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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현대문학 | 2024년 7월호 (제835호)

문학 엑소시즘의 세 가지 사례

선우은실 문학평론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비평부문 등단 평론집 『시대의 마음』, 산문집 『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가 있음.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함. 2025년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2021년 대산창작기금 등을 수혜함.

  intro. 불가해한 현실에 대한 오컬트적 상상력


  빙의, 신내림과 같은 토속적 오컬트 형식을 활용한 콘텐츠 자체는 우리에게 이미 낯설지 않다. 다만 최근 「파묘」(2024)에 쏟아진 뜨거운 호응을 돌아볼 때, 토속적 오컬트 장르에 대한 환호의 수준 또는 흥미의 정도는 유의미하게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반응은 ‘장르’의 취향을 넘어선다. 귀신, 빙의, 퇴마, 신내림, 굿, 무당과 같은 한국형 오컬트 요소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과 대결하고, 그 오랜 원한의 영향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꽤 주류의 정서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1) 어째서일까? 불가해한 존재에 의탁해 현실의 고난을 해소하고자 하는 오컬트적 서사를 향한 환영은 코로나19에 급변한 생활 감각에서 시작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여러 재난과 비극 그리고 그에 대한 여전히 미비한 처리 과정에서 오는 분노와 무력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코로나19는 특정 ‘몇몇’에 해당하는 국소적 재난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했으며, ‘전염(과 변형)’의 형태로 인간 존속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는 점에서 특수한 경험이다. 이때 위기의식은 단순 치사율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전염병 자체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을지라도, 인종, 젠더, 사회적 지위, 재산 수준 등에 따라 공평한 예방을 약속받지 못했다. 사회가 일진보해왔으며 인류의 평화로운 존속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망령과 같은 계급적/젠더적/식민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사례인 것이다. 이에 더해 최근 한국 사회에서 참사(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가 거듭 벌어지고 그에 대한 공동체 차원의 해결이 미비한 현 상황은 어떠한가. 이는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야기하고, 물질이 아니라 구조 또는 의식적 차원에서 재고되어야 하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거듭 마주하며 좌절을 겪을 때 자신의 고통을 초월적 존재에 의탁하려 든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오컬트적 서사에 열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에 공감을 표하고 일종의 허구적 엑소시즘을 경험하는 필요의 결과다. 그런데 ‘허구적 엑소시즘’은 현실에 대한 불안의 반증이면서 미신적 형태의 승화, 즉 다른 희망에 대한 갈구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허구적 엑소시즘’은 현실 정치의 불안 정동을 확인하게 하는 동시에 ‘엑소시즘’의 결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또는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하게 만든다. 허구적 엑소시즘의 사례는 영화나 드라마 콘텐츠뿐만 아니라 최근 문학작품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음에, 이 양상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인간 중심주의라는 망령에 대한 엑소시즘


  앞서 한국형 오컬트의 새로운 서사적 양식 및 그에 대한 흥미가 확대되는 최근의 현상에서 강조되는 것 가운데 하나로 현실의 상황이 허구적 재현 양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들었다. 이는 현실에 ‘존재’함에도 우리가 그 한가운데 들어가 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문학적 양식을 통해, 즉 이야기로서 ‘보이는 것’으로 현현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원석의 「알파벅스」(웹진 「문장」 4월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망령된 이데올로기로서 인간중심주의(의 몰락)를 보여주는 서사다. 이 소설은 벌레가 들끓는 바람에 외지인의 출입이 끊겨 마을의 주 수입원이던 펜션업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소몽리 마을 사람들의 위기 상황에서 시작된다. 강력한 살충제로 벌레를 모두 죽이자는 석연치 않은 결론을 내리고 회의를 파하고 난 참, 외지에서 와 소몽리에 최근 정착한 ‘정’은 마을의 실세이자 청년인 ‘강’에게 은근한 제안을 한다. 자신이 국내 서식 중인 희귀 생물 생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이곳에 온 연구원임을 밝힌 정은, 자신이 속한 연구소에서 개발한 ‘알파벅스’를 풀어 유해충만 죽이는 쪽으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달라고 강에게 부탁한다. 강은 그가 제시한 적잖은 금액의 ‘보상’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설득한 끝에 알파벅스를 산에 풀기로 결정한다.

