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시학 2024년 5-6월호(제619호)
‘나의 비애’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피어난 시 ― 강우근 시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 ‘나’의 형편
『현대시학』617호(2024년 1-2월호)에 발표한 「미래파 이후의 한국시」에서 필자는 한국시의 현황을 ‘매너리즘의 시절’로 규정한 바가 있다. 그리고 매너리즘이란 상식적인 의미와는 달리 혁신의 한계에 갇힌 자질구레한 변이들을 총칭한다고 하였다.
강우근의 첫 시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창비, 2024.01) 역시, 그러한 추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집을 특징지우는 가장 큰 특성은 ‘나에 대한 물음’이다. 첫 시의 첫 행은
하나의 불이 꺼질 때 나의 영혼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궁금해 (「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
이며, 마지막 시는
지하철역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내가 단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해(「단 하나뿐인 손」)
진다는 안심 속에서 그 ‘하나’의 몸으로 타인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끝내고 있다. 요컨대 이 시집은 ‘너와 나의 만남’에 대한 갈망으로 큰 물이 지고 있다. ‘나’는 갈망하고 ‘너’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기척을 알린다. 그런데 ‘너’의 다가옴은 풍요한 양상을 산출하는데, ‘나’는 여전히 그것을 보는 관찰자이기만 하다. 표제시인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은 ‘너’의 풍요함을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에 제시된 ‘알 수 없는 것’의 강도만큼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만해가 ‘알 수 없는 것’의 광휘를 매개로 해서 너무 뻔해 알고도 남는 데데한 조선 사람들을 격상시키려고 했다면, 오늘의 젊은 시인에겐 ‘나’가 문제다. ‘나’는 ‘너’의 기척만 예민하게 감지하지만, 그러나 ‘너’는 결코 내 손을 잡지 않는다. 그런 안타까움을 수일한 이미지로 표현한 다음 시구가 있다.
미세먼지로 뿌예진 창문을 닫고,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오는 TV를 틀어놓은 채 4인용 식탁에서 혼자 생선을 발라 먹고 있을 때
아주 먼 곳에서
무언가 천천히 내게 오고 있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아파트 창에서
희뿌연 대기를 내려다보면
불빛을 내는 자동차들은 타들어가는 것 같다. 내일이면 또다른 차들이 도로를 메우다가 메우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아파트의 이웃들은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윗집 부부의 싸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너무 커버린 나는 매일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신호」)
이 시인에게 ‘너와 나에 대한 만남’을 향한 갈망은 언제나 ‘나’라는 암초에 걸린다. 그게 이상한 것이다. 아니 차라리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바로 ‘나’라는 존재가.
■ ‘나에 대한 물음’의 맥락
‘나에 대한 물음’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오늘날 한국시의 대부분은 나를 묻고 나를 정의하고 나를 시료대에 올리고 나를 조작하고 나를 장난질하고, 나를 버리고, 대체하고, SNS에 올리고, 사진과 영상을 늘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바꾼다.
여기에는 한국적 존재를 둘러싼 이중적 맥락이 개입해 있다. 하나는 서양이 주도한 지구적 정신 전체의 흐름 속에서 ‘나’에 대한 존재론적 지위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존재의 사회적 위치의 변화의 마지막 지점에 오늘날 ‘나’에 대한 다양한 언술과 생각들이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맥락은 ‘인간 중심의 시대’라고 지목되는 이른바 ‘근대modernity’ 이후 새로운 시대가 개시되었다는 인식 및 그를 뒷받침하는 광범위한 양상에 근거한다. 즉 근대의 행동 핵자가 ‘개인’(나)이었다면, 점차로 개인은 와해의 길에 들어섰다고 보는 시각이다. 게다가 그런 추세는 20세기 말 인터넷의 출현으로 네트워크의 그물이 전 지구에 드리워짐으로써 개인이 거대 ‘사회 네트워크(Social Netwark System)’의 한 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부추김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대한 담론은 아주 오래되었고 여전히 기승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양한 기점을 긋는다. 개인에 대한 의혹이 발생한 시기를 로베르트 무질과 카프카의 시기, 즉 19세기말~20세기 초엽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차세계대전 이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에서 보는 이도 있고, 20세기 말의 Web의 출현에서 보는 경우도 있다. 지식 체계로 보자면 ‘선택’을 개인이 소유한 ‘전가의 보도’인 것처럼 내세웠던 장-폴 사르트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다양한 기점들은 20세기 내내 개인에 대한 불안이 들끓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19세기라는 개인과 이성에 대한 확신이 넘쳐나는 시대와 대비되어서 꾸준한 소문거리가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20세기의 불안은 자신의 시간대를 길게 소급하기도 했다. 미셸 푸코는 개인의 자기 표현이 강력했던 시기를 근대 직전의 17세기로 보았다. 이미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개인은 제도의 그물 속에 갇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은 일종의 “절름발이의 논리와 위선 속에서 비틀거1)”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면 개인은 근대의 핵자라기보다 근대의 강박관념이다. 이는 주체는 태어나는 순간 동시에 ‘분열된 주체’라는 정신분석의 통찰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경향 속에서 자주 착각하는 것은 이런 불안과 위협이 실은 개인의 권리와 기능의 강화라는 역동적 활력을 촉진하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개인은 결코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기승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징표는 오늘날 정보화 문명이 개인들의 손아귀에 더욱 밀착하는 매개적 과정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퍼스널 컴퓨터’로 변신하면서 전 세계에 퍼졌으며, 그것은 다시 ‘모바일’로 축소되어 개인들의 신체의 일부로 장착되었으니, 개인들의 활동 능력과 범위는 크게 확장되었고, 기능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바로 이런 모순적 양상 때문에 개인들은 담론상에서는 끊임없는 위협과 불안, 그리고 ‘우울’의 현상으로서 진단되지만, 실제 삶의 차원에서 개인은 능력의 증대와 활성화에 뒷받침되어 지속적인 몸과 마음의 변이를 꾀하면서 저 ‘우울’을 즐기곤 하였다(이런 양상에 대해서 필자는 여러 번 주의를 달았지만, 이를 주목한 이는 거의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여하튼 이는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느닷없이 들고 나왔을 때 얼마 후 푸코가 저자는 죽은 게 아니라 기능이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 사정을 생각게 하는데, 갑자기 20세기 후반기 최고급 지식인들의 공방이 떠오른 것은, 방금 전에 인용한 『성의 역사』1권의 번역자 이규현이 역자 해설에서 푸코의 다음 말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나는 실제로 정치적 장기판 위의 대부분의 구역들에서 차례차례 그리고 때때로는 동시에 무정부주의자, 좌파, 내노라 하거나 변장한 마르크스주의자, 허무주의자,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반마르크스주의자, 드골주의에 봉사하는 기술관료, 새로운 자유주의자 동으로 자리매김되어 왔습니다. / 나는 차라리 내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는 것을 좋아하며, 내가 판단되고 분류되는 방식의 다양성을 즐겨 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2)
한데 푸코의 이런 발언은 흥미롭게도 푸코가 ‘성’에 대한 통제에 대해 부르주아가 행한 반응이라고 풀이한 것과 밀접히 유사한 형태를 취한다. 필자는 방금 앞에서 푸코가 근대와 더불어 개인에 대한 관리가 개시된 사정에 주목했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그런데 부르주아(시민)들은 그런 관리에 마냥 복종한 건 아니었다. 이 또한 번역자가 적절히 환기시키고 있는데, 관리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던 ‘성sex’의 가족화라는 압력을 수용하면서 부르주아지는
18세기 중엽 이래 자체의 성적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발판 삼아 하나의 특수한 육체, 건강 ‧ 위생 ‧ 자손 ‧ 종족이 수반되는 ‘계급의’ 육체를 구성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3)
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은 “스스로 창안한 권력과 앎의 기술체계로 자체의 성을 둘러쌈으로써 그들 자신의 육체, 감각, 쾌락, 건강, 남은 삶의 높은 정치적 가치를 돋보이게 했”으니, 성은 “그 계급이 공포 ‧ 호기심 ‧ 희열 ‧ 열정의 혼합된 감정을 품고 가꾸어 온 그 부르조아 계급 자체의 구성요소4)”가 되었다. 역자의 해석을 보태자면, “부르조아지에게는 성적 욕망의 장치가 예속화의 수단이기는커녕 자기 확인의 도구였다. 그들의 성적 욕망은 귀족의 혈통과 맞먹는 것인 셈5)”이었다.
