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제145호)
드르륵, 드르륵, : 양안다, 『몽상과 거울』(아침달, 2023) _이린아, 『내 사랑을 시작한다』(문학과지성사 , 2023)
토바이어스 브래드퍼드Tobias Bradford의 작품 가운데에는 작은 탁자 밑면에 사람의 다리 모형이 장착된 장치가 있다. 다리 모형과 테이블 사이에는 전기로 동력을 얻는 원형의 나무 판이 기계장치와 함께 설치되어 있다. 장치에 전류가 흘러 나무 판을 회전시키면, 나무 판에 세로로 연결된 다리 모형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신발의 뒤꿈치 부분이 땅을 디디면 원운동은 땅을 미는 힘이 되어 장치 전체를 이동시킨다. 신발 앞코가 향하는 방향, 원이 회전하는 방향으로 탁자는 드르륵, 드르륵, 느린 리듬의 소음을 내며 나아간다. 1)
이 장치가 움직이는 방식을 보고 있으면 삶의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반복되는 원의 회전이 선적인 나아감을 만드는 모습은 반복되는 매일로서의 삶을 시각화한 것처럼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를 보는 대신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가만 듣고 있으면,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나무 판이나 모형 다리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탁자 다리가 땅을 끄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가운데, 이 장치의 시간에는 들리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땅의 질감에 따라 같게도 다르게도 들리는 소리들이 있다. 장치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들리거나 들리지 않는 소리도 함께. 그런 시간의 품은 가청역보다 넓다. 그 넓이 안에서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은 하나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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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다의 『몽상과 거울』은 시집의 형식으로 먼저 말을 건다. 표지와 내지, 이미지와 글자, 시집의 구조와 구성 모두에서 그렇다. 1) 물감을 뿌리고 번지게 둔 듯한 시집의 표지 이미지는, 책등을 기준으로 앞표지와 뒤표지가 대칭을 이루는 듯 배치되어 있다. 2) 앞표지에 적힌 시집의 제목은 뒤표지의 같은 위치에 역순으로, 좌우로 뒤집어진 모양으로 적혀 있다. 3) 표지를 열고 들어가면 시집의 1부는 스물한 편, 2부는 한 편, 3부는 다시 스물한 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1부와 3부는 서로 쌍을 이루는 제목들을 공유하는 채로, 서로의 역순으로 시를 배치한다. 4) 2부를 가운데 둔 대칭 구성은 2부의 시 제목 ‘ xanax’의 회문 형식과 연결되어, 시 「xanax」 속 한 지점을 기준으로 시집의 앞뒤가 대칭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게 한다.
책등을 기준으로, 혹은 책의 중간 지점을 기준으로 표지의 좌우, 내지의 좌우를 구분하는 방법은 좌우대칭을 활용하는 데칼코마니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러한 배치에 이름을 붙인 제목들은 대칭을 좌우가 아닌 앞뒤의 문제로 바꾼다. 5) 1부의 제목 “거울 안에는 우리가 있다”와 3부의 제목 “거울 밖에는 내가 있다” 사이에 놓인 2부의 제목 “가운데에는 거울이 있다”는, 시집의 ‘가운데’에 ‘거울’을 세운다. 이 거울을 두고 표지와 내지의 좌우대칭 원리는 ‘안’과 ‘밖’을 나누는 거울의 앞뒤 대칭 원리로 번역된다. 1부의 시와 3부의 시는 서로를 비추며 제목을 공유하고, 순차적 읽기가 아닌 대칭적 읽기의 대상이 되어 자신의 ‘앞’에 놓인 시를 마주 본다. 표지의 글자와 이미지는 그런 내지 전체를 하나의 거울로 삼아 앞뒤로 서로를 비춘다. 그렇게 제목의 힘으로 『몽상과 거울』은 거울이 기능하는 세계를 구현한 하나의 공간이 된다.
시집의 형식이 읽기의 방법을 효과적으로 제어한다면, 거울 법칙을 따라 1부와 3부의 시들이 ‘안’과 ‘밖’을 나누어 갖는 맥락과 2부의 ‘비추는’ 기능을 파악하며 시집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1부는 실재가 아닌 거울에 비친 상들의 이야기로, 2부는 세계를 분리시키는 경계, ‘가상’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이자 ‘나’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3부의 시들은 ‘거울 안’과 무관히도 존재하는 ‘나’의 현실을 기술하는 언어로 읽으면서 말이다. 거울의 문법은 안과 밖, 허상과 실상, 대상과 주체, 일인칭 복수와 일인칭 단수 사이 경계와 거리를 선명하게 강조하고, 그 문법을 따라 만들어질 때 독법은 거울 자체의 기능과 효과에 방점을 둔다. 그런 원리 속에서 『몽상과 거울』은 거울의 안팎을 말할 수 있는 ‘거울 밖’의 시점에서, ‘거울 안’과 거울 자체를 인지하는 ‘나’의 정확한 시선에 관한 시집으로 독해될 수 있다. 나아가 시집은 앞에서 뒤로, 거울 안에서 거울 밖으로, 허상에서 실상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서사로 읽힐 수도 있다. ‘나아가는’이 ‘나아지는’으로 오인되기도 하는 복판에서 말이다.
