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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봄호(제118호)

촛불 이후의 정치라는 단상斷想·單相·壇上

김건형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2018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평론집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가 있다.

민주주의는 최악을 피하는 제도라던데 지금은 왜 이럴까


    십 년 전 세월호 참사는 사회적 재난일 뿐만 아니라, 사회야말로 재난에 처해 있음을 체감케 했다. 언제 죽도록 내팽개쳐질지 모르는 나라에 살고 있다 는 충격은,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국가에 대한 분노를 동시에 일으켰다. 사회적 안전망이 이토록 무너지게 만든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진상 규명을 요구 하는 뜨거운 목소리가 촛불 항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 한 ‘최종 책임자’를 국민이 파면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은 지 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이태원 참사가, 오송 참사가 일어났고, 국민에 의해 선출된 최종 책임 자는 진상 규명은커녕 국민에 대한 사과조차 거부하고 있다. 그런 윤석열 대통 령이 취임 이후 처음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때문이었다. 국민을 살리는 것보다 국토종합개발이 정치의 최우선인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년 가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그동안의 일을 집약해주는 상징 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공직자로서 기밀을 유출하여 ‘조국 사태’를 촉발한 김태 우 전 구청장의 궐위 때문에 치러진 선거에서 검찰 출신 윤석열 대통령은 그를 사면 복권하여 직접 후보로 내세웠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경찰 간부 출신인 진교훈 후보를 지명했다. ‘정치 검찰’의 독재에 맞서 치안-행정 전문가를 내세우는 구도 속에서, 더 나은 정치는 국민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치안-행정으로 상상 된다. 1) 한국사회는 다시 ‘개발독재’와 ‘국민을 살리는 치안’ 사이의 대결에 머무 는 것일까? 촛불 항쟁이 요구했던 것은 단순히 전문가/엘리트 집단의 교체나 법 제를 유지/보완하는 개혁보다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갱신하라 는 근본적 문제 제기에 더 가깝지 않았던가.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그 결정적인 가능성이 폐제된 계기를 지난 21 대 총선 전 선거제 개혁 시도로 기억한다.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지탱하는 승자 독식 제도를 개선하고, 지역 유지 출신 정치인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를 벗어나 대안 정당을 향한 투표를 반영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를 확충하는 것이 민주당이 내건 개혁의 요체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은 개혁의 흉내만 내다가 그마저도 자유한국당을 따라 만든 위성 정당이라는 꼼수로 형해화하고 말았다. 우선은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면서. 물론 그 나중은 도래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겨 최대 의석을 확보한 후로 얼마큼의 진보가 있었던가 되짚지 않을 수 없다. 자기 혁신을 멈추는 순간 진보라는 명명은 이름값을 할 수 없다. 의미 론적 관성 에너지로 남은 개혁은 그 목표가 자신이 되어야 할 때를 인정하지 않 는다. 끊임없이 ‘외부의 커다란 적’을 강조하는 이분법에 의존해, 자신이 적을 상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주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위치를 가까 스로 연장할 뿐이다. 그리하여 현행 제도 속에서 그 인적 구성을 전환하는 정도 가 최선의 정치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촛불 항쟁은 주권재민의 대의제적 원칙을 확인하는 공화주 의 회복 운동으로 한정된 셈이다. 이는 민주당 지도부와 주류 586 세대의 관성 이 더 많은 정치의 가능성을 제한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민주당은 기득권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통치 집단의 인적 교체에만 대부분의 역량을 쏟 았을 뿐이다. 국민을 살려야 하는 치안의 대상으로 여길 뿐 국민과 권력을 나누 려 하지 않았다. 아니, 삶과 권력의 형식 자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 거대 양당의 위성 정당 창당이 예고된 이번 총선도 구도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촛불 항쟁의 함성이,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 촛불과 노란 포 스트잇을 집어든 시민들의 목소리가, 퀴어 청년과 여성 노동자와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기후 위기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기성 정치에 담기기는 여전히 요원해 보 인다. 통치 권력의 인적 교체를 넘어 권력·제도 자체의 갱신을 더 꿈꿀 때, 그 과정 안에서 비로소 민주주의가 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갱신의 요청은 (인) 문학장에도 마찬가지여야만 한다.



촛불의 역사적 단계와 ‘나중에’ 정권


    백낙청의 「2023년에 할 일들—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2) 는 그 글이 실린 『창작과비평』 해당 호의 특집 ‘위기의 한국, 무엇을 해야 하나’의 기획안처럼 보 인다. 이 글은 “촛불 혁명이 진행중이라고 자랑하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물으며 “나라의 주인이신 시민 여러분”(16쪽)의 반성을 호소한다. 특히 보수 진영으로의 정권교체의 원인인 동시에 민주당의 재집권을 위한 방법으로 서 시민의식에 주목하여 “문재인 정부가 해낸 것이 적지 않은데도 촛불 정부를 자임했었기에 제대로 못한 부분으로 인한 시민들의 분노는 통상적인 수준을 훨 씬 넘었습니다. 반면에 촛불 정부가 한번 더 들어서면 자기네는 끝장이라는 기 득권 집단의 절박감도 남달랐습니다”(같은 쪽)라고 정권교체의 인과를 분석한 다. “기득권 집단의 절박감”에 비해 “민주당의 절박감이 태부족”(17쪽)이긴 했다 는 표면적 겸양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높은 정치적 요구치를 만족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은근한 억울함 속에서 내부 책임자도 지목된다. “촛불 시민들의 열정으로 2기 촛불 정부를 꿈꾸는 대선 후보가 선출되었지만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만 생각했”(같은 쪽)다. 촛불 시민을 계승한 이재명 대선후보를 중심으로 뭉쳐야 하는데 내부의 농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후보가 무능하고 무개념이면 어떠냐, 당장에 유권자를 속이는 데 가장 유리한 인물이라면 ‘악마면 어떠냐’는 것이 그들의 공감”이었고 “레거시 언론”(18쪽)과 그들이 유착하여 “침묵의 카르텔”(19쪽)이 형성되었기에 시민들은 (정치적인 결정 을 했다기보다는) 속아넘어갔다.