두 번째 맥락, 즉 한국 사회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양가적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일제에 의해 국가를 상실한 시기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은 자신을 공동체에 동일시함으로써만 심리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1990년대까지 한반도의 개인들은 모두 ‘한민족’이었다. 한민족(韓民族)은 ‘한(一) 민족’이었고, ‘한(恨) 민족’이었다. 그런 민족으로서 한반도 사람들은 ‘우리’ 안에 포함되었다. 그런 굴레로부터 한국인들이 풀려나가기 시작한 건 1987년 6월 항쟁 이후였다. 그 항쟁을 이끈 학생운동세력은 스스로를 “구국의 강철대오”라고 자칭했으나, 실제 항쟁의 성공 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민족의 자리를 서서히 개인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민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순수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등장했으며 1990년대의 격렬한 미성년 인권투쟁을 통해 한반도의 모든 존재들(심지어 반려동물까지 포함해)에게 ‘천부인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권리는 일종의 형식에 불과했다. 전반적인 사회적 장에서 순수한 개인들은 천민자본주의의 격렬한 사회적 경쟁 속에 휘말려 들어갔으며, 개인의 권리는 개인의 존중과 어긋나기 일쑤였다. 형식과 실제의 혼동은 개인들을 사회적 악으로의 함몰과 그로부터의 배제라는 양 극단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낙엽들처럼 날리고 있는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그 자신에게 부여받은 형식적 의미에 근거해 저마다의 새로움을 모색한다. 다만 그러한 모색들은 하나의 구심점을 갖추지 못한 채로 각각의 방향으로 산개하고 분기한다. 다음 시구는 그런 사정을 암시한다.
나는 어느 날 17층에 살고 있는 것이다
16층에 있지 못하는 것이다
17층에서는 16층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보일 것이다
구름이 더 가까이 보이고,
빗방울이 조금 더 빠르게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자주 산책을 하며 지나치던
이 오피스텔을 공인중개사와 보러 갔을 때 마침 17층의 방이 비어 있었던 건 우연이었던 것이다
집마다 방 안에서 다른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나도 17층에서 떨어지지 않는 하나의 음악이 되어가는 것이다 (「어느 날 17층에 있다는 것」
17층에 있다는 우연하고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사실, 화자는 그 사실에 대해 공들여 의미를 찾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한 까닭이 무엇인가? 후반부에서 화자는 자신의 행위에 도사린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어느 주말에 암막 커튼을 덮고 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고등학교 친구의 전화소리에 꿈에서 깨고 마는 것이다
“여보세요?”
나는 잠이 덜 깬 채로 하품하면서 커튼을 치고
공룡의 등을 덮었던,
동굴벽화를 그린 크로마뇽인의 손을 차갑게 했던,
수많은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발을 묶었던,
폐허가 된 서울에 다시 지어진
건물의 창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며 언제까지 이어져왔던 생활을 하는 것이다
■ ‘비애’의 상호텍스트적 반향 1: 세계 속의 한국인
이상의 서술은 강우근의 시적 상황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그는 오늘의 젊은 세대가 겪는 일반적인 질환을 앓고 있으며, 또한 광범위하게 분산하는 다양하면서도 한결같은 방향의 기도에도 동참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그만의 시를 유별나게 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시적 실천을 통해서 배어나는 ‘비애’이다. 방금 읽은 시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듯이 화자는 자신의 의미 생산에서 자족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질구레한 의미 만들기가 ‘폐허’ 위에 기초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광범위하게 퍼트린 게 워쇼스키 형제의「매트릭스」임은 잘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는 신-인간(네오)이 세계를 구출해 줄 것 같은 뉘앙스를 계속 풍겨대지만, 이 시는 그런 얄팍한 희망을 갖지 못한다.
이 시집의 바탕을 ‘산독(山豄)6)’처럼 흐르는 비애는 현실에 대한 시인의 정직성과 안목의 두터움을 동시에 드러낸다. 정직성은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안목은 그 자신의 삶이 ‘화려한 외관의 심각한 빈곤’이라는 모순적 상태를 들여다보고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가리킨다.
한데 두 개의 문화적 맥락에 비추어보면 강우근의 시적 태도에 좀 더 깊은 의미망이 새겨진다. 그 둘은 동떨어진 별개의 맥락이지만, 이 시집을 통해서, 한국시 그리고 현대시의 이해를 북돋는 데에 협력할 수 있다.
하나는 김수영으로부터 온다. 김수영은 프랑스 시인 쉬페르비엘의 시를 좋아했었다. 그가 처음에 쉬페르비엘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그의 ‘연극성’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연극성’의 문제를 ‘겉멋’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쉬페르비엘에 대한 선호는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은 그의 연극성에 ‘비애’가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7). 그것을 그는 ‘속(俗)과 아(雅)가 한데 뭉친’ 상태로 보았다.
어떻게 보면 쉬페르비엘은 스스로의 속아(俗雅)에 취해서 늙은 것 같다. 속(俗)과 아(雅)가 한데 뭉쳐 버렸으니 이것은 속도 아니고 아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는 데서 느끼는 비명. 최후다! ‘모든 것에 용기를 내자!’ […] ‘모든 것에 용기를 내자!’ 그러나 이미 늦었다. […] 그러나 그가 그의 연극성을 버리려면 그는 아주 죽어 버리는 수밖에는 없다. 시인의 숙명적인 비극이 여기 있다8).
김수영에게 ‘비애’는 연극성만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의 ‘비애’ 인식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현대성을 최대치까지 추구한 시인으로서, 그는 현대의 속성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니, 그로부터 발생하는 비애이다. 그것을 간명하게 표현한 두 개의 시구가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비」)9)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자유
—비애 (「헬리콥터」)10)
이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대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비애보다는, “우리만의 비애”에 눈길을 쏟게 되는데, 그것은 후발국(한국)의 시인은 원본국(서양)의 시인들에게 ‘뒤쳐졌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시의 양심과 작업은 이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이 모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한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11).
그의 연극성(‘겉멋’)에 대한 혐오는 이로부터 나온다. 그가 연극성의 문제를 간취한 것은 프랑스의 시인에게서였다. 때문에 연극성에 대한 원초적인 인식은 현대시의 속성 상 곧 사라지고 말 포즈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애초에 그는 거기에서 거의 ‘비애’만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다가 쉬페르비엘과 피터 비어레크를 통해 ‘연극성’을 끌어내면서부터는, 한국 시의 상황이 ‘흉내내는 처지’에 불과하다는 인식으로 눈길이 이동한다. 이 흉내의 운명을 이기기 위해서는 흉내의 불가피성 속에 갇혀서 그 상황 자체를 직시하면서 반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그 흉내를 겪으면서 동시에 그에 저항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火'超)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 一육체로서 一추구할 것이지, 시가一기술면으로一추구할 것이 아니다12).
시는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13)”이라는 그의 유명한 발언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것은 말 그대로 자신이 처한 처지에 대한 절실한 자각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 ‘온몸’이라는 말에 도취해서 편하게 읊조릴 것이 아니다.
여하튼 이 ‘온몸으로 동시에’ ‘흉내내면서 흉내에 저항하기’라는 입장이 세워짐으로써, 그는 ‘숨은 멋’을 선택하고 ‘과도한 겉멋’을 질타한다. 김수영에게는 이 과도한 겉멋이 ‘연극성’의 실체이다.
김수영이 이런 생각들을 격한 어조로 쏟아내며 한국시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 시대로부터 무려 50년 이상이 흘렀다. ‘비애’를 기준점으로 김수영과 강우근을 비교하면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알 수가 있다. 이제 오늘의 세대는 더 이상 선진문화를 모방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는다. 선진문화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이미 한국인은 세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의 신비, 그것은 세계의 신비」에서 ‘나’와 ‘너’는 외계인 찾기 놀이를 한다. ‘나’와 세계가 이미 한몸이 되어 있으니, 이제 타자는 ‘외계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 젊은 시인의 정직성은 실은 ‘나’가 세계에 가상적으로 통합되어 있을 뿐이라는 날카로운 인식을 촉발한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너에게 전화를 걸자
잠이 덜 깬 낯선 목소리가 내게 묻는다.
“누구세요?”
나는 급하게 전화를 끊고, 자판기 불빛이 비치는 벤치에
앉아 생각하지.
여기에서 ‘너’는 ‘나’의 세계성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나의 이웃으로서의 세계인’이라는 추상적 관념의 은유이다.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 ‘외계인 찾기’놀이를 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때 ‘나’는 지구인이니까). 그런데 왠지 ‘너’는 “너답지 않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우리의 외계인 찾기는 이어지지 않고, […] / [나는] 혼자 콜라를 마시면서 저녁을 보낸다.” 그리고 문득 ‘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낯선 목소리가 받는다. 이러한 사정이 인용부의 맥락이며, 이 맥락 속에서 ‘나’는 실은 썩 막연한 관념으로서의 ‘세계인’에 공상적으로 통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세계인들이 낯선 자들로 인지되기 시작한다.
상점 에서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외국 노래 콜라를 들고 서성이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시행은 다음과 같다.
나만 외계인처럼 보인다.
