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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 2024년 가을호(제147호)

오려 쓰기 오류 쓰기

홍성희 문학평론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려 쓰기 오류 쓰기 1)




습격


코끼리 무리가 차도를 가로지른다. 줄지은 차들은 크고 작은 코끼리가 길을 다 건너기를 기다린다. 한 개체는 차도 한가운데 서서 무리를 다 보낸 뒤, 차들을 향해 고개를 크게 움직이고 마저 길을 건넌다. 인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신사 코끼리로 유명해진다. 큰 오리 한 마리가 도로를 걷다 하수구를 점프하여 지난다. 뒤따르던 아홉 마리 새끼 오리도 힘껏 뛰어보지만 하수구 구멍으로 줄줄이 빠진다. 인간 구조대가 하수구 아래로 내려가 새끼 오리들을 한 마리씩 찾는다. 물에 쓸려 간 마지막 새끼 오리가 한참 걸려 구조되고, 내내 소리 내어 울던 큰 오리는 다시 새끼 오리들을 데리고 수풀로 사라진다. 야생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이런 영상은 널리 퍼진다. 관광객이 떨어뜨린 휴대폰을 건져 올려주는 야생 벨루가와, 휴대폰이 ‘신상 조개’인 줄 알고 바위에 신나게 찧어대는 해달 영상도 있다. 똑똑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인간의 사물을 든 자연 속 동물의 ‘해맑은’ 모습은 오늘날 지구의 다정을 기분 좋게 바라보게 한다.

     올해 여름에는 해안에 나타나는 해파리의 수가 크게 늘어 이슈가 되었다. 해수욕을 즐기다 해파리에 쏘이는 사람이 많아져 피서객이 줄고, 그물을 상하게 하는 해파리 떼 때문에 조업이 중단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언론 보도에서는 해변에서 큰 뜰채로 해파리를 건져 올리는 안전 요원의 모습과 모래 구덩이에 쌓인 해파리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여러 후기 글, 유튜브 영상에서도 초점화 된 이런 장면들은 주로 ‘공격’ ‘습격’ ‘피해’ ‘수거’ 같은 말과 나란히 있었다. 여름 바다는 ‘해수욕장’, 바다는 ‘어업 공간’, 그곳을 ‘습격’한 해파리들, 그로 인한 ‘피해’, 추가 피해를 줄이기 위한 ‘수거’ 작전. 길을 건너는 코끼리나 하수구에 빠진 새끼 오리들, 휴대폰을 부수는 해달은 ‘신사’나 ‘신상 조개’ 같은 비유적 언어와 함께 아름답고 귀여운 공존의 예로 코드화된다면, 바다에 가득한 크고 붉은 해파리는 공존할 수 없는 제거의 대상으로 언어화되고 이미지화된다. 바다 수온이 상승하면서 해파리의 서식 영역이 확대되었고 그 결과 인간과 서식 영역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런 표현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파리는 의미를 입는다.

     수년간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생태주의적 시선으로 현실을 마주할 것을 제안하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이 이어져왔다. 이 작업들은 인간과 자연, 문명과 야생, 지적 생물과 비지적 생물 사이의 구분과 분류, 가치 분배의 프레임을 반복해온 언어들 대신, 모든 것을 나란히 두고 함께 있음에 관해 사유하는 언어를 발명하고자 했다. 보기에 흐뭇한 ‘공존’의 영상들은 그러한 언어를 공유하고 축적하고자 하는 의도와 연결되어 흐뭇함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만큼 발달한 신체나 감정과 언어를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생물에 대하여서만 혹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권리와 공존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언어 속에서, 한번 자리하여 오래 명맥을 이어온 프레임의 힘은 여전하기도 하다. 구분하고 분류하고 가치를 배분하는 인간 언어의 프레임 그 안에서 코드화된 언어들은 여전히 특정한 방법으로 관계 맺으며 사유와 상상의 범위를 구조화한다.

     김혜순은 ‘여류 시인’이라는 호명이 이루어지는 프레임으로부터 분리되어 ‘여성 시인’이라는 코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호명된 시인이다. 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김혜순은 적극적인 비평 활동을 통해 새로운 코드화 작업에 직접 참여해오기도 했다. 그러한 궤적 속에서 그의 시는 ‘여성시’ ‘여성성’ ‘여성적 글쓰기’ 등 ‘여성 시인’과 관계된 여러 언어들와의 결합 속에서 읽혀왔다. 새롭게 발명되고 발견되어야 할 이 언어들을 어떤 내용 혹은 형식으로 마주하고 또 어떤 어휘들과의 관계망 가운데 구성할 것인가를 물을 때, 김혜순의 시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안해주는 장소로서 거듭 발견되었다. 프레임을 재-설정하고 그 안에 구체적인 코드값을 부여하는 작업에서 그의 시는 그 자체로 ‘여성성’을 발명하는 ‘여성시’이자 ‘여성적 글쓰기’의 한 모델로서 이름 불렸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일에 집중하는 가운데에도 김혜순의 시는, ‘여성 시인’ ‘여성시’ ‘여성성’ ‘여성적’ 등의 언어를 코드화하기 위한 기본 코드로서 ‘여성’ 혹은 ‘여자’라는 단어 자체를 바라보면서, 그것으로부터 오래되고 익숙하고 또 여전한 감각을 직시해내고, 그것을 끝내 달라지고 새로워지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왔다. 그의 시가 거듭 사용하는 ‘여자’라는 단어는, 그 단어에 오랜 기간 새겨지고 반복되어온 이미지, 경험, 신체, 상상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넘어서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 비판의 작업 속에서도 무언가 반복되고 있지 않은지를 켜켜이 살피려는 이중의 목적 속에서 씌어진다. 이를테면 김혜순은 ‘여자’라는 단어로 시를 꾸려가면서 그 단어와 그것을 사용하는 자신의 언어 체계를 들여다보는 메타적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코드는 논리와 상상의 대상이 될 때에도 언제나 현실에 발붙인 언어이고, 시의 언어와 시인 역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코드는 어떤 반복 속에 있어왔는가, 자신의 ‘여자’는 무엇을 반복하기도 하는가, 그 반복을 관통하는 권력은, 경험은 혹은 감정은 어떤 것인가. 그런 복수의 질문을 던지고 또 경유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여자’라는 언어의, ‘여자’를 구분하고 분류하고 배분하는 언어 구조의 오류를 오류 자체로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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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언어에서 오류는 무수한 코드로 세분되어 있다. 그 단순하고도 복잡한 언어 체계 내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고, 오류의 양상은 서로 다르며,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도 무수히 다르기 때문이다. 컴퓨터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여 실제 기능으로 실행시키는가와 더불어, 오류 상태를 어떻게 인지하고 구조적으로 파악하며 해결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류 코드는 언어의 외부에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내부에서 그 일부로서 구조 전체의 작동 및 오작동 가능성을 지시한다.

