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월간 릿터 2024년 4-5월호(제47호)
이 거친 세상, 부서지기 전에 부숴버려 ― 『파쇄』 『파과』
‘파쇄(破碎)’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동사인 ‘깨어져 부스러지다’와 타동사인 ‘깨뜨려 부수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깨지면서 깨뜨릴 수 있을까? 혹은 부서지면서 부숴버릴 수 있을까?
구병모의 소설 『파쇄』(위즈덤하우스, 2023)는 흥미롭게도 깨져야만 깨뜨릴 수 있는, 부서져야만 부숴버릴 수 있는 세상 이치와 그 역설의 논리를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건조하고 냉정하게 그려낸다. 소설에는 킬러가 되기 위해 극한 훈련을 하고 있는 ‘그’와 ‘그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경로로 킬러가 되기 위한 산장 훈련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과감하게 생략한 채, 오직 죽음을 담보로 한 ‘그’와 ‘그녀’의 벼랑 끝 훈련 장면만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소설은 그렇게 훈련인지 실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극한의 상황과 매번 온몸으로 그 상황을 돌파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그녀’의 미션 임파서블로 채워진다. 그렇게 『파쇄』는 공격과 방어, 다시 공격으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육탄전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극한의 대결 구도와 팽팽한 긴장감을 소설 초반부터 끝까지 이어간다. 한국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과호흡의 소설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밑도 끝도 없는 하드보일드 트레이닝 소설이다. 그런 이 소설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소설이 『파과』(2013)의 ‘외전’이라는 작가의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파과』는 65세 ‘할머니 킬러’인 ‘조각’이 살인기계로서의 효용가치가 다하는 순간 맞닥뜨린 생애 마지막 혈투에 대해 다룬 소설이다. ‘외전’(外傳, supplementary story)은 일종의 파생 작품으로, 본편에서 빠진 부분을 채워주는, 원작에 대한 보충 설명 같은 성격을 갖는다. 과연 이 소설은 작가의 전작 『파과』의 주인공인 늙은 여성 킬러 ‘조각’이 본격적인 살인기계가 되기 이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등장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사건의 배경은 삭제하고 있어 전작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거꾸로 독자는 『파쇄』에서는 알 수 없는 ‘그’(‘류’)와 ‘그녀’(‘조각’)의 유사 가족 관계, 그리고 이들이 속한 조직이 ‘방역업’으로 불리는 살인 용역 업체라는 사실 등을 전작인 『파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파과』의 프리퀄(prequel)인가? 흔히 프리퀄은 원작 캐릭터의 과거 모습이나 오리지널 스토리의 전사(前史), 즉 이전 이야기를 통해 본래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다. 분명 『파쇄』는 시간 흐름상 『파과』의 이전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사적 진공 상태에 가까운 장면 연출로 인해 이 소설이 전작에서 더 나아간 이야기와 캐릭터를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파쇄』가 『파과』와 이어지는 지점은 무엇인가? 외전이나 프리퀄이라는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두 작품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깨뜨릴 파(破)’로 상징되는, 거칠고 험한 세계를 향한 어떤 태도, 즉 아무런 인간적 연민이나 우호적 감정도 없이 세계와 부딪혀 세계를 부숴버리겠다는 각오다. 아니면 그렇게 세계와 부딪히다가 내가 부서지거나. 『파쇄』가 『파과』의 핵심 모티프인 ‘파과(破果)’를 클로즈업해서 드라마틱하게 장면화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분명 이 ‘파’ 하기는 두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임은 분명하다. ‘파’의 방식과 방향은 다르지만 말이다. 일단 두 소설에 등장하는 ‘파과’의 현장을 좀더 디테일하게 살펴보자. 『파쇄』 먼저.
그녀는 두 개의 손 안에 한 세상을 움켜쥐고 부숴버린다. 세상은 불과 한 번의 총성으로 인해 짓무른 과일처럼 간단히 부서진다. 그 파열음이 벼락처럼 귓전을 갈기지만 그녀는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다. (......) 손안에 쥔-애당초 쥔 게 있었던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과일과 같은 세상은 씨앗조차 남지 않고, 과육은 진작 분해가 끝난 시신과 같이 흔적도 없다.(『파쇄』, 84~85쪽)
극한의 훈련을 끝낸 직후 갑자기 등장한 멧돼지로 인해 그가 심각한 부상을 당하자 그녀는 달려오는 멧돼지를 향해 총을 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죽인 멧돼지가 갑자기 ‘부서진 세상’으로 의미화되다가 급기야 “짓무른 과일”에 비유된다는 점이다. 아무런 유사성의 논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멧돼지→세상→짓무른 과일’이라는 기표의 미끄러짐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단 『파쇄』의 내용에 따르면, 이 연속된 기표는 그녀를 둘러싼 적대적 세계 그 자체이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가차 없이, 그리고 흔적도 없이 부숴버려야만 하는 목표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임을 당한 멧돼지란 ‘짓무른 과일’처럼 그 자체로 이미 깨지고 부서진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멧돼지에게 연민이나 후회의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칫 방심할 경우 그와 그녀가 오히려 짓무른 과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남는다. 그런데 왜 그녀가 대결해야 할 멧돼지같은 세상 혹은 세상의 멧돼지들은 ‘짓무른 과일’에 비유되는가? 도대체 이 비유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이상한 비유의 기원은 바로 『파과』다. 아래 인용문은 『파쇄』의 ‘짓무른 과일’이 『파과』에서 비롯되었음을, 따라서 이 두 작품이 동일한 세계관 위에 구축된 시리즈임을 확인시켜준다. 『파과』의 한 대목을 보자.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 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 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파과』, 222쪽)
썩어 문드러져 본래의 형태를 잃고 냉장고 야채 칸 벽에 들러붙어 “시큼한 시취”를 뿜어내는, 한때는 복숭아였지만 이제는 물컹한 덩어리에 불과한 그것은 이제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버린다. “부서진 ‘조각’들을 건져 올린다”는 문장으로 짐작할 수 있듯, 이 ‘짓무른 과일’은 주인공 ‘조각’의 노쇠한 육체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런데 40년 넘게 업계의 전설로 불렸던 완벽하고 냉혹한 킬러는 어쩌다 짓무른 과일, 즉 파과가 되었을까? 그것은 다만 전성기가 지난 킬러의 노화에 대한 비유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거친 세상을 부수면서 자기 자신도 그만큼 내적, 외적으로 붕괴되고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나? 중요한 점은 『파과』에서 살인기계로서의 효용가치가 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각은 자기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인간으로서 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과』에서 ‘파과’가 인간 되기의 시발점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나아가 부서진 정신과 육체는 15살 이후로 멈춘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로 작용한다.
