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현대시 2024년 1월호(제409호)
태초의 빛을 위한 죽음의 시
1. 태초의 빛으로부터
아, 가엾은 원시의 아버지 네안데르탈!
살아남기 위해서 이곳까지 도망 왔으나
결국 멸종하고 말았다.
- 「한탄강」 중에서
시집의 제목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머릿속에 ‘기원’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어떤 질문들과 그 질문들의 방향성들이 떠올려지게 된다. 기원이라는 말로부터 퍼져나가며 수없이 많은 갈래로 파생될 수 있을 의미들처럼. 요컨대 시란 무엇인가. 규정해서도 안되며 동시에 규정되기도 불가능한 말. 그 답이 당연하게도 하나일 리는 없겠지만 한 시인이 오랫동안 사유해오고 고민해오던 결과물로서 『오리진』(한국문연, 2023)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란 판단이 들게 된다. 그러니 시란 무엇인가란 이 질문을 조금 더 확장해볼 수도 있겠다. 시를 쓰는 우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오늘날에도 왜 이 무가치하며 무의미하며 동시에 별다른 의미를 가지기 어려운 시쓰기란 행위를 지탱하고 있을까. 이는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요컨대 나는 무엇인가란 질문이 가능해질 것이다.
시집 말미에 실린 그의 에세이를 따른다면 시는 “상징형식”에 해당한다. 시인은 카시러의 의견을 빌려 “상징형식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 형식으로, 세계는 오로지 상징형식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122면)고 말한다. 카시러의 의견을 빌려왔지만 이는 시인 자신의 말로서 봐도 무방할 듯싶다. 즉 시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 형식’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보자. 왜 나는 세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관해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세계를 이해한다는 행위가 단순히 현실을 인식한다는 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를 이해한다는 행위는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기원이자 근원을 파고드는 것이라 해야 한다.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하며 또한 나를 사유하고 진정으로 존재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지금의 우리 모두를 둘러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현실 너머의 바깥이자 기원을 탐색하기 위한 언어. 말하자면 진창을 구르면서 이미 잃어버린 태초의 신성한 빛을 갈망하는 마음. 그것이 아마도 ‘기원’으로서의 시이자 ‘세계를 이해한다’는 말의 본래적 뜻이겠다.
지금의 우리에게 부재하는 태초의 빛이 기원으로서의 시였다면 그 태초의 빛은 이미 쇠락하고 꺼져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그 빛은 우리란 지금의 시공간이 지닌 어둠에 잠식되어 버렸다. 언젠가 자크 데리다가 『그리마톨로지』에서 최초의 언어는 시적 언어였다고 말했을 때, 그곳에도 ‘상징형식’으로서의 언어이자 세계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최초의 행위로서의 언어 개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초의 시적 언어가 탄생하고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 그 놀라움과 신비로움의 발화를 맨 처음 시작했을 한 인간으로부터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오늘날 우리에게 시는 더 이상 신비롭거나 놀랍지 않다. 지금을 지배하는 물질주의적 사고관 아래에서 세계는 우리의 말들을 측량 가능한 형태로 교환하거나 혹은 얼마의 돈으로 바꿔줄 뿐이다. (몇 푼의 돈이라도 되면 다행일 지도 모르겠지만) 또한 시를 쓰는 우리들 역시 시라고 생각되는 고정되고 완결된 코드와 시스템을 그저 부품 갈아끼우듯 글자를 적고 있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무가치함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바로 기원이다. 태초의 시적 언어이자 신성한 빛이었으며 어떤 신비로움과 놀라움의 언어들. 마치 ‘우주의 먼지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별’(「칼의 기원」)이지만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 언어들. 시집을 일별한 독자들 역시 눈치 채겠지만 시인의 시들이 태초의 빛이 지닌 휘황찬란한 휘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오히려 태초의 빛이 감추어진 지금 우리의 세계를, 말하자면 진창을 구르고 또 구른다. 그의 시들 속에는 우리의 지금의 세계가 지닌 어둠이 눅진하게 녹아들어 있고 동시에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 역시 있다. 그렇다면 이 깊은 절망감을 통과하는 자들에게만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태초의 빛들이 비로소 주어질 수 있고 사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물어보자. 왜 시인은 “성스러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청춘의 연금술」)고 선언하며 “진정한 삶은 이 세상에 없다”(「바깥들」)고 단언하며 할 수 있는가를. 그리하여 시인이 구르는 진창 같은 어둠의 세계를 어떻게 끝끝내 부정할 ‘죽음’이 왜 필요한가를 말이다.