괜찮아요. 호르몬이 균형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실패한 룸펜들의 밤」 부분
하지만 이 시집을 나아짐의 서사로, 그런 서사를 가늠하게 하는 선명한 거울의 문법으로 가뿐히 정리해낼 수 있을까. 양안다의 시는 꼭 닮은 채로 겹쳐질 리 없이 나누어진 거울 ‘안’과 ‘밖’의 이분법을, 세계를 둘로 나누는 대칭의 무덤한 선을 성실히 그리고, 겹겹의 장치로 견고히 만든다. 그러나 시집 전체를 압도하는 듯 보이는 ‘거울’이라는 규칙은 만들어지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흐릿해지고 있기도 하다. 대칭인 듯 보이는 표지 이미지의 물감이 실은 좌와 우로, 혹은 거울의 앞과 뒤로 서로를 비추지 않으면서, 그저 하나의 몸으로 다르게 번지고 있듯 말이다.
『몽상과 거울』을 열고 닫는 시의 제목 「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에서처럼, 양안다의 시는 육체와 영혼, 몸과 마음, 꿈밖과 꿈속을 나누는 표현들을 반복한다. 누군가가 “나에게서 무엇을 이해”해주길 바랄 때 그 무엇은 종종 “영혼”(「문라이트」)이고, 그것은 꿈속에서 ‘악보’ 없이도 연주되는 ‘음악’ 같은 것이다.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춤을 추거나 음악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춤을 추는 양안다의 사람들은, 때로는 “얼굴을 할 수 없”(「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는 마음으로, 때로는 “내 몸에 영혼이 없다고 생각”(「꿈 일기」)하는 마음으로 “드라이플라워”(「목련밭」)와 “박제된/프리지어”(「12월」)를 떠올린다.
몸과 마음이 나누어져 각각 소외되고 있다는 감각은 양안다의 시에서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부채감, 혹은 두려움의 모습이어왔다. 그의 시는 이쪽의 없음이 저쪽의 있음과 나란한 평행의 세계를 상상하고, 그렇게 이쪽의 텅 빔을 견딘다. 다만 이쪽이 아닌 저쪽이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마련해야 할 것이어서, 그는 “손거울을 깨뜨리고/이것 봐./이것이 너다./그리고 나다”와 같이 시의 문장으로 자신의 세계를 쪼개고, “우리는 분열한다./네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면/우리가 달려간다./우리는 분열한다”(「실패한 룸펜들의 밤」)처럼 숨 가쁘게 이어 말한다. 나누기의 방법으로 ‘나’는 자신을 이미 쪼개어져 있던 ‘우리’로, 언제나 ‘너’를 위해 달려가는 ‘우리’들로 이름 짓는다. ‘너’ 역시 ‘나’가 쪼개어진 ‘우리’의 하나일지라도 말이다.
양안다의 시에 오래 있어온 여러 이름들에 그런 ‘우리’의 이름은 더하여져, 『몽상과 거울』에는 ‘로’ ‘이드’ ‘S’ ‘히나토’ ‘빈’ ‘듀듀’ ‘흰 토끼’ ‘연인’ ‘선생님’ ‘친구’ 같은 이들이 불러 모아진다. 그 모든 “나의 친구들”이 “세상 모든 단어들을/목련잎에 적어 날리기 시작”(「목련 경전」)할 때, 시의 언어는 “검은 양이 두루마리 휴지를/한 칸씩/ 뜯어서……/씹어 삼”(「더 짙은 블루」)키듯, 세계를 쪼개는 방식으로 텅 빈 곳을 채우려는 마음 자체이기를 택한다. 다른 말로 그것은 텅 빈 세계 속에서도 살아 있기 위해 자꾸만 말을, 그로써 세계를 하나 이상으로 나누어야만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줘./간지러워. 간지러워./섬광./섬광./섬광./킥 킥……”(「새의 눈으로 본 풍경」).
양안다가 시편들을 쌓아온 방법이기도 한 이 나누기는 줄곧 아픔과 고통, 불안과 회피, 대결과 저항의 일상들과 연결되어왔지만, 『몽상과 거울』에는 유난히 그런 일상을 ‘멍청이’의 착오로 언명하는 언어가 자주 틈입한다. “멍청한 놈들”(「실패한 룸펜들의 밤」) “멍청한 새끼”(「입원」) 같은 말은 “인센스가 타들어”가는 방 안에서 “나의 방을 비 젖은 숲으로 혼동”하는 “내가 기르는 두 마리 개”나, “길을 잃었다고 착각하”는 “어항 속 금붕어”(「구정물이 흐르는 내리막에서」), “그래봤자 나의 머릿속”인 줄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흰 토끼”를 향한다. 하지만 그 언어는 개와 금붕어와 흰 토끼의 입으로, 흰 토끼가 “빛 토끼라는 사실”을 모른 채 “빛과 흰색을 혼동”하는 ‘나’를 향해 되돌아온다. 나아가 양안다의 시가 오래 머물러온 자리를 곧장 겨냥하여, “세상 사람들은 꿈에서 만난 연인에 대해 말한다. 바보. 바보들이지 정말”(「새의 눈으로 본 풍경」)과 같이 씌어지기도 한다.
