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현대시 2024년 2월호(제410호)
소란騷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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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이 공연되고 있는 작은 극장이 있다. 무대는 과거의 물건으로 가득하고, 배우들의 복장은 겹겹이 현재와 멀다. 배우는 서사의 시공간 안에서 인물의 현실을 살면서, 그것으로부터 한참 멀어진 자신의 현재를 산다. 두 현실은 그에게 모두 지금 여기이지만 극은 시차를 분명히 드러낼 것을 요구하고, 두 시간을 모순 없이 맞붙여 동시에 있게 하는 것은 오롯이 배우의 일이다. 충실히 과거로서 현재에 있을 것. 그런 요구에는 멀미나는 지점이 있고, 그것을 견디기 위해 연기자는 연기에 몰입하는 방식으로 연기하는 티를 지운다. 그때 배우의 지금은 극중의 지금에 잠시 갇히고, 이 직업인의 목소리는 인물의 목소리 뒤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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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빈의 시는 길고 빼곡하다. 장면을 만들거나 사태를 짚으면서 언어는 한참 이어지고, 종이를 가득 채운 표의문자처럼 가볍지 않은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아득히 시의 무대에 몰입하게 된다. 그의 시가 종종 연극적이어 보이는 것은, 구도와 동선이 섬세히 고려된 연출 속에서 물질들 사이의 관계를 그려내거나, 당신과 내가 비장하고 비대한 문장들을 대사처럼 읊으며 등장하기 때문이다. 무대 위와 아래, 꿈의 안과 밖, 텍스트 내부의 서사와 외부의 현실, 창문의 이편과 저편 사이를 오가며 인물들이 말을 던질 때, 그의 시는 그 자체로 극이 공연되는 중인 극장에 관한 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연극적 성격이 이설빈 시의 한 지점으로서 중요하다면, 그 이유는 그의 시가 꾸리는 무대와 극본, 연기와 연출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장치들 아래에서 어떤 목소리가 매몰된 채로 멀리 들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 목소리는 인물이 아니라 녹아내리고 흡수되어 무대가 되어버린 이가 작은 입김을 내뱉듯 가까스로 만들어지는 소리로, 말이 아닌 숨의 흔적으로 간직되어 있다.
불이 나간다 창문에 복도를 열고
두 눈은 번갈아 발을 내딛는다
복도 안팎으로
눈발이 날린다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창문은 더 선명한 복도를 바란다
복도는 더 적은 입김을 가져야 한다
─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부분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는 “창문에 눈송이가 붙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눈송이가 붙어 있는 창문은 방처럼 닫히는 공간이 아니라 그런 공간들을 연결하며 열려 있는 복도의 한 단면이다. 눈송이는 그 투명한 표면에 붙어 “아무도 없는/복도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이설빈 시의 연극적인 특징은 이런 시선의 교환 속에서 만들어진다. 창문과 눈송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곳에는 복도를 들여다보는 눈송이의 시선이 동시에 있고, 눈길들이 가로지르며 이루는 시공간의 입체로 시의 무대는 만들어진다. 그 무대에 시선을 가진 눈송이와 ‘나’가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나’와 눈송이가 서로를 마주보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이 무대에 있는 방식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복도를 들여다보는 눈송이의 시선 앞에서 ‘나’는 자신의 눈으로 “눈송이를 들여다본”다. 이때 그의 “두 눈”은 ‘나’의 몸에 있는 하나의 신체 기관이 아니라, “맥박이 뛰”고 번갈아 땅을 딛는 두 발처럼 움직이며 “나보다 오래 깨어/복도를 서성”이는 몸 자체이다. 이 몸은 눈송이가 들여다보는 중인 복도를 거니는 듯, 그 “발소리가 녹아”드는 공간이기도 하다. “창문을 열면/눈이 달라붙”을 “내 눈”은 이를테면 소유격이 무색하게 나의 것이 아니라 나 자체이고, 제 움직임으로 스스로 울리는 복도이며, 눈송이가 들여다보는 대상이자 “아무도 없는” 공간 전체이다.