  고성능 인공지능인 알파벅스는 “곤충 사회에서 피부양자를 위한 부양자의 희생은 절대적”이라는 명제에 따라 해충을 제거하고 약충을 번식 및 부양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러한 알파벅스에 의해 마을에서 문제시되는 해충은 약 보름 만에 박멸된다. 그러나 해충 박멸 이후 산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약충을 부양하기 위해 알파벅스는 해충의 범위를 점점 넓혀 인간까지 포함시키고, 그 결과 소몽리의 사람들까지 ‘박멸’된다. 그런데 소설의 결말부에 이르러, 소몽리에 대한 ‘이야기’가 한 알파벅스 및 ‘정’의 남겨진 메모리에서 추출한 영 상을 토대로 “각색된 소설”임이 밝혀진다. 소몽리 사람들의 몰살 이후 실제 현실에서 소몽리는 비옥해졌고 정부에 의해 비거주지역으로 통제되었다.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은 오직 관광객, 그러나 많은 수의 관광객이다. 그들은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고, 행복을 느끼고, 위로를 받고, 때로는 슬픔과 분노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받으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익명의 소설가는 묻는다. “폐허 위에 지어진 낙원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로 낙원에 살고 싶은 것일까?”라고.

  이 소설의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대규모 자본과, 그 하청업자로서 개인적 이익(돈)과 명예를 최우선하는 인간 공동체의 대표에 의해 ‘합리적’ 선택이 주도된다는 것, 인간의 기술력과 합리성은 종내 공생 대신 계급적 위계 체계의 맨 꼭대기에 스스로를 위치시킨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는 것, 그 이후에도 인간들은 타인의 고통을 ‘관광화’함으로써 자신의 희로애락을 가볍게 해소한다는 것. 아무리 허구성에 기댄다고 하더라도 마을 하나를 간단히 소실시키고, 관광지로 재기시키는 것은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에서 과감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마을 이야기’를 알레고리화하는 방식은, ‘직접 겪은 것’을 구전하는 형식을 통해 합리적 이성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와 그에 따른 공포를 형상화한 괴담의 스토리텔링과 흡사하다. 나아가 이 소설의 경우 그러한 괴담의 플롯을 소설적 담화로 재전유한다. 인공지능과 관광이라는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실로 있을 법한 경험, 뜻 모를 재난(벌레의 출몰)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는 공포스러운 교훈,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를 재차 촉구함에 따라 향후 현실 또한 언제든 벌받을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 이는 식민지 시기의 괴담2)이 그러하듯, 합리성으로 모든 것이 설명이 불가능한 현실을 직시함에 따라 불안한 현재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이야기화한 것이다. 즉 현실기술주의 및 인간중심주의에 근간한 합리성 이데올로기라는 망령을 퇴치하는 문학적 엑소시즘이다


  증오의 추체험


  우리가 살면서 타인에게 가지게 되는 증오만큼 좀체 승화되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증오가 얼마나 타당한 경험에 따른 것이 든지 간에, 대개의 경우 증오의 요인이 되는 사람보다 증오를 품게되는 사람이 더 큰 고통을 경험한다. 백온유의 「전염」(『현대문학』 3월호)은 이렇듯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처되기 어려운 현실의 증오에 대한 오컬트적 승화 양상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나’가 오래 연을 끊고 살았던 언니로부터 ‘그러지 말고 한번 오라’는 연락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제 상황에 의해 절연했던 형제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게 된 상황이다. 소설은 다음 장면에서 ‘나’가 언니와 연을 끊고 난 이후의 어느날 엄마로부터 언니의 몸이 좋지 않다며 연락을 받았던 몇 년 전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픈 언니는 무당을 찾아가기에 이르고, 이윽고 신병이라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는 조언을 듣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언니가 다소 연극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속이거나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했음을 떠올리면서 코웃음 치지만, 가족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내림굿에 참석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가 떠올리는 것은 언니가 가증스럽고 우스운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부모의 지원 없이 상경해 살던 20대 초반, ‘나’는 언니와 함께 살면서 생활비를 대기 위해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으지만 언니가 진 큰 빚을 갚는 데 그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종내 ‘나’의 전 재산을 들고 사라지기까지 했기에 ‘나’에게 언니는 “내 젊음을 갉아먹고 구렁텅이에 빠뜨린 철천지원수”이자 “구제불능의 이기주의자, 위선자, 사이코패스, 저주받아 마땅한 나르시시스트”로 명명된다.