     한국사회의 위기가 (악마로 묘사되는) 보수 진영 카르텔과 진보 진영 내부 의 배신/순진함 때문이라는 레토릭은 사실 방향만 바꾸어 반복되는 기성 정치 의 흔한 이분법적 음모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권자의 선택의 의미를 악한 세력에 의한 피해로 축소하고 ‘적’의 위력을 강조함으로써 민주당은 대의에는 부 합하나 현실에서 힘은 부족한, 연민받아 마땅한 피해자의 위치에 선다. 586 세 대와 민주당 정권이 이미 한국사회 기득권의 일부라는 점은 적극적으로 은폐되 고, 억울하게 억압받았으나 끝내 승리할 미래의 주역으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이 글의 후반부는 ‘추가적 단상 몇 개’라는 소제목으로 기후 위기와 성평 등, 평화의 문제를 덧붙여 다룬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논의와 연마가 부족했던 점도 촛불 혁명의 원활한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문제 의식”(24쪽)은 매우 적실하지만, 기획과 구성에서 볼 수 있듯 이 문제들은 부가 적인 차원에 할당되어 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점점 실감되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너무 국내 정치 에 열중한다는 비판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더 넓은 세상의 큰일들도 당연히 생 각해야지요. (……) 아무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 실을 젖혀두고 벌이는 거대 담론이나 거시적 전망은 한담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일은 한국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현존 세 계체제로서도 관건적 사안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핵심적 일부 이자 약한 고리거든요. 따라서 촛불 혁명은 기존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작업이 며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입니다.(22쪽)


     정권교체가 최우선 과제라는 확신은 분단에 대한 기묘한 ‘특권 의식’과 연동된다. (유일한 분단 민족으로서 냉전체제를 대표한다는 자의식과 별개로 여러 분 단 민족 중 하나이기도 한) 가자-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민족주의적 권위주의 정부의 전쟁 및 인도적 위기, 후쿠시마와 지구온난화 같은 핵에너지 기후 위기가 상수가 된 지금, 한반도의 민족 분단이 유독/여전히 지금의 ‘세계체 제’를 체현하는 상징적 우위에 있다는 데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물론 한반도 분단이 냉전에서 중요했다는 점이나 군사주의적 체제가 여전히 강고하다는 점 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민주당으로의 집권 세력 교체가 곧바로 세 계체제의 핵심 변수이자 변인이라는 확신은 기묘하다. 이렇듯 범세계적 반군사 주의 운동보다는 강대국/기득권의 음모를 이겨낼 한반도의 민족국가 설립으로 과제를 한정, 선별하는 소명의식은 분단·전쟁문학, 냉전 담론으로 한국 (인)문 학이 세계시장에서 독특한 상품성을 지녔던 (한국학 1세대로 흔히 통칭되던) 시대의 세계화/탈식민주의/근대화 욕망을 환기하는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산업화-독재 세대에 대한 신자유주의-민주화 세대의 집권 투쟁 이 핵심 과제로 (아직도) 설정되면서, 진보/보수 지지층이 세대와 젠더를 교차해 서 나타나고 있는 현재의 구도와는 별개로 이분법에 의존한 정치가 다시 소환 된다. 이로써 ‘기성 진보’의 소명의식이 유지된다. 그래서 다른 긴급한 논의들은 정상 국가 건설 이후 자연스럽게 해소될 부차적인 ‘한담’이 되고, 그마저도 “성평 등보다 ‘음양의 조화’ 같은 좀 다른 차원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는”(26쪽) 이성애-재생산 중심주의적인 복고풍의 덕담으로 향한다. 평등이 “무조 건적 평등주의로는 달성될 수 없다고 할 때 ‘성차별이 사라진 평등 사회’ 구상에 나름의 새로운 개념과 호명 방식이 필요”(27쪽)하다는 제언은 지금껏 이미 치열 하게 논의·수행되어온 구상·실천들에 대해 사실 관심이 없다는 고백이자 이를 무력화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기성 정치(민주당)를 향한 ‘실사구시’로 대표되는 제언을 제외하면 대체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중용’의 반복에 가깝고, 현재 진행 되는 여러 인문사회학 논의를 거의 반영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팔십대 남성의 ‘단상’이라는 제약을 달긴 했지만, 오히려 그야말로 이 위기들이 나라다운 나라 를 건설한 ‘나중에’ 다룰 부차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단계론을 무람없이 제시하 기 위한 전제인 셈이다. 이러한 목적론적/국가주의적 역사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촛불 항쟁을 민족국가 건설 운동의 계보에 놓는 것이다.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촛불혁명 시대의 한반도」 3)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4) 등이 대표적인데, 「어떤」은 촛불 항쟁이 “기존의 혁명 개념에 미달함은 분명하 지만 우리는 교과서와 역사책에 없는 ‘분단 한국의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판 단해야 한다”(30쪽)고 공을 들여 강조하면서, 3·1운동이라는 민족 독립운동과 4·19혁명 이래의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여러 민중운동의 성격을 구분하지 않고 민족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분단 한국의 특수 성’이 곧 현존 세계체제의 모순이 집약된 현장이자 ‘약한 고리’에 해당”(32쪽)한 다는 점 때문이다. 그에 따라 촛불 혁명이 남북 화해를 향한 강대국의 입장 변 화를 이끌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이어진다. 국가/민족을 역사의 기본 단위 로 하는 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약소국 한국’이 비로소 강대한 민족국가의 단계 에 들어섰느냐의 여부다. 근대 민족자결주의적 자유라는 선험적 절대정신의 실현 정도로 역사의 발전단계를 나누는 헤겔적 역사관 속에서 독립운동과 민주 화 운동 사이의 단속斷續과 그 주체 내부의 차이는 누락되고, 그 모두가 도래할 민족국가에 대한 자긍심의 증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촛불에 나타난 다양한 주 체들과 정치적 의제들, 그 성과와 한계는 모두 ‘한반도 나라 만들기’라는 절대정 신을 지휘할 수권 집단(민주당 지도층)의 유불리 문제로 흡수된다.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5)는 더 본격적으로 3·1운동의 실패가 촛 불 혁명으로 청산됐다는 도식을 설정한다. “한반도 근대의 나라 만들기는 단 계적으로 진행되어왔고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서 “국민국가의 형색을 상당 부 분 갖춘 두 개의 정부가 남과 북에 자리잡았지만 3·1이 요구한 의미의 ‘대한 독 립’ ‘조선 독립’에는 여전히”(307쪽) 미달하였으나, “촛불 항쟁으로 실현된 남한 의 정권교체가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으로 이어지고 한반도 전역에 걸친 민 중 역량의 비약적 증대를 이룬다면 이는 ‘혁명’의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 다”(319쪽). 이렇게 촛불은 민주당 정권에 의한 민족국가 건설의 사전 단계라는 ‘이성의 간지奸智’의 자기실현이 된다.