     김혜순의 시에서 세계는 어떤 오류가 반복되는 중인 곳이다. 첫 시집부터 근작인 열네번째 시집까지 시간을 가로질러 그의 시에는 뺨을 때리고 뺨을 맞는 이들이 반복하여 등장한다. 인물을 바꾸어 되풀이되는 이 장면은 왜 맞아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이의 혼란과 이해 없이도 때릴 수 있는 이의 기묘한 우월감을 거듭 시의 복판으로 부른다. 여기에서 오류는 맞는 이와 때리는 이 누구도 왜 이 장면이 반복되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이고 ‘잘못’인지를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몰매」, 『별』)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공백이 발생하는 그 오류의 지점에서 김혜순의 시는 웃음소리를 낸다. ‘와하하’ 하는, 통쾌하게 입 커지는 소리가 아니라, “낄낄낄”(「제목은 가뭄」, 『별』), “키득키득”(「사랑에 관하여」, 『별』), “깔깔깔”(「국사공부」, 『별』), “힛쭉힛쭉”(「진실」, 『별』)과 같이 감추고 내리누르는 소리이다. 첫 시집에 이어 두번째 시집까지 이어지는 그런 웃음의 자리에는 “낄낄거리며 나를 끌고 가/가로등 아래에 패대기치”(「殉葬」, 『허수아비』)는 사람과 “달려와 내 눈깔을” 찌르고는 “깔, 깔깔, 깔 흩어지” (「敵 1」, 『허수아비』)는 “아이들”처럼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길 좋아하는 이들의 비열이나 “자, 같이 웃어요. 급히 웃으라니까요. 웃기라도 해야잖아요?”(「말」, 『별』) 스스로 명령하며 세계의 폭력을 자조적으로 견디는 이들의 모멸이 있다. 그 비열과 모멸로부터 오류를 읽어낼 언어를 찾아가면서 김혜순의 시는 “키득키득/키득/당, 시, 늬, 내, 장, 은, 파, 라, 쿤, 너, 무, 굴, 멌, 어/당, 시, 늬, 내, 장, 은, 노, 라, 쿤, 황, 다, 리, 야”(「사랑에 관하여」, 『별』) “비명을 감추고/한껏 웃어보려고 입술을 비틀며/시궁창 같은 사연”(「사연」, 『허수아비』)을 읽어내려는 시도를 반복한다.

     그러나 “〈A가 좋아〉라고” 말하면 ‘B’가, ‘C’가, ‘A’가 달려와 둥 그런 순서대로 ‘나’를 때리는 세계(「몰매」, 『별』)에서 오류를 읽어낼 언어는 발견될 수가 없다. 애초에 무엇이, 어떻게, 왜 잘못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언어화하여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사실을 사실로서 말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무엇이 ‘사실’이고 ‘잘못’인지를 결정하는 철저한 언어의 통제 속에서 정확한 언어를 발화할 수 도, 정확한 언어로 읽힐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끝없이 에피소드들이 한 두릅 썩은 조기처럼/엮어져 대못에 걸리는”(「그곳 1」, 『지옥』) 곳에서 “드디어 발가벗기고 매 맞고/무거운 이야기를 옷인 양 입고/몸 위로 가득 글씨를 토하고야”(「그곳 2—마녀화형식」, 『지옥』) 마는 이들은, 주어진 언어만을 ‘글씨’로 쓸 수 있는 가운데 ‘사실’의 언어를 “─님금임 는귀 귀나당 귀”처럼, “내 입 속에 다시 처넣고/내 입술을 비틀어 닫”(「되돌아오는 말」, 『허수아비』)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입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허수아비』) 되어, “빈 들판에” 으름장 놓는 “허수./아비”이자, 실수(實數)가 아닌 ‘허수(虛數)’, 그것을 세우고 입히고 거는 ‘아비’가 구축한 “침묵에게 당”(「敵 2」, 『허수아비』)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언어 없는 상태에 놓인다.

     오류가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며, 해결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에서도 여전히 오류인 경우가 있다. 오류를 인지하고 구체화하는 언어가 ‘실행’의 단계에 놓이지 못하는 때, ‘실행’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일 것이다. 김혜순의 시는 세계의 비루를 알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자신이 왜 어떤 일을 어떻게 할 수밖에 없으며 해야만 하는지를 찾고, 언어화되지 않은 형태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어로, 언어를 통해 실수(實數)로 실행되지는 않는 상태에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갇힌다. “앞에서 벽이 다가온다/뒤에서 벽이 다가온다/그 가운데 내가 까마득히 매달려/흔적 없이 사라졌다가/다시 너에게 벽이 될 내가 매달려” (「 벽이 다가온다」, 『음화』), ‘낄낄’ 웃고 ‘침묵’하는 자신 역시 언어화되지 않은 오류의 일부로서, 오류를 재생산하면서,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달력』) ‘벽’을 수평으로 수직으로 물려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폐쇄된 오류의 복판에서 김혜순의 시는 입속에 갇힌 언어 대신 끝내 무엇을 어떻게 분출해낼 것인지를, 세계의 언어에 어떤 ‘답장’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 고민 가운데에 “코끼리 부인”이 있다.