멍청한 것과 멍청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이런 판정의 언어가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실제가 아닌 것을 실제라고 믿는 것, 혹은 무엇이 실제인지 아닌지를 혼동하는 것은 ‘멍청함’에 해당한다는 논법이다. 그 언어가 “두루마리 휴지” 조각들처럼 ‘나’에게서 시작되어 ‘나’에게 도달할 때, ‘나’는 ‘멍청한’ 자와 ‘멍청함’을 힐난하는 자 가운데 어느 한쪽일 수가 없다. ‘나’와 개와 금붕어와 흰 토끼는 모두 ‘우리’로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멍청함’의 굴레에서 나누기의 문 법을 반복해야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나’는, ‘멍청함’을 이해하기 위해 ‘멍청하지 않음’의 구역을 만들고 그 구역을 이해하려 한다. 이곳의 텅 빔을 견디기 위해 ‘저곳’을 만드는 것이 양안다의 시가 되풀이해온 나누기라면, 저곳의 멂이 만드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곳’을 만드는 것으로 『몽상과 거울』은 오랜 반복을 계속한다. 이때 ‘이곳’이란 저곳으로부터 돌아오는 애초의 지점이 아니라, 저곳에서 만들어내는 ‘저곳’, 이곳인 적 없던 ‘이곳’이다.
거울을 바라보면
내가 보인다.
거울 속의 내가 거울을 바라보면
거울 밖의 내가 보인다.
─「거울과 거울」 전문
“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내가 보인다”(「거울과 거울」)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언어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진실에 닿거나 이미 있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쓰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거울 ‘밖’에서 실제로 있는 ‘나’를 확인하는 일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양안다의 시에서 이런 반복은 각자의 마침표로 적히는 각자의 문장들처럼 “내가 보”이는 방법이, 혹은 방향이 하나이기만 하지 않음을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거울”은 하나가 아니다.
“왼쪽 거울에 내가 보”이고 “오른쪽 거울에 내가 보”이듯 거울은 더해지고 더해지는 ‘우리’의 이름들처럼 그 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 거울은 때로 “지금 나는 양치기의 꿈이거나 전생이거나 최면에 빠져 있다는 걸” 아는 “연주자”(「one」)를 비추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렇게 이해하는 흰 토끼”(「사계」)를 비춘다. 하지만 때로는 “히나토, 주사기의 마음을 이해해본 적 있니. 누군가를 살리거나 누군가를 망가뜨리거나……”(「사계」) 그렇게 말을 걸며 살고 망가지는 것처럼 나누어진 것이 실상 나누어지지 않는 세계를 끝내 견디는 ‘나’를 비춘다. 거울은 “양이 울타리를 뛰어넘어//초원 밖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믿음”(「문라이트」)처럼 ‘멍청함’의 ‘밖’을 설정할 수 있게 하지만, “살기 위해”(「사계」) “시든 꽃으로 시간을 셈하”는, “꽃 하나”를 “꽃 둘”(「꿈 일기」)로 나누는 ‘나’의 시간을 다만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거울들 앞에서 이곳과 저곳, 멍청함과 멍청하지 않음은 대립하는 이항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되는 방법의 한 모습들이다.
노천극장에서.
상냥한 방식으로 눈보라가 내렸다. 무대는 계속된다. 비둘기들이 떼로 날아오를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과도가 놓여 있었다. 무대는 계속된다. 소년 배우가 칼을 던졌고 소녀 배우가 칼을 받았다. 소녀는 과도를 쥐고 캠프로 돌아갔다. 눈보라가 거세졌다. 모닥불은 모형이었다. 모형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이다. 소년은 소녀 곁에 앉아 모형 불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다. 무대는 계속된다.
나는 모든 것이 나쁘지 않았다.
─「개 두 마리」 부분
무대라는 장치는 무대 위와 아래를 구분하여 허구와 현실, 서사 안과 서사 밖, 캐릭터와 배우, 재현하는 세계와 재현되는 세계 같은 나누기의 논법을 만든다. “모형 불” 같은 장치를 더할 때 나누기의 원리는 더 견고해지고, “모형 불에 손을 넣었다 꺼”내는 “소년의 손이 끝내 녹아내리지 않”(「개 두 마리」)는다 것을 ‘아는’ 무대 밖 현실은 ‘모형’에 대하여 우위를 갖는 듯 여겨진다. “그런데 정말…… 창문은 닫혀 있던 걸까?”(「12월」) 무대 위와 아래, 무대 안과 밖을 나누는 선은 선명한 듯 선명하지 않다. 양안다의 시가 ‘극장 안’과 ‘극장 밖’이 구분되지 않는 “노천극장”을 ‘극장’으로 삼아 ‘극’이 이어지는 시간을 보여주듯, 무대의 이분법은 그러한 문법이 엄밀하게 성립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단호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다.
텅 비어 고통스러운 이곳을 견디기 위해 저곳을 만들어내는 경계선이 ‘멍청이’ 같은 말에 문득 구부러지는 것은, ‘멍청이’와 ‘안 멍청이’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거울 하나 옆에 다른 거울 하나를 세우는 것으로 쉬이 꼬여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양안다의 시가 그리는 선과 그 선들로 나누어지는 세계들의 대립은 그 자체로 시의 원리가 되거나 법칙이 되지 않는다. “무대는 계속”되고, 무대라는 방법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그러하며, 이때 계속되는 것은 무대 위 혹은 무대 밖 어느 한쪽이 아니라 이편과 저편을 구분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이어가는 방법 자체이다. 반복되는 것에는 반복하려는 마음이 있고, 정말 계속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마음의 이유이다.