     나아가 이 글은 “100년의 지체 끝에 실현되는 채무이행”으로서 촛불 혁 명이 보여준 “감수성의 확장”(319쪽)의 대표적 사례로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을 독해한다. 백낙청은 이 작품이 “1996년의 연세대 투쟁과 2014년의 세월호 참사 등을 2016~17년의 촛불 항쟁과 하나의 서사 속에 묶음으로써 촛불 혁명 이 대중의 누적된 학습의 결과”(같은 쪽)임을 보여준다면서, 『디디의 우산』의 마 지막 대목,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6)라는 소설가 화 자의 선언에서 ‘이렇게’의 내용 대신 민족국가 건설을 읽어낸다. “촛불 항쟁의 탄 핵 쟁취로 혁명이 ‘도래’했지만 혁명의 ‘완성’을 향한 긴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다 는 생각으로까지 나갈 대목이며, 한반도 체제의 변혁을 가져올 혁명의 진행에 따라 제도·정동·사유의 더욱 발본적인 변화를 전망하고 탐색할 대목”(같은 쪽) 이라는 것이다. 이는 촛불 혁명이 이룬 정권교체가 “낮은 단계의 남북 연합”이라 는 “한반도식 나라 만들기의 당면한 다음 단계”(321쪽)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론 으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문학평론이 아니기에 연세대 사태에서의 여성 혐오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여성 혐오를 연결하는 소설의 핵심적 구성에 대한 논 의를 누락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세월호 참사와 촛불 항쟁에 대한 문학적 재현을 민족국가 건설의 전 단계를 지향하는 민족의식으로 서둘러 흡수하는 서술 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 퀴어 청년 ‘나’가 일상 노동에서 겪는 폭력, 민주화 운동 에서 촛불 항쟁으로 이어지는 진보 담론/운동 안에서의 ‘악의 상투성’을 다룬 소설의 주제를 과소 독해하는 것은 촛불 항쟁 당시의 여러 의제와 실제 인과관 계를 거의 소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혁명운동이나 혁명관을 삐딱한 각 도에서 바라보”고 “혁명 개념을 재구성하도록 이끈”7) 소설이라는 한기욱의 평을 직접 인용하고도 이를 반대로 읽고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 운 착각”(『디디의 우산』, 306쪽)에 대한 소설적 발견에서 도리어 역사적 연속성/ 전체성을 강조하는 비평은 선험적·관념적 역사철학에 의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디디의 우산』은 촛불 항쟁이 타자의 고통과 정치에 대한 감수성을 확장하는 동시에 혁명을 혁명하는 잠재적 가능성이었음을 적실하게 성찰하고 관찰하는 소설이다. 특히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 록한다”에 이어 서술된 ‘이렇게’는 다음과 같다.


남자는 울지 않는 법이라며 구석에 숨어서 우는 아이를 말하고 그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며 살아야 하는지를 걱정하기도 하면서. 쌤 스미스의 커밍아웃 을 말하다가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회원들과 작은 언쟁을 벌이고 만 일을 말하 기도 하면서. 헌법재판소로 들어가는 재판관의 머리칼에 핑크색 헤어롤 두 개가 말려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으나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서 그 것에 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고.(317~318쪽)


     ‘나’는 광장의 혁명(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식탁에서 나누는 이야기 의 전환이 만들어내는 다른 혁명을 기록하자고 말한다. 탄핵을 앞두고 “동학농 민운동, 만민공동회운동, 4·19혁명과 87년 6월항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이겨 본 적 없는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고. 이 나라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최초로 승리 를 경험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314쪽) 자긍심을 표출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 고 ‘나’는 식탁에 머무른다. 정상 국가를 회복했다는 “승리와 완성의 축제” 속 에 서기보다는 “파도가 가고 남은 자리에 이 식탁이 남는 광경을 나는 생각해 본다”(315쪽). ‘광장’의 ‘민주 시민’ ‘민족/민중’이 여성, 퀴어, 청년, 비정규직, 비혼 돌봄 가정의 일상적 투쟁을 직간접적으로 배제/삭제함으로써 보편적 역사 를 구현해온 과정을 몸소 겪고 읽었기 때문이다. 촛불 혁명의 과정을 전후하여 겪은 퀴어 페미니즘적 결절점들에 주목하여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이야기를 만 들고자 하는 황정은에게 촛불은 일상의 통치성을 전복하고 혁명을 갱신하는 이 야기로 “이제 모두를 깨울 시간”(같은 쪽)이었다. 역사 법칙을 예증하기 위하여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 재현 언어의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을 역사로 만들어가 는 과정이 되도록.

     그러나 ‘살던 대로 살지 말자’는 권유는 기성 대의제 안에서 민족국가 건 설에 관심이 있는 세력이 정권을 차지할 때까지 다른 열망을 유예하자는 말일 뿐, 지금의 삶 자체를 위해 주권 제도를 재구성하자는 말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논의는 ““박근혜 이후 ‘누구’가 아니라, 박근혜 이후 ‘무엇’을 말해야 한 다”는 지적은 일단 경청할 만하지만, 조기 대선이 확실시되는 현 시점에서 재고 할 필요가 있다”(「‘촛불’」, 24쪽)8)는 민주당의 인물론으로 이어진다. 지금 다시, 윤 석열 이후 ‘누구’를 찾는 질문만이 남게 된다면 촛불은 다시 원점이 될 것이다.

     촛불 항쟁이 87년 체제 이후 민주주의 시스템(의 최소한마저)이 작동하지 않는 사태가 중첩되어가는 꼴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촛불의 궁극적 과제는 민 주주의 시스템의 재점검과 갱신일 것이다. 그것은 집권 세력과 대통령의 인물 됨됨이에 크게 좌우되는 대의제 안에서의 권력 집단 교체에 그치지 않고, (‘한반 도’를 특권화하지 않는) 범세계적 반군사주의 평화운동, 기후 운동, 퀴어 페미니 즘, 장애-질병 담론 등 정치제도와 그 주체를 심문하는 목소리를 통해서 이뤄 져야 하지 않을까. 정상 국가(전체)를 우선 만든 다음 ‘나중에’ 다룰 문제가 아 니라, 도리어 이것을 시민사회의 구성 원리로 삼아야만 (굳이 단합된 민족/국가일 필요는 없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지식인의 우주 진화적 사명과 죄책감의 미학적 흡수력


     단계론적 역사관의 특징 중 하나는 절대정신을 체현하는 지도부와 시민 의 독특한 관계다. 백낙청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촛불’」에서 문재인, 안희정 등 당시 민주당 대권주자에 대한 간접적인 하마평과 더불어 시민이 지지하는 후보를 잘 고르라고 주문한다. 역사적 사명을 기꺼이 짊어지는 ‘진보적 지식인’을 제대로 선발하고 ‘살던 대로 살지 않기로’ 결심한 시민이 결합한다면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역사의 전위인 엘리트 정치인과 속지 않는 시민으로 구성된 연대체가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다.


탈성장이 아무리 정당한 목표이고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 및 기 업들과의 싸움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싸움의 성패는 결국 단·중·장기 목표를 얼마나 슬기롭게 배합해서 대중의 지지를 얼마만큼 얻어내느냐에 달린 것 아니 겠는가.(「2023년」, 25쪽)


     이러한 단언은 시민이 탈성장(을 비롯한 여러 의제)을 국가에 먼저 요구하 고 다른 시민을 직접 설득하는 현재의 시민사회/운동의 구도와는 동떨어진 정 세 분석에서 나온다. 진보적 엘리트 관료 계급이 일부 시민의 성급한 요구를 슬 기롭게 통제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해가면서 목표를 달성해가는 이러한 단계적 근대화론에는 정상 국가를 설계하는 엘리트와 이를 지지하는 진보 시민 연대 체가 후위에 있는 대중을 설득한다는 은근한 계몽의 서사가 저변에 깔려 있다.