  현재의 ‘나’가 그런 언니와 다시 연락을 하게 된 까닭은 소설의 말미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일’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의학적 기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말라간다는 정황이 드리운다. 언니의 신당에 찾아간 ‘나’가 유산 사실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는 하나(“태어나지 않은 아기도 원한을 가질 수 있을까”) 소설은 그 끝에 이르러 ‘나’의 증오가 피어오르는 삶의 다른 국면을 폭로한다. 언니가 씻김굿을 해주는 대신 그간 ‘나’에게 저질렀던 모든 잘못을 탕감해주기로 한 거래가 성사된 이후 시작된 굿판에서, 자신이 모시는 신에게 빙의한 언니는 ‘나’가 자신을 속였다고 말하면서 “사내 둘”을 언급하며 그 원한을 대리 갚음해주겠다고 말한다. 알고 보니 ‘나’의 남편이 한 남자와 외도 중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이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면서 말라가던 중이었는데 그것을 간파한 유일한 사람이 빙의한 언니였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생각하며 “선녀님 외의 타인들이 외면했던 나의 호소와 눈물들을 떠올”린다

  소설은 인물의 내력이나 사연에 대해서 집요하게 탐색해나간다기보다는 인물의 증오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정보를 최소화한다. 이는 ‘나’가 자신에게 일어났던 고통을 누구에게도 어떤 식으로도 말할 수 없어서 결국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야 사정을 한 문단으로 압축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방식의 유보적 장치다. 언니를 뒷바라지하고 남편이 남자와 바람이 났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벌해져야 한다는 죗값의 요소인지 아닌지, 또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가 아니다. 도무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할 수 없고 의미조차도 찾을 수 없는 고통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유 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문학이 지닌 허구적 가정假定은 무언가를 용서하거나 현실에서 불가능한 진실을 밝힘으로써 삶의 불가해함을 해소해주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처럼 좀체 언어화될 수조차 없는 고통을 초월적 매개물(신내림)을 통해 상쇄시키기도 한다. 조금은 허황되어 보일지 모르는 이러한 초월적 방식의 해소는, 갈등의 근본적인 부분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실제 현실에서 해소되지 못하는 고통을 상상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소지를 남긴다


  장르의 결합, 너를 이해하기 위한 빙의


  이희주의 「0302♡」(『악스트』 3/4월호)는 오컬트적인 요소를 활용한 현실의 타개를 비슷한 맥락에서 가져가되 장르문학적인 문법을 결합하여 발랄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앞의 두 소설이 일종의 ‘기담’으로서 불가해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면, 이희주의 소설에서 ‘빙의’는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되어보기’로 재현됨으로써 보다 직관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절친인 희주와 유리가 우연한 계기로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사고(?)로 시작된다. ‘사거리의 미소년’을 보러 간 두 사람은 길거리의 노인에게 사탕을 나누어주는 호의를 베풀고 때마침 미소년을 목격함에 따라 하늘에서 “전지전능하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목소리에 응답하여 그 찰나에 소원을 빈다. 그 결과 유리는 ‘사거리 의 미소년’이 되었고 희주는 그의 절친이 된다. 이후 유리가 학교의 대스타가 되어 학생들의 과도한 욕망을 둘러싼 기묘한 경험을 하거나 나아가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하고도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식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두 사람이 친구란 사실, 몸이 바뀌기 이전의 기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영혼의 깃듦과 몸 바뀜’은 일종의 정신적 기억과 유대감이 유지된 상태의 빙의라는 요소 일부를 차용한다. 특히 실존하는 사거리의 미소년이 된 유리의 경우는 다른 영혼이 몸에 귀의한다는 차원에서 빙의에 가까운데, 희주의 경우 본래 있던 다른 존재의 몸에 깃들었다기보다는 단지 다른 몸을 한 유리의 절친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빙의의 요소가 다소 애매하게 걸쳐져 있다.

