집단을 집단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살ideological genocide”(21쪽)이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 활동에 가하는 일체의 금지, 제약, 학대, 억압 등”(21쪽)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필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필화사건에 휘말릴 때 작가들은 구금되거나 감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임헌영을 따라 필화를 국가폭력의 일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필화사건을 더욱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대 필화사』를 읽으며 우리 삶에 필화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지 체감하게 된다. 2. 탄압받는 사람과 삶, 말살되는 글과 영혼 임헌영은 1945년 8·15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필화사건을 배치하고 탄압의 주체에 따라 부를 나누어 그 양상을 살핀다. 제1권의 경우 해방에서 이승만 집권기까지의 필화를 다루고 있으며,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제2권은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의 필화를, 제3권은 전두환 쿠데타 이후부터 윤석열 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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