반면 『파쇄』 속 ‘짓무른 과일’로 대변되는 파과 현상은 일차적으로는 그녀가 부숴버린 세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멧돼지 같은 세상을 부숴버린 순간 그녀는 자신이 죄책감이나 슬픔, 그리움과 같은 인간적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살인기계가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것은 바로 “약탈과 섬멸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길 없는 삶을 시작했음을 알게 되고 지나온 보통의 시간과 평생을 걸쳐 이별하게 되리라는 예감”(90쪽)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녀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인간적 삶에 작별을 고하는 애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냉혹한 살인기계는 그렇게 탄생한다. 그럴 때 『파쇄』는 혹독한 수련을 통해 완벽한 킬러가 되는 전형적인 장르소설의 외양을 가지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킬러가 되기 위해 세상과 육탄전을 벌이는 어린 소녀라는 강렬한 모멘트 속에 ‘부수다가 부서지기’ 혹은 ‘무너뜨리다가 무너지기’(그 역도 사실이다.)로 요약되는 비관적 염세주의를 갈아넣어 파국의 무드를 뿜어낸다. 그러니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다가 급기야 ‘짓무른 과일’이 되어버린 ‘조각’의 몰락에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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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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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작년 세월호참사 희생자 10주기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세월: 라이프 고즈 온」(장민경 연출)은 참사 유가족 유경근씨를 좇아가는 가운데,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출연한 다른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품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중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와의 대화에서 인상적인 문답이 등장한다. “진짜 세월이 약인가요?”라고 묻는 유경근씨의 질문에, 약은 없다면서 “안고 사는 게 약이여”라고 답하는 배은심씨의 대답이 그것이다. 흔히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무뎌지고 잊히기 마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배은심씨는 세월이 아니라 안고 사는 게 약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시간의 풍화에 내맡겨 점점 무뎌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루는 일부로서 비통하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껴안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자신을 살게끔 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형식이 필요해진다. 그 형식에는 상실과 끊임없이 새롭게 관계 맺는 역동적인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며, “집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물은 건 묻고 요구할 건 요구하는”1) 움직임,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안기고 그들을 안아주는 움직임이 요구될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고통을 안고 정치로 나아가는 삶의 형식이라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세월호참사, 대구 지하철화재참사 등 재난 피해자와 유가족들로 구성된 ‘재난참사피해자연대’의 발족선언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나는 것도 낯설지 않다. “우리가 겪은 참사를 여러분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고 불가피하게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곁으로 찾아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자 한다.” 그리고 4·16재단 부설로 문을 연 ‘재난피해자권리센터’는 피해자를 조력하는 한편 재난을 만드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점검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이렇듯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투쟁하고 사건에 관한 사회적 기억의 구성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또다른 재난참사의 피해자·유가족과 연대하며, 상실의 비통함을 우리 모두가 보다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희망의 몸짓으로 전환해내고 있다.2) 그러므로 미래란 애도를 완수한 이가 비로소 맞이하는 삶의 다음 단계 같은 것이 아니라, 고통과 상실을 삶으로부터 격리시키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통해 열어젖히게 될 새로운 가능성이라 할 것이다.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채 누적되어온 재난참사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듯, 최근 소설에서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거듭 마주할 수 있었다. 애도의 서사화가 거듭하여 창안되는 것은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한 문학의 필연적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례식장으로 곧장 향하는 대신 어쩐지 딴청을 피우며 한참을 에둘러 걸어가는 이들의 발걸음에서(김채원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우산을 보며 세상에는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의 뒷모습에서(최예솔 「토니」,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제대로 읽지 못할 책을 들고나와 길가에 놓인 소파에 앉는 마치 의례와도 같은 행위 속에서(윤단 「남은 여름」, 『현대문학』 2024년 12월호) 상실이란 과거완료의 사건이 아닌 남겨진 이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현재적인 것이 된다. 다만 짧은 소설의 형식에서 애도란 다소간 미학적인 것으로 완결되는 듯 보이기도 하기에, 좀더 긴 시간을 통해 애도를 수행하는 서사, 모순과 간극을 섣불리 메우지 않고 상실을 끌어안고 사는 삶의 버성김과 지난함까지 다루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그러한 서사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삶으로서 보여주었듯, 부정적 감정으로 치부되곤 하는 슬픔과 우울, 고통의 정동이 지닌 운동성을 새롭게 사유할 매개가 되어 어쩌면 인물들에게 미래를 지어 먹이려는 소설적 움직임을 보여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속 인물을 살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허기진 공동체에 애도의 감정과 연대의 상상력을 전하며 보살피려는 문학적 돌봄의 실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뒤늦은 노력들의 형식 문진영의 소설 『미래의 자리』(창비 2024)는 ‘미래’라는 인물의 죽음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전체 8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장마다 초점화자가 전환되며, ‘지해’와 ‘자람’ 그리고 ‘나래’ 세 사람의 내면 풍경과 그들이 통과하는 삶의 국면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소설은 미래의 꿈에 관하여 미래와 지해가 대화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모호하고도 아름다운 꿈과도 같은 장 ‘0 미래’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1 지해’의 장에서는 해져 닳아버린 듯한 지해의 마음결이 도드라지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어떤 사건의 여파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2 자람’의 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래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미래는 지해와 자람과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친구이자, 나래의 쌍둥이 동생이다. 