  큰 틀에서의 빙의, 즉 영혼의 ‘깃듦’이라는 장치를 활용한 이 서사에서의 핵심은 두 사람이 빌었던 소원이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태가 되기’에 있었다는 점이며, 이에 타인의 표상을 ‘빌려’ 물리적 법칙에 가로막힌 소망을 실현시켰다는 데 있다. 유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을 받게 해달라고” 빌었고 그 결과 사거리의 미소년의 육체를 얻었다. 희주는 “영원한 관찰자”로 유리의 곁에 있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그에 따라 변하기 전 유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유일한 사람이되 유리의 신체적 성별이 변화함에 따라 그 자신도 남성인 절친이 되었다. 이들이 타인의 모습으로 갈음 되거나 혹은 그 몸에 영혼의 형태로 빙의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빙의는 ‘빙의된 존재’로서 더더욱 불가해한 존재로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불가해함이라는 요소를 기꺼이 감수한 채 ‘되어보기’를 애정으로 시도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희주 소설 속 빙의에 대한 상상력이 오컬트적인 문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음에도, 현실의 문법에서 불가능하고 때로 기이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다른 사람 되기’가 불쾌하고 위협적 형상이 아니라 불가해한 다른 존재 되기를 시도하기에 대한 응원으로 읽히는 까닭일 것이다.