너는 자면서도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
─「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 부분
시집을 닫는 시에서 양안다는 이런 표현을 적는다. 얼핏 이 문장은 ‘너’가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하는 ‘나’의 담담한 표현인 듯 읽힌다. 하지만 시집에서 이 말은 ‘너’를 위해, ‘너’를 기억하는 ‘나’를 위해 ‘나’가 스스로 되고 싶은, 되어가는 중인, 되어 있는 사람을 표현하는 언어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무의식중에도 나를 찾고 감싸는 손길이 아득하도록 그리운 이유는, 그것이 ‘무의식’에까지 틈입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과 몸이 분리되지 않을 만큼 힘이 센 마음을 체온처럼 가까이 감각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처럼 가깝게 ‘너’에게 손을 뻗기 위하여 양안다의 시는 “자면서도 내 손을 잡”는 ‘너’와 닮아 있는, 그러나 순서가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힘이 센 마음이 여기 없는 ‘너’에게 닿을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이 가로지를 ‘의식’과 ‘무의식’을 만들고, 꿈밖과 꿈속을 나누고, 그곳에 ‘영혼’과 ‘육체’를 배당하여, 그 모든 단절들을 단절이 아닌 것으로 도약해버리는 것. “어항 속 해마./어항 속 해마. 둘./잘 어울리지?/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게”(「실패한 룸펜들의 밤」). 마지막 말을 건네기 위해 처음의 말을 시작하고, 마지막 마음에 닿기 위해 세계를 쪼개는 일부터 시작하며, 마음을 말하기 위해 하나와 둘을 구분하는 셈으로부터 시작하는 일. 양안다의 시에서 계속되는 것은 그렇게 무언가를 위하여 시작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일 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불을 옮기기 위해 먼저 타는 “성냥”(「성냥」)처럼, 제 안을 쪼개고 마찰을 일으켜 몸에 불을 일으키는 자기연소법과 멀리 있지 않다.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은 꿈속과 꿈밖, 어제와 내일, 몽상과 현실 같은 구분들이 아니라, 그런 구분을 반복하면서 지켜내는 마음의 온도, 그 열의 시간일 것이다. 유리를 녹여 거울을 만들고 다시 거울을 녹여 무언가를 시작할 작은 불의 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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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린아의 『내 사랑을 시작한다』는 비유로 가득하다. 불안은 “유에프오”(「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꽉 채운 6시는 뒷마당의 수탉”(「주사위」), “집으로 돌아가는 건 노란 등에서 태어나는 것”(「신월」), “언니의 계절과 계절 사이를 훔친 나는 동그랗게 차오를 언니의 아치형 질투”(「틈」). 두세 번 곱씹게 하는 언어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표현 같기도, 몸의 색을 무시로 바꾸는 생명체들에게처럼 신체 깊숙이 새겨 있는 생존 전략 같기도 하다. 턱수염이 꼬불꼬불한 “아저씨가 다녀간 날이면/엄마에게도 꼬불꼬불한 털이 있”(「엄마의 지붕」)다 같은 표현은 아무것도 감추거나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가 감추어지면서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붙잡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과 보아야 할 것이 쉬이 일치하지 않는 ‘미확인비행물체’ 앞의 기분은 이린아의 시를 가로질러 어떤 이미지들을 발견하게 한다. 이를테면 그의 시에는 터지기 직전까지 빵빵하게 공기가 채워진 원형의 주머니가 있다. “왼쪽을 차면 오른쪽으로/오른쪽을 차면 다시 왼쪽으로 휘어”지는 “축구공”(「아픈 공기」)이나 “바글바글 우글우글” 공기 입자들로 가득한 “벌룬”(「벌룬의 저주」), “노랑 빨강 파랑이 가득한” “키다리 아저씨”가 부는 “풍선”(「풍선 부는 사람」)처럼, 비슷한 사물들이 하나의 이미지를 이룬다. 이때 이미지란, 사물들이 공유하는 형태적 유사성보다는 그것들이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팽팽하게 공기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축구를 “한 공기를 숨통이 트일 때까지 차고/우르르 몰려다니는 놀이”로 부르는 시의 언어가 ‘축구공’ 대신 “아픈 공기”를 보게 하듯 말이다.
“아픈 공기”(「아픈 공기」)의 입장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벌룬”의 상태는 “저주”(「벌룬의 저주」)와 다르지 않다. “풍선은 언제나 미리 울 준비를 하고 있”(「풍선 부는 사람」)는 사물이며, 그 막힌 세계의 안쪽에는 “캄캄한 항아리 속”처럼 “푸른 물고기들이 펄떡거리”(「항아리 마을」)고 있다. ‘안’의 입장에서 사물은 전혀 다르게 말해질 수 있고 또 다르게 말해져야만 하는 언어의 대상이다. 오래 이어져온 문법에 따라 하나의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사물의 어느 부분은 볼 수 없게 만든다면, 바로 그 부분을 시작으로 새로운 언어를, 문법을 이해하는 방법을 구상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린아의 언어는 그런 구축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란 응축된 결과값이 아니라, 너무 오래 응축되어온 것이 새어나가고 풀려나가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마련되는 일종의 기본값이다.