이 음식을 먹은 자는
모두 벙어리가 되고 말았으니
아무도 이 음식의 정체를 모른다오.
(이 음식의 이름은 죽음이오)
- 「저녁 식사」 중에서
2. 교환가능해진 타락의 역사
일찍이 영리한 돼지들이 야생의 자연을 버리고
인간들에게 길들여짐을 선택했을 때, 인간이 돼지에게
이렇게 안락한 형태의 숙소를 제공하리라고는
돼지들 자신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말한다.
공리주의란 인간과 돼지의 사회계약 같은 것이다.
- 「돼지 아파트」 중에서
시인의 말처럼 지금의 “영리한 돼지”이자 인간에게 더 이상의 신비로움은 없다. 그렇다면 신성한 언어란 태초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만약 하나의 용어로 말해볼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계약’의 언어라 칭할 수 있겠다. ‘계약’으로부터 주어진 안락함. 그 계약은 우리를 길들이고 편안하게 하며 그리하여 인식하지 않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효율성과 계약의 문서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 타락해버린 언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어떤 태초의 신비로운 언어의 형상을 발견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지도 모른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어떤 과거의 희미한 기원이 여기에 있다. 시인은 그러한 태초의 언어가 지닌 순수한 빛이 어떻게 타락해왔는지에 대해 말한다.
최초의 책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와
돌 위에 새겨졌을 것이다. 일곱 개의 별이 박힌 이 책을
사람들이 무덤으로 삼았으니, 책이 어찌하여
별의 부적이 아니겠느냐? 산 자들이
그 앞에서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고, 열흘 밤
열흘 낮 동안 점을 친다.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나의 애인아. 진정한 삶은 이 세상에 없다.
몽매한 현자들이 점토판의 진흙이 굳기도 전에
쐐기로 제 두 눈을 찌르고, 하늘의 문자를 모방하여
불멸의 책을 구워냈으니,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색창연한 먼지로 뒤덮인 도서관의 책들을.
형이상학으로 가득한 이 책들은 온통
호명을 기다리는 죽은 아버지들의 이름들뿐!
도둑처럼 날이 저물고, 생각 없는 별이 뜬다.
골짜기의 백합보다 순결한 내 애인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중개하는 밤이 왔다. 죽음으로 봉인된
책이 열린다. 오, 존재가 사라진 공간 속으로
날아오르는 흑조들. 그 뒤로 죽은 아버지들이
전쟁 포로처럼 돌아온다. 이곳은 ‘바깥’들이 모인 ‘바깥’의
바깥들. 존재 없는 존재자들이 사는 곳. 죽은 자들이
산 자를 낳는 곳. 사물들이 모두 거울이 되는 곳.
나는 흑조를 쫓아 절벽 끝까지 내달린다.
순간 절벽이 나를 비추고 흑조가 나를 비춘다. 번쩍번쩍
비추는 대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내 오늘 밤
저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허공에 떠
유물론자와 물질주의자의 차이를 제법 유치하게
말해줄 수도 있지만, 애인이 서둘러 책을 덮는다.
최초의 아버지들이 미지의 행간 속으로 사라진다.
울지 마라. 모두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서관엔 아직도 먼지를 털어내며 읽어야 할 책들이 수북
하다.
옛다, 너도 한 권 가져다가 저잣거리에
비린내 나는 생선이라도 한 마리 바꿔 먹으렴.