  • 1)「사바하」(2019)와 「곡성」(2016)을 중심으로 오컬트 서사의 한국적 변형 양상을 탐구한 논문에 따르면, 두 영화는 기존 서구 중심의 오컬트 문법과는 다르게 “여귀의 환영이 여전히 등장하나 주된 요소가 되지는 못하”며 “복수 메커니즘” 또한 부분적으로 등장하기는 하나 해소되지 못하는 형태로 변형된다. “이는 새로운 경향의 하위 오컬트 장르인 좀비 영화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따르지 않고, 무속도 등장하지 않고, 복수도 등장하지 않은 채 원인을 알 수 없는 재난의 형태”를 보인다고 분석된다.(유지은·양윤호, 「한국 오컬트 영화의 서사 관습 변화 분석-「사바하」와 「곡성」을 중심으로」, 『영상문화콘텐츠연구』 26집, 2022, 218쪽) 두 영화가 세월호 참사(2014) 이후, 코로나19 시기(2020-2022) 사이에 제작 및 개봉되었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원인 파악이 불가능한 형태의 오컬트적 재현은 그저 ‘새로운 서사적 양식’이 아니라 사회 맥락 위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발생한 정동은 단순한 절망감이 아니라 ‘인간적이지 않은 대처’에 대한 분노와 속수무책과 그에 따른 절망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오컬트적 문법에 접목시키고자 할 때, 작품 속에서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 및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속수무책의 감각은 손쉽게 대상에 대한 ‘처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논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도무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는 채 벌어진 ‘재난’의 감각은, 재난 자체 그리고 그 ‘재난의 실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만듦에 따라 해당 상황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든다. 이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경험적 정서와 비슷하다.
  • 2) 일제강점기 괴담의 플롯과 다변성을 주목한 연구에서는 괴담의 출현 자체는 혼란한 시대상에 대한 반응으로 폭증된 바 있으며, 구전설화의 형식에서 목격담, 경험담과 같은 사실성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변화함에 따라 “근대적 인본주의, 과학주의, 리얼리즘의 설화적 반영”(염원희, 「일제강점기 괴담의 특징과 현대 도시전설 형성에 관한 시고」, 『한국민족문화』 69호, 2018, 84쪽)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지않는 초자연적이고 초현실적인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근대의 과학 및 합리성 을 강조하려는 시도였으나, 종내 그 합리적 설명이 실패함에 따라 “전근대 질서의 몰락과 근대 질서의 대두 사이에서 유동하던 시대의 불안”(이주라, 「일제강점기 괴담의 특징과 한국 공포물의 장르적 관습」, 『우리문학연구』 45집, 2015, 371쪽)을 보여주었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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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호에 덧붙여 : 완전한 미래에 대한 몽상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마지막 챕터 ‘원의 현상학’에는 ‘새’에 관한 곱씹어볼만한 진술이 제시된다. 바슐라르는 ‘새는 거의 전적으로 구형이다’라고 말한 미슐레의 문장과 ‘그 둥근 새소리’를 노래한 릴케의 시구를 곱씹어본 뒤 이렇게 말한다. “둥근 존재의 둥근 소리는 하늘을 둥글게 하여 둥근 천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둥글게 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쉬고 있는 것 같다.”1) 여기서 시인들이 말한 ‘새의 둥긂’으로부터 바슐라르가 연상한 것은 새의 둥지이다. 하늘에는 그 어떤 것도 새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비상하는 새는 가장 완전한 쉼터에 머물다가 그 둥근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새를 ‘둥글다고’ 느끼는 감수성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다. 하늘을 곧 새의 둥지로 연상하는 상상력 또한 관습적이지 않다. 따라서 나는 조금 익숙한 맥락에서 ‘새의 둥긂’에 대해 해석해본다. 왜 새는 현대인에게, 더 정확히 말해 도심 속에서 새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둥글게’ 느껴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새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고작 샛길을 택하는 게 전부인 사람의 운명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방향이든 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둥긂의 본질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글다. 그 둥긂은 인간이 소유해보지 못한 자유의 근본적인 심상이다. 자전거포를 지나며 생각한다 저 탐스러운 바퀴 하나만 나에게 팔면 안 되나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들 중에서 자전거 말고 타이어 말고 그렇게는 안 판다면 훔치는 것도 안 되나 달리는 말의 네 발굽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을 보려는 경마광의 호기심이 영화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저 바퀴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한 사람의 침묵이 상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상에서 겨우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일 텐데 겁먹지는 말자 그가 땅에 닿아본 적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다른 것 가지곤 집중하지 않으니 개미 한 마리 밟아죽인 적 없다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 살리거나 죽이는 일 아니곤 관심 없으니 맨홀 뚜껑에 도톰하게 새겨진 장미꽃 음각화 빙상 위로 미끄러지듯 그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나, 그는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 그는 당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스크린에 비친 풍경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가 기다리는 우연한 사건 맨홀 뚜껑을 훔쳐 달아나던 노인에 관한 보도를 읽다가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 메아리의 발꿈치는 정말로 동그란가 딴생각에 잠겨 그의 편자가 지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보지 못한다 유계영, 「이미지 서클」 전문(『현대문학』 2025년 3월호) 마찬가지로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라는 유계영 시인의 물음 속에서는 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깃들어 있다. 시적인 이미지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둥긂에 대한 지향이 있다. 세상을 둥글게 느끼는 감각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세상을 몽상하기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왜 시인에게 자전거 가게의 바퀴 하나조차 ‘탐스러워’ 보이는가. 왜 그의 머릿속에는 지상에서 네 발굽이 지상에서 모두 떨어지는 경주마와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것일까. 왜 그는 가게 벽에 걸린 자전거를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라고 기록했을까. 「이미지 서클」의 배후에 놓인 몽상은 결국 바슐라르가 원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새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살고 싶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한 걸음을 몽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미래란 완벽하게 둥근 이미지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인간 그 이상일 수 있는 높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도달하는 높이가 잠깐의 도약이거나 ‘5밀리미터’ 정도의 비상에 지나지 않듯, 유계영 시인의 비상은 창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몽상에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불안을 드러낸다.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가진 사람은 없듯 어떤 시인도 자신의 몽상을 완전한 해답처럼 여기지 않는다. 시인은 ‘둥글다’라는 미적 심상 속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완전한 비행을 상상하기란 아주 어렵다. 미래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대개 직선로와 완전한 둥긂 사이의 어중간한 에움길의 이미지로 귀결한다. 