추신, 당신이 언제나 건강하기를 기원하며
때때로 태양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날에는 아무것도 깨닫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날의 모든 문자는 모조리 창문이다 나는 내 눈앞에 무심코 씌어진 글자들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매번 이해해왔기 때문에 함부로 나의 이해를 쓰고 싶지 않다는 건 때때로 내가 눈부신 태양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추신 같은 거다
─「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 부분
‘추신’은 편지 등의 말미에 덧붙는 글이다. 하지만 이린아는 “추신”을 가장 먼저 오는 언어로 위치시키면서 「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을 시작한다. 그에게는 이미 쓰인 것들, 한참 씌어온 문자들에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어를 꺼내놓을 수 있는 가뿐함이 중요하고 또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래 사용되어온 언어의 역사와 자장과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알 때, 그런 언어적 소속감은 종종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문득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불안이 시작되며, 그 공백을 시급히 채우는 일이 요청된다. 이린아의 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날에는 아무것도 깨닫지 않아도 된다”고 적으며 그런 조급함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건 이해하지 못함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관성에 스스로 제동을 거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간을 벌리며 이린아의 시가 하는 일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답’을 감춘 불투명으로 보는 대신 안팎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창문으로 둔 채, 그 창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볼 수 있고 볼 것인지를 스스로 헤아리는 일이다. “왜 의자는 의자야?” 단어를 얻어가는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처럼 자신의 생을 구성해온 단어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운동성을 비움과 동시에, 무엇 속에서 그 단어들을 써왔는지, 배경을 탐문해보는 일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그때에만 ‘나’를 “울 준비를 하고 있”는 “풍선”으로 만들어 “펑펑 터지”게 해온 타인, ‘숨을 불어 넣다’라는 관용구의 어감 속에서 “신神의 한 종류로 분류되”는 “사나이”(「풍선 부는 사람」)의 문법으로부터 ‘나’의 것으로 가져보지 못했던 ‘기본값’을 되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어요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나는 얻고야 마는 행동을 멈출 것이고 내가 개에게 물렸는지보다 개에게 내가 물렸는지 아니 내가 과연 개에게 물릴 수 있는지 개는 나를 물 수 있는지 내가 개를 물었는지 물어보겠지 그러다가 물리고─ 가장 먼저 가장 늦게 끝에 닿으면 가장 구하기 쉽고 가장 길게 무는 방법을 터득하겠지
─「도그 바이트Dog Bite」 부분
이린아의 시에는 개에게 물리거나, 마술사의 상자 속에서 몸이 잘리거나(「쉽게 열리는 무릎」), 간지럼을 버티거나 배탈이 나거나(「나비 정원」), 뺨을 맞거나(「뺨 맞은 관계들」) 바닥으로 떨어지거나(「항아리 마을」) 구토를 하는(「그룸Groom」) 신체들이 있다. 이 신체들은 누군가로부터 가해진 폭력과 안에서 반복되는 고통을 모두 몸의 기억으로 끌어안은 채 잠들지 못하고, “구부리지 못하는 손가락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중인”(「오렌지 섹션Orange Section」) 건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물음 속에는 언제나 피동의 문법에 묶여 있는 ‘나’와 ‘동생’과 ‘언니’, 그런 무수한 사람이 있다.
‘개가 사람을 물었다’와 ‘사람이 개에게 물렸다’라는 문장은 사실을 사실로 지시하는 단순한 말 같아 보인다. 하지만 문장의 안에서 본다면 사람은 ‘물다’를 ‘당한’ 목적어의 위치에 묶여 있고, 그러한 문법의 시간은 사실을 사실로서 직시하는 시선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한다. ‘당한’ 사람이 자신의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채 묻는 언어들이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렴”(「그룸Groom」) 조언처럼 말하며 입을 막는 언어처럼 말이다. 그런 피동의 자리에서 최초의 이해는 언어를 개발한 자에 의해 부여되며, 이후의 인식 역시 허락된 언어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문법은 종종 아주 일상적인 차원까지 닿아서, 사람은 “누구의 미움에도 뻔뻔해질 용기를 갖겠다며/결국, 책장 속으로 가” ‘용기’의 방법을 학습하고, 행정구역 안에서 “끊임없이 주소 를 옮기”듯 ‘내부’에 굳건히 머문다.
그러나 이린아의 시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를 읽고 나를 옮길 수 있나요?”(「불안의 사생활」) 하고 묻는다. 이 물음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삿된 ‘안심’의 영역에 무심코 머무르지 않기 위해 쓰는 추신 같은 것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매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만을 허용하는 이곳에서 그는 다음 두 개의 문장을 적는다. “내가 말하려는 건, 정말로,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것도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두 자기 자신만 결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함부로 나의 몸에 어떻게 그것을 기억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두 문장은 ‘결정하다’라는 동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쥐여주려는 의지와 마음으로 쓰이면서, ‘할 수 있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 반복한다. 이린아의 언어가 말하려는 건 ‘어떻게’의 자리에 모범 답안을 채워 넣는 방식의 ‘결정’이 아니다. 그가 적는 ‘결정하다’라는 동사는, ‘어떻게’에 어떤 언어를 채우든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달한 목소리들에 의해, 문법에 대한 ‘이해’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기본값’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시스템 안에서도 ‘기본’의 방식과 형식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거듭 말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이린아에게 동사는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될 수 있어야 하는 말이다. ‘내’라는 소유격은 그렇게 쓰인다.