시인이 다음 사항까지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외계인’의 영어는 ‘alien’인데, alien은 지구 바깥의 외계인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미국에 이주해 온 비서양인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주민들은 영주권을 획득한 이후에도 내국인이자 동시에 ‘에일리언’이라는 이중의 존재론적 저울 위에서 휘청거린다. 오늘날 세계의 정치‧경제‧문화 등등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것에 비추면, 그들은 세계인이지 동시에 외계인인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공간적으로 단절된 ‘나’의 형편은 어떠한가? 이주민들에게 ‘너’가 눈 앞의 타자라면, 한반도의 ‘나’에게는 ‘너’가 부유하는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 타자의 관념성 때문에 ‘나’의 존재론적 속성 역시 허공에 붕 떠 있을 뿐이다.
네가 없는 세계에서
나의 자전거는 붕 떠버린다.
■ ‘비애’의 상호텍스트적 반향 2: 날지 못하는 비행기
그렇다면 그의 비애는 이런 정직한 두터운 인식 속에서 고뇌만을 유발하는 것인가? 필자가 끌어올 두 번째 맥락은 엉뚱하게도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이다. 원명은 “조르주 퐁피두 국립 예술문화센터”로서, 예술 전시, 도서관을 포함하는 일종의 복합문화시설이다. 1971~1977년 사이 동안에 준공이 되었다. 파리 4구의 ‘보부르Beaubourg’ 지역에 있기 때문에 흔히 ‘보부르’라고도 불린다.
보부르에 무슨 문제가 있나? 오늘날엔 잊혀진 문제가 되었지만, 이 센터는 그 괴상한 외관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시끄러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골조만 세운 것처럼 형해가 노출되었고 그 안에 사람들의 이동이 그대로 보였다.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방문객이라기보다 비계의 사다리를 거니는 듯한 노동자들인 듯한 착각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매우 화려한 실내가 기다리곤 한다.
허무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 망칙한 건물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 건물을 “평화로운 공존과 핵 위협의 [동시적] 시뮬레이션”으로 보았고, 이 동시성에 내포된 “문화적 분열”이 “정치적 억제14)”를 동반한다고 보았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보편성’에 대한 사유를 내부로 돌려서 보편성의 ‘혁명적’ 효과를 “자기 소진적15)”인 것으로 방출하는 효과를 가진다고 보았다.
필자는 지금 날짜를 잊었지만, 이런 비판에 대한 설계자 렌조 피아노Renzo Piano의 유머러스한 응답을 프랑스의 일간지 『르 몽드』에서 읽은 적이 있다. 2000년대 초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간단히 이런 내용으로 대꾸했다.(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의 정확한 진술은 아니다.)
그렇다. 내가 노린 것은 ‘날지 못하는 우주선’이다. 그런데 그게 현실 아닌가?
이 실없는 농담처럼 보이는 대꾸 속에서 건축가는 무능력을 조장한다는 철학자의 비판에 대해 무능력 자체가 힘들게 작동하면서 스스로를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혁명’의 출구일 터인데, 왜냐하면 무능력의 주체들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외부에서 어떤 모종의 힘이 혁명을 제공해준다는 게 넌센스이자, 혁명의 대의를 스스로 모독하는 자기 배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린 그런 사례를 20세기 내내 보아 왔고, 지금도 보고 있다.)
렌조 피아노의 이 발언이 떠오른 것은 시, 「유성」에서 같은 생각의 진술을 읽었기 때문이다.
헐렁한 셔츠를 펄럭이며 목장을 달릴 때면
우리는 언제나 날지 못하는 비행기가 되었다.
이 진술은 지금까지 살펴본 삶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다시 한번 압축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의 인물은 이름이 ‘유성’이다. 이 또한 유성처럼 날아가지 못하는 유성이의 존재를 알린다. 그러나 바로 날지 못한다는 것을 직시하기 때문에 유성이는
유성이는 진흙이 묻은 손으로 하얀 염소의 몸을 어루만지고
염소들이 모두 얼룩덜룩해질 때까지 건초를 먹였다.
유성이의 행동이 부단한 좌절에 의해 “우리”를 “어린 염소처럼 들판에 / 풀썩 주저앉”게 한다 할지라도, 그 행동 자체는 꾸준히 이어진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메지난다.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사는 고양이들이
다양한 색깔로 난간을 타고 넘는 것을
보고 또 보았다.
“졸업할 때까지”를 치환하면 “죽을 때까지”가 될 것이다. 어떤 상태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가 죽을 때까지 보는 것은 생물의 끊임없는 동작이다. 그것도 아주 “다양”하게.
이제 강우근의 비애는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마르크스)의 존재,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사르트르)의 그 존재 말이다. 즉 ‘활동하는 무화’로서의 존재. 주체가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존재는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필자가 ‘퐁피두 센터’의 야릇한 외관에서 ‘비계’의 철골 사이를 오가는 노동자를 떠올린 것은 그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복합문화공간’인 그곳에 건축가는 방문객들이 ‘관람하는 자’로 오기를 바라지 않은 것이다. 그는 문화 노동자로서 그들이 거기에 와 살기를 그 미완의 형해로써 요청한 것이 아닐까?
■ 비로소 시작하는 문제
문제는 그런 존재로서의 비애가 언술로써 표명되는 대신 형상으로써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이리라. 강우근의 시가 이제 막 출발점에 있다면 그는 언젠가 지금의 흘러가는 여울물처럼 이어지는, 생에 대한 그의 느낌을 생 그 자체로 빚어야 할 것이다. 그런 편린이 비치는 걸 엿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우리는 태풍 때문에 얼굴을 못 보고, 운행이 중지된 버스에 타지 못하고, 닫힌 상가를 들어갈 수 없겠지만
작았던 마음이 이렇게 거대해진
태풍의 심정은 어떨까, 이름을 가지는 순간부터 사라질 일밖에 없는
바다의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 나무의 이름을 가진, 해가 질 때 풍경의 이름을 가진 태풍이 지나가고 있어
지금 누가 이렇게 옥상의 빨래를 흔드는 걸까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은 무서움 때문일까,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일까
붙잡히지 않으려면 우리도 몸을 함께 흔들어야 할까, 우리는 창문을 모두 걸쇠로 잠가놓았지만
길 한복판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있어, 어떤 비는 슬픔을 흘려 보내지 못해 그 슬픔을 헤매는 사람으로 남겨놓는다(「태풍 같은 사람이 온다면」)
이 시구에는 태풍에 휘둘리는 마음만이 있는 게 아니다. 연을 달리하며 이어진 두 행, “이름을 가지는 순간부터 사라질 일밖에 없는 // 바다의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은 태풍의 광포함 밑바닥에 텅 빈 공허가 있을 뿐임을 언뜻 환기시킨다. 그 공허는 그의 존재의 필연성을 부정하게끔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태풍의 위력은 위력 그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 “무서움”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태풍을 맞는 ‘우리’의 몫이다. 즉 우리는 태풍에 대해서 “무서움”만을 가지지는 말아야 한다. 그 반응의 정서는 스스로의 마음의 운산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은근슬쩍, 그것도 연의 구분 때문에 표시 자체가 희미하기짝이 없는 채로, 개입된 비-관여적 문구가 시 전체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기능을 한다. 태풍의 흐름을 타고 있는 시편 속의 물상들은 휩쓸려나가는 모양을 보여주다가 이 시구에 의해 끌려서 몸을 세우고 방향을 돌이킨다.
그러니 독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이 얼핏 기척을 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정작 그가 출현할 때는 청각적인 것도 시각적인 것도 아니라 체험적인 사건이 되리라.
달그락거리는 병이 한번씩 맑게 깨지는 소리 (「투명한 병」)
로 세상을 발딱발딱 일깨우면서.
- 1) Michel Foucault, 『성의 역사 - 1권 앎의 의지』, 이규현 옮김, 나남, 1990, p.24.
- 2) 이규현, 「역자 서문」, pp.16-17. 이 발언은 푸코의 타계 직전인 1984년 5월, 폴 라비노우와의 대담에서 한 것이다. 원본은, 「논쟁, 정치 그리고 문제화 Polémique, politique et problématisations」, in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IV. 1980-1988, Paris: Gallimard, 1994, p. 593
- 3) 『성의 역사 1권』, op.cit., p.137.
- 4) ibid., p.136, p.137.
- 5) ibid., p.13.
- 6)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표제어로 실려 있지 않지만, 옛 문헌에 나오는 단어로서, “외부로 흐르는 곳이 없는 시냇물”이란 뜻이다. -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제 4권,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8, p. 744. 이 대목에 이 단어가 맞춤하다고 생각하기에 가져다 쓴다.
- 7) 쉬페르비엘에 대한 김수영의 변덕스런 반응뿐 아니라, 이하 김수영의 인식의 진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면, 졸고, 「김수영의 마지막 회심一 김수영과 프랑스 문학,그리고 자코메티적 변모」(정과리,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幻)을 좇아서 - 내가 사랑한 시인들 세 번째』, 문학과지성사, 2020)을 참조 바란다.