그럴 때 ‘나’는 무대 공간 자체, 시가 펼쳐지는 무대로 있다. 이 무대 위에 등장인물로 있는 것은 바라보는 시선으로 복도의 입체를, 복도의 맥박을 가능하게 하는 눈송이뿐이다. 텅 빈 공간에 놓인 의자 하나처럼 눈송이의 시선이 무대의 성격을, 내용을, 질서를 지배하며, 무대로서 복도는 그 시선의 소유격에 귀속된다. “눈송이는” 아마도 꽃송이 같이 엉긴 무수함으로 복도를 쪼개어 “많은 복도를 가”지고, 복도의 문법적 위치도 바꾸어버린다. 눈송이에게 시선을 돌려주며 주어의 자리에 있으려 하는 ‘나’는 목적어가 되어 “지나쳐온 의문과 지나치게 가까운 질문들이/한 몸으로 나를 호흡”한다는 문장 속에 놓이고, 복도는 “많은 문”과 “그보다 더 많은 창문을” “가졌다”고 말해지는 때에도 “창문에 복도를 열”어 버리는 문장의 도치에 힘을 잃는다. “복도 안팎으로/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지고, “창문은 더 선명한 복도를 바”라며, 그런 문장들의 복판에서 복도는 “더 적은 입김을 가”지는 방식으로만 주어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는 복도마저도 더 조용히,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있어야 하고, 그런 눈송이의 법칙 하에서만 복도는, ‘나’는, 시는 있기를 계속한다.
문마다 창문마다 무수한 것들이 쏟아져 들어올 수 있는 공간. 타인이 개입될 창구가 많아질수록 하나의 몸으로도 수많아지는 복도의 기능 속에서, ‘나’는 스스로 숨죽여 소리를 낮춰야 하는 자리에 깊이 놓인다. 시선과 바람에 응답하고 호응하는 방식으로만 있어야 하는 그 볼륨 없는 자리에는 기대되는 역할을 연기하며 자신을 감추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을 소리 내지 않는 배우가 있다. 그 배우의 언어는 언제나 일종의 대사이고, 그가 발음하는 음성인 와중에도 대사는 언제나 타인의 문장이며, 그 문장 안에 먼저 ‘너’로 불리지 않는 ‘나’의 자리는 없다.
장마가 지난 어느 화창한 날, 말갛게 씻긴 그는 어느새 한참이나 위에서 그를 굽어보는 새로운 꽃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꽃들은 거인처럼 군다. 커다란 눈에 그득한 이빨을 움직이며 저마다의 목소리로 그에게 면박을 준다.
─천사니 화단이니, 철 지난 이야기는 관둬. 그리고 벌새는 대륙에서 꿀을 빨지. 조그만 게 성질도 더러워서 여기까지 날아오지 않아. 바보가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지. 바보가 아니지.
─좋아. 다시 말해보자. 나는 바보가 아니다.
─너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지.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해야지. 다시.
─너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를 나로 바꿔야지.
─바보는, 내가 아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아니, 바보가 아니긴 한데…
─너는, 바보가 아니다.
─…
─너는, 바보가 아니다.
너는 바보가 아냐
─ 「벌새는 거인을 불러온다」 부분
이 시에서 “나는 바보가 아니다”라는 문장은 조금씩 변주되며 열 번 반복된다. “한목소리로 흔들”리는 “꽃들”이 시작한 이 말은 사람과 개, 벌과 바람, 별과 달, 파리들과 빗방울들이 이어 받는다. 그들은 모두 ‘그’가 “키 낮은 화단에 발을 묻”은 채 화단에 속해가는 시간을 배경처럼 지나는 등장인물들이다. “천사”였으나 스스로 날개를 접고 발을 묻으며 “이제 누구든 좋으니까/너는 바보가 아니라고 말해”달라 말하는 ‘그’의 간곡함은, 그를 향한 언어가 아니라 그가 복사해야 할 무수한 ‘나’들의 언어로 되돌아온다. 모두가 ‘나’의 자리에서 스스로 “바보가 아”님을 말하고 그렇게 ‘그’에게 아무도 “너는 바보가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는 가운데, ‘그’는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그에게 ‘나’라는 인칭은 언제나 ‘너’인 상태, 타인의 시선과 호명을 경유해야만 말해질 수 있는 대상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그’가 내는 목소리는 화단을 빼곡이 채운 꽃들의 목소리를 따라하는 일종의 모사로서, ‘나’의 목소리를 멀리 감춘다.