“내 사랑을 시작한다”(「내 사랑을 시작한다」)라는 문장에서 ‘내 사랑’은 목적어의 자리에 있지만 ‘내가 사랑하다’라는 하나의 문장을 오롯이 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문장은 동사로 가득하고, 동사와 동사가 나란해지는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그 시간에는 분명 어떤 문법 안에서 목적어 자리에 놓여야 했던 기억과 몸에 각인되어 지속되는 통증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사를 찾고, 그것을 움켜쥐면서 이린아의 시는 계속 스스로 읽고 스스로 옮겨 간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귀신같은, 귀신같은」)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을 때, “당신이 언제나 건강하기를 기원하며/때때로 태양을 즐길 수 있기를 바”(「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란다는 ‘추신’ 혹은 시의 첫 문장 속에서 ‘나’는 ‘당신’과 나란할 수 있다. ‘나’와 ‘당신’이 ‘어떻게’ 보이든지, 매일의 다른 날씨들 속에서.
코끼리는 크고 둥그런 귀로 하늘을 날아요
천적이 없는 코끼리는 그래서
뒤로 걸을 필요가 없고
오래된 기억을 길게 가지고 놀아요
하지만 그것은 곧 죽을힘을 다해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오래된 기억이 생긴다는 뜻이에요 입술과 코가 붙어 있는 건 말 대신 원인을 찾는 데에 더 영리하다는 뜻이고 유별나게 크고 둥그런 귀는 자신의 비명을 영영 잊지 못한다는 뜻이니까요 작은 상자의 7일, 둔중한 막대기의 70시간, 날카로운 꼬챙이의 70리, 단단한 쇠사슬의 7백 리 속에서 뒤로 걷는 법, 따끔거리는 막대기가 자신의 상아보다 더 작다는 걸 잊어버리는, 주춤거리는 놀이예요
─「코끼리」 부분
‘서니사이드 업’은 달걀프라이를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이다. 동그란 노른자 부분이 해를 닮아서 붙여진 이 이름은, 노른자를 깨뜨리지 않은 프라이 중에서도 뒤집지 않은 채 한 면만 익힌 것을 말한다. 「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의 제목에 붙은 “햇살이 가득한 프라이팬을 뒤집지 마세요”라는 각주는, 노랗게 빛나는 밝음을 뒤집어 흰 막으로 덮어버리거나 깨뜨리지 말기를 바라는 요청으로 읽힌다. “언제나 건강하”듯 “태양을 즐”기는 것이 그렇게 매일의 상태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린아의 시는 “태양을 즐”기는 일이란 “때때로” 일어날 뿐이라는 것을, 프라이팬은 언제고 뒤집히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뒤로 걸을 필요가 없”는 채로 “오래된 기억을 길게 가지고” 노는 “코끼리”는 “크고 둥그런 귀로 하늘을” 나는 가뿐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린아의 이해 속에서 그는 몸에 기억과 경험을 새기고 있는, 몸 자체가 온통 비명인 존재이다. 이때 코끼리의 ‘놀이’는 축구공에게 그러한 것처럼 언제나 다른 언어를, 다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 비유의 시간 속에서 비명은 크고 깊으며, 쉬이 ‘이해’ 완료되지 않는다.
“태양을 즐”긴다는 것은 그러므로 어떤 맑음이나 밝음을 전부로 여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림자가 가장 길고 어두운 때와 해가 지상과 가장 가까운 때가 같아지는(「노을」) 매일의 노을처럼, 뒤집히는 의미들을 동시에 갖는 것, 지금껏 쓰인 언어와 지금 쓰는 언어 속 다른 위치들을 한 몸으로 상대해가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내 사랑을 시작한다”라는 이린아의 문장은 그래서 한 번 쓰이지 않고 계속 쓰인다. 그가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내’ 것으로 갖는 방법은 다시 보고, 다시 기억하고, 다시 이해하고, 다시 말하며, 다시 쓰면서 ‘시작하다’를 반복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다. 이린아의 시작(詩作)은 그런 시작(始作)들이며, 그런 동사들의 시간으로 여기에 있다.
“나는 노을을 좋아해”(「노을」)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나는 복숭아를 좋아해요”(「복숭아」)라는 문장으로 닫히는 이 시집으로부터, 추신은 계속 시작되는 중이다.