- 8) 김수영, 「새로움의 모색 — 쉬페르비엘과 비어레크」,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 pp.322-323.
- 9)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1. 시, 민음사, 2018, p.160
- 10) ibid., p.119.
- 11) 김수영, 「모더니티의 문제」,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 p.576
- 12) loc.cit.,
- 13)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op.cit., p.498. 이 발언의 주변을 함께 읽으면, 본문의 인용과 ‘선택적 친화’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14) Jean Baudrillard, 『보부르 효과L'effet Beaubourg』, Galilée, 1977, p.11.
- 15) ibid., p.49.
추천 콘텐츠
《현대시》 12월호 신인특집에 함께하게 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의 시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삶과 언어의 도정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여섯 개의 서로 다른 감각이자 하나의 세대적 사유로 읽힌다. 각기 다른 이력과 문학적 여정에서 출발한 이들의 시적 몸짓에는 관계의 불안과 결핍, 동일시의 실패, 존재의 진동, 텍스트와 사물의 해체, 제도와 언어의 부조리를 가로지르는 탐색이 응축되어 있으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장면들이 미리 스며들어 있다. 2025년 시단에 첫발을 내디딘 이 신인들의 작품은 단순한 개성의 제시를 넘어, 동시대 청년 세대가 마주한 균열과 감각의 변화를 촘촘한 형식 실험과 사유의 밀도로 형상화함으로써, 오늘 한국시가 어떤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고자 하는지 또렷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의 시 앞에 함께 서 있는 동안, 독자는 친밀과 거리, 소유와 결여, 있음과 있었음, 정지와 흐름, 안내와 방황 사이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감정과 사고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완결과 합일의 환상 대신, 실패와 잠정성, 불확정성과 우연을 감수하는 태도가 이들의 언어를 떠받치는 공통의 윤리로 드러나며, 그 위에서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과 존재의 사유, 시적 상상력의 책임이 다시 질문된다. 이들은 관습적 서정보다 불안정한 접속과 해체의 감각을 밀어붙이며, 평범한 일상과 비극적 현실, 실존적 결핍과 축제적 상상력을 교차시키는 다양한 전략으로 시의 경계를 확장한다. 올해의 신인 시인들을 통해 우리는, 시가 더 이상 하나의 의미나 메시지로 귀결되는 통로가 아니라, 세계와 주체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부딪히고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건네는 열린 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특집은 여섯 신인의 개별 작품을 따라가며 그러한 움직임의 결을 세밀히 더듬어보는 작은 동행이자, 앞으로 이들이 한국시의 지형 위에 남겨갈 긴 문장들의 서두가 되기를 바란다. 이수빈의 「빈속」과 「귀갓길」은 현대적 인간관계의 불안·결핍과 일시적 연대,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윤리의 잠정을 감각적으로 표상하는 작품이다. 두 시에서 시인은 익숙함이나 표면적 친밀 속에서도 오히려 더 깊이 체감되는 거리·결핍의 정동, 그리고 자기소외의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먼저 「빈속」에서 화자는 “나를 미워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받는다. 이 집은 “창문이 많았고 식물이 많았고 나무 빛깔의 가구들이 많”지만 “진짜 나무는 하나도 없”고, 온통 “나무 무늬를 흉내 낸” 것뿐이다. 친구의 집은 외관상 충만해 보이나 본질적 결여가 깃든 장소로, 친구 또한 소외와 결핍의 구조 안에 있으며 화자는 호두의 텅 빈 속에 자신의 존재를 포갠다. 이는 우정과 인정,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결국 실패로 전환되는 심리적 역학을 드러낸다. “나는 친구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친구가 주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일 것만 같은데”, “중요한 건 전부 친구에게 있는 것 같다”는 화자의 고백은, 타인과의 관계가 항시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을 차라리 결핍의 자리로 위치시킴으로써 관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것이다. 「귀갓길」은 「빈속」과 달리, “집에 가지 않”는 화자가 익명의 타자인 아저씨와 마주치면서 관계의 또 다른 층위를 탐구한다. 아저씨가 “정말 하수구 덮개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어깨까지 접어 넣어 손을 휘젓더니 내 지갑을 꺼”내는 행위는, 화자가 처음부터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과 교차하며 극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자신의 곁에서 “땡볕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힘을 다하는 “교과서에서 배운 좋은 사람”을 실제로 마주한 화자는 오히려 그 초월적 선의와 헌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놀라움과 낯섦을 경험한다. 이 만남은 타인과의 관계가 단순한 연대나 지속적 돌봄의 형태로만 해명되지 않더라도 사회적 선의가 분명히 세계 속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비둘기가 됐네. 아저씨가 말한다./그 말이 재밌어서 나는 웃는다.”는 구절이 상징하듯, 이런 일시적 돌봄과 선의가 완결이나 해결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관계의 의미와 삶의 풍요로움을 증명한다. 시인은 이 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관계 맺기가 미완성과 불확정성의 상태에 머무르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과 순간성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윤리적 언덕이 된다는 통찰을 환기한다. 「빈속」과 「귀갓길」 전편을 관통하는 관계의 구조는, 친밀에 대한 열망이 궁극적으로 결핍, 소외,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완전한 결속이 아닌 잠정적 윤리가 성립된다는 데 있다. 친구, 그리고 익명 아저씨와의 관계 산물은 완전한 소유나 영속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두 시는 현대적 인간관계의 지속 불가능성과 일시성을 드러내며, 타자와의 만남의 현장이 언제든 실패와 결핍, 잠정성과 불안을 품을 수 있음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익숙하거나 친밀한 공간, 예상치 못한 우연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정동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오늘날 존재·윤리적 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선사한다. 이수빈의 시는 어떠한 교훈이나 모범답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담백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완전한 의미나 지속적 소유에 도달할 수 없는 현대적 관계성의 본질, 그리고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불완전한 시도와 실패,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연결,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미학을 포착한다. 감각적 이미지와 절제된 서사, 미묘한 정동의 떨림을 통해, 관계의 좌절·틈새 윤리·결핍의 정서를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실존적 현실에 대한 현대시의 성찰적 깊이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현아의 「거절」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부정의 표명이라기보다, 존재론적 함수처럼 읽혀야 한다. 이 시에서 ‘거절’은 행위의 단절이나 의사의 미수(未遂)를 넘어, 근본적인 내부적 불일치,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윤리적·존재적 통찰의 알레고리다. 또한 메타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동일시를 통한 묘사나 모방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면서도, 주체가 대상을 자기 안에 온전히 흡수하거나, 대상을 자신과 동등하게 체험하려는 시적 의지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함을 전제하며, 이는 서정시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동일시의 전략, 곧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묶으려는 욕망의 실패를 현대시적 자의식으로 재구성한다. 「거절」 시의 주체는 대통령, 영부인, 수행원, 그리고 귀신으로서의 화자라는 다층적 관찰자와 중개자의 시선에서 이 비일치의 조건을 반복적으로 마주한다. 영부인의 반지를 대통령에게 건네는 장면, 수행원이 죽어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초월적 설정, 그리고 내밀한 공간인 침실에서조차 타자의 감정과 내면은 이해 불가능함인 “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으로 남는다. 여기서 ‘거절’은 소유와 일치, 결정적 진실에 대한 모든 요구에 부드럽지만 냉철하게 선을 긋는다. 어떤 친밀함과 접근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남기며, 타자의 고유성, 내부적 비밀에는 끝내 도달할 수 없음이 시 전면에 놓인다. 