중요한 것은 이때 일인칭을 말할 수 없게 되는 그가 일인칭을 아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세계를 온통 일인칭에 대한 감각으로 채운다는 점이다. ‘그’는 화단이 되어가는 와중에 문득 “화단에서 조금씩 발을” 빼고, 발끝에 “발가락이 자라 있”는 것을 본다. 그때 그는 “쨍한 이명”을, “메아리 없는 목소리”를 듣는다. “벌새는 거인을 불러온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두 번 반복되는 동안, 잠시 잠깐 “꽃들은 한목소리로 침묵”하고 그는 오래 박혀있던 발을 뺀 채로 “화단에 쓰러”진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는 스스로 “거인”이 되어 “다 자란 발을 빼고 화단 밖으로 다른 몸이 되어 걸어 나”가거나 “벌새”가 “불러”올 “거인”을 기다리는 대신, 화단에 머물며 “꽃들”에게 “거인”의 이미지를 씌운다. “거인”은 도래할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꽃들”의 질서가 되며, ‘그’의 “다 자란 발”은 그 질서에 박히지 않아도 여전히 화단에 속한 채로 머문다. 그를 ‘너’로 호명하며 소속을 확인해줄 것들이 무수한 이 꽃밭[花壇]에서 그는 ‘너’로서 스스로를 삭제하는 채로 눈송이 앞의 복도만큼 많아지고, 그 방식으로 비대해진다. ‘나’라는 인칭을 자기 것으로 발음하지 않아도 ‘나’에 관한 문장들은 그의 세계를 충만히 채우며, ‘나’를 말하는 무수한 것들에 기대어 그는 스스로를 ‘나’처럼 앞세우는 “행렬”의 부분이 된다.
단단하고 뜨거운 들판, 입김을 뿜으며 전진하는 공중의 검은 들판이 되어 우리는 돌아온다. 아니, 검은 갈기가 빼곡한 목덜미, 그 위에 절그럭거리는 투구 안으로 나는 돌아왔다. 옆구리 아래로 감각이 없다. 흘러나온 피가 안장을 적시고 있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종자(從者)는 말없이 내 말을 끌고 있다.
말머리를 돌린다, 산발한 갈기 너머로. 행렬, 노을을 등진. 겹겹의 기다란 행렬. 깃발도 구령도 없는 행렬. 흙먼지를 삽 뜨는 빛, 몸통이 매몰된 그림자들의 행렬.
─ 「이탈자, 벗어날 수 없는」 부분
“나사가 빠져나온 하늘”을 배경으로 겹겹의 “이탈”에 대해 말하는 이 시에는, “말을 타고 처음과 끝을 오가는 데도 한나절이 걸”릴 만큼 긴 “행렬”이 나온다. 행렬은 하늘에 구멍을 내며 “빠져나온” “이탈자”들인 동시에, “배신자나 약탈자”라 불리면서 “자신들을 이탈자라” 부르는 “그들”에게 “쫓기고 있”는 “순찰자”들이기도 하다. 복잡한 배경이 있는 듯 보이지만 이 행렬은 그저 행렬을 이루어 걷고 있을 뿐이며, 회전하는 일이 빠져나오고 들어가는 일이 되는 나사의 원리처럼 “산허리를 겹겹으로 감아” 도는 그들의 걸음은 그 자체로 “돌과 나무와 흙으로 이루어진 나사”의 모양으로 스스로의 배경이 되는 중이다.
“기수”인 ‘나’는 그 풍경을 이끌거나 멈추거나 돌아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하지만 “깃발도 구령도 없는” 행렬의 선두에서 ‘나’는 “몸통이 매몰된 그림자들”과 마찬가지로 행렬의 일부일 뿐이다. 기실 거기엔 ‘나’보다 앞서 걷는 “종자”가 있고 ‘나’가 탄 말은 “종자”의 손길을 따르며, 이 거대한 화면에서 ‘나’는 자리는 있으나 역할은 없는 공백의 기표처럼만 있다. ‘나’에게 “면박을” 주듯 말을 거는 “성난 기수”들에게 대사의 큰 비중이 할당되며, ‘나’는 그들의 언어에 반응하고 수긍하는 역할만을 하다 끝내 “말에서 내”린다. 그의 말을 끌던 종자가 ‘나’를 내려두고 대신 “말머리를 돌”릴 때, 말은 기수에게 높이를 부여하는 말[馬]이자 기수들에게만 부여되는 목소리로서 말[言]이기도 하다. ‘나’는 자기 언어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온 채로 말을 잃어버리며, 그의 생이 무엇으로부터 이탈하거나 무엇을 맴도는 중인지를 정확히 따져 묻지 않는 채 최소한으로 남아 있고, 끝내 모든 것을 잃는 방식으로 그 최소의 상태를 지킨다.