     기실 이 구도는 『창작과비평』의 창간사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9)에 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문단의 낙후성”(6쪽)을 딛고 “대국적 안목”으로 “문학의 온전한 사회 기능을 옹호”(9쪽)하는 이 글에서 흥미로운 점은 근대화와 선도적 문학인의 관계다. 그는 시민 생활과 문학이 일치했던 서구의 황금기 및 혁명의 모범 사례를 열거하면서, “근대화의 중심 과제가 곧 산업화”이고 “현대는 집단 감정과 집단 행동이 움직이는 시대”(31쪽)이므로 개인의 문학이 아닌 집단 의 문학을 꾀해야 한다고 본다. 후진적인 “한국에서 정말 대다수 민중이란” “문 학을 읽을 여유도 능력도 의욕도 없는 사람들”(17쪽)이기에 “현실 독자들의 한심 한 수준”(19쪽)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민중의 저항을 가로맡고 근대화를 위한 가장 보편적인 이상을 제시하며 또 실천하는 역사의 주동적 역할을 작가와 지 식인이 맡아야 한다는 데에 딴말이 있기 어렵다”(34쪽)고 주장한다. “대중의 소 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38쪽) 렸다는 것이다. 대중을 올바르게 통제함으로써 서구적 근대화 기획을 현실화하는 (인)문학 엘리트라는 구도다.10)

     「시민문학론」11)에서는 민족의식을 체현하는 ‘중위’적 시민이라는 매개가 부가된다. 그에 따라 지식인/문학인의 역할도 대중의 교양에서 민중 속 시민 정 신의 맹아를 발견하고 이를 지원하는 역할로 변한다. 고전적 시민혁명인 프랑스 혁명이 “혁명기에 절정에 달했던 시민의식을 온전히 지키고 키워 참다운 민주 적 시민사회를 완성하지는 못했”(464쪽)기에 현대인은 시민의식을 잃고 소시민 으로 전락해버렸다. 백낙청은 사회경제적 계급인 시민에서 “자신의 공동 운명과 사회적 위치를 명백히 인식”(463쪽)하는 공동체적 자의식을 분리하여 시민(성) 의 맥락을 전환하는데, 그 ‘시민의식’은 근대/민족정신의 역사적 자기실현 과정 으로서의 헤겔적 절대정신과 유사한 속성을 지닌다. “열병처럼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민주주의에의 집념은 한 동물학적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자신의 우주 진 화사적 위치를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이에 고무”(466쪽)된 덕분으로, 우주적, 종적 절대정신이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필연을 체현해가는 인류의 추진력이라 는 것이다. 그는 플라톤을 경유해 “세계의 창조가 ‘필연anakhe’과 ‘정신noos’의 협 동 작업이었다고 설명”하고, “주어진 환경조건의 필연성 내지 폭력성을 ‘설복’시 켜 조화를 증대시켜나가는 우주 진화의 어떤 궁극적 요인”(469쪽)으로서 ‘이성’ 을 주장하면서, 이는 단순히 합리적, 분석적 이성이 아니라 (예수와 보살의 사랑 을 예로 들며) 설복과 조화라는 정동적 요소를 담은 합일의 원리임을 강변한다. 그래서 소시민이 되어버린 현대인에게는 “하나의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우주 전 체를 움직이고 이끄는 힘으로서의 ‘사랑’”(509쪽)이라는 일종의 교양 문학이, 개 인을 전체로 조화시키는 고전주의적 재현 원리가 필요해진다.

     따라서 우주적, 종적 역사의식을 실현하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형성 과 정에서 작가와 지식인이 또 한번 핵심적 역할을 맡”(465쪽)아야 한다. 이를 위 한 시민문학으로는 “사회와 인간을 보는 어떤 ‘원숙한 관점’과 이에 수반되는 ‘균 형’”(472쪽)을 담은 리얼리즘이 합당한데, 여기에는 “어느 개인 개인보다 전체 사회 그 자체를 중시하는 동시에 (……) 그들 자신은 제 나름으로 하나의 절대적 목적을 이루는 인간의 창조”(473쪽)12)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시민문학은 개 인과 사회(전체·우주) 사이의 ‘균형’을 재현함으로써 세계정신을 추구하는 ‘원숙 한 관점’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 삶의 근거에 대한 정직하고 온전한 파악”을 하 게 해주는 (시민)문학을 통해 교양을 갖추어야 “시민다운 시민”(477쪽)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시민성에서 사회적 계급성(과거의 것이니까)과 당파성(부분적인 것이 니까)을 지우고, 이를 민족/국가라는 전체 지향적 합일의 원리로 전환하면서 사 랑의 문학이 그런 교양의 매개로 재정의된다. 당대 역사학계의 자발적 근대화 론의 분위기 속에서 백낙청은 전체를 위한 사랑이 구체화된 한국적 사례를 검 토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3·1운동과 같은 민족적 민중 봉기에 잠재된 우주 적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민족 대표 33인 같은 문학인·지식인들이 보여준 “영 도력의 취약성”(486쪽)이다. “대다수 민중과 소수의 선구적 지식인이 하나의 시 민의식으로 뭉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484쪽)을 민중은 기다렸으나 지식 계 층은 그동안 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문학인이 민중 과 자신을 다시 묶어주는 시민의식, 시민문학을 깨닫길 역설하는 것이 이 글의 요체다. 그렇게 묶일 때의 세계와 자신을 사랑하는 감각, ‘국가(민족)’–‘시민(의 식)’–‘ 지식인(문학인)의 자아’가 하나된 삼위일체에 대한 자긍심이 문학적 사랑 에 이른다.

     그런데 백낙청은 이 ‘사랑’을 실제 문학비평에서는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번역한다. 특히 김수영의 자기반성을 고평하며, 지식인이 “매우 힘들여 얻은 통 찰과 성실성과 긍지”(506쪽)를 시민문학의 목표로 꼽고, 역사적 시민의식을 알 면서도 충분히 체화하지 못했거나 이를 이미 체현한 민중과 호흡하지 못한다는 지식인의 죄책감·책임감에서 “순수한 사랑과 기다림의 경지”(508쪽)를 찾아낸 다. 그리하여 김수영의 시는 (역사를 미리 체현하고 있는) 민중, 민족을 보라는 정 언명령에 따라 시민의식이라는 이념을 (뒤늦게 반성하며) 획득함으로써 “세계와 우주 전체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며, “가장 높은 의미의 시민의식을 ‘사랑’이란 말로써 표현한 것도 바로 김수영이다”(509쪽). 그럴 때 문학/비평은 전 체를 위한 부분으로서의 책무를 깨닫는 자기 고양(니코마코스 윤리학적 자기 계 몽이라는 개별자의 덕성)을 민족/국가 완성을 향한 (헤겔적 선험적) 사명과 연결하는 매개다. 전체에 대한 이념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분열된 세계-자아 의 전체성을 재종합하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헤겔 미학의 얼개를 여기 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백낙청 비평은 ‘시민의식’을 통해 문학을 선험적으로 공공적인 것 으로 설명하고 단일한 전체에 대한 부분의 기여를 역사의 원리로 만들어 선험 적 공동체(민족국가)와 개인을 연결해왔다. 그런 점에서 백낙청 비평의 근간에는 전체로 합일될 역사적 법칙을 아는 조화의 관점, 그런 부분으로서 제 역할을 아는 균형, 이를 미리 체현해온 민중·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들의 시민의식 에 부합하지 못한 지식인 자신에 대한 반성과 (반성하는 ‘나’에 대한) 긍지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랑과 긍지는 민중(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죄책감으로부 터 미래적·선험적 시민의식을 회복하는 계기를 찾아내는 미감이다. 민족·국가 의 필연적 완성태와 자신을 일체화함으로써, 현재/타자의 비극에 대한 수치심 에 머무르기보다는 그를 재빠르게 미래의 민족·국가적 자긍심으로 전유專有하 여 ‘부분’의 죄책감과 ‘전체’의 자긍심을 오가는 정동의 변증법인 셈이다.

