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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현대시 | 2024년 8월호(제416호)

순수한 분노의 잔여적 미래

김정현 문학평론

1979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났고 이후 전남 여수에서 성장하였다. 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김소월 시의 구술성 연구로 석사 학위를 그리고 구인회 모더니즘 시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사는 알레고리적 언어 미학과 예술가의 개별적 실존성에 있으며 그에 관한 연구와 비평을 병행하고 있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황인찬론)」로 등단하였고 공저인 『한국 근대시의 사상』과 『2023년 제24회 젊은평론가상 수상작품집』 및 문학평론집 『헤테로토피아의 밤』등이 있다.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문학창작산실 발간지원기금 수혜받았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조교수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늘 울다가 그친 마음으로 일어났다 발을 헛디디듯 온갖

                                         추잡한 욕을 쏟고 나서야 혈관을 따라 산듯하게 피가 돌기

                                         시작했다 잘 씻어 말린 선잠을 개키면서 하지 못한 말만 모

                                         으니 기도문을 닮아갔다

 

                                           이 무뎌지고 유약한 것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나

                                           누군가 기다리고 있으면 온몸이 천천히 깍여나가는 기분

                                         이 들었다 우리의 그림자가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이

                                         를 악물기도 했다

 

                                           네 손이 닿지 않는 곳은 다 묘지였다

 

                                           죽어서도 너와 계속 살았다

                                                                              - 「묘적계중에서

 

 

1. 죽음의 냄새

 최백규 시인의 신작 시들을 일별하고 난 후 그의 언어 이면에 깊숙이 감춰져 있는 무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마치 언어의 행간 속에 진득하게 고여 있는 죽음의 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예컨대 시인의 신작시 <전야제>나의 출생은 부고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의 생이 곧바로 죽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의 풍경이 매우 짙고 어두운 냄새를 풍기며 시인의 언어에 들러붙어 있다는 것. 하여 그를 죽어있는 세계 속에서 죽어있음이란 기묘한 존속을 유지하는 자라고도 말해볼 수 있겠다. 즉 현실이란 세계에 기어이 속하려 하지 않는 언어. 그 감각이 시인을 근본적으로 둘러싸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이는 언어의 이면 속에 내제된 숨겨진 어떤 의지라고 칭해져야 한다.

 그의 첫 번째 시집인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창비, 2022) 역시도 유사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일차적으로 이는 시인의 개인사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은 시와 개인사가 얼마나 일치하는가란 사실관계에 있지 않다. 핵심은 그의 언어가 죽음의 무거운 중력 속에서도 힘겹도록 무언가를 찾아 해매고 있다는 점이며 이와 동시에 그 의지의 동력원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탐색해 보아야 한다는 것에 있다. 현실이란 압력의 거대한 체계들 속에서 그가 진정으로 원하며 바라는 바. 지금의 여기에선 사라져버렸고 부재하는 것이겠지만 존재해야만 하는 무엇. 시인의 시선은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언어들을 통해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는 필사적으로 과거의 어떤 순간들 기필코 호명하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 죽음으로 둘러싸인 지금의 세계를 순수하게 부정하고 증오할 수 있는가를 말이다.

 

 

2. 이탈된 자로서

 우선 시인의 신작시를 통해 스스로가 죽음 그리고 죽음 속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떠한 인식을 지니는 지를 검토해야 할 것 같다. 다음의 시를 보자.

 

나의 출생은 부고였다 죽은 아버지가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죽지 못한 어머니는

추위와 어지러움을 견디며 멍하니 누워 있었다

무언가 두고 온 듯했다

세상에 남겨진 내가 그것을 찾아 헤매는 동안

세상은 아름다웠다 못 배운 부모들이

가난한 동네에 모여 살았고 자식들이

새벽에 출근해 밤에 퇴근하는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똑같은 학교와 비슷한 학원에 입학했다

서로의 빈집으로 골목으로 떠돌았다

좋아보이는 옷과 신발을 훔치거나 뺏고 걸어 다닐 때마다

몇 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그 모든 것마저 아무 일도 아니게 될 즈음

어른이 되었다

축의금과 조의금 몇 번에 세월이 갔다

무덤 앞에서 유가족이 울었다 너무 비통히 울고 있었다

나는 나의 부모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못했다

                                   - 「전야제」, 전문

 

 시인에게 감각되는 세계가 이와 같다. 앞서 지적했듯 전야제나의 출생은 부고였다라는 문장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이 말은 자기 자신의 물리적인 죽음 그 자체를 뜻한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다 핵심적인 부분은 시인 스스로가 자신을 현실이란 세계 속에서 위치지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는 유령처럼 세계를 부유하고 있는 자이다. 이 측면에서 시인이 자신의 존재론적 출발점을 죽음으로 명명하고 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 그는 스스로를 죽음으로부터 유래한 세상에 남겨진존재로 여긴다.