네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코끼리 한 마리 풀어보낸다/얼마나 증오가 깊어야/두 눈동자 사이/미간에서 팔이 돋아나/통나무 둥치같은 것/마구 감아올리게 되는지//맷돌 같은 어금니로 무시무시한/웃음을 갈아 삼키면서/탱크처럼 아무거나 밟아 터뜨리고/꿈틀거리는 것이면 무엇이건/감아올리게 되는지//얼마나 절망이 깊어야/몇날며칠 머리를 받치고/눈물을 받던/잿빛 베개가 두 귓가에 들러붙어/펄렁거리게 되는지/네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사방에서 날아오는 소문의 화살이/귀찮아 죽겠다는 듯/두 베개를 연신 펄렁거리는/코끼리 한 마리 풀어보낸다/코끼리 발자국 닿을 때마다/글자들이 마구지워진다//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야/앙다문 입술 밖으로 불현듯/불멸의 상아가 치솟게 되는지/글자들의 숲속에 구멍 뻥뻥 뚫린다//이제 눈물 방울 얼룩진 편지를 찢어버리련다/그리고 창문 열어 코끼리처럼 딱딱하게/들어찬 잿빛 연기도 날려보내련다/아, 그러나 이 뾰족한 상아를 입가에 매단 채/어떻게 거리로 나가지?
—「코끼리 부인의 답장」(『사랑』) 전문


     ‘너’의 언어 앞에서 ‘나’는 깊은 증오와 절망의 힘으로 ‘너’의 글자들을 지우고, 글자에 구멍을 “뻥뻥 뚫”어 그 ‘허수’의 텅 빔, 혹은 복자(伏字) 같은 언어 간섭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새겨 넣으려 한다. 그럴 수 있는 거대하고 힘이 센 신체로 ‘코끼리’를 상상해내는 ‘나’의 전략은 그러나 ‘너’의 편지에 “눈물 방울 얼룩”을 남기거나 편지를 찢어버릴 따름이다. 코끼리의 거대한 몸은 “잿빛 연기”로 흩어져버리고, 코끼리의 흔적은 “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 돋아난 “뾰족한 상아”로만 ‘나’의 입가에 남아 있다. ‘나’는 이때 상아를 단 입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대신, “이 뾰족한 상아를 입가에 매단 채 어떻게”든 “거리로 나가”는 방식으로, 그 ‘뾰족함’ 자체를 ‘너’과 세계의 ‘거리’에 보이는 것으로 끝내 ‘답장’을 ‘보이고자’ 한다. 얼굴과 상아와 나가겠다는 마음을 다 준비해둔 상태에서 김혜순의 시는 다시, “어떻게 거리로 나가지?”라며 ‘실행’을 가능하게 할 방법을 묻는다. 이때 물음 속에서 연기로 흩어진 ‘코끼리’를 그는 “코끼리 부인”으로 호명한다. 시의 제목인 “코끼리 부인의 답장”에만 슬며시 적힌 이 ‘부인’이라는 단어는 ‘여자’ ‘어머니’ ‘딸’ 등의 단어로 옮아가면서, 김혜순 시의 언어적 세계와 세계에 대한 언어적 응전의 방법론의 뾰족한 상아가 된다.

     ‘실행’이 되지 않는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로세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체크하거나, 기체(機體)가 놓여 있는 환경 자체를 점검해야 한다고 한다. “내 코끼리마저 파먹어치울 것들”(「나는 고것들을 고양이라 부르련다」, 『사랑』)로 가득한 세계의 복판에서 “두꺼운 자물쇠로 잠긴 저 푸른 고막이 통치하는 나라”가 “무섭다”(「티티카카」, 『거울』)라고 하면서, 김혜순의 시는 스스로의 언어가 언어를 ‘실행’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지, ‘실행’을 위한 단계에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한다. 자신이 ‘실행’하고자 하는 것을 위한 조건들을 톺아보면서, 코끼리 ‘부인’의 상아를 가지고서. ‘여자’ ‘어머니’ ‘딸’과 같은 단어들은 ‘오류’의 일부로서, ‘오류’를 해결하기 위한 뾰족한 출발점으로서 김혜순 시의 중심이 되어간다. 이유 없는 ‘죄책감’에 늘 뺨처럼 시달리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러한 감정마저도 ‘오류’의 일부임을 알면서.



미치게 하는 말


김혜순의 시는 그 첫 시작에서부터 신체적·정신적·감정적 폭력을 당하는 위치에 대한 감각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 위치는 여성의 위치와 겹쳐 있지만, 위치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한쪽의 특질보다는 폭력이 반복되는 관계 자체의 기이한 특성이었다. 폭력이 아닌 ‘사랑’의 관계에서도 그 기이함은 계속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관하여 나누는 대화에서, ‘사랑’으로 주고받는 언어에서 언어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언제나 ‘문답’ 관계나 주종 관계, 포식자–피식자 관계, 선후 관계, 미숙–발달 관계 등 불균형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근본적으로 대결의 구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그 기울어짐은 “애벌레한마리와애벌레한마리가애벌레사랑을하는데애벌레가나비가되어도애벌레처럼사랑할까애벌레를벗어놓고나는날아오른다신나게애벌레를알아볼까나비가애벌레는껍질일까애벌레를벗어놓고너도날아오르는군애벌레는어머니일까아들일까애벌레두마리와나비두마리는어떻게서로사랑을해결할까”(「사랑에 관하여 2」, 『허수아비』) 같은 질문처럼 숨 가쁜 물음으로 반복된다. 이런 물음에는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주어지거나 자동적으로 발생해버리는 관계의 구도에 거듭 묶여 있는 자의 난처와 곤혹이 담겨 있다. 김혜순의 시가 그러한 ‘대결’의 구도에 계보의 문제를 더하여 반복을 시간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딸’과 ‘엄마’ ‘어머니’에 대해 말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돌아앉으셨고/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또 들어가니/또다시 들어가니/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모든 윗대조어머니들 앉으셨는데/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엄마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바람을 넣고/내 배는 풍선보다/더 커져서 바다 위로/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려다니고/거울 속은 넓고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청천벽력./정전. 암흑천지./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흰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감은/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딸을 낳던 날의 기억─판소리 사설조로」(『허수아비』) 전문


‘나’는 출산이라는 신체적·정신적·감정적 경험을 매개로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연쇄를 상상적 계보로 바라보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사성을 통해 경험을 연결된 것으로 인지하는 것뿐 아니라, 마주 본 두 거울이 서로를 비추어 무한히 반복되는 똑같은 상처럼 특정한 신체 이미지가 원근법을 가장한 평면 위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자신이 낳은 “공주” 역시 출생의 순간 이미 그 평면 속에 놓여버릴 수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피 묻고 눈감은/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조그만 어머니”인 아이는 ‘어머니’로 호명되는 존재들의 명맥 속에서 첫 이름이 불리는 자이자, 그 자신의 미래를 ‘어머니 되는’ 과거에 저당 잡힌 ‘딸’이다.