미래의 죽음 이후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은, 미래의 죽음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소급하여 재현하지 않거니와 남겨진 인물들 역시 죽음의 순간 미래가 얼마나 쓸쓸하고 고통스러웠을지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남겨진 세 사람의 시선을 빌려 전개되는 이 소설은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래의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낼 뿐이다.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서 마주하는 문제와 씨름하고 나름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세 사람이 미래의 자리를 되짚는 방식과 밀도 역시 상이하다. 다만 미래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감정만큼은 모두가 공유하는 듯 보인다. 미래는 지해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자람에게 난생처음 오롯이 이해받았다는 기분을 선물해준 사람이고, 쌍둥이 언니 나래에게는 섬세하게 이해받는다는 느낌과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의 기억 속의 미래는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98면)고 누구보다 섬세하게 감각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지해와 자람, 나래가 고교 시절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말을 나눌 동안,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던 미래는 현장을 뛰어다니며 그 시간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기록해나간다. 스무살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희열에 젖은 나래가 그 사건을 조금씩 자신에게서 밀어낼 즈음, 미래는 사건의 여진 속에 들어가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미래의 죽음 이후 지해와 나래는 조그만 징후라도 발견하고 싶어서, 미래의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싶어서 그의 블로그에 남겨진 일기를 샅샅이 읽어나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미래가 치열하게 통과했던 외로움과 슬픔, 기쁨을 각자의 방식으로 되짚는다. 자신의 살아 있음을 미안해하며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싶어하는, 자신이 누려온 삶의 여유로움에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하는,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론적 혼란마저 있는 그대로 껴안고 기꺼이 자신을 더 큰 혼란과 열망 속으로 밀어넣는, 그리하여 “충분히 살아 있다”(175면)는 감각과 함께 삶의 아름다움 또한 생생하게 느끼던 미래의 시간은 장의 전환 지점마다 삽입된 미래의 일기를 통해 기록되어 독자들에게도 전해진다. 소설에서 지해와 나래를 절망에서 건져올리는 분명한 서사적 계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극적인 회복의 서사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길 수 있지만, “삶 쪽을 향해 반짝이고 있는”(125면) 미래의 문장들을 한줄 한줄 읽어나가던 지해와 나래가 천천히 삶 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은 충분히 개연적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보건대 ‘미래의 자리’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을 후회와 죄책감으로만 잡아끄는 수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때나 내가 너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79면) 전하고 싶어 지해에게 건네는 자람의 자그마한 선물들과, “살아주면 안 될까. 내 소원이야”(204면)라며 나래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는 지해의 마음에, 이렇듯 서로를 살피며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연결고리들마다 무한히 창안되는 장소에 가깝다. 소설은 그 연결고리를 미래와 남겨진 세 친구의 관계로만 한정하지 않고, 조금씩 보태어지고 때로는 끊어지며 유동하는 관계의 여러 모습을 통해 그려낸다. 지해와 엄마, 그리고 지해와 용이씨, 나래와 재원, 자람과 가족, 그리고 자람과 민서까지, 소설은 세 사람이 갖가지 연결과 만남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므로 『미래의 자리』는 남겨진 자들이 미래의 자리를 서서히 지워버림으로써 그 시절을 ‘극복’해가는 모습이 아니라, 이들이 미래의 흔적을 묻힌 채 상실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려는 쪽에 가깝다. 세 인물의 이야기 모두 확실한 종결 없이 마무리되며 그 어디에도 미래의 자리에 대한 확고한 고정값이 부재하다는 점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미진한 느낌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미래의 자리를 섣부른 의미화로 고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숨탄것3)으로서 숨탄것을 끌어당기는 한 그 의미화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의지를 내포하는 듯 읽힌다. 예소연의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현대문학 2025)는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친구 ‘석이’를 찾기 위해, ‘나(동이)’와 ‘혜란’이 캄보디아로 향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석이를 찾는 여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10년 전 대학시절 세 사람이 캄보디아에서 교육봉사를 하며 함께 보낸 시간과 이후 점점 멀어지게 된 세 사람의 관계에 관한 회고가 교차하며 삽입된다. 이러한 전개 가운데 세 사람의 우정의 역사뿐 아니라 ‘나’의 비틀린 마음, 이를테면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부족함이 없어 보여 “보편적인 행운을 단단히 쥐고 있는”(10면) 듯 보이는 석이를 향한 날선 마음과 질투, 적의 같은 것들이 함께 끌려 올라온다. 회고조의 서술을 통해 간간이 드러나듯 석이를 찾는 여정이란 기실 ‘나’ 자신의 못난 마음을 마주보는 시간이자, 판단하기에만 급급했을 뿐 애써 이해하려고 해본 적 없는 석이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되짚어보려는 노력의 여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석이의 실종이라는 사건은 ‘나’와 혜란의 삶의 관성을 잠시라도 멈추기 위해 요청되었던 서사적 계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실종과 같은 충격적 사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타자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굼뜬 노력이 시작된다는 점을 드러낸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석이를 찾기 위해 떠난 이들의 여정이 결국 석이를 만나지도 못한 채 결말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를 의미하기 어렵다. 