 어딘가 기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당연한 현실로부터 조금씩 어긋나있기. 시인은 세계 속에 있지만 세계 속에 있지 아니하며 그로서 규정될 수 없는 장소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그러한 태도의 표면적 지향점이 바로 죽음이라면 그 죽음에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해야 한다. 이때 주의 깊게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시인 자신도 그 이유를 그저 찾고 있을 뿐이며 또한 희미하고도 어렴풋하게만 그러 필연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가 세상에 남겨진 내가 그것을 찾아 해매는 동안에만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을 수 밖에. 아름다움이라는 언어의 표면이 아닌 그 이면 속에 감추어진 것. 현실이란 세계로부터 이탈한 자들에게만 비로소 보이게 될 무엇. 이것이 시인이 자신을 죽음으로서 인식하는 첫 번째 이유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죽음을 지니지 못한 우리들의 세계란 어떠할까. 즉 어른이 되어버린 자들의 당연한 현실. ‘못 배운 부모 밑에서 가난한 동네에 살며 똑같은 학교와 비슷한 학원에

입학한 우리들의 지금. 시인은 그 당연한 곳에 있으려 하지 않으며 서로의 빈집으로 골목으로 떠돌아 다닐 뿐이다. 요컨대 지금에 위치하지 않는 소년이자 과거일 것. 따라서 시인이 자신을 죽음으로서 인식하려는 이유가 다시금 확인된다. 그것은 머물 곳을 바라지 않고 어른이 되지 않으려 하는 과거의 시간이자 기억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죽음의 심층적 이면이자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어떤 세계라고 칭해져야 한다. 그러한 있지 않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이탈되고 벗어난 자들 뿐이다.

 요컨대 그 모든 것마저 아무 일도 아니게 될 즈음이자 무감각하고 일상적인 현실의 법칙이 반복될 뿐인 세계에 맞서기. ‘세월이 가고결국 소년은 어른이 되어버리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서를 거부하며 다르게 존속하기. 시인이 스스로를 죽음이자 유령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이러한 시인의 존재론적 인식은 희미하게 그의 시 속에 스며들어 있을 뿐이다. 마치 아무도 듣지 못했다라는 차디찬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나의 부모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중얼거리려 한다. 우리는 이 문장을 단순한 사실적 위로의 마음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위로란 지금이란 여기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려는 죽은 자들에게 가능한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오직 유의미한 것은 죽음 너머의 어떤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의지이자 바로 그러한 순간의 시간과 공간들일 뿐이다.

 

1

  여름 축제의 시작

  가방에 넣어온 사복으로 갈아입을 때

  흔들리는 조명 속 내 어깨에 네가 머리를 기댈 때

  눈을 피하지 않을 때

 

  2

  우리는 외출 금지를 어기고 비상금을 털어 바다를 보러 갔지

  불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긴 노래를 부르며

  밀려오는 적막을 바라보았어 멈출 수도 이어갈 수도 없이

  이것이 사랑이구나 그렇다면 음악이 멎고 아침이 오면

  끝나는 걸까 행복했던 가사가 후렴으로 들수록 슬퍼져도 그만두지 않았지만

  어지럽게 흩날리는 꽃잎들에 무언가 흐려지고 벌써 그리워

  오래도록 춤과 노래가 끝나지 않고 공허히 사랑이 증발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하더라도

  이 마음을 다 전할 수 없으니까

  크게 웃었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운 네가 먼 하늘을 쳐다보며 한참 웃어서

  웃을 일도 없는데 불안해서 아프고 싶지 않아서

 