     그러나 이 계보학적이고도 평면적인 연쇄에 관한 인식에 머무는 대신, 김혜순의 시는 그 안에서 다시 반복되는 기이한 관계성과 반복되어온 것을 초과하는 다른 관계, 혹은 다른 언어적 가능성을 본다. ‘거울’ 속, 없는 깊이를 가로지르는 이미지는 ‘사실’을 비추는 것이기보다 몸의 범위를, 몸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을 결정해온 언어 구조의 시간을 비춘 것이고, 어떤 언어는 그러한 구조 자체를 다른 시선으로, ‘답’이 아닌 ‘오류’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야를 좁게 가져라/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영혼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정답처럼 명령과 금지의 메시지를 건네던 “엄마”의 “말씀”은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자동화된 자기 인식으로 연결된다. “어린 자식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널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우물을 파는/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엄마」, 『허수아비』)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제 들은 말을/ 내일 또 내가 지껄이고/내일 한 말을 어제 또 듣게 되리라”는 체념을 어쩔 수 없는 전망처럼, 약속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에게 “어린 자식”은 그러한 전망을 상속받은 적 없는 개별의 신체, “여기/갸우뚱거리며/엄마 배고파”라고 말하는 낱의 상태를 상기시킨다.

     ‘배고프다’라는 기초적이고 단편적이며 꾸밈없는 자기표현은 ‘나’에게 “처음 들어본 소리”(「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지옥』)처럼 ‘말씀’ 이전의 감각을 휘젓고, ‘거울’에 비친 겹겹의 신체가 어떤 ‘말’들에 갇혀 자신의 상상에, 전망에 도착했는가를 추적하게 한다. 그 단순한 ‘배고픔’이 ‘나’로 하여금 어떤 신체들을 ‘먹을 것’으로 제공하는 ‘모체(母體)’의 역할과 ‘엄마’라는 호칭에 머물게 할지라도, 배고픈 신체 자체는 그것을 “조그만 어머니”로 칭해버리는 오랜 서사 구조,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자동 연결되는 이미지 자체를 의문에 부치기 때문이다. ‘말씀’을 경유하여 ‘거울’을 보기 전에, 애초에 ‘거울’에 비친 상으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기 전에 개체는 ‘처음’ 어떤 신체감각을 간직하는가. 어제에서 내일로, 내일에서 어제로 동그랗게 순환하는 언어의 복판에서 ‘나’는 그런 ‘처음’을 기억하거나 회복해낼 수 없지만, 끝내 상상해보려는 작업을 개시한다. 김혜순의 시는 스스로도 호명하는 ‘어머니’ ‘딸’ ‘여자’ 같은 언어가 특정한 ‘말씀’들을 입고 있는 코드라는 사실, 그 코드가 활용되어온 시간의 궤적, 코드화가 지운 것은 무엇이고 ‘처음’으로 돌아가 복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복합적으로 살피면서, 1) 세상이 반복하는 ‘엄마’와 ‘딸’과 ‘여자(女子)’ 2) 자기 안에서 반복되는 ‘엄마’와 ‘딸’과 ‘여자’ 3) 반복이 중단되는 미래의 ‘엄마’와 ‘딸’과 ‘여자’, 세 가지 시선의 층위를 각각의 단어에 겹쳐 단어가 하나의 상에 머물지 않도록 한다. 거울의 평면은 그런 ‘불일치’를 통해서 그 자신의 오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의 궤적을 거칠게 정리한다면,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는 연극적인 무대 위에서 인물이 겪는 것들에 집중하고,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畫』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은 그 인물의 배경이 되는 무대의 조건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며, 『불쌍한 사랑 기계』부터는 인물에 배경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인물의 서사 자체가 어떻게 ‘무대화’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이 궤적은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본격적으로 ‘여자’ ‘딸’ ‘엄마’를 하나의 ‘역할’로 바라보고 그것의 배경을 살피면서, 동시에 ‘역할’에 대한 자신의 감각이 어떻게 배경의 논법에 종속되어 있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으로 나아가는 것과 맞물린다. 김혜순의 시는 “오늘밤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었지만/여자들이 맡은 배역은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몸부림치며 우는 역할뿐”(「물 속에 잠긴 TV」, 『달력』)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사실’에는 “수평아리는 모두 죽여 참새구이집으로” 보내고 “암평아리는” “키워서 잡아먹”기 위해 “모두 기숙사로”(「엄마는 깃털 샘인가 봐요」, 『달력』) 보내듯 “다만 허공에 주형을 뜨듯 찍어보는 육체의 얽힌 형식이 있을 뿐”(「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달력』)이라고 말한다. ‘사실’을 답이나 약속이 아닌 ‘형식’의 문제로 바라보는 이 비평적 시선은, ‘형식’을 표면적 현상 혹은 실천의 차원을 넘어 ‘남자’와 ‘여자’, ‘수평아리’와 ‘암평아리’를 구분하고 분류하며 가치 분배하는 언어 구조 전체의 오류로 바라본다. 그 ‘형식’은 언어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언제나 언어를 매개로 기억과 계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메아리처럼” 자꾸만 되돌아오는 흔적으로 ‘형식’은 ‘나’에게도 새겨져 있어, ‘나’는 “나이 먹어서도” “이제 갓 암컷이 된 새” “그 새파란 시절로,/그리로 자꾸만 돌아가”(「메아리가 갔다가 오는 만큼, 그 만큼」, 『달력』) 스스로의 몸을 ‘암컷’으로 바라본다. “내 몸에 보초를 세우”고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며 “나를 자꾸 상처로 가두”는 ‘너’의 언어를 경유하여, ‘나’는 자신의 몸을 “무늬 새겨진 몸”으로 인식한다. ‘여자’ ‘암컷’ ‘어머니’ ‘딸’ 같은 말들은 김혜순의 시에서 적히는 언어[文]인 채로 그것이 달라붙는 몸[身]을 대체해버리는 ‘문신(文身)’ (「文身」, 『달력』)으로 작용한다.