익숙한 동일시의 미학이 동질적 교감·일치로 수렴했던 것과 달리, 현대시에서 ‘거절’은 반대로 불일치, 미끄러짐, 간극의 미학을 긍정한다. 「망상과 착각」은 이현아 시의 존재론적 간극과 동일시 불가능의 미학을 한층 더 섬세하게 확장한다. 반려견을 둘러싼 고독사의 이야기와 “그 개가 남긴 망설임의 흔적”은 타자의 실존, 감정, 본능마저도 끝내 전적으로 포개지지 않는 비일치의 조건을 상징한다. 화자는 빨래 건조대 양 끝에서 “점점 멀어지는” 두 존재의 행위를 반복하며, 동일시의 실패와 존재론적 거리, 미끄러짐을 일상적 장면으로 그려낸다. “그 사람이 거기서 진짜 빨래를 너는지, 혼자 집으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라는 고백은, 실재와 상상 사이, 나와 타자, 기억과 현재 사이의 확인 불가능과 불확정성이 상상력의 출발점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일시와 이해, 행위의 의미가 결여와 불확정성의 지점에서만 반복되는 윤리를 지시한다. 이 시에서 상상과 미끄러짐은 채울 수 없는 거리를 감각하며, 결국 이러한 틈과 거리의 자각에서만 현대적인 시와 존재의 미학적·윤리적 가능성이 살아난다. 바르트가 텍스트의 미학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가는 해석의 복수성과, 완전한 합일에 도달할 수 없음 그 자체에 있다고 했듯, 시의 읽기도 언제나 ‘마지막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무한한 해석, 다양한 감정·경험 간의 에너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이현아의 「거절」과 「망상과 착각」은 동일화의 불가능성, 완결과 단일성의 유예를 담담하면서도 치밀하게 수락하는 현대시의 윤리적·미학적 혁신으로 자리한다. 시의 목표는 더 이상 단일함이나 일치가 아니라, 열린 장 속에서 실패와 미끄러짐,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시적 전략은 독자의 읽기도 정적 재현이 아닌 무한히 개방된 해석과 자기성찰, 그리고 주체와 타자, 이미지와 기억이 과정적으로 겹쳐지는 창조적 소통의 현장임을 강하게 환기한다. 임어지니의 「있음과 있었음」과 「모델 하우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이 시적으로 펼쳐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자인(Sein)은 ‘얼음’이나 ‘집’처럼 물질적이고 세계에 놓인 단순한 ‘있음’의 상태다. 이런 사물들은 자신의 변화나 소멸, 의미를 자각하지 않는다. 「있음과 있었음」에서 사물로 제시되는 얼음은 자연의 섭리와 순환성의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 시적 주체가 되지 않는다. 집 역시 「모델 하우스」의 서두에서 경제적 표상, 사회적 기호, 공간에 한정된다. 시의 화자는 이와 같은 ‘자인’적 사물과의 작용에서 시적인 의미를 확장한다. 얼음의 녹음과 소멸, 집의 존재와 이동이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닌 자기 인식의 계기가 된다. “얼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에서 시작해, 사라짐과 흔적, 남겨짐 앞에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주체는 집에 대해서도 “집을 사기로 했다 살 것이다”라는 주체의 인식에서 시작해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 건너려고 신호 기다릴 때” 등 모든 공간과 장소를 초월해 존재의 사유를 채움을 보여준다. 이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다자인(Dasein)’의 인식이 풍요로워짐을 말한다. 다자인의 관계성은 ‘자인’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는 것이다. 주체는 사물 자체의 운명과 자기 경험의 흔적, 결핍, 해석의 운동을 실존적으로 배치한다. “글러브 박스”의 비어 있던 자리, 얼음의 흔적을 집요하게 감각하고 환기하는 과정은 세계 내 던져진 존재인 다자인의 실존적 태도를 소환한다. 주체는 시간과 부재, 흔적과 상상의 교차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며, 항상 세계와 사물, 시간적 가능성의 긴장 안에 존재한다. 「모델 하우스」는 집이라는 사물이 단순한 경제적 혹은 사회적 표상을 넘어 의미와 기억, 내면적 진동이 축적되는 복합적 장소로 전환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시의 화자는 집을 단순한 정주의 공간이나 투자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일상 속 크고 작은 경험, 가족과의 삶, 소유와 결여, 귀속과 떠남의 감정이 집에 층위별로 배어든다. “집에 살았다, 집에 살 것이다”라는 시제의 중첩은 주체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축 위에서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정체성의 진동을 감각함을 의미한다. 집이 일상의 반복적 경험에 내면적으로 녹아들면서, 어느 순간 과거의 긴 시간에 편입된 현재가 존재의 가장 큰 불안의 근원이 된다. 이 시에서 집 자체는 원래 하나의 기의, 단순한 본질에 가둘 수 없는 존재다. 집은 한때의 경험이기도 하며, 불확정한 미래의 가능성, 소망 혹은 결여의 상징으로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띤다. 시적 주체는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라는 엄청난 입에 삼켜지듯, 항상 어딘가로 쓸려가는 자신의 존립 조건을 예민하게 인식한다. 단어와 장소, 기표와 의미의 관계는 하나의 본질에 고정되지 않고 풀려나가며, 그것이 곧 언어의 연약함과 해석의 불완전함, 나아가 존재의 덧없음과 상실의 미학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임어지니의 시는 실존적 경험에 귀속된 사물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이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며 내면적 지각의 장으로 소환하는 주체의 감각을 정교하게 교차시킨다. 집이나 얼음 같은 물질적 대상은 자인(Sein)의 차원에 머물지만, 주체가 자신의 기억, 상상, 소망, 상실, 불안, 내면의 흔적을 그 위에 겹쳐 올릴 때 다자인(Dasein)의 자기성찰과 해석의 운동이 비로소 시작된다. 이 층위에서 시는 단순한 사물의 존재를 넘어, 실존의 불안과 정체성, 상상과 결여, 시간과 흔적이 교차하는 해석의 장 역할을 하며,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존재의 불확정성과 생성, 상실의 미학을 현대적 감각과 깊이로 펼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임어지니의 시는 자인과 다자인이 교차하는 시적 현장에서 언어와 세계, 주체와 의미의 긴장과 개방성을 유기적으로 드러낸다. 임어지니의 시들은 일상적 사물과 내면적 세계, 정체성과 시간의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대적 존재의 진동과 경험의 의미를 담담하면서도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사물의 나열이나 감정의 표출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와 의미화, 언어와 세계의 복합적 긴장을 정교하게 펼치는 현대시의 한 실천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장희수의 「싱크대」와 「적설」은 일상적 경험과 자연의 이미지를 감각적이며 서정적으로 조직하여, 존재의 온도와 따스함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두 시 모두 홀로 선 주체라기보다는 타자와의 교감, 일상과 공동체적 체온이 작품 세계를 따뜻하게 감싼다는 믿음을 바탕에 둔다. 「싱크대」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생활 사물과 신체적 경험을 극대화하면서 감각과 정서, 시간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너의 옆구리가 젖은 건, 설거지를 마친 손을 허리춤에 슥슥 문질렀기 때문”과 같은 동작은 “덕분에 네 옆구리에서는 오후 내/세제향이 났다”로 이어지며, 손목, 바람, 식물과 같은 일상의 요소들이 신체적 교감과 감정적 유대를 촘촘하게 확장한다. 손목이 옆구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로 연상되고, 서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긁고 오랫동안 함께 웃는 모습은, 일상적인 순간조차 관계의 친밀성, 촉각적 유대, 공동의 정서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장희수의 시에서 실현되는 미학적 방법은 반복과 일상의 평범함이 결코 낡은 것, 시적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의 시편은 시간과 수많은 사물,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적 해방과 미학적 자유의 가능성을 실감나게 입증한다. 구체적 손길, 바람, 미묘한 향, 일상의 움직임과 그 감정의 변동, 타자와의 촉각적 교감은 모두 언어와 이미지의 층위에서 섬세하게 조율된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일상적 순간과 신체 감각의 자연스러운 연계를 통해 ‘평범함’ 자체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의 작품은 반복의 세계에서도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며, 사물과 시간, 타자와의 접촉이 곧 미학적 존재의 시작점이자 메타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출발점이 됨을 증명한다. 「적설」의 첫 부분은 ‘너’가 “떠날 사람처럼” 화자를 “꼭 안아준” 장면에서 시작한다. 화자는 그 체온을 간직하고 있다. 눈은 “끝나버린 세상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세상이 얼어붙을 것 같아도, “마지막에 껴안은 사람과는/영원히 붙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에, 화자는 그 믿음을 간직한다. 화자는 “어떤 말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자꾸만 믿고 싶어”하고, 언젠가는 “끝나버릴 것 같”아도, ‘너’의 포옹에 남겨진 가능성을 “희게 쌓는다.” 시는 처음부터 따스함과 이별,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남는 온기와 만남, 신뢰와 관계의 지속성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종말적 상상, 관계의 소멸과 재생, 윤리적 가능성을 끝까지 탐색한다.