     하지만 그 민족/국가의 미래는 누구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것일까? 국가 가 제대로 건설된다면 (그에 일조한 모범적인) 덕 있는 국민에게 행복이 분배될 것이라는 (끊임없이 유예될) 약속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미래의 국가를 향한 투자를 지속하게 한다. 한편으로 보수 진영의 노동/소비 인구 소멸론과 진보 진 영의 민족국가 지연론은 모두 국가의 완성을 향한 통치술이라는 점에서는 상통 하는 것 아닐까. 둘 다 경제적 빈곤과 외세의 간섭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현 재에 소환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을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는 계 몽의 강령을 만들고, 국가가 완성된 이후에야 비로소 개별자들에게 행복을 분 배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이 서사는 공히 특정한 역사를 차출해 현재의 문제와 직접 대응하는 인과관계를 과잉 설정하고, 민족적·국가적 트라우마가 자부심 으로 바뀌는 행복13)에 기대어 국민/시민에게 아름다운 전체로의 조화/복종을 권유하는 것은 아닐까.



발견, 반영, 승화의 선험적 전체주의를 넘어서


     이러한 비평적 기원을 바탕으로 역사의식을 (자기도 모르게) 미리 실천하 며 슬기로운 지식인을 기다리는 ‘중위’적 시민을 『창작과비평』의 ‘촛불 시민’이 계승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더 나아가 문학의 근본적 공공성을 사랑으로 명명하 는 것, 그 전체적 공공성에 대한 ‘시민의식’적 죄책감/자긍심을 ‘커먼즈 문학론’ ‘돌봄의 공동체론’과 연결해 읽어보면 어떨까14)). 미처 언어화되지 못했으나 정치적 열망을 품은 시민의식을 알아보는 선각자 지식인/문학인이 있고, 이를 더 보편적인 민 족국가 건설의 방향으로 슬기롭게 설계하고 인도하면 전위의 의식 있는 민주/촛 불 시민들이 이를 흡수하고 확산하여 결국 후위의 대중 역시 이를 따르게 된다 는 암묵적인 구도가 현재까지 여전히 유사하게 전개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욱 그렇다.15) 『창작과비평』의 근래 지면 배치 역시 노동자 시민의 언어·독서 현 황보다 (민주화 세대의 교수진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내외의 사회 지도층과 진보 적 교육자, 정책 전문가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시민의식’을 대리 발화하거나 지 식인을 대표하여 반성하게 하면서 민주당 (재)집권이라는 미래를 자긍하는 경 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한기욱의 비평은 촛불 항쟁 시기의 동시대성을 중심으로 소설을 꼼꼼히 독해하면서 이를 통해 촛불에서 기존 혁명과는 다른 방식, 주체, 의제를 읽어내 고 민주당 정권이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애도와 연대의 경험을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하는 등의 의미 있는 독 해를 보여왔다. 그럼에도 이는 페미니즘적 의제를 촛불 시민의 ‘시민의식’으로 사후적으로 발견/흡수하거나, ‘조국 사태’의 위선과 모순 자체보다는 그 때문에 분노한 청년들을 “정동의 아나키즘”으로 몰아가는 야만적 자본주의를 발견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16) 이런 발견-흡수는 시민의 ‘즉각적 정동’을 지식인·문학인 의 ‘훈련된 사유’로 승화하여 민주당(을 존립하게 하는 제도/세대의 개혁보다는) 정 책으로 전유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강경석이 촛불 항쟁을 ‘혁명의 갱신’의 필요를 드러낸 사건 으로 차분히 독해하는 장면은 소중하다. 그런데 그가 자신과 김건형, 김요섭, 강 지희의 황정은론 사이의 해석적 차이의 원인을, “「아무것도」〔「아무것도 말할 필요 가 없다」, 『디디의 우산』—인용자〕가 말하는 혁명이 ‘혁명의 혁명’을 포함하는 개 념임을 간과한 결과일 것”17)으로 꼽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네 논자 모두 촛불 혁 명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 혁명 운동/전략의 보수성과 자기동일성 을 지적하고 혁명의 갱신을 향한 동시대 문학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있음에도 그가 자신과 다른 논자들의 독해가 사뭇 다르다고 해석하는 배경에는 촛불 항 쟁 및 당시 텍스트에 대한 역사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광장의 (민주 주의적 가능성과 동시에 상존하는) 타자 소외/누락이라는 현상과, 시민정신의 이 념에 따라 필연적으로 종합될 촛불의 거시적 미래 어느 쪽에 무게를 싣느냐는 시각의 차이다. 이는 현재 개별자들의 수행성이 만들어가는 미래와 역사의 선 험적 법칙에 따라 해석된 현재라는 역사철학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강 경석은 백낙청이 “‘소수의 지도자 또는 지배자가 아닌 다수의 국민’ 정도로만 풀 이해놓으면 그 이상의 정의가 필요 없이 된다”(「민중은 누구인가」, 1979)라고 한 민중의 정의를 인용한다. “민중은 거주지나 계급 또는 성차 등에 따라 정체성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단위 공동체가 아니며” “차라리 특정 공동체 또는 특정 공동체를 통어하고 있던 규범이나 제도, 코드, 정체성의 동요로부터 소환되곤 해왔다.”18) 그럴 때 ‘민중’은 시기별로 출현하는 양태는 상이하지만 기득권과 싸 운다는 점에서는 단일한 상이며, 따라서 ‘민중적인 것’의 이념은 민중/국민 안의 위계와 폭력을 오래 응시할 수가 없다. 하나된 민중(이라는 동일성)과 외부의 기 득권/적이라는 이분법에 그 존재 형식이 기대기 때문이다.