출근 지하철 안에서 새파란 처녀가/젖은 머리칼을 휘휘 내두르며/친구랑 떠들고 있다/신문 읽는 내 손등에 목덜미에/물이 뚝뚝 떨어져/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덩달아 신문도 젖어버렸다/소녀 시절/여러 번 같은 꿈을 꾸었다/누군가 붓에다 먹을 찍어/내 얼굴에다 자꾸 글씨를 썼다/눈을 떠보면(여전히 꿈속이었지만)/내 얼굴에 글씨를 쓰는 사람의/얼굴도 글씨로 가득했다/(그는 누구였을까)/(무슨 글자들이었을까)/실제로 출판사에 다닐 땐 내 입 안에/글씨로 엉킨 검은 실 뭉치가 가득 찬/날도 있었다/(결핵성 늑막염으로 가래를 퉤퉤 뱉고 다녔다)/ 집에 돌아와 목욕탕에서 거울을 보며/딸의 붓으로 얼굴에/글씨를 써 보았다/그러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그 시절 내 얼굴에 글씨를/쓰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얼굴에 쓴 글씨」(『달력』) 전문


이 시에는 여러 겹의 ‘문신’이 있다. “처녀”가 “내 손등에” 물로 쓰는 자국, “소녀” 시절 누군가가 ‘나’의 얼굴에 먹으로 쓴 글씨, 성인이 된 ‘나’가 뱉지도 삼키지도 않으며 입안에 가득 물고 있던 글씨, “딸”의 붓으로 ‘나’의 얼굴에 직접 쓰는 글씨. 몸에 흔적을 남기는 이 자국들에서 글씨를 쓰고 글씨 적히는 사람들은 서로 무의식중에 관계되어 있고, 자신이 ‘쓰지’ 않은 글씨에도 도구로서, 매개로서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서로에게 새기는 ‘글씨’의 자음과 모음은 김혜순에게 언어 구조에 깊이 새겨진 “子母”(「전 세계의 쥐들이여 단결하라」, 『슬픔치약』),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어머니 됨’의 프레임에 붙박인 여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너는 여자로 태어났으니 귀도 뚫어야 하고/어깨에 뽕도 넣고, 땅에 못을 치듯 걸어야 할 거다/느닷없이 찾아온 숨을 들이쉬지 못 하는 고통!/그건 첨 들어보지? 그 속에서 아기를 밖으로 밀어내야 할 거다/아니면 아기를 떼고 땅에 머리가 처박힌 참새 신세가 될 거다”(「출석부」, 『슬픔치약』) 같은 말을 휘두르는 이들이 움켜쥐고 있는 것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권력, 여하한 “신세”가 될 리 없는 남성 신체의 권력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체의 문제가 어째서 권력이 되는가인데, 그 배경에는 가장 강력한 ‘문신’이자 세계 창조라는 근원적 ‘처음’에서부터 신체에 ‘글씨’를 새긴 성경의 언어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브”(「오늘의 이브」, 『음화』), 동정녀 “마리아”(「신기루」, 『거울』), “아베 마리아”(「오리엔탈 특급 정갈한 식당 서비스」, 『돼지』) 같은 익숙한 말들에는 남성 신체의 부분, 남성 신체의 흔적, 남성 신체가 깃들 공간으로 여성 신체에 이름을 붙이는 ‘아버지’의 시선이 새겨져 있으며, 그 시선의 범세계적 역사 내부에서 “여자로 태어”난 이들은 자꾸만 몸에 글씨가 씌어지는 신체, 이미 항상 “무늬 새겨진 몸”으로 치환된다. 이때 ‘글씨’는 사각의 벽이 세워진 자음(子音) ‘ㅁ’ 같다. “‘ㅁ’으로 끝나는 글자들 속에서 우글거리는 벌 떼/신부님 선생님 판사님 사모님 자궁님 트라우ㅁㅁㅁ 세탁기”(「웅웅」, 『첫』), 자궁을 ‘자궁님’으로 만드는 오래된 글씨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하나님의 십자수와 레이스에 대한 강박, 1」, 『슬픔치약』)과 그 언어를 입은 “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 『슬픔치약』)이 ‘그녀’의 몸에 오늘도 ‘ㅁ’을 그리는 중이다.

     그러한 언어적 결박이 ‘어머니’가 “한 천 년째” “휘젓고 계”신 ‘바다’라면,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 (「어머니 달이 눈동자를 만드시는 밤」, 『달력』)이다. “만물은 큰 자궁의 영생을 위해 작은 자궁들로 한생 지분거리다 가는 것”(「맨홀인류」, 『슬픔치약』)이라는 문장이 ‘창조’ 이래 세계가 어떤 신체들에 반복하여 새겨온 글씨의 ‘바다’라면, 몸은 이미 항상 그 ‘바다’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금” “걸어나올” 수 있는 동체(動體), 독립된 신체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창조한 부모에게 ‘조그만 어머니’ 같은 말 대신 ‘배고픔’을 전하는 아이처럼, 김혜순의 시는 ‘처음’을 기억하고 상상하여 ‘여자’를 개체(個體)로 구하고자 한다. “자궁님”의 “이야기 속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여자/아직도 내 몸 밖으로 한번도 나와보지 못한 그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 (「유화부인」, 『거울』) 혹은 ‘여자’인 ‘나’가 스스로를 구하는 상상은, ‘여자’를 ‘이야기’에 속하는 ‘공통의 몸’으로 호명하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복수(複數)를 하나의 말로 통칭하는 언어를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에미애비」, 『첫』)는 개별의 몸들로 풀어내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는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쌀죽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 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다, 밤하늘 드넓은 궁창을 우러르기만 해도 무서워 뒈져버리는 돼지다, 뒈지는 돼지는 돼지라고 생각하는 뒈지는 돼지다//팔다리가 축 늘어진 돼지,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감추고 쿨적거리는 돼지, 허공을 묶었는데 왜 이리 무거워 돼지,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면 뜨거운 구름 냄새가 나 돼지, 부드러운 도대체 돼지, 아늑한 이윽고 돼지,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 돼지, 쥐가 새끼를 갉아먹어도 아늑한 돼지,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한번도 창문을 내다본 적 없는 돼지, 이빨 뽑힌 돼지, 탄식 돼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돼지라서 괜찮아」(『돼지』) 부분