오히려 석이와의 만남이 지연되는 것이야말로 석이에 대한 이해를 거듭 수정해나갈 기회를 허락하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엄마를 간병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된 삶에 시달리던 ‘나’가 이태원참사로 인해 괴로워하는 석이에게 공감하는 대신 “너 너무 격양되어 있어”(65면)라며 그녀를 제어하려 했던 기억은 서사가 한참 진행된 뒤에야 소환된다. 캄보디아행에서 ‘나’가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교육봉사로 캄보디아에 머물던 시기 한국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일과, 캄보디아인인 ‘삐썻’이 그 사건에 대해 위로하며 꺼삑섬에서 벌어진 압사사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석이가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앞질러 단정한 일, 그리고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꾸벅꾸벅 졸며 이태원역을 지나치던 석이의 머리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일과, 이후 석이가 뒤늦게 삐썻을 찾아가 사과한 일들 사이의 희미한 연결성이다. 세월호참사와 꺼삑섬의 압사사고, 그리고 이태원참사 등의 사건들은 시공간적으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고유한 역사정치적 맥락 위에 놓인 개별적인 사건들이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 의해 차이를 초월하여 특히 정동적 층위에서 연결될 수 있다. 이때의 연결이란 구체적 사건의 맥락을 지워 책임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연루감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작동하는 쪽에 가깝다. 세 개의 서로 다른 사건은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64면) 된다는 느낌으로, 고통과 무력감, 수치심과 우울의 정동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석이는 그 느낌으로써 주변의 사람들과도 연결되려 하지만, 정치색이 너무 짙다며 석이를 피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나’ 역시 “크나큰 불행을 혼자만 짊어지고 있는 사람”(122면)처럼 느껴지는 석이를 부담스럽게 여겨 부재중전화를 외면하면서 석이가 자신에게 미칠 정동적 전염을 피하려 한다. 결국 캄보디아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야 석이의 마음을 상상해보게 된 ‘나’가 “석이가 하고자 했던 일을 할 것이다. 석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 애쓸 것이다”(125면)라고 다짐하게 되는 극적인 전회와 함께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렇듯 석이의 자리에 대신 서보려는 듯한 ‘나’의 포즈에 주목해본다면, 『영원에 빚을 져서』는 『미래의 자리』와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이야기를 끝맺게 되는 셈이다. 이는 『미래의 자리』가 장마다 초점화자를 전환하며 이야기를 독점적인 인물의 담론으로 귀속시키는 것을 피하는 한편 미래의 일기를 삽입함으로써 미래의 내면을 고유한 영역으로 보존하려 한 것과는 달라 보인다. 이는 두 소설의 결정적 차이, 즉 미래와 달리 석이는 잠시간 자취를 감추었을 뿐 분명 생존해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나’와 혜란을 캄보디아로 끌어들인 게임의 주최자와도 같다는 점, 즉 두 사람이 삐썻의 도움을 받아 되짚게 될 여정을 한발자국 앞서 지나감으로써 그들이 지나올 길을 미리 마련해둔 것과도 같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석이가 하고자 했던 것을 하며 석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나’의 다짐은, 추후 ‘나’가 다시금 석이와 대면하는 가운데 부대끼게 될 시간을 괄호 안에 묶어둔 위에서만 가능한 일시적 봉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지만 불가결한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발견되는 얼마간의 비약을 동반한 실선의 연결감은 『미래의 자리』에서 그려내는 점선의 연결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남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두 소설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두 이야기에는 첫째, 죽음 혹은 실종으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진 ‘그녀’가 있다. 둘째, ‘그녀’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녀 타인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자신을 성찰하던 사람이었다. 셋째, ‘그녀’의 마음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였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그녀’의 마음을 더듬으며 헤아리려 한다. 그리고 이렇듯 뒤늦은 이해의 시도라는 것이 서사를 끌어나가는 소설의 전체적인 추동력으로서 작동한다. 세월호참사의 고통을 향해 뛰어들어간 미래가, 이태원참사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던 석이가 사라진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들 소설은 예민하게 타인의 고통을 청취하고 감응하며 세계와 불화하던 이들을 서사에서 가장 먼저 퇴장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 조금쯤 둔감하거나 이기적인 덕분에 생존해 있는 자들의 서사를 상대적으로 많이 조명하는 가운데 이들로 하여금 사라진 자들에 대해 회상하게끔 한다. 이는 이야기에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둔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재난참사의 당사자가 아니라 재난참사에 대해 섬세하게 공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 그러고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다루는 대신 그 사람의 상실 이후를 경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 이것은 몇 개의 겹을 걸친 ‘관찰자’의 위치에 선 인물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전략처럼 보인다. 사건을 직접 다루는 방식에 대한 큰 부담을 방증하는 듯한 이와 같은 서사전략에는 비판이 가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미래와 석이가 사라진 세계가 어떠한 혐의를 가지는가에 대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해온 미래와 석이가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내면을 자세하게 펼쳐 보이는 것이 과연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상실 이후에서야 후회와 반성을 여실히 내비치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는, 사라짐을 택한 인물이 아니라 그 상실에 대해 곱씹는 자의 내면으로 서사를 집중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과 독자들 사이의 공감을 강화하고, 끝내는 독자들의 동질적 자기연민으로 이어지는 나르시시스트적 소설 향유를 강화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근래 한국소설과 소설 독자들의 주요한 경향성으로 누차 지적되어온, 예상 가능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텍스트의 읽기란 반드시 그러한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들 소설이 이러한 구도를 통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들 소설이 발생시키는 효과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읽는 