  3

  희미한 파도로 쓸려가던 새벽

  세상은 여전히 너로 가득하지만

  눈 감으면 꿈일까 봐 일출을 기다리며 어쩐지 익숙했고

  이제부터 평생 이와 비슷한 크기의 일들만 이어질 것을 알았지

 

  4

  그날 흩어진 후 자연스럽게 혜와 연락이 끊어졌다

  공무원 준비를 한다더니 경찰과 살며 아이도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희는 간호조무사로 들어갔다가 술집에 취직했다

  우는 때가 늘어만 갔다

  왠지 우리는 희가 죽을 것 같아 주기적으로 찾아가려 노력했는데

  외국 여행을 계획하던 윤이 갑자기 사라졌다 서먹한 기분으로 고시원을 정리해야 했다

  민은 예술대학에 입학했다

  창이 우연히 길에서 부딪쳤는데 눈가의 분위기가 달라졌더라고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일러주었다

  창은 친구 몇과 여러 사업을 벌이다 파산하더니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5

  여름이 끝났다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들이었다

 

  6

  몇 년이 흐르고 연락해보려 했지만 누구와도 닿지 않았다 어쩌다 스친 다음에도 끝이 좋지 않았다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했다 우리가 언젠가 마주했을 때 웃어줬으면 좋겠다

 

  네가 이 시를 읽고 있다면

                                                                              - 「커튼콜」, 전문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들이자 벌써 그리운것들에 에 말없이 깃들인 무언가. 언젠가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부재하며 그리하여 짧은 축제같은 여름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외출 금지를 어기고 비상금을 털어 바다를 보러갔던 꿈결 같은 과거의 어떤 시간에 대한 그리움. 하여 시인은 그 과거의 공간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다. “불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긴 노래를 부르며/ 밀려오는 적막을 바라보았어 멈출 수도 이어갈 수도 없이/ 이것이 사랑이구나라고. 적막 속에 숨겨져 있는 작은 불빛들에 대한 기억들. 명확하게 언어로 규정해버리고 소유할 수는 없던 아우라와도 같은 시공간. “오래도록 춤과 노래가 끝나지 않고 공허히 사랑이 증발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하더라도/ 이 마음을 다 전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순간의 마음. 요컨대 슬퍼져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자 말해질 수 없고 규정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기억들을 지닌 존재가 곧 시인인 셈이다.

 그러나 희미한 파도로 쓸려가던 새벽의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멀어져버린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죽음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우리들처럼. ‘세상은 여전히 너로 가득하겠지만이제는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지금.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이제부터 평생 이와 비슷한 크기의 일들이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불길하게 예감하게 된 현실의 세계 속에서 시인은 친구들의 일상을 그저 차분히 나열한다. 어른이 되고 직업을 가지며 어느 순간에는 눈가의 분위기가 달라졌더라고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의 나와 우리를 말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과거의 어떤 기억과 아우리가 더 이상 영영 우리들의 손에 닿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

 “몇 년이 흐르고 연락해보려 했지만 누구와도 닿지 않았다는 차갑고도 무의미한 현실 속이기에 시인은 자기 자신과 지금을 죽음으로 감각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기억은 함몰되고 세계는 우리를 현실이란 법칙 속에 구겨 넣으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당연히 강제한다면. 그러한 죽음의 세계 속에서 시인이 행해야 하는 유일하고도 희미한 가능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쓰는 것을 통해 희미한 과거의 시간을 인식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해 그에 대한 간절함을 다시금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시인은 이를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시를 읽고 있다면” “우리가 언젠가 마주했을 때 웃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우리는 이 말을 과거에 대한 단순한 추억으로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네가 이 시를 읽고 있을 웃음이란 순간의 시간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이행해야 하는 모험이자 지금이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자신의 과거에 걸친 모든 존재들의 기억을 불러오며 이를 살아있게 만들려 한다.