예컨대 이상이 사로잡혔던 직선로의 이미지가 있다(「오감도 시제일호」). 한편 정현종이 사랑했던 둥근 이미지가 있다(「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유계영 시인이 그려낸 ‘둥근’ 이미지는 그 사이에 놓인다. 달리는 말처럼 잠깐의 탄력으로 현실을 벗어나기. 눈앞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조금은 뒤틀어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가는 에움길이 곧 시인이 그려내는 미래의 이미지이다. 2. 문학적 시간론에 입각한 부조리의 정의 앞서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규정을 설명하였다. 문학적 시간은 물리적 운동보다 내면의 운동이며, 내면의 운동은 곧 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는 바꿀 수 있지만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역설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적 자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의 고난 중에서 무엇인가는 ‘불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듯,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자아는 성숙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설은 다음과 같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득한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실감 또한 없다. 그리고 숭고한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간을 지속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따라서 성숙은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였고, 따라서 성숙은 부모를 대신할 애틋한 만남과 승화의 방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라면, 즉 자아도 타인도 세계도 영문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거기에 ‘내면의 흐름’은 없다. 하루는 나무와 나무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어금니에 씨앗을 심는다.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고 써도 나쁘지 않았겠네. 그래서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 씨앗은 달아오르고, 달아오르는 씨앗이 중얼거린다;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그게 문제야- 늘 그렇듯이.) 하루는 구름 사냥을 하며 중얼거린다; 휘영청 달무리 깊은 골 어딘가 드러누워 부운浮雲을 핑계 삼아 술잔만 치며 살고 싶다고. 치고, 치고, 또 침으로써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네가 너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난센스 같군.) 발 없는 새가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디딜 수 없는 (위태한)나무를. - 나무의 자리에 삶이 들어가면 뭐, 나쁘지 않았을지도. 참, 집결지는 무악산이야. 잊지 말길. (그리고 잊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너- 늘 그렇듯이) 또 하루는 네가 중얼거리면서 중얼거린다- 늘 그렇듯이 동시에; 휘영청 달무리 적막한 산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뜬구름이란 뜬구름은 다 끌어내려 앉히기 위해 사냥을 벌인 것이라고.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 (구름은 오븐보다 팬에 구워야 더 맛있다.) 하루는 CU무악산점 앞에 널린 생선 박스 중 하나를 주워 네가 너를 수납하고, 포승을 칭칭칭칭칭칭칭칭 감는다. (항우와 우희의 절절한 러브?) 진부하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내쉬어 보시길 권유! 왜 이렇게 비좁지?-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으로 곧잘 살아왔듯이. 그럼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이제 매일을 하루처럼 사는 당신에게 귀 기울여 보자; 이 생선 박스는 내가 나의 생활을 독려하는 공간이자,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이다. * 내가 생물이라는 조건하에서만. (내가 상상한 나는 발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식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뇌관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갈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배꼽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항문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없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 박지일, 「쓰면서 쓰고, 읽으면서 읽은 것들」 전문 (『시와사상』 2025년 봄호) 여기서 내용보다 먼저 감상되어야 할 것은 어조이다. 이 시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도 반대로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는 투로 모든 것이 증언된다. 최초에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접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나 씨앗을 잉태했을 때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생명의 탄생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진다. 또한 ‘나’는 뜬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독백하면서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절박하게 ‘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기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발상에 가깝다. ‘나’는 약속 장소에 대해서도 잊어도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에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권유해보다가도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조금 더 세심히 내용을 분석해보자. 여기서 희구되는 것은, 앞서 논의한 유계영의 시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시인은 저 위태한 나무가 씨앗으로 ‘폭발하는’ 순간과 저 구름이 흘러가고 흩어지듯 ‘내 자신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도 당신이라는 그 비좁은 존재를 벗어나보라고 권유한다. ‘나’에게 삶은 “생선 박스” 같은 것인데,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처럼 세상은 날 사육하는 것만 같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묻자. 도대체 박지일 시인을 가두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라고 시인이 독백할 때, 그를 ‘포승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은 그의 시에서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단지 모든 타자의 이미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스쳐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유계영의 시에서는 ‘멀어지는’ 아득한 자전거의 이미지가 존재했다. 유계영에게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간절함이 내재했다. 반면 박지일의 시는 씨앗이 폭발하여 싹을 틔우든, 구름이 흘러가든, 그저 반복되는 ‘하루’만이 진술될 뿐이다. 이 시에는 뚜렷한 원근감이 없다. 그의 시에는 내적 시간의 닻이 될 절망이 없다. 가없이 ‘반복하며’ 인간을 끌어내리는 덧없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내면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 또한 덧없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을 가질 수 없다”라는 진술 구조의 반복은 존재 상실을 가리킨다. 상실의 징후는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취소선의 형식으로 극대화된다. 이때 부조리의 개념을 빌려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겠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설명했듯 부조리는 세상의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터 시작한다.2) 삶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로써 지속할 필연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박지일의 시에서도 세상은 어떤 식으로 대하든 ‘별 것 아닌’ 무의미한 대상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카뮈가 묘사한 실존적 비극은 삶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부조리란 삶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는’ 것을 택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반항하는 자의 비극이다. 