방식에 대한 미세조정을 통해 같은 텍스트로부터도 서로 다른 담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며, 읽는 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학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서사에서 진동하고 있는 운동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읽어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미래의 자리』와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그려내는바, 남겨진 자들의 위치에서 상실을 돌아보는 일이란 매끈하게 자기를 완성하며 현상태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작업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동시에 우리가 어떤 것으로 변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4)까지 품고 미래를 고민하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읽기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지지대로서 황정은의 근작 「문제없는, 하루」(『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를 세워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도 앞서 살핀 두 소설과 유사한 관계구도가 발견되고 있다. 소설에는 구체적인 일상과 노동의 감각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영인’과, 세계의 커다란 고통에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어쩌면 그래서인지 점차 고립되어가는 듯 보이는 ‘인범’이 등장한다.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그걸 보게 돼./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라는 인범과 “뭘 그렇게까지 해,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해”(244면)라는 영인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소설은 두 사람의 버석거리는 관계를 적나라하게 다룬다. 초점화자인 영인을 통해 독자들마저도 피로해지게끔 만들면서, 인범에게 전하지 못한 영인의 마음이 닳아가는 가운데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해져가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럼에도 잔존하는 사랑과 끊어질 수 없는 이들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이 버성김과 부대낌을 재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음에도 태풍이 휩쓸고 간 날 인범에게 전화를 거는 영인과, 그 전화에서의 침묵이 마음에 걸려 영인의 집으로 찾아오는 인범에게는 서로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여전히 존재한다. 오랜만의 만남 이후 해가 뜨는 것을 함께 보기 위해 나선 길에서, 그들은 터널 안에서 위험한 상태에 놓인 차량과 그 안의 노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영인은 터널 속 쓰러진 노인을 구하려는 인범을 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차들을 향해 제발 멈추라고, 그들을 믿는지 믿지 못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저 경적 울리는 일을 한다. 인범은 아직 영인의 곁에 생생히 살아 있으며, 영인은 불가피한 두려움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다시, 『미래의 자리』와 『영원에 빚을 져서』와 같은 소설들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문제없는, 하루」 속 영인이 경적을 울려대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를 멈추어 세우는 일이 아닐까. 관찰자의 위치란 독자들을 안전한 곳에 위치시켜 위안을 주기 위해 설정되는 구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당겨 연루시키기 위한 절박한 유인책에 가까워 보인다. 최선을 다해 상실을 쓰다듬어보려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뒤에서야 그것을 수행하고 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라도 멈추어 상실을 쓰다듬는 행위의 중요성을 역설하려 한다. 혹자에게는 이것이 지나치게 소박하거나, 기만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혐의를 안고도 그 태도를 취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타인의 상실을 그만의 사적인 경험이라며 지나치지 않고 곁에 멈춰 서서 그의 고유한 상실과 연루되는 삶의 형식을 감히 상상해내기 위하여, ‘우리’가 함께 상실한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가를 멈추어 되돌아봄으로써 지금-여기의 세계를 당연하지 않게 느끼기 위하여. 이로써 조금 다른 형태의 미래를 “지금-여기에서 밀어 올”5)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실 도식화된 이해와는 달리, 관찰자의 위치란 사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부동하는 점으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덕지덕지 묻히고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더듬으며 때로는 침잠하여 간신히 기어나오지만 때로는 비약을 감행하는, 요란하고도 사나운 움직임에 가깝다. 지금의 한국소설이 그려내는 그 움직임이 독자들을 정동할 만큼 강력한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이렇게 바뀌어 던져지는 편이 온당할지도 모른다, 그 관찰자들을 관찰하려는 ‘우리’들은 정동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가? 나와 동일한 상실을 경험하였기에 가능한 연결이 아니라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차이와 불가피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차이와 간극으로 인해 더욱 적극적으로 연결로 이어지는 형태를 상상해낼 수 있는가? 이는 곧 지금 들리는 작고도 또렷한 경적소리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귀 기울이고 멈춰 설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1) 영화에서는 간결하게 처리되었으나, 장민경 감독의 인터뷰(「“시간이란 약은 없다”···가족 잃은 고통 ‘안고 사는’ 이들이 손잡을 때」, 경향신문 2024.3.24)에서는 배은심 여사의 말을 빌려 그 의미가 좀더 자세히 풀린다. 배은심씨는 아들의 죽음 후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오다 2022년 타계했다. 2) 이태원참사 가족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창비 2024)에서도 이태원참사의 유가족들이 상실의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 길을 내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는 서술이 확인된다. 혹 이와 같은 진술이 재난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사회운동의 책임과 부담까지 지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이미 수행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정확히 기입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이 보다 강조되는 쪽이 온당하지 않은가 한다. 3) ‘작가노트’에 따르면 ‘숨을 받은 것’이라는 의미인 ‘숨탄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될 뻔했다고 한다. 이 표현의 아름다움에 공감하며 본문에서도 인용하여 사용했다. 4)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393면. 5)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24면.