 

자고 일어나면 손발이 붓고 말라붙은 눈물 자국

 

(…중략…)

 

장하빈 시인의 <행복한시쓰기>

김동원 시인의 <텃밭시인학교>

그곳에서 만난 어른들의 따스함

손영숙 시인과 심찬용 시인

임미경과 지정화

 

얻어걸린 등단

처음 친해진 선배

대구 시인 형들을 만나고

여정 시인이 가르쳐준 것

아직 우리에게 첫 시집도 없던 시절

안지랑곱창골목에서의 합평들

권기덕 시인의 큰 웃음소리

김사람 시인이 모임마다 태워다준 차

우리도 언젠가 한탕 치자고

김준현 시인과 새벽에 걸은 영남대학교 몇 번이나 엇갈린 계명대학교

처음 청강한 김문주 평론가의 대학 강의

나도 위로 가야겠다 생각한 이성복 시인의 비밀 모임

부딪치던 잔들

조진리 시인의 술버릇

대구문화에서 일하던 이선욱 시인과의 인터뷰

대구신문과 KBS 대구

특강들

집 근처 분식점에서 읽은 강진규의 가능성

영진전문대학교 건너 중국집에서 들은 황재민의 꿈

피 흘리는 내 곁을 끝까지 지켜준

곽유진 박정수 박준희

 

그리고 배신한 친구들

본인만 믿으라는 사기꾼의 행사를 마치고 출연료 대신 받은 쓰레기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무시

 

너를 만나고 멤버들을 모아 동인을 결성할 때까지

                                            - 「체험판 게임」, 부분

 

 시인은 자신의 과거 속에 있던 모든 존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호명한다. 마치 백석의 선우사에서 정갈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반찬친구들처럼 말이다. 하여 우리는 이 시의 구절들을 시인이 경험했던 과거로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시간은 그 누구에게라도 결코 균질할 수 없는 것이니까. “눈물 자국을 기억하려는 그의 존재론적 이유와도 같이 시인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일종의 아우라같은 분위기를 떠오르게 한다. 삶의 무의미한 출발점에서부터 스스로 시를 쓰겠다는 마음먹었던 순간을. 그리고 얻어걸린 등단이후 지금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자신의 존재이유라 할 수 있는 것. 일상의 무의미한 시간들 속에 촘촘히 박혀있는 낱알같은 기억들은 단지 과거에 머무르며 고정되어버린 사실들이 아니며 요컨대 살아있다. 더욱 정확히 말해보자면 이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희미한 살아있음이자 어떤 가능성인 것이다.

 핵심은 이 기억들이 따스하며 순수하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무시라고 할 죽음과도 같은 세계에 맞설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다. 나와 유사한 이탈된 자들을 만나 웃음소리가득한 술을 마시고 두근거리는 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며 대화하기. 오직 시라는 순수성만을 생각하던 순간들. 그 아우라와도 같은 기억들 덕분에 나는 배신과 사기꾼 그리고 쓰레기로 가득찬 죽음이자 현실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의 살아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결국 피흘리는 내 곁을 끝까지 지켜준친구들이자 그 친구들과 내가 공유할 수 있었던 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말하려는 동인을 시인의 현실 친구들로서만 생각할 필요 역시 없겠다. 그가 자신의 친구이자 동류로 여기는 자들은 말하자면 순수한 존재이자 시간이며, 그러한 죽음 너머의 시간을 원하는 오직 단 하나의 태도만을 가지고 있는 용감하고 비겁하지 않은 행위자들일 테니까.

 

 

3. 순수한 분노

 하면 여기에서 덧붙여야 하는 또 하나의 질문은 그의 분노에 대한 것이다. 어떤 점에서 최백규 시인의 시작들은 부재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들에 토대하기에 이를 서정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정적이란 말은 다소간 좁을 수도 있다는 생각 역시 들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단순히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들을 말하는 것이 그치지 않고 순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증오 역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측면에서 그의 첫 번째 시집인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에 수록된 다음의 시를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난 일이다 옥상 한가운데

  서 있으면 멀리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려온다 늙은 내가 앉아 있을

  서울행 열차를 향해 어린 내가

  대구 육교 위에서 친구들과

  돌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이만한 크기였을 것이다 머리 위

  비행기가 항로를 틀었다 봄은

  멀고 하늘도 높다 눈발이

  날릴까

    -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전문

 