이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종자를 따라 행렬이 다시 나사 모양으로 “하늘의 구멍에 조여드는” 광경을 본다. 모든 ‘이탈자’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하늘은 다시 완전해질 것이다. 그런 전망으로부터 등을 돌려 ‘나’는 고여 있는 “웅덩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 꿈을 이탈한다”고 말한다. 이 단언 혹은 선언에서 ‘이탈’은 ‘나’만큼 텅 빈 기표여서 일어나는 듯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렬이 “살얼음 덮인 웅덩이들을 밟을 때마다 땅 아래로부터 탄식이 터져 나”오는 땅에서 바로 그 웅덩이 중 하나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일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탄식”으로, “적은 입김”으로 주어진 풍경에 목소리 없이 속하는 일과 다시금,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설빈 시의 인물은 그처럼 ‘나’로서의 결단을 내리는 듯 보이는 때에조차 스스로 입을 막으며, 그 소리 없음으로 ‘나’가 ‘나’로 남겨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웅덩이 깊은 곳에서 그런 ‘나’는 작지만 너른 들판만큼 크며, 눈송이의 시선 속에, 꽃들의 부름 속에 살아 있듯 행렬이 이루는 풍경의 일부로서 “혼절과 결락 사이”, 잘려나가지 않은 채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탈자, 벗어날 수 없는」이라는 시의 제목에서처럼 ‘이탈’이 사건이 아니라 풍경 전체가 질서를 반복하는 방법인 듯 그려지는 것은, 끝내 ‘이탈자’가 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그의 시에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눈물을 자르”는 종자의 단호함을 본 ‘나’가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듯, 이설빈의 시가 “댕강/댕강/댕강”(「만종」) 잘려나가는 장면을 오래 반복하는 배경에는 어쩌면 행렬과 화단의 질서로부터, 문과 창문과 눈송이의 시선으로부터 단절되고 배제되어 버리는 것에 대한, ‘포함’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입김이 되어 최소한의 ‘나’를 지키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이설빈 시의 이러한 방법은 시인 자신이 삶을 체감하고 이어가는 방법으로 읽히기도 한다. 자신이 반복하여 꾸리는 무대 위에서 스스로 반복되는 서사가 되면서, 그의 삶이, 시가 갇힌 웅덩이가 어디인지를 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겐 책임이 없다”는 성난 기수들의 말은 이설빈의 시가 그 자신의 언어를 향해, 지속되는 삶을 향해 읊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 말은 이를테면, 어떤 상황은 이미 주어진 채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위협이 될지 모를 “이탈자”들을 피하거나, 결국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행렬”로서 걷는 오래된 일을 다른 모두와 함께 이어가야 할 따름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큰 배경에 속해 있다는 감각을 지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행렬이 길어지고 웅덩이가 많아지며 나사가 풀렸다 조였다를 반복하는 오랜 서사 속에서, 그러한 사태를 반복적으로 무대화하는 시편들의 시간 속에서, ‘나’와 시인은 그 되풀이를 되풀이하는 한 몸으로서, 그림자로서, 더 조용해지는 방식으로 모종의 책임과 관계되고 있지 아닐까. 이설빈 시의 ‘나’ 혹은 ‘그’에게 여전히 귀속되어 있는 최소한의 소유격이 있다면, 그것은 “벗어날 수 없”다는 감각을 생의 조건으로 붙들어온 그 자신의 “방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방법이 재차 현실 속에서 무대를, 지금으로부터 먼 시간을, 의인화된 인물들과 비장한 대사를 필요로 한다면, 그런 방법은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피하면서 책임 있음과 없음에 대한 감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이설빈의 시는 시의 방법과 더불어 그 방법의 배경을, 이유를, 그 방법의 다음을 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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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대낮의 원주(圓周)
그 속에서 나는 배꼽만 한 홈을 발견했고 숙달된 몸짓으로 내 보잘것없는 언어의 유리문을 돌렸으며 그 안으로 사람들이, 비눗방울들이 밀려왔다
서로의 표면을 깨뜨리지 않은 세심하고도 무심한 대화들, 그 부드러운 입김들에 저항 없이 떠밀려가는 몇 달간, 나 자신을 드러내는 어떠한 표현도 하지 않았지만
그만해!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 말을 듣고도 나는 계속 침묵하며 말했고 그 침묵을 과장했으며 이 문은…… 그 침묵과 이 침묵을 이어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문은 특별하다
─ 「벽 없는 문」 부분
분주하게 돌아가는 유리 회전문을 생각한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사람들이 오갈 수 있도록 뱅글뱅글 도는 문. 하지만 유리 회전문에는 안쪽과 바깥쪽이 없이 도는 방향만이 있다는 사실. 그 문이 “벽 없”이 있다고 느낄 때 이설빈에게 유리문의 회전은 어떤 것으로 감각되고 있는 것일까.