1. 엄마 이야기는 반칙인가 동료들과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이따금 어머니에 대해, 진부하고 문제적이지만 또 있을 법하고 유려하게 그려낸 작품들을 보면 난감하다. 이른바 ‘엄마 이야기’가 갖는 정동적인 파급력은 작품의 정당한 미학적 평가를 돕는가, 방해하는가. 그 정동이 비단 작가 혼자 만든 게 아니라면 이는 전략적 수단인가, 반칙인가. 어머니와의 경험 앞에서는 당사자 아닌 사람이 없지만, 한 사람의 여성을 어머니로 그려내는 일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합의된 여러 규범이 작동한다. 그 행위는 어머니라서, 어머니임에도 그러하다는 식의 인식이 따라붙는다. 한편으로 규범은 서사를 향유하는 독자들의 이해와 몰입을 돕고 공통 감각을 비교적 빠르게 형성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배우 염혜란과 문소리가 연기한 ‘엄마’들은 산업화 시기를 다룬 작품이 으레 그렇듯 억척스럽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를 포함해) 그토록 많은 시청자를 단시간에 울릴 수 있었다. 어머니를 서사화하는 일은 그만큼 쉽고도 어렵다. 사실 어머니를 둘러싼 공통 감각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재생산해온 문학의 역사에서 어머니는 그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은 강한 점착력을 지니며 다각도로 전형화되어왔다. 어머니는 이제 자애롭거나 폭력적이고, 가난하거나 사치스러우며, 안쓰럽거나 징글징글하고, 아프거나 팔팔하며, 무성적이거나 문란하다. 이러한 온갖 어머니의 각본이 그 나름의 색채를 띠는 것은 역시 그 구체성과 역사성 덕분이겠지만 그 특이성이 보편으로 전유될 가능성이 유독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새롭게 말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에 가까운가?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전형과 규범에 머물 수밖에 없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어머니는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말해진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가부장 서사가 급속도로 인기를 잃은 것과 달리 어머니는 거듭해서 발견되고 발굴되어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어머니 서사의 지속 혹은 확장에 대한 메타적인 분석 그리고 여성 인물들의 성장과 각성 중심의 여성 서사 플롯을 벗어난 어머니 서사가 가능한지 묻는 일이다. 두 편의 소설을 통해 그 가능성을 짧게나마 살펴보려 한다. 2. 엄마를 참조하는 남성의 자기 말하기 박선우의 『어둠 뚫기』는 37년간 동거를 해온 게이 아들과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책에 함께 수록된 문학동네소설상 심사평에서 몇 명의 심사위원이 언급했듯 한국 문학에서 청년 퀴어와 엄마의 구도는 이제 낯설지 않다. 멀게는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민음사, 2017)나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에서부터, 최근 발표된 김봉곤의 「기록적」(『문학과사회』 2023년 겨울호), 임솔아의 「금빛 베드 러너」(『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까지 몇몇 소설이 엄마의 질병과 노화를 지켜보며 돌봄의 문제를 고민하는 퀴어 자녀의 이야기를 다뤄왔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청년들이 더는 엄마를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못하고/않고 스스로 돌보는 일반적 현상으로도 읽히지만 퀴어 청년의 경우 엄마와의 관계가 갖는 상징성은 그보다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재생산 노동을 담당했던 엄마와 재생산 담론에서 배제된 퀴어 자녀 사이의 대립 구도나, 자식의 동성애를 마땅히 알아보거나 ‘고치지’ 못한 데에 죄책감을 느끼는 양육자로서의 엄마의 위치, 두 사람이 노동자 혹은 주거 취약 계층으로서 보이는 상호 이해 등의 주제를 앞서 말한 소설들은 정교하게 다뤄왔다. 이 소설은 얼핏 보면 그런 주제들과 멀지는 않다. 화자인 ‘나’는 도통 맞지 않는 엄마와의 동거를 그만둘까 하면서도 서울의 집값이나 혼자 살게 될 엄마를 생각하며 망설인다. 평생 미싱사로 일해왔던 엄마는 코로나 이후 직장이 폐업하면서 일을 관뒀는데, 엄마가 몇 해 전부터 보청기를 끼기 시작하며 경증 장애 판정을 받자 ‘나’는 새삼 엄마의 보호자가 된 것에 부담과 불편함을 느낀다. 엄마는 ‘나’가 돌이 막 지났을 무렵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로 오랜 시간 ‘나’의 보호자였지만 어느 모로 보나 ‘나’를 잘 보호했다고 할 수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나’의 커밍아웃을 엄마는 제대로 듣지 않고 방에 던져놓았으며 성인이 된 ‘나’의 우울증과 과수면 상태를 애써 못 본 척해왔다. ‘나’는 그런 엄마의 방치와 방어가 어떤 맥락에서 일어난 것인지, 어떤 삶에서 비롯된 대응 방식인지를 모르지 않는다. 엄마는 스무 살에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한 뒤로 낮에는 재봉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안일을 하는 삶을 줄곧 살아왔다. 자식의 커밍아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나,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되어가는지와 같은 문제는 엄마의 삶에서 중심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관심은 단순히 엄마를 아는 데에 있지 않다. “물론 이제는 안다. 엄마가 왜 그런 식으로 대응했는지를…… 이해한다기보다 그냥 안다”(p. 72). 이 소설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앎이란 하나의 행동이나 사건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그 행동과 사건을 겪어내는 한 존재를 설명하는 일이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와 엄마 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었다”(pp. 13~14). 엄마에 대한 이해는 사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다. ‘나’를 부정하는 엄마를 사랑하는 ‘나’,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나’,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이로 살아가는 ‘나’ 말이다. 『어둠 뚫기』가 기존의 퀴어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지점이다. 이 소설은 나를 아직 모르는 ‘나’의 무지와 불확신을 놀랄 만큼 솔직하게 꺼내놓는다. 이 일인칭 화자는 게이인 ‘나’가 너무도 잘 알고, 알 수밖에 없는 것들을 쓰는 게 아니라 ‘나’가 모르는 것을 말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무지는 꼭 과거 ‘나’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기에 이 방식은 성장소설과도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소설은 ‘나’가 지금 왜 소설을 쓰는지, 왜 이런 사랑을 하는지, 그 나이 먹고 왜 아직도 엄마와 같이 사는지와 같은 물음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답이 되지 않는다. 원인관계를 서술하는 박선우의 문장들은 “추측건대” “이건 내 생각인데” “~것 같다”와 같은 단서를 달며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정체성에 대한 불확신과 혼란이 퀴어에게 얼마나 자주 개입과 치료의 근거가 되어왔는지를 생각하면 이러한 조심성은 차라리 용감하다. 