- 「바깥들」, 전문
시집의 서두에 배치되어 있는 「바깥들」은 이 측면에서 시집 전체의 의도와 맥락을 조감할 수 있는 그러한 시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타락의 역사가 있고, 그 타락 이전에 존재했을 언어의 가능성도 형상화되어 있다. 이를 시인은 다음처럼 말한다. “최초의 책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와 / 돌 위에 새겨졌”으며, ‘사람들이 무덤으로 삼았던 일곱 개의 별이 박힌 이 책’은 “별의 부적”이었다고. 요컨대 죽음과 함께 매개되는 태초의 기원이자 신성함의 원천으로서의 언어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카시러의 말처럼 ‘상징형식’으로서의 언어이자 세계를 인식하는 행위로서의 언어이자 우주 또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지금 부재하는 사유의 방식으로서.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일종의 이데아처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원천이며 기원으로서.
책과 언어는 태초의 기원에서 그 신성함을 직접적으로 매개했었다. 우리는 기원으로서 한때에 “하늘의 문자를 모방하여 / 불멸의 책을 구워냈”으며, “살아서 / 돌아온 자가 없는” 죽음의 몫으로 책에 대한 경배를 수행했었다. 이 태초의 시간을 지나 책과 언어는 타락해가고 본디 “죽음”의 숭고함과 뒤엉켜있어야 하는 ‘태초의 빛’은 시간이 흐르며 쇠락해 간다. 그리하여 언어이자 책의 “형이상학”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읽혀지지 못하고 “호명을 기다리는 죽은 아버지들의 이름들”처럼 먼지가 쌓여갈 뿐이다. 효용성과 안락함 그리고 계약이라는 언어들이 아닌, ‘죽은 아버지들의 이름들’로 가득 찬 “고색창연한 먼지로 뒤덮인 도서관들의 책”은 그저 세계의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뿐이다.
그러니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도둑처럼 날이 저물고 생각 없는 별이 뜬다”고. 계약이란 명료한 언어가 지배하는 어둠으로서의 우리 세계는 있어야만 하는 놀라움과 신비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세계란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사라져가는 태초의 빛을 인식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시인이다. 즉 ‘죽은 자와 산자를 중개하는 순결한 내 애인’이며 나인 존재는 세계의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죽음으로 봉인된 책을 열려 하는 자’인 셈이다. 시인은 그러한 책의 이면 속에 존재할 세계를 “‘바깥’들이 모인 ‘바깥’의 / 바깥들. 존재 없는 존재자들이 사는 곳. 죽은 자들이 / 산자를 낳는 곳.”이라고 말한다.
일종의 신비주의적이기도 한 시인의 말들은 우리의 어둠이 감추어두고 가려버린 혹은 타락시켜버린 근원을 찾으려는 자의 형상에 해당할 것이다. 언어가 효율성과 명료함이란 계약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지만, 때로는 그 어떤 시간 속에서 그리고 그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가 책을 들추는 행위를 지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계약이란 이름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의 영역. 중심이 아닌 오직 ‘바깥’만을 향해 있으며, ‘존재 없는 존재자들처럼’ 이름 없는 자들의 이름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 태초의 빛을 바라보았던 죽은 자들의 유지를 이어받으며 감추어져 희미해져버린 태초의 빛에 감응하는 자들. 시는 그리하여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정으로 살아있을 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이자 하나의 상징형식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계약의 언어들에 속박된 우리들이자 돼지들에게 책들의 더미 속에 숨겨져 있을 태초의 빛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흑조를 쫓아 절벽 끝까지 질주하는 나’는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돼지이자 인간은 ‘울지 않으며’ ‘책을 시장(저잣거리)에서 생선과 바꿔먹을 것’이다. 그들은 ‘최초의 아버지들이 미지의 행간 속으로 사라지는’ 풍경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금 언어는 이 타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밥을 먹고 죽는 것이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희디흰 쌀밥.