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면 하얀색일 것”, “끝이 날 것이라고//누구에게 말하는지 몰라도/누군가에게 말하는 목소리가//희게 쌓이고 있었다”와 같은 구절에서 시인은 세계의 거짓과 희망, 종말과 만남, 현실과 상상, 영화와 눈이 교차하는 미학을 그린다. 이 두 시는 일상성과 감각, 시간성, 정체성, 관계, 흔적, 소멸, 애도라는 현대시의 주요 의제를 집요하게 탐색한 셈이다. 평범한 사물과 신체적 행위, 작은 몸짓과 자연의 미묘한 변화가 모두 언어와 이미지로 실존의 결, 감정의 파장, 시간의 불확정성을 유기적으로 직조한다. 장희수의 시세계는 언어, 세부적 감각, 상상력, 공동체적 연대가 만나는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과 자기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는 ‘돌’처럼 “정지한 사고”와 언어,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상상력과 “움직이는 시간”이 “삐걱대”(「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면서 직조해내는 우리의 상상력의 현실적 질감, 텍스트의 탈장소적 특질, 해체적 실험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현대시의 모범적 성취를 보여준다. 시의 첫 구절 “나: 보이는 순간 끝을 예견한다”는 시적 객체가 등장하자마자 곧 상상력이 소진되는 불확정성과 파편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꺾였다/다채로워서... 유복해서”, “나: 차라리 망쳐 보라 했다”와 같은 파편화된 장면과 파괴적 명령을 통해 시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를 흔들며, 독자가 하나의 알레고리나 고정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항상 새로운 체험적 해석의 장을 만들도록 한다. 이러한 해체적 실험정신은 바르트가 강조한 “텍스트는 기호에 비해 접근하거나 체험되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기의로 닫혀진다.”(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2002, 41쪽)라는 원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정태인은 단일한 해석이나 알레고리에 저항하며, 각 행과 단어·이미지를 독자 몸에 밀착시키며, 독자가 읽는 순간마다 “내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도록 이끈다. 이로써 ‘목이 긴 나무’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독자가 진입하는 열림의 장이자, 매번 흔들리는 사건의 연속체로 기능하게 된다. 특히 “시계 침이 뾰족해지고/서정은 유리 공예에 갇히면/나는 너와 너를 사랑한 적 없다”와 같은 구절은 ‘목이 긴 나무’와 ‘시계’라는 시간성과 경직성을 병치함으로써, 단일한 기호에 의미를 환원하지 않고 시간의 연장, 멎음, 서정의 경직 등 다양한 감각적 층위를 활성화한다. 이어지는 “모방은 창조를 학대/구체는 모방의 미끈함을 덮고”, “유복함이 가짜일 때/목덜미에서 살냄새가 난다”, “딸기씨가 때론 딸기를 벗어나 종이에 우글거린다” 등에서 실체와 모방, 감각과 추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유희하며, 독자에게 언어의 돌발적 감각과 의미의 미끄러짐을 선사한다. “유복함”이라는 표현은 시 창작에서 모방이 과잉되면 ‘가짜’가 되기에 십상이고, 그것이 “유복함이 가짜일 때” 느끼는 “살냄새”를 통해 진짜 시적 실재의 감각을 드러낸다. 우글거리는 기의들 속에서 하나의 기의를 찾으려는 독서 행위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바르트적 “텍스트의 체험성” 원리를 재확인하게 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정태인은 각 행, 어휘, 이미지를 독자 경험에 침잠시키며, 닫힌 작품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체험되는 텍스트의 본질을 구현한다. 독자는 시를 읽는 순간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의미를 발명하고, 새로운 감각적 사건과 해석의 여정을 실현하는 텍스트의 자유와 해체적 실험정신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와의 교차적 맥락을 통해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의 밀도는 더욱 강화된다. “멎음;/부둣가에 달려가 해를 잡으면 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다/내려간다?”와 같은 구절은, 사유의 지점이 미끄러지고, 실체처럼 굳어진 사고와 움직이는 시간 사이에서 자주 삐걱대는 현존을 고스란히 포착한다. 결국, 정태인의 시는 닫힌 작품, 해석의 최종성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접근하고 체험되는 ‘텍스트’로서의 공간을 창출한다. 돌처럼 굳어진 사고, 용암이 굳은 자리, 흐르는 시간과 붉은 해, 썩어가는 나무, 비옥하지 않은 땅 등 다양한 사물과 현상을 통해 시인은 실체 없는 실체, 멈추고 흔들리는 삶의 흔적을 복합적으로 상상한다. 이렇게 시와 독자는 서로 병치 되고, 결과적으로 바르트적 해석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텍스트의 본질, 의미의 창출과 사유의 미끄러짐이 정태인의 시 안에서 가장 섬세하게 실현된다. 두 시에서 드러나는 제목의 배열과 라틴어와 한자, 영어(외국어)의 사용은 미학적으로 ‘열림’, ‘다성’, 그리고 경계의 유연함을 구현하는 전략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우리 고유 언어와 문화의 소중함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다양한 언어와 표현 방식을 단절하고 배척하는 폐쇄적 태도는 결국 ‘돌’처럼 굳어버린 사고, 무관심적·기계적 반복, 혹은 철학적 질문 없는 ‘비사유’에 머무를 위험성을 내포한다. 정태인의 시적 구도에서 ‘돌’은 의미를 경직시키는 사고를 상징하며, “이매진(Imagine)”과 같은 흐르는 영어 동사는 의식과 감각의 흐름을 동적인 사유의 힘으로 전환한다. 시인은 고정적 해석에 안주하지 않고, 낯설고 열린 체험을 지속적으로 유도함으로써 정동적 힘, 곧 주체와 언어·이미지의 역동적 재배치를 구현한다. 많은 시인들이 상상력의 융합, 이질적 감각, 독특한 형식 실험을 펼쳐왔던 흐름과 달리, 정태인은 언뜻 파편적으로 보이는 시상의 흐름을 각 이미지를 통해 유기적으로 직조해내며 결과적으로 명확한 사유와 체험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의 시는 바르트의 텍스트는 접근하고 체험되는 것이라는 미학을 적극적으로 설계해, 단일한 알레고리와 저자 중심 해석을 철저히 거부하고 시적 언어와 감각을 독자 신체와 경험으로 촘촘히 전달한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에서 “목이 긴 나무”라는 이미지는 특정 의미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이미지는 독자가 텍스트 안을 걷고 감각하며, 흔들리고, 다시 일어나는 해체적 사건의 연속으로 기능한다. 독자는 그 열린 공간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자유롭게 발명하며, 언어·상상력·사유의 무한한 변주를 직접 체험한다. 바르트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닫힌 ‘작품’의 형식이 아니라 독자와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능동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로 작동한다. 여기에 정태인의 시적 축제의 장(場)에는 연극적 요소가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연극은 현실의 경계를 해체하며, 공연마다 새롭게 변형되는 극적 힘을 품고 있다. 알프레드 시몽이 『기호와 몽상』(박형섭 역, 동문선, 1999)에서 말하는 축제와 연극의 파편적·전복적 구조, 그리고 몽상가의 세계가 고독 속에서 우주적 상상과 평형(아니마)의 정동적 열림으로 나아간다는 점은, 정태인 시의 파편적 이미지·공간의 단절·대화와 소리의 겹침·물질의 초월·멎음·윤리적 감정 등과 긴밀히 맞닿는다. 한편 시몽은 인간의 삶을 연극과 축제에 비유하며, 축제와 연극 모두 민중 삶의 조건과 비극성에서 태어난 문화적 산물로 해석한다. 정태인의 시작품은 시적 조건과 비극적 현실에서 발현되는 환희와, ‘사리자’의 목소리로 상징되는 지혜와 질문, 감정 구조를 동시에 담아낸다. 정태인의 시는 주체와 기호, 현실과 환상, 언어와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해체·재배치되는 역동적 현장이다. 축제적 해방, 연극적 전환, 몽상적 상상력, 그리고 유연한 경계의 감각은 실험적 언어와 구체적인 체험 구조로 귀결되며, 현대시 해체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최경민의 「안내원」과 「라스굴라」는 현대시가 부조리의 미학과 해체적 언어 전략을 어떻게 갱신하는지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두 시는 현대사회에 널리 퍼진 “사람의 말이 차가운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언어와 제도, 관리 절차가 인간 고유의 감정·고통·기억·죽음을 어떻게 표면적이고 소외된 대상으로 환원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안내원」은 반복적·무표정한 안내 언어로 구성된 시스템 안에서, “너무 누르지 마세요. 쉽게 터질 수도 있습니다. 터지면 저희가 치워야 해요.”, “실족사는 누구의 기억도 아니어서 복원할 수 없습니다. 대신 깔끔한 가족을 써드릴게요.”, “번호가 불리면 나아가세요. 끝나면 힘껏 돌아오세요.” 등 절차적 언표가 일상적 사건, 개인의 상실, 심지어 죽음조차 데이터로, 복원 불가한 에러로 치환한다. 이는 의미 없는 반복과 객체화, 존재적 공허의 심화로, 소통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라스굴라」는 인도 디저트 캔이라는 사물에 ‘예언’과 ‘유산’을 덧씌운다. “콜카타에서 가져온 예언이었다.”, “당신은 세 개의 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입구가 찌그러진 제품은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같은 구절을 통해, 신화적 내러티브와 산업사회의 경고와 공지, 소비와 관리의 언어가 구체 사물(캔)의 표면에 동시에 아로새겨진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 정보 혹은 경고를 넘어, 인간 경험의 현실과 신화적 상상, 관리사회의 절차가 겹겹이 작동하는 복합적 층위를 형성한다. 