- 1) 작품의 제목은 「Restless」(2019)이다. 장치의 형태와 움직이는 방식은 작가의 개인 웹페이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https://www.tobiasbradford.com/rest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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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1. 림보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해가 뜨고 지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예외 없이 반복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 의미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 온전한 구원도 영원한 처벌도 아닌 기이한 경계 위에 놓인 끝모를 유예의 삶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텅 빈 약속에 기대어 자기 몫으로 주어진 무한한 침묵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견디며 서서히 소진되어 갈 뿐이다. 림보가 때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원형이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구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한없이 갈망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으면서도 간절히 희구하는 인간의 오래된 마음과 그 기이한 관성을 림보의 심연으로부터 불현듯 마주치게 되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흐르지 않는 시간의 더미 속을 오늘도 무심히 통과해 간다. 림보 안에 갇혀 있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망각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금까지의 생과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무한한 반복뿐인 오늘의 심부에 거칠게 쑤셔 넣는다. 어떤 부정도 외면도 더는 되풀이할 수 없을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생의 열기를 창백히 소진시켜 하루치의 안도와 평화를 가까스로 얻어낸다. 그렇게 림보의 일부가 되어 간다. 급류에 휩쓸리듯 림보의 심연에 깊이 좌초된 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허방 속을 무한히 배회하며 림보의 중력에 천천히 소화되어 간다. 이번 최호빈의 시편들은 이 림보의 심연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매혹과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화자들은 공허한 반복뿐인 림보의 시간을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살아냄으로써 정보와 명령의 과잉으로 점철된 현실의 앙상한 구조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오래도록 잊어온 살아 있다는 일의 경이와 그 선득한 실재를 회복해내고 있었다. 의미의 부재를 좇으면서도 섣불리 상상적 매개에 의지하지 않는 신중한 견고함으로 림보가 뿜어내는 육중한 중력을 존재의 내부로부터 캄캄히 씹어 삼키고 있었다. 림보의 심연 속을 항해하는 그 투명하고도 예리한 시적 섭생의 한 방식을 따라가 본다. 2. 림보의 출입구를 발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그토록 선명했던 목표도 출발점도 림보의 중력과 그 자장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것이 한없이 모호하고 흐릿해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림보는 단순히 삶만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온 일체의 가치나 의미까지도, 이에 기대어 뿌리내려온 존재의 모든 시간까지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린다. 림보에 갇힌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동력은 관성이며, 이는 삶의 고유성과 의미를 모두 말끔하게 지워버린 현재라는 강력한 동일성의 중심을 향해 어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아간다. 최호빈의 시는 그 맹목의 관성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투명하게 응시하되 어떤 확신도 포기도 신중히 경계하는 이중의 절제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성찰적 시가 도달하기 쉬운 환원론적 경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 낸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체온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혈압을 잰다 폐활량도, 골밀도도, 시력도, 심전도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맥박을 세고, 혈당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기록한다 오늘이 낮이 긴 날인지 밤이 긴 날인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있다 (중략) 체인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차르르, 차르르 하루가 하루를 굴리고 있다 ―「루틴 버그」 부분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맹목적 “루틴”뿐인 삶의 허망함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사유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이 림보의 중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근대적 자각의 형식을 빌린 손쉬운 착각 속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오직 동일한 운동의 “반동”과 그 강도에 기대어 “하루가/하루를 굴리”는 지리멸렬한 삶의 풍경은 명백한 부정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는 우리 삶의 조건이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며 그 삶이 놓여 있는 지배적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계몽적 맥락에서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림보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그 맹목뿐인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호빈의 시는 림보에 갇힌 생의 구체적 세부를 하나하나 주시하고 “기록”해 둠으로써, 그 텅 빈 강박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존재의 깊은 불안과 고독을 읽어낸다. “맥박”, “혈당”, “혈압” 등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수치화한 표백된 추상의 개념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살아가는 뒤틀린 허기뿐인 삶의 중심엔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없는 곳에서/점멸하는 가로등같이 애써 살아가는 오늘이/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나 우리,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닌데, 다음의 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선생님, 저희는 팔을 흔들며 달릴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궁금한걸요 (중략) 마지막 곡선코스를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 친구는 쓰러져 있었고, 한 친구는 울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고, 한 친구는 마치 신호를 듣지 못한 듯 출발선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손에 있었던 것은 건네주고 건네받는 릴레이 바통이 아니라 녹초가 될 때까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0의 릴레이」 부분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경주마의 은유는 이미 우리 생의 보편적 형식이 되었고,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이를 내면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당위적 상식과 표준 내지 윤리적 규율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녹초가 될 때까지” 결코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대의 “릴레이”란 사실 “릴레이”의 형식을 빌린 단독 경주에 불과하다. 