이것이
치명적인 독약임을 깨닫기 위해선,
시간의 말을 타고
가뿐 숨을 헐떡이며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
갈기를 세운 말 한 마리가 시간 속을 질주하고 있다, 미친
듯이
- 「밥」, 부분
태초의 신성한 빛이 계약의 언어로 대체되어 버린 지금. 계약의 언어는 우리에게 ‘밥’으로 치환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효율적이고 명료한 계약의 언어들 속에 있다. 그렇다면 그 계약의 언어는 왜 우리에게 자신의 법칙을 수행하게 하는 것일까. 그 계약의 언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밥’ 혹은 먹고 사는 문제로 통칭되는 생존에 있을 뿐이다.
굳이 한때 사회적 유행어가 되었던 ‘헬조선’이란 말을 떠올려보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의 사회는 어둠에 가득 차 있다. 요컨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지옥으로서의 현실. 우리는 생존을 걱정하고 돈벌이를 걱정하며 살아야할 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는 지상에 발을 내딛고 사는 인간으로서 무조건 현실의 문제들을 외면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직 생존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질문이자 법칙이 된다는 현상 그 자체가 아닐까.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란 노래의 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여기는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우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계약의 언어가 완성시켜버린 최후의 인간들이자 그 형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결국 / 밥을 먹고 죽는 것이”라고. 최상의 권력을 가진 자들도 최고의 부를 가진 자들도. 요컨대 계약의 언어란 세계 속에서 승리한 자들도 그리고 패배한 우리들도 “결국 밥을 먹고 죽는다”는 어떤 진실. 그 진실을 외면한 채 우리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희디흰 쌀밥”을 먹으려 계약의 언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돼지”이자 노동하는 동물의 삶으로. 시인은 우리의 현실이란 어둠이 감추어둔 ‘독기’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이 치명적인 독약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독약의 세계를 그리고 동물이자 “돼지”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현상학적’ 죽음이다. 그 죽음만이 “갈기를 세운 말 한 마리가 시간 속을 질주하는” 괴이하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그리고 이 세계의 어둠에 대항하기 위한 “미침”의 가치를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미친 말의 헐떡이는 질주’가 가려고 하는 곳은 어디인가. 이 질주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이자 태초의 신성한 빛이 우리에게 비춰주는 어떤 희미한 ‘매혹’으로 불리워져야 한다.
이 여인을 본 자는
모두 장님이 되었으니
아무도 이 여인의 정체를 모른다오.
그러나 당신은 이미 알고 있소.
지금 당신이 먹고 있는 음식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임을.
(그러니 즐기시오, 매혹과의 식사를)
- 「식사 시간」 중에서
3. 신비롭고 매혹적인 죽음과 꿈
세상에는 온통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그리하여, 놀란 귀는 더욱 놀랄 것이다.
- 「놀란 귀」 중에서
요컨대 시인은 “오늘 밤도 별들이 밤하늘에 마침표처럼 박혀 반짝거리”는 어떤 특수한 시공간이자 태초의 빛을 향해 ‘질주하지 아니하면서’(「시감도 2013」) 질주하려 한다. 계약의 언어이자 돼지들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태초의 기원이란 신성한 언어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문제는 무엇일까. 규정될 수 없고 규정되어서도 안되는 시적인 것처럼 우리가 그 세계를 결코 명료한 방식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세계란 그러한 점에서 “불가능한 일도 없고 가능한 일도 없는”(「북위 38도」) 곳인 셈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결기만이 시인의 태도가 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죽음이란 테마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다음의 시를 보도록 하자.
죽음이란 육체가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것이다.
나는 꿈속에서
애인의 눈을 들여다본다.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애인을 소유한다는 것은
세상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불안하다. 내가
애인을 소유한 적이 있었던가?
빠져 죽고 싶은 이 맑은 물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애인의 눈을 바라보는
내 눈에도 물이 고인다.
모든 물은
여자이자
남자이며,
아이이자
어른이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있고
죽어 있으면서도 살아있다.
모든 죽음은
물의 죽음이고
애인의 죽음이다.