남자의 신체 “둔부가 사실 거대한 종기…흘러내”리고, 들개의 상상적 파트너십과 반복적 언어는 결국 모든 것이 관리·절차·소비의 공허 속에 미끄러지는 인간 실존의 우울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이 보여준 미학과 맞닿는다. 『엔드게임』에서 넬과 네그가 깡통(쓰레기통)에 갇혀 기억, 신체, 생의 잔여물로만 존재하는 것과 같이, 「라스굴라」의 남자와 들개는 캔 속에서 ‘예언’의 의미도, 유산의 실체도 다 소진된 채로 반복과 공허, 아이러니와 우울 속 부조리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예언이 텅 비고 말았군”, “유산은 달콤한 맛이 나는군”과 같은 반복적 대사는, 삶의 의미 생성 실패와 현대적 소외·결핍의 심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두 작품은 이 세계가 소통 불능, 맹목적 반복, 파편화·객체화·공허, 그리고 시스템 언어와 관리·경고·소비 코드가 인간 조건을 조직함을 밀도 있게 드러낸다. 그 핵심은, 현대 존재가 결핍과 부조리·불확정성과 아이러니로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그 경계에서 해체적 언어와 블랙코미디 미학만이 진실로 인간 실존을 감각하게 한다는 통찰에 있다. 이를 통해 두 시는 해체미학의 실천적 성취를 드러낸다. 올해 등단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 등 여섯 신인의 시편들은 단순한 개성 표현이나 언어실험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대 청년 세대가 겪는 세계의 깊은 변화와 복합적 결핍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들은 관계의 불안과 결핍을 연대의 가능성, 타자와의 접촉, 아이러니와 부조리, 파격적 상상력과 시적 실험을 통해 깊이 탐색한다. ‘관계’의 불안정성은 피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언어, 일상적 감각, 상상력, 존재 인식 층위로 확장·해체되어 작동하며, 이는 단순한 시의성을 넘어 세계와 존재의 분리 불가능한 틈 사이에서만 생성되는 독특한 감각과 사유, 윤리·상상력의 책임까지 묻는다. 이러한 결핍은 고립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이 충돌·포개지는 현장으로 성립되고, 시적 언어는 해체와 실험, 평범한 일상을 뒤흔드는 감각의 진동, 정체성과 타자성, 세계와 자신 사이의 긴밀한 긴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이 신인들은 구체적 경험과 내면의 리듬,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을 미감으로 끌어들여, 한국시의 서사적 확장과 일상에서 새로운 언어적 감수성을 착취하며, 시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넓히고 있다. 현실과 내면, 언어와 침묵, 소외와 감각이 교직된 이들의 시는 결코 완성과 합일로 안착하지 않으며, 손이 닿지 않는 영역, 불안정의 운동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특히 이들의 시적 작업은 메타시의 상상력과 존재 미학의 구현, 언어의 자기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존재의 다양한 양태를 시적으로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로 이해된다. 시는 언어적 표현을 넘어 존재와 현실의 틈새, 그곳에서만 드러나는 감각과 상상력, 윤리를 길어 올리고, 이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주체적 활동이 된다. 올해 신인 시인들의 작품은 그렇게 오늘날 한국시의 중대한 미학·문학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시단의 방향성과 역할에 대해 깊은 통찰을 낳게 하는 의미 있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 믿는다.
1. 흰 벽, 검은 구멍을 보는 거울의 눈 “내 눈雪동자는 떨어지고 있고 녹고 있다”(p. 171). 이 문장은 낯설고 난해한 도식이지만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추론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의 가혹한 운명을 대체하는 동시에 1997년 데뷔부터 현재까지 70편(장편, 단편 포함)이 넘는 소설을 발표해 온 김숨의 저력을 보여준다. 『무지개 눈』의 눈[雪]과 눈[目]은 동일 기표다. 이 명제에 대한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눈은 테제인 동시에 안티테제이다. 여기에서 진테제가 ‘녹는점’이라고 한다면 김숨을 모르는 것이다. 김숨 소설을 단순한 변증법으로 접근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라는 이야기다. 다만 ‘녹는점’을 가진 작가가 김숨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녹는점’을 들뢰즈와 가타리 방식으로 이해하자면 ‘기관 없는 신체’가 될 것이다. 어쨌든 눈[雪]과 눈[目]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이질성 속으로 침잠하여 함께 녹아내려야 한다는 추상적인 방정식 외에 김숨 소설을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연작소설 『무지개 눈』은 선천성 전맹 또는 선천성 저시력과 지체 장애를 복합적으로 겪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티브로 삼는다. 시각장애라는 결핍은 색이 전제되는 무지개와 일곱 색깔에 흰색과 검은색이 없다는 다중장치로 재현한다. 슬픈 색, 화난 색, 간지러운 색 등 ‘색’에 대한 사유가 소설 전반을 압도하는데, 일반적인 색채 인식을 초월하여 도전과 실패, 욕망과 죽음이라는 양극단을 오가며 김숨만의 독보적인 아우라를 뽐낸다. “내 얼굴에는 눈동자가 없어.” “아니야, 네 얼굴에도 눈동자가 있어.” “거짓말!” “정말이야. 네 눈동자는 육각형이고 흰색이야.” 육각형이고 흰색인 것은 눈雪이다. (「검은색 양말을 신은 기타리스트, p. 170」) 위 인용은 『무지개 눈』 행위자의 결핍이 눈[雪]과 눈[目]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으로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1장(편의상 책의 순서대로 1~5장으로 표기)의 그녀는 또 다른 자아로 표상되는 백문조를 기른다. 새의 흰색 깃털은 눈동자를 갈망하는 욕망으로 현현한다. 2장의 남자가 선물받은 토끼는 하얀색이다. 하얀색을 산책시키고 연두색을 먹이지만 토끼는 여전히 하얀색이다. “내가 하얀색을 잊어도 하얀색은 있어요. 내가 하얀색을 잊어도 하얀색은 죽어요”(p. 73). 흰자만 남은 눈, 하얀색을 먹이고 키워도 볼 수 없다는 진실만이 폐허가 된 동공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시각장애인에게 하얀색은 극복할 수 없는 흰 벽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백색 공포가 아닐 수 없다. 3장의 소녀는 선천성 전맹과 지체장애인으로 휠체어에 의지하여 생활한다. 빨간색 크레파스로 도화지에 집을 그리며 그곳에서 사랑을 나눌 미지의 당신을 기다린다.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p. 151). 소녀의 절절한 사랑 고백은 그림 속에 갇혀버리고 ‘어느 시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당신’은 트라우마로 남아 의식 폭력의 가해 대상으로 떠오른다. 소녀의 트라우마는 어릴 적 처음 봤던, 어쩌면 딱 한 번 봤을지도 모르는 빨간색이다. 빨간색은 소녀의 심장이고 삶의 전부다. 욕망 덩어리가 된 빨간색으로 인해 소녀의 심장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4장의 기타리스트는 검은 눈동자를 갖고 싶어 검은색 양말만 신고 검은색 기타를 친다. 미끄럼틀 위에서, 동굴에서, 물방울에 박자를 맞춰가며 줄을 튕기지만, 음계를 벗어난 눈동자는 눈[雪]처럼 녹아 검은 구멍으로 사라진다. 5장의 화자 ‘파’는 아홉 살 때 선천성 저시력 판정을 받았다. ‘파’에게 눈동자는 11층 엘리베이터 거울에만 남아 있다. 얼굴조차 증발하고 두 행성처럼 의식 저편에 남은 파의 눈은 ‘거울의 눈’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눈은 『무지개 눈』 행위자 모두의 아포리아다. ‘색’이 눈동자로, 동물로, 실현 불가능한 욕망으로, 급기야 ‘무지개 눈’으로 스며드는 절묘한 기획의 발원지가 바로 ‘녹는점’이다. 2. 나무 - 뿌리에 닿는 손 『무지개 눈』에서 활용한 시각장애인의 언어인 점자는 그동안 김숨이 집요하게 추진해 온 생존 불가능한 생태계 복원 작업의 구심점이 된다. 점자를 소설에 기표한 순서대로 따라가면 나무/혼자/물방울/밤/물/하얀 조약돌/눈[雪]/그녀/바다/뿌리/검은 물고기/양/당나귀/오리이다. 물방울/하얀 조약돌은 눈[目]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나무는 존재의 표상이며 ‘혼자’라는 점자는 고립된 시각장애인의 생활 세계를 전면에 내세운다. 나무/혼자/밤/하얀 조약돌에서는 만지는 대상으로 기표하였는데 감각인지는 의식의 지향점을 아우른다. 그녀는 밤에 혼자 누워 눈동자를 더듬다가 흙을 덮고 있다고 느낀다. 이 수사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죽음의 각인이다. 특수학교 기숙사에 입소한 1장의 그녀는 죽음의 문턱을 무시로 넘나든다. 문턱은 복도라는 통로로 형상화되고 있는데 복도에는 늘 바람이 불고, 모든 문은 닫혀있다. “물방울에 삼켜지고 싶다”(p. 23). 가능성이 차단된 공간에서 그녀는 ‘죽음 욕망’에 시달린다. 죽음 욕망은 물고기 또는 곰 인형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죽음 경험’으로 우회한다. “혼자서 혼자를 만”(p. 24)지며 수도꼭지에 대롱거리는 물방울에 매달리는 그녀. 물이라는 생명의 시원을 통해 죽음 충동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은 “나방의 날개처럼 떨리는 눈꺼풀”(p. 28), 즉 볼 수 없다는 생생한 현실에 곧바로 압도당한다. “그녀는 자신 앞에 있는 게 그냥 커다란 구멍 같다”(p. 41). 검은 구멍에 갇혀 구멍 투성이가 된 곰 인형을 끌어안고 ‘사랑해’라고 중얼거린다. 이 처절한 사랑 고백이 ‘죽은 그녀’ 자신을 향해 있음을 누구도 모를 수 없다. 곰 인형은 그녀의 ‘죽음 모델’이다. 2장의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취업했으나 직장생활에 실패하고 만다. 시각장애가 결코 비인간의 조건이 될 순 없으나 비정한 사회는 남자를 따돌렸고 자발적으로 퇴사하도록 압박했다. “사람이 그리워” “나와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p. 144).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상처 입은 그들은 여전히 사람의 숲에 섞이길 소망하며 ‘당신 목소리’를 들려달라 매달린다. 