     송종원은 퀴어 페미니즘 비평은 (민중적인 것의 종합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비퀴어와 퀴어 사이의 분할선을 만들고 그 분할선 너머의 통합적 정치성을 방 해한다는 염려를 토로한다.19) 그가 보기에 (일부) 퀴어 비평은 “디테일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시선” 속에서 “교정의 논리”로 “전체적 의미에 대한 독해에는 비교적 덜 신경쓰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과도한 민감성으로 이 어”(428쪽)지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작품이 퀴어 재현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므 로 “당시의 환경에서 나름의 타자성과 공동체성을 구현하려는 실험”으로서 “작 품을 역사화하여 읽는 방식이 필요”(428~429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 연 구/비평이 작가/작품이 당대로서는 선구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제한적 칭찬’에 복무하는 작업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폭력 과 억압에 대해서도 후대의 문학 비평/연구는 개입할 수 없다. 여성 시든 노동 자 서사든 어떤 작품이든 특정 집단의 재현 자체에 그치지 않고 나름의 주제의 식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임은 당연한 바인 것처럼, 작품의 형상화 방식이 그 전 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혹은 전달하려는 그 의미가 어떤 가치가 있 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비평의 당연한 역할이다. 비평 본연의 정치미학적 작업 은, 텍스트가 그 나름대로 타자성/공동체성을 구현하려는 시각/재현 방법 그 자체가 당시의 역사적 한계이자 가능성이었다는 점을 가시화함으로써 지금의/ 당대의 문학 독법/창작론 자체를 정치화하여 텍스트 내외의 ‘전체적인 의미’를 더 폭넓게 읽어 의제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퀴어 페미니즘이 기존 문학사를 재점검하고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독해하거나 텍스트에서 새로운 미학을 찾아 내는 작업은 단순히 작가/작품에 대한 사후적 ‘교정’(일 때조차 그간 누적된 독 법/창작론에 개입하는 작업에 더 가깝지만)에 멈추지 않고 문학 자체의 정치성을 갱신하고 확장하는 작업이다. 그런 비평 본연의 역할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애 써 이를 분할선의 구축이라고 재분할하는 일은 특정한 비평적 욕망을 드러낸 다. “의미 있는 전체”(430쪽)로 나아가 타자가 억압받는 현재를 “끊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고 구축하는 일이” 더 중요하므로 “광장의 정치와 퀴어 서사를 애써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429쪽)는 말은, 기실 이 분리를 전면으로 다룬 문 학 텍스트의 현재성을 감소시킨다.


분할된 것의 총합이 곧 전체는 아니며 주체의 행위와 생애는 분할된 것들 사이 의 조합과 그를 초과하는 결합 효과들로 인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젠더 감수성이 충분히 수용되어 있지는 않 았지만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이나 ‘시민’의 개념이 하던 일이 그것이기도 하 다.(430쪽)


     이러한 ‘전체’를 향한 지향 속에는 어떤 재현/존재든 그 부분/자체로는 의미가 없거나 적고 ‘의미 있는 전체성=시민의식=우주 진화적 사명’을 따르는 민족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최종 목표의 사전 단계로서만 유효한 정치 적 주체일 수 있다는 선험적 전체주의의 기획이 들어 있다. 따라서 김현이 “형들 의 나라”20) 만들기를 비판하면서 그간의 선험적 공동체주의, 단계론적 역사의식 이 적극적으로 분할해온 혁명의 작은 주체들을 회복하는 작업과 한국 퀴어의 일상적 노동과 사랑, 돌봄의 역사를 읽는 작업21)에서 송종원이 추출하는 것은 “광장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고도 타인의 생을 염려하고 연대하는 이 감각의 발 견”(431쪽)이다. 퀴어가 광장의 정치, 연대로 돌아가는 통합의 움직임에만 주목 할 때, 광장에서 누락되어온 퀴어적 역사철학을 주창했던 바는 크게 주목되지 못한다.

     황정은과 김현의 문학에는 선험적 역사/전체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 의식 이 없다. 도리어 그 이념을 따랐던 지식인/시민 담론에 대한 청년의 분노가 있 다. 기존 분할선을 가시화하고 이를 의제로 숙고한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달라 진) 광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화자의 문제의식(과 이를 강조한 비평의 문제의식) 을 송종원은 도리어 분리주의로 치부한다. 그러한 변증법적 운동에서는 소외의 주요 원인이 바로 그 ‘저항적 시민 집단’일 수 있다는 비판은 피상적인 포용과 서정적 전체성으로 인해 흩어지고, 그 덕분에 얼마간 겸허해진 ‘시민의식’은 재 빨리 회복된다. ‘나’의 소외와 배제를 말하는 타자의 목소리에서 그 선험적·총체적 원인인 (타자는 몰랐지만 지식인에 의해 드러나는) 거대한 외부의 ‘적’을 지목 함으로써, 타자는 이에 맞서는 저항적 시민 집단의 일부분으로 다시 흡수되어 미래의 국가/민족의 재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 도식에서 퀴어적 인식론은 소시민적 이기성에 가깝게 독해된다. 그래 서 퀴어 되기의 수행성이 “비-퀴어의 주체성을 소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며 “퀴어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같은 쪽) 타자적인 존재이므로 우리 모두를 규율하 고 조율하는 존재로 확장하는 대국적 관점이 주문된다. 퀴어의 고유한 존재론 을 구축/확장하려는 시도를 ‘역사화하여 읽기’보다는, 그 문제의식을 재빨리 더 큰 보편자(가 이미 갖고 있었다는)의 자의식으로 흡수하면서 퀴어적 인식론의 고 유함/필요함이 무화되는 셈이다. 여성/퀴어가 매일 하는 보편 언어의 자기화라 는 번역 노동이 역으로도 가능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하지 못하는 것일까? 굳 이 퀴어 비평이 없더라도 이미 ‘시민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퀴어 비평이 제 기하는 문제들을 왜 진작 보지 않았던 것일까?22) 그 근간에는 비-퀴어가 퀴어 적 인식론을 통해서 배우고 자신의 인식론을 갱신하기보다는 기성 전체/보편의 입장에서 효용가치를 입증하라고 퀴어에게 요구하는 당당한 자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비-퀴어의 대의에 ‘대국적’으로 이입해달라는 요구나 비-퀴어 에게도 익숙한 언어로 번역해야만 문학/학술적 시민권을 배분하는 분할은 그간 무수히 반복되어온 페미니즘에 대한 진부한 요구와도 닮아 있다.23) 사소한 표현 에 집중할 뿐 선험적 공동체를 따르지 않기에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퀴어 페미니즘을 통해 구축할 수 있는 다른 역사성을 미리 평가절하하면서 ‘나 중에’ 도래할 민족국가 건설의 단계론에 따르길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낙청에게 사랑은 모든 존재가 완성으로 향하는 도정을 부추기는 힘”24)이었겠지만, 퀴어 페미니즘 비평에게, 아니 지금 비평에게 사랑은 개별자는 몰랐지만 역사적으로 정해져 있는 하나의 완성을 향하도록 부추기는 책임감/죄 책감이 아니다. 사랑은 모든 존재가 각자의 삶을 스스로 형성하는 과정에서 출 현한다. 그러니 이제 현재를 이미 있던 하나의 광장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 자체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를 만들어가는 언어적, 미학적, 정치적 원리가 더 필요하다. 우리는 누가 정치를 하길 원하는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정치-관계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교양, 그로부터의 말 걸기


     황정은과 김현이 촛불을 통해 기존의 혁명(사) 속 주체와 관계성을 정지 하고 갱신했다면, 김기태의 「보편 교양」25)은 지금의 지성 체계 속의 주체와 관계 성을 정지하고 갱신해간다. 이 소설은 선험적 전체성에 대한 지식인의 책임감과 자긍심의 변증법이 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를 부조한다. 화자인 곽은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해설되는”(189~190쪽) 늙은 교수와 달리 현실 문제 를 사유하고 고민하는 학생을 길러내려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식인으로 서 사회적 책임감을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 곽은 선택과목과 자기 설계 수업이 늘어난 교육 정책에 힘입어 ‘고전 읽기’ 수업을 자원해 개설한다. 문 제 풀이를 위해 토막 낸 단편적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에서 벗어나려면 “고전 읽 기는 일하고 사랑하고 꿈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적 교양을 담 은 수업이어야 했다”(196쪽). 그래서 곽은 수강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 하지 않는다. ‘성적’으로 평가되는 ‘학생’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으로 접근하고 싶기 때 문이다.