「벽 없는 문」의 ‘나’가 “언어의 유리문을 돌”리기를 반복할 때, 그 회전의 앞뒤에는 무수한 문장들이, 등장인물들과 ‘나’의 진술들이 따라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돌아가는 “언어의 유리문”의 일환으로서 순환적인 구조를, 반복의 양태만을 보여주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문”과 “의미”와 “욕망”이라는 단어가 각각 주어의 자리에 놓여 “문은, 더는 의미를 욕망하지 않는다”거나 “그 욕망은, 의미 이상의 문이 아니다”거나 “그 이상의 의미는, 문을 욕망하지 않는다” 같은 문장이 거듭 만들어질 때, 어떤 “진실”을 담은 명제 같아 보이는 단호함에도 각각의 문장들은, 혹은 서로 함께 이 문장들은, 어떤 “처단과 예단”도, “진단과 처방과 예방”도 하지 않는 언어 덩어리로 읽힌다. 무겁지만 비어 있는, 빼곡하지만 형체가 없는. 그것은 아마도 유사한 통사 구조로 두 번씩 반복되는 이 명제들이 문장을 완료하자마자 “문”과 “의미”와 “욕망”의 순환 고리 속에서 곧바로 다음 명제로 미끄러져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반복 속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계속 회전하는 문처럼 미끄러지는 상태 자체일 따름이다.
그런 반복의 복판에서 이설빈의 ‘나’가 “불붙은 불안의 유전(油田)”을 말할 때, 그가 오래 이야기해 온 ‘불안’은 하릴없이 도는 유리 회전문의 폐쇄나 혹은 그 회전 자체로 인한 멀미와만 연관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시의 인물들이 “비명이든 욕이든 한목소리로” 불안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태와 상태를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이며, 알면서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살아감의 방법 속에서 ‘이탈’을 바라는 마음을 그냥 ‘결락’시켜버리지 못하는 모순을 내내 감당하는 중이기 때문일 듯하다. 되풀이를 되풀이하는 와중에 감추어져 살아 있는 마음. 그 마음이 그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어떤 얼굴도 마주하지 못”하는 ‘너’의 무능, 혹은 ‘나’의 ‘할 수 없음’의 웅덩이에 빠져 있을 때, 살아 있음과 할 수 있음 사이에는 “뭔가 이상”한 시차가 있고, 그 시차는 그저 그것을 사는 것 외에는 아마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다는 믿음이 있고, 거기에 불안이 있다.