정신분석의 언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소설의 ‘나’가 털어놓는 증상과 기억을 곧장 인과관계로 엮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눈여겨본 것은 소설에서 ‘나’ 자신을 말하는 일과 엄마를 말하는 일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꼴렸”던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달라는 ‘나’에게 엄마는 너는 원래 이상하다며 ‘나’를 방에 가둔다. 엄마의 이 답변과 행동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나’를 ‘휘게’ 했고, ‘나’는 어쩌면 “그런 나로 인해 엄마 역시 조금은 휠 수밖에”(p. 59)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나’는 다시 엄마에게 자신은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엄마는 여전히 ‘나’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설명할 수 없지만 다른 이야기를 한다. 엄마가 연탄불을 피워놓고 죽으려 했을 때 너는 나를 마지막으로 살린 사람이었다고(p. 207). 가장 가까운 타자로서 당신의 삶은 내가 모르는 나의 삶을 이미 포함하고 또 구성한다. 때로 엄마는 어머니라서 그 구성에의 책임을 과도하게 심문받기도 한다.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형이 엄마를 탓하듯(혹은 탓한다고 엄마 스스로 생각하듯) ‘나’ 역시 불행 앞에 서면 엄마를 탓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이는 내 삶의 존재 방식을 내가 다 책임질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불행과 사랑을 맞닥뜨리고 비껴가는 데는 우리의 의식 바깥의 것, 정확히 말하면 타자의 몫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나’로서는 자기 이해의 실마리가 된다. 이 연결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엄마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엄마로 대표되는 주변 여성들의 여성성은 게이인 ‘나’의 타자성을 해석하고 설명할 언어가 된다. 군대, 첫 직장인 증권사, 예비군 훈련소와 같은 남초 집단에서 이성애자 남성들의 문화에 어울리지 못한 그는 늘 집단의 멸시와 위협을 받아오곤 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며 강화되는 남성성을 거부하는 ‘나’는 종종 여성과 동일시되는데, 게이 남성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또래의 기혼 남자들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충족되지 않는 남성성을 ‘나’를 통해 확인받고, 콘돔 없이 강제 삽입을 시도한 남자는 강간으로 신고하겠다고 하자 “별 미친년이”(p. 144)라며 탄식한다. ‘잘 주는 착한 년’에서 ‘미친년’까지,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나’와 동일시되는 것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거부해온, 성적으로 지배당할 기회를 잘 주거나 못 주는 것으로 정해지는 정체성의 꼬리표들이다.1) 요컨대 ‘나’에게 여성성은 ‘나’를 상처 내고 취약하게 하는 것이지만, ‘나’의 경험을 발화하고 주변의 여성들과 동일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에서 엄마를 말하는 방식이 꼭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대상화’”2)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확실히 엄마는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성을 보장하기 위해 타자화되는 대상도, 미처 극복되지 못한 유년기 욕망의 대상도 아니고 ‘나’가 아버지-남성들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참조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자신의 여성성이 엄마의 여성성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엄마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에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엄마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그것은 여성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말해져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참조가 불가능한 영역을 남겨두는 것은 ‘나’에게 어떤 굳은 믿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엄마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식이어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고이 간직하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p. 161). 바로 앞에서 ‘나’가 엄마와 “적잖이 다르면서도 닮았다는 것. 서로 유사하면서도 유별난 데가 있다는 것”(p. 160)을 깨닫는 장면이 체념이 아니라 안도로 읽히는 이유다. 3. 규칙을 벗어나는 규칙의 글쓰기 김채원의 첫 소설집 『서울 오아시스』는 『어둠 뚫기』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서술된다. 박선우의 소설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노선들을 조심스럽게 더듬어나가는 글쓰기라면 김채원은 그 어떤 ‘자연스러운 길’도 단호하게 거부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첫 번째 작품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에 등장하는 동우, 석용, 성아 세 사람의 행로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규칙의 이탈이다. “사진 찍을래?” 물어보는 석용의 질문에 동우가 “아니”(p. 9)라고 대답했음에도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자판기 사진을 찍고, 늦어서 미안하다는 둘의 사과를 성아는 받지 않는다. 이러한 이탈은 이들이 종일 거니는 공간 도처에 존재한다. 비가 온다고 했던 일기예보는 맞지 않고, 예약자가 있는 우버 택시는 다른 손님을 태운다. 서로 하는 농담은 먹혀들지 않고, 잘 안 죽는다 해서 산 식물들은 노랗게 색이 변해 있다. 왜 이들의 세계는 정해진 규칙을 이토록 거부하는가? 이 소설에서 사실 가장 변칙적인 것은 이들의 행로 그 자체다.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이 아닌 보통날”(p. 14)은 이들이 새벽 일찍 친구 유림이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으면서 보통이 아니게 된다. 보통의 각본이라면 유림이 안치된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야 하겠지만, 세 사람은 유림이 살던 원룸의 물건들을 정리하기로 하고 그마저도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쓴다. 걷다가도 유림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공간—농구대나 수영장의 난간—까지는 가지 않는다. 유림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들은 서로 하지 않는다. 마치 그렇게 하면 유림이 난간에서 뛰어내리지 않은 다른 세상이, 유림의 죽음을 모르는 다른 기억이 존재하게 된다는 듯이. 소설집을 이루는 여덟 편의 소설은 주변인을 자살로 떠나보낸 뒤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시점에서 느슨하게 엮고 있다. 자살 유족 또는 자살 생존자라고도 불릴 이들의 이야기에서 망자는 같은 사람일 수도,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빛 가운데 걷기」에는 딸이 자살로 죽은 이후를 살아가는 노인과 손녀가 나온다. 자살이라는 돌연한 죽음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로잡을 기회의 상실이기도 하고, 예측과 실행/방지로 이뤄진 일상의 질서가 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엄마가 죽은 뒤로 아이는 긴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거리에서 자전거를 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질서의 중단은 증상일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죽음을 대하는 이들의 일관된 대응으로도 보인다. 