     “70년대, 혹은 60년대 작품”을 가르치며 “억압적인 권력에 훼손된 개인의 자유를 형상화하며 반성과 실천을 독려하는…… 식의 설명을 마쳤을 때 맨 앞 줄 학생이 질문”한다. “선생님도 민주화 운동 했어요?”(190쪽) 학생들에게 반성 을 통해서 실천으로 확장해가는 지식인의 사명감과 부채감은 동시대적인 감각 이 아닌 것이다. 곽은 고전 읽기 시간에 자거나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을 책망하 지 못한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봤을 거라 짐작하며 어제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자냐고 물”으면 “늦게까지 배달을 해서…… 죄송합니다”(197쪽)라 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곽은 “사연을 물을지 고민”했지만 “각자의 삶에 서 이 수업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차라리 50분의 숙면이 더 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을 교실에 가두는 것은 어른들의 욕심이 아닐까”(같은 쪽) 생각하며 더 겸허해질 뿐이다.

     그런 곽에게 은재만이 희망을 준다. 은재는 『자본론』을 수업에서 읽힌다 며 학교에 민원을 제기하는 아버지를 도리어 어른스럽게 만류하고, 고전 읽기의 취지에 맞게 인간의 본성을 논하며 마르크스의 유산을 논하는 비평문을 써내 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대에 합격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곽은 졸업식 날 은 재를 다시 만나 아버지와의 해프닝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은재는 입시 컨설턴 트 선생님이 마르크스가 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아버지에게 전화했었다고 말하 며 아버지의 교양 없음을 탓한다. 보편 교양을 가르치려는 곽의 사명감은 비판 적 담론마저 지식 자본으로 흡수하는 교육/입시 시스템 덕분에 ‘늙은 교수’들에 의해 가까스로 ‘성과’를 낸다. 외로움과 패배감에 빠져버린 곽은 수업시간에 늘 잠만 자던 아이들이 몰려와 굳이 자신과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는 데에 기분이 더 묘해진다. “그들이 성인의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지 만 불투명한 상황이라면 실례일 수 있으므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210쪽)

     곽이 교육에 실패하고 입시에 성공하는 역설은 학생들의 사연을 묻지 않 는 데에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는 “일하고 사랑하고 꿈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적 교양”을 바탕으로 권력에 맞선 “반성과 실천을 독려 하는” 지식인을 육성하고 싶었지만, 누구여도 무관한 보편적 인간에 대한 책임 감과 죄책감은 학생들에게 시대착오적이거나 자신과 무관한 것이었다. 입시 컨 설턴트의 조언처럼 대학의 늙은 교수들에게 중요하게 평가받아 학력 세습에 도 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수업시간에 문제를 풀어야만 하는 이유 와 야간 알바를 해야 하는 이유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고전은 아이들에게 공허 했다. 곽 역시 자신이 왜 ‘이 고전’을 가르쳐야 하는지 묻지 않았기에 책장을 메 운 추천 도서 “하나하나는 알맞게 배치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롭지 않아” 보 인다. 그러나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었다”(209쪽). 그는 정규 직 교사로서 임금과 안정성을 보장받으므로 “균형감각, 계급의식, 뭐라고 부르든 견지해야 할 미덕이 있다면 푸념은 자제해야”(191쪽) 한다고 다짐해왔다. 보편적 지식인으로서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한다는 자긍심이다. 그래서 은재의 아버지 와 교장이 “전교조는 아니”냐고 노동권과 교수권을 침해할 때도 “혼자 맞서는 편이 낫다는 결론”(199쪽)에 도달할 뿐 자신에게 필요한 사유와 환경을 찾지 않 았다.

     하지만 곽이야말로 노동환경과 교사 공동체를 제대로 직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 교양이 필요했다. 누구여도 상관없는(그래서 실은 특정한 계급/집단을 지 칭하고 마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선험적 책임감을 가르치는 강단講壇은 이제 아 이들에게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불안과 분노를 말하는 단상壇上이야 말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교양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이제 교양은 민 족·국가에 대한 선험적 죄의식을 습득하고 도래할 전체로 현재를 이월하는 지 식인의 자부심이 아니다. 내가 속한 사회가 지금 어떠하길 원한다고 말하고 설 득하는 데 필요한 도구야말로 교양이다. 곽이 마주한 것은 스스로 말하는 자들 의 단상으로부터 다시 교양을 교양해야 한다는 시대적 전환점이다. 우리도 그 단상 위에 있다.