시각장애인에게 목소리는 소통이고 합일이다. 목소리가 찾아온 건 그녀가 찾아온 것이고 하나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목소리가 떠난 건 그녀가 떠난 것이며 모든 세계가 닫힌 것이다. 주어진 세계의 ‘안과 바깥’ ‘존재와 비존재’, 그 어느 영역에도 소속될 수 없는 그들은 ‘비인칭 주체’로 방기 되고 만다. ‘비인칭 주체’는 의식이든 몸이든 눈[目]이든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이 되어 녹아버려야만 산다. 자기 해체 방식으로서의 ‘녹는점’은 생존을 위한 ‘절대지’다. 점자를 따라가 보면, 물/눈[雪]/그녀/바다/뿌리/양과 당나귀 등 동물들이 나온다. 물과 눈[雪], 바다는 생명의 시원(始原)과 닿아 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시원(녹는점)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비인간, 즉 동물로 변한다. 물고기/양/당나귀/오리는 ‘흐르며 떠오른다’라는 서술어를 공통으로 배치하고 있다. “여섯 개의 줄(날개뼈)이 뿌리처럼 흐른다”(p. 163)라는 선행 문장을 볼 때 ‘흐르며 떠오른다’라는 서술은 ‘뿌리’와 상통한다. 낯설고 기이한 ‘동물-되기’를 재생이나 부활 또는 존재 회복으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쯤에서 김숨의 의식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나무-뿌리’를 소환하게 된다. 김숨은 “새장 속에서 태어나 나무를, 그리고 숲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를 “이동 새장에 넣”(‘작가의 말’, p. 228)어 생명의 근원인 숲으로 인도한다. 이 시대 모든 ‘비인칭 주체’에게 존재자의 자리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농후하다. 따라서 『무지개 눈』의 시각장애인들 손이 닿은 곳도 ‘나무-뿌리’다.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는 나무가 있어야 해?”(p. 132). 나무의 종언은 생명의 종말이므로 이것은 물음이 아닌 답이다. 빨간 집 소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숲을 보길 원한다. 기타리스트는 기타의 음을 조율하며 숲에 스며든다. ‘파’는 지평선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나무를 바라본다. 시력을 잃고도 자식을 낳아 키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림을 그리고, 안마 일을 하며 지평선을 향해 묵묵히 걷는 시각장애인들은 이미 심연의 숲을 보고 있다. “사람처럼 보인다는 건 뭘까?”(p. 179). 숲에 닿은 그들은 참된 인간의 자리를 고민한다. 해답은 소금을 팔러 세상에 왔다는 시각장애 아동 미솔이 쥐고 있다. 소금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그들의 실천 강령이다. 소금 닮은 그들은 이제 “사람을 믿고 싶어요”(p. 106)라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레비나스 관점을 빌리자면 『무지개 눈』은 눈[目]이 아닌 믿음으로 타자를 바라보는 무한자의 자리다. “오늘 아무래도 내 오른쪽 눈동자에 무지개가 뜰 것 같다”(p. 220). 무한자의 자리에 선 시각장애인들은 무지개가 되어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무지개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이어주는 탯줄과 같다. 극단적인 자기 해체 여정을 지나 타자의 고통에 동참할 때 김숨 특유의 ‘공존 미학’이 완결된다. “내 눈雪동자는 떨어지고 있고 녹고 있으며 보고 있다”(p. 183). 눈동자를 녹여 우주를 품은 ‘비인칭 주체’들. 김숨은 그들과 함께 녹아버렸다. 녹는점은 문학의 심층이다. 심층에 남은 『무지개 눈』 작가도 작중 인물도 녹아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사회적 약자를 향한 다수의 시선이 어떠한지 문득 의문이 생긴다. ‘녹는점’에서 마주친 대상이 멀쩡한 눈을 질끈 감은 채 황무지 같은 광야를 떠도는 ‘나’라면 이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내게 닿으려 내게 걸어갔어요”(p. 11). 그녀의 고백이 새삼스레 심장을 울린다.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1) : ‘소유’와 ‘주권적 자기’를 질문하며 1. 다시 ‘자기’를 질문하며 일인칭 글쓰기, 에세이, 자문화기술지, 당사자 서사 등 ‘자기’를 중심에 놓는 글쓰기가 주목받아 온지 여러해를 지나고 있고, 최근 또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이어질 듯하다.2) 이 글은 그러한 글쓰기의 핵심에 놓일 자기를 다시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커먼즈’(commons)로서의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한다. 이때 얼핏 자기와 커먼즈라는 말 사이의 아득한 이격(처럼 여겨지는 것)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자기라는 말은 ‘나’ ‘1인칭’ 같은 단수적 계열어나 차이를 통해 이해되곤 하고, 커먼즈란 ‘공통장’ ‘공유지’ 같은 번역어가 암시하듯 복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루쏘의 『고백록』(1770)이 상기시키듯 자신을 신과 독대하는 개인으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에서 출발한 근대적 존재 인식의 표현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젠더 및 공/사 역학에 따른 위계가 작동해왔음이 이제 대중적으로도 널리 환기되었고, 전통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거나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의 글쓰기와 그 수행적 힘이 각별히 조명3)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에세이물의 당사자 서사가 규범 바깥의 여성 정체성을 실험하며 여성주의적 급진성을 갖는다는 논의4)에서와 같이, 글쓰기의 수행적 힘은 다양한 여성 및 소수자의 가시화와 연동되었다. 한편, 에세이적 글쓰기 일반을 “자아를 일종의 자산으로 생산해내는 장치” 측면에서 조망하고, 이러한 글쓰기의 스펙트럼과 읽기-쓰기의 복잡한 역학 및 형식 문제를 분석하는 논의도 제기된다. 오늘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진술”이 “주체에 대한 진실을 생산해내는 권력을 스스로(재)생산”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한영인의 글은 특히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자아 등을 둘러싼 복잡함의 근간을 짐작케 한다. 한영인의 논의에서 파생시켜 떠올려보는 장면이지만, 예컨대 당사자가 아님에도 타자를 대신 이야기할 때의 윤리문제는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픽션에서 대상화를 피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종종 제기되는가 하면 타자를 모델로 삼는 소설의 종언이 비관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다.6) 그간 문화예술 창작계에서 당사자(성)의 강조는 ‘당사자만 말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사의 주체를 ‘저자’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를 우려하는 논의도 오갔다.7) 당사자주의를 넘는 ‘타자와의 관계성’ 혹은 ‘목격-증인’의 자리8)가 강조될 때조차, 그것은 나와 타자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근거로 회의되거나, 진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시시비비로 연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성)를 둘러싼 논의는 연대가 필요한 자리에서 때로 그것을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켰고, 이런 곤경은 오늘날 ‘나’ ‘자기’에 대한 감각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식의 익숙한 말은 어쩌면 차이로서 증명되는 나를 갈망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인식은 일상에서 종종 불안정한 것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기술 상황에서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확인되는 고유한 나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곤란을 겪는다. 사용자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표방하는 무수한 플랫폼에서도 주체적 행위, 고유성, 독창성 같은 변별자질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진정한 나’ ‘진짜 나’를 갈망할 수밖에 없이 세팅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유와 권리에 대해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가 이러한 이중구속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다. 앞서 적었듯 오늘날 자기서사는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소수자의 존재와 글쓰기를 가시화한 양식의 하나다. 그것은 이 세계 존재를 둘러싼 오랜 위계의 구조를 환기시켰고,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정치화했으며, 자기 삶의 주권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나’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나-1인칭-개인-소유’ 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 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 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성·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 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