나는 살면서 살아 있는 야생의 새를 두어 번 손으로 잡았었지 그 새들은 창문의 변덕에 속아 한참을 짹짹거리고 파닥이다 지쳐서는,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부들부들 몸을 맡기더군 나는 믿을 수 없이 작고 가벼운 새를 품에 안아서 창을 열고 나뭇가지에 올려놓았지 새는 바로 날아가지 않았어 그리곤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한참이나 나를 갸우뚱거리며 바라보았지 먼저 창문을 닫고 자리를 뜬 건 나였어
─ 「혀 없는 키스」 부분
‘나’와 ‘그’, ‘선생님’과 ‘너’, ‘우리’와 ‘우리’를 불러 말을 주고받게 하는 이 시에서 서로의 불능을 지적하는 언어들은 상대에게 닿지 않은 채, 그렇게 그 자체로 불능을 반복하는 채 각자의 문장에 머문다. 멀리 날아가지도 창 안으로 되돌아오지도 못하고 한참을 머물렀다는 작은 새처럼, 말은 무엇을 향해 있으면서도 무엇을 향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고여 “단번에 이어지”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불안을 만든다. 이 시가 이설빈의 시가 스스로 오른 하나의 무대라면, 무대 위에서 발화되는 대사들이 고수하는 그러한 방법은 시의 언어가 묶여 있는 방법의 현재와 아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 속 누군가 “어떤 시선은 굴뚝보다 좁아서 아무도 살풍경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했고/어떤 시선은 대로보다 넓어서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자꾸만 비켜섰”다고 다른 누군가의 무능을 지적한다면, 그 지적을 정말 행하는 것은 좁다와 넓다의 이분법에 두 누군가를 가두어 “아직 어떤 얼굴도 마주하지 못”하는 상태로 그들의 현재를 ‘진단’하고 그 사태에 대한 불안을 부과하는 시의 무대, 시 언어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어지지 않음’에 관해 시가 그려내는 불안은 이어지지 않는 장면을 만드는 시가 스스로 조장하는 불안이기도 하며, 시의 언어가 할 수 없음의 상태로 남겨두는 것은 시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채로 남기를 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처럼 무능 혹은 불능의 상태와 선택이 맞붙어 도는 시의 무대 위에서, 그 무대를 만들고 있는 손끝에서 여하한 상태의 현실을 “잘 봐,” 라고 명령어가 더해질 때, 그런 말은 외려 그 명령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을 잘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시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 맥락만이 아니라 그 맥락이 만들어지고 힘을 발휘하게 되는 단계들을 잘 보기 위하여, 그렇게 시가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방법에 관해 더 묻기 위하여, 이런 물음들을 연달아 던져보고 싶다. ‘나’가 “창문을 닫고 자리를 뜬” 다음 작은 새의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을까, 홀연히 날아갔을까. 어떤 내용으로든 있었을 그런 ‘다음’을 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나’가, 혹은 시가 고수하는 태도라면, 잘 보는 일이란 과연 어떤 것을 정말로 의미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나’가 새를 나뭇가지에 올려놓았을 때, 그 다음 새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한참이나 나를 갸우뚱거리며 바라보”고 있다고 ‘나’가 생각했을 때, 새는 정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새를 보는 방법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어져 왔으며 그 시간 속에서 지금과 다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큼 단순화되어 지금의 선택들을, 다음의 전망들을 미리 제어하고 있는 것일까. 이설빈의 시는 “쓴물을 토”하는 “분수대”의 입으로 이렇게 묻는다.
네가 진짜 이름으로 거짓을 말할 때
네가 거짓 이름으로 진실을 말할 때
이 둘은 뭐가 어떻게 다르지?
─ 「혀 없는 키스」 부분
동일한 통사 구조 안에서 단어의 위치를 바꾸어, 세상이 이렇거나 저런 ‘둘’로 이루어져 있고 그 둘은 같거나 다른 ‘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그런 사유 구도 안에 입장하기를 권하는 언어가 여기 있다. 이 언어의 의도나 효과는 이렇거나 저런 것만은 아닐 것이며, 그런 판정은 이 언어가 발화되는 세계를 잘 보는 일에 있어 아주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설빈의 시 앞에서 그와 함께 묻고 싶은 것은 어떤 질서가, 문법이, 구조나 상태가 반복된다면 그 반복에 동참하는 우리의 매일의 삶이 살아남는, 살아있는, 살아가는 방법이 하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렇지 않으면 저렇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아 조여 오는 때에도 우리는 ‘이것’과 ‘저것’과 다른 ‘무엇’에 관해 말할 수 있다. 그 ‘무엇’의 자리는 채워지지 않은 채 끝없는 모순 속에 우리를 떠밀겠지만,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라는 단어에는 더 많은 세계가, 많이 다른 언어가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때 무수해지는 것은 우리를 숨죽이게 만드는 눈송이들이 아니라, 그 시선 때문에 한없이 쪼개어져 작아지는 우리들이 아니라, 눈송이로 만들어낼 수 있는 눈사람의 모양이지 않을까. 혹은 눈송이가 쌓여 만들어지는 둔덕의 모양들이 얼마나 다양할지도 우리는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혀가 우리 모두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있다. 그렇다는 믿음도 여기에 있고, 그 곁에 불안은 조용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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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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