- 「익사의 꿈」, 전문
공간에 돌입할 가능성이 바로 시인에게 ‘죽음’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꿈 속’에서 시인은 다음처럼 말한다. ‘맑은 물이 고인 눈을 가진 애인을 소유한다는 것은 세상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이 애인의 존재를 단지 현실적 연애의 대상으로 파악할 필요가 없다는 점 역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애인은 말하자면 태초의 신성한 언어이자 빛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시인은 “불안하다”. 왜냐햐면 “내가 / 애인을 소유한 것이 있었”다고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벤야민의 아우라처럼 진정으로 우리가 욕망하지만 나의 소유가 되지 못했던 것이 신성한 태초의 언어가 아닐까. 시인은 천천히 태초의 언어를 바라보며, “애인의 눈과 내 눈”을 눈물이자 “물”이며 슬픔 속에서 일치시키려 한다. 그렇기에 이 슬픔과 눈물의 언어들은 명료한 계약의 언어와 무관하며 타자들의 존재를 규정짓지 않는다. 규정하지 않고 모든 존재들을 포용할 그 태초의 신성한 빛이자 언어는 모든 슬픔 속에 ‘여자이자 남자’를, ‘아이이자 어른을’ 하나로 묶어내려 한다.
요컨대 시인은 말하지 않으려 하며 말한다. 계약의 언어에 묶인 우리는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며, 태초의 신성한 빛의 언어는 ‘죽은 것이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무엇이 될 수 있다고. 그러한 세계만이 시인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하나의 세계이자 ‘모든 죽음’ 너머에 위치해 있는 존재들의 매혹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바로 그러한 세계를 향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통과하려는 자만이 시적 언어이자 본래적 세계에 도달할 가능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너는 언제나 정신의 꼭대기에서
극한의 인내력을 요구했었지.
산은 가팔랐고
바람은 도처에서 추위와 어둠을 몰고 다녔지.
너희들은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이
죽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지 몰라.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너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외쳤었지.
진리여, 변치 않은 힘의 사악함이여.
넘어서는 안될 사상의 지평선이여.
나는 이제
여기서
너를 떠나보낸다.
진리여, 죽음이여, 사유의 멈춤이여.
- 「궤변」, 부분
‘부정한 변증법’과 같은 궤변의 힘으로 ‘이성이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진리의 해변’을 지나가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태초의 빛이란 신성함의 언어는 지금의 우리에게 계약의 언어를 파괴해 버릴 불온하고 불편한 것이며 또한 이성의 입장에서는 ‘궤변’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러니 시인의 보다 근본적인 욕망이 어떻게 이성의 진리가 아닌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지를 질문해볼 수 있겠다. 즉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힘으로 / 모순과 모순을 / 넘어”설 수 있는 어떤 힘으로서의 사유. ‘이름다우며 완벽하고 자유로우며 무한하고 황홀’하지만 세계로부터 단지 궤변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태초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시인은 물으려 한다. 말하자면 “성스러운 궤변”이자 “불가사의한 수수께끼”같은 언어에 시인은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정신의 꼭대기”에서 “극한의 인내력을 요구하”는 정신의 모험일 수밖에. 그 태초에 언어에 도달하기 위한 모험은 어렵고 힘겨우며, “한결같이 죽음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계약의 언어와 현실의 어둠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의 사악함’일 것. 마치 니체의 초인처럼 진리의 세계에 대한 ‘변치 않는 추구’이자 “넘어서는 안 될 사상의 지평선”을 넘어가버리려는 어떤 의지. 그것은 계약의 언어를 파괴하고 붕괴시킬 가능성이자 지금 우리의 세계가 지닌 어둠 너머에 있을 태초의 빛이자 기원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즉 시인은 모험하는 자가 되려 한다. 내가 나를 버리고 나의 이해와 인식 그 자체를 버릴 때에 도달할 수 있는 무언가. “사유의 멈춤”과 나의 “죽음”을 통해 도래할 이성과는 다른 진정한 “진리”를. 말하지 않고 믿지 않음으로서만 도래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말이다.