 그의 시가 지니는 생각하는 당연하고도 일반적인 우리의 서정과 다른 지점이 이 시속에 존재한다. 조금 더 구체화시켜 호명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표현대로 죄악감’(「비행」)이라 부를 수 있겠다. 오해하지 말자. 이 죄악감은 명료하게 이해되는 일반적인 도덕 감정과는 결을 달리하니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에 대한 인식론적 범주에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제목이 내가 아닌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저 죽인다. 그의 말처럼 늙은 내가 앉아 있을 서울행 열차처럼 고속으로 달리고 그 사이에 있을 모든 것들을 말살해가면서. 이 늙은 나와는 다른 어린 나는 열차에 돌을 던지지만 그 돌은 아무런 힘없이 튕겨져나올 뿐. 이 무력감 앞에서 시인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행위를 한다.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이만한 크기였을 것이라는 상상을 말이다. 지금에 있어서는 사라진 그리하여 이미 지워져버린 무언가들을 끊임없이 존재케하려는 일종의 의지인 것. 비록 봄은 멀고 하늘도 높을지라도, 그 위에 떠있는 비행기가 정해진 항로로부터 이탈하려 몸부림 치는 것처럼.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흩날리기 시작하는 눈발이 우리에게 도래해야 하는 것처럼.

 나와 우리가 지워버렸기에 부재하며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것들. 바로 그에 대한 그리움이자 과거라는 아우라적 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는 모든 현실에 대한 순수한 분노. 이에 대한 증오가 아마도 시인의 마음이 지닌 하나의 형태가 아닐까. 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시인의 기발표작인 해방신의 미래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비참한 싸움들

  아직 성패는 알 수 없으나

  살아 있는 한 무너지더라도 침몰하지 않을 테다

  축복이자 저주가 되어

  국가를 전복시키고 한 맺힌 자유를 울부짖다 거꾸러지기 위하여 마침내

  온몸으로 하나의 시대를 마무리한 채 눈을 감아

  역사상 가장 긴 한철로 흘러가기 위하여

                                                     - 「해방」, 부분

 

 일견 해방은 앞서 살펴본 시들과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시의 목적성 때문에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는 점 역시 뚜렷하다. 그러니 이 시가 지니는 완성도나 성취도를 따져 묻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겠다. 보다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분명 늘 항상 패배하고야 마는 성패를 알 수 없는 비참한 싸움들앞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며 또한 시인이 순수하지 못한 지금의 현실에 대해 굴복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일 따름이다. 이 강한 분노는 단순히 정치적이다란 말로 전부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인의 증오는 그 이면에 가장 긴 한철이라는 순수함과 살아있음의 시간을 배음처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신의 미래를 보도록 하자.

 

  신은 왜 나에게 신을 주었을까

 

  바다에서 썩지 못하고 다시 밀려온 소년을 바닷가에서 수습하듯이

 

  여름 내내 살의와 선한 마음들이 세계를 둘러싸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긴 싸움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의 몸 위로 수많은 꽃이 쌓이고

 

  환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미래를 마주하고 온 것처럼

  살가운 눈물로

 

  더 이상 막아야 할 슬픔도 지켜야 할 행복도 없지만 아직도 구름이 흘러서

 

  신이 된 첫날에는 인간들을 죽이고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죽기 싫었다

                                                  - 「신의 미래 」, 부분

 

 그의 말처럼 여름 내내 살의와 선한 마음들이 세계를 둘러싸고있는 지금의 세계 속에 시인이자 신은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머무름은 단순한 일치 혹은 무가치한 세계에 동화된다는 의미를 지니진 않을 것이다. ‘살의선한 마음비웃음과 무시그리고 따스함처럼 너무나도 다른 시공간에 속해 있으니까. 이 측면에서 시인의 존재론적 목적이란 살의의 신과 맞서는 선한 마음들의 시인이자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를 향해 있는 것이라 해야 한다. 이 시인이자 소년은 바다에서 썩지 못하고 다시 밀려온 소년이자 시체이며 동시에 죽은 자신을 바닷가에서 수습해야만 하는 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 요컨대 자신의 죽음 그 자체를 손에 쥐며 죽음을 통과한 소년이자 시인이 스스로를 다르게 인식하기. 그렇다면 죽은 그는 죽은 자신의 시체를 손에 쥐고 나서 시인/신으로 재탄행하기를 염원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죽기 싫어서’. 즉 진정으로 살아있고 싶어서.