우리가 참고 견뎌온 공동체의 경주가 실은 어떤 것도 서로에게 “건네주”거나 “건네받”지 못하는 “0의 릴레이”였다는 깨달음은 날카롭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물론 최호빈의 문장은 그와 같은 체념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비록 영원한 “0의 릴레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릴레이 바통”을 단 한 번도 서로에게 건넨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트랙을 도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이 공통의 운명에 처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였음을 아프게 지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번도 온전히 발설된 적 없는 “우리”가 림보 바깥의 시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면, 다음 절의 시편들은 이를 존재에 대한 질문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전환해내는 시적 사유의 깊이와 그 견고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3. 앞서 다룬 시편들이 림보에 갇힌 삶의 구체적 세부와 그 표면에 비교적 밀착해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다음의 시편들은 성찰적 거리의 매개를 통해 림보의 바깥을 좀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사유한다. 이에 따라 시의 무대 역시 성격이 조금 달라지는데 이들 시편들에서 림보는 맹목의 관성과 공전(空轉)의 열기로 위태롭게 굴러가는 타성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매혹적인 탈경계적 공간으로 변모된다. 그럼에도 이를 림보의 차원에서 일컫는 까닭은, 이 마력의 공간이 언제나 경계와 경계 사이에 놓인 항구적 임시의 공간이며 오직 경계를 넘기 위한 갈망의 깊이만이 그 내부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최호빈의 다음과 같은 시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림보의 중심에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 림보 너머를 사유하고 매개하려는 존재 탐구의 의지를 드러낸다.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겠지. 별생각 없는 이마를 쓰다듬고 사라진 건 누굴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겹쳐 쥔 채, 조금씩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하는 너의 시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가 거기서 깨어난 적이 있다. 오늘도, 내일도. 네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오랜 꿈을 다시 꾸듯 네게 짖고 싶어. 그게 내 운명이라면, 컹컹. ―「데자뷰」 부분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또 건너왔다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돌 하나 정말 내 꿈에 누가 또 있는 걸까 세 번째 돌을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건너오다가 가라앉은 걸까 아니면 그냥 가져간 걸까 그냥 돌아간 걸까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물수제비」 부분 세계는 “미심쩍은 그림자들”로 대표되는 무의미한 일들의 무한한 반복과 단 하나 강렬한 사건적 의미의 출현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적대적 요소들의 대립으로 삶과 세계를 거칠게 이분화하여 환원시키려는 폭력적 의지와는 별 관련이 없는데, 의미의 부재와 결여는 상실된 존재의 시원을 회복하기 위한 인식의 토대이자 판단의 근거일 뿐, 무구한 세계에 죄를 물으려는 핏빛 단죄나 원한의 투사가 아닌 까닭이다. 그의 화자들은 “너”가 “날 선택했”다는 명료한 판단과 전제 위에서,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타자의 방문과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위에서 ‘너머’의 감각과 그 물성을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만, 이 간절한 열망은 언제나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라는 질문의 형식으로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라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기다림의 언어로만 발화되고 매개된다. 최호빈의 시에서 의미는 그렇게 찾아온다. 림보 바깥으로부터 건너온 환대와 초대의 몸짓들은 오로지 그 너머와의 맹약에 사로잡힌 화자의 절대적 갈망과 의지로 인해, 기다림에의 헌신과 그 오랜 견딤의 밀도로 인해 비로소 고유한 얼굴과 목소리를, 체온과 무게를 갖게 된다.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라는 시적 전언은 그러므로 또 하나의 절대적 기다림에 대한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 ‘나’를 투신하여 나를 지우려는 것도, ‘나’의 두터운 중력으로 꿈의 물성을 구부려 억지로 집어삼키려는 것도 아닌 이 투명한 기다림의 자세가 최호빈 시의 고유한 호흡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기다림이 있는 한, ‘너머’는 어디에서나 출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곳도 ‘림보’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다음의 시에서 림보는 세계를 집어삼키는 적대적 미로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 바깥을 상상하고 잉태하는 무수한 ‘너머’들의 자궁이자 그 기미들로 흘러넘치는 경계들의 성소로 현현된다. 조문하러 가는 장례식장은 얼마 전에도 갔던 곳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갔던 곳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아, 맥도날드 모든 불행은 멀리 있다는 듯 웃고 있는 맥 도 날 드 불 고 기 버 거 한참 뒤에 나타난 경찰이 정리를 해봐도 한번 막힌 도로는 쉽게 뚫리지 않고 눈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호루라기 소리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아, 글자 하나하나가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것처럼 묵묵히 솟아오르는 M c d o n a l d ’ s ―「이방인-맥도날드 불고기버거」 부분 “맥도날드”는 평소엔 아무런 문제도 의문도 일으키지 않는, 편리하고 무감한 숱한 일상의 장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퇴근길 막힌 도로처럼 꼼짝없이 림보에 갇히고 만 삶의 실재를 차분히 응시하려는 화자의 시선에 인해 일순간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처럼 분리되어 “묵묵히 솟아오”른다. 일상의 허기(“시장기에서 오는 쓸쓸함”)와 존재의 허기(“쓸쓸함에서 오는 시장기”)가 엇갈리며 뒤엉키는 이 기이한 경계적 시간 속에서 화자는 “맥도날드”라는 일상의 공간이 불현듯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무수한 “통로”들로 변신하는 시적 도약의 비일상적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맥도날드” 자체는 물론 어떤 숭고한 의미도 약속도 제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이하게 뒤틀린 경계적 공간들은 림보 너머의 삶과 그 선연한 물성들을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받아들이고 예감하게 한다. 이 너머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과 존재론적 갈망이 최호빈 시의 화자들이 ‘림보’의 심연을 헤매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것이 “너”라는 인칭으로 호명되든 “돌”이라는 존재론적 사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든, 불길하고 불가해한 실재에의 매개나 교차로로 묘사되든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최호빈의 화자들은 이 ‘너머’에 대한 사유와 갈망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실재들을 림보 속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림보’는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조건이자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 혹은 이미지이기에 앞서, ‘너머’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그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림보와 맺고 있는 곤경의 특수성을 얼마쯤 정확히 짚어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림보 안에서 태어나 ‘너머’를 꿈꾸고 갈망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림보는 우리를 가두지만, 동시에 그 가둠을 통해 깨어나게 한다. 깨어남을 갈망하게 한다. 림보는 우리의 적이면서 자궁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림보의 바깥은 림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림보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만 림보의 바깥으로 향할 수 있다. 최호빈의 시는 이 ‘림보’의 생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림보 안에서가 아닌 림보 속으로 쓰여진 기나긴 울음의 내력들을 그의 문장들로부터 뜨겁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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