인용된 부분에서 ‘돼지’라는 단어는 마흔 번 사용된다. 주어가 아니라 형용되는 명사의 위치에서 반복되는 ‘돼지’는, 같은 위치에서 나열되고 있음에도 개별의 돼지 개체들로 생각되기보다 ‘돼지’라는 종에 관한 복수의 서술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돼지’라 불리는 돼지들은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이고, 이름을 붙이고 부르고 맥락 속에 배치하는 인간의 시선에서 특히 “고기 돼지”이다. “이 품위 없는 단어 돼지”(「엘피 공장에서 만나요」, 『돼지』)는 개체를 지시할 때에도 그것의 종(種) 전체를 가리키듯 사용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비유적 전략을 항시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돼지’를 부르는 세계를 김혜순의 시는 “수사학이 헌법인 나라”라고 부른다.

     국경과 국법과 국민이 있을 이 ‘나라’에는 여러 비유가 있다. “북극곰 의인화, 경찰관/술 취한 토끼 의인화, 피의자”처럼 비유에 기대어 힘을 부리고 또 잘못을 피해 가는 국민들이 있고, “유령으로 태어나 유령으로 죽는 사람들”처럼 비유의 방식으로 이미 국민에서 제외된 존재들이 있다. ‘죽음’도 의인화하여 “흰옷 입은 천사”의 “현현” (「Y」, 『돼지』)이라 말하는 이곳에서 어떤 비유는 “고래”처럼 “유행” (「올해는 고래가 유행이야」, 『돼지』)하기도 하고, 국민들은 유행을 따라 미리 공유되고 전달되며 학습되는 코드로 소통한다. ‘당신’과 ‘나’는 모두 그런 언어적 국경의 내부에 있다. ‘당신’과 ‘나’가 “대화”를 나눌 때 “사그락사그락” 오가는 언어는 “당신인 척 하는 빈집과 나인 척하는 먼지”의 언어이며, 빈집에 쌓인 먼지처럼 가까운 두 사람의 비유적 거리는 사실 “전화”를 걸고 받을 만큼 떨어져 있다. 그것을 때로 “나는 모른 척한다”(「날씨님 보세요」, 『돼지』). 먼 거리의 서로를 연결하는 ‘전화’처럼 언어는 가까운 기분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그런 기분을 나눌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코는 코끼리/눈은 눈끼리/입은 입끼리/귀는 귀끼리”인 수사학의 세계에서 ‘나’는 “코끼리 눈을 찾아” “냄새나는 코끼리를 벗어나고 싶” (「공주여 공주여 잠자는 코끼리 공주여」, 『돼지』)어 하기도 한다. “코는 코끼리” 묶어 부르는 ‘코끼리’라는 말이 몸에 새겨진 글자처럼, ‘ㅁ’처럼 느껴질 때에, 그 사각의 벽 안에서 “왜 내가 벽 보고 나를 버려야 돼요?”(「돼지라서 괜찮아」, 『돼지』) 물으면서 말이다. ‘돼지’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위의 시적 작업은 ‘돼지’의 어떠함을 묶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묶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 “죽음의 자서전”이 서로 다른 ‘너’들을, ‘너의 죽음’들을 개별로 부르고 환기하듯(『죽음』),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4월이 오면」, 『돼지』)라고 김혜순의 시는 말한다.