하여 시인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로 가득한 “성스러운 궤변”을 탐구하는 자이며 규정할 수 없고 명명될 수 없는 흔적들을 탐색하려는 자일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죽음을 통해 버려버리고 그 너머의 ‘바깥들’이란 죽음과 꿈의 세계를 보는 자. 고유한 타자들의 목소리로부터 울려 퍼지게 될 놀라움과 신비로움의 언어들을 들으려는 자.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시적 언어를 현전하게 하려는 자. 규정할 수 없는 태초의 빛으로부터 오게 되는 희미한 형상이자, 오직 랑그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로부터 사라져버린 “빠롤”에 대한 “불멸”같은 믿음으로서.
불멸이여, 순간 너는 발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에우리디케가 네 손끝에서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너는 마침내 절대 무無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동물의 쾌락.
너는 그만 얼떨결에 죽음의 강을 건너고 말았던 것이다.
시간을 어린애처럼 희롱하는 물의 요정이여.
사라져 버린 세상의 기원이여, 불멸이여.
오 빠롤!
- 「불멸」 중에서
4. 연금술적 대장장이의 운명
오, 순수한 분노여, 나는 불가피하게 푸른 당나귀가 될 수
밖에 없다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의 한 복판, 나는 강가에서 장작불을
피우며 얼음을 녹이고 있소.
- 「푸른 당나귀」 중에서
결국 시적인 것을 위해서, 이미 사라져가고 꺼져가고 있는 태초의 빛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언젠가 벤야민이 ‘망각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랑그의 법칙들을 부정하고 빠롤들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긍정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문학이란 결국 개개인들의 빠롤들이 구축해가는 어떤 고유한 세계들이 아닌가. 계약의 언어가 지배하는 이 세계의 어둠 속에서 이들의 고유한 언어들은 작은 빛들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당연하게도 그 ‘읽음’은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진 시라는 시스템과 코드의 작동체계들과는 무관하다.
사방 천 리 땅이 푹 꺼지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분화구 아래
하늘에서 온
아주
단단한
금속이 있다는 것을.
이제 세상을 구원할
한 자루의 칼을 만들 때가 되었다.
- 「칼의 기원」, 부분
시인은 선언한다. “자고나면 새로운 왕들이 나타나/ 서로를 헐뜯고 /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우는 무한한 반복들의 세계 속에서도, “우주의 먼지 속에서 / 새로운 별이 태어나듯” 존재하는 언어가 있을 것이라고. 그것은 “하늘에서 온 / 아주 / 단단한 금속”일 것이라고. 엘리아데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에서 언급했듯이 반신적 존재로서의 대장장이는 세계를 구축하는 자이며 동시에 ‘비밀을 소유한 주술사’라고 말했던 것처럼,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벼려내어 한 자루의 칼을 만들어내려 한다. 어쩌면 시인이 만들어내려 했던 이 한 자루의 칼이 『오리진』에서 암묵적으로 발화되는 태초의 언어이자 신성한 빛이 아닐까. 계약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계의 어둠 속에서도 불을 밝히고, 저 알 수 없는 기원을 가진 단단한 금속을 두드려 ‘한 자루의 빛나는 칼’을 만들어내는 것. 즉 이제는 사라져버린 언어의 빛을 되살리려고 하는 자. 그러한 점에서 시인은 결국 ‘꿈 속’같은 죽음과 친연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서만 세계를 인식하고 진정으로 사유하는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려 보자. 시를 쓰는 우리란 무엇인가. 왜 우리들은 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시쓰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가를. 그것은 우리의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해야 한다. 그저 쓰고 읽으며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말없는 자들의 말들과 이름 없는 자들의 이름을 다시금 불러 일으켜 세우기.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처럼 진보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이란 단 하나의 파국 속에서도 죽은 자들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고 산산히 파괴된 것을 다시금 결합시키려는 존재일 것. 그러한 운명 속에서만 시적인 것은 어떤 빛나는 태초의 별들의 신성한 빛이자 신비롭고 매혹적인 꿈들을 내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리고 그저 그 빛을 간절하게 품어 안는 일일 뿐이다. 사라져가는 숙명을 지닌 이 희미한 목소리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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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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