  • 1) 김건형, 「이태원의 ‘나’ 아카이브와 치안-행정을 넘는 문학/비평」,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 2) 백낙청, 「2023년에 할 일들 —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이하 「2023년」),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3) 백낙청,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촛불혁명 시대의 한반도」(이하 「어떤」),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4) 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이하 「‘촛불’」),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5) 백낙청,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6) 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317쪽.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7) 한기욱,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디디의 우산』을 읽고」,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2~3쪽.
  • 8) 최근 외부 필진이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원론을 소개한 적은 있으나 본격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개혁 요구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하승수, 「선거제도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 9)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비평』 1966년 겨울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10) 물론 “‘지식인-문학인’과 대중을 선명하게 구별하는 그의 생각이 대중을 무시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백낙청은 한국의 후진성이 대중 의 의식 발전의 지체를 낳고 있고 그래서 대중의 잠재성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당대 한국에서 ‘지식인-문학인’은 ‘소수 선구자’로서 의 역사적 위상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에게 역사의 주체는 결국 ‘대중-민중’이다. ‘지식인-문학인’은 ‘소수 선구자’로서 대중의 주 인 됨, 민주주의를 앞장서서 대중 스스로 일깨울 수 있도록 앞장선다.” “이렇듯 백낙청의 ‘지식인-문학인’에 대한 높은 역사적 책무와 위상의 부여 는 기본적으로 현재까지 줄곧 지속된다. 여하튼 창비를 창간할 때부터 백낙청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그래서 그는 새로 창간하는 잡지명을 ‘전위’라고 할까도 생각했다고 한다”(이성혁, 「1970~1980년대 한국 문학운동 담론에서 ‘지식인-문학인’ 위상의 변천」, 『뉴 래디컬 리 뷰』 2016년 가을호, 126쪽). 1960년대의 엄혹한 사회적 환경이나 동시기 인문학계의 전반적인 인식틀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 백낙청의 비평관 이 꾸준히 갱신되어간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으나, 지면상 이러한 역사-주체의 구도가 현재까지 큰 변동 없이 이어진다는 점에 우선 주목한다.
  • 11) 백낙청, 「시민문학론」, 『창작과비평』 1969년 여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12) 영국의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리얼리즘과 현대소설」의 일부로, 백낙청이 직접 “본지 7호에 번역 수록”했음을 밝혔다.
  • 13) “한 명의 시민으로 긍지를 느낀다는 것은 과거에 발생한 트라우마에, 그러한 트라우마가 〔자부심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하는 일에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가리킨다. 트라우마를 넘어서 마침내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지 않는 일은 단지 마음이 메마른 것을 넘어서 적대 적인 것을 뜻하게 된다. 마치 행복을 느끼지 않는 일의 이면에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한 불신과 더 나아가 국가를 파괴하려는 음모가 도사리 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국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가 겪은 트라우마의 역사를 기억하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여정에서 이를 상기한다 는 것을 뜻한다.”(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486~487쪽)
  • 14)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통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개개인의 창작이면서도 서로의 반응이 만나야만 하기에 “시가 정말 시답게 존재하 는 방식, 그러니까 협동적 창조를 통해 생성”(황정아,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22쪽)되는 유기적 전체성을 ‘문학이라 는 커먼즈’라고 칭한다고 할 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라는 자각 속에서” “공동체를 능동적으로 구성 및 재구성”(백영경, 「복 지와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8쪽)하는 태도가 중요해지는데, 이를 갱신된 시민문학론으로서, 그 주체의 내적 위계와 공동체의 역사적·선험적 자기실현 원리를 비교,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와 시민이 협동적으로 창조하는 커먼즈는, 대중에 미칠 미래적 영향력을 자긍하며 자신을 정체화하는 지식인의 죄책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을까. 시민-독자의 ‘부분’적 현실로부터 작가-지식인의 보편적 책임을 발 견하는 ‘시민정신’의 구도, 시민과 지식인을 묶으면서 분리하는 ‘사랑’의 미학적 태도와는 얼마나 같고 다를까. “마을 공동체나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공동체 단위”라는 시민적 거버넌스를 전제로 하면서 “국가가 곧 공공성의 담지자라고 볼 수 없”(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25쪽) 다며 국가 중심주의와 다른 공동체를 섬세하게 논의한다는 점은 커먼즈론의 중요한 입각점이지만, 커먼즈를 민족국가로 종합되는 진보적 시민 집단과 일체화하는 경향이 여전히 없지는 않은 듯하다. 공공성을 대체하는 커먼즈라는 개념적 시도가 (순문학장에서) 특정 세대/이념의 비평가 바깥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사정도 어쩌면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 15) 조연정은 백낙청의 시민/민족/민중문학론이 동시대 현장 비평장에서 여전히 유효한 준거로 작동하는 양상을 지적하기도 한다(조연정, 「주 변부 문학의 (불)가능성 혹은 문학 대중화의 한계—백낙청의 ‘시민/민족/민중문학론’ 재고」, 『인문학연구』 51집, 2016). 『창작과비평』의 문학 론 전반을 백낙청의 “역사실천주의”로 손쉽게 환원하는 시각은 물론 곤란하지만, 백낙청의 글이 비판적 검토 없이 고스란히 내부 인용으로 순환 되는 『창작과비평』의 독특한 패턴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이 약화되고 문학의 자율성이 점점 더 강화된 90년대 이후부 터 최근까지의 문단에서, 창비가 어떤 행보를 보였으며 창비에 대한 이 같은 오래된 선입견이 어떤 문제적 작용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도 관심 을 둘 필요가 있”(327쪽)으므로 그 기점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조연정은 시민/민족문학론이 ‘운동’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인류의 모럴을 요청”(350쪽)하는 문학 근본주의자의 ‘문학 원론’이라고 정리한다. 관련하여 손유경은 창비의 민중, 민족문학론을 “부채 의식에 시달리 는 ‘지식인’이 아니라 특정 인물형이나 소재, 배경, 스토리를 애호하는 ‘문학예술가’로 간주하는 관점으로의 전환”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에 동의 하는 한편으로 도리어 ‘부채 의식에 시달리는 지식인’과 ‘부채 의식을 자부심으로 반전하는 지식인’이야말로 애호되는 문학적 모티프임을 덧붙여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손유경, 「현장과 육체—『창작과비평』의 민중지향성 분석」, 『현대문학의 연구』 56호, 2015, 38쪽).
  • 16) 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21쪽, 34쪽; 한기욱, 「주체의 변화와 촛불혁 명—최근의 몇몇 소설들」, 『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 21쪽. ‘조국 사태’를 기득권 언론에 의한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폭주”이자 한국 사회의 입시 제도 기준에서 ‘공정’하지 않은 공격으로 보는 억울함은 김종엽, 「조국사태, 대학입시 그리고 교육불평등」(『창작과비평』 2019년 겨 울호, 274쪽)에서 본격적으로 개진된다. 민주당과 586 지식인/교수 집단의 학력 자본 세습이 다른 기득권의 부패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님에도 언론/검찰 유착 탓에 더 공격받는 프레임이 생겼다는 집단적 감각이다. 이는 민주당(내외의 담론)이 자처하는 ‘개혁적 중도주의’가 자기동일성의 재생산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따라서 그 역사적 시효를 다했음을 역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한기욱도 인용하듯이 “기후변화와 성장주의의 위기 앞에서 “구세대가 이어온 맹목의 질주에 새 세대도 끼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구세대의 ‘전향’을 요구하는” 것이 진짜 ‘세대 정치’라는 것이다. 장 석준, 「진짜 세대 정치」, 한겨레, 2019. 10. 18.”(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 19쪽 각주 3)
  • 17) 강경석, 「촛불의 재배치—황정은, 윤이형, 김성중의 눈」, 『리얼리티 재장전』, 창비, 2023, 34쪽.
  • 18) 강경석, 「리얼리티 재장전—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 같은 책, 107쪽.
  • 19) 송종원, 「분할선 너머에서 작동하는 문학의 정치」,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20) 김현, 「형들의 나라」,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문학동네, 2021, 164쪽.
  • 21) 김건형, 「역사의 천사는 똥구멍 사원에서 온다—김현론」,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 문학동네, 2023.
  • 22)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까? “도래할 미래를 향한 선한 약속은 고통을 구원의 시간을 예언하는 증례로 사용할 뿐, 고통받는 눈앞의 사람을 살리지는 않는다. 이는 신학적 구원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역사관의 형식이기도 하다.”(김건형, 같은 글, 498쪽)
  • 23) “골리지 말고 상냥히 설득해달라는 주문은, 그러면 보다 건설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여성운동과 성소수자 운동 진영 에 지속적으로 요청”된다(오은교, 「손절과 벤딩」, 『문학3』, 2019년 3호, 49쪽).
  • 24) 송종원,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23쪽.
  • 25)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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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영 오렌지 셰이밍 ― 김나현, 「공중정원」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김나현소설계간평리뷰 2025
최다영 유독한 유기농 가족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림 :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양수빈소설계간평리뷰가족 2025
정의정 광장에서 만난 괴물과 춤출 때 ― 성해나 소설집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계간 문학동네 정의정 성해나혼모노탄핵태극기 집회근대성무속정동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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