     “나는 돼지”라는 언뜻 비유적인 문장은 이를테면, ‘나=돼지’라는 ‘끼리’의 구도를 만드는 ‘글씨’인 듯 그것을 초과하기 위한 시작으로 읽힌다. 비유의 한 항인 ‘나’는 인간의 통칭도, 여성의 통칭도 아닌 채로 개체의 상태를 지시하거나 지향한다. 다른 쪽 항인 ‘돼지’는 반면 돼지 종을 통칭하는 단어, 개별 돼지를 ‘나’로 사유하지 않는 비어 있는 이름의 자리에서 임의로 활용되는 비약적 단어이다. 단수와 복수를 등식으로 만드는 ‘나=돼지’라는 말은 그 불균형과 비약에 대해 생각할 때 다시 복수를 단수로 푸는, ‘돼지=나’라는 말의 전환을 생각할 수 있는 언어적 출발점이 된다. ‘돼지’의 죽음을 말하면서 ‘돼지’ 종의 ‘처분’이나 ‘돼지고기 가격 폭등’으로 죽음 전체를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의 몸을 가진 무수한 ‘나’가 어떤 낙인 속에서 ‘종’으로서 생매장되는지, 그때 ‘돼지’라는 단어는 어떻게 비유의 방법을 지키는지를 김혜순의 시는 돌아본다.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라고 쓰면서 그 문장이 ‘나 나 나 나는 죽어요’로 읽힐 수 있도록, ‘영원히 사는’ 돼지 종의 계보가 아니라 “나 나 나 나” 사이를 벌려 글씨를 다시 쓸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은 나아가 “나는 돼지”라고 말하는 ‘나’의 언어 역시, ‘돼지’에 대칭되는 ‘인간’ 종, 혹은 비유적으로 가까운 ‘여자’ 전체를 아우르는 일인칭의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일과 관계된다. 김혜순의 비유는 묶어 사유하는 ‘끼리’의 방법 대신, 개별과 개별의 문제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한 방법으로 “나 나 나 나”(「돼지라서 괜찮아」, 『돼지』)를 적는다고 해서 ‘돼지’가 단번에 ‘나’들로 풀려날 수 없다는 것을 김혜순의 시는 잘 알고 있다. 하나씩 띄어 글자를 적어도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4월이 오면」, 『돼지』) 여전히 통칭하는 단어를 개별인 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에 ‘나’의 개별성 을 쥐여줄 수 있다고 단순히 믿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언어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의 첫 자부터 마지막 자까지 지우기로”(「두 마귀」, 『돼지』) 해도 국어사전의 언어로 모든 말은 쓰이고, 사람은 그 사전에 따라 구분되고 분류되며 분배되는 시스템에 의탁하여 세계와 자신을 호명하고 인식한다. 모든 것을 ‘나’로 부르는 것이 ‘사전’의 방법을 초과한다면, ‘사전’에 기댄 언어 구조 안에서 그 ‘초과분’은 쉽게 달성되지 않고, 적어도 아직은, 그래서는 안 되기도 하다. ‘사전’을 따르지 않아도 그것이 문법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경험적으로 우리는 다시 ‘사전’의 방식으로 모이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자신도 모르게 “돼지 데리고” 가듯, “이제 그만 새가 되라는데/몸속에서 새가” 울듯, 김혜순의 시는 “내가 바로 저 여자야”(「돼지라서 괜찮아」, 『돼지』) 다시 말하게 되는 장면들의 복판에 서 있다. ‘나=여자’를 ‘여자=나’로 연결하여 ‘여자’라는 글씨로부터 놓여나는 ‘나’들을 말하려 해도, 돼지의, 새의, “저 여자”의 울음이 ‘저 여자=나’라는 등호를 되불러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그 등호로 돌아가도록 하는, “〈A가 좋아〉”라고 말하면 ‘B’가, ‘C’가, ‘A’가 달려와 둥그런 순서대로 ‘나’를 때리는 글씨의 힘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담임의 숨에서 나던 냄새/결혼식 날 주례의 숨에서 나던 냄새/여자를 모욕하려고 쓴 글에서 나던 냄새//이 옷과 같은 냄새//내가 기록한 것은 내가 언제나 출발했음을/그러나 붙잡혀 돌아온 곳은 언제나 이 옷 속이었음을//토네이도를 묶어두는 것은 범죄야/ 끓는점에 도달한 액체를 가둬놓는 것은 재해야//나에게 우파에 좌파에 모더니스트에 친일파에 온갖 병을 뒤집어씌워도/나는 울지 않아 대신 내 콧물 가래나 받아//물고기에게 그물을 옷이라고 하다니/물고기에게 튀김옷을 외투라고 하다니//이 옷을 입으면 라디오 안에 들어간 것 같아/전 국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사과할게요 전 국민이 사과를 바란다니/평생 사과할게요 앞으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모두 새빨간 사과예요//왜 사과(내)가 사과(너)한테 사과를 해야 하니?/사과(너)랑 사과(나)랑 무슨 사과(상관이)니?//두 손을 묶고 소매를 묶은 옷//단 한 벌//저절로 기도하는 자세가 된 내 두 손으로 찌른 내 심장에서 나는 냄새/빙 둘러앉아 갓 잡은 돼지를 나누던 소수민족 아낙의 손에서 나던 냄새//조명이 도수 높은 렌즈로 세례를 베푸는 방/그러나 아무도 옷을 입고 이 방에 들어올 순 없어//새들도 깃털을 벗고/물고기도 비늘을 벗어야 해/나무도 물론/내 방에선 무조건 누드야//오래 낀 가죽 장갑이 나에게 뻗어 올 때/훅 끼치던 화장실 냄새/땀으로 부글부글 끓는 옷냄새//때려봐/때려봐/새는 이미 날았어//네가 친 것은 그저/옷 입은 허공이야//옷 속이 훤하잖아
—「구속복」(『날개』) 전문


지금 여기에는 거부해도, 버려도, 벗어나려 해도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결혼식에서, 수치와 속죄를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수치를 모르는 렌즈들 너머 구체적인 사람들의 눈알 속에서 무시로 닥쳐오고 덧씌워져버리는 ‘여자’라는 단어가 있다. 그리고 ‘여자’를 둘러싼 ‘수사학’과 그 수사학이 지배하는 문법의 구체적인 현장들이. 개별의 신체는 그 수사학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여자(女子)’로, 세계를 이루는 ‘자모(子母)’로 휩쓸려 들어가고, 그 아래에서 글씨 씌어지고 무늬 새겨지며 유사한 경험 속으로 내몰린다. “여고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울면서/나가 나가 내 방에서 나가/행진할 때 제일 눈물이” 나고, 그렇게 “우는 사람이 우는 사람에게/얼굴을 기울여 눈물로 당겨주”(「초」, 『날개』)는 마음은, ‘여자’라는 코드를 나눠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란 적 없는 그 코드의 벽 안에서 ‘여자’에게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김혜순 시의 ‘나’는 “아빠, 너”의 죽음을 마주하며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고/이미도 없고/아직도 없고/여자도 남자도 없고/아빠도 자식도 없”이, “그래서 평평하”고 “그래서 무한”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실은 모든 사람의 시작점이었음을, “모두 평등”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임을 기억한다. 그리고 언어가, 언어가 분배해낸 결과로서의 세계가 날개를 꺾고 발을 자르고 ‘ㅁ’ 속에 가두는 장면을 마주하는 그 “슬픔이 내 몸보다 클 때”, 평평하고 무한했던, 평평하고 무한해질 “이미 죽은 내가”(「작별의 공동체—작별의 신체」, 『날개』)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에 관해 말한다. 그가 시의 언어를 통해, 거듭 글씨를 적는 행위를 통해 하는 일은, “내 몸”이라는 ‘나’의 단위를 태워 “내 두 눈”에 빛을 켜고 “이 불 꺼뜨리면/ 천지의 새들이 다 날개를 펼 수 없을 것 같”(「초」, 『날개』)다고 여기는 것, “내가 계속 적지 않으면 떨어져버리는 새를 생각”(「작별의 공동체—해파리의 몸은 90퍼센트가 물이다」, 『날개』)하면서 “내가 버린 여자들”을, “여자”“들”을 “대면”(「여자의 여자」, 『날개』) 하는 것이다. 날개를 꺾고 발을 자르고 ‘ㅁ’ 속에 가두는 글씨에게 “새는 이미 날았어//네가 친 것은 그저/옷 입은 허공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여자’라는 말을 흔들며 “옷 속이 훤하잖아”(「구속복」, 『날개』) 하고 일러주며 ‘이미’ 가벼울 수 있을 때까지.