자살은 죽음의 방식이지 원인이 되지 못하고, 사인(死因)을 설명할 이의 부재는 남은 이들이 무한한 설명을 떠안고 살아가게 만든다. 소설이 인물에 대한 부연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일종의 심리부검3)처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아이의 엄마를 보호 병동에 있던 「서울 오아시스」의 엄마나 자전거를 탄 채 차도에 달려들어 사망한 「외출」의 엄마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엄마는 왜 하필 차도에 뛰어들었나? 엄마는 왜 병원의 ‘병자’가 되었나? “그런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의 발생처럼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을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곤 하듯이 여기저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서울 오아시스」, p. 83). 그러나 ‘아무 상관도 없을 일들’의 상관을 설명해야 하는 누군가는 망자와의 관계망에 특별히 더 붙들려 살아간다. 이를테면 엄마의 병과 죽음은 우연히 생긴 ‘나’를 지우지 못한 데서 출발했고, ‘나’가 학교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다 엄마의 죽음 때문이라는 이야기. 죽음의 앞뒤에서 조건과 결과가 되는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사 바깥의 사람들을 안도시킨다. ‘나’의 외삼촌이 실종된 날 우연히 외삼촌의 휴대폰에서 병원 번호가 나오자 이웃 사람들은 삼촌의 행적을 엄마의 병과 엮어서 설명하고(「서울 오아시스」, p. 74),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엄마가 죽은 것을 안 뒤로 더는 오전에 따로 전화를 걸어 아이가 왜 이런 문제적인 행동을 하는지 노인에게 묻지 않는다(「외출」, p. 188). 변칙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된 세상은 재빨리 원상태로 돌아가 다음의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목표 지점을 향해 이동하고, 정원을 가꾸고, 제대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길게 쓰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남은 이들 역시 세상과 같이 그 규칙들을 따라가고자 한다. 살기 위해서, 아니 살리기 위해서. 노인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시간에 맞춰 데려온다(「빛 가운데 걷기」). 딸은 엄마로부터 화분을 키우게 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서울 오아시스」). 그러나 화분은 병원에서 남을 해칠 수 있고 또 엄마는 양손을 마음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므로 편지에 씌어진 엄마의 욕망은 이뤄질 수 없다. 질서를 잃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규칙적인 생활과 인과적인 설명은 이들의 질서를 돌려놓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세상이 강조하는 자연스러운 순리 속에서 이들은 언제 실종되거나 결석하거나 감금되거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 순리를 벗어나 살려고 할 때, 세상은 이들에게 다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한다. [……] 더는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더는 돈을 지불해가며 비굴하게 꿈도 없는 긴 잠을 사려고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누군가 묻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도록 인과를 생각하고. 그런데 어째서 증명해야 하나 내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어째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증명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 (「외출」, p. 198) 살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은 살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병원을 나와 거리를 걷고 허깨비를 보고 술을 마시고 꿈을 꾸는 김채원의 인물들은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살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또는 다른 것처럼 보이는 그러니까…… 남의 눈을 속이는”(p. 205) 허깨비와 살아가는 방법을 말이다. 「럭키 클로버」의 자영은 술에 취한 동료들과 함께 자두 농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구도 자영의 농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자영은 엄마가 남긴 농장을 가꾸고 엄마 대신 자두나무를 키운다. 농장에는 농장을 지키는 여덟 명의 클로버 병정이 있고 이들은 불시에 나타나 자영을 돕거나 돕지 않는다. 이들은 이들만의 일과가 있으므로 자영은 그들에게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장난에 불과한 걸까? “자영에게는 그것이 중요했고, 그 중요함은 선했다. 그리고 그 선함이 때때로 자영을 구해낼 수 있었다”(p. 173). 가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종교와 같은 어떤 보편적인 윤리보다도 주체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다. 자신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는 인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채원의 인물들은 규칙을 벗어나는 규칙, 언어를 속이는 언어를 만들면서 터벅터벅 걸어 나간다. 이런 이탈적 행로에서라면 엄마는 이들의 보행을 중단시킨, 언어를 앗아간 사람이 아니라 “걷는 법을 알려준 사람”(「빛 가운데 걷기」, p. 43)이고 암호를 알아듣는 사람(「서울 오아시스」, p. 82)이다. 부재나 결핍으로 설명되는 사람이 아니라 설명을 무한히 증식시키는 사람이다. 박선우의 소설처럼 김채원 역시 ‘나’(대체로 여성)를 서사적 존재로 설명하고 정립하는 데 있어 엄마와의 연속과 분리가 문제가 됨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실의 사건 이후, 엄마와 엉켜 있는 '나'의 상태를 바라보고 언어화하는 그의 방식은 박선우와 매우 다르다. 후자가 서사를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 탐색하는 산문의 방식이라면 전자는 서사를 부수적인 것으로 무력화하는 시적 혹은 유희적인 공간을 구축하며 우리에게 그곳에 ‘없지만 있는 것처럼’ 남아 있는 엄마 이야기의 가능성을 전한다. 이토록 다른 ‘나’들을 ‘이해 불가한’ 삶에서 ‘있어 마땅한’ 삶으로 옮기는 한 가지 언어로서, 일종의 규칙(혹은 반칙)으로서 어머니가 있는 거라면, 어머니라는 타자는 더 이야기되어도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1) 이를테면 남성에게 섹스는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 섹스는 좋거나 싫은 것이라는 권김현영의 말을 들며, 정희진은 섹스를 잘하거나 못하는 여성은 언제나 ‘걸레’와 같은 낙인의 대상이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p. 95). 2) 오혜진, ‘수상 작가 인터뷰’, 『어둠 뚫기』, p. 250. 3) 자살자의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인의 진술과 기록을 검토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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