박지일 시인의 시, 그리고 이전 호에서 분석했던 ‘부조리’에 가까웠던 시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로 그들의 시는 부조리의 절반만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무의미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지일 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방하는 형식이다. 삶의 무의미함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듯, 가장 내밀한 절망을 닻으로 삼지 않는 시 작품에 내면도 시간도 없다. 이러한 반문도 뒤따른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는 단언은 진정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절망을 감추는 방식은 아닐까. 이에 관한 대답은 미루어두자. 이 시에 내재한 무의미가 진실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박지일의 시는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사체험인 셈이다.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내면의 시간이 ‘흐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불변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먼 곳인 것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는 커다란 것처럼, 닿지 않는 것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언제나 소원 성취를 위한 장르, 즉 미래를 향해 투사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 것이다. 욕망에 뒤따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시간, 특히 시 장르에서 증언되는 모든 시간성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이다. 수많은 논자가 강조했듯 시적 시간의 본질은 ‘충만한 현재’이다. 충만한 현재란 기본적으로 시인이 그의 자아가 가장 충만한 순간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 즉 그가 살아낸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미래에 다가올 기쁨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금’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누군가 오롯이 삶을 살아낸 나 혹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스 마이어호프는 문학적 시간의 현재를 ‘통합’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무질서하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을 통합하는 ‘나’라고 동일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3) 그런데 여기서 음미해볼 것은 충만한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가 시간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시 말해 충만한 현재에는 언제나 이중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나’와 그것을 기록하는 ‘나’라는 이중의 시간 말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인 ‘시적 현재’인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를 맡기고 흘러갔다 떠내려오던 것들이 전부 내가 타지 않은 종이배였을 때 아…… 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구나 이미 말라버린 뒤의 이야기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 속에서도 물은 서로 헤어진 적 없다 안개를 나눠 가진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나는 이 길을 지우지 않고 기다림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는다 떠나기 전엔 왜 스스로를 붙잡는 기행이 되는지 젖은 수건이나 물기 맺힌 접시의 반짝임을 보며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둔다 고요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오지 않는 일로 그들이 나의 슬픔을 아껴주었다면 물 한 잔 허겁지겁 들이키게 된다 마른 식도로 흐르는 것을 느낄 때 내가 나를 살려주는 기분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 물의 직업을 베끼다 흘러가는 얼굴 꼭 붙잡은 채로 꺾인 길에서도 만날 수 없어 웃는 얼굴로 하나씩 지워가는 물녘의 약속들 서윤후, 「물길 빈티지」 전문 강물이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임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물기는 곧 사람과의 관계로도 읽을 수 있겠다. 우선 사람들의 ‘하류’가 나의 ‘물길’로 밀려오듯,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와 같았던 만남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어내듯, 시인은 아픈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담대하게 말해본다. 때론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며 슬픔을 털어놓고,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품으며 그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타인의 슬픔을 견디고, 앞으로의 슬픔을 견뎌내는 ‘지금’에 대해서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확인한다. 저 묵묵한 강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었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한 겹의 ‘현재’를 더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서술의 시간, 즉 수동적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어 기록하는 자의 시간이다. 서윤후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는 대신 ‘한다’고 섰고, ‘얼룩이 번진다’라고 쓰는 대신 ‘얼룩을 일으킨다’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시간을 견뎌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적인 시간성, 즉 충만한 현재의 본질은 바로 이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있다고 한다.왜 새벽은 사람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 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은 그 불면의 새벽에서 쓰는 행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위치로부터 그 경험을 ‘기록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나 어떤 잔혹한 상처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게 그것과 직접 대면하고 극복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은 대면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간이든 그 속의 타자를 현재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서윤후 시인의 시는 바로 충만한 현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그 모든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행하듯, 마음을 마음이 다하도록 행하는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92쪽. 2) 알베르 카뮈, 박언주 역,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2020, 32~35쪽 참조. 3) 한스 마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 속의 시간』, 문예출판사, 2003, 56쪽 참조.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유계영박지일서윤후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박동억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월간 현대문학 박동억 김안변혜지엄시연현대시시간시간성문학적 시간 2025
선우은실 상태로 말하는 방법 : 최재원 , 『백합의 지옥』 (민음사, 2024) /신미나 , 『백장미의 창백』 (문학동네, 2024)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계간 문학과사회 선우은실 최재원백합의 지옥신미나백장미의 창백상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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