결국 김혜순의 시가 감당하는 질문, 김혜순의 시를 경유하여 오늘의 언어가 마주해야 하는 물음은, 글씨 씌어진 경험으로 모이는 자리에서 그 원인과 배경과 조건으로서의 언어를 어떻게 부수어낼 것인가, ‘여자’라는 ‘구속복’으로부터 어떻게 날아오를 것인가이다. 그 질문을 김혜순의 시는 ‘엄마’와 이별하는 시간을 가로질러 거듭 되묻는다. “엄마를 망할 딸에게 물려”(「목젖과 클리토리스」, 『지구』)준, “시야를 좁게 가져라/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영혼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자못 교훈적”(「엄마」, 『허수아비』)이었던 ‘엄마’의 죽음 앞에서 ‘나’는 “지구를 가득 뒤덮은 사람들이 각자의 엄마를 부르는 소리”(「잊힌 비행기」, 『지구』)처럼 ‘엄마’를 부른다. 그 마음 안에서 ‘엄마’는 오래 이어져온 ‘어머니’이고, ‘여자’이고, “밀크”(「엄마는 나의 프랑켄슈타인」, 『지구』)로서 아주 무거운 글씨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의 엄마에 대한 시는 왜 다 비슷하냐고” “엄마는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문장 밖에 있다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엄마를 쓰려고 하”(「천 마리의 학이 날아올라」, 『지구』)는 자신의 ‘비슷한’ 문장들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은 그리움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아빠가 준 것, 내가 준 것, 동생이 준 것, 엄마, 그따위 것. 가루처럼 날아가버리는 것”을 벗고 “엄마는 엄마만 있는 사람”이라는 문장으로 엄마를 부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엄마는 엄마만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엄마’의 위치에서 이름 없이 불리는 사람에게 ‘엄마’라는 글씨만이 남는다는 의미처럼 읽히기도 한다. 동시에 이 말은 ‘나’에게 ‘엄마’인 이 ‘사람’은 이제 ‘엄마’를 벗고 그 자신만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다만 그 사람은 ‘나’에게 ‘엄마’이기 때문에 호칭이 ‘엄마’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언어는 그렇게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이때 ‘엄마’는 가두는 말인 동시에 날아오르게 하려는 마음의 말이고, “멀리 날아가보실까? 집에 가실까?”(「죽음의 베이비파우더」, 『지구』) 그리움 속에서 그저 당신의 안녕을 바라는 말이며, “죽은 인형들의 몸을 차곡차곡 제단처럼 쌓”고 “그 위에 우리 엄마 인형을 올려 오줌 똥 싸게”(「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지구』) 하는 쓸쓸하고 다정하고 시원한 상상의 말이기도 하다. “엄마 하고 부르자 병실의 모든 모래인 여섯이 응 합창한다”면, “모래인은 한 알로서도 한 사람이고 억만 알로서도 한 사람이” (「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모래인」, 『지구』)고, 순서를 바꾸어, 억만 알로서도 한 사람이고 한 알로서도 한 사람이라고 김혜순의 시는 말한다. 그의 비유는 다시, 언어의 오류와 오류 너머의 개체를 같이 생각한다.

     복수를 통칭하는 말이 개별의 자리를 지우고 언어적 코드값에 가두어버릴 때, ‘모래인’이라는 말은 항시적으로 복수의 상태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한 알 한 알이 다 색이 다른 화소話素”(「사막의 숙주」, 『지구』)인, 제각각의 ‘이야기’인 모래알들을 하나씩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개체인 동시에 종인 ‘사람[人]’임을 간과하지 않게 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품는다. “모래인의 명사는 오직 하나, 모래”(「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언어」, 『지구』)라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이고 싶은 마음”(「Yellowsand/ Blackletter/Whitebooks—*모래증후군」, 『지구』)에도 물론, 시달리면서. 그런 ‘모래인’의 새롭지 않지만 다르려는 언어가 “새들(그러나 모래)”(「새는 왜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할까?」, 『지구』)처럼 명사에 명사를, 복수에 단수를, 수사학에 수사학을 연결하며 단순하지 않아질 때, 김혜순의 시는 다시, 말하고자 할 것이다.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또 다른 별에서』(문학과지성사, 1981, 이하 『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 1985, 이하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청하, 1988; 문학과지성사, 2017, 이하 『지옥』), 『우리들의 陰畫』(문학과지성사, 1990, 이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사, 1994, 이하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문학과지성사, 1997, 이하 『사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사, 2000, 이하 『달력』), 『한 잔의 붉은 거울』(문학과지성사, 2004, 이하 『거울』),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2008, 이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문학과지성사, 2011, 이하 『슬픔치약』),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이하 『죽음』),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 이하 『돼지』),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 이하 『날개』),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지성사, 2022, 이하 『지구』). 『어느 별의 지옥』은 문학과지성사의 복간본을 대상으로 했다.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시 제목과 시집 이름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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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솜 말미잘 하는 몸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월간 현대시 박다솜 김혜순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말미잘시하다모든 종류의 슬픔 2025
김효숙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배옥주,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 ·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

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월간 현대시 김효숙 문화 보충물문화 텍스트문화 감수성그림기후 위기남성-언어성 착취몸의 식민지다중 감각시의 비판적 기능 2025
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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