 죽음을 통과한 자의 눈으로 현실이란 세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며 그 부정의함과 비순수에 대한 분노를 사유하기. “더 이상 막아야 할 슬픔도 지켜야 할 행복도 없는 지금의 세계에 무가치한 우리 인간들을 죽이고 도망치는 꿈을꿀 수 있는 그러한 시인이자 신인자. 이 이탈한 자이자 우리의 지금을 전부 부정할 수 있는 기억의 시공간과 아우라를 지닌 죽은 자. 바로 그러한 자가 비로소 시인의 이름에 걸맞는 존재일 따름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의 증오와 분노는 단지 부정과 파괴만을 향한 것이 아니니까. 그 순수한 증오와 순수한 분노를 지닌 자가 환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줄 수 있으며 미래를 마주하는 살가운 눈물을 마음 속에 품고 있다는 것. 그러하기에 이 죽은 자의 근원적 시선은 과거의 시간이자 공간이며 실로 죽어 있는 우리 모두가 알지 못할 어떤 장소를 끊임없이 향할 따름이다. 마치 죽은 나의 몸에 수많은 꽃들이 쌓여가는흔적처럼 말이다.

 

 

5. 잔여적 미래

 그러니 이 죽은 자는 언제나 어딘가를 바라보며 꿈을 꾸려 한다. 그 순수한 자만이 분노하고 증오한다. 그의 분노와 증오가 지닌 기원과 원천에 대해 그의 첫 시집에 있는 에프터글로우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지옥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안녕과 안녕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늘 끝 위에 몇명의 천사가 쓰러질 수 있을까

 

  -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때쯤 결심한 것 같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남은 인생을 모두

  이 천국에게

                                - 「에프터글로우」, 부분 

 

 그는 모르지 않는다. 지금의 우리이자 죽음을 알지 못하며 무의미한 세계가 그저 반복되고 있는 지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변치 않을 듯이 보이는 이 세계가 결국 언젠가는 붕괴해버릴 것이라는 것을. 더 이상 안녕과 안녕을 구분할 수 없게되어버리는 무감각하고 동질적인 세계이자 천사들이 바늘 끝에서 무수히 죽어나가는지금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꿈과 기억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기에 그는 찾으려 한다.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며 죽음으로부터 다시 태어날 예측하지 못할 아름다운 사랑의 태어남을.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그때쯤 결심한 것 같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순수한 자가 지니는 분노일 것. 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는 세계로부터 죽음으로 이탈하고 또한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는 시인이자 신이 되려는 것. 그것만이 지옥 같은 천국 속에 유일하게 가능할 다른 아름다움이자 우리가 알지 못할 또 다른 천국의 가능성이지 않을까. 해가 지고난 후 남은 잔여적인 빛을 뜻하는 에프터글로우(afterglow)’가 의미하는 바가 여기에 있다. 그의 말처럼 우리에겐 깊은 절망의 지금을 죽음으로서 통과하여 도달해야만 하는 천국 아닌 천국이 알 수 없는 형태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파괴이자 죽음으로만 주어질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그 불명료하고 비정확한 장소로부터 흘러나오는 무엇이자 이 희미한 빛의 잔여적 흔적처럼 말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보자. 죽은 자로서 그의 분노 이면에 깔려져 있는 과거의 시공간에 대한 기억의 필연성이 그의 언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신이자 시인의 말들이 지니는 근원적 울림은 바로 그 장소의 아름다움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고 말이다. 죽은 자로서 오직 순수한 장소를 살아있게 하려는 사랑이란 기억들. 그러한 장소이자 마음으로 회귀할 수 있는 길이란 망가진 세계 속에서 시를 쓰는 것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다.우리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아름다운 세계를 향한 의지를. 이탈한 자가 다다를 해방이며 시인/신에게 가능해야 할 미래를 향해 계속 걸어나가야 할 시간.

 

                                            너는

                                            타오르는 목련나무를 맹렬히 노려보고 서 있다

 

                                            너무 뜨거워 설핏 녹아버릴까봐 겁이 난다 캄캄한 동굴

                                          같은 눈으로 나를 전부 집어삼킬 것만 같다 죄악감을 태우

                                          는 냄새가 번지기 시작한다. 흰 날갯짓이 돋아나듯이

 

                                            누가 계속 올라와야 할 시간이라 부르고 있어서

 

                                            목련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나갈 것이다

                                                                                - 「비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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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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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올 때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월간 현대시 이은지 김기형사육제동물능동성폭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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